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종이 되게 하소서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녹취자: 백지영
열린교회에서 오래 교역자 생활하신 분은 아마 이 설교를 너댓 번은 수련회 때 듣지 않았을까, 28년 동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 무엇을 말씀을 전할까 하다가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은 종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읽으면서 한 번도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라고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감동이 안 되었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그렇게 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것은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고,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인이 멀리 가면서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이렇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어떻게 했는지를 계산하게 되는 때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주인은 성품이 굳은 사람이라", 아마 돈에 대해서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부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종이 혹시라도 이것으로 무엇을 했다가 혹시 본전이라도 들어먹으면 그 엄격한 주인이 얼마나 책망할까라고 염려하면서 땅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갖다 주면 이자를 주는 사람이 있었나봅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해서라도 이자라도 남기지 어찌하여 땅에 묻어두었느냐 하면서, 그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리고 그가 받을 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제 이쪽으로 이야기를 초점을 옮겨보면,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과 두 달란트를 남긴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배 반이나 되는 금액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칭찬이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을 조금만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마어마한 재능을 주셨는지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실 답을 내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주권에 의해서 그 일을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어떤 사람은 많이 이렇게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 대목이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주석이나 신학자들의 글을 보면 이 나누어준 달란트의 상이한 금액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냈다고 그랬는데, "왜 나에게는 주권이 그렇게 나타났을까?" 이해가 잘 안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쨌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맡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여기서는 이미 떠날 때에 주인이 달란트를 주었지만, 우리들의 달란트는 그런 식으로 받은 달란트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부지런히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무슨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는지 하는 것을 이제 알게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하실 교회 때 일인데,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닌데 매일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마디도 기도를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남의 교인이 참 그렇게 매일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 나오는 것도 특이하고, 한마디도 기도를 입도 못 떼고 가는 것도 너무 특이하다 그랬습니다. 어느 날 강대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날 찾아와서 날 툭툭 치는 것입니다. 뭐냐고 그랬더니, "목사님 제가 남서울 교회 다니는 교인인데 할 수 없이 열린교회 나와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집이 요 앞이라서 그러는데 나를 위해서 좀 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게 어렵겠느냐고, 그래서 뭘 위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하느냐고 그러니까 남편과 이혼할 수 있게 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니 목사가 어떻게 이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 줄 수 있느냐고 안 된다고 그러고, 대신 안수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교인이 결국은 열린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열린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KT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독할 정도로 가부장주의적이고 그렇게 아내를 쥐 잡듯이 잡는, 때로는 폭력도 행사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남편이 그렇게 불쌍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좀 살아보려고 그러는데 남편이 덜컥 중풍에 걸려서 반신불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정도 없는 남편이 그렇게 됐으니까 때려치우고 떠나버릴텐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니까 이 자매가 그냥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KT 다니다가 그만 었으니까 퇴직금이야 좀 주었겠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한 퇴직금도 아니고. 그 양반이 그만둘 때가 오십대 초반쯤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되는데, 그런데 이 아내는 한마디로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월급가지고 겨우 살아가는데 안되겠으니까, 생활을 해야 되니까 베이커리에 가 가지고 빵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그렇게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 오륙년 후에 이사를 멀리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열린교회를 떠나게 됐는데, 우연히 예식장에서 한 6, 7년 후에 그 자매를 만났습니다. 나이는 좀 들었는데 얼굴이 환했습니다. 그래서 잘 지내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남편은 결국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어떻게 지냈냐고 그러니까 -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벌써 줄잡아서 십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그 자매는 아마 오십대 초반이나 중반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되는데 - "목사님 제가 연봉 일억을 받는 샐러리맨입니다." 