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녹취자: 이경순
극히 예외적인 분들을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마 여기서 공부하시는 것은 목회를 하기 위함 일 것입니다. 또 선교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목회를 해야 되고 또 다른 주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것은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목회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목회를 위해 준비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감옥 속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1.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라
여기서 그는 아주 명쾌하게 목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누스가 말한바와 같이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마르틴 루터가 레오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바와 같이 사랑은 믿음을 창조하지 않지만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살면서 그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부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본분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목회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기 직전 실패한 베드로를 불러 예루살렘교회를 맡기시기 전 하셨던 말씀을 기억 합니까? 그는 세 번이나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맹세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실패한 그를 만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을 물어 보신 후 예수님께서는 동일하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돌보라 내 어린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격 이것이 목회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명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대원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들어도 그것이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소명이 아니거나 소명이었다 할지라도 매우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은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을 올바르고 점점 더 풍성하게 사랑하는데 이바지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나를 만난 사람들을 모든 겸손으로 섬겨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 마음에 불을 지펴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회의 사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를 위한 가장 훌륭한 훈련은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딛고 매일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소련을 무너뜨렸고 개방사회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획기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6년도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실험을 하면서 계측해서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안전스위치를 끄고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여지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원자력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는데 추산하기를 59만 명이 죽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중의 한 예는 우라늄이 녹으면서 불꽃이 치솟는데 이것을 너무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납덩어리 80킬로그램을 가지고 비행기를 높이 띄워서 비행기 헬리콥터에서 원자로에 투입해서 위를 막으려고 시도 했는데 600명의 조종사가 동원되었습니다. 1년 안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우라늄을 녹이면서 타오르는 불길이 1000미터 상공까지 타 올랐다고 합니다. 그것도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 동안 천 미터 상공으로 불꽃이 치솟으면서 타올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천 미터나 상공으로 타오르는 어마어마한 불길은 아마 지구상에서 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표를 맡기시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의 영혼에 불을 질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학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숙제는 매일매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더빌트(Vanderbilt University)라고 하는 미국의 아주 좋은 대학입니다. 그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네 학교의 신학과정 박사과정에 학생이 들어와서 공부를 했는데 석사까지는 복음주의 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에 들어와서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학교를 얼마 다닌 후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불신자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것들은 신학에 있어서 학문은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신학에 있어서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 하나님을 그 모든 지식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매일 매일 더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권위가 흐르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가슴에 칼로 깊이 새기십시오. 나는 목회의 부름을 받았다 이 소명은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으로 어떠한 악인들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출중한 젊음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훌륭한 집안에서 금수 저를 물고 태어났어도 여러분의 부모님이 순교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무시되어도 좋을 정도로 여러분은 목회의 세계에서는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목회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 지식과 총명으로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떻게 그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오는데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피’라는 말과 ‘그노시스’가 합쳐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롯해서 하나님과 세계, 인간, 사회,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어떤 한 구석을 알고 있는 그런 편파적인 지식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 아주 올바르고 전체적일뿐 아니라 통합적인 관점에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통해서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알고 있는 것, 혹은 설 아는 것의 위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모르면서도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오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논리적으로 하나님 안에 이미 이 모든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물에 대한 하나하나의 지식은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포합합니다. 그러니까 인류사회에서 인간이 발견하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고, 또 그 사물들이 관계에 대한 지식인데 실제로 있는 사실은 알고 있는 우리의 지식을 훨씬 능가합니다.
