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8._대신대학교오후특강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랑의 신학
녹취자: 오희열
지금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지 마스던 교수가 노틀담에서 역사를 가르시다가 지금은 은퇴하셔서 칼빈신학교에 계신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그분은 “미국 역사에서 ‘The great’, ‘위대한‘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학자가 있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당대에 아주 걸출한 사람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6년, 쉰세 살까지 살다가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천재였습니다. 세 살, 네 살 때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쓰기 시작하고 여섯 살 때 자연과학에 관한 짧은 글을 쓰고 여덟 살 때 유물론에 관한 짧은 논문을 쓸 정도가 되었고 열세 살에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하고 지금의 예일 대학원을 들어가게 됩니다. 4년 후에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식 때 라틴어로 연설해서 박수를 받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열아홉 살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합니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의외로 목회를 지망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내 생각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왔고 전기가 나오긴 했지만 여러분이 전기에 관심을 갖고 봤을 리는 없고 부흥과 관련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널리 소개되었고 거기에는 저의 책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의 책 중에서 에드워즈가 인용되지 않은 책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저의 독자들을 통해서 에드워즈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에드워즈의 평전도 나오고 부흥에 관한 책도 나오고 부흥과 개혁사에서는 그의 전집도 나옵니다. 책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쉬운 것도 있지만 난해한 책들, 철학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은 그의 책을 친근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이 스물일곱 권 정도 되는데 저는 서너 권을 빼고는 약 20년 동안 영어로 된 전집을 모두 읽었습니다. 18세기 영어라서 좀 어렵긴 한데 어쨌든 다 읽었습니다. 에드워즈가 풀어 놓은 내용이 수없이 많은데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내용은 에드워즈와 사랑에 관해서입니다. 에드워즈가 사랑을 어떻게 봤는가, 특히 기독교와 관련지어서 이 사랑을 어떻게 우주적인 비전으로 봤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빨리빨리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발표할 순서, 목차는 이렇습니다. 들어가는 말, 하나님을 사랑함,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보여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아름다운가?, 어떻게 아름다움을 아는가?,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맺는말입니다. 이것을 목회사역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가 있고 사람이 있는데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야 될 것인지를 점점 알기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기독교는 인간이 누구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지혜를 알려주기 위한 종교였습니다. 인생을 사는 이치를 기독교를 통해 터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는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를 실제로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 철학이라는 말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Philosophia 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사변적인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들어가는 말을 보면, 오늘 우리는 후기 산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2차산업을 중심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3차 서비스 산업으로 오다가 이제는 그 산업이 예전처럼 공장을 돌려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학기술을 이용해서 기술과 기술들을 함께 엮으면서 새로운 혁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것을 인공지능을 비롯해서 컴퓨터, IT기술, AI, 등등이 결합하여 거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과학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한 100년 전만해도 30년 후에는 어떤 사회가 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30년 후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폭발적인 기술의 발전과 개발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1990년대 초에 들어섰을 때 여러 나라가 자본을 모아서 획기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리디움이라는 회사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때는 국제전화의 요금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쌌습니다. 제가 당시 체신부, 지금의 정보통신부에 있었는데 정신 놓고 국제통화를 하면 40만원, 50만원의 요금이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200만원, 300만원이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때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 인공위성을 50~60개 정도 띄워서 그것으로 폰을 연결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요금을 낮추자고 해서 인공위성을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니까 인공위성을 쏘는데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몇 십 개 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빌 게이츠 이후로 마이크로 소프트를 비롯해서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인공위성을 다 쏘기도 전에 이미 인터넷에서 무료통화가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투입된 돈이 53조였다고 합니다.
