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인터뷰
녹취자 : 김세나
작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영아부부터 전 부서 방송 송출을 할 수 있게 초기에 아예 다 대비를 하였습니다.
너무 당황스럽거나 그 상황에서...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은 너무 감사하게 요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작가로서 집필에 전념할 수 있고,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로 일반 시장에 진출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 책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네.
그전에는 목사님께서 일반 출판사로는 책을 내지 않으셨었습니까? 책을 많이 내셨었는데요.
책을 많이 냈는데, 다 생명의말씀사와 두란노, 규장. 두란노와 규장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생명의말씀사에서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다시 뵙게 되어, 목사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반갑습니다. 목사님, 질문지는 보내드렸지만 제가 편안하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쓰신 책 도착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김영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교회들마다 너무 힘들어서, 사실 ‘염려’라는 주제가 특별할 것 같아서, 목사님께서 이 책을 권하셨지만 제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 책이 쉬운 책은 아닙니다.
목사님, 그 책 「자기깨어짐」책 2탄 같은 느낌이 살짝 듭니다.
「자기깨어짐」책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관련성이 있고, 전반적으로 관련성이 있습니다.
제가 「자기깨어짐」책을 처음 나왔을 때 인상 깊게 읽었었습니다.
그 책 어려워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책은 한국 교계에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기 의’에 빠진 기독교인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저는 그 책을 굉장히 많이 추천하였었습니다. 그때 당시 선물도 굉장히 많이 하였습니다. 이 책-「염려에 관하여」 처음에 보면서 ‘아, 이거 그 책 후속편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처음 서문에 염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가 스토리가 다 풀로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염려에 관한 주제를 하게 되었던 풀스토리를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는 우리 아내와 결혼한 지 42년 되었습니다. 둘이 성격이 너무 달랐습니다. 우리 아내는 굉장히 낙관주의적이고, 저는 굉장히 비관주의라기보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염려를 생산해내는, 그리고 제 아내는 염려가 있어도 낙관적인 성격으로 그것을 덮고 넘어버리는 성격입니다. 둘 다 사실은 어떻게 보면 필요한 성격이고, 어떻게 보면 둘 다 단점이기도 합니다. 둘이 이렇게 만난 것입니다.
저는 ‘염려’를 늘 달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성향을 놓고 분류할 때, ‘추론형’과 ‘추리형’이 있습니다. 사물의 연관관계에 대한 사유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추리형’은 직관을 많이 의지하는 편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남을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추론형’은 이성적으로 사물의 연관관계를 캐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상황이 있으면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고, 어떤 현실이 있으면 그것이 몰고 올 결과를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고가 철두철미한 것은 장점이지만,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모든 일까지 미리 생각하면서 마음을 쓰기 때문에 에너지가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제가 수면의 질이 너무 나빠서 서울대병원에 유일하게 수면 랩 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서 50여 개의 센서를 붙이고 정해진 방에서 컴퓨터에 연결한 채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건강보험도 되고, 웬만한 사람들 다 받을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받는 절차도 복잡하고 비용도 꽤 많이 들었습니다. 검사지를 받아서 오는 날 제가 울었습니다. 왜 울었는가 하면, 스트레스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남들의 5분의 1이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것은 남들에 비해 4배나 되었습니다. 결국 5*4=20 합하면, 남들보다 남이 1만큼 힘들 때 나는 20만큼 힘들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1kg을 이고 있을 때, 저는 20kg 쌀을 이고 있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험한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왜 눈물이 나왔는가 하면, ‘진짜 내가 산 게, 내가 산 게 아니라 진짜 주님의 은혜로 살았구나!’ 저 같은 사람의 경우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아주 좋은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보면 ‘아니, 그것 가지고 뭘 그렇게 걱정하나? 그 정도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남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인에게는 그것이 안 받아들여지고,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면에서 다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검사를 받고 나서 그랬습니다. 가족들, 동생 장로님 부부와 다 모였는데 “검사가 이렇게 나와서 내가 참 눈물이 나왔다, 나는 도저히 이러한 스트레스 받는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주님의 은혜로 내가 살아왔다. 참, 그렇게 나는 왜 이렇게 불리한 삶을 살아야 하나….”이야기했는데, 동생 장로님이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형에게 그러한 면이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고통 속에서 풀어내고 결국 그것을 극복할 때는 풀어내니까 그렇기 때문에 형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해석해 줘서 너무 위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염려’에 관련해서 성향성이 계속 있었는데, 이 책을 써내야겠다고 하는 특별한 시점이 있으셨습니까? 서울대병원 검사 후 …
서울대병원 수면 검사와 집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검사는 몇 년도에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 책 쓰기 전 1년 전 일인 것 같습니다.
2018년 정도 되겠습니다.
아마도 그렇습니다.
책으로 딱 풀어야 하겠다고 한 계기가 있으십니까?
걱정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는 늘 있습니다. 목회자가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막 떠들 수도 없는 종류의 일입니다. 어떤 괴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내가 잘못해서 만들어낸 괴로움은 아니고, 상황적으로 말할 수 없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는데, 가정적인 일은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목회하면서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사실은 예수님이 말세에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해라.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한다.”고 하시면서 세 가지 때문에 마음이 둔하여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술 취함과 방탕과 염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생활의 염려입니다. 목회자로서 솔직히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내 얼굴 때문에, 미용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류가 다르지만, 교인들이 다 그렇게 염려하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앞으로 볼 때는 굉장히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을 했는데, 내적으로 대화를 해 보면 너무 많은 근심을 가지고 있어서 날개가 너무 무거워 하늘로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고 싶어졌습니다. 결국 이 염려는 죽을 때까지 다 떨쳐버릴 사람은 없겠지만, ‘한번 민낯이라도 좀 보자, 네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상황적인 것 플러스, 교인들의 모습들 속에서 염려로 인해서 날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결합을 해서 이 염려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해 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기는 나에게도 괴로운 일이 있었고, 교인들에게서도 괴로운 일이 보이면서 그것을 한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가져다주는 ‘염려’라고 하는 것이 정체가 무엇인지, 한번 다 벗기고 한번 민낯을 보자라는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목사님, 조금 전에 ‘염려’가 마음을 둔하게 한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왜 염려가 마음을 둔하게 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민감성을 떨어뜨린다는 의미이겠습니까?
