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녹취자: 이 솔
무슨 일이든지 한 40년쯤 하고 나면 이제는 좀 자신이 있다 하는 전문가가 되게 마련인데 저에게는 전혀 목회가 아직도 남의 옷을 입은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번 곰곰이 이제 도대체 목회라는 것이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목회 그러면 하도 범위가 넓어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를 정도입니다. 교회당을 짓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직원들을 채용하는 거 심지어 은행에서 돈 빌리고 인테리어를 하고 조직을 짜고 말 안 듣는 교인들을 또 달래고 또 법을 어긴 교인들을 치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신방과 설교 준비 등등등 헤아릴 수 없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어서 목회 그러면 그게 뭐가 핵심인지 우리 자신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목회의 본질이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너희 사랑 이라고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서 정확하게 읽으면 너희의 그 사랑입니다. 희랍어로 해 아가페입니다. 굳이 그리스어에서 네 가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사랑은 신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고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고 또 인간이 신을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도 아가파오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가파오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전도가 무엇인가? 전도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게 전도다. 우리가 이것을 만약에 개혁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이 심겨 지는 거다. 성화란 무엇인가? 그 사랑인 우리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 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결론이 좁혀졌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교회를 많은 사람을 모아서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동네 사람이 워낙 없어서 그저 몇십명 평생 목회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교회가 도시에 있을 수도 있고 시골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훌륭한 목회는 그 결말이 결코 숫자가 아닙니다. 그 교회에 온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는가. 이것이 목회에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사랑이라고 불렀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생명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생명이 솟아나는 곳에 사랑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것은 바로 생명이 영적 생명이 넘치는 것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요. 그리고 온갖 방언을 한다고요. 아니면 교인들이 책을 많이 읽어서 어마어마하게 아는 것이 많다고요. 그건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성도들에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상 사랑하던 사람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고 신자 안에 쬐금하던 사랑을 점점점점 더 크게 하는 것이 바로 목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사랑의 크기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했는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자기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회의 뜻은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에 달려 있다. 그래서 여러분 캄캄한 밤바다의 등대가 1만개가 있어도 불이 안들어 오면 딱 하나 불들어 오는 등대만 못한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긴 하는데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면 등대가 안 보인다 하면 등대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는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 속에 이 내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교인으로 만들어야겠다 이 마음이 우리의 가슴 속에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런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의가 적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재미를 못 느끼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그리 마음 쓰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를 불러서 예루살렘 교회에 담임 목사직을 맡기십니다. 그때에 물어본 세 번의 말씀은 희랍어로 각각 다른 동사라고 하지만 결국 다 같은 뜻입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딱 그거 한 마디 물어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첫 번째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십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격은 사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심지어는 어느 신학교를 나왔느냐? 그거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학교 입학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제 뭐 슬슬 이제 갈 때가 됐죠. 저도 이렇게 손꼽고 있습니다. 가겠죠. 가고 나서 얼마 있으면 인제 누구 은퇴한다 그리고 인제 초대장 날라 오다가 그 다음에는 부고장이 오겠죠. 누구 죽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우루루 오겠지요. 그게 인생입니다.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지만 두 번째로 넘어 갑니다. 그래 목회가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점점 불타오르게 하는 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느냐? 사도 바울이 이 비결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풍성하다 라는 이 희랍어 단어가 페리 쑤에 라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물이잖습니까? 우물 아니면 커다란 용기에 물을 부었는데 이게 너무 많이 부으니까 가장자리가 넘쳐서 흘러 나는 동작입니다. 사랑하되 아구까지 사랑하는게 아니라 더 넘쳐서 한계를 넘어서 밖으로 철철철 넘치고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편지 쓸 때 이 사람 로마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자기가 매일 매일 하는 기도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기도는 그 사람의 인생이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가 어땠는지 알고 싶으면 복음서를 보면 되고 복음서가 뭔지 알고 싶으면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공부하면 사실 신약을 다 공부한 거야. 왜? 그렇게 그런 사람 그런 하나님의 백성 그런 교회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신 그 심장이 타 들어가는 예수님의 소원이 주기도문에 다 농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게 이 사람에게는 주기도문이나 아니라 바울도문이 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만 생각하면서 아가페의 사람이 철철 넘쳐흐르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부자되라고? 아니. 사업 잘되라고? 아니. 교회 큰 것 지으라고? 아니. 세계 선교 하라고? 아니. 그건 다 저 아래 하위에 있는 개념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지식과 총명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엔이라는 전치사가 나옵니다. 무엇 무엇 안에~라는 뜻도 있지만 수단을 가리키는 무엇 무엇으로서 그런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서 이런 뜻입니다. 으로서 그 지식이 뭘까요?
