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녹취자 : 박나리
I. 본문해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 에베소서 2장 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아멘.
때로는 허무감이 밀려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목적 없이 달려가는 경주와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그것을 망각한 채 허무하게 살아갑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되는 삶은 언제나 끝나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의심 속에 잠이 들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생활의 현장으로 내몰리고, 고민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따금씩 음식의 간을 보듯이 진리를 맛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몰리니 우리 자신은 급류에 떠내려가는 판자 조각 같습니다. 그러한 삶의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또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반복되는 삶에는 박수갈채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나의 삶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도 이런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를 믿은 것은 결국 다르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대로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다르게 살 길이 있다고 믿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라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라고 가르치니 도대체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요? 내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에 주체(主體)인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현대인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I. 현대인과 인생의 가치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현대인이 선택하는 가치는 두 가지입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입니다. 복음주의를 깨웠던 사람 프랜시스 쉐퍼는, 그의 유명한 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적 평안이란 … 다른 사람의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당하지 않고 …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 풍요는 …계속 높아지는 물질적 풍요의 수준에 의해 판단되는 성공을 뜻한다.” F. Schaeffer,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p.306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 이것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낮은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면 사회의 정의나 앞으로 후손들이 살아갈 사회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은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주의와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좇아가는 세속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삶은 전투적입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십시오. 전철에서 이미 지친 몸으로 직장에 들어섭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높은 효율과 치열한 경쟁에서의 승리를 요구합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탈락하여 도태됩니다. 도태된 사람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못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더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부유하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돈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인생의 무게가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나아지면 평안도 따라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이 재정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쟁사회에서 이겨서 재정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면 평안과 자유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최소한 필요한 물건을 살 때 궁핍함 때문에 어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부유한 사람들은 생계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한 생계형 범죄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생의 참된 가치를 찾지 못할 때 또 다른 형태의 어두운 면들이 나타납니다.
화면에 보이는 이 사람은 일본 온라인 패션몰 조조타운(ZOZO Town)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前澤友作)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올해 1월에 자신의 SNS를 팔로우하는 사람들에게 100억 원의 세뱃돈을 뽑아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매일 10명씩 뽑아서 100만 원씩 총 1,000만 원을 뿌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현찰 1조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SNS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라는 낮은 수준의 가치를 실현하고 나면 과연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바뀌지 않았는데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겪는 일을 부유한 사람들은 겪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인생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져서 육체의 생활이 다소 평안해졌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015년 7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애슐리 매디슨(Ashley Madison) 데이터 유출 사건입니다. ‘애슐리'와 ‘매디슨'은 외국 여자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애슐리 매디슨은 기혼자들을 위한 불륜 사이트였습니다. 평소 철통 보안을 자랑한다고 광고했지만, 2015년 7월 임팩트팀(Impact Team)이라는 해커 단체에 의해서 해킹됩니다. 전 회원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 신용카드 거래 내역 등 모든 신상이 털렸습니다. 회원 명단이 공개된 후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줄지어 이혼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정치계, 학계, 경제계 할 것 없이 수많은 지도자가 추문에 연루되어 사직하거나 쫓겨났습니다. 풍요롭게 잘살고,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인 캐나다의 인구 중 6%가 이 사이트에 가입했다고 합니다. 미성년자와 노년층을 제외하면 얼마나 많은 기혼자가 이 불륜 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68만 명의 가입자 명단이 공개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까요?
이 사건은 인생에 있어서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재벌 3세들이 약물중독 사건에 연루되거나 마약 사범으로 수사를 받습니다. 유명 재벌 3세들이 왜 그랬겠습니까? 모든 것을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데도 마약에 탐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연예인들이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수면제의 일종인 프로포폴을 맞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일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평안과 풍요에 도달하고 나면 인간에게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평안과 풍요는 목표가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버리면 인생의 질서는 위아래가 뒤집히게 됩니다. 수단이 목표가 되고 목표가 수단이 되면, 급기야 하나님도 이용하고 종교도 이용해서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삶의 질서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겠죠. 결국 악은 질서가 뒤집힌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고통이 재생산됩니다.
현대인들은 평안하게 살고 싶으나, 풍요롭게 살려는 욕망은 포기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풍요를 추구하면 평안을 누리기 어렵고, 평안을 추구하면 욕망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없음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낭독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 노래는 지난 세대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이지 않아 보일 것입니다. 함께 영상을 보실까요?
(영상)
일곱 송이의 수선화 나는 멋진 집도 없고 땅도 없답니다.
손에 움켜쥔 지폐조차 없답니다.
그렇지만 난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들 위로 밝아오는 아침을 보여주면서
입 맞추고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릴 수 있답니다.
