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2부
녹취자 : 김세나
[김남준 목사님] 팡세라는 이름은 ‘생각한 것들’. 그때의 신앙심이 뜨거웠던 이 파스칼은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변증하는 목적으로 이 책이 쓰여진 것입니다.
[진행자] 네, 좋습니다. 본격적으로 팡세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우주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진행자] 그래서 비참하다.
[김남준 목사님] 미천하다. 미천한데, ‘미천하다’라는 것은 존재론적 상태이고, 모기 하나 잡아서 우리가 손으로 문지르면 생명이 끝나듯이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하는 말 밑에다가 뭐라고 적습니까. 온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서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수증기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 그게 인간의 존재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미천인데, 그런데 미천하기만 하면 어떻게 그런가 보다 하고 살겠는데, 게다가 비참합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은 비참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순식간에 죽으면 모두 다 끝이 나서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렇게 비참한 인간인데, 그런데 그 인간은 사실 비참하기 때문에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양면적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양면적인 것입니다. 불행과 비참에서 위대함과 행복으로 연결해주는 고리가 뭐냐 하면, 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게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그러한 식으로는 신을 인식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행자]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해서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한 식으로는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도 아예 자기의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해 버립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은 어떻게 이성과 조화를 이루고 찾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것은 데카르트의 관심 밖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파스칼)은 두 가지를 만나게 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느끼는 심정을 가진 존재로서 이 두 개가 유기적으로 활동하면서 인간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생각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러분들에게 단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보겠습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그 어떤 괴수인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저능한 벌레, 진리의 수탁자이자 불확실성의 오류이자 시궁창, 우주의 영광이자 쓰레기.” 그래서 팡세를 시작하면서 이 파스칼이 인간의 위대함을 먼저 말하기 전에는 비참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뒤집어서 ‘비참’만 말해 버리면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를 하고, 비참을 이야기하라. 그러면 그 위대함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한번 퀴즈를 내 보겠습니다. 오늘은 뒤에 앉아있는 형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두 평짜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침대 하나와 밥통 하나, 변기 하나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수감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노숙자로서 소매치기로 걸려 수감되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권의 최정상 가까이에 있어서 천 억짜리 집에 살다가 떵떵거리던 사람이 부정이 발견되어서 결국 투옥되었습니다. 누가 더 고통스럽겠습니까.
[답변자] 아마 정상에 서 있던 사람일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네 그렇습니다. 본인이 그 사람화 되어서 감옥에 갇힌 느낌을 말해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답변자] 아주 비참할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답변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진행자] 죽고 싶을 정도일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확합니다. 아, 내가 이런 상황을 견디느니 죽어야 하겠다. 그러면 그 앞에 자매님에게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대가 되어 보십시오. 그대가 노숙자였습니다. 진짜 박스를 깔고 신문을 덮고 자야 하는 처지였는데, 구속되어서 ‘난 이제 죽 노동이나 하나 보다’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난방이 다 되고 그 다음에 수세식 변기 있고, 깨끗하게 정리된 모포도 있고, 편안하게 전기도 들어옵니다.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답변자] 나가기 싫을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야, 죄짓기 잘했다! 내가 죄를 안 지었으면 어떻게 할 뻔하였을까? 그러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너 내일 가석방 시켜 줄게.” 했을 때 좋아할 것 같습니까? 싫어할 것 같습니까?
[답변자] 안 된다고 할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파스칼이 이렇게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처지는 폐위되어서 노예가 된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런데 원래 자기의 신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처지려니, 운명이려니 생각하는데 너의 원래 신분은 그러한 신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사람 안에 함께 있으면서 두 가지 신분과 상태가, 신분은 왕인데 상태는 노예입니다. 그리고 정신은 진리를 찾아가는데, 육욕은 오류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우주의 영광이면서도 동시에 지구가 빨리 제거되어야지만 지구가 정화될 그러한 존재인데, 이 극단적인 모순 속에서 파스칼이 울부짖는 이야기는 마치 이것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Oh miserable man that I am.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렇게 울부짖었던 사도바울의 심정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을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낄 것입니다. 잘 한번 곱씹어 보십시오.
“현상의 이유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있는 세상입니다.