그 폰을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옛날 영화에서 보면 대통령 같은 사람이 벽돌처럼 큰 전화기를 가지고 어디서든지 통화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지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공위성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의 전화기는 적도에서도 다 통화가 되었습니다. 그것 말고 메트로 이리디움이라고 해서 도시와 도시는 인공위성으로 연결하고 도시 안에서는 망으로 연결하는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무척 비쌌는데 그 폰을 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화요금이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이 저와 약 20분 통화했는데 그날 전화요금이 17만원 나왔다고 합니다. 그랬었는데 인터넷으로 전화가 연결되면서 무료로 통화하고 국제전화를 요금내고 쓰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카톡만 해도 다 되고 영상통화도 되니까 말입니다. 이런 것을 당시의 전문가들도 미리 예측할 수 없던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사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예전에는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으면 목회가 저절로 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많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선배들이 하지 않던 것을 하나 더 해야 합니다. 이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대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잘 모릅니다. 오늘날 왜 저런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지, 왜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지, 문화현상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전망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신학은 그런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목회와 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오늘의 강의가 거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임무가 무엇인가? 목회를 하는 것인데 목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 애매하지 않습니까? 목회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심지어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교회를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경영하는 모든 것까지 목회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의무이고 가장 중요한 의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을 만드셨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 아래 이 세상에 있게 됐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아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이 경륜을 가장 잘 이해하셨던 분이고, 인간이 참된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장 훌륭한 모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성경과 학문, 삶으로 이러한 사상들을 가르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목회입니다. 결국 1, 2, 3번을 모두 통틀어볼 때 첫 번째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믿음이고, 세 번째는 자신의 인격과 삶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에드워즈는 자기 시대의 모든 사상과 싸우면서 나름대로 이일에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의 모본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역사적인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 18세기, 1703년에 태어났으니까 성인이 되었을 때를 1723년 정도로 보면, 18세기 초반입니다. 18세기 초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때이고 산업혁명의 영향력이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있던 때입니다. 딱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17세기부터 산업혁명을 위한 많은 준비들이 갖춰지게 됩니다.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공장제 수공업이 이루어지고, 농사로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 쪽으로 모여와서 공장제 수공업에 가담하면서 농한기에는 도시 쪽에 와서 노동력을 제공하여 물건들을 생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촉발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증기기관의 발명이었습니다. 에너지라는 것은 기껏해야 말이나 소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 아니면 수력이나 바람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풍차 같은 것, 중국의 수차 같은 것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도 공업지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수력이었습니다. 높은 쪽에 물길을 만들고 공장지대를 비스듬한 언덕에 배치하여 물길에서 물이 모아져 흘러내려오게 하면서 이쪽에 물레방아를 돌리고, 다음으로 흐르며 저쪽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언덕 아래쪽의 물레방아를 계속 돌리는 것입니다. 