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종이 되게 하소서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셨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2-23)
녹취자 : 이재호
우리 수련회 온 사람들은 아마 세 번 이상 설교를 들었을 텐데 언제 다시 읽어도 마음에 감동이 되는 성경 구절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수없이 읽었지만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 별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나 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해서 제외해 놓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처럼 되기는 진짜 싫습니다. 그렇게 제외 해놓고 보면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이 제일 만만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종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그 중인이 그 큰 돈을 맡기고 가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열심히 잘 일해서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다섯 개를, 두 달란트 맡은 사람은 두 개를 그렇게 남기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를 그냥 내어 놓았더니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책망을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칭찬이 두 사람이 똑같습니다. 결국은 주석가들은 이것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다’ ‘내가 얼마 만한 달란트를 가지고 태어났느냐’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아직 힘써서 노력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내가 무슨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를 수도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솔직히 비교를 해서 다 파봐도 내가 누구에 비해서는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달란트를 이렇게 이렇게 맡기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달란트에 대한 해석도 여기서 영어의 ‘talent’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재능이나 그런 것을 가리키느냐 박윤서 목사님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라고 해석을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맡기고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능력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기회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은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어떻게 선용했는가에 따라서 평가를 받는 것이다’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따라서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할 수 있는,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고, 두 달란트를 주고,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인에게는 아마 다섯 달란트도, 두 달란트도, 한 달란트도 큰 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진짜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은 그 종들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종들에게 두 달란트 남긴 종하고 다섯 달란트 남긴 종하고 똑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것을 보면 결국 이 주인의 관심이 그 돈의 액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자기 일을 처리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고 아마 이 이후에도 더 큰 것을 이 종들에게 그것을 시험해서 맡기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세마디로 딱 요약을 한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것은 관점의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잘했다’ 고 하는 것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잘했다’는 평가는 이루어진 일에 대한 평가이고,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고, ‘충성되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평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 인격, 신앙’이 세개가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히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은 잘하는데 사람은 착하지 않고 신앙도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냐? 교회는 필요해서 그런 사람을 쓸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일을 하면서 일을 잘할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마지막에 신앙이 어떻게 되는 것, 이것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이 세가지 면에서 모두 승리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일, 인격, 신앙’ 다 승리한 사람이고,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이 세가지를 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 ‘잘 못 하였도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냥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잘 못 했다’ 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은 못하고 인격은 악하여지고 신앙은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한 가지를 따로따로 보면 ‘잘 하였도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준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잘 하였도다’라고 했습니까? 그 주인이 일을 맡길 때에 ‘이 일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던 그것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 기준에 부합했기 때문에 ‘정말 잘됐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림을 이렇게 이렇게 그렸는데 혹은 사진을 찍었는데 자기의 의도대로 잘 나왔을 때 자기가 찍어 놓고도 ‘야! 진짜 잘 나왔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의도대로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일을 할 때에는 그 기준이 사실은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 그 분의 뜻대로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일을 하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과 정성과 기술입니다.