어느 의사가 저에게 얘기했습니다. “목사님, 의사가 얼마나 우리 몸에 대해서 모르는지를 안다면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직업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목사가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지 알면 여러분들은 교회 나오는 것이 겁날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지식은 올바르게 알면 그 지식은 서로의 연관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할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이 우주공간 안에서 하나로 묶어져서 그 모든 만물의 기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수렴될 것이 분명합니다. 직업적으로 지식을 파는 사람들은 그런 성찰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수요자들이 모르는 지식을 가르쳐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에서 가르치는 이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 아니라 이 지식 때문에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대가를 받고 파는 매매용 상품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게 한 지식이 자신 속에 용해되어서 그것이 자연스럽게 인격과 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고대그리스 사람들이 만물에 대한 지식과 삶을 연결한 공식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세 개의 공식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학(physica)입니다. 어떤 사물들을 보면서 지식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논리학(logica)입니다. 사물들의 지식을 논리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윤리학(ethica)입니다. 그것들을 도덕적인 자신의 삶으로 연결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아는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도덕적인 삶을 위해서 우리가 지식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목회자는 가장 중요하게 지식을 전달해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불을 받으라는 방식으로 사랑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최초의 중생 시에는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당신 자신이 영혼에 역사하셔서 생명을 통해서 사랑을 심으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목양이라고 하는 활동을 통해서 그 사랑을 점점 더 불러일으킬 때에는 말씀의 지식으로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그 과정을 성령으로 역사하시므로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증진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신학대학원 시간은 그러한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식들을 성경과 학문을 통해서 철저하게 탐구하도록 구별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가장 주요한 사명은 공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심장에 중요한 질병이 생겼는데 어느 사람이 여러분을 수술대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있는 많은 의사들은 너의 얼굴도 모르지만 나는 너를 낳았고 길렀고 널 위해서 목숨도 줄 수 있는 네 아버지다. 네 심장을 내게 맡겨라.” 그리고 아버지가 부엌칼을 들고 수술대 위에 나타난다면 여러분들은 그 수술을 받으시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지식이 없이 사랑을 강조한 많은 극단적인 사례들이 이단에서 즐겨 행하던 방법이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목회자는 지식을 사랑해야합니다. 책 읽는 것이 싫으십니까? 아마 목회의 소명이 아닐 겁니다. 요즘 학생들 너무 공부안합니다.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 공부를 한 목회자를 별로 본 적이 없고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고 온 목회자들은 목회를 할 때 그 공부와 상관없이 새롭게 배운 방식으로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단연코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한 20년 후에 여러분들은 목회라는 자리에 간신히 직업을 얹혀놓고 교회주변을 맴돌며 밥이나 먹고사는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신학생이지만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저 설교는 깊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설교를 들어본지가 얼마나 됩니까? 그 사람들 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날이 아주 가깝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은 주님을 만난 경험이라도 있었는데 그것도 모자라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가 만 32살에 신학교 전임교수가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입학한 이후로 교수님이 읽어보라고 한 책을 모두 메모해서 읽었는데 일 년에 딱 한 키였습니다.” 그 학생은 매년 그는 자신의 한 키가 되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들 여기 이렇게 생활하시고 있으니까 책을 좀 읽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나 늘 놀고 그렇게 허송세월하면서 보내는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없지만 목회의 세계에 들어와 20년만 지나면 하나님이 쓰시는 목회자와 그렇지 않은 목회자는 만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그리고 지금은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26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라면 나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사상적으로 급변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기독교의 인구는 심각하게 줄고 있습니다. 제가 총신대 들어갈 때 M.div. 과정이 20대 1이었습니다. 붙은 학생은 고시합격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지금 2대1밖에 안 됩니다 그만큼 신학에 지망하는 학생들이 적어진 것입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공부안하면 그 사람이 선한 목자가 될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할 정도로 희귀합니다. 대부분은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위선하고 그리고 없는 것을 부풀리고 심지어는 남의 설교를 줄기차게 카피해서 그렇게 표절하는 설교나 하고 이러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자기가 목회를 위해 자기를 드려야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삶입니까? 차라리 자동차 외판원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지 뭐 할 일이 없다고 세상 사람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방법으로 그렇게 목회를 하다가 죽어야 됩니까?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너무 비참합니다. 공부해야합니다. 철저히 대학에 가서 20대 파릇파릇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제가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한탄하면서 너희에게 말하노니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이제 것 까지 그러나 내가 만약에 그대들 나이로 돌아간다면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정말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 두 번째는 부지런히 운동을 해서 평범한 사람 세 사람을 순식간에 땅바닥에 눕힐 수 있는 완력, 그리고 세 번째는 5개 국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공부하셔야 됩니다. 한 언어를 공부하고 나면 상상도 못했던 지식의 세계들이 펼쳐집니다. 또 하나의 언어를 넘으면 절대로 상상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지평의 지식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마치 돌멩이가 가득한 하천에서 수석을 채집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꼭 필요한 지식들을 채집해 놓으세요. 지금도 안 늦었습니다.
