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생에 관하여
녹취자: 조경훈
오늘 처음 오신 분들만 한번 인사를 하겠습니다. 몇 분 계시네요. 이영석 집사님부터 할까요?
[이영석 집사] 안녕하세요. 4교구의 이형석입니다. 앞에 계신 분하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강의하실 때 가족들이 한둘씩 코로나에 걸려 있었는데 비몽사몽 하면서 강의를 들었는데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질문들이 저희가 한 것처럼 다 저희 이야기 같아서 너무 공감됐습니다. 두 번 정도 남았는데 앞으로 더 고민들을 나누고 목사님의 명쾌한 해답들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백석 청년] 4국의 이백석이라고 합니다. 이 자리는 3~4주 차 분들이 참여하셔서 참여하기가 부담스러웠던 자리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로 듣는 게 가장 마음에 안정이 오고 편안하게 듣는데 직접 듣는 자리에 부담스럽지만 크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고 3~4주 차를 참여하게 됐는데 많은 궁금점들이 풀어지고 인생의 지혜를 얻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정원 자매] 저는 청년부 4국 문경원입니다. 목사님을 가까이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좋은 강의를 듣게 되어서 기대가 큽니다. 이 시간 잘 듣도록 하겠습니다.
[기나연 자매] 청년 4국의 기나연 자매입니다. 마지막 강의를 신청했는데 이번 주제를 직접 듣고 싶어서 오게 됐습니다.
[이지현 자매] 청년 4국 이지현입니다. 오늘 인생에 대해서, 마흔통에 대해서 얘기하신다고 해서 관심이 있어서 오늘 나왔고 기대하는 잘 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년 김윤영] 안녕하세요. 장년 4교구 김윤영입니다. 중학교 2학년,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자녀가 있고 저희 큰아이가 중학교 남자아이인데 BTS 김남준보다 목사님이 훨씬 멋있다고 말하고 엄청 팬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많이 어려울 텐데 많이 집중해서 듣습니다. 개구쟁이인데도 불구하고 저도 놀랐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남편도 옆에서 ‘나도’라고 해서 저희 집에 목사님 팬이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말씀이 뭐가 어렵냐? 하는데 사실 저는 설교를 듣고 한 시간 정도 쉼이 필요한 지식이 그 정도라서 목사님 앞에 앉는 게 많이 떨리고 부담스럽다고 처음에 생각했는데 권현민 구역장님께서 구역 단톡방에 누가 하겠냐고 권해주셨는데 워낙 목사님과의 만남의 자리가 귀하니까 제가 해야 되나요? 남편이 해야 되나요? 그랬는데 두 분 다 가시라고 해서 감사한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들었을 때 남편이 아까도 말했지만 ‘너가 다 질문했니?’라고 저한테 말하더라고요. 모두의 고민들이 모이는 것 같고 성경적인 시각에서 목사님의 조언을 들었을 때 굉장히 깊이 느끼게 되는 것들이 많아서 소중한 시간이라 참 감사한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온라인으로 들어오신 지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은정 자매님에게 인사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양은정 자매] 저는 청년 4국의 양은정 자매입니다. 지난주에 참여했었는데 이번에도 제가 좀 기대를 하고 있는 편입니다.
[목사님] 기대를 하세요.
[조현동 집사] 1교구의 조현동 집사입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해주시고 이런 자리가 너무 감사합니다. 아내가 스피커폰으로 같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가 많이 되고 첫 번째 시간에 들었는데 여러 가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오늘도 기대가 되고 집에서 듣고 있지만 현장에서 듣는 것처럼 열심히 좋은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김지현 집사] 6교구 김지현 집사입니다. 세 번째 듣고 있는데 불혹의 나이라고 했는데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마흔이 되니까 불혹의 나이가 맞나? 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목사님의 마흔통을 통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40대의 삶을 살고 싶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열심히 듣겠습니다.
[목사님] 박수로 모두 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너무 답변을 많이 해서 진이 빠져서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압축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질문1]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때론 하나님을 빨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삶의 고난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기도 합니다. 명랑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삶의 어려움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목사님께서는 가장 어려웠던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명랑하게 해결하셨나요?
[답변]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은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가볍다. 라고 하는 사람은 인생이 가벼워서 가볍다고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없어서 가볍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인생의 짐이 있기 마련이고 말로는 하나님을 빨리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기보다 세상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때로는 죽음을 희망해보기도 하는데 살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을 용기도 별로 없습니다. 다음날 깨어나면 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어제의 고민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마련인 게 인간입니다.
명랑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를 제가 여섯 번을 했습니다. 사실 그때 쏟은 체력이 한 달이 지나도록 여파가 회복이 안 됐고 그때 소비했던 체력이 아직 안 올라온다고 할 정도로 제가 젖 먹던 모든 힘까지 모두 쏟아서 설교했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고역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생애적으로 변화됐다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에서도 보여준 바와 같이 삶의 명랑함을 회복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랑함이라는 게 생각 없어서 명랑해지는 게 아니라 생각을 너무나 많이 해서 그것을 극복하고 그다음에 명랑해지는 것까지 도달해야 되니까 보통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인생에 힘들었던 때가 언제냐? 라고 묻는데 9세까지는 힘든 것을 잘 몰랐습니다. 10살부터 10대인데 10대 때에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고 20대 때도 그랬고 21살 때 주님을 만났지만 진짜 제대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26살 정도 돼서 제대로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을 하고 30대 때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산 시기였습니다. 40대 때는 열린교회와 함께하면서 살아온 시기였습니다.
고통을 받는 종류는 각각 다르지만 다 있었습니다. 10대 때는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고민했다면 20대 때는 같은 고민의 연장선상으로 아직 온전한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으로 고민을 하고 30대 때는 가난과 여러 가지 마음고생, 교회를 섬기는 것, 공부하는 것 사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40대 50대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느 한순간 모든 것을 초월하고 완전한 명랑함을 회복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참 요원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40대라는 나이에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겠지만 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매일 매일 삶의 어두운 한 면만을 바라보지 말고 밝은 면도 바라보면서 그것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화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과 그것이 전혀 없어서 자신의 삶의 현실에 치여서 살아가는 사람과의 차이는 너무 크지 않는지 생각해봅니다.
1번 질문에 대해서 요약하자면 삶의 명랑함은 결국 두 가지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신앙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낙관을 발견하는 명랑함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가 의지적으로 명랑하게 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아예 없으면 사실 그 사람이 신앙을 오래 지탱하기도 힘듭니다. 의지적으로 삶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같이 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은 인정하고 당장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욕구불만으로 살지 말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어떤 즐거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면서 사는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질문2] 육체적인 늙음이 있듯이 영적인 늙음도 있나요? 영적인 부분이 무뎌지는 것도 늙었다고 얘기할 수 있나요? 아니면 그것은 믿음이 약해진 것이랑 상관이 있는 것인가요?
[답변] 육체의 늙음은 있지만 영혼의 늙음은 없습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용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들어보셨을 건데 ‘늙음에 관하여’라는 설교가 있습니다. 저는 제 설교를 거의 다시 안 듣는 사람입니다. 내가 설교하는 목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그런데 늙음에 관하여 설교는 10번 정도 산책하면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위로도 받고 있는데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늙음에 관하여 에서 패커의 말을 인용했는데 그분도 늙음에 대하여 말년에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육체는 점점 늙어갈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죽는 날까지 계속 타올라야 된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혼의 늙음이란 없습니다. 다만 영혼의 죽음은 있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나 ‘죄와 은혜의 지배’에 대해서 영혼의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동사의 의미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풀이 살아났다. 겨울 내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싹이 피면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다시 너를 향한 사랑이 살아났다. 그때 살았다는 의미가 풀이 살았다는 의미하고는 다른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에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죽는다는 동사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가 죽었다고 하면 명확합니다. 숨이 끊어지고 개의 육체가 산 개로서의 작용을 못 하는 것이 개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신앙이 죽었다고 했을 때는 의미가 사뭇 다릅니다. 마찬가지고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진멸되고 없어지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영혼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고유한 기능을 잘 못 한다는 것입니다. 정욕에 날뛰고 그러면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지는데 우리는 그것을 살았다고 하지 않고 영혼이 죽어서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새 이은혜가 어떻게 보면 분노도 생기지만 어떻게 보면 불쌍한데 오늘 신문에 보니까 소시오패스일 것이라고 분석가들이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명력 있게 문제를 만들면서 움직이는 것 같아도 영혼이 죽은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해서는 늙음이라는 말을 쓰시면 안 됩니다. 혹 늙음에 관해서 사용할 수 없지만 늙는다는 표현을 잘 못 해서 쓴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나이하고 비례한 것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도 죽어있는 영혼을 가질 수 있고 숨을 막 거두는 사람도 청년의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질문3] 비신자인 파이어족이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비합리적인 직장에 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신자이면서 돈 때문에 직장에 다니면서 아등바등 힘들어하면서 타협하고 자괴감에 사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보입니다. 경제적인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면 월급 액수와 상관없이 인간적이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신앙과 자존심과 소신을 지키면서 살고 싶습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집에 재산이 많은 분들은 소신 있게 업무처리를 하고 집에 빚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안 잘리려고 자존심을 버리고 때로는 신앙의 양심을 버리면서 일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파이어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영석 집사님. 파이어족을 아십니까?
