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녹취자: 이대중
제가 한 그림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망망한 바다에 어마어마하게 큰 배가 떠있다고 떠올려 보십시오. 약 60만 톤 이상의 배로써 갑판의 면적은 축구장 서너 개가 들어갈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입니다. 갑판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배가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꼭 남쪽으로 가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침판을 손에 차고 남쪽을 향하여 갑판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계속 나침판을 보고 그 넓은 갑판 위를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자신은 남쪽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배가 북쪽으로 가고 있다면 갑판위에서 아무리 남쪽으로 걸어도 그것은 남쪽일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GPS 시스템 즉, Global Positioning System입니다. 그래서 배가 출항을 하게 되면 그 배의 위치가 GPS로 연결이 되어서 위성으로 그 배의 위치와 크기, 속도 등을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알려줍니다. 자, 이제 GPS를 켰습니다. 그러면 그 배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합니다. 심방도 하고 설교도 하고 성도들과 식사도 하고 야유회도 가고 또 회의도 합니다. 성경공부도 시킵니다. 우리는 이를 모두 뭉뚱그려서 ‘목회’라고 부릅니다. 얼핏 보기에는 목회 같지 않은 일, 예를 들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토지 감정을 받고 부동산을 매매하고 커피숍을 운영하고 교회를 디자인하고 청소를 하고 건물을 관리하고 인사 발령을 하는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서 우리는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활동들은 나침판을 가지고 자기가 믿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도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목회의 궁극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감옥 속에서 보낸 편지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약성경 전체, 좁게는 복음서 전체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렴시키면 마지막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즉석에서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자신이 기도하시던 기도의 패턴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도 속에서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일은 없지요. “공기를 마시게 도와주시옵소서.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 한다는 것, 기도의 제목이 된다는 것은 그 기도하는 사람의 소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무슨 목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망을 품고 계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당신이 현재 이루고 있는 공동체와 당신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성령이 오심으로 형성될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이상을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제목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과 정반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신 것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지 않는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 아파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처음 신약의 교회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셨고 신약의 교회가 세워졌을 때 예수님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어서 그 복음의 계시를 자기가 해석하고 전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라셨던 공동체가 꽃피고 성장하고 그것이 세계적인 교회가 되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도록 원했던 사도바울의 진전된 초기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목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모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 목회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만들어낸 핸드폰이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때는 이 핸드폰을 보면서 우리가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핸드폰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왜냐하면 82%가 남의 나라 부속이다. 결국은 퀄컴과 일본 부품업체 먹여 살리는 일만 하지 이건 빛 좋은 개살구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얘기에 상당히 많이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보니 부품을 만드는 것과 전체를 조합해서 새로운 디바이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사태가 일어난 배경이 무엇이냐면 일본사람들은 부품 하나하나는 오랜 기간 동안 장인들의 기술을 통해서 기가 막히게 만들어냅니다. 한국에 있는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에서 그것을 만들 수가 없을 정도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며, 그것을 만들려고 마음먹으면 지금 불화수소나 포토레지스트 들을 해결한 것처럼 이전부터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이러한 현대 사회의 흐름을 간파하면서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세밀한 부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그 부품들을 전 세계에서 수집하거나 경제성이 있는 것들은 여기에서 만들고 융합해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기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 세계를 휩쓸 수 있는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여러 명의 교수님들이 발표를 하셨습니다. 어떤 것들은 아주 세부적인 것입니다. 이런 정보들을 우리들은 갖지 못합니다. 리처드 해튼 교수님과 어제 늦은 시간까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는데 그 분이 하시는 언어가 10개 국어가 넘습니다. 히브리어, 우가리트어, 아카드어, 후리안어, 가나안어, 겐족언어, 이집트 상형문자 등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 분들이 접하는 정보들은 사실 한국에는 사학자들도 거의 접하지 않는 영역의 수많은 자료들입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목회를 할때 그것들은 하나의 부품일 뿐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들고서 그대로 전달해준다고 해서 목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궁극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두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전도이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 목사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희랍어 원전에는 ‘헤 아가페’라고 나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랑’입니다. 