물 한 번 흐르는 것을 가지고 수십 개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으로 동력을 삼아 물건을 생산하고 곡식을 빻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 장소는 모두 붙박이로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증기기관이 발명됨으로써 획기적으로 이 증기기관은 원하는 곳 어디서든지 에너지를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공장이든 무엇이든 시설을 돌릴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증기기관이라는 것은 석탄이나 나무로 물을 끓여서 작동하는 시스템인데 어떤 온도에서 어떻게 물을 끓일 때 최고의 증기가 나오고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에 관심사들이 모아지면서 영국의 맨체스터쪽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열역학, 물리학, 심지어는 분자 이론 같은 것들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증기관의 발명으로 인해서 다른 과학기술들일 폭발적인 발전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많은 물건들을 엄청나게 싼 값에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구두 하나를 장인 한 사람이 며칠을 걸려서 만들었는데 공장에서는 똑같은 구두를 수없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대장장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망치로 두드려 만들던 농기구나 물건들을 한 번에 찍어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생산비의 절감을 가져오고 그 물건이 수없이 팔려나가게 된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영국을 보면서, 어떻게 같은 물건을 저렇게 싸게 만들 수 있을까 하면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자기 나라의 국부가 다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산업혁명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와서는 18세기 말, 19세기 들어오면서 영국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폭발적인 산업혁명의 발전들이 이루어지는 후발국이 된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팽창하게 된 원인은 그런 산업혁명을 통해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생산품들을 만들어내니까 이 물건들을 팔아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국주의의 침탈은 물건을 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었습니다. 독일의 나치즘이 등장하게 된 것도 후발로 공업이 발전하게 되었지만 이미 다른 나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자신들은 들어갈 여지가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의 2세대들이 사라지고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소위 개혁파 정통주의라는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정신사를 흔들어놓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뉴턴, 다윈, 데카르트였습니다. 데카르트가 17세기에 나오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던 사물을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한 다른 대안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데카르트의 상당부분을 임마누엘 칸트가 받아들이면서 대륙에서의 합리주의, 데카르트, 스피노자, 이런 사람들을 중심을 내려오는 합리주의적인 것들 즉, 모든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과 영국에서 일어났던 로크나 흄, 버클리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영국의 경험론, 이 두 사상이 기둥이 되어서 17세기, 18세기를 강타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논쟁하면서 칸트가 이것들을 종합해서 소위 비판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칸트에게서 경험론과 합리주의가 결합을 이루면서 비판철학이 수립되고 그 사상을 물려받아서 헤겔이 서양의 형이상학을 완성합니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헤겔에 와서 모두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철학자들의 정설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이후로 헤겔 같은 사람이 보편 절대정신을 가지고 철학을 완성하고 이 세계 전체를 절대정신의 구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서 정신을 강조한 헤겔에게 대항하면서 물질과 신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내세우며 그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튕겨져나오는 사람들이 포이에르 바하,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회주의 이론들이 나와 한 축을 이루게 되고 또 한 쪽에서는 그의 보편개념을 공격하면서 헤겔의 철학체계에 의해서 개인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반동을 일으키며 뛰쳐 나온 것이 키에르 케고어의 철학, 특별히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이었습니다. 니체는 당시 자신이 살았을 때는 그의 책이 별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 후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니체의 철학이 재조명되면서 이제는 현재의 철학자 중에 니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니체는 현대철학의 중요한 사유의 틀들을 제공하게 되고 이미 이후에 일어나게 될 실존주의를 비롯한 현대철학의 해체주의적인 원류를 이미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발견하게 되고 거슬러 올라가면 유신론 입장에 서서 기독교를 변증하고자 했지만 인간의 고독한 실존같은 것들을 파헤쳤던 파스칼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이미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조가 보였던 것입니다.
문맥으로 돌아가서, 18세기 미국은 사상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후진국이었습니다. 지금의 미국을 그리면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미국은 유럽에 비하면 촌구석이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때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1703년생이니까 그가 20세, 23세가 되었을 때는 이미 구라파를 강타했던 인간중심의 철학, 진리의 기준을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속을 끌어들이는 데카르트 적인 사유들이 비록 화란에 있는 보에티우스나 마스트리에티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열렬하고 정교하게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데카르트 주의는 사상적으로 엄청나게 퍼져서 유럽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 없는 빈 자리를 파고들어서 오늘날 생각하는 모든 만물의 중심이 인간이고 진리 그 자체가 인간의 인식의 틀 안에 있다는 쪽으로 바뀌게 됩니다. 존재론에서 인식론 쪽으로 이행하게 되고, 신을 설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신일뿐이고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의 기초가 인간의 인식 속에 있다는 것을 아주 종교하게 묘사한 책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생의 모든 답을 내릴 수 없으니까 “실천이성비판”이 나오고 후에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판단력비판”이라는 책이 나오게 됩니다.