첫째, 지식은 그 일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요리에서 보면 식초, 참기름, 설탕이 있는데 순서를 바꾸면 완전 다른 맛이 납니다. 때로는 쓴 맛이 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렇듯이 결국은 어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한 지식은 일을 하는 사람이 습득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지식이 요소입니다. 그 일을 잘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과 자료들을 통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정성이 깃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드시 잘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정성이라고 할 때 ‘성’자를 보면 ‘말씀 언’ 변에 ‘이룰 성’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의 신학이라고 해서 결국은 그 성이라는 글자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성 혹은 치성, 지성은 더이상 도달할 수 없는 극진한 정성이고 치성은 그러한 정성을 누군가에게 받치는 것입니다. 치성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이 담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주 고급 식당을 Fine Dining 이라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점심시간에 나가서 돈까스 같은 거 먹는 거에 20 그릇 값을 줘야하는 정도의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그곳의 특징은 설렁탕은 큰 가마솥에 끓여서 한 사발씩 퍼서 주는 것이고 곰탕도 그런 것이고 김치찌개도 끓여 놓은 큰 솥에서 뚝배기에 담아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Fine Dining은 한 사람을 위해서 요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접시가 이렇게 나오면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느껴지는, 그냥 먹으면 되는데 예술적으로 담아가지고 생성회를 내어 왔는데도 그냥 담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싼 집에 가면 쑥떡쑥떡 썰어서 주지 않습니까? 막 썰어회라고 하잖습니까? 싹 떠가지고 파란 접시에다가 학의 모양을 그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야 그것이 나오겠습니까? 젓가락을 들기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사과를 막 썰어 가지고 사다리처럼 그 젠카 놀이하는 것처럼 쌓아서 이렇게 올려서 요리로 만들어서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그 연봉 몇 천만원을 받는 셰프가 그것을 썰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딱 받았을 때 ‘진짜 정성이 들어갔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특별한 날에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 그런 식당에서 대접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즐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입니다. 정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축을 좀 알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보면 보이는 것입니다. 정성이 있는 업자들은 레지 하나를 넣어도 끝까지 꽉 채워서 하자가 없이 다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면 사람들이 툭툭툭 치고서 지나가고 몇 번만 하면 두두두 떨어지면서 그 속에 공간이 빈 것이 나옵니다. 재료를 아끼기 위해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총으로 막 거품을 쏘는데 포밍을 하는데 더이상 안 들어갈 때 싸야 됩니다. 빈 공간이 다 채워지고 단열이 되고 하는 것인데 휙 하고 지나가서 그 공간이 텅텅텅 생기는 것입니다. 언젠가 충격이 가해지면 우두둑 떨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열린교회 방배역에 있을 때 우리 집사람하고 교회 식구들하고 같이 63빌딩에 뷔페가 동네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제법 괜찮은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려고 하는데 직원이 딱 막는 것입니다. ‘너무 죄송한데 오늘은 돌아 가셔야겠습니다.’ 음식 만들어주는 고기도 구어주고 생성회도 해주고 하는 코너가 있는데 거기서 이렇게 떠 먹는데 특별한 코너라고 철제 구조물을 큰 것을 위에다가 매달아 놨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받으려고 그러는데 이것이 뚝 하고 떨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실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 그것은 다 아는 것입니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만한 무게를 견딜 것이라는 것을 계산을 했을 것인데 제대로 걸려 있는지 앵커는 이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콘크리트에 확실히 박혀 있는지 해야 하는데 철제를 만든 구조물인데 그것이 밥 드는 사람 위에 그냥 떨어진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사람들이 실려 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몇 천억짜리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는데 미아가 되 버렸습니다. 연구원이 파이값을 잘못 대입한 것입니다. 계산을 잘못해서 우주로 튕겨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이 모자란 것입니다. 정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그대로 할 것인가라고 하는 지식대로 그대로 하는 정성입니다.