그 질문은 꼭 무엇과 같은가 하면, 방탕하면 왜 마음이 둔해집니까, 라는 질문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죄에 대한 연장선상에서의 염려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입니다. 염려든지 방탕이든지 간에 모두 결국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여성이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여성이 한 남성을, 그리고 한 남성이 한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세상에 여자는 더 이상 없습니다. 한 사람만 여자이고, 나머지는 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그 신뢰의 관계에서 깨지게 됩니다. 여기저기 여자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방탕하다’라고 하는 것은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고 믿으니까 방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안에서 찾는 기쁨 이외에 다른 데서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 같은 즐거움을 기대도 안 하거니와, 찾으려 애를 쓰지도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방탕하라고 해도 사실은 마음적으로는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방탕합니다. 마음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방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방탕을 실행하면 그것이 마음을 굳어지게, 더 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물속에서 무거운 추를 달면 물건이 계속 더 빠르게 물속으로 떨어지듯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염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염려는 불안의 문제와 나란히 갑니다. 인간이 철학을 하게 된 것도 염려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사람이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염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농사가 잘되고 배불리 밥을 먹고 전쟁도 없고 편안히 자는데 그런데 뭔가가 불안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그 불안을 해소할 어떠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불안의 문제를 가장 심도 깊게 통찰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에서는 소위 이야기하는 독일어로 ‘앙그스트’라는 불안의 문제가 하이데거에 의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불안과 염려,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갑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이야기하였던, 쇼펜하우어와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였던 고뇌의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고뇌, 염려라는 말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두 개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염려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내가 바라는 상태와 현실의 상태 사이의 격차가 바로 염려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버리지 않으면 염려는 계속 재생산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농사 잘되길 바랐을 것입니다. 대풍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먹을 곡식을 싸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심이 생겼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바라는 바와 현재 사이의 격차, 그리고 지금 있는 상태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경될 것에 대한 근심. 이것이 결국 염려입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 창고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 풍년이 안 들었으면 그러한 근심을 안 했을 텐데, 염려를 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찾아보면 주식 대박 나는 법, 열 살 어리게 동안으로 보이는 법, 맛집 찾는 법, 싸게 여행 가는 법, 배 안 고프고 살 빼는 법 등등 수없이 나옵니다. 그것이 염려를 해결해주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엽적인 염려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관련된 염려를 해결해주는 것이지, 예를 들어서 주식에 대박 나고 나면 떨어지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염려가 생기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살을 뺐습니다. 그 후에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염려가 생기게 될 것 아니겠습니다. 동안으로 보이고 나면 여기는 동안이지만, 이 안은 늙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관절염도 나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해결은 안 되고 계속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것이 같은 맥락에서 「자기깨어짐」과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부분의 자아에 대한 깨어짐과 교만에 대한 이야기 같이 해 주셨는데, 같이 연결해서 말씀해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앞서 하던 이야기를 좀 더 마무리하고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염려의 문제가 들어오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염려하는 것 자체가 실존주의자들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유에서 오는 것으로 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러한 의미는 물을 수 없는 존재다. 다 부인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게르보르펜 샤 하이트’라고 해서 인간을 던져진 존재, 피투성 존재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 던졌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던져졌다라고 하는 것만 압니다. 그래서 “내가 왜 태어났는가?” 그러한 질문은 정말 웃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는가?” 더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안 태어나도 아무 문제 없는 인간인데, 잉여의 존재로 ‘훼 떼 스몰라레르’라고 사르트르가 정의합니다. ‘잉여의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그러한 것을 물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해소하고 살겠습니까? 사람들도 실제로는 근심을 계속해서 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알베르 카뮈라는 사람이 「시지프스 신화」라는 책을 씁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그 책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시지프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린도 지역의 왕이었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묘수를 쓸 때도 신들이 못 당할 정도로 엄청난 재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을 자기가 못 당하겠으니까, 신들끼리 이간질을 시키고 요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면서 신들의 속셈을 다 알아차렸습니다. ‘저 자식 안 되겠다. 저놈을 한번 저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 신들이 형벌을 내리는데, 그것이 비로 시지프스의 형벌입니다. 산꼭대기에 돌멩이를 놓았는데, 산 끝이 볼펜 끝처럼 동그랗습니다. 거기에 돌멩이를 놓았습니다. 굴러떨어집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굴리고 돌아가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며칠 동안 해서 올려다 놓으면, 산봉우리 자체가 그 돌이 서 있을 수 없는 산봉우리였기 때문에 다시 굴러떨어집니다. 참, 알베르 카뮈가 절묘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 같으면 그 사건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왜 이러한 운명을 타고났을까? 이 운명을 타계할 방법은 무엇인가. 신들에게 가서 빌어볼까?’ 아니면 ‘여기에서 도망칠 길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식으로 질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신들에게 나에게 이러한 것을 하였을까?’ 이러한 근원적인 해결을 하려고 하다 보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라는 미신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싹 올려놓고, 올려놨는데 또르륵 굴러떨어집니다. 그런데 ‘에휴. 저것을 다시 올려놔야 하네.’ 그렇게 하지 말고 천천히 내려가면서 시크하게 웃으면 ‘또 주워오면 되지.’하면서 걸어오는 것까지가 인간의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궁극적인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실존주의에 빠져봤던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실존주의자들이 규명은 하였으나, 결국 그것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던 그 문제를 신학과 신앙 안에서 해결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자기깨어짐」과 연결되지 않는가, 하셨는데 이것입니다. 염려의 원인은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사랑 때문에 생겨납니다. 예를 들자면, 나 혼자 독신으로 삽니다. 물론 이런저런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나이는 먹고 집 한 칸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집이라도 하나 있어야 염려하지 않고 먹고 살 텐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아픕니다. 그러면 이 사람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데, 이것은 신령한 염려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염려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씀해 주시는 것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의 염려입니다. 신령한 염려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에서 구원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칭의의 구원에서 성화의 구원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그 염려를 짊어지고 살았던 사람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셨고,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이루어져야 할 현실과 지금 있는 현실 사이에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 호소하셨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 신령한 염려 자체가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염려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가 황성주 박사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의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까 더 깊이는 모르겠지만 황 박사님 설명에 의하면 우리의 몸이 근심의 종류를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예방의학자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 신령한 종류의 염려를 하면 우리 몸에 바이텔리티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신기하네요.
