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녹취자: 남궁지선, 황인준
목회자에게 제일 무거운 짐이 뭐냐 물으면 그중에 하나가 자녀들에 대한 짐일 것일 것입니다. MK 소위 얘기하는 선교사 자녀, PK 목회자들의 자녀 때문에 어려워하는 그런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많습니다. 또 이들이 아주 훌륭하게 부모님을 본받아서 열렬히 신앙 생활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 가운데는 빗나가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리고 목회자의 아이들이 신앙에서 빗나가면 다른 아이들은 쉽게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목회자와 선교사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빗나가면 이 사람들을 돌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죽 했으면 지금은 돌아가신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회자였다는 분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누군가 와서 내 아들 누구누구를 좀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다 그랬고 한국 교회의 신학자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박윤선 박사님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자녀들을 두고 말하면서 그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누가 우리 자녀들을 좀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내가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그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이게 우리 모두의 목회의 짐이고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우리의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또 목회의 아름다운 열매가 가정으로부터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 자녀들에게는 나름대로 어떤 상처가 있느냐하면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를 교회에 뺏겼다는 그런 상처가 있어요. 왜냐하면 어린 나이에 항상 어린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 언제쯤 될까요?
저는 좀 일찍 결혼했지만 지나간 시대를 놓고 본다면 그저 여자가 스물여덟 남자가 삼십쯤 돼서 결혼 한다고 하면 이제 한 이년 있다가 아이를 낳는 다고 하면 아이가 서너살 될 때에 목회자 나이 서른여섯이나 일곱 정도 될 거고, 사모님 나이 서른셋이나 넷쯤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때쯤 되면 지금이야 아주 오래도록 나이가 먹어도 부목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 때는 그때 쯤 되면 개척교회를 하든지 본격적으로 목회를 해야 할 때에요. 부목사를 해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서른 아홉 살에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정신이 없어요. 학교 강의 나가야죠. 개척해서 개척교회 새벽 서부터 밤까지 해야죠. 일주일에 예배만 열 세 번인가를 설교를 해야 될 정도니까 그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하겠어요. 그런데다가 여기저기서 오라고 하면 전국을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강연을 하고 해야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집에 얼굴을 식구들에게 보여주기도 쉽지 않을 때죠.
그때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뭔가 좀 조화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는 분들도 없었고 그때는 그것이 주님께 충성하는 줄 알고 그냥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했고 저도 선배들이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2월 달에 통합 측 교회에서 제일 큰 교회 중 하나인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어요. 그 교회에 원로 목사님만 두 분이 계시더라구요. 한 원로목사님이 96세이시고, 한 월로 목사님이 80이 넘으시고 담임 목사님이 60대 되신 분이 계세요. 그 상 원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 아내는 일찍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자기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가정을 거의 돌보지 않고 자기는 오직 목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 한다고 같이 밥 한번 먹어주지 못하고 그렇게 외롭게 살다가 갔는데 마지막에 하는 말이 그때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참 잘못했어. 근데 이제 96세가 되셨는데 얼마나 건강하신지 쩌렁쩌렁 하세요. 96세인가 97세인데 이번에 코로나 걸렸다가 거뜬히 나으셨대요. 근데 이제 쓸쓸하게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우리 집사람한테 너무 미안해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닌데 참 내가 너무 몰랐어. 그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 있는 겁니다. 또 남자로 태어나서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서 그렇게 뭔가 자기를 다 쏟아놓지 않고는 되는 게 없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우리들의 자녀들이 문제에요. 그 아빠는 그렇게 목회 사역에 빼앗기고 엄마는 남편인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는데 사모가 전혀 사명감이 없어요. 그리고 아예 집에서 안 나가요. 그러면 좀 낫지 그런데 그런 사모님에게는 남편을 향한 원망의 그늘이 마음에 가득해요. 그런데 사명감이 뛰어나요. 그러면 남편의 목회사역을 열심히 거들어야 하잖아요. 그럼 결국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거예요. 힘을 다해서 애를 쓰기는 하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잖아요. 모든 일을 다 잘한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목회를 많이 하면 가족들에게 낼 시간이 줄어들고 가족들과 많이 같이 있으면 그럼 목회할 시간이 줄어들고 많이 즐겁게 놀면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고 공부를 많이 하면 놀 시간이 없는거지 모두 똑같은 시간 24시간 갖고 사는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겠어요 난 모든 걸 잘한다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건 다 못한다는 말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럼 자녀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거죠.
제가 서른아홉 살에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저는 솔직히 말해서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시간이 없었다기 보다도 아버지로 부터도 가정을 어떻게 따뜻하게 보살피고 아내를 챙기고 아이와 같이 있어주고 그러는 거를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에게 나중에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우리 집사님이 물어봤데요. 아버지가 한 번도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1도. 두꺼운 책으로 몇 대 얻어맞은 기억만 몇 번 있고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와서 지방에서 사업하셨는데 집게로 집어놨던 시험쳤던 시험지 넘기면서 검사하던 아버지밖에 기억이 없어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회심하기 전까지 1도 없었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지 않으면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함께 있는 공간 자체가 매우 매우 불편해요. 빨리 여기서부터 탈출하고 싶은거죠. 그 후에 제가 스물한 살에 회심을 하고 그리고 스물여섯 일곱 되는 그 해에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됬죠.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잘 해드렸어요.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모든 어두움을 떨쳐내고 사랑했어요.
