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학 수업과 글쓰기
녹취자 : 오희열
(사회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 학기 적응은 되셨습니까? 신학공부와 글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해보고 있는데 오늘은 학교를 좀 떠나서 글쓰기와 신학공부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많으시고 실제적으로 좋은 예를 보여주고 계신 김남준 목사님의 열린교회로 왔습니다. 오늘 목사님과 함께 목사님의 신학공부에 대한 평소의 생각, 또 책을 통해 알려주신 것들, 그리고 목사님의 글쓰기에 대한 그동안의 훈련, 실제로 하고 계신 모습들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사회자)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바쁘신 중에 우리 학생들을 위해서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시고, 지금 1학년들이 주로 하지만 2, 3학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이 책은 충격적인 책이었습니다. 작년에 개정판을 내시면서 독후감을 모집하시고 신학생들에게 큰 기회를 주셨고 저희 학교 학생 중에도 마침 수상하신 분이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이번에 학생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다시 정독하면서 25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의 문체를 좀 바꾸시고 예화도 다듬고 하셨지만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이 개정판을 내셨다고 말씀해주셔서 그 얘기는 결국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지 신학공부나 목회의 본질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다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아마 1996년 쯤 이었을 겁니다. 부산에 있는 브니엘 신학교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교생이 기도원에 모여 수련회를 하는데 새벽과 저녁 말씀을 전해주실 수 있느냐고 해서 갔습니다. 아주 아담한 기도원이었습니다. 4일 내내 비가 쏟아졌습니다. 새벽에 말씀을 잠깐 전하고 저도 새벽기도하고 저녁 때 말씀을 전할 때까지는 저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경을 차례대로 읽고 있었는데 누가복음 1장을 읽을 차례였습니다. 1장을 읽고 내려오는데 80절을 읽을 때 “아이가 자라매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라는 단순한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을 네 시간을 읽은 것 같습니다. 희랍어 성경으로도 읽었습니다. 그 후 4일 동안 성경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20분 만 쓰면 배터리가 방전되는 아주 허름한 싸구려 노트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깨달은 것을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4일 동안 했습니다. 4일 동안의 집회를 마치고 나서 그 메모를 얼마나 했는지 보니까 A4용지 40매였습니다. 그것이 이 책이 나오게 된 결정적 토대가 된 것입니다. 그때 잡았던 프레임, 구조가 지금 책과 완벽하게 같았습니다. 돌아와서 그것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이 걸렸습니다. 당시 저는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제 방이 하나 있었고 저는 강의 나갈 때였습니다. 제 책을 내 방에 잔뜩 쌓아 놓고 글을 쓰는데 아내가 하도 건강을 해치니까 같이 자자고 하면 침대에 가서 아내와 같이 자고 아내가 잠들면 살며시 빠져나와서 한 새벽 4시까지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다녀와서 한 시간 반 정도 자고 강의 나가기를 6개월 정도 하면서 깊이 몰입해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책이 나왔는데 그야말로 그 당시에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찍자마자 4만5천부 정도 나갔습니다. 지금보다 그 당시에 책을 좀 더 많이 읽었다고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숫자가 팔려나간 것입니다. 그 책이 나오고 나서 두란노에서 저를 보는 눈빛이 그윽해졌습니다. 그 후로 이 책이 신학생들의 고전이 됐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그랬지만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책이 이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나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1학년이라고 하셔서 말씀드리는데, 예를 들어 내가 뒷동산을 올라간다고 하면 늘 보던 뒷동산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태백산을 종주하겠다고 하면 가기 전에 지도를 놓고 태백산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디서 백두대간이 끊어졌는지 미리 다 보고, 더 세심한 사람은 가까이 가서 드론 같은 것을 띄워서 사진을 찍은 후에 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알피니스트들에게 들어가는 굉장한 비용이 사전답사비라고 합니다. 헬기까지 띄워서 사진을 찍는데 2년 전 산과 2년 후의 산이 다르다고 합니다. 지형이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변한 지형과 선택한 코스를 가져오면 장인이 등산화를 만듭니다. 코스에 따라서 만드는데 몇 십년 전의 알피니스트 등산화 가격이 한 켤레에 1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신학공부를 할 때도 신학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고, 신학은 학문전체의 산맥의 어디에 있고, 나는 지금 어느 길을 걸어서 신학을 갈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참 많고 제가 하나님께 받은 복 중에 하나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네가 신학을 한다고? 그래 참 대견하구나. 신학이란 말이야..” 하면서 산을 보여주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온 몸으로 부딪치면서 긴 세월을 보내고 신학교 교수가 되고 나서야 겨우 종합해보니 이런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는 수백 권의 책을 참고했지만 어떤 책에서도 내가 써야할 책의 전형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순수하게 제 자신의 사유 속에서 나와서 쓰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런 책을 읽으면서 신학의 길 전체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신학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으셔서 저에게 말씀하신 것이, “목사님, 제가 이 책을 읽고 후회했습니다. 20년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10년은 절약할 수 있었을 텐데..” 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는 아직 시작이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보고 실패를 해보고 나야 정답이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깊이 숙고하시면서 신학 전체를 보시고 무엇을 위한 신학을 할 것인지 여러분이 그 길을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사회자) 목사님께서 “그 길을 가려나?”