[이영석 집사] 경제적으로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들어서 빨리 은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답변] 그렇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찍 파이어족이 되는 것, 평범하게 얘기하면 돈벌이로서의 직업으로서 해방되는 것을 파이어족을 정의합니다. 그것은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비난받을 일도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결정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파이어한 다음에 뭘 하고 살 것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파이어하고 난 다음에 신문에 흔히 나오는 사람들처럼 10억 가지고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것 같고 30대 후반인데 결혼했는데 20억을 벌어놨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이어하고 그다음에 시골에 가서 예쁜 전원주택을 하나 짓고 벌어 놓은 돈을 가지고 재미있고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입니다. 자연도 즐기고 낚시질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직업은 단순한 생계를 유지하는 돈벌이 수단이 아닙니다. 직업을 vocation이라고 하는데 라틴어 보카치오에서 온 것입니다. ‘보케레’ 부르다의 명사형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직업으로 부르신 것은 그 직업 활동을 통해서 자기가 없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 되게 하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어가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직업을 돈벌이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두 번째로는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또다시 돈벌이를 한다면 직업을 바꾸는 것입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시골에 가서 전원주택을 짓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농업을 선택한 것이니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파이어족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돈벌이로서의 직업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다시 어떤 활동을 돈을 벌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파이어족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돈하고 무엇을 하고 살아갈 것인가? 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야 되는 것이 자기의 만족과 가치가 조화를 이뤄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오늘은 낚시질하고 내일은 모터보트를 타고 글피는 걷고 놀면서 살겠다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처사입니다. 특별히 그 사람이 어디가 아프기 때문에 그만뒀으면 파이어족이 아니라 병 때문에 그만둔 것이니까 회복될 때까지 그렇게 휴식을 취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입니까?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도 그 일이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돈하고는 상관없이 나는 그린피스 같은데 활동하면서 세계 환경을 위해서 뭔가 나의 남은 생애를 봉사하면서 살겠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는 것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그린피스 열렬히 다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린피스 보면 포경선 있는 데 가서 해상시위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곳에 간다 그러고 호주 시위에 참여하고 싶다고 그러면 최소한의 비행기 표와 비용이 온라인 계좌로 다 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비행기 표를 끊고 영수증을 내면 다시 리펀드(환급)를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활동을 하면서 산다든지 아니면 시골에 가서 농촌 봉사를 한다든지 아니면 설교 속에서 예화를 들었던 70만 장의 전도지를 뿌렸던 어떤 목사님처럼 전도하면서 산다든지 무엇인가 사회에 이바지하면서 그리고 그 일이 자기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나는 옳다고 봅니다. 두 번째 정리입니다.
세 번째는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질문에 보면 질문자와 자기가 관찰하는 사람을 대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돈도 있고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하면 당당하고 그런 사람이 직장생활도 밝고 긍정적인 것 아닙니까?
제가 직장을 다닐 때 월급을 15만 원 정도를 받을 때였는데 저보다는 한 계단 높으신 분이었는데 그분은 월수입이 600만 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한 분이 월급을 400만 원을 받는데 한 사람은 월수입이 6,400만 원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 교육을 가라고 지시가 내려와서 제가 너무 여러 가지로 바빠서 이번에 안 가고 내년에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작년에도 미뤘기 때문에 올해는 꼭 가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에이 그러면 안 되겠네. 제가 그냥 사표를 내지요. 그러니까 담당자가 놀래서 빨리 알아봐서 얼른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감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누가 봉투를 가지고 와도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건물을 가지고 있어서 임대업을 하면서 한 달에 600만 원씩 수입이 되는데 봉투에 돈 오만 원을 가지고 온 것을 뭘 받겠습니까? 사람을 우습게 아냐고 가지고 가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제가 왜 직장을 다니십니까? 그랬더니 아. 이게 참 좋아! 부동산 임대업을 하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부동산 임대업자라고 하면 좀 그런데 제가 사실은 공직에 있습니다. 하고 명함을 딱 주면 갑자기 신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관공서에 있으니까 연줄로 서로 아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공무원은 민간인이 찾아가면 경계하지만 공무원이 찾아가서 공무원에게 얘기하면 이상한 동종상련 같은 게 있습니다. 제가 우체국장을 했을 때 휴가 갈 때 걱정을 안 했습니다. 강릉을 가서 방을 못 구하면 근처 우체국에 가서 나는 송추 우체국장입니다. 국장님 계시우? 그러면 나와서 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송추 우체국장입니다. 그러니 아이고 국장님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면서 차 주고 밥 주고 언제 오셨나? 그래서 그런데 국장님 여기 방 구하기가 되게 힘드네요. 그러니까 아. 걱정 마시라고 내가 구해줄게. 그런 게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육군사관학교에서 방위병 생활을 했는데 다른 중대장은 기가 죽어서 이렇게 있는데 항상 자신감이 뿜뿜 하는 중대장이 있었습니다. 나를 참 좋아하셨는데 부인이 약사입니다. 지금도 약사가 대단한데 그 당시에는 진짜 약사가 소수였습니다. 우리는 저 중대장의 뿜뿜이는 마누라 약국에서 나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없으면 어떡할 것이냐 하는 자신과의 비교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해석하지 말고 나도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다. 라고 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니까 직장생활을 8년이나 했습니다. 4년 동안은 매일 사표를 써서 다녔고 4년 동안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다녔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얼마나 긍정적인 마음을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직장에서의 자신감 문제가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똑같은 일을 해도 내가 가족들 벌어먹이려고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오늘 하루 번 돈을 연봉에서 나누기해서 계산하면 너무 사람이 비참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하나님이 어떤 뜻이 계셔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고 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내가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고 생활비는 이 직장에서 벌어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국 창고에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라는 긍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본인에게도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자신감은 반드시 돈이 많기 때문에만 나오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녀보면 개념 없는 사람들이 자신감 충만하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사시고 파이어족에 대해서는 이 정도를 이야기하면 됐을 것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절대로 자기 직업하고 돈하고 이런 식으로 엮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나름대로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간다. 하고 하나님은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시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젊어서 돈 좀 많이 벌어서 통장에 넣어놓고 아니면 연금해도 충분히 연금이 나올 정도의 삶을 살아가는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교수님이 자기 친구 얘기를 하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취직해서 20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좀 있다가 다시 직장에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연금이 두 군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20년, 20년 해서 40년을 채우고 60살이 되니까 연금이 두 군데서 나오는 겁니다. 굉장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개인연금이든지 공적연금이든지 충분히 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고 나머지 인생을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진짜 하나님 앞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 수 있으면서도 넉넉히 나누어주고 베풀면서 일생을 살 수 있다면 우리가 모두 바라는 로망이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파이어를 안 시켜줍니다.
[질문4] 나이가 들면서 병을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일상생활이나 그전에 제가 좋아했던 활동 등에 심한 제한이 생기고 또 병이 악화될까봐 몸을 사리면서 소심한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해외여행 가는 것은 꿈도 못 꾸게 되었습니다. 이전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 건강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또 더 악화될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열정적으로 일해야 할 위치인데 주위에서 환자라 배려한다고 쉬운 일만 주거나 승진 등에서 일부러 누락시키기도 합니다.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질병으로 나에게도 생길 수도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희귀질환이나 암이 나에게 생겼을 때 어떻게 잘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답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앙 빼고는 사람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도 살아남아라.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것 빼고 나면 살아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전도서에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우리말에도 정승 집에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몰려와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좋은 선물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교인 중에 한 분이 계신데 가족이 암에 걸려서 너무 아프니까 목사님한테 기도라도 받으라고 신앙도 없는 분이었는데 왔습니다. 암에 걸렸는데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자기가 빼고는 직장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 암 치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돌아가신다. 암이 선고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 휴식부고를 찍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말을 안 들으시고 1년 반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질문 한 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해외여행, 몸이 불편하고 쉬이 피곤하고 승진도 누락되고 그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일 순위에 두십시오. 저분이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의지라고 저는 여겨집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선물을 합니다. 아주 맛있는 커피를 내려왔습니다. 커피와 선물 받은 고급 초콜릿을 개봉하겠습니다. 고디바 초콜릿밖에 안 돼서 미안합니다. 우선 교육생을 중심으로 하나씩만 선택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명랑함을 회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콜릿을 전혀 안 좋아했는데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릴 백 총장이 나를 설득한 다음부터 먹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내려놓고 거기에 집중하라고 말씀드립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죽으면 직장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을 일 순위에 놓으십시오. 암에 걸려서 치료받았던 사람들은 우연히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휴가도 내고 쉴 만큼 쉬셨겠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필요하면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찾아오게 될 경제적인 부담도 무거운 짐이겠지만 자신이 죽음의 위협 아래 놓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자기가 환자라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환자는 삶의 다른 모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휴대폰을 하다 보면 배터리가 다 되면 자연스럽게 절전모드로 들어가면 휴대폰의 많은 기능이 작동을 안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급한 연락이 오면 받아야 됩니다. 그런 것처럼 환자모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 옛날 생각을 하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 늙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감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이 갱년기 우울증이 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환자 모드로 들어가서 내가 해외여행을 못 가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은 희망이 없는 당연함이 아니라 여기서 절제를 하면서 살아남으면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해도 자신에게 그것이 티끌만 한 도움도 안 됩니다. 욕심을 줄여라.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데 더 악화가 되지 않을지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에 관하여 에서 모두 얘기했듯이 그 염려는 우리를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지 않으니까 내려놓아야 합니다. 염려는 자기사랑에서 오는 것이어서 너무 상태가 심하시면 마음에 죽음까지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나는 주님의 긍휼의 눈물방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이분은 일에도 굉장히 욕심이 많으시고 생에 집착이 굉장히 강하신 분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정도의 병에 걸렸으면 승진 같은 것에 대해 내가 그런 것을 할 때인가? 그 몸을 가지고 승진을 한다면 그 책임감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승진 안 하려는 것 아십니까? 공무원 생활을 5년 하다가 때려치우고 싶으면 승진을 시킵니다. 그러면 신나서 몇 년 다니다 보면 다시 짜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으면 또 승진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보람이 생기고 월급이 올라가고 많은 사람들이 지시하면 말을 듣고 내가 결제에 사인하면 전국적으로 시스템이 바뀌고 하는 보람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나이 먹고 나면 아이들 때문에 못 그만두고 투덜대다가 정년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별것 없습니다. 이분은 아프면서도 승진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욕심을 줄이십시오. 욕심이 여러분을 병들게 합니다. 내려놓으시고 우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이십시오.