고신대학교에 어떤 교수님이 신학대학원 본과도 안다니고 예과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교를 정상적으로 공부를 못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대원에 때에 중학교 1학년 교과서부터 공부해서 졸업할 때 원서들을 학생들에게 강의했다고 합니다.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셔서 그 학교의 교수를 거쳐서 총장까지 역임하셨습니다.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에 늦었다고 칩시다. 나이 먹은 게 자랑이 아닙니다. 제일 꼴불견이었던 것이 학교에서 강의할 때 이름 위에다가 "저는 나이가 많아서 입학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점수 좀 후하게 주세요." 그게 뭡니까? 밟혀 죽어도 자존심이 있지 그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늦게 들어온 것을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젊은 학생들이 한 시간 공부할 걸 두 시간 하고 젊은 학생들이 저녁 공부할 것을 자기는 밤을 새서 공부하면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받은 소명을 입증하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복부인이라면 강남과 강북 부산과 제주의 땅값소식에 대해서 무관심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서 비교하고 그래프를 만들 것입니다. 왜? 돈 벌어주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소명이 땅 투기만도 못합니까?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 강의를 듣고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 1학년 입학해서 여태까지 커버로 책을 읽은 신학 책이 만화책이나 잡지 그런 것 말고 신학 책이 몇 권이나 있는지 한번 집에 가서 눕혀놓고 올려보세요 3년을 다녀도 무릎까지 오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결코 그 정도 학문가지고는 성경을 독자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열릴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조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나오든지 그것을 연결해서 쓸 수 있는 리글 마인드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법적 사색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덟 시간씩 3년을 꼬박 읽어야 생겨난답니다.
신학적 사색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책을 읽고 그 책에서 진리를 채집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하나님 앞에 살도록 씨름하면서 진위를 입증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방식으로 학문을 하는 가운데 에피그노시스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생은 기본적으로 무릎과 팔꿈치가 닳아야 합니다. 무릎은 기도로 팔꿈치는 책상에 붙어 앉아 있어야 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고 심오한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아 내용이 있구나, 저기에는 분명히 귀담아 들을 만한 중요한 지식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헤어지면 여러분들을 언제 만나날지 모릅니다. 또 만날 수 있을지 죽을 때까지 못 만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사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공부해야합니다. 이렇게 물어보면 학생들이 꼭 뭐를 공부해야하냐고 묻습니다. 나는 이 시간에 짧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방대한 양의 공부를 필요로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학, 신학 중에서도 성경 신학, 역사와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 이 세 가지 분야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문학, 역사, 철학, 사회, 윤리, 예술 과학 이런 것들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두 다 할 수 없으면 자기의 지적 능력이 확산하는 범위 안에서 정 가운데 성경을 두고 성경에서부터 바람개비처럼 휘돌면서 공부를 해 나가고 그 공부가 계속해서 성경 속으로 돌아오는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대개 안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번 책상에 앉아서 얼마나 장시간 동안 책을 붙들고 씨름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가야 됩니다. 앞으로 나가야 됩니다.
역사를 움직였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위대하게 사용하시진 않습니다. 교회 역사에 기초를 놓았던 사도바울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놀라운 에피그노시스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이 기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신약성경 전체의 2분의 1일을 저술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어떻게 기독교의 복음이 온 세상의 모든 지식의 보화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그는 서양사상으로 나아가는 수문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고 1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영향아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거스틴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비판할 수 있는 방법을 어거스틴으로부터 배웠다라고 합니다. 미셀 푸코와 같은 철저한 해체주의 철학자도 그 사상적 뿌리를 어거스틴에게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놀랍게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 마르틴 루터, 존 칼빈, 멜란히톤을 비롯해서 츠빙글리와 같은 신학자들은 당대에 최고의 석학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그들은 그렇게 역사를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철저한 지식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지성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가 설파한바와 같이 성경의 구절들을 찾아봐도 명백합니다. “기억하라. 잊지 말라. 너희는 이것을 알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러한 강조만 보더라도 여호와의 신앙과 기독교의 사상이 이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탈 지식적인 방법으로 부흥운동을 하면서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서 교회를 하던 방식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여러분 중 누가 그런 것을 흉내 내도 이단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성공할 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 지식으로서 사랑을 불 일 듯 일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두 번째는 총명으로 그렇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총명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이스데시스 라는 단어인데 이이스토너
마이라고 하는 두려워하다 라고 하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스데시스 라는 단어는 현대 그리어 성경에서는 뉴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아이스데시스의 정확한 의미는 지식은 지식인데 이론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통찰해서 꿰뚫어 봄으로서 획득하는 직관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논리적인 지식을 가져다주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뜨겁고 강한 것은 끊임없이 그런 초월적인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수레바퀴처럼 한쪽에는 에피그노시스가 또 한쪽에는 아이스데시스가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의 수레위에는 하나님에 관한 더 풍성한 지식이 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피그노시스를 위해서는 우리들이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이 맞는데 아이스데시스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인 민감성은 결국은 사랑에 불을 지피고 사랑에 감화될 때 영적인 민감성은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개는 끊임없이 휘돌면서 그러면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아이스데시스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매일 읽고 거기서 찬란한 계시의 빛을 발견하면서 아멘 아멘 아멘 하고 믿는 작용이 일어나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에 엎드려지는 일들은 신학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잘 믿으려는 마음이고 잘 믿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을 잘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흔히들 목회자가 되면 믿음에 있어서는 이미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꼭 같은 인간 영혼과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다르지만 보편적인 인간성 안에서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할 때도 있고 덜 사랑할 때도 있지만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믿는 것이 기쁠 때도 있고 그렇지 않고 의심이 되고 말씀 그대로 받아드리지 아니하려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프란시스 세펴가 쓴 책속에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좀 오래된 책인데 전 그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목회자의 얘기를 들으면 목회자였던 그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모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극 자유주의적인 신학교 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매술에 빠진 타락한 목회자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면서 자백을 합니다. 그 내용이 나는 생명의 떡을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신학교가 나에게 준 것은 돌멩이 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고 극단적인 자유주의에 치우치면서 그것을 치료하고 해소 할 수 있는 신앙의 경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 잠식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생명의 떡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에피그노시스도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아이스데시스가 필요 없을 정도의 에피그노시스는 없습니다. 아이스데시스는 훌륭하지만 에피그노시스 없이는 그것이 어떻게 얼마나 훌륭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종류의 지식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인생의 황혼에서도 그가 하나님께 감옥 속에서 올리고 있는 기도였습니다.