하고 말씀하실 때는 조금 덜 권하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는데 목사님께서는 정말 권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쓰셨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부제에 보니까 영어로 Guide for seminary students for how to prepare for pastor and ministry 라고 되어 있어서 지금 목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부제목을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제 두 번째 질문이 세례요한인데 앞서 말씀 중에 답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이, 그날 누가복음 1장 80절에서 큰 감동을 받으시고 그 감동을 이어가신 것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도 있으시겠지만, 그 한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 또 오늘날 조국의 교회에 필요한 그 한 사람이 목사님이 되셔야만 했고 또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하셔서 초청하고 계신데, 그것이 왜 세례요한일까? 저 같으면 사도바울이 먼저 생각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베드로일 수도 있을 것이고, 구약의 인물들 중에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목사님께서 세례요한으로 하신 것이 책에는 물론 잘 나타나 있지만 그 이야기를 좀 해 주십시오.
(목사님)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고민이 있었는데 본받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만이 아니라 세상에 수많은 이성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냥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나에게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녀가 내 마음을 끌어야 하고 거기서 사랑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에서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회심하고 얼마 있다가 바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바울보다 바나바가 훨씬 더 매력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러다가 아내와 결혼했는데 아내는 다윗의 팬이라고 하면서 내 남편이니까 다윗을 한 번 좋아해보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너무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훨씬 매력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이리저리 표류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에 대해서 깊이 끌리게 되었고 나중에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라는 타이틀로 세례요한에 대한 책도 써서 지금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라고 하면 세례요한과 사도바울은 결이 다른 삶을 살았지만 철학자로서, 신학자로서, 세계와 하나님과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에 있어서는 세례요한에게 비교될 수 없는 안목을 가진 스승이라고 바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은 평가가 다르지만 다윗이 어마어마한 철학자였는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철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내 마음에 그렇게 화살이 꽂히듯이 세례요한이 꽂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돌아보면, 제가 1988년도에 신대원을 졸업하고 88년도에 THM을 들어가고 89년도에 개인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영적인 변화가 있었고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계속 공부해서 신학교 어느 한 구석에서 구약이나 히브리어, 고대 근동어를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영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청교도와 부흥의 역사를 읽으면서 참된 부흥을 너무 갈망하던 끝에 이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복음서를 통틀어 이야기하면 세례요한이 누구냐고 하면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설교 몇 편을 남기고 죽은 사람 아닙니까? 그 이상의 무슨 기록이 거기 나옵니까? 물론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했다고 나오지만 어쨌든 설교 몇 편 하고 일찌감치 목이 떨어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그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셨을 정도로 엄청난 위인이었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서 제가 교수생활하면서 연구해본 적이 있었는데 세례요한이 소명을 받는 패턴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는 패턴과 똑같습니다. 세례요하는 구원사적으로 구약의 마지막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이고 신약의 입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이 끝날 때에도 세례요한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끝나고 신약성경이 시작할 때는 세례요한의 출현과 함께 시작하니까 구원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 온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이 메시아의 오심, 메시아와 함께 이루어질 왕국에 대한 갈망으로 불탔던 사람입니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던 순교의 각오로 설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엄청나게 움직였습니다. 부흥을 갈망하면서 살아야 하는 설교자로서의 분명한 모델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제가 세례요한에 천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그때 세례요한을 만나면서 제가 3년 반 동안을 매일 기도했습니다. 