골수에 불을 보내사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며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애 1:12-13)
녹취자: 조경훈
신약 성경에서의 바울과 구약 성경에서의 예레미야는 아주 잘 비교가 됩니다. 특히 사람들은 예레미야서와 고린도후서를 많이 비교합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은 선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했고 자기의 예언이 자기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으니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도 가장 잔인한 인생을 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긴 내용을 모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망한 다음에 예레미야는 아주 큰 슬픔을 가지고 이 시를 씁니다. 공교롭게도 에카(הכיא)라고 하는 이 탄식은 예레미야서 히브리어 본문에서 맨 첫 절에 맨 첫 단어로 등장합니다. 탄식의 말로서 ‘애통하도다.’ 혹은 옛날 말로 ‘오호 통재라’라는 뜻입니다. 큰 고통을 짊어진 것처럼 쓰리고 아프구나 하면서 탄식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끊임없이 예언할 때 왕가의 미움을 받고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선지자들이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굳게 믿기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깃들어 있어서 거기에 부딪히는 것은 마치 옹기그릇으로 큰 바위로 된 산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이스라엘을 패망시키기 위해 공격하는 자들은 결국은 멸망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그런 증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육 백 승의 병거를 이끌고 도망가는 이스라엘을 추적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물을 합체하게 하여서 멸망시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리고성 정복은 또 어떻습니까? 이런 역사를 모두 보아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역사적인 전례에 호소하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위 ‘안정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성경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주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고 싶어 하는지를 읽어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모세까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가지를 치듯이 불결한 자들을 잘라 내시고 남겨진 뿌리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것이 신약의 비전이 된다는 것까지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부류에 속하는 선지자들이 보는 역사적인 시각은 오늘날에 극단적 좌파와 극단적 우파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가 Th.M 공부를 할 때 이사야서를 꼼꼼하게 공부했는데 그때 느낀 것은 지금 이야기하는 이 두 종류의 신학이 성경을 번역하는데 있어서도 엄청나게 작용을 해서 성경을 다루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성경 사본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둘 중의 한) 신학을 택해서 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꺾으면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70인 역으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놀랬습니다. 이 정도의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집요하게 자신의 상황으로 성경을 보려고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흔적들을 추적해 보는 일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그런 안정신학)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신학이 백성들에게는 너무 환영을 받았는데 나라는 결국 망했습니다. 어떤 신학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 신학인가 하는 것이 여기서 뚜렷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시절이 좋을 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불의한 사람들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름을 보호하고 사람들을 핍박하면서 낙관주의 신앙으로 똘똘 뭉쳐진 것 같았지만 (결과는) 다 부서졌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거기에다 쏟은 순금만 80톤이었고 은은 300톤이 넘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그 아름다운 금기명들을 이방민족들은 다 뜯어갔습니다.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이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상황은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여기고 생각을 모두 접고 오직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더 이상의 생산이 없으니 먹고 사는 데에 필수적인 물품의 값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장롱 밑에 숨겨두었던 금은보화를 가지고 나와서 온 길거리를 헤매며 양식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선지자는 너무 안타까워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무엇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성이 다 파괴가 되었고 고관대작들은 모두 끌려갔으며, 외세에 의해서 처처가 짓밟히고 폭력과 강간이 난무하는 이 일이 (나만 관계있는 일이고 당신들은 아무 상관이 없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은 망했습니다. (이 패망과 아무런 관계가 없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 대한 구약학자들의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은 이렇습니다. ‘우르’는 ‘이르’의 옛 히브리어입니다. ‘이르’는 ‘성’(city)이라는 뜻이고, ‘샬라임’, ‘샬렘’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쌍수(둘로 이뤄져 하나처럼 되는 것, 예루살렘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봄)를 이루며 ‘평화의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평화, 내적인 안식이 있는 그런 종류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시고 여기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것도 이런 명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보기에 이스라엘을 위한다고 했던 사람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들에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묻습니다. (패망한 