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1부
녹취자: 조경훈
[사회자] 안녕하세요. 매주 고전에서 신간까지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나가고 있는 서재의 재발견의 아나운서 박여명입니다. 목회자이자 기독교 작가인 존 파이퍼는 그의 저서 ‘최고의 하나님을 맛보라’ 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많은 책들을 읽는 것은 나무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과 같지만 거기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이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여러분의 삶에 불을 지필만 한 단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계신가요? 오늘은 인생의 변곡점에서 만난 문장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소개해 주실 메인 스피커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파스칼의 ‘팡세’를 아주 깊이 있게 풀어주셔서 정말 유익한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어떤 책을 풀어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그 전에 앞서서 오프닝에서 한 사람의 삶을 지핀 한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목사님의 삶에도 그런 문장이 있을까요?
[목사님] 많죠. 한 문장이 아니라 많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문장들 중에서 특별히 내 마음을 움직였던 여덟 문장, 그런데 그것이 한 저자에게서 나온 문장을 모아서 풀어놓은 게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입니다.
[사회자] 바로 오늘 소개할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에 목사님의 삶을 바꿔놓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덟 문장을 담아서 책을 완성하신 건데 저희가 그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목사님께서는 정말 많은 책들을 쓰시잖아요. 제가 사실 오랫동안 문학 쪽의 정보를 드리는 역할을 하면서 신간들을 소개합니다. 제가 목사님의 책이 신간이 나왔네. 하고 읽다보면 다 읽기도 전에 목사님의 신간이 또 나오더라고요. 그 정도로 많은 신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책을 늦게 읽으시나요?
[사회자] 아. 그런 건가요? 제가 책을 늦게 읽는 걸로. 이 책도 가장 최근에 나온 신간인가요?
[목사님] 네. 2020년 12월 28일에 나온 신간입니다.
[사회자] 어떤 책인지 간략하게 소개를 해 주시고 시작을 해 볼까요?
[목사님] 저의 최애 작가 중에 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 책을 젊었을 때도 읽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5-6년 전에 그의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고 이제까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생 200-250권 정도의 책을 씁니다. 오늘날 우리가 권수로 말하는 것은 책 속에 여러 권의 책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250권이 안 돼지만 원래 권수로 보면 200권이 넘고 250권 사이의 책을 씁니다. 그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수 십 권의 책을 읽었는데 읽은 것 중에서 내 마음을 깊이 울렸던 문장들이 수 백 개나 될 텐데 그 중에서도 엑기스인 8개를 뽑았습니다. 거기에 나의 자전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경험들을 녹여내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제목을 보면 특이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산다는 것 자체가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미우라 아야코 일본 소설가의 표현에 비하자면 빙점입니다. 물이 액체로 있고 고체로 있는 지점인 0도에서 물은 얼고 얼었던 것은 녹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있다가 한계상황에 딱 온 것입니다. 사실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을 바꿔서 얘기하면 죽고 싶던 밤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던 때를 나도 겪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으니까 그 어두운 밤과 같은 인생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가 어떻게 용기를 내서 살 수 있겠는가? 그 얘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회자]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도 하게 되겠고 목사님의 이야기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과 함께 읽을 만한 책들을 가져오셨는데 어떤 책인지 소개를 해 주시겠습니까?
[목사님] 두 권만 가지고 왔습니다. 우선 고백록입니다. 여러 권의 번역이 있는데 그 중에서 60년대에 번역이 된 책인데 가장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가장 시적으로 번역이 됐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약 120번을 읽었습니다. 한창 때는 거의 다 외웠는데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제 책인데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 입니다. 이 책은 고백록에 있는 구절 중에서 100구절을 뽑아서 풀은 책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만화책 같은 책을 원하면 사지 마십시오. 이 책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sns에 글을 올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는데 이것처럼 어려운 책은 처음 봤다. 대개 책을 읽으면 앞 페이지가 생각나는데 이 책은 이상하게 한 페이지를 넘어가면 그 전 페이지가 생각이 안 난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이해는 다 안 가는데 어마어마한 은혜가 밀려왔다’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고 이해를 하시고 고민을 하신다면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을 읽으면서 파스칼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어떻게 보면 필요한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아사밤 이라고도 표현하시던데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그 여행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목사님] 원작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한 번 알아야 되겠습니다. 354년에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북아프카 알제리 쪽입니다. 당시에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법률을 공부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는 의식을 못했지만 속에서 이 세계와 인생에 대한 영원한 설명을 너무 찾고 싶어 하는 갈망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책인데 로마의 유명한 사상가인 키케로가 쓴 호르텐시우스 라는 작품을 읽습니다. 나이가 19살 때인데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것은 예지이다. 통찰이 있는 삶, 인생 전체가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당시 유럽을 휩쓸면서 특히 지성인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종교가 있었습니다. 마니에 의해 창시된 마니교였습니다. 기독교, 불교, 심지어 동양의 신비종교부터 시작해서 플라톤의 철학 등 모든 것을 섞어서 모든 지성인이 동의를 할 것 같은 교리의 체계들을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기존의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마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행복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상당히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종교였습니다.