난 당신에게 화려한 것들을 사줄 재산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달빛을 엮어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줄 수는 있답니다.
아, 일곱 송이 황금빛 수선화는 햇빛 속에 빛나다가 사라지겠지요.
우리 함께 있는 하루가 저물 때가 되면은요.
그때 나는 당신을 위해 내 노래 한 곡조와 빵 한 덩어리,
그리고 베고 누울 소나무 큰 가지로 만든 베개를 드릴게요.
아직도 이런 노래를 부르며 낭만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이 고맙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지난 세대의 소설 속에나 나오는 순애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특히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텔레비전 혹은 영화관에서 가끔 감동 받고 싶은 삶이지, 자신이 직접 살고 싶지는 않은 비현실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하루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때가 되어 마른 빵 한 덩어리에 가수도 아닌 남편의 노래 한 곡조를 들으면서, 소나무 가지로 만든 베개를 베고 잠드는 밤의 불편함을 과연 현대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부유하게 되려는 노력과 개인적 평안은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도록 태어났습니까?
어떤 물건의 존재 목적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만든 사람이 자신의 쓸모에 따라 그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급해도, 앞서서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III. 나는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리 없습니다. 자신만을 들여다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며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을 위대한 작품임을 모릅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목적을 알아야지 어떻게 살 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답을 줍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A. 하나님이 만드심
첫째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생겨난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만드신 바'로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성경에 한 단어로 표시되어 있는데, ‘포이에마’(poiema)라는 단어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와 그리스어 성경에 모두 ‘작품'을 가리키는 말인데, 항상 '신의 작품'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예술작품처럼 만드셨습니다. 완전히 선하시고, 완전히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니, 졸작을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결함이 있는 예술품을 창작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장인의 손끝에서도 명품이 탄생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어찌 최고의 걸작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예술작품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은 작가에게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만이 완전한 의도를 가지고 창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 작품을 보면서 이런저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의견일 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걸작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에서, 심지어 이교도 신앙에서 그것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는 자기를 창조하신 그분을 향하여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지 몰랐고,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록 제1권 5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리하지 않으면 제게 진노하고 커다란 비참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 - A. Augustinus, 「고백록」, 1.5.5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솜씨에 의해 만든 바 된 걸작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상하시기 위해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걸작품은 누가 손대지 말고 반드시 원작품 그대로 있어야만 합니다. 인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소중한 미술 작품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일 것입니다. ‘도대체 모나리자 그림 한 장은 값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960억에 팔렸고, 뭉크의 절규는 1,300억까지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비교될 수 없는 모나리자가 경매에 나오면 얼마나 될까요? 누구의 이야기도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작품을 팔겠다고 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62년에 감정사들이 시험 삼아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 당시 가격으로 7천억 정도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금값으로 계산하면 현재 5배 정도 올랐으니까 3조 5천억쯤 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격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몇몇 사람이 자기가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라며 모나리자의 값이 1경 4,000억쯤 된다고 합니다. 1만 4천조 원쯤 되는 것입니다. 팔 리가 없으니까 가격이 형성될 리가 없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사우디아라비아 부자의 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1천조라고 하는데 그것을 모두 정리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그림이 바로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웃을 듯 말 듯, 아무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인류에게 남겨진 단 한 장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원본에 누군가 낙서를 해서 저렇게 훼손했다면 박물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 유산을 사랑하는 전세계 모든 사람이 분노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입니다. 그림과 조각은 한번 만들면 멈춰 있지만, 여러분 자신은 걸작품일 뿐만 아니라 걸작품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입니다. 그런 걸작품에 우리는 매일 매일 낙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짓을 하는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가는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진 '나'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걸작품인 내가 훼손되었습니다. 콧수염을 그린 정도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게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분이 만들지 않은 또 다른 '나'입니다. 바로 나를 병들게 하는 '나'입니다. 책임져야 할 것도 '나'이니, 나로서는 내 힘을 가지고 나에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있지 않고 걸작품을 훼손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걸작품을 훼손했을 때 끔찍한 질병과 감염병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훼손했을 때 그것들이 뭉쳐져 일어나는 사회현상이 우리가 보는 고통스러운 세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시려고 만드셨을까요?
