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랑의 신학
녹취자: 백지영, 이대중
[사회자] 서울신학대학교 설교대학원 설교 명사 특강에 정말 명사님 한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열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남준 목사님께서 굉장히 불편한 미디어를 통한 특강임에도 불구하고 후배 목사님들을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또 준비해 주셨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저희에게 귀한 저서를 두 권이나 보내 주셔서 저희가 큰 도움을 받게 해 주셔서, 선물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간략하게 김 목사님을 소개해 드리면 총신대에서 공부하셨고, 평촌 열린 교회 담임목사로 수고하고 계시고, 또 무엇보다도 많은 저서, 80권에서 백여 권이 되는 많은 저서를 통해서 한국 교회를 신학적으로,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깨우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이 저서는 저도 한 권 있습니다만 97년도에 기독교출판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 그 이외에도 '거룩한 삶의 실천을 위한 마음 지킴'이라든지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계속해서 수상하신 뛰어난 기독교 작가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남준 목사님과 함께 설교에 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듣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시고 또 저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강의를 해주시는 목사님을 위해서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기도드리고 목사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고 신앙과 목회의 선배로서, 선배 설교자로서, 또 신학자로서 저희가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한 자리를 기술적인 어려움 없이 마련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마음껏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멘토링 될 수 있도록 주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시종을 주님 앞에 의지하옵고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남준 목사님] 여러분, 이렇게 온라인으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제가 오늘 부여받은 주제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설교'입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한번 진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저의 책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이 담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한 권 읽으셨고 오늘 발표할 내용과 관련된 논문을 미리 보내드렸기 때문에 읽으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읽으셨다는 전제하에서 쉽고 편안하게 강의를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50세가 약간 넘게 살다가 떠나신 분인데, 이분을 제가 처음 만난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통해서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이분에 대해서 “청교도가 히말라야라면 루터와 칼빈은 알프스이고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이다"라고 그 정도 극찬을 합니다. 그 당시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인기가 굉장했기 때문에 사실 한 사람에 대한 극찬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번 읽어보려고 하는데 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도서관을 뒤져보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조잡한 형태로, 돋보기가 아니면 볼 수 없을 정도의 글자로 된 19세기의 판본을 그냥 영인본으로 찍어낸 두 권으로 된 works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글씨도 아주 깨알 같고 내용도 난삽하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30대 초반이었고, 신대원을 막 졸업을 하고 청교도들에 대해 깊이 심취해 있었고 부흥이라는 주제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관련된 부분들을 찾아서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뜸하다가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근근이 읽었지만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한 1년 지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기 시작했고 최근까지도 읽고 있으니까, 저는 어쨌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이 지금 스물여섯 권, 일곱 권 정도 나왔는데 한 서너 권 정도 설교집을 빼고는 거의 모든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저는 technical scholar는 아니지만, 목회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배워왔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조지 마스던이라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전을 쓴, 아마 현존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룹에 있는 학자인데, 이미 노트르담 대학을 은퇴하셨습니다. 그분이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미국 역사상 학자 중 The Greatest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극찬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를 긴 세월 동안 읽어왔습니다. 에드워즈만 읽은 것이 아니라 여러 교부와 종교개혁자들과 르네상스 이후의 걸출한 사람들을 읽으면서, 사실 그 당시에 깊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마틴 로이드존스나 조지 마스던의 이런 평가에 대해서 완벽하게 동의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에드워즈의 전작을 거의 읽은 목회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로이드존스가 극찬하거나 혹은 로이드존스 연구가들이 극찬한 것처럼 그렇게 어마어마할 정도로 독창적인 신학과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에드워즈는 평범한 많은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탁월성을 가진 신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우선 빼놓지 않고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고 활동을 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 신학에서 중요한 전통들이 파괴되어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이고 계몽주의의 시대입니다. 미국은 그 당시 뉴잉글랜드였는데 좀 뒤떨어지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운동들이 커다란 자유주의의 파고를 예고하면서 이런 지성적인 물결들이 미국 대륙을 덮치기 시작했고, 준비가 덜 되어있었던 많은 미국의 신학자들과 많은 사람이 이런 사조 속에서 전통적인 신앙을 막 잃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방위적으로 이런 근대사상들이 밀려오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때 단순히 교회에서 매 주일 설교를 하면서도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밀려오는 계몽주의의 사조의 본질을 파악하고 모든 학문의 분야에서 그 계몽주의에 맞서서 성경적인 기독교 사상을 고수하려고 몸부림쳤던 통합신학자였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서론이 조금 길어질까 하는 염려가 있지만, 그분이 쓴 책 중에서 'The philosophy of sci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거의 읽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난삽한데 그 내용인즉 무엇이냐 하면 전체가 물리학에 대한 해석입니다. 왜 그것을 쓰게 되었느냐 하면,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물리학에서 두 충격파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뉴턴이즘입니다. 뉴턴주의는 뉴턴이 쁘린띠삐아라는 책을 쓰고 미적분을 고안해 내면서, 우리에게 한때에 경외의 대상이던 이 모든 자연의 현상들이 엄격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며 그것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을 실제로 시도한 그것이 바로 쁘린띠삐아입니다. 아마 인류 역사를 움직인 열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이 될 정도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사상이 사실은 근대의 사상을 솟구치게 하는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법칙이 있고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으며 우리가 신비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그 규칙의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두 번째 큰 파장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상대성 이론입니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나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엮어져 움직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뉴턴주의는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얇은 고무막이라고 비유한다면 그것을 운동장처럼 크게 펴놓고 거기에다 크고 작은 쇠 구슬을 굴리면 그러면 그것들은 고무 막을 밑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각각 존재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막이 시간이고 들어간 그것이 말하자면 공간입니다. 