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극동방송 직원수련회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이은정
여러분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열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남준 목사입니다. 제가 1993년 12월 12일 7명의 교인과 함께 열린 교회를 지하실 교회에서 시작했습니다. 두 교회가 교회를 하다가 문을 닫고 떠나간 폐허가 된 자리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때 우리 교인들도 저도 우리 집사람도 열심히 전도했지만, 우리 교회 전도 왕이 둘 있습니다. 그게 극동방송과 생명의 말씀사였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그때, 지하실 교회에 수많은 교인들이 몰려와서 너무 사람이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예배드리다가 사람들이 산소가 모자라서 졸도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교인들이 많이 왔고, 그 후에 이제 두 번의 이사를 거쳐서 지금 열린 교회인, 평촌의 열린 교회가 됐는데, 그 때, 교인들이 오면 대부분 어떻게 여기를 오셨습니까? 그러면 대부분이 책을 읽고 왔습니다. 아니면 극동방송 새벽 설교를 듣다가 왔습니다. 아니면 기독교 방송, 라디오 방송 설교를 듣다가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집사람이 교인들 가운데 전도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 당신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를 하도록 도와준 두 방송국이 CBS와 FEBC 기독교 극동방송국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했지만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날 밤은 누가복음 5장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던 때와 데자뷰처럼 똑같았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못 잡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이심을 알아보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신 네 가지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어디서 마련하셨는지 예수님은 이미 타오르는 숯불에 맛있게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이 역할은 사실은 가정에서 엄마의 역할입니다. 가족들이 밭에서 일하는데 맛있게 식탁을 준비하는 것은 엄마의 일입니다. 이 제자들은 이제 영문도 모른 채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찾아오셔서 맛있게 차려주신 조반을 먹게 되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별로 오가는 대화 없이 식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에 관한 문맥이 한국 사람들의 식사에 관한 문맥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함께 직장생활하는 걸 가리켜서 한솥밥을 먹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세계에서 아주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받으셨던 비난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시느냐? 그렇게 비난을 하였는데, 이 문맥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함께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가족이 되고 형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식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창녀와 세리, 죄인들은 사실 한솥밥을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야 자신의 거룩함이 입증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결국 한 가족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렇게 한 가족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전도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실 세 번째 나타나셨다고 하지만 베드로와는 개인적인 면담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는 제자들도 없었고, 또 두 번째도 그런 면담이 없었고, 세 번째 처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결국 식탁을 차리시는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을 가족으로 여기시고 식탁을 차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던 뜨거운 신앙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다시 멀리 떠났다가 돌아오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던 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제일 첫 번째 선물은 따끈따끈한 밥상이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그 겨울 날씨에 눈보라를 무릅쓰고 외출했다가 돌아오고 보니까, 어머니가 소반에 맛있는 반찬을 차려놓고, 국이 식을까 염려하며 끊임없이 데우고 아랫목에 따뜻하게 묻어 놓았던 밥뚜껑을 열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자식에게 대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의 식탁으로 여러분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가족이라고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 식탁 앞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기독교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가장 위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목사와 그리고 이렇게 기독교 선교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위험과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통로는 되지만 자기 자신은 결코 그 말씀에 잠기는 적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마치 파이프가 수없이 많은 수십 톤 수백 톤 수천 톤의 물을 끊임없이 가정에 실어 날라도 자기 자신은 그 물에 잠기지 않는 것처럼, 통로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식탁을 차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우리가 생명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방송국이 본사를 포함해서 13개의 극동방송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제 생각(에는) 거의 절반 정도는 저의 설교를 내보내는 것 같습니다. 서울 본사는 어떻게 계속해서 관계가 계속되다가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쨌든 그 관계가 여러 해 전에 끊어졌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자세히 모르니까. 근데 너무 감사한 건 이번에 전국의 저희 교회에서 라디오 사경회를 최초로 우리 사장님이 잘 이렇게 마련해 주셔서 내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지 모릅니다. 근데 놀랍게 방송을 듣는 사람은 저렇게 감격을 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 우는데, 그 방송을 내보낸 사람은 마음이 차갑고 언제 하나님의 밥상을 받아봤는지 기억이 없다고 할 때 우리는 이상한 삶과 우리 영혼의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마음이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이 확실히 하나님을 떠났다고 의식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목사와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예배 드리고, 하는 일이 말씀 편집하는 일이고, 하는 일이 책 만드는 일이고, 하는 일이 원고 만지는 일이고, 하는 일이 기독교 신앙 상담 혹은 간증을 녹화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늘 하나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는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고 감격을 주는데, 자신은 그 은혜의 감격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우리들은 아주 세속적인 직업에 비선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특별히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역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이 은혜와 감격을 나를 도구로만 사용하시지 마시고, 나를 통해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식탁을 차려주시는 어머니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이름을 부르심입니다. 