그래서 내가 깜짝 놀라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월급을 받느냐고 그랬더니, 무슨 세일즈 하는 데인데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거기의 유명한 강사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결혼식 끝나고 다음 주에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가서 거기 있는 직원들을 교육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세상에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딪혀 보면 하나님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달란트를 주셨다는 사실을 결국은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묻혀버리고 영원히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때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 다음에 부르넬리스키를 비롯해서 지오토, 마사초 같은 걸출한, 역사를 거의 움직인 예술가들이 28명쯤 폭발하듯이 쏟아집니다. 그것을 천재폭발이라고 합니다. 쭉 없다가 갑자기 그냥 화산이 폭발하듯이 천재들이 폭발하듯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또 한 백년, 이백년 동안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천재들이 폭발할 때 여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게 무엇이냐 하면, "여성은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 시대에 안 태어났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확률적으로 49대 51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28명의 남자가 나왔으니까 여자도 25명이나 26명쯤은 나왔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안 나왔을까요? 기회를 안 준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나 이런 사람들이 다 금은세공공방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방에 여자를 아예 안 받아 준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달란트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딪혀서 해 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 사람이 달란트를 받은 것과 우리가 달란트 받은 것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이 주인의 평가를 보면서 우리들이 메시지를 찾아가기로 하겠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냥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주인이 와서 두 달란트 맡은 종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하고 똑같았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이 한 달란트 가지고 왔더라면 똑같은 이야기를 주인이 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첫째, "잘 하였도다." 그래서 이게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잘했다" 이것은 일입니다. 시선이 일에서, 그 다음에 "착하고" 인격으로 가고, "충성되고" 그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순서가. 그래서 먼저 그가 한 일을 보고 주인이 "잘 했다", "well done", 그게 칭찬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여기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너무 분명한 메시지이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주인이 이렇게 맡긴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박윤선 박사는 이것을 기회라고 해석을 하셨습니다.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주신 재능, 우리에게 주신 소유, 심지어 우리에게 주신 건강, 심지어 생명, 내가 어제 죽지 않고 오늘 여기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할 수 있는 직분을 주신 것, 이 모든 것이 아울러서 다 달란트겠지요? 하여튼 하나님 앞에로 받았고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달란트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재능이라고 하는 하나에만 국한시키는 것도 너무 좁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어쨌든 활용해서 섬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회를 포함해서 모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과 심지어 생명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에 주인이 와서 "잘 하였도다"라고 제일 먼저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선이 제일 먼저 그가 한 일을 보면서 주인이 평가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결국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비유잖습니까? "너희들이 지금 살아 있는 것조차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기회다, 모든 것이 달란트다, 그리고 네가 어떻게 이 달란트를 가지고 살든지 간에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때 너는 각자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을 것이다." 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가 "잘 하였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꾸로 내려오지를 않고 바깥에서부터 일, 인격, 하나님과의 관계, 이렇게,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이 세 가지가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평가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못된 놈아.", "잘 하였도다. 못되고 충성된 종아."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체적 일관성이 있으니까 하나로서 관통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관점이 ‘일’입니다. 그래서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미래도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과거는 현재를 말해주고 현재는 미래를 이미 말해줍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공식은 변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 모두 학교에 갔을 때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그때 첫 인상이 있지 않습니까? "제는 말을 저렇게 건방지게 하나?" 사십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건방집니다. 그때 겸손하던 사람은 지금도 겸손합니다. 그리고 그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사람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때 뭔가 누가 뭐만 이야기하면 꼬투리를 잡고 막 비비꼬면서 마치 대나무 껍질 까듯이 그렇게 캐대던 사람은 지금도 그렇게 삽니다. 변한 사람 없습니다. 