결국은 시간은 공간에 의해서 공유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든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규칙이 한정된 우리의 일반세계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미시세계 속으로 들어가거나 거시세계, 초 거시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다 달라진다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사상이 1920년대에 닐스 보어 같은 사람에 의해서 양자역학으로 발전하고, 그다음에 거의 같은 연장 선상이지만 그러나 충격파를 준 것이 스티븐 호킹 박사의 블랙홀에 대한 이론이었습니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사상적으로 커다란 충격파가 왔습니다. 이후에 받은 충격파도 굉장히 커다란 충격이었고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박사의 기여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첫 번째 뉴턴이즘의 그 충격은 이후의 발견에서 얻은 충격 못지않게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때 뉴턴의 사상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것을 정리해서 모든 물질의 법칙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상을 새로운 해석으로, 그 모든 물체의 관계 사이에는 힘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힘은 어떤 사물의 전건과 후건의 관계를 지시하는 데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증거라는 식으로 논증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보면 그의 책들은 엑스표 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지만, 그러나 그 당시의 수준에서는 아주 탁월하게 이해하고 전 방위적으로 철학, 과학, 종교, 심지어 사회,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을 보존하기 위해서 계몽주의와 맞서는 거의 유일한 전사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매우 탁월한 사람이었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 살 때부터 벌써 이미 글을 읽기 시작했고 여섯 살 때 최초로 자연과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여덟 살 때 유물론을 발표하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아주 탁월하게 잘하면서 예일대학에 들어가고 4년 뒤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2년 뒤에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약관 열아홉 살의 나이였습니다. 그러한 천재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독서하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각할 때 설교란 무엇인가, 저는 그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설교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강의할 내용을 목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우선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증언, 지성의 상승과 하강, 삶의 방식과 의미를 말씀드리고,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절대성, 두 번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사랑의 결합, 그리고 마지막 에드워즈에게서 배울 점, 이런 순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먼저 말씀을 드리면, 에드워즈에 대해 아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매우 탁월한 학자이고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특히 제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깊이 탐독하기 시작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오늘날까지도 연구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 더욱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에드워즈의 추종자는 아닙니다. 누구의 추종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모든 위대한 인물들, 제가 깊이 탐구했던 네 사람, 존 칼빈 그다음에 17세기에 에드워즈보다 백 년 전에 앞에 살았던 존 오웬, 에드워즈에게도 그가 아주 중요한 저작자였습니다. 청교도의 거의 황태자입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아우구스티누스, 이 네 분으로부터 가장 커다란 감명을 받고 그들의 저서를 거의 다 탐독해 왔습니다. 저는 다른 학자들의 사상을 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추종자의 마음은 아닙니다. 깊이 존경하지만 좀 더 객관적이고 다양한 시각 속에서 그리고 복음주의적 맥락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심취하기 전에 저는 이미 나름대로 저 자신 설교의 세계에 대해서 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저의 설교를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모든 세계의 원인이신 그리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설교의 최고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대충 몇 권만 읽어도 에드워즈의 관심사가 칼빈과 유사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심의 빛 아래서 성경을 통해 증언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선포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이 에드워즈의 설교 목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Knowing God’라고 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서 썼던 J.I. 파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의 그 책은 전 세계에 한 오백만 권 이상 번역이 되어서 팔린 인기 중의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가 맨 처음에 책을 시작할 때 스펄전의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스펄전이 하나님에 관한 아주 아름답고 완벽한 묘사를 인용하면서 탄식에 가까운 코멘트를 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에 관해서 엄청나게 탁월하게 체험적으로 진술을 한 설교자가 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약관 스무 살이었으며, 여기에 솜털이 날 나이에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인식하게 된 것을 높이 칭송하면서 '그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The knowledge of God, 하나님에 대한 지식,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다트 엘로힘이고, 신약 그리스어로 말하자면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conversion되기 때문에 그노시스 크리스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 맨 앞에서 항상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불렀던 둘로스 크리스투, 혹은 둘로스 예수 크리스투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환원이 되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설교집을 잘 안 읽습니다. 사실 저작전집 중에서 상당 부분이 그의 설교집입니다. 당연히 목회하고 있었으니까 논문이야 쓰고 싶을 때 쓰지만 설교는 매주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설교집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사림들이 설교집을 잘 안 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존 오웬이나 심지어는 소위 이야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컬 인터프리테이션(allegorical interpretation) 때문에 그의 설교의 효용성에 대해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까지도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서 설교는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설교 속에서 그의 모든 철학과 신학, 사상, 그리고 경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애정까지 모두 녹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많이 읽으라고 저는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학 책을 읽고 설교를 읽지 말고 거꾸로 설교를 읽고 그다음에 신학책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몇 편만 읽어보면 의심할 수 없이 명료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매우 높은 차원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학문적으로 뛰어나다고 하는 것,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위대한 설교의 대가들에게서, 신학적인 대가들에게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관해서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의 상승과 하강입니다. 원래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을 들어가고 대학부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괄목할만한 신학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누가 증언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여러 가지 간증들을 종합할 때 그의 메모라든지 아니면 그의 가끔 쓴 일기라든지 특히 그가 신학적인 단상을 휘 갈겨썼던 미셀러니라든지, 미셀러니는 잡문록이라고 사람들이 번역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통합신학 묵상입니다. 모든 학문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딱 관찰하고는 그것이 자연적이든지, 도덕적이든지 혹은 성경적이든지 그것을 실마리로 해서 자기의 생각을 통합적으로 풀어나가는 것들을 나중에 글을 쓰기 위해서 모아놓은 문집입니다. 세 권으로 되어있는데, 이 자료도 에드워즈의 연구가들이 잘 안 읽는 자료입니다.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단편적으로 되어 있지만 통합적인 사상을 보여주는 단편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모두 보면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도 나타나는 간증이고 '집어서 들어라. 읽어라'라고 하는 그런 음성을 들으면서 바울 서간문을 읽고 아주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그랬듯이, 역시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도 역시 그랬습니다.