이게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여러분이 만약에 자녀들을 잘 대하지 않으면 그 자녀들이 이룰 가정이 또 똑같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에게는 이유가 있죠? 주의일을 하느라고 하나님 일 하느라고 이렇게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 부모에게는 구실이 없었겠어요? 전쟁통에 산업화에 새벽별을 보고 나가서 별을 보고 들어올 때까지 미친 듯 일하지 않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 아이를 돌아보고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부모들의 그런 사정은 사정이고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은 영향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오늘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거라 그리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거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거죠. 제일 먼저 첫 토막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이게 뭐 아비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죠. 이것은 엄마든지 아빠든지 뭐든 마찬가지에요. 아이들이 부모를 싫어해요. 엄마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아이더러 엄마하고 비슷한 그림을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사자를 찾았데요. 선생님이 예쁜 아기사자를 보여주니까 그거 아니래요. 큰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번쩍 든 성난 사자를 지목하며 이게 우리 엄마라고 아이가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제 그 다음날 엄마가 유치원에 와서 아무개가 엄마를 동물로 묘사했어요. “호호호호 알아요. 저를 토끼라고 불렀죠?” 그게 엄마의 착각이에요. 험상궂은 사자예요. 끊임없는 잔소리꾼 잡아 삼키지 못해서 안달하는 그런 부모로. 만날 때마다 엄마는 뭔가를 요구하고 뭔가를 보채고 자기는 항상 거기 미치지 못해서 허덕거리는 그런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엄마가 비치는 거예요.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는 일반적으로 이런 성향이 더 심해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엄마들은 직업을 가지지 않은 엄마들은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고 기다려 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어요, 그런데 직장 다니는 엄마, 목회하는 엄마들은 짧은 시간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아이들의 모든 것을 고쳐놓아야 해요. 짧은 시간에 같이 하는 동안에 열 시간 동안 펼쳐서 할 잔소리를 압축해서 한 시간 안에 쏟아놔야 하니까 더 심한거에요.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굉장한 거에요. 더군다나 이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게 되잖아요? 사춘기에 접어들게 되면 얘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마음속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싸우는게 너무너무 힘들어요. 근데 옆에서 엄마 아빠가 염장을 지르는 거에요. 염장을 지르면 얘는 자기안에 있는 것과 싸우는 것 보다는 엄마 아빠랑 싸우는게 훨씬 쉬워. 왜냐하면 엄마 아빠는 보이는 적이고 자기 마음에 있는 싸움은 적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옳다구나 하고 얘네들이 엄마 아빠와 부딪히면 거기에 전쟁하듯이 엄마 아빠를 미워하고 투쟁을 하는 거에요. 그러는 동안에 자기와 싸워서 해결이 안 되는 스트레스를 푸는 거에요. 그것도 모르고 엄마는 계속 잔소리고, 아빠는 얼굴도 안 보이다가 나타나면 “너 그따위로 해서 대학 가겠냐?” 묻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런 건 안돼, 그렇게 하면 안돼.”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 아이는 자기와 싸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아빠가 도와주지는 못 할망정 염장을 지르면서 자기 마음속에 적개심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들이 생각해 보면 억울한 거에요. ‘도대체 뭘 잘못했나? 지를 위해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고 어떻게든지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충고하고 도와준 것 밖에 없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서러운 마음이 부모님들에게 밀려오는 거예요. 특히 사모님들에게 밀려오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본인의 생각이고 아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라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나는 거냐? 자녀를 기를 때에 자녀에게 잘 해 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자녀를 화나지 안하게 하라는 거예요. 노엽게 하지 말라는데 이게 뭐냐 하면분노가 일어나는 거에요. 아이들에게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나도록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서 ‘니가 뭘 잘한 게 있다고 화를 내냐?’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족치면 안 되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아이들에게는 특히 청소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사실 어렸을 때에는 크게 교육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잖아요? 여렸을 때 갓난아기일 때 제 시간에 우유주고 밥 주고 누가 와서 돌보든 지 간에 큰 문제가 없잖아요? 그런데 얘들이 자아의식이 생기기 시작할 때 그 때부터 이 교육은 심각함을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이 있어요. 중학교 2학년 된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물어봤을 때 응 하고 대답해주면 감사하라 그만큼 이 아이들은 이 안에 엄청난 혼란과 투쟁이 이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부모가 먼저 그것을 깊이 공감해야 하는 거예요. 자신도 사실 예전에 그랬거든요. 그런데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꼰대가 되어 가는 거예요. 잊어버려요.