인간으로부터 기원을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사랑들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하나의 사랑 안에서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고 마지막에 그 사랑 안에서 인류를 살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이 모든 세계를 완성하시고 그 사랑이 영원히 있게 하는 그 하나님의 단 하나의 사랑.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옥 속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노사도가 눈물로 기도했던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제목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에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항상 사도바울의 감사의 제목에 남았는데 그것이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하사’ 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페리쉬에’’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테두리가 있는 그릇 같은 데에 물을 계속 부으면 그 테두리가 넘쳐서 흘러넘치게 되는데, 그런 동작을 가리키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하기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마구 부어져서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쳐나도록, 어느 한 시점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지고 그것이 그들의 인격 및 삶 속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느 회사원이 직장을 다니는데 갑자기 사장이 연말에 올해 보너스 천 이백 프로를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는 거의 일 년치 월급입니다. 연봉이 5백 만원인 직장인인데 사장이 연봉만큼을 인센티브로 넣어준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환희를 자아낼 다른 바램이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내가 너무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는데 나의 프러포즈를 받아주었다면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터지겠지요. 그것을 무한대로 영적인 방식으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부어지기를 사도바울은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며 가슴아파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절대 울면서 설교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절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가슴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저희 학교 다닐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뭘 하나 배우면 미친 듯이 그것을 전공해서 유명하게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 물론 비교적 똑똑한 학생들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런 학생 중 하나였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주님을 깊이 만나기 전까지요. 물론 그때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분들은 그런 길로 가세요. 누군가는 부품을 생산해야 디바이스들을 만들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일반적으로는 외국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생산하고 학문도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만들어야겠지요. 그러니 그런 일을 하세요. 하지만 이건 한 클래스에 그저 한두 명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넘치도록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목회자가 되는 조건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가슴 저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하셨을까요? 이것은 그만큼 완벽하고 중요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붙들고 깊이 씨름해야 합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목회를 해온 사람으로서 난 단연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목회의 길로 접어드는 사람은 밀려오는 파도의 물거품에 불과한 인생을 살 것이고 그가 목회를 하면 자신도 괴로울 것이고 성도들은 더 많이 괴로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넘어가서 그러면 이런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한 답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여기서 지식과 총명은 수단이라는 의미도 되고 사랑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희랍어 전치사 ‘엔’이 사용되었습니다. 엔은 ‘무엇으로’ 라고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어디 속으로’ 하는 목적을 향하는 전치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어느 것으로 해석해도 큰 차이가 없는데 저는 많은 성경의 번역이 따랐던 것처럼 그냥 ‘무엇으로’ 라고 해석하기를 권합니다.
그럼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서 '지식'이라는 단어는 ‘그노시스’가 아니라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라고 하는 것은 ‘무엇 무엇에 관하여’ 또는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입니다. ‘기노스코’에서 온 것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면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사물에 대해서 철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별 사물에 대해서 그 존재의 구성과 작용을 철저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물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때 비로소 그 사물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단순히 이렇게 헬라 사고 속에서 정보를 오고가는 종류의 그런 지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랍어에서 특히 성경 희랍어에서 ‘그노시스’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고 ‘그노시스’의 히브리적인 배경이 바로 ‘다아트’입니다. 그것이 아까 교수님이 설명하신 ‘야다’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그노시스’라는 것은 어느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사물에 대해 말할 때 목회를 하는 사람이 이 종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설교에서 이것이 꼭 필요한지도 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물은 이런 종이나 컵이나 접시 같은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물도 가리키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신적이고 인간의 마음에 속하는 ‘이데아’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물입니다. 그래서 라틴어의 ‘레스’라고 하는 단어는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사물입니다. 