에드워즈는 대대로 예수를 믿는 귀족적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탁월한 지성의 능력을 가지고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대학원 때에 건강이 매우 안 좋았습니다. 병을 달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말을 타고 산책을 하는데 그때 아주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숲속에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가 경험한 간증을 기록했는데 그때 나이가 대학원 때였으니까 기껏해야 열여덟 열아홉 그때쯤이었을 것입니다. 그 간증을 아주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디모데전서 1장 17절이 마음에 다가오면서 그 압도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엎드러지면서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 그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그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자들도 그 점에 있어서 동의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거기서 보여주는 것은 지성의 상승과 하강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이냐?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러한 수많은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라볼 때 인간은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여태까지 경험해 오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일반적인 관념에 의해서 겨우겨우 이것들이 무슨 관계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알 뿐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 안에 국한된 것이지 궁극적으로 이 사물을 있게 했던 원초적인 원인자에게 관련되어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그런 점에서 이렇게 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대면하고 이 세계를 대면하고 사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세계와 심지어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의 상승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바시스입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아나바시스입니다.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그 동굴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동굴 속에 갇혀서 그림자만 보고 불빛만 보던 사람이 도대체 저 그림자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면서 아무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고개를 돌리고, 형상을 발견하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를 발견하고, 바깥으로 나가봅니다. 나가보니까 그림자로 보았던 것이 뒤에는 조각처럼 되어있는 형상이 있었고, 그리고 실제 햇빛의 세계로 나가보니까 그 형상이 진짜로 바깥에 존재하는 실제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형에서부터 실제로 나아가는 정신의 상승을 아나바시스라고 합니다.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여기에서 지성의 상승이 이루어지고, 그다음에 이 상승한 정신으로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이 모든 세계와 자신과 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전개되는 세계는 하나님 안에 이데아로 있었다는, 관념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거기에서 하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타바시스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위의 실제의 세계를 보고 나니까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그림자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나의 인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깨닫습니다. 그렇게 발견하고 나면서부터 거기서 행복하게 살면 될 텐데 그렇게 못합니다. 왜냐하면, 실제의 세계를 본 사람의 소위 이야기하는 아낭케가 있는 것입니다. 숙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결국은 그 동굴 속의 이 실제의 세계를 못 보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동굴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와서 그 자기가 본 실제의 세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느냐 하면 결국은 거기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록 플라톤을 추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지성의 세계 전체의 구도를 움직이는 것들은 - 당대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 그리스철학의 전통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라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에 가깝고, 그리고 로마 가톨릭적인 사유의 체계라기보다는 개신교적인 사유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그런 지향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렇게 지성이 상승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이 중요한 모멘텀(momentum)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중생과 회심입니다. 중생은 영혼이 거듭나는 것이고 회심은 그것이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고 그다음에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첫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할 인간이 결국은 아드베리지오, 배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서는 것입니다. 돌이켜 선 인간이 이제 이렇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은 결국 무지로 가는 길입니다. 지성적으로, 그래서 콘베르지오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향이라고 가톨릭 사람들은 번역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회심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중생과 회심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강함으로써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고, 이것을 갖게끔 해주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설교가 사람들에게 중생과 회심을 불러일으키느냐, 그렇게 보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데, 설교는 바로 그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갈망을 끌어내고 그래서 참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성령의 역사로서 이 사람은 중생하고 회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혁명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뉴센스라고 하는 것인데, 새로운 감각입니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센세이션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 거룩하신 하나님, 신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신적인 진리의 탁월함, 이 모든 것의 집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과 탁월성 그리고 스위트니스, 달콤함에 대해서 감각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그 감각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그다음에 에드워즈는, 한 인간의 삶의 방식과 삶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어떤 목적과 의도로 세계를 만드셨는데, 결국 인간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도덕적 계획이라고 하는 그 위대한 계획의 가치망, Net of Value입니다, 그 가치망 아래, 이렇게 있는 가치망, 이것은 가치망이기도 하고 존재의 그물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렇게, 이렇게 존재함으로써 이것이 서로 서로의 의미를 정해주고 이 모든 의미는 하나님 한 분으로 수렴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사상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설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보여주고, 세계의 이 모든 역사와 사물들과 그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수렴하고, 결국은 그 창조의 목적이 인간의 타락으로 좌절되는 것 같았으나 구속으로 회복되고 회복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맨 처음 이 세계를 창조하셨던 당신의 계획을 계승해 가는 것이고, 인간은 바로 그 계획을 알고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관한 생각입니다.
자,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이것은 에드워즈의 아주 독창적인 사상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즐겨 듣고자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자기네 나라 출신의 사람이 이렇게 위대한 사상을 표명하였다면 독창적이기까지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 사상은 전혀 새로운 사상은 아닙니다.