지성인들의 흐름에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마니교에 몰두하게 되고 마니교 신자가 됩니다. 거기서 자기의 인생과 우주에 대한 어떤 비밀들을 터득할 수 있으리라고 매달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너무 빈약한 사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사람의 사상은 더 발전하게 됐습니다. 마지막에 굉장히 존경받고 실질적으로 교주라고 까지 할 수 있는 사람도 만나서 자기가 진심으로 배우고 싶고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마니교가 헛된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켜 서게 됩니다.
알다시피 아버지는 이교도였고 어머니는 유명한 모니카였습니다. 그러다가 30대에 회심을 하게 되고 천재적인 사상가인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학문에 날개를 달게 됩니다. 이성과 심정을 두 개 다 가진 사람이 되어서 한없이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위대한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사실 그는 서양 사상이라는 바다로 나가는 수문의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모든 학문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수문을 통해서 학문의 체계가 정리가 되어서 다시 서양으로 퍼졌듯이 어거스틴까지 있었던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사상 관심분야가 단순한 성경이 아니라 성경, 신학, 심리학, 천문학, 수학, 기호학, 음악론 등등의 수많은 학문들이 집대성을 이루면서 이 사람에 의해서 정리되어서 다 나오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4-5세기 걸쳐서 살던 사람이고 그 때는 이미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인되고 자유가 주어지고 국교가 되던 때였습니다. 유럽 전체가 기독교 세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 속에서 오늘날 서양사상이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이 사람이 내보낸 사상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날까지의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해석이었고 기독교신학은 어거스틴이 한 말에 대한 해석이었다. 라고 까지 불리어집니다.
200여권을 책을 쓰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강력하게 인상에 남는 세 권이 있는데 고백록, 삼위일체, 신론입니다. 세 책의 공통점은 모두 신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고백록은 자기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삼위일체는 자신의 정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신국론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님께로 향하는 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을 오늘 다루면서 넘어가려고 하는데 시작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명문으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 4권 7장 12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번 잘 음미해 보세요. ‘내 마음이 내 마음을 피해서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내가 내 자신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내 자신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도망칠 은신처가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문장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 얘기해 보시겠습니까?
[방청객1] 굉장히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방황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방청객1] 내 자신 또는 내 마음 때문에 방황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옆에 계신 분은 그 방황의 원인이 무엇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어떤 것 때문에 방황을 있는 것 같습니까?
[방청객2] 마음에 갈등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마음에 어떤 갈등일까요?
[방청객2]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드는 확신 혹은 정체성을 찾아가는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목사님] 맞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체성’ 이라는 단어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군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목사님] 사춘기가 지나서 이제 안정됐지요? 사춘기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다 짜증이 납니다. 엄마 아빠가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원수처럼 느껴집니다. 무지하게 섭섭하고 귀찮게 느껴지는데 그런 감정을 느껴 보셨습니까?
[방청객3] 네.
[목사님] 그런데 왜 엄마 아빠가 귀찮게 느껴질까요? 그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변명을 해 보십시오. 너 왜 엄마한테 함부로 대하고 까칠하게 굴고 엄마 아빠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 왜 그랬느냐?