그런 개별적인 사물에 대해서 철저한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지식은 원래 하나님의 관념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시간적이 아니라 논리적 의미임) 하나님 안에 먼저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연히 당신이 창조하실 사물 하나하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 없이 완벽히 아셨고 그 사물과 사물이 관계를 맺을 때에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이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이 서로 하나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관계를 맺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와 수많은 공해들은 그것만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에 영향을 주어서 생태계 전체를 흔들어 놓으면서 점점 더 지구를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만들고 인간의 생명을 심각히 위협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전체적인 연결을 올바로 알기위해서는 우리들이 낱개의 지식 하나하나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신학을 탐구하고 성경을 탐구해서 예를 들면 십만 명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두 명만 눈길을 줄 그런 것을 탐구하는 학자도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것이 절대 목회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부는 별로 뛰어나지 않지만 목회를 잘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수단이 좋아 그렇게 보일수도 있지만 그 영역이 서로 연관을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물들에 대한 이해를 갖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 되는 것은 공부입니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연결시켜서 목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겠으며 양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서로 상호연관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상호라는 것은 최소한 두 개 세 개 여러 개가 될 때에 그것이 서로 이어지면서 상호연관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장 중심에 놓고 그 다음에 신학으로 확장하고 그 신학을 이해하게 해주는 인근의 학문들 예를 들어 문학, 역사, 철학 같은 것들을 공부하고 그것들을 더 확장시켜서 이해하게 해주는 예술, 과학 이런 모든 것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학문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 학문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 세워진 학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들이 원뿔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심에 가장 높이 있고 그리고 그것들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을 해석하면서 결국은 이 들풀하나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져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그게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로부터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셔도 되지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이 때에는 얼마만큼 공부를 해야 할까요? 신학대학원 다니면서 몇 번을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단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부는 ‘문서설’부터 시작해서 ‘신약비평’, 구약의 ‘우가리트’ 문헌과 ‘아카드어’ 그리고 ‘현대비평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종합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했는데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 즉, ‘에피그노시스’였던 것입니다.
그럼 ‘에피그노시스’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정상적인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안 나온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제일 먼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사람이 되어져 가는 과정은 지식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물론 모든 신학생, 모든 젊은 목회자가 동일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성경을 휘돌아 밖으로 나오면서 성경을 중심에 놓고 원심력과 구심력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만큼 뻗어나가면서 학문을 공부해서 무엇에 관하여 성도들에게 가르치든지 성경적으로 학문적으로 정확한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에피그노시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진실한 목회자가 못되는 경우도 많지만 공부를 안 하고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총명’ 왜 ‘모든’ 이라는 말이 ‘에피그노시스’에는 붙지 않고 뒤에 오는 총명에는 붙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 지식도 중요하지만 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희랍어로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아이스타노마이’ 즉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현대 희랍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노에시스’ 라고 썼는데 이 ‘노에시스’는 플라톤철학에서 ‘누스(Nous)’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누스(Nous)’는 ‘지성’입니다. 그냥 하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붙들고 있는 어떤 지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세계에 대한 설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로 시스템처럼 작용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는 논리라기보다는 뭔가 올바른 것을 직관하는데서 오는 통찰입니다. 그리고 그 통찰에서 오는 판단력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을 만한 번역인 킹제임스 버전이 이를 ‘All Judgemen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이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인간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 하신다’,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사명을 주셨다’ 이런 것들은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논리를 초월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이 보이는 세계에 매어있던 지성이 계시의 말씀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안개를 뚫고 지나가면서 어떤 초월적인 사실들을 확신함으로서 갖게 되는 판단력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 준비되어야 할 것은 훌륭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과 사랑하신 것을 믿고 거기에 자신을 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 민감한 사람인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이 지각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얘기하는 총명입니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 넘는 그 곳에서 부터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에게 놀라운 평강이 주어지는데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은 믿지만 그것은 장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돈 때문에 사역지를 옮겨 다니고 공부 좀 더 하겠다며 교회도 섬기지 않고 신학생인데도 거의 전도한번 안하면서 그렇게 살면 결국 쓸모없는 목회자가 됩니다.