그는 아주 폭넓은 독서가였습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대해서 매우 밝았고 심지어 그 당시에 사서오경을 모두 읽었습니다. 물론 한자로 읽지는 않았고, 역사적으로 17세기 초반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나기 백 년 전에 이미 유럽에서는 중국에 있는 중요한 철학서들이 거의 다 영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입수해서 읽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러한 탁월한 신학적인 면모를 흠모하던 영국의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사실은 영국의 노샘프턴 교회를 그만뒀을 때 영국의 스칼트랜드의 아주 큰 교회에서 초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안 갑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유럽에서 나오는 책들을 당시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로, 미국으로 부쳐주었습니다. 그것을 탐독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사상의 근육을 키웠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소위 이야기하는 엘렘틱 어프로치(Eremtic Approach)로 읽습니다. 그것들을 뭐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선교 변증학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변증학이 아니라 엘렌티코라는 말이 그리스어로 ‘꾸짖다’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책망적 변증학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을 이해하지만 그것들을 비평하면서 읽는 흔적들이 이미 그의 미셀러니 속에서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창 성장하고 있었던 시대의 영국과 유럽의 흐름이 엠피리시즘(empiricism)입니다. 경험주의 철학이 대세를 장식하고 있었던 시대였고, 그 경험적인 철학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입니다. 전부 다. 존로크가 성경의 주석도 여러 권 쓰고 그럽니다. 물론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의 한 가지로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새로운, 말하자면 네오플라토니즘 운동들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경험주의가 플라토니즘과 함께 결합이 되면서 독특한 해석을 만들어내는데, 당연히 이때 플로티누스 같은 사람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하고 이제 그와 함께 플라톤이나 플로티누스 같은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경험주의의 맥락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재평가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스콜라 모데르나 아우구스티니아’라고 하는 운동이 펼쳐집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 정도라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많은 소위 이야기하는 도덕 심리학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잘 생각해 보시면 18세기의 계몽주의가 일어나면서 관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어떤 사람은 완전히 부정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지만, 그것은 아주 멀리 있는, 말하자면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은 우리 인간들이 교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따라서 잘 살 수 있다는 이것이 온건한 기독교의 입장이었고, 기독교에 대해서 엔타이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 필요 없고, 이성이 우리의 스승이 된다면 우리는 충분히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보다도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와 기독교가 아닌 세계를 걸쳐있으면서 양자를 오가면서 당시의 지성적 사조가 만들어내는 많은 의문에 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은 도덕적인 것보다는 부도덕한 것들을 자꾸 선택하게 되는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움직여서 결국은 감각적인 아름다운 것보다는 지성적인 아름다운 것을 찾게 만드는가 플라톤이 이미 오래전에 제기했던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 다시 답을 찾기 위해 도전합니다. 그때는 플라톤의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미 르네상스에 접어들고 인간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인간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결국은 인간의 마음 심리에 대한 구조들을 밝혀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심리학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인간에 대한 아주 깊은 연구를 하면서, 결국은 인간이 어떻게 감각과 지각 그리고 인식,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받는 도덕적인 감화, 그다음에 사랑과 미움, 이런 것들이 인간의 심리 속에 작용하면서 어떻게 선과 악을 선택하게 되는지에 대한 아주 풍부한 설명을 쏟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학자들에 의해서 - 샤프스베리라든지 커스워드든지 이런 걸출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에드워즈가 이 사람들의 사상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을 빌어서 그래서 전통적인 신학에서 빠뜨렸던 고리들을 찾아내는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 고리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다음에 성령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는데, 결국은 성령이 말씀을 인간에게 역사함으로써 인간은 회심도 하고 변화된 새 삶을 살고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게 사실은 밝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에 있어서 사랑 이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드렸던 그 정동이론이라는 그 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정동(情動)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쓰는데, 사실은 이것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물론 일본어에는 있지만. 왜냐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영어의 어팩션(affection)이라는 단어를 그냥 이것을 애정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에드워즈에게 어팩션은 사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사람이 쓴 이 어팩션이라는 단어는 뭐냐 하면, 왜 이 사람의 책 중에 전집 중에서 ‘Religious affections’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신앙감정론’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사실은 religion이라는 이 말이, 그 당시의 유럽에는 이 말이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그 이후에 한두 세기 동안 쓰였을 때는 유럽에 다른 종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크리스챤덤(Christiandom)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종교라는 말은 곧 경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많은 종교가 생겨나면서 도대체 무슨 종교에 속한 경건이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이제 이 말의 사용이 일반종교라는 의미까지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에드워즈는 그런 혼란 이전에 사조를 물려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Religious affections이라고 할 때 이것은 사실은 종교적인 감정론입니다. 그 종교는 유일하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감정론인데 이 감정이 무엇이냐 하면, 큰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파장이 일듯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게 될 때 여기에 감정이 발생하게 되고 그래서 이미 있었던 정(情)이 인식을 통해서 이것이 출렁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바로 정동(情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이제 정교하게 이 사람들이 설명해 내고, 에드워즈는 이것을 가지고 그것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에드워즈가 볼 때 목회란 무엇이냐고 할 때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저 넓게 이야기하면 좋아하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랑은, 에드워즈가 말하는 참된 사랑은 결국은 인간이 행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면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사는, 결국은 어떻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능력, 사랑의 가능성이 올바른 방식으로 표출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인데, 비극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화해시키고, 그 화해시킨 그것을 어떻게 그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그가 변화되어서 예전에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삶을 청산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을 사랑해서 자신도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성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인간이 이렇게 있다고 할 때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물이 있고 혹은 사람이 있다고 혹은 어떤 관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이 사람이 볼 때 좋은 것은 사랑하게 되고 그다음에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결국은 오혐할 것 아니겠습니까? 싫어하고 혐오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결국 이것이 인간인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가능성 혹은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 자신에게만 맡겨놓는다면 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결국은 인간을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하나님의 선제적인 어떤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선제적인 행동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신미(神美)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절정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예전에는 사실은 육체의 감각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감각으로 볼 수 있게 만드시고, 그래서 좀 더 쉽게 믿을 수 있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식으로 현현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과 같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렇게 사물을 사랑하고 관념을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한다고 칩시다. 결국은 이 사람은 이것들을 사랑하면서 행복을 느끼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사랑 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인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참되게 아름다운 것을 참되게 사랑할 때 그다음에 참되게 행복에 이를 수 있게 되는데 이 삼자의 연결이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결국은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이러한 모든 사람의 사랑이 이 모든 사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되는 사랑 안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될 때 이 굽었던 질서들은 올바르게 방향을 잡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인류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인간들을 사랑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결과 그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그 사랑의 결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심포니를 연주하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저쪽에 소프라노 내는 악기서부터 베이스 내는 악기까지 수없이 많은 악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일 먼저는 자기 악기를 맞춰봐야 할 것입니다. 줄을 맞추고, 그다음에 혼자만으로 맞출 수 없으니까 피아노를 치며 맞춥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마지막에 조율할 때 지휘자가 한번 전부 다 소리를 내게 합니다. 그때 악기들이 다른 악기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조율하면서 모두 어우러져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귀에 조율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연주해서 교향곡을 망치지 말고 이 다른 악기들과 조율이 되도록 하는 것이 이제 다른 존재에 대한 어울림이라면, consent of being to being, 존재의 존재에 대한 일치라면, 이것이 교향곡 지휘자의 연주에 의해서 의도대로 연주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서 모두 완벽한 튜닝이 이루어질 때 이것이 The consent of being in general이 되는 것입니다.