신기합니다. 사실은 수반물리학에 조금 더 들어가서 연구해 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합니다. 상당한 의학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이텔리티를 주는 것입니다. 영국에 가면 저쪽 위가 북해도입니다. 그쪽에서 헤링, 청어가 많이 잡힙니다. 유럽사람 모두가 즐겨 먹는 게, 우리나라 꽁치처럼 즐겨 먹는 것이 바로 청어입니다. 맛도 비슷합니다. 그것을 소금에 절여서 그냥 들고 먹습니다. 식사 시간 아니면 간식시간에 말입니다.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어가 꽁치만큼 신경질적인 생물입니다. 그래서 수조에 가두면 죽습니다. 북해도에 있는 고기를 잡아서 밤새도록 트레일러에 싣고 오는데 죽었으면 아랫지방에 와서, 뻔합니다. 떨어지면 에든버러나 런던까지 올 텐데 죽으면 제값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살려야 합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쓰는 방법이 물메기 한 마리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물메기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합니다. 돌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 물메기가 청어를 몇 마리를 먹겠습니까. 어마어마하게 가득 들었는데 말입니다. 이놈들은 그것을 도망을 다니느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기도하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쇄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남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영혼을 향한 근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를 위한 염려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네.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의 염려는 그 염려로 인해서 내 마음이 둔해지고, 마음이 점점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염려가 더 심해지면서. 그리고 그 염려 속에는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극에 달하면, 영혼을 갉아먹는 정도가 아니라 염려가 극도에 달하게 되면 죄가 그 염려 속에서 융성하면서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무모함입니다. 무모함이 생기면서, ‘확 죽어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살자고 하였던 염려였는데, 죽는 것도 무섭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악에 받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거기 미친 기운이 들어오는데, 비이성적인 것입니다. 세 번째 들어오는 기운이 열렬함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근심에 휩싸여서 더 이상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미친 기운입니다. 광기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면, 삶의 욕구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데서 그러한 것들이 근심, 염려가 오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행복 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 지수가 결국 소유가 있고, 욕망이 있는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행복 지수는 욕망 분의 소유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소유를 크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쾌락으로 올라가는데 이게 밑에 있는 욕망이 더 빨리 커집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2분의 1이었는데, 위의 것이 10으로 늘어나는 동안에 밑에는 100이 늘어나면 이것은 2분의 1이 아니라 20분의 1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삶의 만족도와 행복 지수가 높은 국가는 솔직히 잘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저 아프리카 토고, 그러한 나라입니다. 이유는 물질은 풍부하지 않은데 욕망이 줄어들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감자 캐는 여성은 다 김태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쁜 여성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소박합니다. 그냥 여자로 태어나서 자신의 미모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신랑 만나서 그에게 헌신하며 자식 키우면서 시골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그러한 정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 지수가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아까 질문하신 내용인데, 그러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욕망의 지수를 키우는가. 욕망의 지수가 크면 당연히 염려의 지수가 커질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죽음 직전에 가면, 저는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 데 죽음 직전에 가면 마음이 천사 같아집니다. 미운 사람이 아무도 없고,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면서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됩니다.
이제 하늘로 가야 할 시점이라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딱 죽는 그 순간에 우리 몸에 저장되었던 모든 엔돌핀을 확 폭발하듯이 쏟아냅니다. 몸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희열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하나의 배려입니다. 그런데 결국 무슨 문제인가 하면, 욕망이 계속 그것을 통제를 안 하고 키웁니다. 그것의 정체가 뭐냐 하면 자기사랑입니다. 「자기깨어짐」에서 깨어져야 할 ‘자기’가 무엇인가 정의를 하였을 때, ‘자기 의’와 ‘자기사랑’에 대해서 깨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의’는 예수의 의를 의지하지 못 하게 하고, ‘자기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에 그 두 개를 붙잡은 채 인간이 행복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였을 때 여기에서 ‘가난하다’라는 말이 그리스어로 ‘프토코스’인데 그 당시 파산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집안이 다 망해서 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받아서 “너의 재산은 너의 것이 아니다!” 맨몸으로 식기 정도 몇 가지 가지고 바깥으로 쫓겨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파산선고에 대한 경험을 해야!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파산선고를 경험할 때, 그러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 복은 ‘마카리우스’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그리스어에서 히브리어로 넘어가면 동치어가 바로 ‘에세르’라는 동치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서 ‘복’을 가리키는 두 단어가 있는데 ‘에세르’와 ‘바라카’입니다. ‘바라카’는 심지어 가축이 늘어나는 것도 ‘바라카’에 들어가고, 딸이 부자와 결혼한 것도, 자신이 오래 사는 것도 모두 ‘바라카’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에세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인 복입니다.
그러면 ‘바라카’는 육체적인 복만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면 됩니까?
육체적인 복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조금 더 포괄적이며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에세르’는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를 예수님이 ‘마카리오호이 호이 푸토코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물론 예수님은 희랍어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아람어로 말씀하셨지만 그때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다 알고 있는 성경에 익숙한 분으로서 염두에 두었던 것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할 때 그 단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영적인 의미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염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염려하면 염려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달려 있고,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가 염려하는 것이 충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바깥에서 염려하게 되면, 하나님과 충돌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미 그러한 염려를 하는 사람의 속에서 하나님과의 모순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질문에는 안 썼지만, 말씀을 듣다가 궁금해서 질문합니다.
‘염려’라는 이 재료가 하늘의 염려와 그렇지 않은 염려가 있는지, 아니면 염려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하늘의 시각 속에서 염려를 해석하거나 아니면 이것이 어떤 생각 속에서 ……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제 질문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주 잘 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신령한 염려가 처음부터 종류가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염려의 처음 시작은 세속적인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것이 신령한 염려가 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두 가지 염려가 사실 완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마음 안에서 해석되는 것입니다.
네. 그게 더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에 대해서 심도 있는 통찰을 하신 목사님이 바로 존 오웬 목사님이십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렇게 보십니다. 우리는 흔히 temptation과 tset를 나눕니다. 그래서 심지어 순복음교회에서는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 그래서 창조적인 시험은 하나님이 더욱 복을 주시려는 시험이고, 파괴적인 시험은 우리를 미끄러뜨려서 죄에 빠뜨리려는 시험이라고 합니다. 창조적인 시험은 다윗이 당하였던 시험이고, 파괴적인 시험은 가룟 유다가 당하였던 시험이라고 예를 들자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존 오웬 목사님은 반대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 매우 매우 황당한 일이 교계 신문지상을 발칵 뒤집혀 놓았습니다. 현직 담임 목사가 같은 지역의 어느 담임 목사를 권총으로 쏴서 살해하였습니다. 목적은 돈을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군대 갔다 나올 때 총을 몰래 가지고 나왔는데 숨겨 놓았다가 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1,500만 원인가 빼앗았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수사 과정에서 물었는데 대답이 너무 절묘했습니다. 교회를 짓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사람에게는 엄청난 열등감이 있었는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저렇게 목회를 잘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는 예배당이 번듯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나는 아직 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을 잘못한 것이군요.
나는 너무너무 교회를 짓고 싶다. 종류로 따지면 신령한 근심입니까? 아니면 세속적인 근심입니까?
겉은 신령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이 사람 마음속에서 잘못 해석되어서 총으로 쏘는 것으로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있었던 일인가요, 목사님?
서울. 이것은 오프더레코드입니다. 합동 측 경기노회 소속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저는 외국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나라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쓰면 안 되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오프더레코드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생겼습니다. 근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근심입니까? 신령한 근심입니까? 세속적인 죄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이를 사랑해서 근심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이 폭로될까 봐 걱정한 것이니까, 당연히 세속적인 근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죄에 빠지면서, 사실은 벤자민 워필드라고 하는 올드프린스턴의 신학자는 이 죄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결코 그렇게 깊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죄에 빠져서 그 죄를 감추고 하는 모든 것은 세속적이었지만, 거기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니까 원인은 지극히 세속적이었는데 이 사람을 아주 거룩하게 만들어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과 같이 temptation과 test를 그러한 식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작될 때, 우리 구역 전도해야 하는데, 더 커져야 하는데, 우리 교회 정말 부흥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였다가 죄를 짓는 경우도 있고, ‘아, 내가 죄를 지었는데 이거 들통나면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결국 염려를 둘로 나눈다고 할 때 그것은 존재하는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람 속에서 재해석되는 그 카테고리를 나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사랑에 대한 부분, 하나님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것들을 초반부터 강조해 가셨습니다. 그것에 대한 중요한 것이, 마음 안에서의 작동이 그것으로 돌아가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씀이 맞습니까?