순교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순교 안하고 여태 잘 살아있지만 그럴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에 대해서 잠시 천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자) 사도바울도 그렇고 베드로도 그렇고 세례요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분들이 사실 우리에게는 너무 큰 분들이라 부담스럽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같은 양의 구원을 받아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지만 너무 다르고 범접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음에 있어서 저는 세례요한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따라가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태어난 것도 다르지만 어릴 때부터 다르게 길러졌고,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우리와 같은 일상의 나눔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례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달라서 감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리스도를 세우고 자기를 낮추는 과정은 너무 귀하지만 저와 너무 다르다는 그 느낌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 마르틴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목회자의 소명은 일반 신자의 소명과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터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는데, 지금부터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설교자나 목회자, 선지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일하게 느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세성과 타계성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계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역사성이 없어집니다. 역사적인 책임 같은 것들을 회피하게 되고 타계적인 것만 가치에 두고 사는 현실도피적인 인간이 되기 쉽고, 역사성만 강조하고 내재적인 책임만을 강조하면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우리가 무얼 하든지 결국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초월성에 대해서 우리가 균형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를 단순히 사회개혁의 매체정도로 보고 신앙의 초월성에 대해서 마음을 별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이쪽에 치우친 사람들이라면,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아무 상관없이 자기 개인적인 경건과 위로에 만족하고 현실과 전혀 다른 게토화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쪽에 치우친 것입니다. 사실 그러면 안 됩니다. 제 표현에 의하자면, 어떤 면에서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 사람 같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역사 속에 살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오늘 밤이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릴 것 같은 타계성을 가지고 살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수많은 고통의 문제나 시련,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은 그 두 가지를 너무 조화롭게 자기의 인격 안에 구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롯의 불의를 꾸짖는 것이라든지, 가난한 자의 삶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마치 이 현실이 모두인 것처럼 분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설교하면서도, 토마스 아켐피스가 한 이야기처럼 세례요한은 까치발을 띄고 산 사람이다, 언제든지 역사의 이슬로 사라져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요한이 세례요한을 요한복음 1장에서 소개할 때,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라고 소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현실과 영원 속에서 까치발을 딛고 산 세례요한, 감사합니다.(“까치발을... 현실과...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영적으로 고귀하고 가장 고상한 단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저는 대변해서 말씀드리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개신교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톨릭과 달리 목회자가 된다고 하면 적어도 자기 가정을 버려야 한다던가 육체적인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는 면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모든 일상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세례요한, 사도바울, 이런 사람들의 영적이고 신앙의 고매한 경지를 추구하고 있는, 까치발도 아주 심각한 까치발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어느만큼 누려도 되는지 그 갈등이 신학생을 봐도 그렇고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그 점이 어렵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목사님) 마르틴 루터의 시대에만 해도 여전히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중세에서 여성의 위치라는 것은 정말 하잘 것 없었습니다. 사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로마시대까지 올라갑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구분이 명확했고 여자는 집 바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공중 앞에서 내는 것 자체가 가장의 엄청난 수치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중세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학을 비롯해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성주도적인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오늘날의 젠더 문제가 본격적으로 폭발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 산업혁명 이후였습니다. 산업혁면이 되면서 자본주의로 넘어가고 이 자본에 대한 주권들을 남자들이 갖기 시작하면서 여자들의 사회적인 위치는 더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고 남성 의존적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런 역사를 개관하면서 16세기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계몽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중세의 기후는 근대로 넘어오는 사이에 있고, 위에서는 사상이 들끓고 있었지만 아래에 있는 평민의 삶은 거의 연장되는 삶인데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남편이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개킬 때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신다.” 당시로서는 사실 상상할 수도 없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마르틴 루터는 자유인이었습니다. 가톨릭을 보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도화되어서 출가를 해야 하고, 가정을 가지면 안 되는 것으로 살았지만,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속리산” 충청도에 가면 속리산이 있는데 세속 속, 떠날 리, 산 산입니다. 우리가 보면 세속을 떠난 산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산 분리 속 속리산입니다.