“현상의 이유는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낸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니, 세상이 개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죄인들도 많고,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사상이나 이러한 것들이 망가져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명을 붙이는 것이, “사욕에서 사악한 욕심을 가지고도 그러한 훌륭한 질서를 만들어 내다니!” 그러니까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행자]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 계속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개는 아무리 개같이 살아도 개입니다. 개를 보고는 개만도 못한 자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로도 못 올라가고 아래로도 못 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만도 못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인간이어야 하는데, 개처럼 되었을까? 그것에 포인트를 맞춘 것입니다. 왜 개처럼 되었는가 하면, 그것을 자신이 도덕적으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각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거대한 문명은 인간이 그 위대성을 발휘해서 그러한 쓰레기 같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어보고자 자기의 사적인 욕심에 의해서 항구적인 자신의 세계를 건축한 것이 말하자면 하나님 없는 불신앙의 세계의 모습이다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음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1부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 없는 인간의 비참함, 그리고 2부에서 신안에 있는 인간의 행복으로 넘어가는데 그것을 세 개로 전개할 수 있습니다. 1부 맨 앞부분에 보면 우주를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똑바로 쳐다보면 미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그리고 안 미쳐도 결국 미쳤기 때문에 안 미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면서 미칠 수도 없고 안 미칠 수도 없는, 미쳐도 미친 것이고, 안 미쳐도 미친 것인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인식하는데 그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철학자들에게로 이야기가 옮겨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꼈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였는가, 그것이 이제 위대한 철학자들을 찾았던 것을 보면서 최고의 선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성공하였다면 신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서 설명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세 번째 그림입니다. 이성으로는 이렇게 상승해서 신에게 겨냥하고 갑니다. 그런데 결국은 안 됩니다. 꺾여집니다. 그런데 심정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깊은 속을 꿰뚫어 보면서 통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신에게로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끔 되어서 이렇게 신앙으로 상승되었던 심정적 인식이 다시 그 사랑을 가지고 아래로 하강하면서 모든 인간과 세계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진행자] 미천함과 비참함을 벗어날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유일한 길,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 단장을 보겠습니다. “자연은 그것이 신의 그림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이 신의 그림자일 뿐임을 나타내기 위해 결함을 가지고 있다.”
(찬양) 저 푸른 하늘에 수많은 별들도 주 하나님의 사랑을 늘 속삭이지요.
주일학교 때 많이 불렀던 찬송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거스틴이 쓴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게 아니고 나중에 쓴 것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후자가 맞을 가능성이 많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다.” 그래서 거기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질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질서,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고 모든 것들이 완전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자연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림자를 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알듯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행자] 그렇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자연을 보고, 우주를 봅니다. 별들이 너무 신비하고 별들이 너무 질서정연하고, 충돌하는 법도 없고, 너무 별빛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우리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셔서 통곡하고 탄식하는 내 마음을 그 자연이 위로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연에 결함이 있어서 좋은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키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이 아니라 그림자일 뿐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와 그 다음에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무질서 사이에서 결국 이 두 개를 통합하는 뭔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단장 283을 보겠습니다.
“세 정욕이 세 학파를 만들었다. 철학자들은 단지 이 세 정욕 가운데 하나를 따랐을 뿐이다.”
그게 뭐냐 하면, 스토아주의, 허무주의입니다. 이 허무주의이고, 그 다음에 피로니즘은 회의주의입니다. 불가지론입니다. 피론이라는 사람에 의해 유래된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 두 개는 인간의 비참을 너무나 잘 보고 그 대신 거기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무신론은 뭐냐 하면,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함 하나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결국 어느 쪽 한쪽을 포기하고 치우칠 때, 인간은 진리로부터는 멀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신이 있는 증거를 대라고 할 때 그것은 말이 다른 것입니다.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자]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제가 밤중에 신학생 시절 전철에서 전도를 하는데 심야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당신은 그러면 신을 본 적이 있어?” 물어봅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습니까? 만약에 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너도 못 본 것을 우리에게 전하는가 했을 것이고, 봤다고 하면 보여 달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봤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못 봤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답변자] 못 봤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못 봤다고 말하면 너도 못 본 것을 왜 전하느냐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봤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양심이 있다고 조금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답변자] 네.