이 상황에서) 왕족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 가문의 자식들도 평민이나 다름없이 일상으로 급격히 돌아와서 먹고 사는 일에 열심을 보이며 살아가니 모두가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선지자는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말합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하나님은 진노하셨으나 단칼에 예레미야의 목을 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노하시는 날에 이런 충성스럽던 말씀의 종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당신의 종들이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또 그 누구도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덜 받을거야’라는 이유로 멸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동일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이 진노는 예레미야 개인에게 쏟아진 진노가 아니었습니다. 회개는 커녕 가나안 땅에 보내준 하나님의 소명대로 사는 대신 이방 문화에 젖어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가지고는 도저히 당신의 이름을 이 땅에 올바르게 알릴 수 없다는 판단이 섰으며, 여태까지 있었던 재앙들 중 가장 커다란 징벌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애굽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포로로 끌려가서 사는 것 같은 삶은 살지 않았었는데 이제 끌려가게 하시니 그 긴 고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짧게 얘기하면 70년의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고 길게 말하면 1945년도에 영국을 비롯한 몇 나라들에 의해서 현대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시인 605-610년 정도부터 시작해서 약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될 나라 없는 비참한 시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선지자가 물었던 것이 바로 ‘너희에게는 나에게 임한 것 같은 고통이 없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뛰어다니면서 양식을 구하며 서로 갖겠다고 멱살잡이를 하는 야박한 상황을 다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며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골수는 뼈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분이 척추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척추를 중심으로 인간이 몸을 버틸 수 있는 자질들이 생겨난다고 보았는데 그 척추의 골수에 불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 불은 무엇일까요? 그 불은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이 불을 받음으로써 선지자는 비로소 자기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정으로 예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비관적인 예언을 한다고 박해를 받고 투옥을 당합니다. 그때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나이다”(렘 20:9).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불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하나님의 불은 활활 타오르면서 모든 것을 불태웁니다. 이 불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역을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길이 삼키기를 가장 좋아하는 가연제가 두려움입니다. 이 불타는 마음의 불은 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그 불이 자기 몸 안에 있으나 이 불이 자기의 몸까지도 모두 태워 먼지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 불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하게 만드는 불입니다.
사람을 불러놓고 설교를 가르치고 목회를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치는데 나무랄 데 없이 잘 듣습니다. 1년이고 2년이고 가르치면 생각하는 것이나 책을 읽는 것이나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틴에 관해서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거스틴에 관해서 한 1년 정도 입문서를 가르쳤는데 해설해 준 것을 녹취를 해서 모두 모으니까 책 한 권 분량이 됐습니다. 새롭게 전수받은 지식은 자기 고민을 일깨우니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 어거스틴을 다시 읽으면 예전에는 안 읽히던 것이 읽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발전일 뿐이고 하나님이 어거스틴에게 주셨던 그 불을 나도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누구한테 글을 배워서 그 사람의 학생이 되는 것과 하나님이 그 선생님에게 주신 신적인 열정을 자기도 전수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하는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겠습니다. “골수에 불을 보내서 이기게 하시고” 자기가 살아 있지만 도저히 그 불 때문에 자기는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이겨버린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도저히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발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으며” 선지자도 똑같이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는 길로만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존경하게 되면 그에 대한 사료를 취사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것만을 쫙 정렬해서 세상에 없는 좋은 사람인 냥 글을 써내려 가지만, 그가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료들 중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다 빼버리고 욕먹을 것만 모아서 정리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를 인간도 아니라고 평가하면서 읽을 수도 있고 혹은 사도바울 이래 최고의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둘 다 팩트가 아닙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대부분 섞여 있습니다. 당연히 예레미야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것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사람도 자기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을 못 가게 그물을 치신 것입니다. 결국은 그 길을 못가고 다 파괴되고 멸망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멸망할 것이다’가 아니라 ‘이제 망하였도다’라고 탄식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라. 