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난 산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쯤 돼서 나타난 타락의 풍조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모든 제도적인 부분은 기가 막히게 갖춰져 있지만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 그 제도를 비웃으면서 온갖 부패한 풍조들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도, 사람이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수도원을 만들어도 세속은 도시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흘러나와서 도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완전히 금욕적인 삶을 살고, 프란시스코 수도원처럼 엄격한 시간에 맞춰서 자기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남을 따라서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일상이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당연히 집도 있어야하고 생활도 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기에 신앙의 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허락되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자기를 사랑하려는 자기중심적 자아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는 건강한 자아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거기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승리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허한 경건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과 관련지으면서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삶으로 올려드리면서 사는 것은, 수도원에서 사는 삶을 악기 하나로 연주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이런 식의 일상의 삶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쳐지기만 한다면 경건의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것을 해 내는 것이 일상의 우리의 과제이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거룩한 자녀인데도 세속 속에 두신 이유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거룩한 곳이지만 교회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모형이 교회 안에서 다 일어납니다. 시기, 분쟁, 질투, 욕심, 다툼, 분쟁, 모든 것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거명하면서 경고합니다. 그런 일상 속에 살고 있는 목회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학을 가르치시다가 돌아가신 김희보 교수님이 계신데 성자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제사장을 생각해보십시오.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제사 현장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죽입니다. 안 죽으려고 짐승은 배설물을 쏟아냅니다. 결국 죽고 해체되면서 내장과 피들이 쏟아집니다. 연기가 피어 올라가고 죄인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비규환입니다. 그 속을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지나다니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를 서는 제사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목회자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상에 들려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하는 눈물소리, 짐승의 배설물, 찢어진 짐승의 창자, 피가 튀는 그곳을 깨끗한 옷을 입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 사이를 오가면서 절망적인 죄인과 그 죄인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과의 화목을 중재하는, 너희는 평생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울림이 아직까지도 저에게 있습니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목사님. 책으로 다시 돌아가서, 목사님께서 세례요한의 전형을 이야기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목회자의 준비를 이야기하십니다. 육체적이고, 지성적이고, 인격적이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준비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각각이 다 너무 귀해서 저도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셨을 때 각각이 하나같이 다 중요하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져 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순서를 매기기 힘든 것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께 나름의 순서를 주신 것도 있고 혹시 목사님의 생각 가운데 이것이 순서가 있다던가 혹은 어떤 것이 조금 더 중요하다던가, 어떤 것이 기본이다 라던가 하는 것이 있으신 여쭙고 싶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차피 책으로 쓰니까 앞에 나오거나 뒤에 나오거나 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지 다 맞다고 보는데 제가 이 책을 구성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자연에서 은총으로”였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은총의 선물이지만 순서를 보면 자연에서 은총으로입니다. 또 하나, 구속의 순서를 보더라도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창조주에 대한 관념이 먼저 있어야만 구속에 대한 관념이 생겨납니다. 저의 표현에 의하면, 창조주의 관념이 먼저 있고, 창조주에 대한 관념을 토대로 구속주를 바라보고, 그 구속주의 관념으로 창조주의 개념으로 돌아갈 때는 예전에 희미하게 알고 있던 창조주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일 처음 시작한 것이 몸이었습니다. 그 당시보다 지금, 이 책을 쓴지가 거의 25년 지났는데 지금 와서 보면 사람들이 몸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철학에서도 몸은 거의 천대받았는데 현대 철학에 들어오면서 이 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사조적으로 보면 18세기에 이루어졌던 낭만주의, 자연주의, 특히 낭만주의에서 그런 것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독일에서의 낭만주의를 흔히 질풍과 노도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의미는, 바다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파도를 일으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바다만 봤습니다. 멀리서 바다를 보니까 늘 말이 없고 수평선 하나 보여주는 물입니다. 그런데 낭만주의가 일어나면서 들여다보니까 바람이 불면 엄청난 파도가 치는데 다 똑같은 파도가 없고 날마다 다른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이전에 고전주의에서는 문학적으로 시와 희곡이 발달되었습니다. 소설은 오히려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희곡과 소설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 규칙에서 딱 어긋나면 가치가 없다고 하고 단절해버립니다. 로맨티시즘에서 로망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원래 불어에서 나왔습니다. “소설”이라는 뜻이랍니다. 그 소설이 모든 소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남녀 사랑을 다루는 장르, 그 중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다루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사와 영주 부인의 사랑이라든지,