그리고 우리들이 살던 시대와 요즘 아이들이 사는 세대는 사뭇 달라요.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그래도 우리는 내색하지를 못했어요. 누구한테 화풀이를 못하고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선생님께 대들었다가는 몽둥이가 날라 오고 분필통이 날라 오고 피나게 맞았어요. 집에 가서 이르면 엄마가 한 대 쥐어박으면서 ‘니가 맞을짓을 했으니까 선생님이 때리셨겠지 니가 잘했으면 왜 맞겠냐?’ 이러고 오히려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우리 아이가 맞을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오히려 사과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를 학교에서도 못 꺼내고 집에서도 못 꺼내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아이들은 달라요. 훨씬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고 그리고 이런 매스미디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살라는 사상을 많이 주입받으면서 아이들이 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윽박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거에요. 진솔하게 아이들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아이가 기분이 가장 좋았을 때 아니면 편지를 써서 물어보든지 문자로 물어보세요. 내가 아빠가 많이 고칠 수는 없겠지만 네가 아빠 때문에 제일 힘든 게 뭔지 두 개만 얘기해다오 내가 일 년 동안 노력해 볼게. 어떤 아이들은 그것도 답장 안 할지도 모르지. 어떤 애들은 답장 할 지도 몰라고 그리고 그것을 왠만하면 들어줘야해. 엄마도 연락을 해서 엄마가 부족한데 어떻게 할 때 엄마하고 사는 것이 힘든 지 두 가지만 얘기해 봐라. 엄마가 다는 못 고치겠지만은 두가지는 노력을 해볼게. 그러면 얘네들이 이야기 할거에요. 그럼 실마리가 풀리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노력을 해야 해요.
그래서 아이들을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럼 내버려 두라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왜 아이들이 노여워지는가? 골로새서 3장 21절에도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낙심할까 하노라 하고 나와요. 낙심하다. 이게 그리스어 성경에 ‘아듀모신’이라고 나오는데 ‘아’는 없다는 것이고 ‘듀모신’은 힘, 능력, 감정이 솟아나는 것 희망 이런 것을 뜻하는 거죠. 부모가 자식을 계속 화나게 하고 노엽게 하고 지나치게 아이를 책망하면 이 아이는 의욕이 없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삶에서 의욕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요. 목회도 이렇게 보면, 목회를 그렇게 오래 하지 않았는데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린 목회자들이 있어요. 그럼 안돼요. 교회가. 그런데 오래 목회를 했는데도 끊임없이 의욕이 있는 목회자가 있어요. 그 교회는 됩니다. 무슨 뭐 한 없이 된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한없이 발전해서 순복음교회처럼 커지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의욕이 있는 것. 그것은 숨 거둘때까지 목회자 부부 속에서 유지되어야 할 힘이에요.
아이들도 인생을 살아갈 때 아이들이 마음속에서 희망과 열정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솟아오르는 아이가 되어야지만 무엇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기술을 배우든지 예술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잘 해야 겠다는 열정이 솟아오를 때 그 아이의 인생이 희망이 있는거죠. 여러분 티비에서 가끔이 아니라 자주 나오는 서민 갑부, 아니면 이 음식점이 이렇게 음식을 잘 합니다라고 나오는 이런 프로그램이 있잖아요.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아 정말 대단한 열정이다. 어떻게 저 냉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저렇게 열정을 쏟아 부을까? 그런 느낌을 받는거죠.
제가 본 프로에서는 부산에 있는 어떤 냉면집을 소개하는 데 녹말가루를 사다가 냉면을 만들잖아요. 더 쉽게 하는 사람은 냉면 봉지를 사다가 삶아서 하고 좀 나은 사람은 녹말가루를 사다가 반죽을 해서 그래서 국수를 내리잖아요.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 녹말가루를 자기가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사 오는 건 맛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붕 전체에다가 삶은 고구마를 썰어가지고 말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다가 지저분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뭐를 씌워 놓고 하루에 몇 번씩 올라가서 그게 잘 마르는지 보고 그것을 바싹 말랐을 때 그거를 빻아가지고 거기서 녹말을 내리고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음식 하나도 제대로 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집을 보면 주인에게 ‘듀모신’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것이에요. 그게 공부를 하는 사람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이든 하다못해 시장에서 호떡 하나를 구어서 팔아도 장사가 잘 되는 집은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거죠.
