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물로 따라 간 예수님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26-27)
녹취자: 김정호
이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형시키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습니다. 죄수 중에서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는 아주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십자가는 로마가 변방의 야만족이었을 때 만들어낸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너무나 잔혹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사형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사형은 결국 나무에 사람을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나무를 땅에다가 박아놓고 가로 나무를 사람의 등 뒤에 붙이고 양손에 못을 박고 그를 묶어서 도르래로 달아 올려서 세워져 있는 세로 나무에 그 나무를 끼웠습니다. 그리고 발에 못을 박았는데 사람의 무게가 무거우니까 이 손이 찢어지면서 자꾸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못을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박고 기차 레일 위에 있는 것 같은 아주 단단한 큰 못을 박아서 사람을 매달았고 다리도 그렇게 못 박아서 매달았습니다.
십자가 사형의 잔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총으로 쏴서 죽이든지 칼로 찔러서 죽이면 단숨에 죽는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목숨이 붙어 있는 끝까지 최고의 고통을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수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면 큰 못을 양 손과 못에 박게 될 때 필연적으로 동맥을 건드리게 됩니다. 핏줄을 건드리게 되면 핏줄에서 피가 쏟아집니다. 피가 쏟아지면 골이 깨질 것 같은 엄청난 통증과 타는 듯한 목마름이 찾아옵니다. 이 십자가도 사형시키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형 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는 재판을 받으셔야 됐습니다. 알다시피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증인들이 있었지만 증인들의 말이 서로 엇갈렸습니다. 그래서 재판장도 사형 언도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앞뜰과 근처에 있는 구릉까지 모두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사형 언도를 내려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왜냐면 그때가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었고 예루살렘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주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빌라도에게서 재판을 받으신다는 소식은 커다란 뉴스거리였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다 서로 서로 약조를 하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게 해달라고 소리치도록 사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거기에 불복한 빌라도는 비겁하게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줄 알면서도 사형 언도를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수를 위한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매달린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형장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약 120kg쯤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자기가 못 박힐 그곳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셔서 채찍에 맞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몸이 다 터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에 맞으셨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굵은 가시로 만든 관을 씌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확 박아버렸습니다. 당연히 그 가시는 예수님의 이마를 찔러 얼굴에는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헝겊 조각을 예수의 몸에 두르고 갈대를 들려주었으니 그것은 꼭 코미디에 나오는 희극 배우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느냐 한번 내 꼴을 보라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 많은 채찍을 맞으시고 자기가 매달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 그 전날도 한숨도 못 주무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가 될 때까지 남겨두고 가는 제자들과 미래의 우리를 위해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바로 그 최후의 만찬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미 오래 전에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로마 군병들하고 종교 지도자들하고 모두 다 짬짬이를 하고 예수를 잡으러 올 것을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힘을 다하여 눈물과 통곡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붙잡혀서 이리저리로 끌려 다니다가 지금 이 빌라도의 뜰 앞에 오게 된 것입니다.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 시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한 아침 6시나 7시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지셨던 곳마다 팻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은 6번을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결국 이 십자가를 예수님이 도저히 지고 갈 수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의 그 십자가를 그 근처에 가고 있는 아무 젊은이나 붙들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대신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구레네라고 하는 지방에서 온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아마 예수님을 구경하러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인도 지방에서 순교를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으며 하는 일 중 모두 자발적으로 하는 것도 훌륭하고 너무너무 좋은 것이지만 예수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것, 여러분들이 싫어도 선생님 심방을 받으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공과 공부를 하고 연초에 결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은혜입니다. 그것들이 결국은 계기가 되어서 결국 여러분들로 하여금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 너무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안 믿으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전해주기만 하면 예수님을 얼른 믿을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이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못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보려고 하지만 누구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나라에서 34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합니다. 재작년에 죽은 20대 젊은이들 가운데 두 명 중 한 명은 자살로 죽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첫 번째 깨달아야 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다음 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또 백성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다가 구레네 시몬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당연히 걸음이 지체되었으니까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에게 채찍을 때렸을 것이고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하며 침 뱉으며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약간 높고 비스듬하게 경사진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따라서 올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그 당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 봤습니다. 누가는 그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지만 두 부류로 나눠지는 것처럼 기록을 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백성이라는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에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백성이 누구였을까요? 35절에 보니까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라고 했습니다. 그 백성들은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8절에도 보니까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의 정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구경거리가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살아계실 동안에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잃은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시고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그 당시에 가장 절망적이라고 하던 문둥병자도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어서 관에 누워 있는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놀라운 예수가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인가 이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재판을 구경하러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재판을 받는 게 그들의 주 관심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어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면서 따라온 것입니다.