(사회자) 중세시대에 아주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기사와 그 집 주인 딸과의 사랑이라든지, 일설에 의하면 그것이 십자군 전쟁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이야기가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원정을 갔는데 전쟁을 나가서 헤어졌던 사람들의 소식이 없고 외로운데 누군가가 그것을 가공적으로 써서 표현한 것을 보면서 서민들이 격하게 공감하고 그런 소설들이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나중에 낭만주의에서 꽃이 피었다고도 합니다. 그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끼친 좋은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몸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길, 남편의 길이 있으면 그 외에 다른 것은 다 쓸 데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남편이기 전에 남자로서, 아내이기 전에 여자로서 무엇을 느끼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 감정, 환희, 슬픔, 기쁨, 이런 것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생리학적으로 보면, supervenience 라고 하는데 수반심리학적으로 보면, 물론 미묘한 것들이 다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간의 많은 감정들이 물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생리학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고 그 몸이 결국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된 것이 낭만주의입니다. 지금에 와서 영호니라는 것이 증명되지도 않고 진리라는 것을 부인하고 나니까 몸이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제가 예견한 것은 아닌데 자연적인 순서로서, 우리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몸이 없으면 내 인생도 없고, 그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몸에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를 해보고 나니까, 목회자들 사이에서 흔히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돈이 없으면 은행에서 빌리면 된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디카로 사진을 찍어서 컴퓨터에 올려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질 않았습니다. 저는 sns도 전혀 하지 않고 카톡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늙어서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관심이 있으면 왜 안 하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제가 컴퓨터를 모르면 컴퓨터 잘 하는 사람을 전도해서 교회에서 은혜 받게 하면 봉사합니다. 정 안 되면 돈을 주고 외부 업체에 일을 주면 됩니다. 그런데 빌려 쓸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지 모르지만 목회자가 목회를 잘 하다가 한 달 아프면 교인들이 죽을 끓여오고 소고기를 사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1년 쯤 아프면 “언제쯤 물러나실까?”, “누가 후임으로 좋을까?” 합니다. 저를 많이 지도해주신 박희찬 목사님은 “목회자는 몸을 먹고 사는 직업이다. 건강을 잃으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몸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어마어마한 체력을 요구합니다. 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운동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제가 야구도 좋아하고 축구도 좋아하고 좋아한 운동이 많습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몸에서 시작하십시오. 지금 젊은 분들은 운동을 하십시오. 걷기 이런 것 말고 격투기 같은 것을 하십시오.
(사회자) 격투기를 추천하신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목사님) 탄탄한 몸을 만들어서 특수부대 출신 같은 사람에게는 안 되겠지만 평범한 사람과 붙으면 3대 1정도 해도 한 방에 눕힐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훈련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평생 쓰지 마십시오. 쓰면 문제가 생기니까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몸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 몸을 건강하고 순결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격, 지성, 열정, 정서, 영적인 것으로 더 내면화되어 들어가면서 결국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쓰실 때 좋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자) 그 격투기, 그것을 요즘의 모든 신학생들, 저희 학교는 특히 그렇습니다만 연령대가 다양합니다. 남녀구성도 예전에 목사님께서 다니실 때와는 다르고, 목사님께서 여전히 가르치시지만 교단이 달라서 여학생들이 굉장히 많고 나이차이도 많이 납니다. 특히 한국어 과정이 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투기를 권하시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총신대에서 가르칠 때는 거기는 아직 학생들이 어리고 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충분히 그런 운동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했는데, 혹시 이런 것 아십니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이 평소에 운동을 하는 사람인지 안 하는 사람인지, 건강상태, 심지어 심리까지 다 알아맞힙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전공한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운동을 계속 한 사람은 스텝과 자세 자체가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도 스텝 자체에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양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20대 초반이라면 헬스부터 다른 운동은 다 하면서, 우리가 화장 할 때도 색조화장 전에 기초화장을 하듯이, 당신이 20대라면 격투기까지 하면서 색조화장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젊지 않고 연세가 드셨다면 걸어 나오실 수 있으니까 학교를 나오시잖습니까? 그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운동을 꼭 하셔야 합니다. 