3.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그러면 세 번째로 그렇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를 통해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여기서 풍성하다 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는 물 같은 것을 부어서 넘쳐서 경계를 지나쳐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성한 사랑으로 점점 더 말론카이 말론 점점 더 풍성해지게 하므로 서 도달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온 맘을 다해 목회를 하므로 서 목회 받는 양떼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에프그노시스와 아이스데시스로 점점 더 풍성하게하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오느냐 이것입니다.
세 가지인데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가치 있는 것으로부터 더 가치 있는 것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게 좋다 이것이 훌륭하다 이것을 찾아야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 모든 것들 가운데 일 푼어치의 일리도 없는 제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것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반짝이는 것이지만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닙니다. 유리처럼 빛나는 것은 다이아몬드의 성질이지만 반짝거리고 빛나는 유리 알갱이 같은 모든 것이 다이아몬드는 아닙니다. 그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므로 서 제일 먼저 하고자하는 일은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을 구별해내는 판단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든지 그것이 성경해석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인생관에 관한 것이던지 간에 정확하게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두산 속에 들어가서 처음가본 사람이 백두산을 헤매고 있다고 칩시다. 그는 자기가 어느 곳을 헤매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나름대로 아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산자락 산의 모양 자기가 왔던 방향등을 회고하며 길을 잡을 수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백두대간을 종수한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훨씬 더 쉬울 것이고 헬기를 타고 백두산 전체를 돌아보고 독도법을 익힌 사람이라면 자기가 있는 자리만 정확하게 안다면 그러면 쉽게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지식과 총명으로 무장시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바로 이런 일을 기대하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목회자를 추종하게 하기 위해서나 자신을 존경하게 하기 위해서나 혹은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이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칭찬해주는 것 존경하는 것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눈길하나 주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잊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영원히 빛나리라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잊혀도 전혀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목회의 목표를 자신 속에서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인생의 유익입니다. 왜 ? 세상에 잊어버릴 정도로 사랑하는 것이 없고 지키고 싶을 정도로 잃어버리는 것이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풀잎의 이슬처럼 잠깐 태어나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고 그리고 그 외침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서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연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뷔페에 가보면 무순이 나옵니다. 누가 그 무순을 보면서 사진 지식이 없다면 무라는 사실을 생각하겠습니까? 신기한 것은 무와는 모양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데 서너 장을 입에 넣고 이빨로 씹어보면 정확하게 알싸한 무맛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다 성숙한 목회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한목자가 될 사람은 지금 벌써 무순과 같은 맛을 느끼게 합니다. 얼마나 믿음으로 사는가. 그리고 얼마나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한 것을 분별해 내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4. 진실하고
두 번째는 진실한 것입니다. 이 진실은 성경에서 어떤 개념이냐면 진리와는 다릅니다. 진리는 객관적인 참된 것이고 진실은 주관적으로 그 참된 것에 부합된 마음과 정신 삶 전체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라틴어로 베르수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리에 부합된 인간의 정신의 상태입니다. 당연히 그 정신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이렇게, 이익이 안 된다고 저렇게, 이런 식으로 한국의 정치인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목회자의 모습이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참된 것은 죽어도 참된 것이고 살아도 참된 것이고 바르지 않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얻은 순간 그리고 하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나의 심령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 이외에는 내 삶의 또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 그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올바르다고 믿는 진리를 따라 행동하다가 시대가 불의한 시대가 되면 거기에 항거하다가 칼에 맞아 죽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학문에 뜻을 두고 선비가 될 때 그때 이미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합니다. OMF 선교사들이 임지에 부임하면서 제일먼저 하는 것이 유서를 쓰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목사가 되는 순간 우리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그것은 어디 거짓된 용기나 비상식적인 충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알고 진리에 붙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 강하게 붙들려서 진리 때문에 즐거워하고 그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킨 상태가 되어서 어떤 곳에서도 그는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게 목회의 실제적인 두 번째 목표입니다.