[김남준 목사님] 그런데 그것을 외과 의사가 증명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엎어 놓고 톱으로 내장을 갈랐습니다. 마지막에 고무장갑에 빨간 피를 묻히고 나서 “거짓말이네. 어디 양심이 있어? 창자, 콩팥, 이런 것은 다 있는데 양심은 없잖아.” 그게 바로 이성의 한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해부학적으로 있는 핏줄과 살을 가진 장기가 아니라 정신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의 증거는 사실 우리가 콩팥이 왼쪽에 있는가, 오른쪽에 있는가, 아니면 간이 왼쪽에 있는가, 오른쪽에 있는가보다 더 명확하게 혹시 우리 장기는 여태까지 알려진 것과 위치가 바뀔 수 있어도 사람에 따라서,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부인은 못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 신을 알 때 그렇게 과학적인 이성의 논리로만 신의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양심을 찾겠다고 수술실에 사람을 넣고 배를 가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게 제 마음을 때렸던 문장입니다.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심정은 자기가 열중하는 데에 따라서 보편적 존재를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를 마음을 때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자동차를 탑니다. 정면충돌을 할 때 운전사가 죽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아니면 조수석에 탄 사람이 죽을 확률이 높겠습니까?
[진행자]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죽을 확률이 높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예를 들어서 둘이 사랑을 합니다. “생명도 널 위해 줄 수 있어.” 그런데 정면 충돌 하는 순간에는 운전대를 자기 쪽으로 본능적으로 꺾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 생각할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꺾습니다. 결국 조수석에 탄 사람은 죽습니다. 꼭 죽는 것은 아니지만, 확률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입증할 필요가 없는 것이, 내가 회의한다면 내가 존재한 것만큼 굉장히 명료한 명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논리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너는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신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그러면 너는 어디 있는가? 아, 나는 열린 교회 있지. 그것 말고! 그런 대답이 아닌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 않습니까. ‘너’라는 자아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 안에. 그러면 공간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논리가 있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논리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을 사랑하든지 결국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둘 다 모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매 순간 신이 있느냐 없느냐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도덕적인 결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현실적인 적용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성경으로 보면 어디에서 만들어집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디에서 만드십니까? 무슨 재료를 가지고 만드십니까?
[진행자]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흙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파르’라고 나옵니다. ‘아파르’ 이것은 티끌입니다. 먼지. 이런 벽돌 만드는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먼지. 먼지가 함유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의미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결국 모든 것들은 없는 것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결국 없는 것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자, 집에서 자기 방을 쓰고 있습니까? 청소를 얼마에 한 번씩 합니까?
[답변자] 저는 하루에 한 번씩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굉장히 깔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레질을 합니까?
[답변자] 네.
[김남준 목사님] 특히 책장 같은 곳에 걸레질을 합니까?
[답변자] 잘 안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청소하면서 걸레질을 하면 짙은 색의 걸레로 청소를 하다 보면 뭐가 나옵니까? 먼지가 나옵니다. 먼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털’입니까? 사물이 부서진 것입니다. 피부가 부서진 것일 수도 있고, 책이 부서진 것일 수 있고, 그 다음에 플라스틱이 부서진 것일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입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확장을 해서 만약에 수만 년을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지가 뽀얗게 쌓이면서 모든 물건들은 먼지로 환원이 되는 것입니다. 먼지를 더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지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결국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에 화학 기호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매가 지금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 손톱 중 어떤 원소는 수 만 년 전에 코끼리 콧등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솜털이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한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시하면 인간이 너무 무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욕망론을 이러한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인간이 무지무지하게 경쟁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것에 막 오르려고 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진행자] 어떤 이유이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 이유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허무로부터 와서 무한으로 가는데, 자기는 우주를 쳐다보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을 드렸고, 미쳐서 안 미치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을 똑바로 보면서 인간은 살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라고 개념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별로 없는데 ‘기분전환’ ‘기분돌림’ 그 다음에 ‘마음돌림’ ‘오락’ ‘다른데 정신 팔기’ 이런 뜻입니다. 저는 그것을 회피라고 봅니다. 그것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회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많고 권력이 높고 지위가 높으면 많이 회피할 수 있습니다. 회피하는데 다 돈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끝나고 가다가 오늘 만난 것도 인연인데, 피시방 가서 한 게임하고 갈까, 이야기한다면 이것도 돈을 내야 합니다. 당구장에서 당구를 친다 해도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집중하지 않고 ‘디베르티스망’하기 위해서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지위와 재물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바늘구멍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결국 이 회피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에 전혀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똑바로 인간의 비참과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렇게 하고 살아가면 기독교로 말하면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고, 다른 종교로 말하자면 득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해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십만 명 중 한두 명이 갈까 말까 한 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위로가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맨정신으로 살 수가 없는데, 우주를 보면서 ‘아, 순식간에 사라질 존재인데….’