어쨌든 그런 서구의 사상이 미국에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인텔리들은 유럽의 사상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인텔리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970년대, 60년대에 미국의 문화를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느냐를 가지고 인텔리인지 아닌지를 결정했듯이 미국도 그러했고, 우리가 미국에 대한 약간 사대주의 같은 경향을 가진 똑같은 것들이 18세기 미국의 사람들에게도 있었고, 그래도 저쪽은 학문의 깊이나 모든 것들이 자기들보다 뛰어나고 실제로 문화 인프라들도 구축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초반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보잘것없는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물결들이 들어오면서 이전까지는 칼빈주의자, 정통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미국에서 인텔리들이었지만 이 물결이 들어오면서 점점 이런 옛날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학력이 낮은 사람으로 떨어지고 오히려 학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자유주의 신앙을 갖게 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1774년에 미국이 독립하게 되는데, 미국을 세운 토머스 제퍼슨이나 워싱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영국과 구라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신론 즉, 하나님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시계태엽처럼 감아놓으시고 나머지는 저절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라는 신관들이 미국 사회의 인텔리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건국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80, 90% 이상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 이신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조나단 에드워즈 생전에, 특별히 그가 40대로 넘어갈 때쯤에는 이미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대세로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역사신학 속에서 배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는 튤립(TULIP), 인간의 전적타락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도의 견인에 이르는 전통적인 교리들은 이미 상당히 많은 공격을 받고 있었고 동조자들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인 노선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적인 평가가 많이 엇갈리는데 저는 그렇게 봅니다. 칼빈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에서 열두 번 정도 언급되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를 칼빈주의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눈에는 칼빈이 그렇게 눈에 차는 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많이 언급하는 수많은 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고, 제가 보기에 에드워즈는 적어도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정도의 사람들의 레벨에 서서 신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렇게 신학만 한 사람이 아니라 엄청난 철학적인 사변을 가지고 세계 전체를 자신의 신학 속에서 설명하고 싶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집 속에는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라는 과학철학에 관한 저술들이 있습니다. 철학은 그 당시에 학문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과학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펼쳐보면 수많은 과학이론들이 제시되면서 그 과학이론들에 대한 설명을 달고 있는데 보면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당시에 미국을 강타하던 사상 중에 자유주의 사상과 함께 들어왔던 것이 뉴턴주의였습니다. 뉴턴은 그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원리들)에서, 그의 유명한 이야기로 캠브리지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과학이라는 것이 근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지만 우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과학은 개량화과 안 되었습니다. 수학화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과학은 반드시 개량화 되어야 합니다.
17세기쯤에 오면 수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칭송을 받게 됩니다. 특히 대수학과 기하학, 이런 것들은 학문중에 최고의 학문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을 보면 신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인 동시에 대부분 수학자였습니다. 스피노자 같은 사람도 대수학자였고 데카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파스칼도 수학자였습니다. 모두 뛰어난 수학자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신도 만약 사유를 한다면 수학을 빼놓고는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수학이 극도로 추앙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을 봤는데 “이것은 노랗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샛노랗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만약 근대 이전의 과학이었다면 근대의 과학은 그런 색깔을 파장의 수로 표현합니다. 노란색은 파장 얼마에서 얼마까지가 우리의 감각에 인식될 때 노란 빛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발간하게 되는데 그 책은 모든 자연의 현상은 수학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근대의 포문을 연 사람을 몇 명 꼽으라고 하면 결국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지금 이야기한 뉴턴, 다윈 이런 사람이 근대라는 문을 열면서 르네상스 이후로 시작된 근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 근대의 갈길을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디에서든지 이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도 무너집니다. 어떻게 무너집니까? 칸트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바깥에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감성의 틀이라고 보았습니다. 뉴턴은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나중에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그, 이런 사람들에게 와서 이 공간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시간과 공간이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섞여서 공간의 사물들이 시간의 길이를 좌우한다는 이론들을 밝혀냅니다. 그래서 뉴턴의 개념들이 무너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편의점에서 사용하는 스캐너, 자기부상열차, 이런 많은 것들이 양자역학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데, 양자역학에서 통용되는 법칙은 일반 물리세계에서 통용되는 법칙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과학의 대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뭔가 자연현상이 일어나면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모두 인과관계로 귀결되는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수학으로 해명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계에는 점점 하나님이 있을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버리거나 신앙의 노선을 수정해서 이신론주의 쪽으로 가거나 알미니우스주의 쪽으로 가거나 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의 생각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칸트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최초로 근대철학 안에서 밝힌 사람입니다. 그 근거를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라는 것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았습니다. 그런 사상이 유럽에 만연해지고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던 때였습니다. 그때 새롭게 시작된 뉴턴의 물리학을 미국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에드워즈였습니다.