being in general은 철학적인 용어로 존재 일반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의미가 애매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결국은 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근본적인 존재의 원인인 그 원인자인 그 신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도 똑같이 그런 이론 아래에서 여기에 몇 개의 요소가 이렇게 어울려서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나누어갖고 등등 약한 자들을 돕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국은 이 아름다운 질서라고 하는 것이 자기끼리 볼 때는 질서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완벽한 질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이 결국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이미 총정리 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특히 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전체적인 커다란 틀 속에서는. 그래서 저는 에드워즈에게 별명을 붙이라고 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충실한 학생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우주적인 사고에 있어서 에드워즈를 깊이 읽으시려는 분들께 제가 권하기는 어거스틴을 열심히 읽으신다면 에드워즈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고 또 플라톤을 읽는다면 더더욱 그렇게 되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라고 정리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에게 가장 큰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런 미학적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독교에 있어서는 기독교 미학의 근원을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미학의 창시자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왜 아름다운가?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은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좋아하는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왜 사랑하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연구해 나가는 학문이 미학 그리고 미학적 도덕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은 근본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들을, 참고해야 할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 때만 해도 출처를 잘 안 밝히고 충분히 글을 썼습니다. 그런 시대였는데, 재미있는 것은 고대 사람들의 글은 밝혀야 하는데 근대 사람들의 글은 안 밝혀도 되는 그런 너그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각주에 표시도 안 하면서 어거스틴의 글을 물론 그것을 보고 베낀 것은 아니겠지만 거의 암기 수준으로 문장이 거의 틀리지 않을 정도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반씩 계속되는 설명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보면 plagiarism이라고 하는 표절의 논란도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아주 충실한 어거스틴의 학생이었고 실제로 많은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아주 굉장히 탁월합니다. 가톨릭의 신학자이기는 하지만 현대에서는 우루본 발타사르라고 하는 학자입니다. 이분이 쓴 전집 전체의 이름이 ‘The beauty of God’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관점 하에서 모든 신학과 설교, 성경에 대한 해석을 풀어나간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런 미학적인 접근은 이분이 시작이라든지 혹은 당대의 유일이라든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탁월한 철학적인 사색과 그리고 사변적인 능력을 통해서 아주 논리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전개되어서 결국은 미학적인 접근을 했다고 하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17세기 청교도들에게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소위 이야기하는 경험주의적인 신학입니다. 그래서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 사람의 머리 구조가 영어보다는 라틴어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를 익혀왔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예일 대학교 졸업할 때 졸업생 답사를 라틴어로 할 정도였으니까 그냥 단순히 라틴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고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 희랍어는 잘하지 못했지만 -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작품을 비롯한 서방교회의 저작들 즉 피에리나 파트로기아 라티나 라틴교구들의 저작을 자유롭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지적인 창고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당시 부족했던 풍부한 단어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중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가 sweetness라는 단어입니다. 달콤하다는 아주 미학적인 단어입니다. 그런 단어들을 찾아내면서 아주 풍부한 경험신학적인 요소를 철저한 철학적인 사변과 커다랗고 웅장한 신학으로 연결해 냈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과 그의 미학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한 사람들이라면 전체적으로는 에드워즈를 읽을 때 감동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연관성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많이 참고했던 기독교 미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은 그 근원이 어디인지 추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폴란드의 미학자인 타타르키비츠(Tatarkiewicz)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론은 크게 세 가지 출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 출처는 성경적 미학론인데 성경 자체 안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미학적인 묘사들이 풍부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집의 아름다움이라든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겠나이다.’라고 하는 그런 부분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소위 히브리어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단어는 에뻬라는 단어보다는 오히려 토브라는 단어가 많이 쓰입니다. 사실 이것도 하나의 연구대상인데 성경에서는 아름다움이 곧 선입니다. 어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가 진리라면 이것에 대한 윤리적인 사유가 선이고 이것에 대한 미학적 사유가 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사유가 소외 이야기하는 Holiness(거룩함)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경적인 미학을 첫 번째 배경으로 두고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스토아학파(Stoicism)의 미학입니다. 스토아학파의 미학은 시메트리(symmetry) 미학입니다. 이것은 아주 질서정연하게 규칙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당시 스토아 사상이 로마 말기에 널리 유행했으니까 아무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요.
마지막 한 가지는 플라톤주의의 미학인데 아시메트리(asymmetry)의 미학입니다. 이것은 시메트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메트리가 없다는 것은 같은 수준에서 막 깨진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디포미티(deformity) 즉, 추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메트리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는 차원에서 연결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시메트리가 아니라 이것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아시메트리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보면 결국은 그 아름다움은 인간이 그 원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빛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시메트리의 아름다움은 복잡성의 아름다움이고 아시메트리의 아름다움은 단순성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존재 하나만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그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도 결국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아름답고 그 하나님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 표출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며 당신 자신이 기뻐하신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계를 창조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창조된 세계로 인해서 인간과 하나님은 말하자면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은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을 계승합니다.
결국은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좋아한 나머지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그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쏠리는 사랑을 갖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사실 이런 대화를 제가 칠 년 전쯤 그랜드래필즈에 갔을 때 마침 거기에 강의 오셨던 조지마슨 박사가 계셨고 연락을 해서 만났고 한두 시간 동안 에드워즈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 중에서 자기도 에드워즈를 좋아하고 평생 연구했지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고 특히 지옥에 관한 이론은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깊이 동의했던 것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전 우주적인 중요한 비전은 이 무지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보여주면서 여태까지 자기가 가지고 놀던 아름다운 것들을 버리게 만드는 것이 에드워즈의 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사물 속에 녹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정확하게 계승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교도 속에 있는 것이라도 그 진리가 참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것을 되찾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진리는 그것을 올바른 질서 속에 놓을 때 그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지어진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요소가 되게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가 이런 사상을 정확히 개진합니다. 수많은 종교와 철학들에 관한 책들을 읽고 그것을 다시 비평하고 해석해서 그 안에 진리의 요소들을 성경적인 구도 속으로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 에드워즈가 기울였던 노력입니다.