이런 것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관계 속에서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하는 것 어떻습니까? 유튜브 같은 데 보면 자기 암 투병기 같은 것을 그대로 올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고 이해인 수녀 같은 경우는 글을 써서 승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질병의 치료와 관계되는 일들을 하고 집중하고 욕심을 줄이면서 살고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 회복되면 조금씩 조금씩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해외여행을 못 하신다고 하시는 데 신장이나 심장 쪽에 질병일 경우에는 해외여행 하는 게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그것도 건강을 회복하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질문5] 노화되어가는 얼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시술 보톡스, 리프팅 등 수술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예전에 염색하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는데 성형 시술이나 성형 수술을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도 될까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답변] 어디까지 가능하냐 하면 도저히 본판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뒷머리에다가 얼굴을 다시 새기시는 것까지 괜찮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어느 한 기준으로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요새도 가끔 저를 놀리는데 저를 만나고 연예할 때 제가 26살 때 반백 예찬론을 펼쳤다고 합니다. 하얀 머리가 섞이면서 얼마나 멋있는지 반백 예찬론을 설파해서 진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별로 자신의 그때 신념이 신념이 아니었고 때때로 염색을 하더라고 놀리는데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자기 신념이 나는 아무 상관 없다고 그래서 주변에 목사님 중에는 로션도 안 바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머리만 하얘지는 게 아니라 눈썹같이 하얘집니다. 목사인데 산신령처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연적인 늙음에 대해서 손대는 것에 대해서 자기는 싫다고 하면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코털까지 하얀 게 나왔는데 그것까지 안 깎고 다니는 것은 좀 그럽니다. 그런데 수염은 안 깎습니다. 그러고 사는데 우리는 그 사람을 존중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는데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니까 지금처럼 다니는 게 나 보기에도 좋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지금처럼 하게 다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한 달 반 정도 되면 깨끗이 자연염료로 염색하고 눈썹도 하얗게 나와서 예전에는 다 뽑았는데 눈썹이 점점 없어져서 눈썹도 칠하고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사는 것입니다.
마흔아홉 살 때쯤 피부는 뭘 자꾸 바르면 간사해진다는 신념이 있어서 아무것도 안 발랐습니다. 그런데 너무 따갑습니다. 젊을 때 감당하지 못하는 게 자고 일어나면 개기름이 흘러서 너무 싫었습니다. 나이 드니까 기름도 젊었을 때 나오지 나이 많아지니까 안 나옵니다. 뻣뻣해지면서 따가운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왜 그렇게 사냐? 로션도 바르고 스킨도 좀 바르라고 해서 로션하고 스킨만 발랐습니다.
그리고 마흔아홉 살이 됐는데 목사님. 목사님 사진이 없는데 사진 좀 찍읍시다. 그래서 그때는 미디어실이 발전하기 전이어서 동네에 있는 사진관의 사진사를 교섭해서 30만 원을 내가 줄 테니까 오전 오후 나를 따라다니면서 여러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이야 땡잡았지. 카메라 무거운 거 메고 와서 우리 봉고로 과천에 있는 제비울미술관, 남한산성 등을 다니며 150장을 찍었습니다. 그때는 인화지로 인화를 해 왔는데 며칠 동안 잠이 안 왔습니다. 이게 내 얼굴이라는 것에 대해서 동의가 안 됐습니다. 눈이 나빠서 거울을 봐도 내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사진은 말도 안 되는 게 늙어 보여서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화장품을 발라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화장품의 세계가 그렇게 끝이 없고 오묘한지 처음 알았습니다. 스킨하고 로션만 바르는 게 아니라 세안부터 시작해서 오버나이트, 영양크림, 마사지 팩부터 수 없는 게 있고 서비스받는 데도 있다는 세계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저는 그런데 관심이 없고 얼굴에 칼을 댄 적이 없고 심지어 실 리프팅 같은 것을 한 적도 없지만 나는 사람들이 한다고 그럴 때 그것은 자기 자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감하게 수술하는 것 같은 것도 각자 본인의 자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이 중요한 것입니다. 본인이 자기를 보면서 나는 너무 싫다. 그러면 고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요즘은 열심히 화장품을 바르고 있습니다. 저가는 고가도 다 소용없습니다. 좋은 화장품을 요렇게 요렇게 바르는 것보다는 그것보다는 질이 낮은 화장품을 많이 바르는 게 좋습니다. 저녁때 집에 들어가서 깨끗이 세안을 하고 오일 클렌징을 하고 다시 토너로 클렌징을 하고 열 한 개를 바르고 많을 때는 열여섯 개를 바릅니다. 천천히 마지막에 세 개 정도는 잠자기 직전에 흠뻑 바르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 보면 활기차 보입니다. 왜 그것을 생각을 하게 됐냐 하면 성도들의 사랑을 받으니까 목사님. 안색이 왜 그렇습니까? 어디 아프세요? 그래서 한두 명이 아니라 보는 사람마다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할만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요즘은 저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일주일 만에 수도 없이 그런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변명도 한 두 번이지 너무 싫어서 어떻게 하나? 그랬습니다. 어떤 교인이 나보고 설교를 들으면서 비서실에 연락해서 목사님. 샵에 다니냐고 물었는데 안 다닙니다. 샵이 우리 방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중앙일보나 신문에 보면 가성비가 제일 좋은 화장품이 무엇인지 나와서 그 자료들을 모읍니다. 클렌징 크림 중에서는 싸면서도 가성비가 뛰어난 게 이거다. 영양 크림 중에는 이거다. 선크림은 이거다. 이런 정보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재구성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안티에이징의 정의가 안 늙는 게 아닙니다. 늙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습니까? 가는 홍난(?)을 누가 막을 것이며 오는 백발을 누가 금할 것이냐? 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안티에이징의 정의를 곱게 늙기 위한 행동이다. 라고 정의합니다. 운동을 계속하고 젊음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면 늙는데 곱게 늙습니다. 그런데 내버려 두면 배는 나오고 살도 늘어지고 열 받으니까 안 먹으면 영양실조 걸리고 골다공증이 걸려서 별로 안 좋게 늙어가는 것입니다. 얼굴도 마찬가지로 화장을 하고 세안을 잘해야 됩니다.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은 안 늙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곱게 늙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여성들 앞에 피부 얘기해서 웃기는데 퀴즈를 내 볼 테니 맞춰보십시오. 피부가 고운 선을 그리면서 늙어요. 아니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늙습니까? 어느 날 깨어 보니까 늙었더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관리하면서 영양분을 채워주지 않으면 툭툭 몇 번 떨어지고 나면 회복할 수 없는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피부과 가서 여기에 칼을 댄다든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쁘게 해 봐야 쳐다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열심히 화장품 바르고 자기가 게으르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클래식 음악 틀어놓거나 유튜브 음악 틀어놓고 화장품 한 세 개 바른 다음에 벌크업 60개쯤 하고 화장품이 스며들 때쯤 그다음에 세 개 정도 더 바르고 클래식 음악 듣고 벌크업 하면서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직전에 오일을 화장품에 섞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흠뻑 바르고 잡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얼굴이 보송보송하고 봐줄 만합니다. 그렇게 사는 거지 왜 늙는 것을 한탄하면서 사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 훨씬 더 젊어지실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헬스 전문가에 의하면 여기서부터 여기 아래는 60대까지는 마음만 먹으면 20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는 안 되고 병원에 가야 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68세 먹은 분이 67세에 아내가 쓰러지면서 내가 건강을 잃으면 우리 아내가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 여섯 시간씩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을 한 시간 반을 두 손과 두 발로 동물처럼 기어 올라가는 운동입니다. 배에 식스팩이 20대 같은 탄탄한 몸입니다. 여러분들도 노력하세요.
나는 운동, 미용, 독서 이 세 가지는 일반은총 차원에서 꼭 해야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나중에 피부 관리법에 대해서 궁금하면 강의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성을 들이면 영혼의 변화는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안 나타나는데 피부의 변화는 노력한 만큼 나타납니다. 비싼 화장품 쓰지 마십시오. 원가가 10%밖에 안 되는 것 아시죠? 다 소용없습니다. 밤에 잘 때 구두약이라도 많이 바르기만 하면 아침에 변화됩니다. 지금 바르는 것 보다 세배쯤 늘리십시오.