제가 이 책에서 매우 매우 강조하는 것이 염려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칩시다. 연약하니까 어쩔 수 없다 치는데, 너가 누구인지 알아라. 그러면 염려를 해도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가? 결국 그것은 엄숙하도록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선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결함이 있게 창조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원래 창조는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윤회가 왜 이 고통스러운 윤회가 끊이지 않는 것 않습니까. 자매님이 불교로 보면 거의 성자처럼,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진짜 성자 비슷하게 살면 다음에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확률은 수천 분의 1, 수십만 분의 1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보다 못한 것으로 태어납니다. 개, 돼지, 파리, 이런 것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면 궁극적인 비전은 이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윤회의 원인이 뭐냐 하면 ‘나’라고 하는 인간이 처음부터 독특한 존재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까지나 나에게 있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불교에서 윤회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더 뒤로 백업하면 결국 없는 것이고, 우주의 커다란 근본으로 돌아갈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야지만 모든 오욕칠정과 탐진치를 벗어나 윤회의 업보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데, 그것을 해탈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만약에 똑같은 사람들이라면 사실은 태어날 이유가 없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혼이 큰 밀가루 반죽처럼 있는데 거기에서 떼어서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를 창조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그것을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완전한 작품이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모의 우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강남의 거리 성형한 사람들처럼 모두가 똑같은 모습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과 모든 것이 다 다르게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퍼즐처럼 맞추게 하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아실 것입니다. 옥션에 나오면 가격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옥션에 나오면요? 천 억, 이천 억? 가늠이 안 됩니다.
삼천 억쯤 나오면 사가겠다고 하는 나라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1962년도에 정부에서 의뢰하지는 않았지만, 재미로 당시 감정 평가사들이 한번 우리 얼마쯤 나가는지 감정을 해보자, 그래서 매긴 가격이 그 당시 7천억 원쯤 되었는데, 그 당시 금값과 지금의 금값이 5배, 6배 올랐는데 결국 4조 원쯤 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가격은 말도 안 되는 적은 액수라 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근거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몇 군데 나오는데 1경 4천억 원쯤 된다고 합니다. 1만4천조이니까 우리나라가 1년이면 500조 사용하고, 10년이면 5천조, 100년이면 5만 조인데, 30년 정도 세금을 안 걷고도 국가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단 한 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한 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나쁜 놈들이 들어가서 수염을 그렸습니다. 다시 지울 수 없는 수염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만화처럼 낙서해 놓았습니다. 그때 아마 이태리 사람들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뿐만 아니라 모든 전 세계 지구인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보다 훨씬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우리가 매일 매일 훼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깨어짐」에서 매일 깨어져야 할 나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기억이 났었는데, 「염려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는 길 가운데 회개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전환이니까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으로부터….
그렇습니다. 자기사랑과 집착이 남아 있으면 결국 탐내고 분노하고 어리석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탐진치의 원인이 결국 자기의 집착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 집착이 클 때 분노도 굉장히 커지는 것입니다. 탐욕이 크면 정신이 어지러워지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면서 지혜가 상실하게 됩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가 우리를 올바른 삶의 질서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첫 단추 같습니다. 첫 단추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교정되어질 수 있는 길을 틀게 만드는 …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요소입니다. 회개만이 아니라, 회개한 것만큼 믿음이 생겨납니다. 회개와 믿음, 두 개가 짝을 이루면서 회개는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였던 것에 대한 후회, 믿음은 자기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신뢰, 두 개가 term이 되면서, 마음이 바뀌고 나면 ‘아무래도 괜찮은 것인데, 왜 내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예전에도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의 충격적인 큰 깨달음으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나쁜 일이 있으면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필요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노력을 많이 해서 그러한 일이 안 일어나도록 하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 일어나라고 해라.’
목사님, 이 지점에서 영원성, 영원에 잇대어 있는 것, 이 시각이 굉장히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책을 상당히 깊이 읽으셨습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여기에서 인터뷰하였는데, 이렇게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입에 발린 말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그것입니다. 내 마음의 초점이 세상에 가 있으면 세상 자체가 출렁거리고 변하는 게 본성입니다. 내 마음은 안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를 달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우리의 마음이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역경을 지날 때에는 순경을 만나게 되려고 근심하고, 순경을 만날 때에는 역경에 처하게 될까 봐 무서워하니, 이래도 우리의 마음은 쉴 곳이 없고 저래도 마음은 쉴 곳이 없습니다. 부자가 우리보다 근심을 덜 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 우리보다 더 많이 염려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 인생을 어떻게 보고 사는가에 따라서 사실은 이 염려의 문제는 훨씬 다른 양상을 띠게 되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여성이 계속 살이 찌는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해도 도로 찌고, 거울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살을 뺄 수가 없다면 평생을 이렇게 거울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노력은 하겠지만, 적어도 내 모습에는 불만을 하면서 살지 말자.’ 그리고는 뚱뚱보라는 잡지를 만듭니다. 그래서 빅히트를 칩니다. 요즘 패션계에서 패션모델들이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우리 눈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키 170cm에 몸무게 45kg. 그것은 가상적으로 한 끼 요만큼씩 먹으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패션쇼를 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도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그러한 패션쇼에 대한 관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것이라 보는 것이 요즘 추세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 적으로라도 관점 자체만 이동해도 염려가 줄어든다면, 만약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관심이 이동할 때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데, 저는 ‘끊어서 생각하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는가 하면, 조던 피터슨입니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12가지 인생의 법칙」책을 썼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리한 발언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성경을 애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이렇게 원칙이 없고 통제할 인생의 규율 없이 사는 것이 인생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하는지에 대하여 통찰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철학, 심리학, 생물학 등 다방면에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쿼라’라고 하는 사이트에서 그 사람이 질의응답이 나오는데, 수백만 명이 접속을 해서 그 사람의 강의에서 지혜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신앙 속에 다 있습니다. 안이숙 씨가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을 때 이 찬양을 지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우리가 사실 몰라서 그렇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저 인간이 왜 저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처럼 건강하게 어떤 상황에 대해서 대응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mental ability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장애인보고 “왜 못 뛰어? 모든 사람이 약 안 먹고도 100m 뛰는데 왜 못 뛰어?”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장애가 있으면 못 뛰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실제로 염려가 압도되는 때가 있습니다.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시인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가슴이 눌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폐 자체가 응축되어 호흡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받은 사람이 헉헉헉 그러다가 죽지 않습니까. 그것은 모두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열 받으면 피의 농도가 아주 진해집니다. 그것이 핏줄 사이를 흐르다가 폐색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느 한 군데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받았을 때에는 빨리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물을 마시는 것이 의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옛날서부터 열 받았을 때 어른들이 물 찾는 이유는 몸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상적인 상황에서 오늘 하는 행동이 일주일 뒤에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일주일 동안 이렇게 살면 일 년 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일 년을 살면 30년 뒤에 나에게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저축도 하고 운동도 하고 지금 당장 쓸 것은 아니지만, 인간관계도 넓히면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에너지가 고갈되면 그것을 길게 볼 수 있는 에너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자꾸 훈장질을 하면 그는 어느 한순간에 꼴가닥 하고 넘어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에게 하는 충고가 뭐냐 하면, “끊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 살자.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도 힘들고 12시까지만 산다고 보자. 그리고 그것도 힘들면 한 시간만 생각해라.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다 끊고 지금 쉬자. 지금은 밭을 가는 시간이니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밭을 갈고 다음에 생각하자.
