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녹취자: 이새봄
I. 들어가는 말
강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제가 왜 이런 강의를 하게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했고 25살에 신학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야간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총신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Th.M.을 하고 박사과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는 34살이라는 나이에 대학의 전임교수로 가게 되었고 교수생활을 한 7년 정도했습니다. 이후 열린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작가로서의 소명을 주셔서 여태까지 한 80여권 정도 쓰고,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한 2백만 권 이상을 독자들이 읽어주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저는 한 달 이상 외국에서 체류한 적이 없고 더욱이 미국에 와서 서머스쿨(summer school)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혼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 다음에도 혼자 이제껏 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공부하면서 저는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작품들은 그러한 소산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어느 작가에게서 본 것도 아니고 주석가에게서 주어들은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사상을 전수받은 것도 아니라는 것, 저의 생각으로 녹여낸 주제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두 가지 책을 가지고 왔는데 하나는 『신학공부 이렇게 해 왔다』라는 책입니다. 모두 3권으로 되어있는 책인데, 두 권은 지금 초고는 작성되어있지만 아직 출판을 못했고 첫 권만 출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쁘겠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쓴 책인데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오늘 강의 제 1강에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해도 왜 그런지 공부한 것만큼 한국교계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훌륭하게 쓰임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고,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여러분들이 도달할 수 있으면 제가 여기 와서 두 시간 강의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오늘 강의를 듣기 전에 성경 한 구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제 1장 9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같이 읽어보겠습니다. 9절부터 11절입니다. 시작.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II. 본문해설
때는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두고 온 교회를 위해서 자신이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은 그 사람의 사상을 보여주고,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태와 미래의 그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중에서 주기도문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꿈꾸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단순히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 이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상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딜(ideal)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vision)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A. 목회의 본질: 너희 사랑을 풍성케 하라
1.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
마찬가지로 여기서 사도바울이 “내가 기도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 기도하고 만 것이 아니라 그가 이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서서 자신의 생명이 다하도록 그 감옥, 로마의 감옥에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생사를 초월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기서 ‘목회가 무엇인가’, 아니 ‘목회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사는가’, 정확하게 여러분들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신학공부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나는 무엇을 위하여 그 일을 하는가’라는 것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여”라는 것입니다. ‘헤 아가페’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소유격이 ‘너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금 빌립보 교인 밖에 있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빌립보 교인 안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풍성케 한다’는 말의 헬라어 ‘페리세오쎄네’는 ‘넘쳐서 울타리 같은 것을 넘어가버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맥주를 부으면 잔에서 콸콸 넘쳐서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에게 있는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서 아주 흘러 넘치기를 위해 사도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사도바울이 옥 속에 갇혀있지 않고 선교를 했거나, 목회를 했거나, 저술활동을 했다하면 그것의 가장 중요한 1차적인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서 그 사랑이 인격에 흘러넘치는 것, 그것이 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신학은 그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결국 이 신학공부는 두 개의 바퀴가 필요한데, 그 하나가 철저한 자기 헌신 속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의 신앙적인 몸부림입니다. 이 바퀴가 있는 사람에게 또 하나의 바퀴인 ‘지식의 탐구’,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개의 바퀴가 굴러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사도 시대,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의 교부들,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에게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이야기입니다. 이게 바로 ‘경건과 지식’(peitas et scientia)이라고 하는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의 관심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 그러면 아가페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우스운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무엇 때문에 사도는 자기의 목숨을 건 목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반적인 사랑이 아닌, 그 사랑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풍성해져서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헬라어로 ‘말론 카이 말론’이라는 말은 쉬지 않고 계속 증대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끊임없이 계속 솟아나서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일이 쉬지 않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그가 살아있는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여러분들이 목회를 하는 이유이고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결국 한 사역자로서 궁극적인 사역의 성패는 선교를 하든지,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든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신학자가 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작업을 통해서 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서 그것이 흘러넘치는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선교는 실패하고 목회는 열매가 없고 그리고 신학공부는 계속해서 지식의 논쟁만 하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나오는 ‘지식은 사랑을 교만하게 하며’, 이는 모든 지식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과 신학에 관한 지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최근에 네덜란드 신학교의 교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면 석사과정에서는 종종 자유주의 신학을 하다가 신학을 잃어버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개혁신학교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Th. M.까지 하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박사과정에서 하다가 결국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해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결국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매일 풍성하게 누리는 현실적인 경건의 신비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그런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전도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즉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전도라고 본 것입니다.