[질문6] 저는 40대 중반입니다. 인생의 절반을 더 즐겁게 잘 살고 싶은데 늙어감을 받아들임에 있어 죽음에 대해 항상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까요?
[답변] 매일 매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만이 삶의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좋은 일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나쁜 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오늘 죽은 사람들 가운데 어제 내일 죽을 줄 알던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미국에서 경쟁 스트레스 때문에 2018년 때문에 자살한 사람만 158,000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10대 20대 30대의 자살률이 전체 자살률의 절반을 넘는다고 합니다. 매일 34분마다 자살을 합니다. 그게 죽음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꿈도 못 꿨던 사람들이 자살을 결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드리 헵번 좋아하십니까? 대단한 미녀였고 전 세계를 휩쓴 몇 안 되는 여성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태어난 이래 가장 빼어난 미인은 우리 세대에 가장 탁월한 미인이 있는데 엘리자베스 테일러입니다. 다 돌아가셨는데 젊었을 때는 그분의 미모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인가? 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 탁월한 미녀들이 거의 뇌가 없는 남자를 선택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십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용모에 대해 불만할 때마다 하나님은 용모 대신에 좋은 머리와 훌륭한 정신을 가득 채워주셨다고 위안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말리는 결혼을 하면서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영양가 없는 남자들을 선택하고 불행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젊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됩니다. omf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도착해서 도착한 밤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입니다. 옛날에 교회에서 한창 다이나믹 프로그램이 유행할 때 유서를 쓰기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 밤에 죽는다면 무슨 유서를 남길 것인가? 그러면서 펑펑 울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저녁에 가셔서 검은 편지 봉투 하나 꺼내놓고 하얀 글씨로 유서를 써 보십시오. 오늘 밤에 인생을 마무리한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늙음과 죽음에 대해서 친숙해져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돼서 밀려옵니다. 매일 매일 죽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내가 하나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 라고 하는 선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거기서 가난한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연예인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인기를 누려본 적이 별로 없으시지요. 나는 다른 의미에서 인기를... 여기에 제 아들 팬이 있습니다. RM 김남준보다 내가 더 좋다고. 그렇기 때문에 잘 모르는데 연예인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합니다. 굳이 악플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대중들에게 오히려 악플에 씹히고 가십에 오르는 것은 참을 수가 있는데 더 비참한 것은 잊혀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연예인의 죽음이 잊혀지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고 매일 매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기나 이런 것들도 다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일정한 시간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죽음과 친근히 지내야 됩니다.
제가 30대 젊었을 때 부교역자 생활을 했었는데 상갓집에 가면 항상 죽은 성도들을 마지막으로 안아드리겠다고 하고 내 품에 안아주는 것이 저의 섬김 중의 하나였습니다. 안고 있으면 산 사람을 안는 것하고 완전히 다른 것을 아시지요? 산 사람은 아이든지 아내든지 남편이든지 착 감기는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뻣뻣합니다. 찬 기운이 확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죽음이 나의 생각보다 매우 내 가까이 있구나. 언제든지 자신의 죽음이 당황스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극단주의자는 아닙니다. 늙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늙음을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는 이런 식으로 추락하듯이 늙어가고 싶지 않고 곱게 늙어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옷도 생각 없이 입지 말고 내가 이렇게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면서 옷 색깔도 속옷 겉옷을 맞춰 입고 위, 아래옷도 맞춰서 입고 사십시오. 나 자신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풍경이 되게 하라.
공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의 깊이에 비해서 차림새가 소박하면 촌스러움이 되고 마음의 깊이에 비해서 옷이 너무 화려하면 그것을 사치라고 부른다. 나는 그 글을 읽을 때 공자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까? 깊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옷은 하나의 자존감입니다. 워낙 감각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한테 배우라고 하고 싶습니다. 시장에 가서 옷을 사도 색깔만 잘 맞춰 입어도 훨씬 더 예뻐 보이고 젊어 보입니다.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좋고 사회생활에도 좋습니다.
[질문7] 늙어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젊어서는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인내하며 인생을 살아왔는데 노년에 육체와 정신이 약해지니 하나님은 없고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세상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간의 신앙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오히려 신앙이 없이 늙은 사람보다 인격이 황폐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씁쓸합니다. 비록 가난해도 마음만은 풍요롭게 사실 줄 알았고 내심 존경하였는데 수십 년의 신앙생활이 이런 결론을 내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고 존경하는 마음도 없어졌습니다. 노년에 타락하는 원인이 무엇이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답변] 늙어갈 때 추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서 지혜와 사랑이 점점 더 커져가야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20대 때는 맨날 모이면 이성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대화의 소재가 됩니다. 특히 20대 초반에 누구를 만났는데 예뻐?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예뻐? 남자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대학이 무슨 상관이야. 예뻐? 묻습니다. 인간성이 좋아. 그러면 아니 예쁘냐고?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있어? 키 커? 아니면 돈 많아? 그럴 것입니다. 이성에 관한 대화들이 화제의 꽃을 피우고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을 얘기하면 왕따 당합니다.
그러다가 30대가 되고 나면 자기 직장 그다음에 연봉. 직장에서의 직위 잘 나가느냐? 누가 새 차 샀다더라. 이런 것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다음에 나이 들고 나면 돈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인간의 물욕은 끝이 없어서 인간이 가장 돈을 갖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될수록 돈이 필요 없을 때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이 생겨납니다. 진짜 돈이 필요할 때는 20대 30대 때입니다.
나도 20대 때를 생각하면 돈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위기 좋은 식당을 가는 것은 좋아했지만 비싼 것을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젊어서는 못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 영국인가 어딘가를 여행을 갔었는데 같이 여행을 간 사람이 단번에 버버리에 들어가서 코트하고 선글라스하고 몇백만 원어치를 사서 입고 오는데 저 할머니가 입어서 뭐가 어울릴까? 며느리나 주면 참 예쁘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버버리 걸친다고 바바리코트를 180만 원인가를 주고 샀다는데 그것을 왜 사나? 동네 코트나 마찬가지인데 짝퉁으로 입고 저거는 며느리가 입으면 딱 어울린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돈이 필요 없을 나이에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회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의 안전에 대한 것들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 안전에 대한 욕구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에너지 자체를 아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집도 편한 데서 살고 싶고 비행기도 퍼스트 클래스로 타고 싶고 차도 좀 좋은 것을 타고 싶고 뭐든지 특별대우를 받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게 내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신앙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져서 주님을 사랑하고 인생 자체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직시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면 나도 똑같이 저런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숙연해지는 것입니다.
노년에 타락하는 이유는 노년이 타락시킨 게 아니라 타락은 젊은 시절에 더 많이 일어납니다. 노년은 힘이 없어서 죄지을 힘도 없습니다. 토마스 왓슨이라는 청교도가 자기가 죄를 버린 게 아니라 죄가 그 사람을 버린 것이다. 라고 묘사합니다. 죄도 상대할 만한 사람이나 상대해 주지 기력이 없는 사람은 죄도 상대를 안 해 줍니다. 죄한테 왕따를 당하는 것입니다.
얘기했듯이 노년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미끄러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노년이 돼 보면 젊었을 때와 달리 심리적으로 상상도 못 하는 험한 돌짝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 시편에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시며. 라고 시인이 탄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젊었을 때 나를 데려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중년이라는 미묘한 심리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갱년기 같은 것을 보면 사춘기하고 대조적입니다. 사춘기에는 일차적으로 성징이 나타나는데 갱년기에는 성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춘기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는데 갱년기에는 세계에 대한 싫증이 생겨납니다. 사춘기에는 육체의 힘이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데 갱년기에는 주체할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갑니다. 젊었을 때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요즘은 좀 있는데 예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정신적인 공황 같은 것들이 찾아옵니다.
두 개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사춘기, 사추기라고 합니다. 사실은 여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성도 그런 것입니다. 주위에서 그 사춘기 때 진짜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가 인생을 망치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추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만 가족들이 신경을 써서 잘 돌봐주면 되는데 서로 자기가 힘들다고 돌보지 않을 때 회복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이런 일들은 인간이 태어나서 사춘기를 맞고 사추기를 맞이하고 갱년기를 맞이하고 늙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한 날부터 죽음으로 헤어지는 날까지 꿈꾸는 것 같이 잘해주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을까요? 그런 남편이라고 믿는다면 뭔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옛날 기억을 까먹었던지 그런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에너지가 충분히 있어서 자기가 버틸 수 있어야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늙으면 우리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 늙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젊어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의 몸은 날마다 늙어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돼야 된다. 라고 정리를 하겠습니다.
[질문8]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건강하게 자다가 잠자듯이 편안하게 가면 좋겠지만 힘들게 가는 모습들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안락사, 존엄사, 연명치료 같은 것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답변] 죽음에 대해서 한 번쯤만 생각하면 안 되고 매일 생각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얘기하는 삶의 명랑함이라고 하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그리고 죽음을 생각보다 매우 가까이 두고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죽음 때문에 오늘 소중한 순간을 아무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죽음의 현실이 있다는 것,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 바로 다음이 내 차례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매일 매일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매 순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자. 이것이 제 제안입니다.