이것이 습관화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에너지를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조금 아까 독자에게 편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정신과 의사입니다.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 너무 좌절을 느낄 때가 그러한 때라고 합니다. “자매님, 좋아지실 수 있습니다. 지금 거의 엄청난 혼란 상태이지만 이 약 드시고, 이 약 드시고, 매주 오셔서 상담을 받으시고, 햇빛을 많이 보시고, 가족들에게 도움도 청하시고 잠을 충분히 주무시고, 이렇게 하시면 좋아지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사람이 뭐라고 묻는가 하면 “선생님, 이렇게까지 하면서라도 살아야 합니까?” 묻습니다. 그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거기는 저의 영역이 아닙니다. 정신과에서는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까지는 답을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간절히 부탁드리기는 그래도 제발 사실 의욕을 가지십시오.” 여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신이 단숨에 읽었는데, 자기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것을 쌓아놓고 환자들에게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내 인생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정신과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내과 의사가 수술해야 한다고 말할 때, “얼마나요?” “조금 고통스러우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요?” “왼쪽 다리를 못 쓰신다고 보고 그냥 잘라 내셔야 합니다.” 그때 의사에게, “선생님, 제가 자리를 잘라내고도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게 낫겠습니까? 죽어 버리는 게 낫겠습니까?” 내과 의사가 답을 못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 공감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결국 ‘염려’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없다라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염려가 사실은 ‘변장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시죠?”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혼자 안 믿고 살아도 괜찮은 사람은 그리스도인 된 사람 없습니다. 이분이나, 이분이나 이분 모두 그냥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염려가 극에 달한 것 아닙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생선을 사러 갔는데, “20% 올랐습니다!” 할 때에, ‘큰일 났다. 가계 지출이 많아지겠네.’ 그런 염려 정도였으면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를 통해서 예수를 알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점에서 ‘염려’가 ‘변장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인간의 한계점을 마주하게 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질문에서도 말씀드린 것이 있는데 자신에게 주신 은총을 기억하는 것, 하나님의 은총을 상기시키고 현재 일어나는 염려의 문제를 넘어가게 하는 중요한 것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의 경험을 비추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느 기업 심리 분석가가 앙케이트를 하였습니다. 사원들에게 지금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타사에서 제시하였을 때, 안 간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제안받은 사람들은 답을 해야 했습니다. 대답한 사람의 70-80% 이상이 한 가지 답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추억’이었습니다. 이 회사에서의 추억. 그 추억은 반드시 사람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너무 정이 들어서 못 떠난다. 저쪽에서 돈을 조금 더 주겠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사람들을 다시 사귀고 하는 에너지,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남의 조직에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 모든 것을 다 고려하고 그것을 다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연봉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연봉 1억 받는 사람에게 2억 준다고 하면 한번 가보겠지만, 여기에서 너무 정이 들었고, 너무 추억을 많이 쌓았는데 “3천만 원 더 줄게, 올래?” 한다고 했을 때 그것 가지고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부생활도 똑같습니다. 이 사람과 못 헤어지게 만드는 것이, 겉으로는 하나님이 이혼을 금하시니까 그렇지만, 하는 짓을 보면 꼴도 보기 싫습니다. 요새 왜 저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맨날 회식한다고 늦게 들어오고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여태껏 살아온 추억이 있습니다. 정이 들었습니다.
이것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러니까 못 떠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에서도 똑같습니다. 시인이 영적인 침체에 빠집니다. 죄를 짓거나 큰 어려움을 만나거나, 세 번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의문에 빠질 때,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침체에 빠집니다. 다시 말하면, 죄 때문에, 큰 고통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침체에 빠지는 것이 시편 73편에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며? 왜 악인은 저렇게 떵떵거리고, 죽을 때도 저렇게 잘 죽고. 나는 그래도 말씀대로 살아보려고도 하고, 아침마다 잘못했다고 야단을 치십니까? 그럴 바에야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막살아버릴걸.”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편의 영적 침체가 죄악, 고통, 무지, 세 가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 처하든지 간에, 그 사람들이 놀라운 것은 회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을 합니다. 회상. 회상이 뭐냐 하면 “내가 성의를 지키는 무리와 함께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도다” 옛날이야기입니다. 망명 가서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뭐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주께서 나를 안다고 하셨나이다.” 혹은 “주께서 나를 은혜로 이끄셨나이다” “내가 물 가운데 지날 때 불 가운데 지날 때 주께서 건지셨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적으로 항상 반복해서 리사이트 했던 것은 “바로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 홍해를 건너게 하셨나이다” 미리암의 노래를 반복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 끊임없는 추억으로 회고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 같은 감격이 없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지금 염려에 처해있을 때 그러한 세속적인 이유로 염려에 빠져있을 때에는 항상 그 사람에게 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탈해 있는 때입니다. 이탈해 있는 그 상황에서는 회상이 잘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에게 열받아서 ‘저 나쁜 사람 말이야. 내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할 때 첫 키스의 장면을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게 스톱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워지면 잊혀진 것도 다 생각이 납니다. 이때 이렇게 잘해 줬는데, 이땐 내가 너무나 미안했고, 우리가 개울가를 건너다가 넘어져 깔깔대고 웃었었지 등등 일들이 생각이 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의 원리를 적용해 보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CEO는 머스트비, must be CRO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chief executive officer가 CEO이지 않습니까. CRO는 chief recollection officer. 그래서 최고 책임자는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줘서 여기를 그리워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떠나지 않고,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는 다윗은 은혜를 소환한 사람이고, 사울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의 스토리에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은 아직 안 들려주셨습니다.