2. 사랑의 기원과 출현
우리들은 흔히 요즘 ‘사랑’이라고 하면 아주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굳이 그 사랑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상은 그에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보통 하나의 사상은 그것에 맞서는 비판적인 사상이 생겨나곤 했지만 여태까지 사랑을 비판하는 사상은 없습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 사랑이 좋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가 없고 가장 포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은 누군가에 의해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도대체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결론적으로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위격은 ‘인격’이라고도 번역이 되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식의 독립 개체적 인격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통적(communal)이고 관계적인(relational) 인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를 위격적 관계 안에서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사랑하실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완전성’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은 ‘존재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으로 나뉠 수 있는데 존재적 속성은 당신 자신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원하시다’, ‘무한하시다’, ‘완전하시다’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적 완전성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성품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랑이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사랑은 어떻게 인류에게 나타나게 되었을까’, 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시고 인간을 마지막으로 빚으십니다. 인간을 빚으실 때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각 위격은 스스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위격은 그 완전한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를 무한한 방식으로 사랑하십니다. 그 위격적 교통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 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대상이 없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의 교통의 본질을 창조세계 속에 투영함으로써 마치 거울처럼 만들어 당신의 그 속성을 이 창조세계에 비추어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자신은 시간을 초월한 분으로서 시간 안에 있는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어서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그 창조된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짐승들도 자기 자식을 많이 아끼고 어떤 면에서 강아지들이 슬픈 일을 당할 때 눈물을 흘리고, 자식이 죽었을 때에 그것을 스스로 땅에 묻어주고 거기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도 사랑할 수 있는가, 라고 묻지만 그것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종족의 보존과 번식을 위해서, 의미는 모두 알 수 없지만, 아주 깊은 유착관계를 자신의 번식하는 개체에게 느끼도록 만들어서 그 개체가 보호되고 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 속에 부여하신 유전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짐승은 자기 새끼를 안 버려도 인간은 자기 새끼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인간의 사랑은 본능에 매인 사랑이 아니라 다분히 자기의 도덕적인 선택에 달려있는 측면이 유일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이 인간답지 않은 것을 보면서 우린 거기서 인간의 위대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개는 개만 못한 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맘만 먹으면 개보다 훨씬 못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개는 개로 머무르게 하셨는데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으로 선택하면 짐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기결정적 가능성을 용인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의 특이성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한 사람, 아담이 창조됩니다. 당연히 아담은 창조되자마자 성인으로 만들어졌고 그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이 학습을 통하지 않고 창조될 때 직접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경험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백색 서판'(tabula rasa)의 상태에서 습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빛 아래에서 체계를 알 수 있는 지식의 가능성,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자체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과 아주 놀라운 친교를 누리면서 ‘에덴’이라고 하는 선택된 그 영역에서 당신의 임재 속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 혼자서도 사랑하실 수 있지만 인간은 인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만드셨는데 이것은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인간창조 계획인데, 창세기를 인간의 관점에서 쓰면서 마치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게끔 설명한 다음 하와의 창조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아코모다치오(accommodātio)’입니다. ‘accommodation’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수준에 맞춰서 설명하기 위해서 눈높이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은 하나님은 하와의 창조를 염두에 두시고 이미 아담을 만드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흙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아파)’, 먼지입니다. 히브리말로 ‘티끌’입니다. 그 티끌에서 사람을 빚어서 육체를 창조하시고 그런데 여자는 그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십니다. 매튜 헨리는 이 부분을 아주 감동적으로 설명합니다.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통의 뼈가 아니고 짓밟히도록 발의 뼈가 아니라, 보호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유는 소재에 있어서 차별성을 보여줍니다. 남자는 먼지, 티끌에서 만들어지고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를 취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성 종속적 성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남성주의자들의 해석입니다. 특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 할 때 ‘그를 위하여’라고 번역된 ‘케네그도’, 히브리어 전치사는 단연코 ‘for’가 아닙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corresponding to’입니다. ‘누구누구에 상응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자를 그런 방식으로 창조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한 몸’, 즉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와를 창조하셔서 데리고 나오실 때 아담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말입니다. 