적어도 성경을 읽으면서 강의시간에 들었던 모든 인간의 논쟁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초월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나만의 영적인 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 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속에서 그것을 지식과 함께 병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에피그노시스’를 감동적으로 가르쳐주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주고 내가 믿고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을 성경 진리와 부합하게끔 가르쳐서 그 초월적인 사실에 대한 증언을 들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며 그 사랑이 점점 더 넘치게 되는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의 강의가 아주 어마어마하게 감동이 되었다고 칩시다. 다음 주에 와서 똑같은 얘기를 하면 그것이 감동이 될까요? 물론 감동이 되는 분도 있겠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 여섯 번 이렇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오천오백편의 공식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자들이 왜 설교를 베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십니까? 더 이상 할 게 없어서 입니다. 그렇다고 베끼지 않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미 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은혜 충만한 사람은 ‘평생에 듣던 말씀’이라며 들어줄지도 모르지만 몇 번쯤 그렇게 반복해서 들어줄까요? 이것은 ‘에피그노시스’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전되어 가는 것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회자가 평생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붙어 앉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목회자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점점 더 믿음이 훌륭해져서 예전에 자기의 영적인 수준에서는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치면서 자기가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물론 믿음으로 해야겠지요. 그러나 자기도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음으로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이렇게 어떤 사물에 대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알아가는 지식 축적의 방식과 하나님을 점점 더 훌륭하게 믿으면서 ‘아이스테시스’가 자라나는 방식은 즉,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은 사역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내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 한다” 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서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하며’ 세 번째는 ‘허물이 없음’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결국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목회라는 것은 어떤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어떤 것들을 일구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게 선한 것이 아니라 희랍어 ‘디아페론타’입니다. 이 뜻은 다른 것이며 ‘서로 다른 것을 시험해 내며’ 라는 뜻입니다. 설명하면 아주 길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모조품이 많습니다. 그리고 진리일수록 가짜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모나미 볼펜을 모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금을 모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왜냐면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까스로 모나미 153볼펜을 위조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진품과 모조품의 가격 차이는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천 원짜리 위조지폐를 거의 비슷하게 위조하는데 원가가 삼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천 원짜리 위조지폐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만 원짜리 위조지폐 만드는데 오만 원까지 원가가 나오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오만 원짜리 위조지폐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을 들어서 목회의 세계를 보십시오. 그러면 아직까지 잘 모르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도 규모가 외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진짜 저건 모범이 아닌데.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뭔가 굉장히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데 나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사례를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재의 여러분들 같이 아직 분별력이 덜 갖춰진 상태에서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믿음과 지성이 점점 자라서 훨씬 더 온전해졌을 때에는 사실은 참된 것이 너무 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목표를 ‘디아페론타’를 알아내는 것으로 두어야 하며 많은 학자들이 ‘더 베스트를 초이스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킹제임스 버전에는 ‘디 엑설런트’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장 탁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내서 덜 탁월한 것을 탁월한 것을 위해서 희생하고 탁월하지 못한 것을 탁월하게 칭송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진리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무 진실해 보이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진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신사도 운동에 빠져서 교회이고 뭐고 막말로 말아먹었습니다. 너무 너무 가엾은 경우이었습니다. 즉, ‘디아페론타’를 구분을 못하는 경우입니다. 목회자만 ‘디아페론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설교를 듣고 목회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디아페론타’ 들을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도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두 번째 ‘진실하며’ 라고 했는데 오리지널 텍스트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할 수만 있으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거의 외울 정도로 하면 좋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도 우리말 성경을 펴놓고 잘못된 번역을 X표 칠 정도의 능력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꽤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공부해야 합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희랍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데 원래 ‘에일리크리네이스’의 뜻은 ‘채로 쳐낸’ 이란 뜻입니다. 로마 시대 때 가루 같은 것들을 방아에 빻아서 떡 같은 것들을 만들려면 가루가 굵으면 안 되니 고운 채로 쳐내야 합니다. 이렇게 쳐내지는 것을 ‘에일리크리네이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햇빛에 비추어보는’ 입니다. 지폐나 어떤 물건이 있으면 그것의 진위를 파악해 보기 어려울 경우 햇빛에 비춰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에일리크리네이스’라고 합니다. 둘 중에 어느 것으로 해석을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어떤 것들이 실제로 있고 있는 그것들이 채로 쳐서 가루로 떨어진 것이 보다 음식을 만드는데 적합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채 안에 남아있는 것 보다 월등히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현실에 있는 것을 채로 흔들어서 더 좋은 것을 분별해 낸다고 할 때 그 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눈으로 볼 때는 ‘A’로 보이는데 햇빛으로 비춰볼 때는 ‘B’라고 판명이 된다면 ‘B'라고 알게하는 이것은 결국 진리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이 라틴어로 ‘베루스’입니다. ‘베루스’는 ‘베리타스(진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실한 것은 진리에 의해 걸러진 것, 진리에 의해 비추어 진 것이며 더 쉽게 말하면 진리가 있고 진리에서 벗어나서 맘대로 가던 인간의 마음과 삶이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인 자신의 마음과 삶이 일치를 이루었을 때 이것이 바로 ‘에일리크리네이스’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루스’입니다.