결국,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는 바로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선봉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심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심취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설교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않고는 사랑할 리가 없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면 아름다움을 발견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자기가 발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녹아 있는데 그 아름다움들은 희미한 아름다움들이고 이 아름다움의 에센스 정수가 뭉쳐있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리고 그 정수 중 한복판에 있는 아름다움의 극미가 구속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속사역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 정의와 불변성을 가장 확고한 방법으로 찬란하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를 드리고 강의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그 광경을 촬영하려고 핸드폰을 켰습니다. 그럼 작은 불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진짜 대포 소리가 울리면서 어마어마한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았습니다. 별빛조차 어두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았습니다. 학문과 인간의 본성 역사와 일반 지식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벌레 한 마리, 구르는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아름다움이 묻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조화와 균형과 절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하나씩 하나씩 있는데 그것이 그 어두운 벌판의 핸드폰의 불빛이었다면 구속사역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불꽃놀이가 시작되면 여전히 핸드폰 불빛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때문에 방해를 받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찬란하게 폭발하고 작렬하는 섬광 속에서 불꽃놀이를 보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성경 속에 베푸신 불꽃놀이가 결국 구속사역입니다. 그래서 히스토리 오브 리뎀션(History of Redemption)이라고 하는 책은 아름다움의 진수가 구속사역임을 보여주는 역사 철학적인 책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결국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목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미학이 어떻게 설교와 목회 속에서 나타나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을 내가 잘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점에서 저는 에드워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는 이 지식과 사랑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아주 정교하게 설명을 합니다. 이제 아까 했던 설명을 좀 다시 상세하게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인식이 떨어지고 인식이 인간의 감정을 무한히 출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떨어진 것이 지식이라면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떨어지는 지식인데 지식의 최초의 형태는 인식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인식할 때에 이 인식이 결국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호도 불러일으키고 불호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은 지식과 사랑이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식과 사랑이 함께 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11세기의 보편교회 신학자였던 클레르보(Clairvaux)의 베르나르도(Bernhard)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노띠띠아입세 에스트 아모르(notti di est amor) 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식 그 자체가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과 지식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역시 어거스틴도 똑같이 지식과 사랑이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로 된다는 것을 정동이론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우리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회중들이 이미 발견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에드워즈는 나에게 사랑의 목회, 아름다움의 목회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중심이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것, 조화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면서 나의 설교를 바르게 하고 풍성케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사회자]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귀한 말씀을 들었는데 저희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가능하시면 질문들을 메시지로 입력하시고 목사님 화면에서 메시지를 보시고 답변을 하시는 방법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질문1) 서형범님이 질문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랑의 목회를 목사님 교회에서는 어떻게 적용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좀 포괄적인 질문이긴 한데 에드워즈 자신도 목회하면서 사랑의 목회를 하자 라고 하면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사실 비사교적인 사람이었고 집안 내력 자체가 아주 고집이 센 집안이었습니다. 한때는 에드워즈도 심방도 해보는 등 사교적인 노력을 했었는데 이것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에 전념했던 사람입니다. 하루에 열세 시간 가까이 매일 공부를 했다고 하니까 사실 프로그램을 돌리고 말고 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에드워즈에게서 그런 것을 배우지는 못하지만 그의 기도합주회 같은 것들은 배울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제가 어떻게 적용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상적인 적용을 저에게 준 것입니다. 결국은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는 성가대가 없지만 성가대 밥을 하거나 국수를 삶는 사람도 책을 출판하는 출판실의 직원도 무슨 모든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함이고 진리를 설교하고 전달하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완성인 사랑의 나라의 실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본보기, 맛보기를 보여주는 것이 교회여야 된다는 그런 사상을 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사랑의 교훈을 통해 사랑하기 힘들어하는 자신을 꺾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질문2) 그 다음 질문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설교를 한다면 어떤 본문이 좋은지 한 가지 예만 부탁드립니다.’입니다.
아름다움을 검색해서 찾아보시면 많이 나오는데 함부로 덤벼드시지 말고 우선 아름다움이 뭔지를 먼저 읽으시고 철학적으로 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읽고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최근에 지지난주에 제가 하나님의 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참고하시고 도전해 보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질문3) ‘주일 예배 설교시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주일 예배 설교 시간은 몇 개의 스테이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개척을 했을 때에는 주일 설교 예배 시간이 100분이었습니다. 설교 시간만 100분 짧으면 90분이었기 때문에 예배가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하지만 예배 순서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같은 해에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사실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의 평생소원이 병원에 한 번 입원해서 누워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먹을 것과 꽃을 사가지고 온 것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 이후부터 계속 입원해서 11년 동안 열두 번을 입원하고 열 한 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몸무게의 20kg정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교인이 많아져서 4번을 설교해야 하는데 그렇게 설교해서는 도저히 한 중에 700대씩 몰려오는 주차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줄어든 것이 요즘 50분에서 70분정도 설교를 합니다.
질문4) 그 다음 질문 보겠습니다. 김성원 교수님의 질문인데 ‘에드워즈의 감정론과 오늘날 포스트모던의 감정은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에드워즈의 미학과 신학의 감정은 매우 사변적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를 극복할 수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모더니즘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을 현대주의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는데 현대주의가 아니라 모더니즘은 사상적으로 근대주의입니다. 근대에는 그래도 질서를 인정했습니다. 도덕적인 질서, 학문적이고 어떤 규범이 되는 질서들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는 탈근대주의라고도 번역을 하는데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후기근대주의라고 번역을 하지만 철학적으로 번역할 때는 탈근대주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일체의 규범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들은 제일 먼저 예술에서 일어났습니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곳에서 일어나고 그 다음에 철학에서 일어나고 철학 이후에 복식사 심지어 도시 미학 그리고 연극 예술 같은 곳에서도 일어납니다. 칸딘스키 같은 미술가나 쉰 베르크 같은 음악가가 대표적인데 쉰 베르크의 음악은 장조와 단조가 없는 음악들도 있고 이런 음악을 들어 보면 이해할 수가 없고 아주 불쾌합니다. 그런데 격식과 규범을 파괴하면서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운동은 브라우어르의 수학직관주의에서도 나타납니다. 전통적으로 수학에서 지지하고 있던 배중율같은 것들을 거부하면서 수학이 논리적인 학문이 아니라 직관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인 것을 보면 브라우어르가 논문을 썼을 때 지도교수가 집어던지면서 이까짓 것을 논문이라고 썼냐고 호통을 치던 때와는 굉장히 수학계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미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강요하는 게 아니냐 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성들에 대해서 진짜 못생기셨네요 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진짜 예쁘시네요 라고 하는 것도 성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네 기준으로 나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미학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 자체가 개개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미추를 이야기하면 안 되고 항상 그것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집안의 딸이 예술을 공부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쓰레기 더미 위에서 누드로 엎드려 있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은 굉장히 유명한 사진입니다. 그런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화에서도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조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치를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렇게 규범을 거절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모든 규범을 파괴하고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진리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허물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도전적인 생각으로 미의 기준에 대해서도 부수고 파괴하는데 결국은 어떻게 보면 기존에 있었던 아름다움이 기준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어떤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는 노력이 아닌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은 어떤 미에 대해 배척할 때 그 감정 자체가 또 다른 자신의 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기준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결국은 완벽하게 조화와 균형 이런 것들을 결별하기 힘든 것입니다.