이게 히브리어로는 ‘마호’, ‘the choice’, ‘the best’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뼈 중에서 없어도 되는 뼈, 살 중에서 없어도 되는 살이 아니라 한 점만 떨어져 나가도 치명적인 그런 살과 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저 여자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게 바로 한 몸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한 몸의 모티브가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라 이해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율법, 하나님의 징계, 그리고 메시아의 출현,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그리고 교회, 지체됨, 그리고 교회가 밀알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모티브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언약이나 혹은 성전이나 혹은 전쟁의 개념보다도 더 탁월하게 구속사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수의 인류를 창조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 그 인류를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이상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서로를 모든 인류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미래에 있을 혼인의 첫 번째 케이스이기도 했지만 인류의 첫 번째 사회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도 똑같이 부모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얘기했을 것이고 당연히 가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모든 인류가 서로를 자신의 몸인 것처럼 사랑하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기대하셨던 사회인데, 이 계획이 죄로 인하여 깨집니다. 이렇게 깨지고 깨진 사회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그 사랑이 완성된 나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되는 사회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를 선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미래에 이루어질 그 사랑이 침투해(penetrated) 들어와서 오늘 그 실체를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헤 아가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 속에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목회를 하는 이유이고 선교를 하는 이유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역자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사역자의 최고의 영광은 당연히 대형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책을 출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역자로서 최고의 명예는 나의 말씀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찬양)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 사랑에 대한 그 기원과 이야기를 교회와 연관시켜서 쓴 것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주는 작은 책입니다. 교회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단연코 현대에는 없습니다. 과거에는 있었습니다. 저의 교회론이 오히려 일반적이었습니다.
B. 목회의 두 가지 수단
1. “지식”: 에피그노시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 대답이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는 전체적이라는 뜻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히브리어 ‘다아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희랍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로써의 앎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면 희랍 사람들은 항상 지식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느냐’ 하면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지식을 다양한 층 차로 분리해서 이해를 했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 그 기원이 되는 ‘그노시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아마 신약 성경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실은 논문도 수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대적인 개념의 지식과 그리스적인 지식의 개념들을 대조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귀에 가장 익숙한 성경구절이 이 단어를 쓰는 곳이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할 때의 지식이 ‘그노시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히브리어 ‘다아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다아트’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호세아서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라고 말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2장 14절에서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지식으로 넓은 바다가 충만한 것 같이 온 세상이 그 지식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지성적 이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세한 논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여러분들이 가서 ‘그노시스’를 가지고 한 번 공부를 깊이 하셔도 좋을 정도로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어쨌든 결론만 말씀드리면 ‘그노시스’의 배경은 히브리어 ‘다아트’이고 그 개념은 기본적으로 인격과 경험이 동반된 총체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정보로써, 소위 이야기하는 오토마톤(automaton)적인 지식, 자판기에 돈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콜라가 나온다는 식의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전인격적으로 체득된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아트’의 동사가 ‘야다’인 것은 아십니까? ‘야다’라는 단어가 ‘키노스크’이죠. ‘야다’라는 단어가 첫 번째 쓰인 게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라고 할 때 쓰인 단어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의 ‘know’라는 단어가 ‘성교하다’라는 의미가 아직도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여자가 “난 저 남자를 안다”라고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그것은 아주 깊은 성적인 경험을 동반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정도로 이 ‘알다’라는 단어가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많은 단어와 관련된 논의가 있지만 접고 생략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저절로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위에서 불이 떨어지고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 흐를 수 있도록, 점점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있는데 그 첫째가 ‘지식’입니다. 