마지막에는 기술입니다. 어떤 엄마가 맛없는 음식을 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요리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정성은 모두 기울였는데 맛이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아는 지식, 그것을 잘 해야 되겠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마지막에 그 정성을 구현해 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그 기술이 있어야지만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 요소입니다. 지식과 정성과 기술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교육관을 건설하면서 VP라고 하는데 비닐페인트라고 하는데 이것이 시가가 1미터에 최소에 만이천원은 줘야 한다는 결과에 도달했습니다. 업체를 불렀더니 육천원이면 자기는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니까 그 사람이 제일 싸게 부르니까 시켰는데 칠하고 지나갔는데 뽕뽕뽕 하고 거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거품이 터집니다. 착착착 동그란 반쪽자리 구멍이 달나라의 분화구처럼 생기는 것입니다. 너무 신기한 것은 그 당시에 그것을 석고를 짤라 논 것처럼 예쁘게 하는 사람들이 강남에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만원을 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렇게까지 돈 주고 할 필요가 뭐 있을까’ 그러고 그 사람을 불렀었는데 정말 놀랐던게 무엇이나면 ‘VP가 다 그런거지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자기가 아무리 봐도 잘 되었는데 왜 잘못되었습니까?’ 처음부터 이 사람은 그렇게 잘 된 고급VP를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칠해서 남이 이만원받을 것을 육천원을 받으면서 칠하면서 다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 할 수 없습니다. 지식과 정성과 기술이 있어야지만 이것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대부분 착하지 않습니다. 고집이 있고 쟁이에 곤조가 있는 것입니다. 기술자로서 자기 나름의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워낙 일을 잘하면 성격이 개떡같고 변덕스러워도 비유를 맞춰줍니다.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성당에 벽화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교황이 너무 보고 싶어 죽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약속을 했습니다. ‘아무도 보면 안된다. 내가 완성하기 전까지는.’ 교황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들어가서 그것을 본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알고서 뿔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한테 ‘약속을 해 놓고 어겼냐?’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사로에 의하면 교황이 그 교황 지팡이를 가지고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도망을 갑니다. ‘다시는 가서 안 그리겠다.’ 이렇게 해서 그림을 그리다가 사팔뜨기가 되어버립니다. 똑바로 쳐다보고 칠을 하면 눈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눈은 여기에 있는데 볼 때는 저 위를 보면서 저 위에다가 그림을 그려야지만 페인트가 자기 눈으로 안 들어오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몇 년동안 이렇게 보니까 눈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사정사정하고 빌면서 우리나라 말하자면 기와집 큰 것 두 채정도 주고 마음을 달래고 돌아와서 벽화를 완성했습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그렇게 예술이라든지 무엇인가를 잘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무 같은 거 보면 심이 있잖습니까? 당근 같은 거 잘못 사면 뼈가 있잖습니까? 그런 것처럼 이 속에 무엇인가 자기 고집처럼 그것을 했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그런 고집스러움과 쉽게 이야기하면 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잘 할 뿐만 아니라 착하다고 했습니다. 착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너그러워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섬기지 말라. 이것은 죄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그런 것이 아닌 한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 평화 뒤에는 그 사람의 착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하다고 할 때 누가 착하다고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괴범이 아이가 있는데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 줄께’ 그리고 주면서 아이가 잘 따라와 ‘아이구 착하구나’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괴범은 무엇을 기준으로 착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이를 유괴하려고 하는 자신의 뜻에 잘 협조해 주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아이를 착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엄마 아빠가 낯선 사람 무엇을 준다고 따라가지 말라고 했어요’ ‘넌 진짜 나쁜 아이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유괴하려는 그 의도에 맞춰서 착하고 나쁜 것을 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주님이 보실 때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CEO들의 고민이 그것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박덕하고 덕이 많은 사람은 능력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결국은 능력이 훌륭한 사람을 써서 일을 하려면 조직의 위협을 느껴야 되고 조직이 평안하고 안정되려면 능력을 양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를 다 가진 사람을 찾기는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지위가 올라가서 재밌는 것이 있는데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는데 다 퇴사했는데 하여튼 간사라고 하나 있는데 내 마음을 많이 쓰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간사가 팀원이 하나 있는 팀장이 되었습니다. 몇 달 지나서 보니까 책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리더의 조건’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를 데리고 있는데 그것이 엄청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저는 하나를 데리고 있는데 이렇게 힘든데 목사님은 이렇게 많이 데리고 계시니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자기 혼자 일할 때에는 사람들이 못하는 것만 눈에 들어왔는데 자기가 데리고 일해보니 딱 하나 데리고 있는데 얘 눈에는 이 리더가 마음에 안 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얘는 자기를 리드를 해가야 겠는데 말은 안 듣고 그렇다고 나가라고 할 권한도 없고 자기가 나갈 수도 없고 데리고 일을 해야 되니까 ‘리더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웃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국 보면 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들도 아주 착하고 모든 사람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은 공부 별로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주 그 방면에 골수가 되어 가지고 무엇인가를 터뜨릴 수 있는 정도가 있는 사람들은 다 못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기 아래로 보거나 깔보거나 아주 독특해서 웬만한 사람들이 이렇게 부딪쳐야 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이 비유 속에 이 사람을 빌어서 다 담은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면서 ‘아닙니다.’라고 정색을 하면 그것은 굉장히 존중을 받습니다. 평소에 아주 그렇게 깐죽거리고 인정머리 없이 살면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 그 사람의 사소한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원리가 그것이었습니다. 