너는 이것을 그대로 전하라. 내가 비록 너희의 언약의 하나님이지만 너희들이 나와의 언약관계를 파괴하고 방탕한 길로 가며 이방신을 섬기고 육욕을 따라서 살면 나는 이 백성을 멸하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신앙의 단련을 받기는 했지만 나라 자체를 싹 쓸어버리시는 이 충격적인 사건은 남북왕조의 분열과 북왕조의 멸망에 이어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떨어져 나간 북왕국은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왕국 유다를 영원히 당신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전치사 하나 해석하고 하는 것들을 전부다 바꿔서 그런 해석이 나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예언들에 관해 칠십인 역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이 본문이 과연 이 텍스트에서 나왔을까 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해서 다르게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종일토록 나를 괴롭히사 나를 버림받은 자처럼 되게 하셨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선지자였지만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충만한 하나님의 교제를 누리기에는 장애를 받고 있는 장면을 선지자는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두 개의 메시지가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너희에게는 이 불이 있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자기보다 탁월한 사람을 보면서 내가 좀 쳐진다는 주눅 든 마음,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잘하는 어느 한 부분을 보면서 나에겐 하나님이 확실히 남에게는 없는 목회의 은사를 주셨고, 이것만큼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능력이 있고 없고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놀 때 공부해야하고 남들이 공부 안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남들이 일반적인 목회활동에 시간을 보내면서 유용하게 시간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흘려보낼 때 깊이깊이 학문을 탐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영향력이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골수에 불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골수에 애쉬(ש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원리가 절대로 복잡하지 않고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칩시다. 어떤 자매를 사귀는데 아주 놀랄 정도로 예쁘지는 않지만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화장을 지우고 얼굴을 보면 좀 실망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기가 막히게 화장도 합니다. 또 부잣집 딸은 아니지만 철마다 예쁜 옷을 입고오고 커플이 된 나의 마음을 심히 괴롭게 하지도 않고 잘 지냅니다. 그런데 나를 얼마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결혼할 꿈도 꾸고 있는데 몸이 너무 이상해서 병원을 갔더니 췌장암 3기라는 겁니다. 치료의 길이 없고 수명은 짧으면 4개월, 길면 6개월 정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교제하는 자매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자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만 하다가 병실에서 돌아갔습니다. 이틀쯤 지난 다음에 결별을 선언하는 문자 통지가 왔습니다. 불이 있었던 겁니까? 아니면 없었습니까? 그 자매의 마음에는 불이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프지 않고 좋은 기업에 취직해서 돈도 많이 벌고 능력이 있다면 자매의 마음은 점점 더 기울어질 것입니다. 애들도 하나, 둘, 셋 낳고 하면서 훨씬 더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서 불이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문자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마음속에 신뢰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아플 때 이런 소리 절대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같이 이것을 극복해 가자.’ 그것은 남자들의 생각이지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용히 놔줘야 됩니다. 놔줘서 가면 그냥 가는 것이고 6개월을 살아도 나는 당신의 아내가 돼서 살고 싶다고 하면 그 자매의 마음에는 불이 있는 것입니다. 연예계에서 누군가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뜨겁게 좋아했는데 여자가 죽었기에 남자가 영혼결혼식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진짜 불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닥쳐봐야지만 불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생활해보면 압니다. 선배 교역자들이 후배 교역자들을 평가하는 것을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전도사는 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이 불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불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랑의 힘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부모는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데도 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려고 합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랑의 힘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위에서 보시면서 우리에게 그런 불이 있는지 없는지를 다 아십니다. 생활비가 좀 깎인다든지 교역자에 대한 대우가 가혹해지면 곧 떠날 것이라는 것도 다 아십니다. 요금 ‘환승연애’라는 말이 있는데 더 좋은 조건이 나오면 버스 갈아타듯이 환승 연애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똑같이 목회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웃으면서 이 말을 듣지만 하나님이 바라보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신이 현재 목회하는 수준을 일평생 못 넘는 것 같습니다. 대개 담임목사님의 눈치를 많이 보고 늘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목회자는 나중에 담임목사가 되어도 그럽니다. 열렬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기도하지 않는 자는 이후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 것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은 나중에도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목회를 할 것인가는 현재 바로 여기에서 결정이 됩니다.