두 번째로는 죽음에 대한 것인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우리를 옮기시는 교통수단입니다. 죽지 않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저 세상에 간 사람이 없습니다. 저 세상에 간 모든 사람들은 한 번 죽은 사람입니다. 가족들이 죽을 때 마지막 순간이 가족들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질병에 시달렸다든지 큰 사고를 당했다면 우리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그것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교통수단입니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간의 감정에 그러겠지만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고 하는데 사고밖에 없습니다. 사고가 나서 둘이 같이 비행기에서 추락해서 죽는다든지 열차가 부딪혀서 폭발해서 죽는다든지 교통사고가 나거나 화재가 나서 죽는다든지 하는 것인데 그중에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기도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각자 살 만큼 살다가 죽는 것이고 남편인 네가 먼저 갈 수도 있고 아내인 내가 먼저 갈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각자 자기가 선택하는 게 아니니까 그것은 기도할 필요도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잠자듯 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도 주님의 손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청교도가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작별의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이 데려가지도 마시고 그들이 나와 빨리 작별하기를 원할 정도로 오래 병석에 있게 하지 마시고. 아주 요구사항이 많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저녁때 잘 주무셨는데 아침에 가보니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 한 분은 92세까지 사셨는데 아침 잡수시다가 사모님이 더 드세요. 그랬더니. 아니야. 나는 너무 피곤해. 나 좀 있다가 먹을게. 그리고 잠깐 쉬고 올게. 그러고 올라가셔서 딱 누워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100명 중의 한 명도 안 됩니다. 기도하시는 것은 자유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어떠한 형태의 죽음도 받아들일 준비가 마음에 되어있어야 합니다.
내가 암에 걸려서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죽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이어령 교수님이 마지막에 말라서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동영상까지 찍고 돌아가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저한테 책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것처럼 어떤 형태의 죽음이던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사고로 죽든지 암으로 죽든지 화재가 나던지 아니면 잠자듯이 평안히 가던지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기시는 교통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잠자듯 평안히 가기를 원한다. 그렇게 생각이 되시면 매일 기도하십시오. 매일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면 삶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안락사, 연명치료 등이 있는데 안락사는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는데 인공호흡기를 뺄까요? 하는 것을 안락사로 볼 것이냐? 이런 문제들은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해야겠지만 스위스처럼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 나랏법이 허락하는 곳으로 가서 주사를 맞고 꿈꾸듯이 죽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의미와 뜻이 계셔서 살려주신 것이니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교회 오빠 이관희 씨의 생각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존엄사는 연명치료를 안 하는 것 아닙니까?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가 병원에서 사인할 수 있고 가족들에게 부탁의 말을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안락사만 우리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9] 아는 지인의 가족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신앙의 유무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가족의 권유로 복음도 듣고 교회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자살한 사람의 구원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자살을 하였을 경우 유가족에게 어떠한 위로를 할 수 있을까요?
[답변] 참 어렵습니다.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자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중세시대도 그렇고 종교 시대의 칼빈 같은 경우는 자살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자살을 하는 것을 죄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유산을 상속하는 일에서도 불이익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살은 구원 문제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구원을 받았을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자살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 취소가 된다든지 못 받을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칼빈이 살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훨씬 더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고 그때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인식들이 미약했던 시기였고 더군다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사회가 일어나고 사회가 훨씬 더 복잡하게 되고 도시화가 되면서 인간은 온갖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정신적인 질병 상태에 시달려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10명 중에는 9명은 이미 정신적인 질병 상태가 오래된 가운데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지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밝은 사람이 자살하게 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대인들의 인간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자살할 수 있는 시대라고 봅니다.
생각보다도 입체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서적인 도움을 포함해서 영적인 도움, 의료적인 도움, 사회적인 도움이 다 필요합니다. 구원 문제하고는 상관이 없고 믿지 않았으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살 문제는 구원 문제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유족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냐? 참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자살은 자신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족들의 문제이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목숨을 끊는 것은 자녀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거운 인생의 상처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가족들을 사람의 말로는 위로하는 게 힘들 것입니다. 어떻게 말로 위로할까? 그런 생각을 너무 하지 말고 그게 위로가 될까요? 따뜻하게 사랑으로 베풀고 궁극적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보다는 죽은 사람을 자꾸 생각나게 하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을 도와주는 게 좋습니다. 사랑을 따뜻하게 전하고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섬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다 보면 자녀의 죽음의 상처도 언젠가 씻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나서 죽은 자녀에 대해서 위로한다는 마음으로 자꾸 그 일을 거론하는 것은 상처를 오히려 더 깊어지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질문10] 암 진단을 받게 되어 보험금을 3천만 원을 일시금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인지 목사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현재 질병으로 인해 직업 활동은 못 하고 있습니다.
[답변] 저런 질문이 굉장히 좋은 질문입니다. 은혜받고 나고 금방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십일조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십일조가 들어왔습니다. 1억 6천만 원이 십일조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엄청난 부자가 부동산이나 무엇을 하든지 왕창 벌었나 보다 했더니 그것이 아니라 자녀가 병원에서 의료사고를 당했습니다. 장애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웬만하면 못 했을 텐데 부모들이 현명하셔서 모든 것을 다 해서 밝혀내서 병원과 소송까지 갔습니다. 그때 합의를 본 것이 16억이었습니다. 받자마자 1억 6천을 교회로 보냈습니다. 한 참 교회가 어려울 때였는데 너무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이것은 내가 보험을 타지 않았더라면 없는 돈인데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300만 원이 없어도 나는 드리겠다. 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선택지입니다.
두 번째는 보험이라는 것은 손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보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3천만 원을 받았을 때 예를 들어서 내가 손해보험을 들었는데 실제 사고를 당해서 3천만 원이 나왔는데 실제 손해를 당한 것을 계산해보니까 천만 원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천만 원을 빼고 2천만 원에 대해서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안 하는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이 들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십일조를 해야 되나? 하는 마음이 들고 낸 다음에도 그때 그것을 내지 말고 간직하고 살았어야 됐는데 왜 냈을까? 그런 마음이 들면 안 하는 것입니다.
[질문11] 인생의 많은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돈에 대해서 터부시하기도 했고 비싼 집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니 돈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 사이의 갈등도 경제적인 자유가 없어서 생기는 경우가 많고 건강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돈 아끼려다 병이 들거나 병들고 돈이 더 많이 들어서 더 많이 가난해지고 일을 못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이 악한 걸까요? 돈을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이 악한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젊었을 때부터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 잘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식을 해도 되는지 가상화폐나 복권이나 부동산이나 보험 등에 대해서 그 외에 돈 관리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답변] 보험회사 직원도 아니고 연금수탁업체 직원도 아니어서 거기까지 얘기할 수 없겠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가이드를 주자면 주식을 해도 되냐? 해도 됩니다. 가상화폐를 사도 될까? 사도 됩니다. 복권을 사도 될까? 사도 됩니다. 부동산에 투자해도 될까? 괜찮습니다. 보험 들어도 될까? 괜찮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박이 나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주식을 하는 것은 탐욕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가상화폐를 해서 떼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도 역시 탐욕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복권제도 자체는 선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회복지시설을 확충하는 것입니다. 복권을 사는 동기가 돈이 몇백만 원이 돼야 되겠다는 탐심이 아니라 내가 산 복권으로 많은 사람을 돕는다더라. 라고 하고 복권을 사는 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좀 너그러워졌습니다. 옛날에는 그 자체를 반대했고 복권에 당첨된 돈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땀으로 번 돈이 아니라 소득 자체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십일조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회개하는 마음으로 복권 탄 돈을 모두 내놓으면 그것은 좀 의미가 있다.
제가 며칠 전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15만 원을 주었습니다. 5만 원짜리 3개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안 주우려고 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가질 것도 아닌데 귀찮지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 몇 초 망설이다가 밤이 깊어서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다음 사람이 오면 가져갈 것 같습니다. 확실히 장담할 순 없지만 인 마이 포켓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형법상에 점유일탈물 횡령죄입니다. 집에 보관만 하고 있어도 형사법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내일 신고하려고 했다고 해도 안 됩니다. 그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하느니 내가 갖자. 그리고 경찰서를 가서 주웠다고 썼습니다. 여자 경찰이 맨 위에 여기도 쓰셔야 되요. 해서 이게 뭐예요? 하고 봤더니 습득한 물건에 대해서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쓰면 찾아주든지 말든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포기를 하냐고 하고 포기 안 한다고 썼습니다. 6개월이 지나서 분실자가 안 나타나면 약 30% 세금을 떼고 나머지를 찾아가라고 연락이 옵니다. 6개월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탐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이 청년들에게도 나왔습니다. 저는 주식을 안 하는데 주식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안 할 거냐? 그럴 가능성이 많은데 꼭 안 할 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확실히 하지 말아야 될 선은 있습니다. 주식하는 젊은이들이 주식 때문에 핸드폰을 하루에 보는 횟수가 340번이라고 합니다. 실감이 납니까? 컴퓨터로 일하면서 주식 창을 띄워놓고 일하는 것입니다. 아침 9시면 화장실에서 남자들이 들어가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9시에 개장할 때 팔 것은 팔고 살 것은 사고하느라고 몸은 회사에 있지만, 정신은 주식시장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정상적으로 소명이 있는 직업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식투자도 여러 방법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월수입이 500만 원인데 30만 원 정도만 저축한다고 생각하고 매달 주식연금이나 이런 곳에 넣어서 매달 30만 원씩 주식을 사서 주가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고 30만 원씩 저축한다고 생각하는 것. 삼성전자 주식도 그런 식으로 산 사람들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8만 원 할 때 10만 원 간다더라 하면서 왕창 대출까지 집어넣은 사람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6만 원 초반 선에서 빌빌거리고 있으니까. 주식은 돈 벌었다는 사람은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퍼져도 쪽박 찼던 사람의 이야기는 본인과 옆에 사람만 아는 걸로 끝납니다. 그런 이야기를 과신하지 말고 욕망에 휘둘리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가상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잊어먹었다고 해 놓으면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 같지만 오늘 집어넣었다가 다음 주에 꺼내면 대박이 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파멸을 불러오고 그런 생각을 가진 정신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락될 수 없다고 봅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동산을 해서 떼돈을 벌려는 탐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정법이 우리에게 죄라고 하느냐 아니냐 이전에 탐욕을 부리면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입니다.