나의 온 몸을 건강한 상태로 기분 좋게 유지하고 목회에 대한 어떠한 짐이 지워져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관리를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 하는 마음으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목사님께서 주석 달아놓으신 것을 보면, 이 육체적인 준비에 관한 것에 대해서 개정판을 내시면서 생각이 바뀌신 부분을 오늘 구체적으로 더 많이 듣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좋습니다. “인격적”인 부분이 나왔는데, 목사님의 예를 드셨는데 교회에서 터무니없이 너무 큰 오해를 받으셨지만 변명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나가서 생활하시기 위해 강원도에서 광부가 되셨다가 그 사이에 오해가 해소되면서 다시 교회로 초빙되셨다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잘못한 경우도 많겠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실제로 잘못한 사람조차도 안 떠나지 않습니까?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시고 광부로 지내시다가 인정을 받으신 것, 굉장히 좋은 예입니다.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구체적인 사례가 요즘 같은 세대에 울림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희가 조금 마무리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이 책이 신학생들이 신학수업을 하면서 준비하는 책, 마음을 다지고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라면 목사님께서 신학공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쓰신 책은 “나는 신학공부 이렇게 했다”가 아닐까 하는데 책이 너무 두껍고 이 책이 볼륨 1인데 그걸 보고 제가 더 걱정됐습니다. 이 책을 조금 소개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학생들이 다음 단계로 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이 책이 쓰여진 것이 2016년이었으니까,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가 나온 지 20년 만에 나온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동안의 저의 지적인 발전과 영적인 성장, 이런 것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신학교를 들어왔다면 이 정도 책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래 두 권으로 쓰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세 권을 쓰려고 하는데 올해 2권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누가 어떻게 신학을 하는가? 이것은 1권에서 다루는 내용이고, 2권과 3권은 신학을 하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면 목회를 하기 위해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2권의 처음 시작은 신학을 위한 준비학문으로서의 인문학부터 시작해서 문학, 역사, 과학, 철학, 예술, 외국어, 이런 이야기부터 들어가고 고대 교부들, 마르틴 루터, 르네상스 정도 해서 2권이 끝나고, 마르틴 루터 이후부터 현대 신학자들까지 3권으로 해서 총 1900페이지에서 2100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1학년이시니까 너무 욕심내지 마시고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시고 종합적인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처음에 1년 공부하다가 지적인 허영심이 생깁니다. 신학교 들어온 학생들 열 명 중 일곱 명이 교수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학을 꿈꿉니다.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많이 만나보는데, 저 학생은 정말 유학 오길 잘했다고 생각되는 학생은 열 명 가운데 두 명 밖에 안 됩니다. 사실 열 명 중에 두 명이 공부하고 와도 한국에서 교수로 쓸 수 있는 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만일 여러분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려고 한다면 지금 체재에서는 자기 전공을 택해야 하고 전공을 공부해야 하는데,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칼빈은 전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루터는 전공이 무엇이었습니까? 아퀴나스의 전공을 굳이 꼽으라면 무엇입니까? 슐라이마허의 전공은 무엇입니까? 칼 바르트는 무엇이 전공입니까? 우리가 대답을 선뜻 못하는 이유는, 지금 거론한 인물들 모두 백과사전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encyclopedia” 라는 말 아실 것입니다. pedia는 교육이라는 뜻이고 en은 그 안에 있다는 뜻이고 사이클은 돈다는 뜻입니다. 나무위키 보시면, 로셀린을 검색하면 몇 세기, 무슨 음악, 이렇게 나뭇가지처럼 이어져 나오는 것처럼, 지식이 꼬리를 물고 돌면서 우주적인 판 페디아가 되는 것입니다. 판 코스믹하게, 범 우주적으로 학문이 전체를 보여주면서 하나님과 인간과 역사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사실 예전의 교육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전공을 한 가지 한 것이 아니고, 천문학자인 동시에 수학자이고, 수학자인 동시에 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 이런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학문이 엄청나게 많이 분화되었는데 분화된 학문의 방식이 공업이나 3차 산업, 4차 산업에서 뭔가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우리가 목회를 하며 가르쳐야 하는 지식의 양상은 깊이 파고들어가서 바울의 칭의론 하나를 배우는 그것이 목회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어 낸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면 설명이 짧아질 것 같습니다. 어떤 교인이 성경 로마서 9장을 읽다가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께 물어봤더니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목사들은 모르고 교수님께 물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성경구절을 가지고 신학교에 가서 교수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은 조직신학 전공이라서 성경은 잘 모르니까 성서신학을 하는 분께 가보라고 했습니다. 성서 신학자를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그분은 구약이 전공이라서 신약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된다고 신약 전공하는 분께 가라고 했습니다. 신약전공하신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그분은 공관복음이 전공이라 로마서는 잘 모른다며 바울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해서 수소문 끝에 바울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더니, 그분이 너무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신은 데살로니가를 전공해서 로마서는 잘 모른다며 로마서 전공하신 분께 가보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로마서 전공하신 분을 찾아서 물어보니까 정말 미안하다며 8장이 전공이라서 9장은 함부로 이야기할 처지가 안 된다고 했답니다.