5. 허물이 없고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점입니다. 예를 들면 크기와 맛 빛깔 모든 면에서 최고의 과일입니다. 그런데 끝에 동전만큼 과일이 상했습니다. 그러면 결코 극상품의 목록에 올릴 수 없습니다. 크고 맛있고 빛깔이 놀랍게 탐스럽고 싱싱해야 하는 동시에 어떠한 흠도 그 최고의 과일에는 없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신자의 삶에 신자들이 얼마나 불완전한 사람들인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적인 설명입니다. 허쉘퍼드 목사님이 자신의 설교에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주인이 사공에게 ‘자 가자, 나는 잠시 눈을 붙일 테니 너는 계속 배를 몰 거라, 어디로 갈까요? 주인님 저 북극성을 향해 계속 노를 저어라 그러면 그게 배가 물위에서 떠올라서 북극성을 향해서 공중을 날아가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 사공은 그 배를 몰고 북극성 그 방향으로 가면 목적지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흠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야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평지에 놓고 우리는 결코 기구의 도움 없이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릴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완벽한 원이 존재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마음속에 있는 것과 일치된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살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커다란 과오를 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6. 의의 열매가 가득하며 하나님의 찬송이 되라
이제 것 말씀을 정리하자면 목회는 사랑을 점점 더 불꽃처럼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 불꽃이 점점 더 일어나는 그 불길아래에는 두 개의 장작이 있는데 하나는 에피그노니스 또 하나는 아이스데시스 그 불길이 일어나게 해서 도달하려는 세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해지고 마지막에는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신학적으로나 흠이 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목표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그 모든 목표는 한 목적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 목적이 마지막 성경 구절에 나오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정확이 번역하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열매의 이름이 디카이오수네라는 열매입니다. 의인의 열매입니다. 이 디카이오수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언약과 관련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덧입혀지는 그러한 의를 통해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들어오다 보니까 여기에 “칼빈주의 5대 강령”(five point calvinism) 적혀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모두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도 의로움도 은혜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맺게 되는 인격과 삶의 열매 그 사람들이 모인 사회의 의로운 열매입니다. 당연히 그 열매는 불의한 열매와는 정반대의 열매이고 불의한 열매가 어둡고 하나님 없는 칙칙한 세상을 보여준다면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평화를 보여주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인격과 삶 사회 속에 풍부하게 맺어져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극히 행복하게 보이는 그러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본체적 영광인데 하나님 자신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인데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쉐키나와 같은 것입니다.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강력한 효과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가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내 인데 효과적 영광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내가 너에게 영광을 돌린다 라는 말은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말과똑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목회 그리고 그 목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 가지 목표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지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계시고 그 하나님 안에서 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하고 그리고 진리와 함께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순수성에 달려 있습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인천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공부하러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던 어느 날 중간까지 왔는데 폭풍주의가 나왔습니다. 돌아가야 되는데 전기도 모두 꺼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토하면서 저는 어린나이에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을 정도로 배는 요통 쳤습니다.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배 앞을 지나갑니다. 그런데 아주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온 바다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고 날이 풍랑이 와서 별빛하나 없었습니다. 저 멀리서 딱 하나 등대가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수많은 배들이 피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온 세상을 어두운 밤에 조명탄처럼 비추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요. 그런데 나는 역사적으로 정말 그런 시대가 있었는가 묻고 싶습니다. 언제나 진리보다는 악이 보편적이었고 사람의 인기를 더 끈 것은 보편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시대일수록 불꽃과 같은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 시대의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고 그리고 거기에는 참 자유가 없다는 것을 외치며 그 외쳤다는 이유 때문에 피를 뿌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는 목사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에 의하면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며 순교했던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전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35년이 넘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그때에 무기력하고 그리고 상처받고 자존감 없고 자신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모이는 사람이 없는 버림받은 목회자들 되지 말고 어디에 가든지 진리와 함께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