[방청객3] 제가 바라는 대로 대해주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 엄마로서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해주기를 바랬는데?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니? 하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니? 나는 이렇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라는 너의 분명한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니? 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방청객3] 대답을 못 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청소년기의 변덕입니다. 그것을 괴테는 질풍과 노도라고 표현을 합니다. 질풍과 노도는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사회자]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서부터 시작해서 고전에 이르기까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부터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이런 이야기는 대중가요부터 고전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레퍼토리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내가 누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특히 그런 여성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본 적도 없고 말만 들었을 뿐인데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봤습니다. 누구 얘기를 했는데 사진도 못 봤는데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잘 안 그러는데 사회자님 시절 같은 경우에 브로마이드 같은 것이 유행했었습니다. 잡지 같은 데서 펼치면 크게 나오는 것을 자기 방에 붙여놓고 합니다. 그 때 연예인에 대해서 막 설레고 그랬는데 저는 왜 그랬는지 나를 열렬하게 마음을 흔들어놓는 연예인은 없었습니다. 영화배우는 가끔 있었습니다.
[사회자] 누구실까요?
[목사님] 영화 ‘러브 스토리’ 에서 나왔던 여자 앨리 맥그로와 ‘초원의 빛’ 에 나왔던 나탈리 우드 같은 사람을 느끼면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 영화보고 나와서 며칠씩 앓고 밥도 못 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야 목사가 될지 안 될지 몰랐었고 그 당시에 영문학자나 수필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것이 인간의 기묘한 모순입니다. 내가 나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살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의 자살은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라 너무너무 다르게 살고 싶은 열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죽는 사람은 죽는 게 아니라 마지막 죽는 순간에 너무나 살고 싶어 하면서 몸부림치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사가 따라 나오는데 ‘지금과는 다르게’입니다. 다르게 살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 안 죽습니다. 다르게 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키에르 케고르가 얘기하는 ‘절망에 이르는 병’인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마치 만나 본 적도 없는 배우를 사랑하고 가슴앓이하는 것이랑 비슷한 것입니다. 여기 그림에 보면 어디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 사람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 아빠가 날 낳아주셨으니까 생물학적인 의미 이 외에 이 분들의 존재가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냐? 이 분들이 죽으면 하숙비를 안 보내주겠지? 이런 것 말고 내 인생이 뭔가? 내가 만나는 친구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자연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것도 잘 모릅니다. 지금 심각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 같은 경우는 백년 안에 이주할 수 있는 항성을 찾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할 것이라고 봅니다. 조금 과장되긴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의 유효기간이 3,000년 도 라고 봅니다. 1,000년 안에 이 상태로 간다면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계를 모르니까 자연을 미친 듯이 파괴합니다.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지구가 소화해 내지 못하는 단계까지 온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자기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이 탄식하면서 고백하는 것은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떠나간다고 칩시다. 보내주는 것도 나고 보냄을 받는 것도 나인데 그러면 내가 찢어져야 되는데 찢어진 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 어거스틴의 설명입니다. 둘 중에 하나는 가짜입니다. 그러면 참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에 불이 와야지만 이것도 이런 의미가 있구나. 하고 불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 합당하게 이것들을 대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내가 무엇이라고 누가 나를 규정해 주느냐는 것입니다.
저기 뒤에 자매님. 자기가 싫은 적이 없었습니까?
[방청객4] 있었습니다.
[목사님] 어느 때 자기가 자기인 게 싫었습니까?
[방청객4] 우울할 때입니다.
[목사님] 또 대표적인 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했을 때 아닙니까? 내가 미쳤나봐? 왜 그렇게 결정했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결정을 했지?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자기도 자기가 싫은 때는 대개 어떻게 해소를 합니까?
[방청객4] 저는 그냥 받아들여요.