어제 제가 TV를 잠깐 보니 여러 가지 패션룩이 나오는데 그중 젠더리스 룩이 있었습니다. 젠더는 사회적인 성이고 젠더리스룩은 남자도 입을 수 있고 여자도 입을 수 있고 아니면 패션 자체가 성에 대해 규정짓지 않는 패션이며 스타일이며 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젠더리스룩도 색깔을 맞추고 모양을 맞췄습니다. 결국 인간은 도전하고 기존에 있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파괴하고 도전하고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노력만으로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도전도 필요합니다. 그런 것도 어떤 의미에서 폭력적인 요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성에게 예쁘고 샤랄라한 공주 옷을 입혀 놓고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지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폭력입니다. 왜냐하면 왜 그렇게 샤랄라한 옷을 입혀놓고 기운이 없어서 남성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만 연상하게 하는 여성상을 만드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우리도 어느 정도 그런 이론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그 아름다운 것을 떠나서 살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 인간의 공통 감각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것과 결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아름다움의 기준도 젊은 시절이 지나고 나이가 들게 되면 또 다시 어떤 공통분모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질문이 있으신가요?
질문5)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에 대한 목사님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깨달음이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물론 있습니다만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면 자랑이 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을 마치 자신이 전쟁에서 노획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오해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한 가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서른네 살에 신학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저는 외국에 나가서 한 달도 공부하지를 않았고 학교를 떠나면서 박사 논문을 안 쓰고 끝냈는데 저 혼자 공부하면서 독학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공부하도록 자극을 받기 전 저의 관심 분야는 구약학이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아주 좋아했고 신대원 3학년 때는 사이러스 고든(Cyrus Gordon)의 우가리트(ougarit) 텍스트 600페이지짜리를 혼자서 독파를 하고 토판을 읽으리만치 구약에 몰두했던 사람이었는데 사마이틱 랭귀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았다면 펜실베니아나 뭐 이런 학교에 가서 학문을 연구하고 고고학도 연구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교수하면서도 계속해서 부교역자 생활을 했습니다. 목사 안수도 늦게 받았고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교수를 했는데 그때 고등학생들을 담당하고 있던 시절에 학생과 선생님 합쳐서 100명 정도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 때는 굉장히 기도를 많이 하던 시절이었고 청교도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매일 기도제목이 순교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는데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습니다. 수련회를 갔는데 홍수가 나서 그 지역이 계곡 속에 고립이 되었고 군부대에 구조요청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어쨌든 아이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하는데 깊고 깊은 산골이었고 거기서 사람을 만나려면 한 삼십 분 걸어 나가야 할 정도로 외진 곳이었습니다. 그 날 어마어마하게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던 날이었지만 그날 저녁 마지막으로 엎드려서 기도할 때에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실 것 같은 확신이 왔습니다. 그래서 전기도 안 들어와서 발동기를 돌려서 자가발전으로 희미한 전등불을 켜놓고 한 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앉았는데 한 사십오 분 정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설교를 하다가 심판에 대해서 막 고함을 치면서 설교를 할 때 밖에서 우르릉 쾅 하면서 천둥이 치면서 번갯불이 비치고 낙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저의 설교에 박자를 맞춰 주셨습니다. 그날 설교가 끝나고 ‘우리 모두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라고 하는데 어떠한 인위적인 노력도 없었습니다. 8시에서 8시 45분까지 설교를 했으니까 8시 50분이나 9시쯤 되었는데 기도합시다 라고 하니 모두들 기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인도하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 기도가 새벽 한 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들이 하도 열렬하게 기도하다가 몇 명은 아예 쓰러져 버렸습니다. 장로님이 ‘이 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해서 제가 깨우고 정돈을 시키고 찬양을 하고 그리고 새벽 한 시 반 정도 되어서 마쳤습니다.
그때 저는 함께 기도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경험했고 내가 신학공부하면서 만난 하나님이 흑백 스틸사진이었다면 이 부흥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은 HD급의 고화질 동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가지고 신학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그것이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제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첫날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경험하면서 저의 신학적인 관심사가 아주 중대하게 방향을 전환하며 구약의 자잘한 언어가 아니라 사상과 성경 역사 이런 쪽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재미없지요?
[사회자]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한국의 에드워즈가 목사님인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아닙니다. 전 전혀 아닙니다. 저는 외국의 학자들을 만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존 오웬을 먼저 읽었고 그의 열여섯 권을 거의 다 읽었고 깊이 심취했고 그의 법학적인 설교와 인간의 내면을 후벼 파는 설교들로 제가 깊이 영향을 받았고 열린 교회의 틀을 형성해 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분은 담임목사이고 나는 그분 교회의 부목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굉장히 존경해왔습니다. 또한 내가 죽어서 천국 가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우리 할머니와 조나단 에드워즈. 아우렐리우스하고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할 정도로 저는 어거스틴을 그렇게 존경하고 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숨 쉬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삼위일체를 묵상하며 책을 준비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죽은 다음에 김남준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였다 김남준은 칼빈주의자였다 또는 김남준은 존오웬주의자였다 조나단에드워드주의자였다 라고 불리기를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나로 하여금 김남준다운 삶을 살도록 해주고 김남준이라는 객체적인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상적인 인간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살도록 나에게 선물로 주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제가 불리고 싶은 것은 에드워즈 주의자가 아니라 인간 김남준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그게 제 마음입니다.”