진짜 변한 사람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그가 하는 일과 그 사람 자신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가 일한 것이 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일하는 것 자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바깥으로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있으라" 그러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못 보지만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고 살든지 간에,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을 보면 우리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특히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이것은 자기완성의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사람이 절대로 좋은 일을 할 수가 없고, 좋은 사람이 못된 일을 하면 엄청난 고통이 그 사람에게 찾아와서 결국은 올바른 곳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살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영화 한편을 보았는데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 무슨 영화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하여튼 말도 안 되는 그런 테러스토리를 엮어서, 말도 안 되지는 않지요, 하여튼 실감나게 엮어서 재미있게 봤는데 - 테러리스트가 핵무기 발사 코드를 대라고, 아니 어디를 들어가는 방에 비밀번호를 대라고 장관에게 총을 대고, 이미 한 사람은 죽였습니다. 그리고 또 총을 딱 대니까 여자였습니다.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난 그게 지금도 가슴이 '쿵'합니다. "말할 수 없다. 나는 성조기 아래서 이 조국에 충성하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거부합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국 우리가 일을 하는 것 이 자체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 사역에 들어선 것 아닙니까? 그걸 우리가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 이 과정이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정함이 없는 교역자들은 그 정신이 안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님의 아가페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고 소명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잘 하는 것은 그냥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주 쉽게 말할 때, 일만 잘 하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상상 속에 있지 실제로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가 탁월해서? 교회 경영능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휘어잡는 언변이 있고 해서 잘 한다, 그게 잘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보실 때 잘 했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그렇게 신앙과 일을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사고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관점을 따라가면, 첫 번째 관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았는데 잘 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일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완성과 관련된 문제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잘 하겠느냐?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첫째는 지식의 요소입니다. 일을 잘 하려면 그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명확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서 있어야지만 자기스스로 잘했는지 못했는지 평가를 내려서 반성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그 일에 대한. 내가 새가족을 맡고 있다, 새가족 사역은 교구사역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전도국 사역을 맡고 있다, 이것은 교구사역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영아부를 맡고 있다, 이것은 소망부 사역하고는 다릅니다. 그것 나름대로의 아주 중요한, 그것만의 독특한 본질과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식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기술입니다. 그 지식을 자기가 스스로 지식대로 사용을 해서 능숙하게 그 일을 하는데 최적화되도록 자기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고 도려내서 그 일에 최적화 되도록 자기를 맞추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제가 한번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다 은퇴하고 사라진 사람이지만 프로 야구 선수가 하나 있었는데 투수입니다. 포크볼을 기가 막히게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런 경험 없겠지만, 선수들이 던지는 공을 포수석에 딱 앉아있으면 아무도 못 받습니다. 이게 카메라로 비칠 때는 공이 약간 이렇게 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포지션이 포수였는데, 그런데 캐처에 미트 글러브를 끼고 딱 앉아있지 않습니까? 공이 똑바로 오다가 시야 바깥으로 사라질 정도로 그렇게 급하게 꺾어집니다. 그런 포크볼을 아주 잘 던졌습니다. 오다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형수술을 해서 이것을 2센티를 잘랐다고 합니다. 이 두 손가락을 벌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야 됐다고 그렇게 즐거워하더랍니다.
사람이 손가락을 1센티씩 자른다는 게 그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마 간단한 수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잘라내서 자기가 투수로서 그 공을 던지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지요. 거기서,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대충하는 사람은 회개가 없습니다. 절대로 회개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잘 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기술만 최고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감당해 나가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이 기술입니다. 그래서 그 기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책도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남에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고 해서, 자기가 그 사역에 최적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맨 처음에 들어와서 유년부 전도사가 됩니다. 우리교회는 또 그것도 일 년 기다려야 되지만, 어쨌든 웬만하면 유년부 전도사가 됩니다. 그런데 들어와 가지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일 년 있다 초등부로 간다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유년부는 못 배우고 초등부로 갑니다. 초등부 가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확률적으로 보면 일 년 있다가 중등부로 올라간다 이렇게 하면서 몇 년을 지내는 동안에 결국은 사역을 하나도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세가 필요 하느냐 하면, 유년부로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여기서 유년부 사역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술을 익혀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일 년 후에 고등부로 발령이 나도 거기 가서 똑같은 자세로 그 일을 배웁니다. 