지금 보면 우리는 우스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뉴턴 물리학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첨단 과학을 목회자가 해부하면서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논파한 책이 그 책입니다. 그런 무대 속에서 에드워즈는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신론이 일어나고 합리주의 기승을 부리고 무신론까지는 아니지만 펠라기즘이나 알미니우스주의, 이런 것들에 에워싸여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치를 떠나가고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현대사조에 항거하여 기독교 신앙의 참된 본질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사람의 삶은 종교개혁자들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유럽 전체가 교회였지만 에드워즈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
에드워즈가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까지 살다가 죽습니다. 노샘프턴 교회의 2대 목회자였고 동부의 영적대각성과 18세기 부흥의 주역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여러 저술들을 남기게 됩니다. 목회를 위한 중요한 사상적인 토대가 되는 책이 3권이 있는데, 천지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어려운 책입니다. 1부와 2부가 있습니다. 1부는 철학을 조금 한 사람이라면 읽을 수 있는데, 2부는 난해합니다. 그럼에도 매우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책을 읽다가 너무 어려우면 열린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세미나에 들어가셔서 천지창조의 목적을 검색하면, 제가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100분 정도 강의한게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나서 읽으면 훨씬 더 쉬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두 권이 쌍둥이의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속사가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인류를 창조했는데 타락했습니다. 타락한 세계를 구속하셔서 세계를 완성하십니다. 그렇게 구원하신 목적이 인류 사회를 사랑의 사회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볼 때 목회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이미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의 그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며..” 이 목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를 하든지, 목회를 하는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고, 전도의 목표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가’입니다. 에드워즈는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랑하게 하려면, 사랑하게 하고 싶은 그 대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면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사랑 안에서 이러한 인식과 지식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켜야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넘어가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에드워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로 본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사랑의 개념은, 제가 본 견해로는 에드워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나온 책 중에 the student of a statin saints augustine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학생들이라는 책입니다. 칼빈의 경우도 말하고, 루터는 말 할 필요도 없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소속했던 수도회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에르푸르트 수도원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엄청 받습니다.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 사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사상,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것이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커다란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과 역사를 바라보는 틀들을 두 종교개혁가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여러분들이 꼭 읽어야 됩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우리 할머니하고 아우구스티누스밖에 없습니다. 주님이야 저절로 배울 것이고, 바울도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 사람도 저를 만나면 좋아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 자랑을 너무 많이 해줬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개념을 계승합니다. 사랑의 개념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것이 호, 불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좋아하면 “호”,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좋아하면 “불호”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는 사랑으로 하나는 혐오로 나타납니다. 미움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관계가 아니면 결코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의 또 다른 형태를 미움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났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이 유일한 사랑이셨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닮은 성품을 인간에게 주심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모든 인류를 사랑으로 교통하는 사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이 사랑은 물리적인 필연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하나님인데 실제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사랑을 하면서 사는 주체는 인간 자신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도덕적인 결정과 성품 안에서 이 사랑은 행사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사랑하게 할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거라”하고 말씀하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시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양립주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결정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둘 다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했을 때 울는 우리가 사랑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이것을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1765년도 초간의 책인데 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이것을 잘 배워서 터득하고 나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릴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어려워도 꼭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이런 것을 교수님들께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권을 가지고 한 학기는 공부해야 합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말입니다. 