라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중고등학생 때 예쁜 사진 탁 놓고, 나를 한번 거울에 비춰보면 ‘아, 세월이 흘렀구나.’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을 느끼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위로를 안 받고서는 맨정신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아라.” 말합니다. 그런데 너 자신이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위로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겠습니까? 반대로 너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네가 생각지도 않았던 데로부터 위로가 올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그것이 이제 신앙이 그것을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진정한 위로가 신앙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말하자면 그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너의 위로는 너 자신으로는 안 된다. 이것을 읽으면서 사실은 현대 젊은이들이 꼭 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죽은 자들의 방 청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사람 직업이 시체 치워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고독사 하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가보니까 이미 죽고 시체가 다 구더기가 든 상태인데, 외롭게 죽은 사람의 책꽂이에는 예외 없이 위로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너무 외로우니까 책을 뒤져서 “괜찮아. 그 모습 그대로 살아. 너는 희망이 있어.”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고립사 되어 가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울컥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은 결국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위로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시각에서 오늘날 우리의 도서계를 보면 지금 딱 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갑니다. 빨리 수술대에 눕히고 얼른 빨리 떼어 낼 것을 떼어내고 봉합을 해서 약을 발라줘야 이 사람이 살 텐데 마취제와 마약을 계속 주면서 몽롱한 상태로 들어갑니다. 용감하게 똑바로 보고 자기가 얼마나 미천하고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오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단장이 나옵니다. 이것도 명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바 되지 않았다면 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이 신을 위해 지음을 받았다면 왜 그토록 자기를 행복하게 할 신을 거역하는가?” 인간이 그렇게 역설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불행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 있고, 행복은 자기를 찾는 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찾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국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결국 이것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무리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파스칼의 유명한 ‘불의 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단장에 나오는 그대로를 인용한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쓴 것입니다.
“1654년 11월 31일 밤..”
이것은 그가 31살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이 시간도 자신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는가 하면,
“철학자들과 식자들의 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복종.” 등등이 나옵니다. 이 단장이 없었습니다. 써 놓은 것이 없었습니다. 파스칼이 39살에 죽었습니다. 시신 수습하다가 외투 안에서 뭔가가 발견되었습니다. 뜯어보니까 속에 뭘 하나 꿰매 놓았습니다. 양피지를 옷 속에다가 꿰매 놓았습니다. 거기에 이것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날 이후로 그는 더더욱 자기 자신을 온전히 헌신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추구하고 살겠노라는, 말하자면 엄청난 전환을 이 사람의 생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늙을수록, 나이가 들고 죽음이 가까울수록 그의 사랑은 더욱 열렬해졌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이 마지막을 마무리하면서 파스칼이 너무 인간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 인생을 우주론적으로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간의 존재를 밝히고자 하는, 만약에 이것-팡세가 작품으로 나왔다고 하면 엄청난 우주론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그는 과학자이고, 수학자이고, 기하학자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도 있습니다. 이미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니까 그 모든 것을 종합적인 학문을 사용해서 쏟아내는 글들을 썼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파스칼이 마음으로 깊이 흠모하고 공감했던 기독교의 위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어거스틴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나옵니다. 유산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주님을 만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다 사용하고,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돈을 버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번다. 그래서 발명을 하고 돈을 벌면 그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가 죽어가는데 위탁할 곳이 없는 사람을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습니다. 아동들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돈이 다 없어졌습니다.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 책들까지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팔아서 양식을 대면서 그 사람들을 먹여 살리면서 살았는데, 끝까지 팔지 않았던 책이 있었습니다. 성경과 어거스틴의 책, 그리고 성경주석이었습니다. 성경과 성경주석을 하나로 본다면 사실 사람이 쓴 책 중에는 끝까지 안 팔고 그가 죽을 때까지 간직했던 책이 바로 어거스틴의 책이었습니다. ‘또르 르와야리’라고 하는 수도원과 이 사람의 관계도 있는데, 그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인간은 비참한 동시에 위대한 존재입니다. 두 번째, 인간의 위대함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간에 있으면 그냥 먼지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일 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이야기해 봐야 2m에 150㎏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벌레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공간이 아니라 사유함에 있습니다. 우주는 나보다 더 크지만, 생각 속에서는 우주는 나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래서 결론은 삶으로 삶을 비춰 보지 말고 죽음으로 삶을 비춰봐라. 그리고 가짜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강의를 다음 단장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단장 751번입니다. “너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나와 비교하거라.”