그렇게 해서 두세 번만 하고 나면 두 사람은 사역자로서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격차를 갖는 것입니다. 기술에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내가 면접 받는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에 소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사역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누구냐?" 눈을 껌뻑 껌벅거립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처럼 되고 싶으냐,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너의 롤모델이 누구냐?" 대답을 못합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뭐냐하면 그냥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든지 그래서 내 이야기가 둘 중의 하나다, 그건 뭐냐 하면 아직 열정이 부족하던지 사역에 대한 목표가 막연하든지, 두 번째는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새롭게 열고 가고 있는 선구자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후자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전자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언젠가 일식집에 가서 능숙하게 회를 썰어서 초밥을 만드는 사람에게 “이 정도 하려면 기술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훈련받을 때는 생선을 사시미를 칠 수 있도록 다듬는 사람이, 거기 사시미는 못 치고 생선을 주방에서 때려 활어를 잡아가지고 껍질을 벗기고 이렇게 포를 떠내서 주방장에 갖다 주기 위한 기술만 3년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회를 이렇게 뜨는 사람이면 도대체 몇 년쯤 됐겠습니까? 또 최고의 사람이라고 하면, 광어 같은 것 회를 싹 떴는데 살이 없는 광어가 물속에서 막 헤엄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경지가 도달해야지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끊임없이 기술을 익혀야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사역 시작하시는 분에게 내가 이야기하는데,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맡은 사역이 전도, 유년부, 고등부, 중등부라고 그러잖습니까? 우리나라 최고를 찾으십시오. 누군가? 그리고 이메일을 쓰십시오. 만나달라고 그러십시오. 배우겠다고 그러십시오. 그럴 정도의 투지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여기서 내가 최고의 사람을 보고 좀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여러분 신임교역자 오기 전에 지난 번 가을에 내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배우고 싶은 곳이 미국이면 내가 비행기표, 호텔비를 모두 끊어서 출장을 보내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여기 다 들은 사람 증인입니다. 빈말 아닙니다. 진짜로 그렇습니다. 그 두 번째 요소가 뭐냐 하면, "잘한다"라고 할 때 두 번째 요소가 기술입니다. 기술.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고야 맙니다. 기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가 정성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파인다이닝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주 고급 식당입니다. 진짜 웬만한 날은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식당입니다. 그 식당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많이 줍니까? 아닙니다. 할인을 해 줍니까? 1도 안 해줍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금그릇에 담아줍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서비스가 아주 예의바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음식이 접시를 받았을 때 먹기가 미안할 정도로 정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파인다이닝입니다. 한꺼번에 솥에서 확 김치찌개처럼 끓어놓고 푹푹 퍼가지고 그릇에 담아서 설렁탕처럼 그렇게 파 뿌려가지고 그냥 주는 것이면 파인다이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요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한 접시를. 그냥 사과 뚝 잘라놓으면 되는데 아주 정성껏 잘라놓고, 회를 쭉쭉 썰면 되는데 그걸로 학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숲을 그리면서 만들어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정성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참 정성스럽구나." 내가 여기서 환대를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잘 하였다"는 요소입니다.
세 가지, 그게 뭐냐 하면 지식, 기술, 정성, 이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잘 하였도다"라고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제일 먼저 사역을 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쨌튼 마지막에 그 결과물이 잘 됐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의도대로 딱 됐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뭘 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 좀 이렇게, 이렇게 해 줘.” 그랬는데 의도대로 정확히 해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의도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게 해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고, 말도 안 되게 해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잘 하였도다"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에 대한 지식, 그 다음에 기술, 정성, 이게 딱 몸에 배어서 최선의 성과를 낼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한 해를 지나면서 한번 돌아보는 것이지요. “정말 잘 했는가?”, “나에게 주어진 직무가 무엇이었고, 이것을 가장 잘 해냈는가?” 세상에서 삼성이나 엘지나 이런 그룹에 다니는 사람하고 이야기해 보면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도록 과학적으로 그 결과물들을 판단해 내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헛다리짚는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연봉을, 아시지요? 삼성은 연봉을 작성할 때 누설하면 퇴사하기로 하고 연봉을 작성합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둘이 같이 있어도. 그런데 그 연봉을 같은 동기인데도, 같은 직급인데도 두 배정도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 사람들이 얼마나 찔러도 피한방울 안 들어가는 사람들인데 얼마나 기가 막히게 그 직무를 평가하겠습니까? 그 시스템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계량화된 시스템을. 