B. 선한 일을 위하심
선한 일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그런데 우리는 죄 때문에 그 목적대로 살 수 없게 병들었습니다. 병든 우리를 고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망가진 작품으로 살지 않고 걸작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살도록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6개월 된 어린 아기, 정인이를 양부모가 학대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직접 취재한 KBS의 기자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도된 것은 지극히 일부이고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차마 떨려서 입으로 옮길 수가 없다.” 우리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학대가 있었음을 암시했습니다. 췌장이 끊어지고 장기가 파열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아이에게 가해졌는지, 죽는 순간까지 아이가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고, 그 아이를 학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부모가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학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부모의 인간성은 철저하게 망가졌습니다. 자신들도 망가진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 어떻게 항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구원하여 훌륭하게 재창조했다고 할지라도 죄를 택하면 인간이 도달하지 못할 악의 세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을 보십시오. 누군가 정인이의 무덤에 찾아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망가지고 나면 못 할 일이 없고, 창조 목적을 떠나 삶의 질서가 뒤집히게 되면 저지르지 못할 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찾는 착한 본성과 그분 없이 살려고 하는 미친 기운이 우리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삼겹살과 같습니다. 제일 위에는 겉보기에 선한 인간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를 뒤져보면 추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면 인간을 향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하는 자신 또한 그런 추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언젠가는 그 본성이 발현되었고, 터져 나올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더 밑으로 가 보면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있습니다. 희망을 갖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추악한 본성을 아시고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저 밑바닥에 있는, 당신을 닮은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지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 나가 보았습니다. 책들의 바다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책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250종 정도의 책을 찍어 낸다고 하니,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지식 덩어리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 내 책 한 권을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지식의 바닷속에서 삽니다. 쏟아지는 책 중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책이 우리의 눈길도 끕니다. 돈 잘 버는 법, 빨리 직장에서 출세하는 법, 주식 대박 나는 법, 10살 어려 보이는 화장법, 실컷 먹고도 살 안 찌는 다이어트 방법, 꿀잠 자는 법, 동네 맛집 찾는 법, 노후 자금 마련하는 법, 100만 유튜버 되는 법 등등의 지식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것들을 한 줄로 요약하면 육신으로 세상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단 한 줄의 대답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지식들은 결코 죽어도 지속될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해답이 아닙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걸작품인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위대한 작품인데 쓰레기 더미에 던져진 것처럼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무게로 달려서 고물상에 팔려나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려고 나를 만드셨으니, 창조된 세계가 보석으로 만든 면류관이라면 우리는 대관식에 앉은 왕입니다. 면류관 때문에 왕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즉위하는 왕 때문에 면류관이 빛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왕은 최종적인 왕이 아닙니다. 더 높은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의 뜻을 따라 세계를 돌보고 가꾸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 때 걸작품으로서의 진가가 드러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선(善)으로 가득 채우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죄 때문에 망가져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인간의 존재는 가장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이 누려도 후회하지 않는 행복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그분 앞에서 그분의 뜻을 위해 태어났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섭니다. 거기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걸작품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궁극적인 행복을 누리게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설교를 들으며 생각을 동원하여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 찾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서입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그것을 토대로 선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자, 이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미친 듯이 매일매일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에 확 죽어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괴롭고, 생각하는 것도 힘들고, 답을 알아도 그대로 살기 싫어서 놀이와 향락으로 이 괴로움을 잊어버린 채 살다가 술에 취한 듯 죽어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이 질문에 자신 스스로는 답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조용히 무릎 꿇으시겠습니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걸작품으로 지으신 하나님께 최종적인 대답을 들어보기 위해 그분께 드리십시오. 아무도 여러분의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결코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주체로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죽을 것인가? 놀이와 향락으로 술 취한 것처럼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오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는 나에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들이 선택하여야 할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특강을 통해서 저희들이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시고 또 저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먼저 지혜자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먼저 깨닫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먼저 행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길을 잃은 저들에게 가르치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하나님을 찾게 해주옵소서. 세상으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IV. Q&A
어떠셨습니까? 통역을 하지 않으니까 좀 편하지 않으셨어요? 대답해 보세요. 자,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미리 보내주신 질문을 올리고 답을 하겠습니다.
인생의 가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고 연구함에 있어서 급한 마음으로 진행하지만 듣는 자들은 급한 마음도 심지어 중요시 하지 않을 때 어떻게 이런 상황을 대해야 할까요?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이 인생의 가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무관심해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관심사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의 마음이 무디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생활의 염려로 방탕한 삶으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살갗이 있습니다.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꼬집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겠죠? 심지어 칼로 베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합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일을 멈추면 안 됩니다. 더 쉽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려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중국인 사형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업가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지런히 밑바닥부터 생활했습니다.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재산이 7조원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돈으로 하면 얼마쯤 될까요? 목사님이 계산해서 말씀해주세요. 그 정도면 어마어마한 부자죠? 그런데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높은 사람들과 결탁해서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제거했고, 그 과정에서 6명이나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윗사람이 무너졌습니다. 보호해줄 사람이 사라졌던 것이죠? 죄는 드러났습니다.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사람의 최후 진술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미쳐서 살았습니다.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조그만 가게 하나 차리고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해주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찾아내십시오. 여러분들의 교인이 이해하는 수준으로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전달하십시오. 그리고 논리적으로 말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는 성령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한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인생의 문제를 근원부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먼저 인생의 의미를 알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목회입니다.