아이가 모두다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겠죠. 부모는. 근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하는 거고 못하는 애들은 못하는 거예요. 아이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모두 다 잘 그리겠어요? 사람마다 다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 확실한 거 하나는 뭐에요? 얘가 공부를 잘하는 애가 될지, 예술을 잘 하는 애가 될지 장사에 수완이 있을지 확실한 거는 몰라요. 어떤 뛰어난 재능이 있을 지라고 확실한 거는 살아봐야겠다. 해봐야겠다는 열정이 이 아이 속에서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거예요. 뭐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인생을 살게 되겠죠. 그렇게 하면 뭐하겠어요? 그래서 먼저 부모는 아이들을 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해요. 왜 아이들을 부모들이 자꾸 화나게 만드느냐? 노하게 만드느냐?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빗나간 욕망이에요. 아이에 대해서 너무 큰 욕망을 갖는 거예요. 그 욕망을 자기가 가진 욕망을 못 이루었어요. 그것을 자식들에게 투영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공부를 많이 한 집안은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시켜야 공부를 잘 하는지 알지만 아이가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비교적 공부를 못한 부모들이 자격지심이 있어서 아이에게 자기가 못한 것을 투영 시키면서 공부 안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하면서 아이에게 강요하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예술에 소질이 있어서 이것, 저것 잘하는 사람은 절대 자식에게 피아노 학원 다녀라 어디를 강요 안 해요. 엄마 아빠가 그런 거에 문외한인 사람들 그리고 잘 사는 집 애들이 악기를 서너개씩 다루는 것을 보면서 약간 열등감을 느끼는 부모들이 자식을 그렇게 싫다는데도 무슨 학원 무슨 학원 하면서 그 한 2만 5천명이 피아노를 배우면 그중에 한명이나 두 명만 피아니스트가 나오는데 그 어려운 길에 자녀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자녀를 족치는 거예요. 그런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해요?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게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부모의 과도한 욕망이 결국은 어느 한계가 넘게 되면 분노가 되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가 무서워서 시키는 거해요. 힘이 없으니까, 권력이 없으니까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기 생각이 떠오르고 나면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지? 하는 회의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가 계속 그렇게 푸쉬를 하면 관계가 깨지는 거예요. 관계가 깨지고 나면 부모는 자식과 함께 살고 있는 것 뿐이지 사실은 남이예요. 관계가 깨졌는데 여러분 혹시 사시면서 그런 경험 안 해보셨어요. 남편과 관계가 심각하게 깨진 때가 있다고 쳐요. 그래서 이 남자하고 살아야 하나 하는 위기가 왔다고 쳐요. 그때 같이 살고 있지만 그게 뭔 가족이에요. 원수지.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자식도 똑같은 거예요. 살고 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니라 서로 관계가 깨어지지 말아야 가족이에요.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나 똑같이 누구나 목사님은 사모님들을 좀 더 자기가 원하는 사모를 만들고 싶겠죠. 그리고 사모님들은 목사님을 자기가 원하는 목회자가 돼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겠죠. 그런데 밀어봐서 더 이상 안 나간다 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한계에요. 거기서 멈춰야 되요. 멈추지 않고 거기서 계속 밀면 관계가 깨지는 거예요. 관계가 깨지면 그게 상처가 되고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남편이 하는 모든 일을, 사람들이 남편을 모든 교인들이 존경하고 좋아하고 그러기 때문에 사모님이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여보 이런 건 당신이 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이런 건 당신이 조심해야 해.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그런 얘기만 계속하면 남편과의 관계가 깨지잖아요.
그러니까 격려와 충고를 적절하게 섞어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이제는 충고하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고쳐지겠어요? 그러니까 가능한 한 절제하면서 관계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죠. 그때 자기 자식을 다른 집 자식하고 비교하면 걔는 이미 오래 전에 자기 엄마와 남의 엄마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하도 공부를 못한다고 아들을 야단을 치니까 아들이 그러더래요. “엄마는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했어?” “공부 뭐 그렇게 잘한 건 아닌데,,” “그럼 내가 이만큼 하면 됐지, 뭘 엄마도 못한 것 가지고 나한테 그렇게 얘기를 해..” 그리고 애들이 가서 외할머니한테 물어봐요. 우리 엄마 어렸을 때 공부 잘했냐고. “야. 말도마라 니 엄마 때문에 내가 맨날 고등학교 불려가고, 중학교 불려가고 그랬다. ” 얘가 비밀을 다 캤어요. “아니 외할머니는 엄마 때문에 학교에 그렇게 두달에 한 번씩 불려갔다는데 엄마는 내가 한 번도 안 불려가게 해줬는데 이만하면 됐지. 왜 엄마도 못 한 거를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하는 거야,,” 그게 자기가 못했기 때문에 그 욕망을 투사시키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면 잘못된 기대에요. 아이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를 갖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네 살 때 쯤에 자기아이가 영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얘가 초등학교 중학교 들어가서는 맨날 하는 말이 있어요. 얘가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런대.. 그게 아니라 원래 머리가 나쁜데 그거를 엄마만 몰라요 그리고 가서 맨날 선생님한테 얘는 머리는 좋은.데.. 머리 좋고 나쁜 거를 엄마가 더 잘 알겠어요? 학교 선생님이 더 잘 알겠어요? 테스트 해 보면 금방 나오는데 아이큐 95밖에 안되는데 뭐가 머리가 좋아요? 그러면서 그릇된 기대감을 자꾸 갖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아결국에 가서 부모는 실망하게 되고 아이는 화나게 되는 거예요. 아이가 노엽게 되면 아이는 거침없이 비뚤어지는 거예요. 그걸 하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지나친 징계에요. 사람들이 잘 인용하는 게 아이를 때리지 않으면 아이를 망치느니라, 잠언 성경구절을 대면서 줘 패야 된다고 얘기 하잖아요. 매 라는게 말이죠. 종아리를 치고 작대기로 두둘겨 패는 것만이 매가 아니에요. 결국은 매를 때리는 이유는 뭐예요? 옛날에? 때리면 아프잖아요. 