식사를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참 그것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이 이름은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입니다. 이제 니 이름이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라 하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새 이름을 주셔서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을 말씀해 주신 소명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베드로야 (그렇게) 부르셔야지, 이미 다 버린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옛날 버린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만약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베드로야라고 불렀다면 베드로는 반석과 같은 믿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상황이 예수님을 제자들이 다 버리고 도망갔고 사실 부활의 첫 번째 현장은 제자 등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달려갔을 때는 예수님은 없고 개켜진 옷만 무덤에 있고 무덤은 열려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제외하고 여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모습을 보여주시고, 그 이름이 높던 제자들이 모두 사도들이, 이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에 대해서 증언할 때 조용한 청취자가 되어서 들어야 하게끔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 같으면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 성격은 아마 이랬을 것 같습니다. “죽기까지 따라온다며? 살았네!” 저는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실 것을 이미 성경에 예고 되어 있는 것으로 말씀하셨고, 이미 일체의 상처를 안 받으실 준비가 되신 분이었습니다.
왜? 이 사명은 자신 혼자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사명이고 누구도 거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애초부터 기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망하실 일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베드로라는 사명의 이름이 아니라 그 자연인으로서의 바요나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이름을 불러주셨는데, 당시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 이, 박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실패했으면 실패한 그대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우리들이 자신을 과장해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잘 보이려고 애를 써서 나에게 다른 인상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실패했으면 실패한 모습 그대로 자기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고 갈 때도 멀리서 구경만 하며 따라가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배신 중에서 그런 배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베드로의 이름 대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복음의 스토리는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는데 한 제자가 피투성이 되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거의 죽을 정도가 됐는데 아직 기적적으로 간신히 구출을 받아서 신앙의 정조를 지킨 단 한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담임 목사가 되었다고 할 때, 그야말로 진짜 남은 자요, 절개를 지킨 자요, 순결을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모두 존경하고 감탄할 그런 인물이 지도력을 이어받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엄한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베드로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었더라면 우리가 이 마지막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이요, 사복음서의 마지막 장인 21장을 읽을 때, 무슨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베드로, 담기에는 너무나 높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베드로 같아서 오히려 그를 통해서 복음을 배우기보다는 베드로를 숭배하고자 하는 사상이 생겨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실패한 사람을 쓰신 것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단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니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니,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불태운 사람이니, 그렇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삶에는 모두 이런저런 굴곡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순교적인 삶을 산 때도 있지만 미끄러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면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 삶의 긴 구간 속에 어느 한 토막만을 붙들고 열렬하게 그 사람을 숭배하는 사람이 되거나, 잘못된 삶의 한 토막을 붙잡고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야라고 규정해 버리는데, 자신도 그런 어벤다운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자신도 결국은 자신을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이면 좋은 것 밖에 못 보게 될 것이고,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이면 그러면 아주 인간답지 않은 그런 더러운 부분밖에 못 보게 되어서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에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하기를,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도 보여줄 수 없는 진실을 보게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는 어리석게도 어느 한 면을 붙들고 위대하다. 혹은 인간도 아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을 매도해 버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버릴 수 없는 자기의 자식으로 여기며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이 우리의 가족들을 향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또 우리의 모든 이웃을 향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사역하는 모든 사역은 보석과 같은 소중한 사역이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고 새 생명을 얻고 저것보다도 더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다시 피드백 되지 않았을 뿐이지 굉장히 많은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저는 목회하면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한 교인이 교회를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인생의 벼랑 끝에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신앙에 미끄러져서 오랫동안 방황하는데 그날따라 새벽에 일찍 잠이 깼는데 도무지 다시 잠이 들지 않더랍니다. 