북한에서 특수부대가 될 때까지 받는 훈련이 십 년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공급 받으면서 훈련을 받지만 제일 강조하는 것은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서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을 받습니다. 이와 똑같이 이 속에서 여러분들이 신앙을 가지고 자라는 것입니다. 목회는 신앙과 분리되지 않고, 신앙은 목회와 나눠지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서 일 년이나 십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나의 믿음이 성장했다고 느끼도록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불을 주시겠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을 통해 확실한 사실 몇 가지가 주어집니다. 예레미야는 한 번도 주의 종이 되겠다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불러서 뽑으셨고, 그를 부수고 파멸하며 세우고 건설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레미야의 나이는 아주 어린 나이입니다. 나이를 특정할 수 없지만 학자들은 대개 8살에서 10살 정도 사이가 아닐까하고 생각을 합니다. 예레미야 1장 6절에 나오는 ‘아이’(나르)라는 단어가 ‘young boy’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을 때 이미 강력한 성령의 경험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없이는 선지자다운 선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특별하게 성령을 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받은 사람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에 (공과) 책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누군가를 선택하시고 성령을 주권적으로 부어주시고 (사역이 모두) 끝나면 하나님이 다시 데려가셨다면, 신약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하느냐에 의해서 성령을 구약시대보다도 훨씬 더 폭넓게 부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자신의 전인격을 가지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제가 신대원 3년을 마치고 Th.M.을 가면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는 학교 공부와 언어공부를 하느라고 책을 읽기 어려웠습니다. 청교도들의 책들, 특히 전기들을 많이 읽으면서 나에게 커다란 신앙의 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전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심지어 4세기와 5세기 시대의 뛰어난 위인들이었습니다. 전기 작가들이 책을 쓸 때에는 대개 그 사람의 신학까지 샅샅이 쓰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대중적인 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초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스펄전 전기에 대한 책을 한 번 읽다가 ‘이젠 자야 되겠다’ 싶어 책을 덮고 밖에 나갔는데 온 몸이 다 각성이 돼서 절대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풍부한 눈물과 불타는 사랑 속에서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스펄전이 비록 설교를 많이 남겼지만 그 안에는 촌철살인의 멘트가 수없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어거스틴 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만은 그런 촌철살인의 멘트들이 수없이 들어있습니다. 그 얘기는 그가 열정을 가지고 농축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손에 절대로 쥐어줄 수 없습니다. 다른 교회를 탐방하고 책을 읽으면 신학지식이 증가할 것이고, 다른 교회에서 뭔가를 보고나면 아이디어가 생길 것이고,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면 좀 더 공부를 많이 하고 사역을 잘 할 수 있는 자원이 마련될 것이고, 동지들을 하나님이 붙여 주시면 외롭지 않게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갈멜산에 쌓아 놓은 장작들에 불과합니다. 그 위에 불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냥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 이상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불이 사라지고 나면 선교건 목회건 대부분 비즈니스 원리를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쌓아 놓은 그 위에 성령의 강한 역사로 불이 떨어질 때 모든 것을 다 태우면서 결국 불타는 그것들이 자기 역할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내가 가진 돈이라면 그 위에 불이 떨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불타게 만들고, 그것이 원만한 인간관계라면 그 위에 불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일에 불타게 만들고, 그것이 재능이라면 그 위에 불이 떨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두 산화시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래 사역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목회자다워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이와는 점점 더 반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이 그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내가 교역자가 되지 않은 때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기도를 나옵니다. 교역자로 섬기겠다고 사인한 다음에는 의무이기 때문에 날짜를 채우기 위해 나옵니다. 동기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살려는 사람에게는 안전장치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도 자신이 계속 순수한 신앙을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의 사상을 배워 나간다고 하는 것은 아주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 둘을 함께 배워가는 일은 사역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며 탐구하고, 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날마다 경험하여 그것을 자신 속에서 엮어서 살과 피가 되게 함으로써 그것을 모두 쏟아내는, 다시 말해 내적으로 이 모든 것이 소화된 내공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불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내가 불을 받아서 목회를 하든지 일치감치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찾든지 정직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진보는 하나님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증거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좀 큰 회사에 직원들처럼 있어도 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오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고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불이 그 마음에 있으면 그 불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님께 그 심정을 토하는 보람으로 살 수 있지만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역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에게 노예된 생활의 시작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일도 생깁니다.