저는 항상 그랬습니다. 내가 이 책을 나중에 읽어 보시면, 처음에 제가 14살 2개월쯤 되었을 때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부모님은 안 믿으셨지만, 고모들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14살 2개월 되었는데 갑자기 슬픔이 확 밀려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입니다. 슬픔이 확 밀려오는데, 69년도 2월의 일이었습니다. 너무 감당할 수 없어서, 서울 변두리였는데 교회까지 20-30분 걸렸는데 거기에 논둑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엎드려 엄청 추운 때였는데 한참을 통곡하였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우는 것인가. 뭐가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네 가지 질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세계는 나에게 무엇인가.” 심지어 사춘기 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엄마가 나랑 무슨 상관인가.” 생물학적으로 나를 낳아준 것 말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타인인데, 내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신은 존재하는가?” 저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는 나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그 당시 교인들이 고민하는 사람들인가 자체를 의심하였습니다. 당시 제 눈에 비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펑펑 울고 눈물을 씻고, 내 인생 최초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로 산다.” 그리고 “신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분은 내 인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 나를 이렇게 내팽개치고 무슨 권리로 내 인생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있는가.” 요즘으로 따지자면 무신론 내지는 반신론이었습니다. atheism이나 antitheism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신론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그다음서부터 어쨌거나 살아야 하니까 6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작가들이 실존주의 작가들이었습니다. 사르트르, 니체, 카프카, 이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구원의 길은 독서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문학으로 들어갔고 문학에서 책을 읽으니까 한 가지 위로가 왔습니다. 나는 고민을 이야기한 적도 없지만,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다 나를 이방인 취급 하였습니다. 문학작품에 들어가니까 나처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사람들이 대개 주인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참 읽다 보니까 그것은 내 인생에 답이 아니고 질문을 던져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느 만큼은 위로가 되었지만, 답이 안 되었습니다. 결국 답이 안 되니까, 그러면서 이제 실존주의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철학책들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목사가 된 다음에 요긴하게 쓰일지는 목사가 된 다음에도 저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에서 대답을 발견하게 되면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도 왜 이렇게 방황하는지 이유를 못 댑니다. 기껏해야, 사업이 안 되어서. 그것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왜 남편과 안 살려고 해?” “담배를 못 끊어. 술을 못 끊어. 돈을 헤프게 써.” 그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담배를 끊고 술 끊고 돈을 아껴서 쓰면 너무나 사랑하며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그것이 뭔지, 무슨 감정인지 다 해명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톨스토이를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 2권의 책이었습니다. 「부활」과 「인생론」이었습니다. 「부활」을 읽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아, 도덕이라는 것이 있구나. 결국 인간이 행복을 미친 듯이 찾아도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몇 살 때였습니까?
스무 살 때쯤이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였으니까. 20살. 21살. 19살에는 헤르만 헤세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미지가 참, 약간 그때 청년 시절의 느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사실은 젊은 사람들과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젊은 사람들이 웃긴다고 하겠지만 제가 젊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그러한 문학적인 기반들이 나를 많이 이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목사님, 책에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던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분이 참 많이 뭉클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하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그것이 느껴지셨던 것이 읽는 저에게도 느껴졌습니다.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글재주가 없고 자기 인생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문학적인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불륜도 세기의 사랑처럼 표현을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세기의 사랑을 불륜처럼밖에 표현을 못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두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목회의 길을 간다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지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있는 분들인데, 지금 상황이 염려의 도가니에 있게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분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시고 싶으십니까? 사실 주변 개척교회 목사님들 너무나도 힘든 이야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솔직히 말하면, 외모 때문에, 세상적인 욕망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굉장히 좋은 질문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살아있는 한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사실 염려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당연히 염려를 하셨습니다. 염려하지 않았더라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도 거룩하게 여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차이가 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주님께서도 염려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중에 공기가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기가 오염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기가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있는 것이고, 오염되는 것이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당연히 근심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근심이 불신앙의 근심이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 상황 속에서 염려의 문제가 확 대두가 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코로나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염려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많이 부정적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서브프라임사태 날 때나, IMF 때는 이것보다 더 잔혹하지 않았겠습니까? IMF 때는 지금보다 더 잔혹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성장률이 –5%까지 내려갔고, 지금은 –1점 몇 % 이지 않습니까. 그뿐 아니라 지금은 기껏해야 자영업체가 문 닫고, 경기가 침체된 정도이지만 그러나 우리 한국사에서 이보다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하나의 계기가 된 이유는 사람이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나면 폭탄이 떨어져서 죽을 사람은 죽고 살아날 사람은 살고, 테러가 일어나도 그러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가 계속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염려라는 것이 화두로 떠오르는 원인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1월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는데, 3월쯤에는 그것이 끝났다고 하면, 우리가 메르스 때도 보면 이렇게까지 휘둘리지는 않았습니다. 불확정한 상태에서 오래 지속이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도 끝을 모르겠는 상황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메르스는 발병했을 때 사망률이 30% 가까이 이르렀고, 이것은 사실은 2%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기저질환자와 노령자를 빼고 나면 사실은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불확정한 상태로 오래 지속이 되니까 사람들에게 불안을 가져다주고, 그래서 이것이 ‘염려’의 문제를 표면에 떠오르게 했다고 저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점이라고 하면, 나쁜 점만 생각하지 말고 좋은 점은 이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왜 불안할까? 코로나 때문이야. 저것 어떻게 없애야 하나?’ 그러한 생각에서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옛날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상, 주일에 교회에 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여행을 가는 일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 자체가 놀라운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놀랍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이렇게 봅니다. 지금 이렇게 교회에 오래 안 나오는 상황이 오래되면, 사람들의 신앙이 다 미끄러져서 엉망이 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염려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염려할 시간에 전화로 한 명 더 심방하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인가 하면, 이 책이 나오고 나서 어떤 사람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이 책을 지인에게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이것을 보는데 처음 보는 책인데, 제목을 보고 울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근심이 많이 쌓이고 불안하니까, ‘하나님이 돌봐주시지 않는구만.’ 하며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요즘 우리가 심방을 합니다. 저기쯤 앉고 여기쯤 앉아 거리를 두고 가림 판을 놓고 심방을 합니다. 평소보다 심방의 효과가 배 이상 나타납니다. 간절해져서 그렇습니다. 너무 외롭고, 그리고 예전에는 구역 식구들도 만나기도 했는데, 이제는 전부 다 전화로 하고 줌으로 하고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비록 마스크는 썼지만 만나서 “잘 지냅니까?” 이 한 마디에 자기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코로나 상황이 사람들은 11월에 집단 면역이 생긴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이 거의 맞았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 보면, 저는 우리나라만을 기준으로 볼 때 코로나에 대한 염려가 종식되려면, 물론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겠습니다. 들어오는 사람을 통제하고 그래도 ‘우리가 걸리겠어?’라는 데까지 가려면 내년 6월은 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해외여행까지 완전히 자유롭게 되려면 최소한 2021년 지나고, 22년 지나고 23년에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잘하면 23년 하반기쯤 그때 비로소 선진국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봅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까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그린 여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예방 접종을 하였고 항체가 생겼다고 하는 여권을 또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두 개를 끼면 그것을 한 나라들끼리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가 대면 예배를 드리는 때가 언제이겠는가 생각해 볼 때, 저는 12월 정도로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풀리는 것, 뭐 몇 퍼센트 아니고 완전히 풀려서 옛날처럼 풀리는 것을 그렇게 보았는데, 지금은 저희가 내년 7월 이후로 봅니다. 그러면 너무 잘했던 것은 작년에 12월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2월 첫 주에 아무 제약 없이 미국 출장을 갔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데 그때부터 이상했습니다. 미국에서 마스크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마스크가 없어서 마스크를 한 천 개쯤 사서 오려고 했는데, 겨우 2개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에 갔는데 이것밖에 안 왔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싹 쓸어서 갔고, 그렇게 2월에 일이 있었는데, 2월 지나기 전에 우리가 딱 결정을 하였습니다. 금방 안 끝난다. 빨리 영아부부터 빨리, 전에는 인터넷 생방을 보낼 수 있는 시설이 세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서별로 토요일에 와서 녹화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하루아침에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아부부터 장애인 부서까지 평소처럼 주일에 와서 같은 시간에 송출할 수 있도록 다 바꾸게 하였습니다. 돈을 꽤 투자해서 싹 바꿨습니다. 아직 방송 장비 난리 나기 전에 바꾼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일찍 하니까 노하우도 생겨서 굉장히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포기하지 말고, 교인들을 돌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저자와 함께하는 북콘서트인 것 같습니다.