희랍어 성경에 이 지식은 그노시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 성경 전체에서 심오하기로 말한다면 20개를 단어를 고른다면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과장을 좀 하자면 그노시스라는 한 단어의 의미를 알면 성경을 거의 관통해서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내게 가장 귀함이다 라고 한 바로 그 그노시스입니다. 이 그노시스는 지식인데 오늘 성경에 에피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 복합 명사 형태로 쓰입니다. 에피 그노시스입니다. 그럼 이건 그노시스와 어떻게 다르냐면 에피가 무엇 무엇에 관하여 대하여 그런 뜻이야. 그래서 에피 그노시스가 되면 일반적인 그노시스가 아니라 철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안다 라고 말할 때 안다라는 범위가 엄청 많습니다. 지나가다가 통성명해도 아는 거고 책을 읽었어도 아는 거고 아니면 몇 년 동안같이 살아 봐도 아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경험을 통한 앎인 동시에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 완전이라는 말이 하나님만큼 완전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어도 그 지식으로 잘못 판단하지는 않을 정도의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주 참외로 유명하잖습니까? 이 동네가 그렇게 부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옆에 동네를 갔는데 전부 다 BMW, 벤츠, 아우디 깜짝 놀랐습니다. 참외를 해서 그렇게 부자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맛있습니다. 참외 농사를 여기서 3~40년씩 지은 사람들은 참외에 대해서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외에 대해서 에피 그노시스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드리면 이것만 해도 한 시간 못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거두절미하면 결국은 지식으로 사랑이 풍성해진다. 그랬잖아요.
근데 이 지식이 뭐에 대한 지식인지가 안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그런데 기본적으로 이 지식이라는 건 뭐냐하면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는 거야.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근본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 보십시오. 이 그리스도가 누구냐하면 만물의 로고스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만물 안에 실제 하시므로 우리가 모든 만물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잖아요. 성부 하나님이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 속에 당신이 원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학문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 있는 놀라운 규칙성 변칙처럼 보이지만 더 상위에 있는 규칙성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가 그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학문이라는 것이 가능하고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혀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정치를 연구해서 올바른 견해를 찾아냈다면 이론을 찾아냈다면 그건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볼 때 이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참된 지식이 개시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만물을 통합하는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맨 이성으로는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끊임없이 복음이 전해져야 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지요.
그럼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뭐냐? 하나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무엇이고 누구고 인간이 누구고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세상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를 제대로 가르치는 지식이 전달될 때 거기에서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사람을 풍성하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총명으로 그랬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이스데 씨스라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아이스 다노마이라는 동사에서 와요. 그리고 아이스데노 다노마이는 놀라다 경이롭게 여기다 이런 뜻입니다. 아무 놀라운 광경 예를 들었어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어마어마한 폭포를 보았을 때 야 경이롭다 와 놀랍다 이런 표현을 우리가 쓰잖아요. 그러한 대서 온 것입니다.