보험 드는 것도 좋지만 보험을 잔뜩 들어놓고 이은혜처럼 누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험을 들어놓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보험도 요즘 해설하는 것을 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보험을 드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나중에 전문가들이 들여다보면 황당해하는 보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곳에 이중 삼중으로 들어서 돈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지혜롭게 하는 것은 괜찮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노후 대비부터 얘기해 보겠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만큼 살아온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까 저는 돈을 낭비했기 때문에 후회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별로지만 옛날에 한창 작가로서 어느 정도로 인기가 좋았냐 하면 한국에서 출판되는 책 10권 중에 1위부터 10위의 기독교 서적이 나오면 한창 정상에 있을 때는 5권이 제 책이었습니다. 1위 김남준, 2위 김남준, 3위 김남준, 5위 김남준, 7위 김남준. 두란노 같은 곳에서는 사실상 제 전 세대의 사람들은 설교집을 낸 사람들이고 한국 기독교의 대중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로서는 제가 1위였습니다. 저는 인세 받은 것을 집에 안 갖다줬습니다. 집에 가져가면 뻔합니다. 그거 잔뜩 모아서 저금할 것이 너무 분명하니까 나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몽땅 갖다주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교회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지. 그러고 그것을 가지고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고 동역자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왔는데 모았으면 꽤 많이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안 모았습니다. 그렇게 살았고 후회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생각이 지금도 후회는 한 번도 안 하는데 돈에 대한 관념 자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호사를 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10년 동안은 제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교회의 돈이 예산상으로 아예 없었습니다. 제가 인세를 받으면 제 통장에 판공비였습니다. 카드하고 연결해서 썼는데 나중에야 장로님들이 세워지면서 교회의 질서가 잡히면서 됐는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때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를 하라는 것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장 예민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가장 공부를 안 합니다. 돈에 대한 공부를 거의 안 가르칩니다. 뭘 가르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얘기하는데 젊은이들도 얘기가 잘 안 통합니다. 20대 보고 지금서부터 연금을 들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유행가 가사 가운데 ‘내 통장은 정류장’이라는 유행가가 있는 것을 아세요? 월급날 내 통장은 정류장 월급이 들어오면 즉시 어디론가 다 빠져나간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20대들에게는 귀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말고 정규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안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지출하기에 너무 빠듯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소비지향적인 사회니까 아주 뛰어난 절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닌 한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25세나 28세 때 취업을 한다고 치고 그때부터 연금을 붓게 됩니다. 국민연금 가지고 모자라는 것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나라에서 주는 것처럼 충분하려면 유럽처럼 수입의 절반은 가져가야 합니다. 노르웨이가 6억인가가 넘으면 80%를 가져간다고 합니다. 상상이 안 갑니다. 거기는 아무 걱정을 안 합니다. 돈을 모은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이 들면 연금이 우리로 따진다면 정상적으로 일한 사람이면 650만 원의 연금이 나오니까 그 돈을 가지고 자기네 나라 북유럽을 떠나서 따뜻한 쪽인 남유럽이나 동유럽 쪽으로 와서 살면 한 달 생활비를 가지고 거기서는 석 달을 산다고 합니다. 여행을 그렇게 많이 가는 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안전망이 확충되는 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가 민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하지 말아야 될 일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젊은이들을 보고 항상 얘기합니다. 종종 보면 착한 딸이나 아들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면 그냥 동생들 주세요. 그러거나 그냥 오빠 다 주세요. 그래 그러면 오빠한테 다 맡길 테니까 오빠가 너를 돌봐 줄 것이다. 그런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오빠가 왜 돌봐줍니까? 오빠가 지금 결혼을 안 했으니까 돌봐줄 것 같지만 새언니가 들어오면 새언니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n분에 1로 정확하게 법적으로 달라고 그래라. 차라리 자기를 돌보지 말라고 그래라. 진짜 맘에 잘 들게 잘하면 조카한테 유산을 남기고 죽겠다. 차라리 그렇게 하고 말지 그것을 쓸데없이 양보해서 그렇게 하는지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도 유산 받을 것이 있으면 부모님이 안 물려주고 사회에 환원하고 죽는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그런 신념을 안 가지고 있으면 받을 것은 정확히 받으세요. 그 대신에 형제나 누구에게도 기대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자존감이 있는 행동입니다. 지금 25세 때부터 연금을 붓기 시작해서 60세 때쯤에 연금이 나온다고 치면 진짜 조금만 부어도 큰 인생의 도움이 될 만한 액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50세 때쯤에 눈을 뜨고 10년 안에 해결하려면 안 됩니다. 생활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노년층의 자살이 심각합니다. OECD 자살률의 1위입니다. 노인 자살의 80% 이상이 빈곤 문제 때문에 자살을 합니다. 한쪽에는 국민소득 3만 5천 불이 넘었다고 하면서 화려한 그림이 펼쳐지고 한쪽에서는 어두운 구석들이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지? 그런 뚜렷한 생각을 가지세요. 아무도 안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태어나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누구에게 민폐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 내가 사람들을 넘치도록 도와주지는 못해도 나를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죽을 때에도 장례 지낼 것까지 모두 다 마련해놓고 죽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스승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분은 목회자가 아니셨으니까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딱 준비해놓고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부조를 받지 마라. 이 돈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라. 자식한테도 누를 안 끼치고 죽는 사람이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소비보다 앞세워서 그것부터 제일 먼저 넣고 거기에 맡게 소비를 계획하며 인생을 산다면 여유로운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35년 정도 연금을 넣으면 진짜 조금만 넣어도 노후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돈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을 했다고 했는데 어리고 미숙해서 그런 것입니다. 통계가 나왔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너무 없으면 집안의 갈등도 심해집니다. 작은 것들도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가정의 경제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족들이 경제력이 있으면 누구 하나 파국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6명이 형제자매인데 막내가 저기에 있는데 막내가 굉장히 큰일을 당해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간신히 먹고살아서 한 달에 단 100만 원도 꺼낼 여유가 없을 때 제 좀 도와주자 그러면 몇 명이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500만 원씩 만 거둬서 2,500만 원을 해주면 급한 불은 끄지 않겠냐? 하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력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같이 사회적인 기반들이 취약하고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되고 경쟁이 치열한데 네덜란드 같은 데만 해도 자기네 국민들이 돈 없어서 서러워서 살겠나? 이런 생각은 안 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리 재정 능력이 안 돼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줍니다. 그 대신에 딱 한 번입니다. 신용을 잃어버리면 그 사회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신용만 지키면 기회를 줍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돈 없어서 서럽구나.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 가서 100만 원을 꾸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좋은 직장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고 있을 때는 가능하지만 직장 잃고 건강 잃으면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제관리는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비혼인 청년들이 많이 나왔는데 자기 스스로를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제적인 여유는 필수입니다. 그것을 자기 스스로 해소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결국 절약하고 절제하고 수입이 있을 때 소비를 앞세우지 말고 절약해서 모으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고 여유가 있어지면 소비를 늘리더라고 젊어서는 노동할 수 있을 때 돈을 모을 생각을 해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도 보면 제일 좋은 것은 자기에게는 인색하고 남에게는 후한 것이 좋은데 남에게 후하고 싶어도 자기가 당장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이 없으면 남에 대해서 너그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물질관리를 잘 해나가야 합니다.