이 책(「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 책이 나왔는데 이렇게 온라인 콘서트를 하는 것입니다. 저자와 함께하는 온라인 콘서트를 해서 여기로 접속을 하면 무대가 딱 열리면서 1장 내용에 대한 연극이 나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사회자가 나와서 같이 토론을 하면서 교수, 진로 전문가 등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다음에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나옵니다. 그것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나오고, 이것은 피아노 연주입니다.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해서 여기에 6장인가 7장의 내용을 연결시킵니다. 이분은 여기에 나와서 김소월의 <못 잊어>를 부르면서 여기에 8장을 연결시킵니다.
대게 입체적으로 문화적 콘텐츠와 연결을 하셨네요?
연결을 해서, 세바시 아실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처럼 내가 나와서 12분 동안에 기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고통 가운데 살면서 삶에 대한 관점을 바꿔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기에 접속하는 사람 천 명에게 모두 집으로 책을 보내줍니다. 엄청난 프로젝트입니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벌고 있고, 폐업하는 사람은 폐업하는 것처럼 목회도 어떤 때는 그것을 …
양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 다양한 콘텐츠로 더 교인들에게 접근 ….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신년 사경회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신년 사경회를 매해 1월에 합니다. 우리 교회 장년 출석 인원이 주일에 3,300명이었습니다. 청, 장년만 말입니다. 해마다 1월 둘째 주에 사경회를 하는데, 실제 참석한 수가 보통 1,200명 혹은 천 명 정도였고, 기록적으로 우리가 엄청나게 감사하다고 했을 때가 1,850명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최초로 버추얼 사경회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개념입니다. 그래서 계속 개척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했는가 하면,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옛날 설교를 틀어주고 그것을 본 다음에 부목사가 자기 교구별로 사람들을 줌으로 초대해서 그 설교의 골자를 전하고, 사람들이 각기 삶을 나누게끔 만든 것입니다. 첫째날 만 명이 접속하였습니다. 그 속에는 우리 교인들의 숫자는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첫날 유튜브로 접속한 인원은 들어가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만 이천 명 정도가 접속을 해서 들은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10년 들을 교인이 한 번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튜브 찾아보면 나옵니다. 만 회에 육박했습니다.
뭐라고 검색하면 되겠습니까? 저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두움을 지나는 빛의 자녀들> 검색하면 나옵니다. 그것은 유튜브로 들을 수 있게 하였는데, 그때 접속한 사람들은 한 2천 명 정도 되었는데 그 사람은 통계로 안 잡히고 거기에서 찍은 것을 올린 것을 접속한 사람이 만 명 정도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정리를 하자면 질문이 코로나 시국에 목회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평소에 못 하던 것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끊임없이 방법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도를 해 봐야 한다!
해봐야 합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방송 장비가 없고, 우리는 큰 교회가 아니고….’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공위성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공위성 띄워서 하는 교회도 있으니 말입니다. 인공위성도 없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 없고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러한 코로나 시국에 우울함과 어려움 속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이 시국이 오히려 그들을 터치할 수 있는 좋은 상황이라는 말씀이시죠?
지금 심방을 하면 대면이라도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가 고구마를 삶을 때 찜통에 넣고 다 익었는지 보려면 젓가락을 찔러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람을 한번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코로나 상황에서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탁 터치만 하면 눈물이 확 쏟아질 상황에 있는 영혼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교회 출석률이 떨어지거나 헌금이 준 것에 대한 생각이나 집착에 빠져 있지 않고 영혼에 대한 회복에 더, 사실 맞는 것 같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헌금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최근에 한 500여 명 정도 모이는 규모가 있는 목회자 10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상황을 어떻게 지나고 있는가 물으니까, 천 명씩 되는 교회들도 20% 이상 헌금이 줄었고, 작은 교회는 40-50%까지 헌금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평소에 온라인으로 헌금을 하는 것이 잘 시스템이 되어 있고, 훈련이 되어 있는 교회는 안 줄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거의 못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96% 정도 헌금하였습니다.
굉장히 높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하게 우리 교회는 신앙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것을 교회가 평소에 훈련을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목사님들이 배우고 그리고 교인들에게 훈련시키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돈을 부치면 된다고 하는 것들을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훈련을 시키고 교회를 해야지, 지금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계속 우리는 뭐, 우리는 뭐, 불평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지금 예배를 못 드리게 되면서, 그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이 두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드리십시오” 그랬는데, 자기네 교회 들어가 보니까 방송도 안 나오거니와, 방송이 나와도 버벅거리고 지직거리고 안 나오는데 옆에 보니까 기라성 같은 목사들이 쭉 뜨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설교도 훨씬 더 은혜롭습니다. 이게 말하자면 ‘온라인 이주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창의적으로 목회를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을 가지고 자꾸 괴로워하지 말고, 있는 한도 내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방어 복이라도 입고 심방을 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가 좀 규모가 있어서 헌금이 많이 줄지 않은 교회들은 최선을 다해서 어려운 교회들을 도와야 합니다. 비상하게 도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돕겠습니까?
물질로 말입니다. 그래서 임대료도 내주고, 어마어마한 돈이 안 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경제적으로 그 교회들이 완전히 주저앉지 않도록 그렇게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 각자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보여줄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목사님, 앞으로의 계획과 그리고 사실 너무나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들이 너무나도 목사라고 이야기하거나 교회라고 이야기하면 굉장히 지탄을 받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목사님께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지 듣고 싶습니다. IMF 때와 다른 것은 IMF 때는 경제가 어려워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없지 않았습니까.