비록 희화화 했지만, 이것이 오늘의 세계이고 우스갯소리로 현대의 박사는 깊을 박 자의 박이 아니라 얇을 박을 쓴다, 그래서 옆으로 1mm만 가도 전혀 모르고 심지어 한 사람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할 때 권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가 8장을 전공했는데 9장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학자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저 분은 얼마나 심오한 분일까!”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회를 하면 몇 장을 전공하시겠습니까? 세밀한 지식은 전체를 보는 지식을 토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저는 학교에도 있어보고 교회에도 있어봤는데 학교에 있을 때는 분석하고 비판하는 정신이 학자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못 하면 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종합하고 통합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두 훈련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분석하고 비평하는 정신으로 쏠려버리면 설교단을 논쟁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반대로 통합하는 정신만 있으면 강의실에 올라가서 강의를 하는데 이게 설교인지 강의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바람직하다면, 여러분은 양쪽으로 스위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 책에서 인격적인 준비를 이야기했는데, 인격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통합하고 종합하면서, 그것이 나 개인에게 적용될 때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할 때는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교리에 대해서도 비평하고 분석하면서 어떤 것이 성경에 가까운 지 따질 때는 비판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왜? 진리를 다루는 사람에게 이 비평과 분석의 정신이라는 것은 종합하고 통합하는 정신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통합하자고 하면 이단이든지 삼단이든지 다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이,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무리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 딱 두 가지만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이 교리반에 들어오면 항상 따라시키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부하게 하시려고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도 지적하셨지만 성경에 보면 “알라, 알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살피라, 살피라.” 수없이 나오는 명령형입니다. 기독교는 지성만을 앞세우는 종교는 아니지만 지성이 굉장히 중요한 토대가 되는 종교입니다. 사실 지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도 없습니다. 공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부하기 싫으십니까? 책 읽는 것이 귀찮으십니까? 목회자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딱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엄청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성경과 성경의 인접학문들을 철저하게 공부해가시면서 지성의 근육을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엘리야가 갈멜산에 장작을 다 쌓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불이 내려오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소설을 보면 작가가 두 종류입니다. 아주 현란한 말장난, 가치 없고 재미없는 것은 빼고 상당히 재밌고 뭔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작가들을 볼 때 두 종류라는 것입니다. 말장난이 현란해서 8시 드라마로 내보내면 대박이 날 것 같은 그런 류의 작가가 있고, 어떤 작가는 작품에서 그의 삶과 죽음을 오고갔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합니다. 설교자의 경우에는 삶과 죽음을 넘나든 어떤 세례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해석하기에 따라서 주님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했다거나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났다거나 하는 것처럼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영적으로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비밀스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 말씀처럼 설교자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 spiritual 한 사람이야 한다, 그가 학문이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덜 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extraordinary holy, 비상하리만치 거룩한 사람, 비상하리만치 spiritual 한 사람, 그 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제가 한 때 아주 좋아했던 청교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라는 인물입니다. 스물아홉 살에 죽습니다. 비상한 목회자였습니다. 설교하러 단상에 올라가면 설교를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답니다. 젊은 목사의 얼굴에 주님을 만나고 온 광채가 확 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아니라 조금 전에 주님을 만나고 온 저분의 얼굴에 저런 광채가 비친다면 저분을 대면해주셨던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일까? 그러면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미천한 인간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목사 때문이 아니라 목사가 만나고 온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아주 뛰어난 예로, 맥체인이 이런 말을 남깁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예수를 많이 닮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해 가는 그 과정 자체가 자기를 완성해가는 행복한 과정이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회자) 목사님, 사실 마지막 질문이 있었는데, “글쓰기” 입니다. 오늘 주제가 “신학공부와 글쓰기”였습니다. 시간이 조금 있으니까 짧게 이야기해주시는데,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지 목사님의 소신을 요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한 편을 찍고 싶은 내용입니다.