여러분 핵폭탄이 얼마나 무서운지 배웠죠? 그런데 역사에 보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핵폭탄은 발견되었는데 핵실험을 할 때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던 때였습니다. 핵폭발하는 광경을 구경하는 티켓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보통 부자가 아니면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야구장처럼 스탠드를 만들어놓고 쭉 앉아서 저 멀리 핵실험 하는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암으로 죽거나 아니면 질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왜 굉장히 많은 돈을 내고 모일까요? 인간에게는 구경을 좋아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디에 짐승이 찢어져 죽인 시체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구경꾼의 심리입니다. 이 백성들의 정체는 그러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서 구경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머릿속에 그려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채찍에 맞으시며 온 얼굴에 피가 낭자한 채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그 벌거벗은 채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맨발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한번 그 골고다 언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자고 하고 슬리퍼를 신고 껌 씹고 팝콘을 먹으면서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올라간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게 무슨 구경거리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왜 십자가를 지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어요?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고통 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도 안 하셨습니다. 가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집도 없으셨습니다. 그 손으로 그 발로 모든 동리를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표창을 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기 위해 끌고 가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무슨 지혜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도저히 그 죄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우리들을 모두 끌어안고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므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죽고 죄 있는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팔복산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던 사람들도 있고 벳세다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마 그들 중에는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하셨으니까 거기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예수님을 구경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구경하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애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일찍이 보지도 못했던 어떤 구경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대조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는데 한두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경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어떤 여자들은 울면서 갔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울며’라고 하는 단어가 그리스어에서 ‘통곡하다’라는 (뜻입니다). 흐느껴 우는 게 아니라 큰 소리로 소리를 내어서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의 마음속에는 이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같이 천한 사람들을 찾아오신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흉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병든 자기를 고쳐주시고 무지의 어둠 속에서 어리석게 살아가는 자기를 깨우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둡던 마음에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밖에 모르고 살던 이기적인 사람들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위해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이 사랑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은 정말 죄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예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람이 마음에 생겨났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지만 나의 질문에 답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매우 커다란 사고를 당해서 몸에 상처를 많이 입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여러분의 엄마가 대신 고통을 당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줄까요? 안 해줄까요? (만약) “우리 엄마 절대 안 그래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면)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엄마는 대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좀 기분 나쁘게 하고 등짝을 한 번 때린 것은 별개의 문제고 자식이 고통을 받는다면 부모님 차라리 그걸 보는 것보다 자기가 대신 고통을 당하는 게 훨씬 쉬운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에게 부모에게 그런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보존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도 그렇습니다. 목사님이 여러분보다 더 어렸을 때 개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개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후로 최근 약 4년 전까지 제가 개를 안 길렀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면 죽는 순간에 헤어지는 것 때문에 이게 트라우마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개가 죽고 나서 며칠 동안 울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 개를 기르겠다는 결심을 못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봤습니다. 테리라고 스피츠 믹스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굉장히 똑똑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개들은 개판으로 걸어 다니는데 얘(테리)는 마른 땅을 깡충깡충 뛰면서 걷는 애였습니다. 암컷이었고 새끼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집 바깥으로 마실을 다녀왔는데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집에 오더니 툭 쓰러지는 것입니다. 막 마당을 돌아다니더니 미친 듯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여덟 마리의 새끼에게 눕는 것입니다. 여덟 마리의 새끼가 달라붙어서 그 어미젖을 빨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약 5∼10분쯤 흐르자 갑자기 그 새끼들을 확 뿌리치고 테리가 미친 듯이 골목으로 뛰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놀래가지고 따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골목에서 팍 쓰러지더니 피를 토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쥐약을 먹었는데 쥐약을 먹으면 창자가 막 끊어지고 다 녹아내립니다. 