사실 방역 문제와 계속 얽혀 있으니까 그리고 또 이제 사회 분위기도 그때와는 다르게 훨씬 반기독교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이 엮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의 평가를 귀담아들어라,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접고 넘어가 주는 부분이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까니까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신문에서 우리를 좋게 써줬다고 너무 희색이 만연해지지 말고, 누가 비판한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그렇게 된 것처럼 비관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어느 시대건 그렇게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람 앞에서 빨리 그 사람에게 감동을 줘야 되겠다고 하지 말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이구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온전한 교회,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그러한 기회로 삼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근황, 앞으로의 계획, 바라는 것은 어떻게 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저의 매일 하는 첫 번째 기도는 “이 코로나 상황에서 최선의 목회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교역자들은 훨씬 더 바빠졌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훨씬 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돌볼 것인가, 지금 대심방 기간 중입니다. 교역자들이 전부 다, 주일학교 영아부부터 시작해서 노년부까지 모든 지체들을 심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대면 심방이 안 되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온라인으로 하지만, 할 수 있는 사람은 3-4m 떨어져서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에서 영혼들을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코로나가 없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발한 방법으로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이제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거리 간격과 상관없이 나름대로 유익을 받을 수 있는 목양 프로그램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온라인이라는 상황이 ‘내 양’ 이러한 테두리를 굉장히 무너뜨려서 사실 목사님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만을 보았던 것이 이제는 한국교회 교인이 내 교인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고 이러한 상황에서 더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사람의 문제를 교회가 다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면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때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염려에 관하여」 책을 쓰면서 이것은 내가 확실하게 기여한 것 같다는 신학적인 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마 정독하셨을 테니까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들이 알다시피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실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가 절반 이상입니다. 절반 정도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문맥이 바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 그런데 그 앞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나옵니다. 그게 문맥 자체가 나란히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저자가 의도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문맥 자체가, 맨 처음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6장 19절에서 “너희는 땅의 보물들을 쌓아 두지 말아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못 섬긴다.” 그러면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나오다가 그것을 종합해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러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하기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그랬더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에서 사실 ‘먼저’라는 말이 순서적으로 이것 첫째하고, 두 번째 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원리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해라. 그런데 이러한 식으로 근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근심해라. 이렇게 근심해라. ‘나 먹어야 하는데. 그래야 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실까. ‘나 마셔야 하는데, 나 못 마시면 내가 주님의 일을 못 하는데….’ 무엇을 입을까. ‘나 옷이 필요한데. 나 입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못 하는데….’ 이러한 식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제유법인 것입니다. 세 가지만 있겠습니까. 교육받아야 할 것도 별의 별 것 다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아내 컴퓨터가 망가졌는데….’ 그러한 것도 다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두 개가 나란히 나오는 것이 저자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문맥 자체가 그렇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족하다고 안 보게 되면 자꾸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인간으로서의 참된 본분을 따라서 못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은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배려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에서 여태까지 적어도 최소한 한국에서 나온 책에서는 설명을 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을 저는 굉장히 아름답게 설명을 해 놨다고 자부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나오는 ‘의’입니다. ‘의’-디카이오쉬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의가 정의입니다. 그러면 정의를 구하는데, 사랑과는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제 딴에는 완벽하게 설명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옳고 그름입니다. 정의를 가지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 판단을 하면 죄를 지은 만큼 벌을 받아야 하고, 잘한 것만큼 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의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이 공평하게, 예를 들어서 요즘 화두가 되는 것이 정의인데, ‘이것이 정의인가?’ ‘정의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기회는 공정하고 과정을 공평하고 결과는 우리가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사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에 대해서 솔직히 우리가 분노하는 것 아닙니까. 돈 많은 사람이 잘살고, 높은 사람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우리의 불만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공평해야 한다. 왜? 왜 엄마 아빠의 찬스를 받고 있지도 않은 위조서류로 들어가느냐. 그것보다 더 나쁜 사람 많았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떨어져도 좋으니까.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폐해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뭐냐 하면 우리는 부자를 잘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부자가 된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승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피케티가 이야기했듯이 근대를 접어들면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하면, 노동을 하고 생산을 해서 벌어 내는 재산 증식의 속도를 돈을 굴리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돈을 물려주고 그냥 거들먹 다니고 골프치고, 이빨 쑤시고, 환락가를 누벼도 돈이 계속해서 돈을 생산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자체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승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못 살아서 한이 맺혀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너무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의에 대해 승복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정의의 문제가 미국에서 공론화된 것이 사실은 월가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품위 있는 직장에 다니고, 품위 있는 노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금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봤더니 아니,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포항제철이나 도로공사의 채권을 사놨는데 팍 오르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이익이 오르면서 그 돈에서 연금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져 0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벌어, 주급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상상한 적도 없었고, 일어난 적도 없었고, 일어난다고 예측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무엇인가 할 때 월가 사람들이 장난을 친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정의의 문제가 사실은 개인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거리가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이 정의다, 저것이 정의다 싸우지만 그것이 나의 소시민적인 삶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상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월가에서 누가 책임을 졌습니까? 그 사건이 터졌을 때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이야기를 하니까 거기 월가에 있는 원로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 잡자고 계속해서 따지다가 이 수렁에 계속 있을 것인가, 아니면 빨리 털고 나와서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그 월가의 탐욕들이 만들어 낸 것인데, 그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가 잘못했는지 가려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미국 사람들에게 꽉 새겨진 것이 뭐냐 하면, ‘아, 이 정의의 문제가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구나.’ 우리가 지금 그것을 이번에 몇몇 사건들을 보면서 경험하면서, 이 정의의 문제가 사실은 그냥 단순한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들, 딸들의 현실의 문제이고, 내가 지금 의사가 되느냐 마느냐, 대학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고, 직장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인국공 사태 같은 것이 그러한 것 아닙니까. 내가 직장에 취업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피부에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결국 그러한 것이 정의인데, 그러면 사랑은 반대로 이 사람도 덮어주고 저 사람도 덮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거기에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한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완성이 되는가 하면, 그것에 대해서 책에서 그림처럼 보여준 것입니다. 그 정의가, 내가 쟁취하고 내가 올바르게 살아서 얻은 정의라면 그렇게 자기보다 더 잘 산 그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을 것이고 자기보다 뭇 사람에게는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너는 나만큼이라도 좀 살면 세상이 이따위는 안 되었을 것이라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결국 신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였을 때 그 의는 모든 사람이 율법대로 살아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니?’ 그러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이룬 의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의롭게 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대목에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러한 것을 내가 받습니다. 나는 전혀 의롭지 않은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 아들이 너를 위해 죽었다.”하시면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용납해 주심으로 나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 속에 생겨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진실한 사랑이 생겨나고 나면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기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정의로운 삶을 살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꾸짖는 대신 그를 그리스도께 데리고 가서 결국 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율법적인 강제나 공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때문에 말하자면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라고 하는 것을 제 딴에는 완벽하게 설명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이 거기까지 읽어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어느 책에서도 저런 식으로 그림처럼 묘사해서 두 개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물론 명제적으로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연결 지으면서 그것을 풀어낸 것에 대해서는 보람을 느낍니다. 정의와 사랑이 어떻게 놀라운 하모니를 이루면서 결국 율법이 완성하지 못한 정의를 사랑이 완성하는가, 그림같이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같이 제가 잘 정리를 해야 하겠습니다. 목사님. 제일 중요한 말씀을 제가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더 드렸어야 했는데, 목사님 이야기에 빠져서 ….
다른 것을 다 제하고 나면 저 책에 존립 가치가 나는 그것이 가장 큰 골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려로 시작을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문맥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