사소한 것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중요한 것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저 사람들에 또렷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결국은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또렷하게 이야기할 때 ‘아, 저 사람의 신앙 속에 무엇인가 있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든 사람과 만나서 일하면서 착하고 이렇게 하다가 어느 한 순간 ‘이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무게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역자 수련회를 열고 했는데 새로운 교역자들이 꽤 여려 명이 있었는데 수련회 2박3일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 다들 느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 교육전도사로 들어오고 목사로 사역하다가 왔는데 우리같이 이렇게 큰 교회에서 이 소망부를 담당하는 목사가 영아부에서 태아부에서 보고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렇게 긴 보고회를 듣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 교회 정도 사이즈되면 교육전도사들은 수련회 데려가지를 않습니다. 전임들끼리 가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간사 수련회를 하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다 해보니까 나는 내수동 교회 있을 때 550명정도 밖에 안모였는데 옆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게 수련회도 안 가지고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모여서 보고회를 하면서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는 게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사람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나는 사역을 이 교회에서 하기 힘들겠구나’ 라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거미줄처럼 다 얽혀 있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통이 없으면, 예를 들어서 내가 딱 이렇게 우편으로 ‘이렇게 세공을 해 주십시오.’ 그러고 통보를 받고 내가 똑같은 모양을 제작해서 그냥 우편으로 보내고 통장으로 돈 받는 것이라면 착한 것이 별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방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 자신이 착함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는 ‘착하다’ 라고 하는 것은 ‘약간 무능하고 못 생겼다’ 라는 말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선 보고 와서 ‘그 남자 어때?’ 그랬는데 별로 내세울 게 없을 때 하는 말이 ‘착해’ ‘그 여자 어때?’ 특별히 외모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 때 ‘착해’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또렷하게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랑해서 모든 사람이 나를 통해서 넉넉하게 후대받는 느낌이 들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에너지가 엄청 많이 들어갑니다. 누구도 은혜없이는 착해질 수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착해지는 것이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래서 요새 심리학자들이 착하게 살지 말라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우울증이 많이 걸린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폭발하고 사는 사람들이 우울증이 안 걸린다는 거잖습니까? 저는 그 말도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억눌림이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억눌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나도 굉장히 많을텐데 어쨌든지간에 주님이 지켜주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사람들하고 만나는 모든 순간순간이 아주 어떤 자기 자신을 구현해 가는 그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담이기는 한데, 사르트르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이 딱 두가지로 구별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돌멩이, 건물, 펜, 자동차 이런 것들은 즉자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 있는 것입니다. 인간만 유일하게 대자적인 존재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컵인데 이 컵을 내가 손에 움켜쥐든 김수미가 움켜쥐든 이길순이가 움켜쥐든 이 컵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이 김수미와 만나서 같이 대화를 하고 일을 하면서 나는 또 다른 내가 되고 심태준이와 하고 만나서 일을 하고 대화를 하면서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입니다. 이길순하고 만나서 일하고 대화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내가 두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는 보지 못하던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확인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데 보이게 하려면 어느 시점에서 딱 줄을 그어야 합니다. 무를 자르듯이 김밥을 자르듯이 딱 잘라야 합니다. ‘2021년 12월 14일 그 때 내가 무슨 일이 있었고 그 때 내가 누군가에게 아주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나는 나쁜 인간이다’ 이렇게 정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매 순간을 사람들하고 만나면서 이전에 없던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측되는 사람을 통해서는 자신이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심태준이하고 만났는데 ‘열린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간사들 중에서 내 맘에 딱 든다. 그래서 우리 둘이 잘 해보자.’ 라고 마음을 먹어도 그것을 가지고는 내가 더이상 발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났는데 나하고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부딪치면서 내가 ‘에이씨, 내가 이렇게 힘들게 맞추면서 살아야 돼!’ 하고 때려치면 기회가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부딪치면서 ‘똑같은 일을 전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리고 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둘 때 연봉이 적어서 그것도 이유이지만 대부분 마지막에 직장을 그만두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인간관계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사람이 상사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직원이 자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가 소송도 내고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은 인간관계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철학자들 속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극복해 가면서 결국 우리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될 때 그 때 그 사람이 일을 하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나고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일에 대한 지식의 범위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지식의 범위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몇십년씩 경영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해서 꿰뚫고 있는 바가 통찰하고 있는 바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은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사람들 속에서 그런 통찰을 가지고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교회 일 뿐만 아니라 세상 일을 해도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직장에서 궁극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일을 잘 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가 유능하다고 하더라. 뛰어나다고 하더라. 아무도 통제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러면 부리겠습니까?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그것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교역자에게 부서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절대 능력 하나만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가진 능력은 있는데 무엇인가 위기를 만들 것 같은 사람은 보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교회 개척할 때는 그런 사람을 보내도 그것을 조직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을 보내면 안됩니다.