그 지식,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대한 포괄적이고 철저한 앎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지게 하려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특히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도 ‘사물’ 속에 들어갑니다. ‘레스(res)’라고 해서 하나님, 사람, 혹은 인간, 교회, 구속, 십자가, 은혜, 이런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사물들이 포함되는데, 이에 대해서 그것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은 희랍 사람들이 사고했던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어떠한 자연적 사물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를 갖게 하고 그 논리를 갖게 한 지식은 어떤 윤리적인 삶을 살게끔 해줍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의 지식, ‘피지카(physica)’, ‘로기카(logica)’, ‘에티카(ethica)’이 통합적으로 엮여지면서 진정한 지식의 진면모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식에 대한 복음주의의 견해는 ‘이 세계의 모든 지식의 가능성이 하나님의 관념 안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물이 존재함으로 인간이 탐구할 지적인 연구의 대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계 사물들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사물에 대한 지식이 먼저입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사물이 있고 그 사물을 감각으로 보면서 지식을 탐구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 하나님 안에는 이미 이 모든 사물이 개별적으로 완전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별적인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완전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개념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난 것이 창조세계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인간이 창조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지식의 대상으로 보고 탐구할 때에는 이 둘 사이에 균형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감각하고 만나는 사물에 대한 현재적으로 획득되는 지식과 하나님이 원래 그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계셨던 완전하고 고유한 관념, 이 두 개에서 인간은 줄다리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깊이 어떤 한 사물에 대해서 파고들어갔을 때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계시가 인간의 타락으로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올바르게 알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을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프린키피아’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라틴어 성경을 보면 그 ‘아르케(arke)’, 이게 ‘태초에’라고 하는 것, 그 다음에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로고스(logos)’가 ‘프린키피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뿐만 아니라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 같은 데에서도 폭넓게 지지되는 것이고, 기독교적 지성의 가능성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원리로서 로고스에 의해서 모든 사물들이 통제되도록 만드시고 그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모든 사물들은 존재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된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존되고 통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든 만물을 아는 지식의 근원으로써 설명되고 있는 골로새서의 개념이나 혹은 에베소서의 개념은 이러한 역사적인 로고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학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고 그 학문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모순된다면 아직 인간의 탐구가 모자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복음사역자의 사명은 이런 ‘에피그노시스’를 사람들에게 잘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에피그노시스’ 속에 살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 안에서 점점 더 증대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부들이나 중세 신학자들 그리고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이 보기에, 오늘날 우리와 같이 ‘지식’과 ‘사랑’을 이렇게 두 개로 존재하는 것처럼 나누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이성주의가 들어오면서 생겨난 풍조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베르나르두스(Bernardus Claravalensis)라고 하는 11세기의 중세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책 속에서 “노띠띠아 입세 에스트 아모르(notitia ipse est amor)”, ‘지식 그 자체가 곧 사랑이다’,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이 안 오는 것이고 참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이 동반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학문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학자적이고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철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지식을 받고 그 지식을 통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사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사물의 이치를 모두 깨닫고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는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지는 못해도 그것을 지으신 자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이 훨씬 복이 있사옵나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 후자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의 지식입니다. 결국은 어떤 사물을 주시고 그 지식을 갖게 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와 복음사역은 철저하게 지성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서 ‘기억하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는 이 평범한 구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지만 보더라도 지성을 성경이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느냐”라고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설교는 물론이고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인격과 삶, 모든 것이 결국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 포괄적인 지식을 가르쳐주게 될 때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렇게 점점 더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2. “모든 총명으로”: 아이스데시스
마지막 두 번째, “모든 총명으로”라고 했습니다. ‘모든’이라는 단어가 왜 ‘에피그노시스’에 안 오고 그 뒤의 단어에게만 왔는가는 그렇게 커다란 시빗거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아이스데시스(αἰσθήσεσις, aisthesis)’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동사 ‘아이스다노마이’에서 왔고 ‘깨닫다’라는 뜻과 ‘놀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럼 결국 ‘아이스데시스’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레이셔널(rational)한, 그런 이성적인 인식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물을 직관하는 통찰적인 지식입니다. 믿음 같은 것도 바로 지식을 얻는 굉장히 훌륭한 수단입니다. 믿음이 지식에 배치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지식을 얻는 훌륭한 수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입증하듯이 현대 그리스어 성경, 그리스 사람들이 현재 읽고 있는 현대판 성경에서는 이 ‘아이스데시스’를 ‘노에시스(noesis)’라고 번역을 합니다. ‘노에시스’는 ‘누스(nous)’와 관련된 것입니다. ‘누스’는 저 멀리 플라톤 철학부터 시작해서 플로티누스(Plotinus)까지 굉장히 신화적인 이야기까지 함께 담고 있는 매우 커다란 픽쳐(picture)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매우 중요한 단어인데 철학에서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다 종합해서 이야기하자면, ‘1+1=2’ 이런 식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어떤 논리를 초월해서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지식은 결코 설득될 수 없습니다.