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 1962-)이라는 사람이 “12가지 인생의 법칙” 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목이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 입니다. 제목은 무슨 처세술를 기록한 교과서 같은데 그 속에서 써내려가는 얘기가 매우 사변적입니다. 심리학, 융, 생물학, 바다가재, 생화학 모든 지식들이 동원이 됩니다.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바다가재는 각기 자기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 바다가재가 가지고 있는 영역에 먹을 것이 많으면 반드시 집게발이 큰 침입자 바다가재가 그 앞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이 어떤 물질 같은 것들을 서로에게 흘려보내면서 상대의 몸집의 크기와 내가 다룰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를 파악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싸워보지도 않고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여기면 피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영역을 내줄 수 없다고 싸울 수도 있는데 상대가 어마어마한 집게로 자신을 잡아서 뒤집어 버리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승패가 납니다. 거기서 가만두지 않고 미친 듯이 찔러서 몸에 상처를 내는데 그렇게 상처입어 진 상대는 결국은 그 영역을 떠납니다. 승리한 바다가재는 새로운 왕좌에 등극하게 되고 그의 몸에는 세로토닌 같은 좋은 호르몬 계열의 분비물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누가 감히 나를 당할 수 있는가”와 같은 자신감이 생겨서 어깨를 쫙 피고 걷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무참하게 패한 바다가재는 그에 상응하는 성분의 신경물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는 정말 이길 수 없어. 나는 내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도 쉽지 않을거야. 이러다가 언젠가는 누구에게 뜯어 먹힐거야”라는 공포 속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바다가재가 회복되는 길은 오직 하나, 그보다 더 작은 싸움이라도 싸워 이겨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고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나오면 ‘나는 강하다’라는 새로운 힘이 생겨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대로 투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자기 꺾임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사역을 하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이나 난관과 같은 것들을 만납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하든지 은혜로 이겼을 때에는 내 속에서 육체적으로는 실제로 그런 신경전달물질이 내려오고, 영적으로는 은혜가 더 충만해져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불렀고 나는 주의 것이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예수 안에 달여 있다.”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이 불을 따라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여러분의 나이 때에 저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89년에서 91년까지 약 3년 정도를 매일매일 순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순교의 길이 어디 있을까 했지만 이 세상에 더 많이 살면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하고 정말 순교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순교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순교의 정신으로 죽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15년의 긴 세월이 흘러야 했지만 말입니다.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불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기뻐하신다. 내가 구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가 맡은 부서 전체를 물결치듯이 막 움직였습니다.
한 목회자가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밤 11시가 다 됐는데 전화가 와서 “목사님. 나 오늘 저녁에 죽어버리려고 유서를 썼습니다. 목 매달아 죽어버릴 것입니다.”고 했답니다. 죽으려면 그냥 죽지 뭘 또 목회자한테 친절하게 전화를 하는 걸까요? 그 얘기를 듣고 목회자가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일어나서 찾아갈 수는 없고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살아야겠어요”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의 힘입니다. 뭔가 잘못 됐을 때 의논도 하고 효율적이지 못한 것들을 고쳐나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은 내가 전심으로 기도해야 될 일이구나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기도 시키는 것 말고 본인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그런 불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이 시대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부흥을 가져온 청년부들, 혹은 주일학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곳을 찾아가면 반드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어서 불타버리고 싶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교회가 안 된다고 말하지요. 안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망하게 하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못해서 안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시면 왜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거기에 누가 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실로 자신을 제단에 바친 사람을 통해 수십 번 망하고 나간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깊이 기도하고 불을 간직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