아픈 거를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게 만들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똑바로 해야지 하는 자기 주도적인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 주기 위해서 아이를 때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맞는 것을 절대로 안 무서워한다. 이럴 경우에 때리는 것이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도 보면 아이들을 빳따를 때렸어요. 아이들이 종류가 세 종류에요. 한 대만 때려도 막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명을 지르는 애가 있고 서 너 대 맞을 때까지는 가만있다가, 한 네 대쯤 때릴 때 무릎을 털석 꿇으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얘들이 있고, 선생님이 열다섯 대를 두둘겨 팼는데도 이를 악물고 움직이지도 않는 애들이 있어요. 성격의 차이에요. 선생님들이 그런 애들을 제일 무서워해요. 왜냐하면 그런 애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렇게 조용히 얻어맞고 있다가 그 다음에 어느 한 순간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에서초달을 차마 못하면 아이를 망치느니라. 할 때에는 아이가 매를 두려워하고 그럴 수 있는 어떤 조건 속에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때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어떤 아픔을 느끼게 해서 반성을 하게 하는 그것이 더 훌륭한 교육인 거예요. 그게.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짜 교육이지 그리고 아이들을 두드려 패가지고 아이를 고친다. 요즘은 그것을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특별 권력관계라고 하는데 징계권이 민법에서 불법으로 규정이 되었어요. 때리면 안 되게 되었어요. 형법으로. 그래서 미국 아이들이 유치원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911, 우리로 말하면 119예요. 911에 전화하는 것부터 배우는 거예요. 엄마 아빠가 때리면 그 번호로 전화하는 거예요. 시대가 달라졌어요. 그러니까 그거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을 징계하는데 지금 때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아이가 잘못한 게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 벌이 너무 가혹해. 여러분들이 아이를 때려봐서 알지만, 때릴 때 일체 아이가 오직 잘 되기를 마음으로 눈물로 아이를 때릴 때가 몇 번이나 되요? 매를 들었을 때는 엄마도 이성을 잃는 거예요. 그리고 애가 미워서 패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해석을 내가 니가 미워서 그랬겠니? 얘는 당연하지 미워서 그랬지? 그런데 엄마는 말하기를 너 잘 되라고 하는거야 라고 해석을 할 뿐이지 실제 마음속에는 미움의 감정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무관심한 거예요. 아예 관심이 없는 거에요. 그리고 오직 교회일 한다고 하고 아이에 대해서 일체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정말 잘못된 거죠. 그래서 젊었을 때 제가 잠깐 수요일마다 나가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목사님은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어요. 상가에서 개척을 해서 300여명 교인이 모였어요. 뭐 그것만 해도 그때만 해도 그렇게 작은 성과는 아니죠. 근데 뭐라고 했냐하면 교회에서 교회의 가구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면 자기는 교회로 달려가지만 교회에 있는데 집에서 아이가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면 안 간다는 거에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 하는 거에요.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목회자가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표처럼 보였지만은 그러나 사실은 그런 속에서 아이들의 마음은 신앙적으로 정말 하나님만 사랑하는 아버지다라고 하는 그것이 자신의 속에 가르침으로 남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자식이구나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상처로 남는 거예요.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사명은 목회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지만 한편으로는 자녀들을 목사님들과 잘 양육하는 것 이 두 개가 비유를 하자면 수레가 굴러가는데 한쪽 바퀴는 교회고 한쪽 바퀴는 가정사역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두 개가 잘 돌아가서 이 아이들이 신앙적으로 바르게 잘 컸을 때 그 때에 그 부모가 정말 목회를 하면서도 자식을 제대로 길러낸 부모다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바로 본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 하나의 표가 되는 거예요. 한번 보세요. 우리 교계에서도 보면 목회는 분명히 굉장히 큰 성과를 냈어요. 그런데 가정은 깨졌어요. 그리고 자녀들을 뿔뿔이 흩어져서 그렇게 신앙을 버리고 방황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냐면 목회자가 목회적인 업적은 이루었지만 신앙생활에서 승리했다고 믿어지지는 않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리 교회를 크게 하고 교회를 은혜롭게 한다고 해도 목회자 집안의 가족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우면 그것을 올바른 신앙의 기반 속에서 이루어진. 사역이 아니에요. 멀리 있는 사람은 우리의 일부만을 알아요. 멀리 있는 사람은 여러분들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여러분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본받고 싶어할 지 말하지만 진짜 여러분들이 본받고 싶은 사람인지는 가족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예요. 자녀들에게 물어볼 때 우리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평가를 수 십 년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짜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으로 목회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런 점에서 있어서 우리의 선배 목사님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많이 있었던 것이죠. 왜냐면 시대가 유교가 지배하는 시대였고. 근대화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교인들과 마찬가지고 가정을 돌보는 게 중요한 지를 미처 마음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가정, 가정, 가정 이런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게 1980년대 이후 지 60년대는 그런 얘기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런 중요성도 없고 어떻게 이 모진 세상에서 밥 벌어 먹고 살까 거기에 집중해 있었던 거죠. 이런 우리 부모들을 이해해 주는 눈빛으로 봐야 하는 거죠.