탈칵하고 라디오를 켰더니 극동방송에서 새벽 설교가 나오더랍니다. 그 설교를 귀담아들으면서 가족들은 자는데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펑펑 울다가 아침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교회로 달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냥 한둘이 아니라 셀 수 없을 정도 여기 여러분 앉아 있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사역을 통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통해서 하시고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논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무엇을 주고 그 바뀐 인생을 다시 다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이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나는 기대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경험이 바로 주님 사랑의 경험입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사랑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큰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으로 경험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사무치는 사람이 됐다라고 하는 의미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용서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우리(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방송을 내보내면서 청취자들에게 기대하는 인생의 변화를 여러분들이 먼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방송은 더더욱 생명력 있는 방송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내보내는 방송이 아니라 눈물의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의 체액을 묻히고 땀과 기도의 눈물과 그리고 피를 묻힌 방송이 될 것이고, 라디오를 켜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냄새를 맡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심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지나간 과오에 대해 묻지 않으셨습니다. 현재형으로 질문하셨습니다. Do you love me? 이것은 그리스 성경으로 해석하면 이게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일 수도 있고, 이 물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사랑하느냐 그 뜻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향해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향한 사랑이 더 크냐 혹은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자 베드로는 난감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거짓말이고 사랑한다고 하면 네가 사랑하는데 왜 나를 버렸느냐 하고 물으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예수님은 용기를 주셨는데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혹은 네가 나로 사랑할 것이냐? 이렇게 묻지를 않으시고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둘 다 팩트였습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님을 멀리 떠나 도망갔던 것도 팩트였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가책에 못 이겨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도 숨길 수 없는 팩트였습니다. 둘 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마음속에 오늘날 들리는 질문입니다. 여기 근무하는 이 장소가 바로 갈릴리 바닷가입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우리는 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있는 이 모든 일도 결국은 나의 밥벌이를 위한 일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눈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극동방송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마지막에 우리를 만날 때 그 일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러한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위대한 성도, 안수집사, 장로, 목사 이런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실패했을 때 여전히 있었던 이름, 지워버리고 싶던 이름, 부끄러웠던 이름, 수치스러웠던 이름,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이름, 그 이전의 이름 석 자를 부르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새 희망을 주시고,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들은 땅을 딛고 일어서듯이, 말씀에서 넘어진 사람들은 말씀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서 예수를 위해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살라라고 하는 뜻입니다. 주님 쪼끔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주를 쪼끔 사랑하는 사람은 명예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영혼을 위해 살 수밖에 없고, 그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 사랑의 소명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보이는 영혼을, 영혼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면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상기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시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넘어진 우리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사실은 푹 찢어서 떼어내도, 요한복음 마지막 장과 사도행전,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다 써도 쓸 수가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찬양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한 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베드로를 위해서 부록으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왜? 만약에 21장을 뜯어버(려서) 없다면 20장까지 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1장 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극을 합니다. 누가 인정을 하겠습니까. 근데 그사이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엄중한 사명을 따라서 사도행전이 전개되는데 바로 이렇게 리더십을 회복해 주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단지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같이 있던 모든 제자들에게 함께 이 메시지에 참여하게 하셔서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명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젊은 자는 늙고, 늙은 사람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주님이 주신 일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낱낱이 그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우리 선교를 위해서 열렬하게 수고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