한 페이지를 읽으면 그 전 페이지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책입니다. 정말입니다. 저 책을 번역해 놓고도 용어 하나를 통일하지 못해서 엄청나게 고심하다가 번역본이 나왔는데, ‘덕’, ‘비르투스’ 라고 하는데, ‘비르’는 ‘힘’, ‘남자’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힘’입니다. ‘덕’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 ‘탁월한 것’을 뜻합니다. 에드워즈는 이 덕을 성향, 의지, 마음과 관련해서 진술합니다. 이 덕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하는데 ‘도’, 중국말로 ‘타오’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가 이미 설정해 놓은 원리, 원칙은 객관적으로 있고, ‘덕’은 내가 그것에 이끌리는 마음입니다. 두 개를 함께 엮어서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도’는 객관적인 것이고, ‘덕’은 그것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자기 마음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덕’이라는 것, 소위 ‘아르떼’라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인간이 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데 덕스러운 삶은 산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너무 배가 고파서 도시락을 사왔습니다. 먹으려고 하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손이 떨립니다. 그런데 옆에 며칠 굶어서 죽어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도시락을 펴서 줍니다. ‘덕’은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내가 밥을 먹어야 하는데 저 친구를 준 것입니다. 이렇게 덕과 행복 사이에 항상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돌아와서 욕망을 죽이고 그 덕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그네 길과 같은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의무이고 그 선은 마지막에 천국에 가서 완전한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을 완전하게 언제나 누리고 계신 분이 하나님, ‘수문본음(? 50:43)’이라고 하는 최고선이신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에드워즈의 덕 이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덕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 로마 가톨릭의 노선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플라톤과 칼빈주의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가리켜서 이라고 나옵니다. 는 박애적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어딘가 예뻐서 좋아하는 것은 박애가 아니고 하나의 목적이나 의도를 가진 사랑이고, 박애는 자신의 사랑의 성품에서 우러나와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박애라고 합니다. being in general 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철학에서는 이것을 ‘존재일반’이라고 번역합니다. ‘존재일반’이라는 말이 우리 마음에 확 들어오지 않는데 ‘어떤 존재든지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명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옆에 동그라미를 보면 각양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존재를 떠나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being in general 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참된 미덕이란 그 존재일반이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치의 질서가 자기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물들을 보면서 질서를 재편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친구는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하는데, 그것만 해도 굉장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왜? 친구도 배신하고 뒤통수치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이 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나 원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원수조차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우리의 사랑을 올려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원수조차도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모든 존재와 가치질서는 결국 미덕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재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역할과 모든 신자의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론적인 설명으로 그림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있는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영적으로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은혜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렇게 되었는데 그게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그 핵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고 하나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사랑했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나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담배 많이 피우는 사람들은 폐암에 걸립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회심하기 전에는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웠습니다. 하루에 한 갑 반씩 피웠습니다. 회심하고도 한 4년 정도 담배를 피웠고 네 번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가 마지막에 끊었습니다. 정말 어려웠습니다. 담배 같은 경우도, 좋은 줄 알고 피웁니다. 굉장히 낭만적입니다. 토요일이면 성경 펼쳐놓고 읽으면서 담배 한 개피를 피우면서 성경 위에 “후~” 뿌리면 요한복음이 담배 연기 속에서 사악 사라집니다. 그때 은혜를 못 받았느냐고 물어보면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내가 굳이 담배를 끊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담배가 얼마나 나쁜지를 알게 되면 담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아닌지를 보여주면 결국 그 사랑을 버리게 되고 대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해야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설교로, 삶으로, 인격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용서하지 못할 잘못 가운데 하나는 설교를 재미없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를 무미건조하게 하는 것, 그것은 정말 잘못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최소한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해 있구나!’하고 느낄 수 있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는 어떻게 옵니까? 