그럼 이 총명이 뭐냐? 이걸 라틴어로 된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불가타 성경에서는 센수수 라고 번역해요. 셴수수는 영어로 센스 감각입니다. 이 감각이 육체의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감각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이스 데시스는 결국은 뭐냐 하면 어떤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입니다. 통찰. 그래서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연결해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한번은 입에서 자꾸 피가 나요.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양치질하고 지냈는데 신문한 면에 잇몸 질환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 실렸냐면 잇몸에서 나오는 피를 처리를 안하고 계속 조금씩 마시면 심장이 망가지고 어느 날 심장 마비로 급사할 수 있데요. 난 한번도 양치질하다가 피 나오는 걸 생각하면서 심장 마비를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가서 이야기를 들었더니 의사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그거 모르셨습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피에 고름이 섞여서 나와요. 잇몸이 곪으면. 그게 심장으로 들어가면 핏줄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가면 정수기 필터에다가 막걸리 붙는 것 같은 효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배겨나겠습니다. 멤브레인이 터지지. 그래서 신장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를 정확히 알아요. 그래서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데 우리는 이 고리를 몰라요. 잇몸은 여기고 심장은 여긴데 무슨 상관 있으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 결과를 찾아 아는 게 지식이라면 총명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다. 하나님이 계시다.
신학교 다닐 때 청파동에서 신학교를 다녔는데 밤에 전철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난 그때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폭력배들이 막 끌고 내릴려고 하고요 잡상인들도 해코지하더라고요. 근데 열심히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밤중에 사람이 얼마 없어서 전도를 하는데 큰소리로 그러는 것입니다. 어이 당신 하나님 봤어. 만약에 그곳에서 내가 못 봤다 그러면 너도 못 본 건 뭘 전하냐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봤다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은 있는 것들 중에 아주 일부입니다. 마음으로 본 것입니다. 총명은 그렇게 신령한 것들을 마음으로 보고 믿어서 얻는 판단력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공부도 많이 못했고 한글도 잘 몰라요. 난 믿음 좋은 권사님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이치를 정확히 알아요. 인간이 해야 할 일 하지 못 할 일. 이런 것들은 지식은 좀 부족하지만 총명이 뛰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총명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떻게 진리와 성령과 판단력이 관계가 있는지를 다섯 단계로 설명을 해요. 다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신 주체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심이 없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신자가 법학을 공부해서도 진리를 깨우치면 성령이 도우셔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사랑이셔요. 그래서 진리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도 함께 하게 돼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데 진리를 모르면 그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고 진리를 아는데 사랑 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발견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림을 그려 드리겠습니다. 불이 타오를 때 한꺼번에 산더미처럼 불길이 붙는 법은 없습니다. 대게 작은 불씨에서 시작돼요. 그래서 추운 겨울 날 마른 손가락 같은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다 놓고 거기다가 성냥불을 간신히 붙인 다음에 낙엽을 모아놓고 간신히 붙힌 다음에 거기다가 새끼손가락 같은 바짝 마른 나무를 얹습니다. 자꾸 꺼져요. 후후. 불어요. 일어나요. 그 다음에 그보다 약간 큰 장작을 얹습니다. 그 다음에 좀 더 큰 장작을 더 큰 장작을. 나중에는 이만한 덩치의 나무를 얹어놔도 다 타요. 요즘 화장장 화장터가 있잖아요. 그래서 전기로 다 태워 버리잖아요. 옛날에 아주 옛날에는 어떻게 태웠는지 아세요. 장작불로도 잘 안타면 이찌불로 태웠습니다. 벼농사 지은 그것을 한 없이 갔다가 놓고 다 탈 때까지 계속 지푸라기를 던지는 거야. 짚 한 트럭 타봐야 15분도 못 할 것입니다. 불길은 어마어마해요. 오래 안 가요. 결국 지식의 수준이지 지푸라기 같으면 잠깐은 확 하고 타도 오래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하고 사랑은 끝나면 헤어지면 되지만 하나님 하고는 이별이 안됩니다. 