방송인 중에 김성주라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상처가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줄 알고 자랐고 나이가 되어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장병이 운동장에 운집하고 있다가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잘 갔다 와라’하고 아들의 모습을 응시하다가 깜빡하고 시선에서 아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버스를 탔는지 모르게 되었고 아들은 자신이 탄 버스를 찾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처음으로 가슴이 울컥했다고 합니다. 자기를 못 찾으니깐 아버지의 눈빛이 그렇게 흔들리면서 당황하여 뛰어다니시며 마지막엔 차창 밖으로 아들을 보고 싶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뛰어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였는데 아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너를 참 많이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 우리 세대가 그러해서 표현할 줄도 몰랐을 뿐 사실 너를 많이 사랑했단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하는 그러한 인터뷰였습니다. 말하자면 자식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에게 최고의 형벌입니다. 그 자식은 그 자식에게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무관심한 것은 아주 잔인한 폭력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원인 때문에 빗나간 욕망, 과도한 기대, 지나친 징계, 무관심 이런 것들 때문에 아이들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기가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틀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강요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랄 수 있도록 최대한 허락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사건건 아이들과 부딪치게 될 때 아이들에게 신앙에 관해서 가르칠 때도 그것이 엄마가 하는 잔소리로 여기게 됩니다. 말이 없고 모든 것을 받아주던 부모가 따끔하게 이야기할 때는 아이들이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구나 그리고 엄마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생각하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구나’라는 것이 가슴에 다가오게 되는데 잔소리가 습관이 될 때 ‘너 어제 교회에 나갔어? 왜 그렇게 빨리 집에 들어왔어? 공과 공부 안 하고 들어온 것 아니야?’.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것 자체가 잔소리에 다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굵은 소리를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에 잘 차지 않아도 아이를 놔둬야 합니다.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놔둬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들에게 해줘야 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가 노여워지게 됩니다.
이 출발은 이 자녀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태어난 고귀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있고 내 발밑에 내 자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나와 자식들, 남편 모두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소중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신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즐겨 쓰는 말에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셔서 당신의 자녀가 될 때 구원하시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손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신자라고 해서 자식이 저절로 구원받는 법은 기독교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있고 자신이 있고 발밑에 자녀들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그때 그것이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만날 때, 아이에 대한 아주 강제적인 지배력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그릇된 기대, 분노 등과 섞이면서 아주 추악한 형태로 자식들에게 내뿜어지게 됩니다. 아주 예민하고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그것을 잘 해석하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이도 낳아 길러보면 ‘옛날에 엄마가 잘못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엄마도 참 힘들었겠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나도 해보니깐 이렇게밖에 못하는구나.’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고 고생해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그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어렸을 때 어떻게 그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상처가 되어서 아이의 인간성을 굳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자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품이 굽어진 자매하고 만나면 그 자매가 시집가서 이루어진 가정은 또 많은 고통을 겪고 그 형제가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지만 그 가정을 극복하고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아들을 그렇게 키워 놨다면 그 굽은 성격으로 자매를 만나서 보통 어렵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남편의 집에서 온 딸을 눈물을 흠뻑 쏟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게 만들어야지만 겨우 그 가정이 유지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식을 발밑에 있는 존재로만 보지 말고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자식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 이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나와 함께 수평적인 관계로 서서 하나님 앞에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아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지극히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안되는 것은 안 되지만 그 안되는 것만 아니라면 할 수 있으면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그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흔히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는 교인들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 때도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이 다 사랑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을 해줘야지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원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착하게 해주고 도와준 다음에 내가 마음이 편하고 뿌듯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 사람은 그게 너무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익숙해져야 할 것은 자녀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자유로워서 아이가 심지어 죄를 짓고 와서도 부모에게 내가 이런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정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너는 목사의 딸이다. 목사의 아들이다.’식의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야기를 안 해도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빠가 목회자라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안에 눌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엄마, 아빠조차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교회 안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3년은 빌딩으로 된 교회의 위에서 살았고 평촌으로 이사 간 다음에는 공장 위에 있는 임시 건물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이미 생활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교인이고 생활하는 공간 자체가 교회입니다. 이미 ‘너는 목사의 아들이다, 딸이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눈뜰 때부터 저녁에 잘 때까지 다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엄마, 아빠가 나서서 ‘너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목사의 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오히려 정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너는 목사의 딸, 목사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교회 안 나오고 예수 안 믿는 것만 빼놓고 뭐든지 너 하고 싶은 데로 하여라. 구김 없이 자라라.’ 