[목사님] 굉장히 좋은 습관입니다.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자아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서 다들 자기균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의 정체가 뭔가? 똑같은 나인데 어떤 때는 남에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너무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싶고 숨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숨겨집니다. 그런데 자기 양심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꾸 그것이 떠오르면서 거울을 보여주면서 네가 이런 놈이지? 그러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 보면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선합니다. 나 때문에 감동을 받고 행복을 찾은 사람도 많습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러면 나는 누구냐? 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미친 듯이 고민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그를 심리학의 시조라고 봅니다. 이전에도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도 심리에 대해서 연구했지만 그것은 우주적인 지평이었습니다. 최초로 마치 소크라테스가 했던 역할 같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는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냐? 자연학파 사람들이 물이다. 불이다. 공기다. 흙이다. 원자다. 라고 얘기를 하는데 다 쓸 데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이냐? 라면서 사람에게로 철학의 문제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 이전에 이미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얘기했는데 그것을 개인의 심리 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나로부터 시작해서 위로 상승하면서 진정한 나를 떠나서 우주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드론을 내 마음에서 띄워서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드론을 띄어놓고 아래만 본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드론을 띄워서 피 묻은 드론으로 위로 올라가서 위에서 비추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다시 보면서 그 드론이 자기 속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주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자아를 찾는 문제입니다.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면서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를 못 찾는 데서 오는 정신발작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문제는 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내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나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나누어집니다. 나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 나 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이외에 모든 것은 그 분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얘기는 결국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그 분과 똑같은 레벨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형제가 온갖 피규어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온갖 피규어를 모아놔서 다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해서 피규어가 자동으로 태양광 충전을 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피규어가 됐다고 칩시다. 그대가 모은 그 피규어가 그래봐야 형제하고 똑같은 레벨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A.I.로봇을 만들어서 아무리 내가 로봇에 에워 쌓여서 산다고 하더라도 나와 같은 수준일 수는 없고 대치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을 하는 사람, 쓸데없는 일만 하고 다니는 사람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가치적인 의미에서 보면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두뇌적인 측면에서 보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왜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 일 저 일 하고 다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묘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서 나를 만드신 데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치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문장이 나옵니다. 저를 엄청 울린 문장입니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께 제가 무엇입니까?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내게 진노하시고 큰 비참으로 벌주시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면서 나보고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고백록 1권 5장 1절
사람이 신앙적으로 깊이 성숙하고 철학적으로 성숙하면 그 사람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누구에게 사랑받아야 할 욕구가 점점 적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숙하면 미숙할수록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고 그 정도가 아니면 사랑을 안 해 주면 죽여 버릴 정도로 사랑에 대해서 애착을 하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하나님께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사회자] 그렇죠.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목사님] 그래야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외로워서 긴 밤 홀로 지새우신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상처를 받으신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사랑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데 우리 보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가 대답을 해 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 없다. 동의하시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필요하지 않는데도 왜 그것을 원하시겠습니까?
[방청객5]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받는 사랑보다 줄 때 사랑의 가치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나눴을 때 더 커지는 것이고 큰 것을 느꼈을 때 더 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에게 더 큰 사랑이 필요했습니까?
[방청객5]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는 필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끔 간증할 때 ‘저는 저만 하나님 없이 못 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도 저 없이는 못 사시더라고요’ 문학적으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여자 친구에게 실연을 당할 때처럼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면 안 됩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은 나의 사랑이 필요 없는데도 내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사회자] 하나님께 유익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군요.
[목사님]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것은 공으로 벽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쿼시 운동에서 빡 하고 치면 총알같이 공이 날라 갔다가 벽에 맞고 튕겨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첫 번째 수혜자가 하나님이 되는 게 아니라 그 분을 사랑하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인간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너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냐? 물으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번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시대가 민주화시대가 아니라 황제들의 시대라고 보겠습니다. 여러분 여섯 분이 모두 친구처럼 지내고 여기서도 공부 잘하는 사람, 아빠가 재산을 많이 물려준 사람, 운동에 능력 있는 사람 등등에 의해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할 것입니다. 제는 나보다 못해. 제는 나보다 좀 더 나아. 했는데 그 중에 제일 쳐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가 와서 황제가 아닌 척 하고 얘기를 듣다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을 왜 묻습니까? 네 언행이 참 품위 있고 훌륭하구나. 나는 이 나라의 황제니라. 이 아이의 장래가 촉망되니 왕실로 들여서 특수한 교육을 받고 고관에 임직하게 하라. 했더니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 사람을 특별한 가마에 모셔가게 됐습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들이 계산했던 레벨은 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형제가 여섯 명 중에 3번 째였습니다. 위에 두 사람이 약간 무시하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흥 했거나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했었는데 졸지에 서열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pick 된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정확하게 추정은 안 되지만 대충 1천억 명의 현생 인류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나라는 사람은 이전에도 태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태어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존재의 목적을 일반적으로는 계승할 사람이 나오지만 나의 독특한 목적은 나로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뜻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여러분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류의 걸작품입니다. 모나리자가 한 작품 밖에 없는 것처럼 여러분은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보면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이고 가치론적으로는 그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존재와 가치가 하나가 되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걸작품이 된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수많은 종이 있는데 희귀종의 개체가 딱 하나만 남았습니다. 마지막 개체가 이것입니다. 모든 세계는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이것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마지막 개체인 것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유는 딱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돈이 없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취업이 잘 안 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딱 두 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은 바 된 존재라는 것,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사랑한 존재라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르는 데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방황하고 사랑으로 방황을 합니다. 분위기를 반전시켜서 영상을 보겠습니다.