여기에서 ‘나’는 파스칼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진행자] 아, 주님이요?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인생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못 찾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쟤는 금수저 물고 태어났는데….’ ‘쟤는 결혼할 때 아빠가 밀어줘서 집도 사서 간다는데….’ ‘쟤는 머리가 좋아서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옛날에는 나와 똑같았었는데 아니 결혼하고 7년 만에 만났더니 나는 할머니를 향해 가는 아줌마가 되어 있고, 쟤는 10대를 향해 가는 아가씨가 되었어! 어떻게 할까?’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그것은 인간의 고뇌와 슬픔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정의롭게 살려고 애를 썼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런데 이 안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너는 나와 비교하라.”라는 이야기는 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과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자,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저 형제를 보면서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혹시 부잣집에서 태어나거나 모든 면에서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갈 사람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위축되고 좌절하는 것을 느낀 적 있습니까?
[답변자] 열등감 비슷한 것이 생깁니다.
[김남준 목사님] 어떤 때 그런 것이 생겨납니까?
[답변자] 제가 꾸준하게 해 왔고, 제가 잘해 왔다고 생각한 부분에 있어서 저보다 더 월등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러한 것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라는 영화 보았을 것입니다. 모차르트 이야기입니다. 살리에리는 어쨌든 열심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엄청나게 노력해서 작곡을 해서 보여줍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보더니 “그래요? 이거 어때요?” 쳤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오래 작곡한 것은 잊어버리고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외치는 살리에리의 전류에 가까운 비명 있지 않습니까. “신이여! 당신을 섬기게 했으면 재능도 주셔야지 왜 나에게는 재능은 안 주셨습니까?” 하면서 I am the Champion of ordinary man. 나는 모든 평범한 사람의 챔피언이다. 그러면서 절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영화를 볼 때, 살리에리의 심정이 이해가 되면 보통 사람이고 모차르트의 심정이 이해되면 천재입니다.
[진행자] 저는 보통 사람입니다. 목사님은 어느 쪽이셨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저는 말 안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의 인생의 참된 의미는 뭐냐 하면 끊임없이 예전의 자신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이 자기보다 나아졌으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하고 감사하고, 부족했으면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보다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이 세상에 두고 가고 버리고 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상상치도 못하였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마감하고 죽음이라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유명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여러분들에게 이 강의를 마치려 합니다. 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팡세에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지금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오락,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시간 뒤에 죽기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지 안 죽는지 빨리 알아보고 자기가 조치를 취하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도박이나 놀이,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한 시간 뒤에 자기가 안 죽을 수도 있지만 혹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놀던 것을 다 때려 치고 ‘야, 나 죽어 안 죽어?’ 그것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아보고 안 죽게 되면 다행인 것이고, ‘아, 그랬구나.’ 하면서 하던 것을 하면 되고, 죽는다고 하면 빨리 조치를 취해서 안 죽는 것으로 해 놓고 여기 와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 시간 안에 죽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 와서 이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확률이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을 합니다. 불신자들, 회의론자들이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서 깊이 동정을 합니다.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정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너에게 묻는다.” 둘 중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신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너가 가본 것도 아니고 경험해 본 것도 아니니까. 결국 당신이 아무리 없다고 해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러면 신을 믿어서 너가 무슨 손해를 보는가, 이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무슨 손해를 보는가?’ 네가 신을 믿으면 나중에 가봤는데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을 믿고 살면 너는 여기에서 우리말로 참하게 살 것이고, 착하게 살 것이고, 나쁜 놈 소리 안 들을 것이고, 죽어서 그 사람을 칭찬할 것이고, 어쩌면 도덕 교과서에 나올지 모른다. 우리말로 표현을 하면 말입니다. 무엇이 손해 보는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여태껏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혹시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여태까지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서 네가 남은 것이 있다고 치자. 쾌락을 즐겼고, 양심의 가책도 덜했고…. 등등했다고 치자. 요만큼 남았다고 치자. 그런데 저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을 다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뭐가 너에게 이로운지 생각해봐라. 결국 확률론을 동원을 해서 신앙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이 그것입니다. 몽테뉴는 “삶으로 삶을 비춰봐라.”고 말한다면, 파스칼은 “삶을 삶으로 비춰보면 삶의 색깔을 알 수 없다. 죽음의 빛으로 삶을 비춰봐라. 그러면 삶의 색깔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가짜 행복을 바라다가 멸망하지 말고 참 행복을 찾아서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라.”