그런 순간에 새끼가 생각이 나서 집에 들어와 그 여덟 마리 새끼들에게 마지막으로 젖을 물리고 최후의 만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까지 견디다가 뛰쳐나가 길거리에서 팍 쓰러져서 피를 토하면서 죽은 것인데 그 이후로 개를 기를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마음의 트라우마가 되어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약 55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그때 충격적으로 느낀 것은 어미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데도 집에 들어와서 마지막으로 여덟 마리에게 젖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셔서 그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대로 내버려 두시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먹고 살 만해진 모든 시대에는 사람들마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 내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너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것을 한쪽에서는 학문의 방식으로 고민을 했는데 이것이 철학이고, 한쪽에서는 그 답을 종교와 신앙의 방식으로 찾았는데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철학과 종교가 매우 많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종교부터 고등한 종교까지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학문을 통해 찾아 느끼는 것을 표현한 것이 예술입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 구원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막연히 믿었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는 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며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시면 영광스럽게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자기들에게 찾아오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것이라고 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너무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자기들을 너무 사랑하셨다는 것, 그분이 죄 없으셨다는 것까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보살펴주시고 모든 것을 바쳐서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돌아가실 때에 자기들이 대신 예수님의 그 고난을 받고 예수님은 제발 살려달라고 부르짖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 ‘가슴을 쳤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아시나요? 너무 슬픔이 가득 차면 피가 모이면서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슬픈 일을 만나면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두드리면 통증이 감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드린 이유입니다.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니까 두드리는 것입니다. 신나서 가슴을 두드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너무 통증을 느껴서 가슴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 여자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친구와 사귀었는데 어떤 일로 결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수단으로 친구를 사귄 것이고 사랑한 적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삶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위기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해야 진짜 친구를 사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구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는데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만 예수님의 뒤를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면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쳐줍니다. 뭔지 아시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증거는 얼마나 성경을 많이 외우는지, 얼마나 예배에 참석 잘하는지, 얼마나 선행을 하는지 그런 것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아주 분명한 게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죽어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들이 믿음 생활을 잘하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믿음을 덜하면 좀 약해집니다. 그런데 항상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그러면 한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이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찌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처럼) 수련회 때 모두 모여서 학년별로 돌아가면서 지하실에 모여서 기도회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까처럼 박수도 치면서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왜 죽으셨을까. 왜 흉악한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셨을까.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아이들이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기도회를 하고 나면 걸어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미끄러워서 걸어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인데도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생각할 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아이들이 흐느껴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막 야단법석하고 유별나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신앙이 아닙니다. 조용히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제까지 나를 어떻게 이끌어주셨는가. 나 같은 사람을 수억 분의 1의 확률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를 여기까지 이끄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오늘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예수님에 대해 믿을 수 있도록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삶의 갈피마다 하나님이 매 순간 나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일생에는 슬프고 괴로운 일들도 많이 일어나서 죽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그때마다 도와주셨습니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주님 앞에 용서를 빌리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바로 마음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우리들이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서너 살 먹은 어린 아이들도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여자들에게는 그 신앙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는 그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은 예수님의 형벌을 구경하기 위해 오고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누구입니까? 구경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뒤따라가는 백성들입니까? 아니면 삶 속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을 생각하며 슬피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며 슬피 울던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흐느낌에서 통곡으로 바뀌었고 예수님이 못 박힐 골고다 언덕에 다가가는 순간에는 핏빛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통곡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발 살려달라고 몸부림 쳤지만 간악한 로마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 골고다 언덕에서 망치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쿵. 쿵. 쿵.
(찬양)
망치 소리 내 마음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씼었네
믿음 생활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고 떠들며 따라가는 구경꾼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쓸데없는 속박을 벗어버리고 조용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 혼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렇게 있기까지 어떻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달콤하게 만들어주시고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기쁘게 만들어주시고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도록 우리를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마음의 찬란한 기쁨을 간직한 채 우리들이 매일매일 나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자신의 몸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주님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며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