그리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네가 목사의 아들, 목사의 딸로서 교회에서 모본을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데로 자유롭게 살아라. 어차피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갖는 것이지, 지어낸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앉아있고 신앙생활 하는척하는 그 속에서 인간의 이중인격적인 것들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셔야 합니다. 교인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래도 목사님 집안 아들인데....’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아이는 내가 목사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모가 되는 것에 대해서 찬성해 준 적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어쩌다 태어나보니 목사 아빠, 사모 엄마를 만난 것뿐이지 그 아이들은 가만히 놔두더라도 많은 억압을 느끼고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끔 허락을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여러분들이 교인들로부터 그것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오히려 사모님들 가운데는 교인들 편을 들고 자식을 혼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퇴하면 교인들과 헤어져도 되지만 자식들과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은퇴하지 않아도 교회를 옮길 수도 있고 사표를 낼 수도 있는데 교인들과 가족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하다 보면 교인들이 기가 막히게 압니다. 여기서 야단을 쳐도 목사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아는 교인은 여기서 아주 심하게 야단을 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에 불만이 많다는 것밖에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볍게 책망해도 그것이 큰 상처로 와닿게 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자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야단칠 자격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한도 안에서 그것을 아주 가끔 너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아이에게 옳은 이야기를 해줄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잔소리하듯 하면 안 됩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첫 아이를 유산하고 나서 특별히 가족계획을 한 것은 아닌데 아이가 안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녀를 달라고 열렬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꼭 필요하단 생각도 안 들었고 부모님 사업하시고 형제 셋이 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부모님이 이혼하시는 등 가족들이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에 대한 이름다운 그림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이 저에게 굉장히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16살에 시집을 오셔서 아이 다섯을 낳아서 둘 잃어버리시고 아이 셋을 기르셨는데 시집을 와보니 시어머니 나이가 32세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이를 갖고 조금 이따 시어머니가 아이들 가지셨는데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게 아이를 맡겨 시동생을 젖 먹여 키우시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손주들을 맡아 기르시다보니 할머니께서 아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신 겁니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저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남준아, 나 참 궁금한 것이 있다. 천국에도 애들이 있냐?” “그럼요. 천국도 애들이 있죠.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는데 다 있죠” “천국에 애가 있다고?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가 있지?” 그럴 정도로 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7년 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서 기뻤는데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게 너무나도 고되고 힘든 것을 그때 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하는데 등록금이 6개월에 45만원 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가 아무것도 없이 한 달에 7만원 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사 먹고 7만원을 6개월 모아도 등록금에서 3만원이 모자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이토록 어렵게 살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무슨 일이 이리도 많은지 나름 집안일을 잘 거두는 남자였는데 우리 아내는 제왕절개를 하고 거동이 어렵고 내가 집안일을 하는데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교회 일대로 다 해야 하는데 아이 하나 낳고 뻗었습니다. 다시는 아이를 가질 엄두를 못 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6년이 지나 딸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하나는 목사가 되고 아들, 딸 모두 시집, 장가를 갔는데 그 아들을 보는데 7년만에 태어난 아이이다 보니 제 나름대로 큰 기대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총명했습니다. 그리고 30개월이 되었는데 아빠하고 논쟁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기저귀 차고 책상에 앉아 말대꾸를 또박 또박 하면서 얼마나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한 6살 정도 되었을 때는 20~30명을 모아놓고 30분이고 40분이고 말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께 인기를 독차지하였습니다. 얼굴도 예쁘게 생기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너무나도 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입학식 날 학부모들이 뒤에 서 있고 자그마한 코흘리개 아이들한테 ‘오늘 학교, 다 구경했죠?’ 물으니 아이들이 ‘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이 ‘구경하면서 인상 깊었던 거 있어요?’ 물었는데 저희 아들이 손을 들고 ‘선생님이 이쁜 게 가장 인상적이었어요’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서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서 집에 안 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저는 천재가 난 줄 알았습니다. 국어, 산수, 과학 할 거 없이 모두 틀린 것이 없이 시험지를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초등학교 4학년까지 자랐습니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천재가 ‘나는 못되었는데 우리 아들이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5학년 때부터 공부를 못하기 시작하였는데 성적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도 안 하고 운동도 안 하고 공부 때문에 1년에 한 차례 정도 매를 맞았습니다. 공부 안 한다는 것, 정리 정돈 안 한다는 이유로 혼을 냈습니다. 그 대신 딸은 절대 때리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 제가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아이, 아니 평범 이하의 아이였고 이 아이에 대한 기대감은 떨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딘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차를 몰고 오는데 신호를 받고 대기하고 있는데 뜬금없지만, 선명하게 하나님이 저에게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너의 하나님 아버지이고, 너도 네 자식에게 아버지인데 네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로서 너에게 해주는 것과 상당히 다르지 않냐?’ 하나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엄마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인 내가 너를 대하는 방식과 아버지로서 네가 자식에게 대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냐?’ 생전 처음 울려오는 큰 울림이었습니다. 신호가 바뀐 후 교차로를 통과하고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대를 붙들고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자녀 교육에 대해 회심하던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온 육체의 기운이 빠져나갈 정도로 울었습니다. 그때 그 회개를 통해서 아주 선명하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해 오셨는가? 나는 끊임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데 하나님은 언제나 회초리를 들고 나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래 네가 그걸 해보고 싶다고? 그럼 한번 해 보거라’. 