[영상] 수평선이 붉게 물든다. 아직 도망가지 못한 빛의 어둠 죽은 독수리의 늘어진 날개와 같다. 새들이 모인다. 선창가 부둣가에 새카맣게 날아든다. 간밤에 내다 버린 생선 내장을 먹으러 오나보다. 서로 먹겠다고 싸운다. 갈매기 한 마리, 고독한 새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홀로 떨어져 있다. 그에게 그리운 건 자유였다. 하늘을 훨훨 나는 것 말이다. 나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다. 고등학교 때 감명 있게 읽었던 책이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바닷가 긴 제방 저 끝에서 총을 쏜다 놀란 새들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간다. 이 문장은 총소리였다. 선창가를 서성이던 내 정신에 울려 퍼진 총소리였다.
‘만일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다’
날아라, 날아라, 너의 자유는 비상이다. 내 마음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쇠줄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이 마음의 날개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던 거다. 날고자 하는 건 나, 날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나였으니 내가 누구를 떠나 날아간단 말인가. 만일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라면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이 답해 주었다. 철학을 하는 것은 사랑을 하는 거라고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늘에 있다고. 의미는 찾을 수 없으니 그 우주는 무한해서 두렵고 침묵해서 무서운 거다. 참된 지혜는 그 분이시다. 그래서 참된 철학은 사랑을 하는 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명문이 심금을 울린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는 당신을 향해 밤낮으로 한숨 짓나이다.’
깊은 밤이다. 바람 속에 벌써 겨울이 들어와 있다. 따뜻한 찻물이 끓는다. 무엇을 마실까?
[사회자] 특별한 영상을 저희가 또 하나 보았습니다.
[목사님[ 이 영상을 보면서 무슨 느낌을 받았습니까?
[방청객5] 따로 떨어져 있는 갈매기가 아니라 같이 뭉쳐있었던 갈매기 중에 한 마리라고 생각이 들었고 영상을 보면서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옆에 분에게 마이크를 넘겨 보겠습니다.
[방청객6] 저는 정말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만 바라 봐야만 하는 존재가 우리 피조물이지 않나? 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되는 존재구나. 라는 느낌입니다.
[목사님] 굉장히 빨리 신학으로 넘어가셨습니다. 또 다른 분 이 영상을 봤을 때 드는 느낌이 어떤 것입니까?
[방청객7] 저는 기억에 남는 문장이 날고 싶었던 것도 나고 날지 못하게 하는 것도 나다. 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목사님] 뒤에 분?
[방청객8] 저는 스스로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나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 다른 분?
[방청객9] 저는 솔직히 좀 울컥했습니다. 추천을 해 주신 책 중에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셨지만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항상 찾아다닙니다.’ 라는 문구가 생각나면서 제 신앙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있지만 그것을 망각하고 있지 않나? 그것 때문에 너무 슬픈 삶을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내 선택이라는 생각이 영상을 통해서 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떠나지 않는 하나님이 너무 놀랍고 감사해서 울컥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사회자님 마지막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회자] 저는 사실 좀 어려웠습니다. 영상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렵긴 했는데 제가 느낀 것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고 그 자유로 인해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인데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나에게 있음에도 그것을 막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이고 그것에서 깨어나야 행복을 찾으러 갈 수 있다는 의미로 저는 이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는 저 책을 고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며칠 동안을 감동 속에서 지냈습니다. 저의 마음을 깊이 두드렸던 것은 나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갈매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로 나와 있는 갈매기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라는 고백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제일 슬펐습니다. 나는 저 쓰레기에 관심이 없다. 나는 저 생선 내장에 관심이 없다. 자유를 간절히 찾는데 저 갈매기는 자기 자유를 날아다니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에서 자유를 찾아야 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를 공포 속으로 몰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실존주의에 심취했었던 때였지만 거기에서도 결국 답을 찾지 못 얻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기에서 다루는 문제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철학자라고 하면 수염 길게 기르고 도포자락 입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닙니다.
[예고]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관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무엇인지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생각들이 다 연결돼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 비참한 사람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엄숙하도록 존귀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렇게 존귀한 사람답게 살아가라. 그리고 인생은 살기 싫다고 안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