결국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 세상 사람에서도, ‘착하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 말로 표현을 하면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위치를 가질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일하면서 착한 사람이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오래 일을 했는데도 전혀 착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충성된 종아’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충성한다’라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똑같아서 표리부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이 하나님 앞에 다 바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 바쳐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자체를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했는데 두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이미 일을 하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들이 휴가에서 몇 개월만에 돌아왔습니다. 막 엄마가 요리를 합니다. 그때는 이미 아들이 도착 안 했는데 이 요리를 먹으면서 흡족해하고 행복해하는 아들의 즐거움에 동참하면서 요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초시간성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옛날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 아빠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내가 혼자 고아원에서 살았는데’ 이야기를 했는데,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몇 십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행복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전에 그 부모도 없이 달달 떨면서 고아원으로 가는 한 아이의 그림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인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픈 것입니까? 이것이 초시간성입니다. 신앙이 없는 이 아들이 어떻게 힘들게 살까 라고 하는게,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십년, 이십년 후에 살아갈 세상을 희망없이 살아갈 아들을 보면서 그 미래의 아픔이 내게 전해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절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 했듯이 그렇게 충성이라는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은총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스러움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런 거, 사람의 시선이나 그런 것들에 의해서 쉽게 흔들이지 않는 견고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영화를 보니까 테러 단체들이 백악관을 습격해서 각료들을 다 사로잡고 비밀을 말하라고 그러면서 하나씩 총으로 쏘아서 죽이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장관에게까지 왔습니다. 총을 겨누고 ‘너는 나에게 그 비밀을 말하라’ 이 여자가 ‘이미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나는 말 할 수 없다. 나는 성조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다.’ 이라크 전쟁 때 실제로 봤는지 모르지만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총격전에서 총탄을 맞고 거의 사람이 죽어가는데, 흑인이고 병사인데, 하얀 보자기에 씌어서 이송되고 있는데 ‘아프지 않느냐? 힘들지 않느냐?’ 손가락으로 흐르는 피를 찍어서 ‘항상 충성스러운’ 이라고 글을 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이해해준다. 이해 못해준다.’ 누가 그렇게 다 이해해 주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다 이해해주는 사람 없고 우리가 충성스럽게 일 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려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알려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리오왕이 다니엘이 사자굴에 갇혔을 때 ‘항상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원하셨더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이 꼭 필요해서 쓰면서도 항상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몸으로는 나를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다니엘이 갇혔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 언제 그가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자기 왕국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를 섬기는 구나. 모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었구나’ 그것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도 그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아내나 남편이 알아주겠지’ 그런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알게 되면 고마워해야지 그러고 참 예외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하면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자기 할 일이 사람이 맡긴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준 사명이니까 감사하면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 충만한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은 노예였지만 결국은 그 종처럼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안에 있는 아들처럼 딸처럼 그렇게 봉사하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세월이 다 흐르고 우리가 다 이렇게 마쳤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참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