그것을 가지고 일을 잘 했는지 못했는지를 정확하게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 속에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잘 했나 못 했나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시작할 때부터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도달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한 게 없는 것입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할 때, 저 앞에 결승선이 있어야지만 내가 거기에 도착했는지 테이프를 끊었는지 안 끊었는지를 알지, 그 선이 없다면 우리가 다 뛰었는지 안 뛰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가능하면 자신의 일에 대한 목표, 그리고 바라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그리고 자기가 한 일을 반성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잘 하였도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뭐냐 하면, 몇 년이 지났는데 교회가 다시 부르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은 부를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른 데서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이번에도 우리 교역자 한 사람이 지망을 했는데, 자기는 너무너무 오고 싶었는데 그 교회에서 죽어도 안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왔지요. 그런 것입니다. 이치가. 그러니까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내년도에 여러분들 사역할 때 하나님이 보실 때 잘 한 사람, 사람들이 볼 때 잘 한 사람, 그래서 몇 년이 흘러도 여러분이 생각나는, 여러분 때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착하고" 그랬습니다. 대개 뛰어난 기술이나 뛰어난 학문, 탁월한 예술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범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 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주관이 너무 뚜렷하고, 그리고 자기의 이룬바 업적이 있기 때문에 자기 신념이 투철합니다. 그래서 자기만 못한 사람을 이해해 주는 것에 매우 약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도 잘 못합니다. 이어령 교수가 정말 앞으로 그 정도 박식할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할 정도로 철학, 문학, 역사부터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그분이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서울대를 나오시고 이화여대 교수를 하고 문화부 장관까지 하고 그리고 우리세대 다 그분 책 읽으면서 자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재능도 매우, 매우 탁월하고, 그리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또 말은 못하는데 이분은 말은 글보다 더 낫다고 할 정도로 말도 잘합니다.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아주 단호하게, 자신은 언제나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왜냐?” 동반자가 없었다, 친구도 없고, 그리고 내 일이 바빠서 가족들도 잘 돌보지 못했고, 물론 그 말은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결국 뭐냐 하면, 탁월한 천재들은 어느 정도 그게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합니다.
결국 착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착하다는 것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잘하면서도 착한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 우리에게 은혜가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착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선하신 하나님이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계시고 그들을 판단하시지만 모든 인류를 당신의 품에 안고 계신 것처럼, 그렇게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자기와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조화와 상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음악으로 말하면 하모니이고, 연극으로 말하면 앙상블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 종은, 그렇게 뛰어나게 자신의 일을 잘 해서 주인에게 달란트를 남겨 주어서 일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착하다는 평가를 못 받으면 잘한 일이 결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하는 동기에서 나왔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듬어가는 과정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우리교회처럼 협업이 많은 교회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교역자 한 육십 명, 칠십 명 되면 서로 이름도 모릅니다. 그리고 서로 그냥 자기 길로 가지 옆에 사람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목회는 끊임없는 하모니와 앙상블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장년부에 왔는데, 유초등부 아이들을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번 교역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새로 계속 교인들이 등록을 할 때 거기에 수많은 애들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니, 골목을 돌아다녀 보십시오. 거기서 자기가 두 달을 다녀봐야 한 명을 교회 데리고 나올 수 있나 해 보십시오. 안됩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교회 나오면 아이가 교회 나올 가능성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엄마 아빠가 딱 붙들고 교회 데리고 나오는 애도 있지만 안 그런 애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 중고등부 아이들 말 듣습니까? 안 듣지요? 그러면 교회 나오고 있는 부모와 협동 작전을 해서 그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면서 걔를 전도하는 게 쉽겠습니까,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뿌리면서 걔를 전도하는 게 쉽겠습니까?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소통하고 협업을 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사람들과 이렇게 부딪히는 게 기질적으로 안 되는 사람은 힘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깎여지지 않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가 매일 체크리스트를 놓고 “이렇게 살았는가?”를 스물 몇 개를 써서(써놓은) 체크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띠는 하나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나는 오늘 하루 종일, 하루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고 붙임성 있게 행동하였는가?" "붙임성 있게", 그 전설적인 설교자가 그것을 매일매일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열렬히 기도했는가?" 그게 일번입니다. 나는 오늘도 열렬히, 포번트리(fervently), 열렬히 기도했는가? 그게 일번입니다. 그러면서 체크리스트가 마지막에 이십 몇 번까지 나가는데, 어쨌든 그 중에 들어있는 눈에 띠는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그렇게 붙임성 있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깨달으면서 자기 자신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교역자들 잘 보면 많이 변합니다. 