[질문12] 신앙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또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친구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한 후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노하고 있습니다. 너무 이해가 되지만 3년 동안 그렇게 지내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만나고 나면 저도 기분이 안 좋아 기분이 안 좋아 점점 만나기가 싫고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관계를 접고 싶지만 신앙이 약해지거나 미끄러진 친구를 버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거나 인격적으로 망가진 친구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특히 하나님을 더 이상 믿고 싶어 하지 않은 과거 신앙으로 맺어진 친구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답변] 제가 말씀드리는 해결책은 능력껏 하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도 지탱하기가 힘든데 그 사람을 만났는데 기운이 쭉쭉 빨려 나가는 것 같아서 들어오면 자기가 숨이 막히는 것 같고 도저히 있었던 작은 기운까지 다 빨려 나가는 마음이 들어서 너무 힘들다면 만나지 마십시오. 그리고 친구를 버렸다는 가책이 있는데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본인이 노골적으로 안 믿겠다고 선언을 하는데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에너지가 자신에게 있는 한도 내에서 사용하십시오. 그러다가 여러분들이 기도도 하고 은혜 생활도 하고 말씀에 은혜도 받다가 보니까 그 친구가 불쌍한 마음이 들고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에너지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되면 연락해서 한번 만나자고 해서 싫다고 하면 그만이고 좋다고 하면 만나서 밥도 사주면서 따뜻하게 위로하고 예수 믿게 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의무감에서 하지 마십시오. 나 자신도 버틸 힘이 없다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청년들에게도 내가 얘기합니다. 구역장들에게 구역원들에게 연락이 오는데 구역장이니까 뭔가 도움을 줘야 하는데 자기도 그렇게 힘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솔직하게 얘기하라고 합니다. 친구한테 그런 전화가 오고 순원한테 그런 전화가 오면 내가 지금 너무 힘든 일이 많아서 네 얘기를 내 마음을 다해서 들어줄 수가 없겠다. 나에게 조금 시간을 줄 수 있겠냐? 내가 기도는 해 주마. 너도 기도하면서 한 번 이겨봐라. 그리고 여유를 갖는 게 좋지 자기는 감당도 안 되는데 의무감으로 하고 자신이 오히려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을 뺏기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충만한 에너지를 늘 갖기를 기도합시다.
[질문13] 옛날부터 지내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조금 독특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어느 날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크게 내색을 안 했지만 충격을 좀 받았습니다.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동안의 추억과 우정들도 있고 앞날에 대해 걱정도 되어서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조금 막막합니다. 동성애, 양성애를 고백한 친구들을 어떤 식으로 도와줄 수 있을까요?
[답변]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에 어떤 경우에는 자기도 도저히 자기를 이길 수 없다고 하는 커밍아웃 고백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을 고백하는 커밍아웃이 있을 수 있고 확신을 가지고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뭐가 문제인데? 라면서 대들 듯이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도와줄 게 별로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확신을 하고 심지어는 트랜스젠더 수술까지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예수 믿기 전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신론에 대한 확신, 세상은 개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베풀고 하다 보니까 옛날에 자기가 무신론으로 커밍아웃을 했는데 무신론을 접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똑같이 보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지금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네가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지? 하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혹시 그런 사상에 물들지 않을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인 사람에 의해서 전도를 받습니다. 그런데서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지는 되물어봐야 됩니다. 커밍아웃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도 여전히 죄의식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고백하듯이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훨씬 도울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신과적인 치료도 받게 해 주고 성경 말씀도 가르쳐주고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그가 신앙적으로 변화를 받고 성적인 성향을 이겨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전문가들과 의논하고 교회가 협업하는 것은 얼마든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한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만난 사람들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우정과 추억, 앞날에 대한 걱정이 있어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막막하다고 막연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자기 능력 안에서, 영향을 끼치는 한도 안에서 도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질문14] 오랜 시간 전업주부로 자녀를 키워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싶지만 이제는 아이들로부터 독립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분리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사회생활 경험도 많지 않아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생에 대해 도전하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답변] 자기가 마음이 끌리는 편한 선택을 하십시오. 예를 들어서 내가 이 나이가 됐는데 아이들을 길러놨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내가 한 푼이라도 벌여야지만 살겠다고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심리적으로 내가 너무나 처졌는데 자꾸 뒤처지고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서 일을 시작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경제적인 이유가 동기가 되어서 직업생활을 해야 된다면 해야 되겠지요?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지금의 수입으로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구조로 생활을 리디자인을 하거나 수입을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충고하고 싶은 이야기는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은데 두려움 때문에 직업을 다시 갖지 못하게 되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고 돈을 너무 집착해서 직업을 갖는 것도 별로 경건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 응답을 따라서 삶을 리디자인해서 수입에 맞추는 삶을 살든지 아니면 자기가 돈을 더 버는 것입니다.
돈을 벌 때는 돈을 버는 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경제적인 이득과 잃어버려야 하는 것들 사이에 대차대조표를 잘 만들어보십시오. 정말 아이들이 내가 직업 활동을 해도 충분히 앞가림을 할 수 있고 나쁜 영향을 안 끼치고 애들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는지도 보십시오.
아까 분리불안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에는 아이들이니까 돌봐줬는데 그러다보니까 아이들이 자신의 전부가 되어서 아이들을 떼어 놓고는 뭣도 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부정적으로만 보지만은 않고 그게 자녀들에 대한 깊은 소속감과 사랑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나약하다. 라고 하는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소속감을 느끼며 살고 애착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부모들에게 너무나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직업을 가져야 된다고 하면 직업 활동을 함으로써 잃어버릴 것과 이득을 얻는 것 사이에 대차대조를 분명히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서 직업 활동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지금은 자본주의사회여서 쓸모가 있는 것만큼만 사회가 대가를 지불하지 그 이상으로 지불을 안 합니다. 냉혹한 사회이니까 자기 자신이 충분한 경쟁력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어마어마한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파출부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나에게 경쟁력이 있는지를 생각하고 시장이 원하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의 효용성을 높여야 됩니다. 그래야지 취업의 기회가 옵니다. 효용성이 뛰어나게 높으면 훨씬 더 많은 대우를 받게 되고 적은 시간만 직장에 다녀도 좀 더 나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하나님이 직업을 기뻐하신다. 라고 하는 응답이 있게 되면 그런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 자체도 그분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바람직한 일자리를 찾아서 일하는 것은 너무 바람직한 일이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회생활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두려움이 앞선다고 하는데 너무 떨지 마십시오. 밖에서 열심히 직업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질문하신 분이 절대 열등하지 않으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질문15] 과학의 위대한 발전 가운데 한 예로 GMO 식품들이 개발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있어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면 어디까지일까요? 또한 다양한 연구와 시도로 신약들이 개발되어지고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고 불치병을 치유하는 목적으로 쓰이고도 있는데 선한 목적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그 선을 넘어서도 괜찮은 것일까요?
[답변] 마지막 질문인데요. 질문을 명확하게 질문하지는 못하셨는데 GMO 유전자변형 식품을 예로 들면서 과학의 발전들이 창조의 질서를 흐트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질문의 요지 같습니다. 저는 GMO 식품을 알고는 안 먹습니다. 그것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실하게 다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기농 식품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혹은 과신하지도 않습니다. 과연 유기농이라는 게 어디까지일까? 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소비를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해 특히 농축수산물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계속해서 비료를 주면서 농약을 치면서 관리했던 땅에서 나온 작물보다 그렇게 길러오던 땅에서 친환경 재배를 하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농약을 안 주고 기른 음식물들이 중금속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그 원리가 비료가 주어지고 농약도 뿌려주면 환경이 안락해서 자연스럽게 성장을 하는데 몇 년 동안 충분한 영양분이 안 주어지고 살충도 안 해 줄 경우에는 땅속에 있는 어떤 성분들을 빨아들일 때 필사적으로 빨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중금속조차 배출하지 못하도록 자기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마치 다이어트할 때 나타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다이어트는 기습하듯이 해야 되는데 계속 암시를 주면 다이어트를 결심하느라고 밥이 안 들어오면 세포가 딱 움켜쥐고 안 놓는 것입니다. 그게 요요가 오고 다이어트를 계속 실패하는 요인입니다. 정상 무게로 돌아간 10명 중에 빠진 체중을 유지하는 사람이 2명이 안 되고 8명은 다시 돌아갑니다. 제가 89키로 였는데 지금은 74키로 정도입니다. 71키로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보기가 안 좋아서 지금 75, 74키로 정도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음식 섭취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하면서 굶주리진 않지만 먹는 것을 조절하고 건강을 생각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0명 중의 2명밖에 안 되고 나머지 8명은 원위치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친환경 유기농을 100% 신뢰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하나 실험실에서 검사한 다음에 먹을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너무나 열악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식품들은 건강에 대한 문제를 항상 가지고 있으니까 항상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경제와 건강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춰야 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GMO 식품을 음식점에서 나오는 것을 모르고는 어쩔 수 없겠지만 알고는 안 먹습니다. GMO를 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종자 개량을 해서 감자의 크기를 훨씬 키운다든지 옥수수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도 얼마든지 유전자 변형이 쓰여 질 수 있습니다. 요새는 배양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것도 사실 윤리적으로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적으로 굶주리고 있는 땅들이 많습니다. 소고기 1킬로를 얻으려면 12킬로의 곡물이 소비돼야지만 얻을 수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사람들이 소고기를 안 먹으면 지구상에 식량문제는 깨끗이 해결됩니다. 문제는 소고기를 안 먹을 때 지금처럼 사람들이 농업을 계속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밀들이 사람들 식탁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중에 상당수가 사료로 들어갑니다. 가축을 키우는 농가에서 사룟값이 70%가 올라서 난리입니다.