심지어 내가 죄를 지을 때조차 하나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면 언제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나를 다시 자녀로 받아주시고 내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 때문에 겪었을 모든 상처와 슬픔이 내 마음속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께로 받았던 상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의 불행이 자녀를 통해 또 그 자녀의 자녀를 통해 계승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내가 이렇게 흐르는 잘못의 끈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불행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내가 이런 식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살다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주님을 뵐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내가 목회하며 성도들에게 베푸는 이 사랑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일까? 진짜 사랑일까? 아니면 또 다른 동기가 나오는 것인가?’와 같은 생각을 몇 달 동안 울며 회개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을 때 우리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같이 다니기도 싫었습니다. 이뻤던 유치원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살도 찌고 공부도 못하고 게으르고 정리도 안 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얘가 공부를 못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라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공부 못했습니다.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학교 간 날이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가기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공부와 상관없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하게 되었습니다. 저 고등학교 3학년 때 타임즈위크지를 거의 사전 없이 읽었습니다. 그렇게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전교에서 영어는 1등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다른 과목은 하기도 싫었습니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꿈이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간대학교에 들어가니깐 공부가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졸업할 때 전체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대학원을 가니 더 재밌는 것입니다. 결국 이 나라의 교육이 저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우리 아들, 지금 미국에서 박사 논문 쓰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잘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나 저의 아들이나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이 나라의 교육이 너무 안 맞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의 자녀들이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녀들이 공부를 정말 못할 수도 있지만 환경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게 되면 얘가 공부를 너무 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공부를 못하던 아이들이 해외에서 공부를 잘하게 된 경우 그 나라의 교육 제도가 그 아이에게 맞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고 정리 정돈 안 한다고 야단을 치고 때렸는데 정리 정돈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했을 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아들이 엄마한테 이야기하길 ‘엄마, 아빠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아!’. 아이가 느꼈을 정도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회개한 이후 처음으로 애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것으로 사 입혔습니다. 애가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아빠가 옷을 사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아빠가 나를 사랑하였는데 내가 몰랐던 것 같아’. 지금도 이렇게 생각해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도대체 그 아이가 무슨 잘못 했다고 그 공부를 잘못했다는 거, 정리 못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고 아이를 혼내고 때리고 ‘내가 왜 잔인하게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항상 납니다. 그다음부터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라고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가 깨달은 것은 우리 아빠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지금 만나도 바른 얘기 일절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나이에 돌이켰으니 자녀들과의 관계가 좋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혼내고 잔소리했다면 지금쯤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절대 저같이 어리석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지각하고 가끔 학교 안 간다고 해도 학교 가기 싫으면 하루 학교 가지 말고 놀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개근상 탄 게 자랑이었는데 이젠 사회에서 개근상, 쳐주지도 않고 가지고 가면 오히려 인간성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한 번도 12년 동안 지각이며 결석을 안 했다고 한다면 기계나 만들고 농사나 짓던 시절에는 그런 사람이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 때에 그게 무슨 쓸모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아이를 괴롭히고 전근대적인 생각 때문이 아이들을 사슬에 묶어두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부모로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을 사랑할 권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은퇴하신 선교사가 계시는데 자녀들이 다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훌륭히 컸습니다. 그런데 후배 선교사들이 “사모님, 얼마나 교육을 잘했으면 자녀들이 저렇게 신앙이 반듯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어요?” 선교 사모님께서 “아니야.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아이들이 학교 다닐만하면 선교지를 옮기고 또 적응할만하면 또 옮기고 그래서 애들 힘들게 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뒷바라지를 못하고 늘 그랬지. 그래도 한 것이 있다면 그냥 아이들에게 얘들아!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 하나만 가르쳤을 뿐이야. 그런데 그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니깐 나머지는 아이들이 알아서 다 하더라구”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 재능이 있는지 보지 마시고 목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리고 이 집안에 태어난 것을 얼마나 기쁘게 여기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어색해 보여도 편지를 쓰고 대화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마음에 그늘이 있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없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부 못하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리고 철들면 공부합니다. 그리고 철들어도 안 되는 아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제가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다. 그 공부가 수학이고 영어라면 잘하는 애, 못하는 애 있겠지만 모든 사람은 잘하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게 무엇인지를 부모들은 발견하게끔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많은 직업을 접촉하게 하고 여행하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열어주면서 이 아이가 어느 한 지점에서 불꽃이 터지며 난 저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죄를 짓는 일만 아니면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예술가가 되든지 아니면 동네에서 가게를 차려서 하나님 경외하며 교회를 잘 섬기고 신앙생활 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모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내 아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신실하게만 살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것을 잘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식이면 이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당연합니까? 무엇을 잘한 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다가가서 독한 감독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한없이 사랑해 주셨던 엄마, 그리고 자기가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든지 항상 자기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어주었고 같이 기도해 주었던 아빠, 그래서 세상에 내가 당신의 아들, 당신의 딸로 이세상에 태어난 것이 내 인생의 커다란 선물이었다는 것을 자식들이 고백하면서 살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