하나님이 ‘에일리크리네이스’된 이런 사람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인정하십니다. 다윗은 한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바로 진리를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보다도 더 큰 것이 없다면 그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당신의 판단으로 채에 쳐낸 사람 사람의 눈으로는 훌륭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빛에 비춰보아도 진짜 그런 사람으로 확인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을 우리 목회에 적용하자면 나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성이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알고 목회자 자신의 양심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선포에 자신의 전 존재를 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백스터 목사가 말했듯이 ‘한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설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가 진리에 대한 웅장한 울림이 되기 위해서는 일평생을 자신이 그 진리와 부합하게 되어보려고 하는 피나는 자기 싸움과 분투 속에서 그 진심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는 진리와 완전히 합치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의 진리가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진리와 완전하게 합치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알지만 길에서 벗어나면 회개하여 돌아오고 다시 벗어나면 회개하며 사는 사람들과 이런 진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자신의 정욕과 욕심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인과 짐승의 차이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이유는 전자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자기가 마음 아픈 것보다도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내가 마음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놓고 가슴 아파한다면 대신 죽어주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자연적인 본성은 자기 욕심대로 살으라고 말하는데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진리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정말 목회자로서만이 아니라 한 성숙한 인간으로서도 정말 동의할 수 없는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때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진리를 전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즉 ‘에일리크리네이스’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짧은 한 마디의 설교로 사람들에게 가슴이 아프도록 회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는 전하는 그 말씀과 피를 흘리는 사투를 벌인 후에 혹은 그런 가운데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흠 없이’는 그냥 그대로 흠 없이 되는 것입니다. 결점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에 2만원씩 하는 사과나 배가 있다고 할 때 이런 물건들의 특징은 크고 맛있는 것 외에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손톱에 치인 자국이 있거나 직경 1mm라도 벌레가 먹은 흔적이 있다면 그건 극상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봉헌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가난하고 시련을 당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열납 되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만들어서 그래서 자기를 돌이키도록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정말 분별력이 없어서 방황하던 사람을 분별력을 갖게 만들고 짐승 같은 사람들을 진실하게 만들고 흠이 많던 사람들을 보다 더 온전한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쉬네’라는 단어입니다. 이 ‘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 얻은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의이며 그 의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열납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의에서 의로운 삶이 나옵니다. 그 삶은 인격의 토대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의와 자신이 의지할 바가 없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 거기에서 나오는 흠이 없는 생활들이 어우러지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으신 이유는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극상품의 열매는커녕 들포도만 맺은 것입니다. 목회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비전을 갖지 마십시오. 가장 위대한 비전은 “내가 비록 아주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이름 없이 살다가 죽어도 내가 일평생 이렇게 예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겠다” 고하는 자기완성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의 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역격적인 소격입니다. 그러니까 그런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영광을 인식하는 사람을 전제로 하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온 우주 안에서 보다도 한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과 비교하고 “어쩜 저렇게 행복하고 아름다울까?” 생각하며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전환된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분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릎을 꿇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기뻐하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약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탁월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고 흠이 없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길을 뚜렷이 세우고 정신을 분산시키지 말고 목회자가 먼저 목회를 통해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십년 삼십년 후에 여러분들이 쓸모없는 목회자들이 되지 않는 비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