그렇게 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어느 부서를 맡길 때 다 정보를 채집하지 않습니까? "성격이 너무 독특해서 주위에 있는 교역자들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 보고가 올라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망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또, "수많은 동역자들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맡겨보자.", 그런데 일 년, 이년, 삼년 지나가면서 착해져 가는 게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너무 착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내가 오늘 나 혼자 있는 나와 우리 모두 같이 있는 나는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입니다. 일본에도, 나는 일본어 잘 못하지만, 일본에도 '우리'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나', '나' 이렇게 ‘나’를 두 번 해야지 ‘우리’라는 말이 되고, 그 다음에 중국어로는 ‘나’는 워(我)입니다. ‘워 아이 니’(我爱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되려면 워먼(我们)이라고 해야 됩니다. 이 '먼'(们)이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들'이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이 삼국에서 우리만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우리'하고 '우리들'하고 다릅니다. '우리' 그러면 여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자기가 독신으로 혼자 살면서 친구에게 "너 우리 집 갈래?" 그리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혼자 사는데 "내 집 갈래?" 그러지 않습니까? 영어에 표현 보면 전부 다 마이 하우스, 마이 와이프, 마이 허즈번드, 마이 파덜, 마이, 마이, 마이, 마이, 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만 독특하게 독신으로 살면서도 자기 집에 갈 때에는 "우리 집 갈래?"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미 누구와 살고 있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집을 공동소유하고 있나?” 그 ‘우리’라는 단어가 그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러면 여기에 이렇게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우리들' 그러면 이제 범위가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나'라고 하는 사람은 누군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를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번 가르쳐드렸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특히, 존재는 우리가, 유한이 무한을 파악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 신학적으로 말하면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 '모두스 오페란디'라고 그럽니다. 속성과 속성이 작용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저 사람이 나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사람을 보면서 "아, 나는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구나." 혹은 저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섬기는 재능이 있구나." 이 사람은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거울을 다 깹니다. 그래서 누구를 통해서도 자기를 비춰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가 안양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인데, 학생하나가 하여튼 교수들이 걔를 싫어하면서도 걔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좋은 학생이기는 한데, 하여튼 데모의 최전선에 서는 것입니다. 문제가 일어나났다 하면 걔가 쥐고 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수들도 사실은 걔한테 눈치를 봐야 될 정도로. 그런데 특히 신학에 관계된 것이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데, ‘군사정권 물러가라’ 이러고 하니까 우리 신학교수들이 도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안양대학교 학생들 데모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이 그 학교를 데모 진압하기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비탈길이었습니다. 애들이 여기서 노깡을 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로있지 않습니까? 큰 것, 시멘트로 된 것. 그것이 구르면 경찰들이 다 담벼락에 붙어야 됩니다. 돌멩이가 굴러서 내려오니까. 그렇게 애를 먹던 데인데, 그렇게 과격하게 하고 해서 눈에 핏발이 서리더라구요. "쟤는 신학을 하지 말았어야 될 애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한 오륙년 그렇게 지나서 학교를 찾아갔는데 아주 양순한 사람이 됐습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났냐고 그랬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가지고 얘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했다고 합니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결국은 열심히 전도하고 성도들을 데려다놓고 하니까 자기가 그 성질대로 했다가는 남아 있을 교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깨뜨려지고 그 교인들을 비유를 맞추면서 목회를 하다보니까 이게 선한 기운으로 바뀐 것입니다.
결국은 착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교인들이 볼 때, "아, 그분 참 친절하고 착하다, 선하다."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착한 사람은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 그러면서도 기가 막히게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세 번째가 "충성된 종아" 그랬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충성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도 누구를 통해서 들은 예화입니다만, 1994년도이지요. 아마? 이라크전이 있을 때에, 쿠웨이트를 침공해서 이제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는데, 그때 굉장히 많은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총탄에 맞고 사지가 다 잘려져서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군인이 있었는데, 아프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급히 구조해 가지고 막 가는데 말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벌써 숨이 넘어가면서 그런데 발발발발 떨리는 손에 피를 막 뚝뚝뚝뚝 흘리는 것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보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으로 자기를 실어 나르는데 그 시트위에다가 글씨를 쓰더라는 것입니다. “생떼르 피엘스”, “항상 충성”, 죽어가면서. 그게 나라에 충성하는 군인의 모습입니다. 아까 그 사람도 똑같지요. "내가 성조기를 아래서 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충성하겠노라고 다짐한 사람이다."