지금 세계인구가 74억 정도로 보는데 농업 전문가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 오대오주 같은 데서 땅에 밀이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내서 내년의 곡물 가격을 다 계산하는 것입니다. 위성으로 씨 뿌리는 데를 다 봐서 통계가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경작지 중에 몇 분의 1을 파종하는 것이 수익구조가 맞겠는지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해서 재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씨를 뿌려서 모두 생산한다면 지금 있는 구조로는 150억 명이 먹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굶주리게끔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후의 문제도 아니고 순전히 자본의 문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신기한 것이 북한에서는 쌀이 없어서 난리를 치는데 매년 북한에서는 150만 톤의 곡식이 모자라고 남한에서는 150만 톤이 더 생산됩니다. 통일되어서 이것을 나누면서 살면 딱 맞게끔 구조가 돼 있는 것입니다. 부의 편중 현상에 의해서 사회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탐욕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축산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GMO 유전자 같은 것을 먹은 가축들을 우리들이 식용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아무도 모르고 양식장에 생산되는 수많은 양식의 수산물들은 다량의 페니실린 항생제를 사료에다 풉니다. 안 하면 고기들이 자기들끼리 부딪히면서 다 곪아서 생산이 안 된다고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싱싱한 바닷속에서 자연산으로 식탁으로 바로 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현실적으로 꿈꿀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가난한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잡아 온 고기나 동해안에서 잡아 온 고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일본이 버린 핵 시설들에 대해 수장시킨 예부터 시작해서 상상할 수 없는 원전 오염부터 해서 통계를 내고 하는 것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인가? 자본의 영향을 받는 신문에 보도되는 통계들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많은 의구심들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GMO 식품이 개발되고 있는데 이것이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일까? 그것은 좀 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유전자를 건드리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유전자 검사까지 나옵니다. 이형석 씨가 유전자 검사하면 자료가 이만한 책으로 한 권이 나옵니다. 10년 전만 해도 믿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데이터베이스가 많이 쌓여서 굉장히 잘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피부는 똑같은 자외선을 받을 때 다른 사람보다 검게 탈 확률이 28% 정도 높습니다. 당신이 운동할 때 근육이 발달할 가능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5% 높습니다. 똑같은 환경일 때 당신이 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유전자들이 발견됐습니다. 무슨 암부터 무슨 암까지 몇 프로까지 다 나옵니다. 지금은 점점 더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예를 들어서 유방암이 발견될 것을 유전자가 나오면 유방 자체를 절제해 버립니다. 안젤리나 졸리 같은 경우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셔서 아예 도려내 버렸습니다. 그럴 때 유전자를 약간 변형시키거나 아니면 집게를 집어내듯이 해서 걸리지 않게끔 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할 것이냐? 이런 문제는 좀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의견입니다.
과학자들이 지켜야 될 선이 있다면 어디까지일까요? 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서 있었던 마루타 부대가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것은 윤리적인 선을 현저하게 넘은 것입니다. 이종교배 같은 기술이 세계에서 최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중국입니다. 중국이 발달한 이유는 압도적인 실험 케이스입니다. 과학자들이 도대체 시체를 어떻게 많이 어디서 가져오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증받은 시체 이외에는 조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목이 완전히 잘린 사람의 목을 접합수술을 하는 시도를 이태리 의사를 데려다가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원숭이의 장기를 사람 속에 집어넣고 하는 이종장기 시술 같은 것에서 압도적인 케이스로 전 세계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것을 만능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윤리의 기준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것들이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윤리성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 됩니다.
사실 선진국들은 이런 것들을 자본도 있고 과학적인 기술력도 있는데 한계에 막혀서 실험 케이스들을 많이 못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을 중심으로 실험이 됩니다.
마지막 질문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연구한다면 그것은 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요? 할 때 우리들은 absolutly not이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코마 상태에 들어가도 다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12년 만에 깨어났는데 와서 가망이 없으니까 단념하고 호수 빼버리라는 얘기도 누가 했는지 다 기억하더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볼 때 내게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해도 된다는 기준을 우리들이 제시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코마 상태에 있다고 해서 나를 마루타처럼 사용하고 실험을 하고 선을 넘어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기술을 개발하라는 것은 본인이 동의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다양한 질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추가로 여러분들이 질문과 관련되든지 상관없든지 추가적인 질문이 있으면 대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추가질문1]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편인데 저희가 새로 아파트에서 살게 됐습니다. 층간 소음을 이야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나는 아랫집을 배려해서 조용히 살고 있는데 윗집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을 나는 참고 살아야 되나? 하는 고민도 있고 아랫집에서는 민원을 받아서 아. 죄송합니다. 하고 처리를 했는데 윗집에 대한 민원을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까 내가 평화를 위해서 참아야 되나?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운전하는데 나는 다른 운전자들을 배려하는데 새치기하는 차들에 대해 나의 불만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런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 참아야 하나? 부당함과 부조리함에 대해서 클랙슨이라도 더 울려야 되나? 이런 사소한 고민을 하게 되고 명랑하게 살기 위해 사는데 지난주에는 기기를 점검해주시기 위해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열린교회 문패를 보고 어머 열린교회이군요? 하면서 성경 이야기와 자신의 삶을 나누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신천지였던 것 같습니다. 생업으로 그 사람들은 가정에 침투해서 하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성경에 대해 조금 알고 있나 보다. 하는데 저 보고 어머 착한 캐릭터예요. 라고 하는데 선한 캐릭터 착한 캐릭터가 삶에 좋은 것일까 과연? 아니면 그렇다고 인상을 쓰고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이런 부분들을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되는가?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돼. 라고만 얘기하는데 이런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노’ 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질도 필요한데 항상 순종에만 이야기하게 되고 하다 보면 이런 부분들에 대한 어려움들을 겪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답변] 착한 사람이 두 종류인데 무시할 수 있는 착한 사람하고 무시할 수 없는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모든 사람이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제 똑같은 일을 만났는데 여기가 주유구입니다. 길은 요만큼밖에 안 되는데 내가 여기서 기름을 넣습니다. 그러면 바짝 대면 기름을 넣은 다음에 나갈 수가 있는데 여기다 데고 기름을 넣는 것입니다. 주유 중이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기름을 다 넣고 나가려고 하는데 내 차를 보면서 주유구에 호스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주유를 집어넣으면 멈출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차를 빼 주세요. 내가 나가야 되니까 이쪽으로 붙이세요. 하고 그 사람이 붙이면 나는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내가 판단한 것이 이렇게 하면 내가 1분 정도 빨리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1분의 시간을 차 안에 멍하니 있지 않으니까 좋습니다. 이렇게 개념 없이 대는 인간을 보면서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때 내 마음은 옳지 않은 행동을 교정해줘서 올바른 길을 찾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보다 에이씨 xx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빼 주십시오. 그러면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할 확률은 10%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시비가 생길 것입니다. 어차피 서로 설득은 안 됩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문을 열고 공손하게 얘기했습니다. 아저씨 내가 지금 나가야 하는데 이쪽으로 붙여주시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면 그것은 경우가 아니지요. 박스 안에다 박스에다 붙여야지. 그렇게 하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서 라디오 뉴스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있다가 왔습니다. 그때 내가 마음을 삭이길 잘했다. 1분 가지고 거기서 싸우고 나를 보면서 차를 댈 사람이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빼 줄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런 일들은 미국에서는 이것을 살인사건으로 봅니다.
미국에 가면 보는 사람마다 생글생글 웃습니다. 그 사람들의 학습 결과입니다. 신호등 같은데 서서 나란히 서면 계면쩍습니다. 예쁜 여자인데 활짝 웃습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한테 들은 건데 실제로 살인사건들이 여럿 있었는데 왜 째려보냐고 그러면서 대시보드에서 권총을 꺼내서 쏘는 것입니다. 주유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에 받친 사람들이 대개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감히 교정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만용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다툽니다.
자기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끼어들고 해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봐줍니다. 그런데 여기저기 직장에 가나 동네에서나 이리저리 치이고 산 사람입니다. 겨우 싸구려 차에 덜덜거리는 거 바꾸지도 못하고 끌고 나왔는데 자기보다 조금 더 좋은 차가 들어오니 짜증이 팍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 있어서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층간 소음 같은 경우도 저는 피해자였던 적은 거의 없고 손주들이 마구 뛰어서 가해자였던 것 같습니다. 밑에다가 매트를 깔고 항상 조심하고 요즘은 강아지 코코가 있어서 늘 아래 윗집에 뭘 갖다주면서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하는 입장인데 좋은 관계로 지내십시오. 찾아가서 똑바로 하세요. 내가 투서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거기서도 관계가 끊어지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떡부터 가져가십시오. 우리가 떡을 좀 했는데 생각이 나서 아래 윗집만 가져왔습니다. 잡숴보십시오. 그 사람이 접시를 보낼 때 뭘 담아서 보냅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층간 소음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아파트를 날림으로 짓는 사람입니다.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돈을 들이면 전혀 소리를 안 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광주 화정동에서도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절대적인 충고일지는 모르지만 나 같으면 떡부터 가져가겠습니다. 이웃과 나누면서 괜찮으세요? 하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가 좋아진다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가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어요. 발자국 소리가 가구 옮기는 소리처럼 들렸나요?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품이 있는 삶.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라면 빈부격차에 의한 귀족주의인데 오늘날은 무한경쟁 사회에 접어들면서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시대가 됐습니다. 능력주의입니다. 장점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지배하고 성공하고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학력이 높아지는 사회가 되는데 사실 그것을 뛰어넘어서 필요한 것이 디그노크라시(dignocracy)입니다. 디그니티는 존엄입니다. 인간 자신이 기품이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성격이 급하고 짜증이 많이 나는데 그런 것을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선하게 해석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기품을 잃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떡 세 번만 가져다주십시오. 그러면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너무 고마워하고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꼭 대사를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어제 가구 옮기셨어요? 새 가구 들어오는 소리가 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