(목사님) 영업 비밀인데...
(사회자) 조금만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타고나는 면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발하지 않고는 타고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재밌는 것이, 제가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책 읽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로 좋아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어디 있겠으며 한번쯤 자신이 문학소년, 문학소녀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기독교 작가로서 여태까지 200만권 정도의 책을 인쇄했습니다. 독자들에게 너무 고맙습니다. 실감이 잘 안 나실 것입니다. 8톤 트럭 하나가 만 권이니까 200대 분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교수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처음으로 글로 옮기려고 할 때 세상의 어휘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습니다. Beyond my description입니다. 제가 어휘 실력이 그렇게 달리지 않는데, 뭔가 적합한 단어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뭔가를 느낀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느낀 것이 없이 글을 잘 쓰는 것으로는 작가가 될 수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을 자기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 비유하자면 원자재입니다. 총장님, 주부로서 살림하시니까 잘 아실 것입니다. 백화점 카탈로그를 보면 1kg에 40만 원짜리 소고기가 있습니다. 1만4천 원짜리도 있습니다. 1kg에 1만4천 원짜리 고기는 집에 가서 그냥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얇게 썰어서 양념을 많이 해서 양념 맛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히 근처에도 못 가보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소고기는 A+++++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A++을 봤는데 전문가들은 A+++++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고기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좋은 숯을 피워놓고 고기 그 자체를 잘라 구워서 고급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양념을 바르는 것은 고기에 대한 모독이고 실례가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아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 작가가 된다고 하면 하나님과 관련된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진솔하게 경험하게 되면 서투른 말로 써도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읽는 사람에게 공감은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out put을 하려고 훈련하지 말고, in put 하는 훈련을 훨씬 많이 해야 합니다. 물이 꽉 차면 결국 넘치는 것처럼, 자기 속에 느끼는 것이 많으면 그림을 그리든지, 글로 쓰든지, 아니면 무용을 하든지, 뭐든지 바깥으로 내놓지 않고는 못 베깁니다. 기술은 그 다음의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목사님.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됐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책을 다시 한 번 정독하시고 목사님 말씀을 다시 보실 수 있으니까 신학공부와 글쓰기에 대해서 큰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목사님 여기까지 하고...
(목사님) 마지막으로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이틀 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처음 쓴 책은 아니고 25년 전에 나와서 80쇄가 찍힌 책입니다. 이번에 한 문장도 그대로 두지 않고 다시 썼습니다. 기본적인 흐름은 똑같습니다. 예쁘게 나왔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으시는 수강생 모든 분들게 한 권씩 드리겠습니다.
(사회자) 목사님을 찾아오면 이래서 좋습니다. 늘 책을 선물로 받고 갑니다.
(목사님) 그 대신 이걸 읽으시고 느낌을 블로그나 리뷰에 많이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다양한 sns를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 트윗으로 짧게라도 남길 수 있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목사님. 그 책을 보니까 전에 안식일에 관한 책, 성수주일과 함께 읽어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지 못해서 지금 굉장히 기대됩니다.
(목사님) 이 책이 20여 년 전에 교회를 한 번 흔들어놓았던 책입니다. 80쇄가 찍혔으니 많이 나온 책입니다. 이 책과 성수주일을 같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작년에 코로나 중에도 좋은 책들을 많이 내주셔서 그런 것을 계속 소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을 계속 만들어도 너무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좋은 책이 많으신데 책을 정독하고 질문을 만들어서 쉽게 전달해주는 시간, 물론 쉽지만은 않으셨겠지만 자세히 들어보시면 다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수고하셨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목사님, 다시 한 번 너무나 감사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