첫째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모두스오페랑띠, 하나님의 성품, 속성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방식을 아는 것, 이 두 가지 말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지식에 뛰어나고 이 성품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웃의 삶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심지어 자연 세계를 통해서 화려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어릴 때 불렀던 찬송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 가사를 어거스틴이 썼다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여쁜 화초밭, 비 오다 개이면 하늘에 뜬 무지개, 그것을 보면서 감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얼마나 이 자연의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셨는지 자연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입니다. 자연 자체 때문에 감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 성품과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미감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가려져 있을 때, 발휘되지 않을 때는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발휘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중생입니다. 중생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떠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에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아울림, 혹은 연합입니다. 아까 설명드린 것처럼 하나님 안에 모든 사물들이 있고, 그 사물들은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질서가 잡혀지고, 그 질서가 잡혀진 속에서 하나의 사물, 사물이 연결될 때 하나님의 의도대로 연결된 것,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름다웠더라”고 하실 때는 바로 그런 모든 사물들의 상호관계와 연결이 아주 이상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때문에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깨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자신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생태학적인 모든 문제들도 이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샬롬의 파괴이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탐욕이 이 세계를 망쳐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과 연합입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래사장이 있고 모래사장 앞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모래사장 뒤에는 나이 많은 노송, 해송, 거목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떠가고 찬란한 태양이 빛나면서 그 빛이 바다에 반짝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만 들어도 가고 싶고 정말 아름다운 바닷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것입니다. 바다, 깨끗한 백사장, 아름다운 소나무, 하늘의 흰 구름, 떠가는 돗단배, 그리고 반짝이는 햇빛, 물살 위에 어리는 반짝임,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하나 하나가 따로 있을 때보다 좋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소나무가 여기에 와서 누워있다면 여러분은 지저분하니까 당장 치우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있어야 어울리는 다른 것들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그런 소나무가 쓰러져 있을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예쁘지 않은 것입니다. 동해안에 있는 큰 소나무를 저 뒷산에 덜렁 옮겨 심어 놓는다고 해도 별로 예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기서 그렇게 갈매기와 바다와 하늘의 구름과 태양빛과 돗단배와 어울려 있을 때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옷을 입는데 자켓, 넥타이, 셔츠, 바지, 구두, 헤어스타일 등등 모든 것들이 하나 하나 다 연결될 때 굉장히 세련되고 참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위에는 저고리를 입고 아래는 청바지를 입고 신발은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는 군인 모자를 쓰고, 가방은 등산가방을 메고,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간다고 하면 우리는 혼란을 느낍니다. 저 사람이 뭘 표현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주 예쁜 여성이 그렇게 하고 다녀도 그 사람의 아름다움은 갖추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 때문에 아름다움이 감퇴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모든 것을 세련되게 갖추어 입는다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자연세계와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가겠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미덕의 본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존재의 일치, 어울림 혹은 연합, 다시 말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에 대한 마음의 연합이나 지향성은 존재하는 사물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최고 최상의 제일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자들의 근본적인 존재는 하나님 자신뿐이다.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참된 존재이며 원천적 아름다움이신 하나님과의 닮음 안에 있다.”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닮았느냐에 의해서 그 아름다움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개별적인 사물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이 있습니다. 똑같은 가방인데 하나는 자동차 하나를 팔아도 못 살 정도로 비싼 가방이고 다른 것은 자동차 타이어 하나만 빼도 열 개쯤 살 수 있는 가방입니다. 하나는 돈 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이고 다른 하나는 신문에 가끔 나오는 1억 9천만 원쯤 하고 여자들이 좋아하는 가방입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완전성입니다. 가방으로서 고유한 기능을 하기에 완전한 것, 그리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가방 하나 만드는데 특별히 상처 안 나도록 소 한 마리를 우유에 목욕시켜가며 키우다가 잡아서 그 가방 딱 하나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사물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존재 그 자체의 완전성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물들과의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입니다. 이 후자가 결국 관계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존재로, 후자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은 완전성과 관계의 아름다움인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해가 됩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어떤 질서를 원하시는지 이해가 됩니다. 