질문6) 또 다른 질문을 받겠습니다. ‘웨슬리의 말인 홀리니스 이즈 해피니스(Holiness is Happiness) 말씀도 오늘의 강의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주관적인 해석인데요. 홀리니스 이즈 해피니스 라는 말은 웨슬리의 유명한 말이기도 합니다. ‘거룩함이 행복이다.’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만족과 기쁨과 쉼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되었을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기뻐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1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게 되고 거기에서만 만족을 얻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홀리니스 이즈 해피니스라는 것은 홀리니스 이즈 뷰티라는 말의 주관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있어서 뷰티의 본질은 홀리니스입니다.
질문7) 다음 질문을 보겠습니다. ‘목사님의 지적이고 신학적인 설교는 한국 교회에 약이 될 것 같습니다. 쉽지는 않은데 지성적이고 신학적인 설교를 정착시키기 위한 조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준비에 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기독교 신앙의 원래 초기로 돌아가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 초기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면 왜 나사렛의 젊은이에게서 시작해 소수의 추종자가 따랐던 이 기독교가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인 그리스 사상의 지배를 받았던 헬라인, 그리고 헤브라이즘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교 주의자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라고 했을 때 플루타르크나 다른 많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결국 제3의 족속으로 불렸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인의 사유와 헬라의 사상을 추종하는 헬라스주의자들과 유대주의자들로 나뉜 2개의 사상이 있었다고 하면 이 그리스도인들은 이 2개의 족속에 속하지 않은 역사적으로는 이쪽 분파에서 나온 것 같은데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족속으로 불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3의 족속이라는 것은 헬라주의자들과도 유대주의자들과도 하나님과 역사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눈길을 끌었던 이유는 2가지인데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3의 족속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가 맨 처음 주어질 때 사상의 형태로 주어졌는데 그 사상은 두 개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기둥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힘이 되기도 하는 사상의 힘입니다. 또 다른 기둥은 바로 윤리입니다. 사상은 지성과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인 윤리는 의지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상을 강조하지 않음으로 윤리주의로 가고 윤리를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지식 중심 주의로 가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는 사랑과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지식과 관련된 것인데 이 두 가지를 연결해 주는 아치가 있습니다. 이 아치가 그라티아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이어지면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 형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서는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초기 기독교가 준 인상이었습니다.
결국은 목회라고 하는 것도 사상과 윤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 편의 설교는 이제껏 가졌던 관점을 바꾸게 만드는 통합적이고 전체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먼저 절대적인 분량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커리큘럼은 학습해야 할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지식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상식이 신학교에서 제시되는 학문의 분야와 양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신학은 각기 구획이 지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을 연구한 사람은 신약을 모르고 신약을 연구한 사람은 조직신학을 모릅니다. 또는 로마서 8장을 전공한 사람은 7장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파편화되어 있어서 이것들을 다 통합하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제안을 하자면 우선 제일 바람직한 제안은 자기가 존경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에 입문해서 그의 모든 것을 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그 인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글만 많이 쓴 사람의 책을 읽으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의 사역과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그런 인물, 신학적으로 올바른 인물을 읽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늘 하루에 끝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꾸준히 읽으십시오. 에드워즈도 읽으십시오. 제가 읽을 때는 한글책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번역이 얼마나 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번역본이 나와 있으니 그 번역본부터 읽으시고 할 수 있으면 18세기 영어로 도전해서도 읽으십시오. 존오웬보다는 에드워즈가 훨씬 읽기 쉽습니다. 심취해서 읽으면서 그 사람의 일부가 될 때까지 빨려들면서 공부하고 그분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비판도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와 사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목회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메디타치오(Meditatio), 텐타치오(Tentatio), 오라치오(Oratio) 이렇게 세 가지로 봤습니다.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묵상하고 그 묵상을 토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난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깊이 있는 신학 하는 사람으로서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저도 그런 선상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 열심히 해야 하냐 하면 신학교 시절에 한두 번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농담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많은 분야의 책을 읽되 성경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신학책들이 포진하고 또 그 주위에 일반 인문학책들이 포진하고 또 그 주위에 예술들이 포진하는 구도로 계속해서 노력해 간다면 여러분들도 제 나이 때가 된다면 저보다 훨씬 훌륭하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한 신학적인 설교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질문8) 마지막 질문을 보겠습니다. ‘동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들도 설교 시간을 목사님만큼 하는지요?’
네, 저하고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약 40~45분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금요기도회에는 20분을 넘지 않도록 하고 새벽기도에는 설교가 15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일반 설교에는 부교역자들이기 때문에 20분 안에 끝내야 하는 기준은 없습니다만 한 시간 넘어서 설교를 하면 제가 좀 싫어하겠지요?(웃음)
[사회자] “목사님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저희에게 너무 큰 도전을 주셨습니다. 학생 목사님들 가운데 성결교회에 목회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은데 청교도 신학이 정통신학과 다르다 보니 이를 많이 알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새로운 입문을 하게 해주시고 가르쳐주셔서 더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아까 한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한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한국의 김남준 목사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감사드리고 아쉽지만, 오늘 만남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앞으로 목사님 책을 통해서 배우고 오늘 주신 조언을 새겨서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 괜찮으시다면 우리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드워즈 시대에는 에드워즈가 필요해서 보내셨고 또 어거스틴 시대에는 어거스틴이 필요해서 보내셨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는 우리가 필요해서 태어나게 하시고 또 목회자가 되게 하신 줄을 우리가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높아지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낮아지기를 원하고 훌륭한 설교를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훌륭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기를 기뻐하기보다는 기도하게 하시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독려하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와 인격과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 없는 증언이 되고 존재의 울림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이 미천한 강의가 사랑하는 학우들에게 티끌만 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혹시 오해할 만한 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올바르게 바로 잡아주시고 또 저희를 더욱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진리를 찾는 데에 매진하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