최근에 맥그래스(Alister McGrath) 교수가 저희 교회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아주 달콤한 교제를 가졌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가 그렇게 기독교를 험담하는 이야기를 해서 성공회에서 아주 학식이 뛰어나고 말도 천재적으로 잘 하는 분하고 공개토론을 붙였답니다. 그 때 도킨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답니다. “너는 틀렸다, 너는 기독교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책을 들여다보면 예수 믿는 사람의 잘못을 공격한 것뿐이다. 아무데서도 너는 기독교를 공격한 적이 없다. 결국 당신은 신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개토론이 몇 시간 계속되고 마지막에 리처드 도킨슨이 공개적으로 시인하기를,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agnostic)로 남아야겠다.”라고 공식적으로 컨페스(confess)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느 한 순간에 우리에게 빛이 들어오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천년 전에 나사렛에서 그 젊은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나의 죄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그 실재를 직접 경험하게 되어서, 눈으로 본 것은 내가 혹시 부인할 수 있지만 그 경험한 영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이제 죽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지식을 ‘아이스데시스’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을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라 불길로 비유를 해봅시다. 그러면 여러분들 마음속에 이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입니다. 목회는 사랑이라는 불길이 점점 더 타오르는 것입니다. 불길이 타오르기 위해서는 가연재가 있어야 합니다. 땔감이 없이는 그 불길이 타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 땔감이 무엇이냐면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푸라기를 놓고 불을 지르면 순간적으로 불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장작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사람의 시체를 태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래가지 않습니다. 계속 타오르는 불이 되기 위해서는 장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두개의 장작을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라고 보고 그 위에 불이 타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위에 ‘에피그노시스’의 장작과 ‘아이스데시스’의 장작을 계속 추가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 불길이 쉬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장면을 그려보라는 것입니다. 그 불은 처음에 여기서 지핀 게 아니라 갈멜산에 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그 사람들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가페 사스’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는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계속 풍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보면 정말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이런 ‘에피그노시스’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분명한 도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에피그노시스’가 되게 하는 것은 단순한 객관적 지식의 총량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의 총량은 많지만 ‘아이스데시스’가 없기 때문에 왠지 그 사람의 삶이 ‘에피그노시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은 기형적인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스데시스’는 인간이 사람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왜, 똑같은 복음을 선포했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구주로 알고 따르고 어떤 사람은 죽이려고 악심을 품는 이런 놀라운 일들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가 그게 자신이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자 애썼고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III. 결론
제가 여러분에게 조언하고자 싶은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사십여 년을 신학공부를 해오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얘기합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는 매우 유익합니다.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철저하게 공부하세요. 그러나 자기 전공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필요로 한 지식은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의 지식입니다. ‘내가 오늘 구약에서 배우는 이 한 가지 개념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는 데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뇌하면 결국은 ‘에피그노시스’가 여러분 자신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때의 모든 신학들은 여러분 안에서 소화된 신학이 되기 때문에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도 그 속에서 충격적인 지식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 속에 용해된 지식이 흘러나오게 되는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나의 복음’(my gospel)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습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복음사역은 사람의 마음속에 아가페의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인도주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유능하게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