이상 마치겠습니다.
[진행자] 일단 박수를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긴 시간 동안 파스칼의 「팡세」를 풀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저는 시간을 안 봤는데 얼마나 흘렀습니까?
[진행자] 꽤 오랜 시간 풀어 주셨는데, 너무나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목사님의 설명을 통해서 「팡세」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조금 이해가 되지만, 사실은 파스칼은 당대 굉장히 아까 이야기해 주신대로 다방면에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자, 과학자였는데 사람들은 이 신앙, 신에 대한 탐구 때문에 그 부분을 소홀히 여겨서 안타깝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가가 성립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어느 면에서는 니체 같은 사람이 이 「팡세」의 인간론을 보면서, 사실은 참 재미있는 것이 「팡세」를 잘 읽어 보면 실존주의 작품들, 문학이나 철학서들을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결국 파스칼에게 빚지고 있다고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아주 섬세하게 인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파스칼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의 비참함, 그것만을 딱 따다가 이렇게 비참한 존재다,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꼭 필요한 존재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실존은 본질을 선행한다.”는 말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따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체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니체는 이 사람은 너무 천재성이 있고, 인간에 대해서 기가 막히게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냥 인간을 그렇게 고민하면서 나아가서 신이 없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렀으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 텐데, 그리고 아예 그쪽으로 안 가고 과학 쪽으로 갔어도 어마어마한 더욱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을 텐데 결국 하나님을 믿어 버린 것이 니체로서는 이 사람(파스칼)의 대실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수학자로서의 어마어마한 재능을, 있지도 않은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정말 애석한 일이다. 천재의 낭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진행자] 꼭 그렇게 보지 않는 관점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당연합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 관점이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과학자로서의 파스칼보다는 사상가로서의 파스칼을 통해서 오히려 인생에 대한 해답을 더욱 얻게 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진행자] 좋습니다. 자, 그러면 파스칼의 「팡세」. 저희가 지금 2021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남준 목사님] 한 문장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힘든 세상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하지 말고 가볍게 살라고 하는데 이 파스칼의 「팡세」를 종합해서 보면 마지막 저의 말로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생각이 가벼우면 대신 인생이 무겁다.” 너무너무 가벼운 생각으로 살면 결국 압사당하고 말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행자] 이 시대에 생각이 너무 가벼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아까 저희가 ‘디베르티스망’-회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잘 보십시오. 웬 방이 그렇게도 많습니다. 먹방, 노래방, 갈방, 벗방, 수많은 방들이 있지 않습니까. 요새 트로트도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소비문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회피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그러한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신은 계속 분산되어서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별로 갖지 않고, 근원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인생의 무게에 눌려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나 SNS에 가짜로 자기가 이러한 호텔에 다녀왔다는 등, 이렇게 허황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여러분 자신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의 가벼움에서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행자] 김남준 목사님께는 「팡세」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팡세」는 정확하게 말하면, ‘나라는 목적지로 가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정확합니다. 정확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남이 그려주는 약도 같은 것으로 나를 찾아갔는데, 대부분의 약도가 뭐냐 하면 가짜입니다. ‘저거 찾아가지마. 가면 있지 칙칙하고 골치 아프고 기분 나쁜 것만 있어.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가.’ 그런데 가보니까, 성공을 향해 가. 그래서 가보니까 신기루입니다. 어디로 가, 해서 가보면 또 신기루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내가 참으로 어디 있는지 안내하는 정확한 내비게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오늘 저희가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고 파스칼의 「팡세」를 살펴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나라는 목적지로 가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많은 독자 여러분께도 그런 내비게이션을 찾게 되는 시간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팡세」를 통해서 ‘나’라는 목적지로, 옳은 길로 가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여기에서 이만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신 김남준 목사님께 다시 한번 박수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블레이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어라. 만일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진다 해도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 말고 신을 믿어라.” 이토록 강력한 선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그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찾아와주신 하나님, 진리를 발견한 후 그가 한 선택, 그 선택이 낳은 「팡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읽힐 전도서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의 서재에서도 「팡세」가 재발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희는 이만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