2.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무주의자였는데 주님을 믿고 난 뒤에도 항상 우울하고 허무감을 느끼는데 이것은 믿음과 인식의 문제입니까?
이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목회자 본인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목회자가 돌보는 지체의 이야기일까요? 만약의 목회자 자신의 이야기라면 심각하겠죠?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아마 목회자 자신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분은 자신의 영혼의 회복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신앙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결심해야 합니다. 은혜를 주시도록 그리고 이런 우울감과 허무감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교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정신과 감정을 받아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마음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와 영혼, 모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 육체적으로 잘못되면 이런 정신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정신과 검증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정신과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검진을 받고 뇌나 정신, 신경 등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문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아서 나의 이런 마음의 증상이 혹시 의학적인 원인에서 온 것은 아닌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허무하고 우울한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건서적을 읽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영혼의 일기를 쓰고, 기독교 위인들의 전기를 읽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고, 은혜로운 찬양을 부르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아주 훌륭한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문제일 수 있으니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접근해야 합니다.
3. 인생의 큰 원칙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이 생을 더 잘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사람들이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비전을 확립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쓰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주고, 이미 믿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경이 바로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잘 가르쳐주도록 그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비전을 확립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린 것이 비전입니다. 안 믿는 자는 믿게 하고, 믿은 자는 선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죠. 이 질문은 너무 광범위해서 한 마디로 답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를 제공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시리즈를 우선적으로 번역해서 자막을 달아서 여러분들이 접속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1번부터 지금 4번까지 왔는데 계속 따라오시면서 듣는다면 여러분들이 더 이해하시기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6번 내지 8번 정도 더 진행될 것입니다. 따라오면서 들으십시오. 그리고 공부하십시오. 소화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말로 가르치십시오.
4. 선행은 무엇입니까? 선행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가요? 이 시대의 선행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선행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가요?
여러분은 이미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모두 갖고 계실 것입니다. 없으신 분들은 목사님에게 연락하십시오. 파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앞부분에 보면 ‘선이라는 무엇인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십시오.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성경과 함께 말입니다. 불과 몇 페이지 되지 않습니다. 금새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선행이 무엇일까요? 선행은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착할 선, 행할 행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모를 바가 없겠죠? 손발을 움직여 행동하거나 심지어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마음속으로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죠. 이렇게 행한다는 것은 행동이나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이 무엇일까요? 그 선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악은 그것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은 인간이 받아들이고 그 선의 목적에 맞게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우리를 그렇게 선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원래 인간을 지으신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선행의 가치는 하나님이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아주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가서 예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값비싼 화초와 아름다운 물고기를 넣은 연못도 만들었습니다. 왕의 정원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일꾼들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잘 가꾸도록 불렀습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들이 만든 동산을 파괴했다고 생각해봅시다. 제일 아끼는 꽃을 꺾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비싸게 사다놓은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죽였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풀밭을 밟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분노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어떤 일꾼은 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훨씬 더 아름답게 가꾸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상주고 싶겠죠. 이것이 바로 선을 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렇게 선을 행하며 사는데 때로는 손해를 봅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죠. 때로는 모함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선을 행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다른 삶을 산다, 궁금하다, 왜 그럴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믿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비 그리스도인의 선행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본질적인 구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비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어떻게 다를까요? 정답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그것이 올바른 선행이라면 하나님 사랑이 동기가 되지만, 비그리스도인의 선행은 하나님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습니다. 삼국지 시대를 생각해볼까요? 한나라와 촉나라와 오나라가 있었죠? 그런 나라들이 서로 자기의 애국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애국적인 행동은 그 나라에서는 너무나 칭찬받을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천인공노할 악이었겠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조조입니까? 유비입니까? 아니면 여포입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들 중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악인이었고, 유비는 선인이었다, 여포도 악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다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선은 시대마다 기준이 바뀌고 나라마다 바뀌게 됩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늘 배웠습니다. 절약이 미덕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비가 미덕입니다. 적당히 돈을 써야지만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하고 그래야만 일꾼들이 월급을 받고 사회가 돌아가게 됩니다. 만약에 거의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고 승려 같은 사람이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면 중국은 발전할 수 없겠죠?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 계속 선의 기준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하나님께 충성스러웠던 사람은 지금도 본받을 만 하고 천 년 후에도 본받을 만 합니다. 세상 끝 날까지 그럴 것입니다. 변함없는 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한 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대답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