이게 충성입니다. 그래서 충성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그분에게 올인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벌써 다 저물어가는 세대지 않습니까? 저도 이제 저물어가는 세대인데, 저의 앞 세대에는 더 전설 같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전설이 점점, 점점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은 신경 별로 안 쓰겠지만 구닥다리라서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간증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으면 "아, 참 희한한 하나님의 역사가 목사님에게도 참 많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 교인 중에 교인 친척이 "너희 목사님은 엘리트코스만 거치고 고생 한번 안 해보았을 텐데 뭘 인생을 알겠냐?" 맨날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새롭게 하소서’를 듣고 그러더랍니다. "아, 너희 목사님 진짜 고생 억수로 했더구나. 말씀이 다시 들리더라." 그런데 우리 간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윗세대의 기라성 같았던 선배들 들으면, “저게 실화일 수 있을까?”라고 할 정도로 크게 쓰임을 받은 종들일수록 전설 같은 간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기가 막힌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올인 한 사람들에게 그런 간증거리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리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하셔도 하나님이 했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이 이루어져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내가 내수동 있을 때에 박희천 목사님이 내가 이 마태복음 25장 설교하는 것만큼 즐겨 설교하시던 성경이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의 다툼을 다룬 구절인데,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내종 모세는 너희와 같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하였던 자다" 그러면서 "모세는 너희와 같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친구와 같이 대면하여 말하였노라" 그러면서 반역사건을, 반역이라기보다도 어쨌든 도발하는 사건을 마무리를 지으시지 않습니까? 그게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 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를 편애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모세의 하나의 표상이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이었다는 게 구약도 증거하고 신약도 증거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집에 충성한 모세의 그 충성이 예수가 충성하신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고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에서는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으로 비교가 되지만, 충성한 것은 아담하고 비교를 하지 아니하고 모세하고 비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친교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아버지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충성스러운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시록에 넘어가면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이라고 나옵니다. ‘아멘’이라는 것은 여러분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히브리어에서 온 것입니다. '아맘',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굳게 하다’ 그게 부사로 쓰여진 것인데, ‘설튼리’(certainly), ‘확실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뜻이잖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예수님이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고난은 당하셨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항상 함께 하시고 어떤 순간에도 그분을 놓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회자의 최고의 자신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영적인 교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나가라고 하면 성경 하나 들고 아무데나 가서 주의 말씀을 외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아무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살아보니까 무서울 게 없습니다. 이발사하고 목사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발사는 가위하고 빗만 가지고 다니면 되고 목사는 성경하고 찬송만 가지고 다니면 됩니다. 어디서든지 교회가 그 사람에 의해서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고, 장래? 장래 아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인도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교회를 하리라고 생각도 안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교회를 옮기고, 교회를 찢고 부수고 새로 사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만 할 수 있으면 무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지막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아득하게 보이지요? 아닙니다. 저 83년도에 처음 전도사 됐습니다. 그리고 2년만 있으면 이제 사십년이 됩니다. 그런데 엊그제 같습니다. 잠깐 동안 지나갑니다. 박희천 목사님이 꼭 내 나이보다 한 세 살 어리셨을 때 나보고 그랬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다는 것은 문학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65세이시던 그 담임목사님이 지금 95세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것입니다. 잠깐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 하는 사람이 되라. 착한 사람이 되라.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라. 그래서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라."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영적인 세계를 갈망하십시오. 그리고 위대한 영적인 거인들의 세계를 탐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그 사람들이 충만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높은, 더 잘하도록, 더 착한 사람이 되도록, 더 충성된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섬긴다면, 결코 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겼던 시간들이 여러분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이 되게 하실 것이고, 언젠가는 여기에서 사역의 많은 열매들이 여러분들의 앞으로 이루어질 위대한 교향곡의 서곡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한 일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고자 계획하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여러분들이 연약하게 사역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거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분재가 되지 말고,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아주 찬란하도록 주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고, 그리고 마지막 불꽃까지 자신을 다 사르고, 주님 앞에 가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