살아 있는 한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됩니다. 그리고 그거 아십니까? 사랑을 했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발전하지 않으면 금방 싫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가 진리의 장작 두개를 계속 공급해 주는 것이 되어야 되는거에요. 설교를 듣고 아 무릎을 치면서 저것이었구나. 저걸 내가 몰라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헤맸구나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장작이 있습니다. 지식, 총명 그리고 여기에 성령의 불이 붙어요. 그래서 타오르는 거지요. 이게 확 타올라요. 이 불이 크게 타오르면 기관차도 움직여요. 물을 끓여서 그물로 그게 증기 기관차잖아요. 물론 석탄으로 하지만 나무나 석탄이나. 그렇게 타오르는 거지요. 인생이 살면서 왜 문제가 없습니다. 목회 하면서 문제가 없다.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지금부터 한 15년 전에 교회 뒷뜰에 앉아서 새벽 기도를 끝내고 성경을 읽는데 불쑥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데요. 어우 선배님 여기 계시네요. 어우 선배님 좋으시겠습니다. 왜? 아니 남들은 개척 교회를 해도 그렇게 힘든데 선배님은 교회도 이렇게 크게 일구셨고 또 아 다른 목사님은 가난한데 목사님은 책도 많이 써서 돈도 많이 버시고 또 다른 교회는 교회가 커도 장로 눈치 보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목사님은 호령하면서 맘대로 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셋 다 사실입니다. 나는 저도 한 2년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2년을 빼고는 나 하고 싶은 것 중에 내가 못한 게 없습니다. 다 내 설교 듣고 회심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라서 다 그렇게 즐겁게 일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대는 청교도를 공부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냐. 내가 부러워 보여. 그대를 내 자리에 세워두면 내가 장담하는데 한 달 내에 사표낸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가 그랬습니다. “내 목회가 부러습니까? 내가 하나 물어볼겠습니다. 당신이 이런 기도 해본 적 있어? 저녁 때 잠 자면서 취침 기도드릴 때 하나님 제발 내일 아침에는 천국에서 눈뜨게 도와주시옵소서. 당신 그런 기도 해봤나?” 하나님은 어느 목회자에게든지 아주 편안한 방법으로 응접 소파에 누운 자세로 진리를 가르치는 법은 없습니다. 모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 목회자들이 진리로 다가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설교가 될 때 헬무트 틸리케 말처럼 6일 동안을 진리와 함께 피나는 싸움을 산사람만이 사람의 설교만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서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은퇴가 좀 남기는 했지요. 뭐 어쨌든 가까워 오잖아요. 우리 모두 다. 나 다른 거 다 소원이 없고 딱 두 개만 소원이 있습니다.
첫째 어느 날 직원들이 다 계산을 하더니 열린 교회 개척하고 제가 한 설교가 6300 편이랍니다. 공식 설교가. 다 녹음을 해서 녹취를 했습니다. 내 소원 하나가 일번이 이것입니다. 어떤 몇 년 후면 어떤 시간에 은퇴식을 할 것 아니에요. 그 전 마지막 주일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이 교회 열린 교회에서 설교하는 마지막 주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때의 성경을 폈는데 34년 정도 설교를 들었는데 그때도 무슨 설교가 나올지 가늠을 할 수 없는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게 첫 번째 소원입니다.
두 번째 소원은 그 날이 내 인생 전체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는 가장 조금 사랑하는 날이기를 바래요. 그게 제 소원입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 아니고 딴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 데려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일 잘했으면 큰 교회를 했던 작은 교회를 했던 선교사가 됐든 목회자가 됐든 신학교 선생이 됐든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사랑의 선두에 서야 되요.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두 수단을 주셨는데 지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두 군데 신체 부위가 닳아야 해요. 책상에 붙어 앉아서 팔꿈치가 닳아야 해요. 끊임없이 공부해서 새로운 지식의 말씀의 세계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교회에서 15년쯤 다닌 사람도 매주는 아니지만 몇 주에 한 번 정도는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되요. 그 지식에 대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그 성령과 함께 주어지는 놀라운 판단력 그것을 성도들에게 말씀 사역을 통해서 줄 수 있을 때 두 개는 장작이 되어서 성령의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올라서 그 사랑의 불로 온 땅을 다 태워서 그들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상 이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