너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부모님이 너에게 잘못했어도 너는 부모에게 효도해야하고, 친구가 너를 배신했어도 너는 친구를 미워하지 말고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떠오르는 도덕적 원칙들은 대부분 관계와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가 도덕 신학적으로 연결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8세기 낭만주의 운동이 꽃을 피우면서 옥스퍼드,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소위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운동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낭만주의와 함께 신 플라톤주의 운동이 번성하게 되고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에 대한 재평가,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면서 도덕철학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행위를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연구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에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성경은 다 해체되고 마지막에 도덕의 교사이신 예수님만 남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윤리와 도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인하면서도 도덕적인 모범으로서의 예수에 대해 연구하면서 많은 연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기독교쪽에서는 플로티누스와 플라톤과 어울리는 기독교의 한 짝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운동이 일어납니다. 소위 스콜라 모데르나 아우구스트니아라고 하는, 번역하자면 근대의 오늘날의 아우구스티누스학에 대한 연구 기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적인 용어로서 사상 안에서 이 도덕을 해명하려는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이때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나오는 경험론자들의 수많은 이론서들을 에드워즈가 친구들을 통해서 입수합니다. 그리고 로크의 ‘unhuman understanding’이라는 ‘인간오송론’을 이미 10대에 독파합니다. 로크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을 기독교 신학으로 재진술해 냅니다. 그쪽 자료들을 접하면서, 샤프츠 베리나 커스 워드 같은 신학자들의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런 자료들을 독파하면서 그쪽의 이론들을 가지고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에서 자신이 이론들을 나름대로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볼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위격적 완전성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한 위격 한 위격이 완전하다는 것, 두 번째는 위격들과의 관계의 완전성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관계를 맺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완전한 위격들간의 일치와 연합을 이룹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시공간 속에서 인간이 본 바요, 들은 바요, 만진 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감각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드러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극치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본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육신의 사건은 영원한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이 유한한 세계 속에 펼쳐진 결정적인 극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모든 것들이 이 자연 세계와 학문의 세계 속에 모두 두루 펼쳐져 있습니다. 바빙크의 그리스도 실제론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사물 안에 계신 것이 학문의 가능성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바빙크는 그렇게 봤는데 에드워즈도 그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본 것은 모든 아름다움은 파편적이고 부분적인데, 아름다움의 엑기스들이 농축된 지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왜 성경이 아름다움의 농축이냐, 구속사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구속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농축이냐? 구속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찬란하게 바라보고 있고, 또 성취되었고 또 그것을 회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구속사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장 진하게 녹아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정수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크게 두 가지로 진술합니다. 원형적 아름다움과 모형적 아름다움입니다. 원형적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고, 그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당신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고 추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추한 것입니다.
최근에 유튜브에 동영상 하나가 올라왔는데 자연보호 운동가들이 어떤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 짐승들이 갇혀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곰 새끼 한 마리, 사자 새끼 한 마리, 호랑이 새끼 한 마리, 이렇게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불쌍해서 잘 돌봐주었습니다. 이 동물들이 전혀 싸우지 않고 하나가 죽었을 때 남은 둘이 너무 슬퍼해하고 마지막에 다른 하나가 죽고 곰만 살아남았는데 그 친구들과 놀던 곳에서 한없이 명상을 하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여러분이 동물을 키워보면 ‘독사굴에 어린 아이가 손 넣어도 물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본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악어를 새끼 때부터 길렀는데 주인이 사라지고 나니까 악어가 한없이 웁니다. 우리가 ‘악어의 눈물’이라고 하는데 안 잡아 먹습니다. 신기합니다. 사자도 마찬가집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힘입어서 아름다운 것이고 추한 것은 하나님 때문에 추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추해진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왜 다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사랑 때문에 다투는 것은 아닙니다. 미워서 다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원천적 아름다움이고 피조물의 모형적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자기의 책 ‘미덕의 본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세계를 통해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움은 밝음과 영광의 무한한 충만을 가진 저 존재에 주입된 광채의 한 반영일 뿐이다.” 모형적 아름다움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은 예쁜 여성의 아름다움부터 시작해서 멋진 남성의 멋짐, 개도 예뻐야 입양이 잘 되지 않습니까? 물건 하나라도 예쁜 물건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여기 이렇게 산도 있고 땅도 있는데 굳이 남의 나라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거기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히 지성을 가진 존재, 이성적 피조물, reasonable creature 라고 하는데, 지성적 존재라고 번역됩니다. 이 지성적인 존재인 인간, 천사, 악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이 범주에 해당됩니다. 그러한 지성적인 존재의 도덕적 피조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판단능력과 사랑의 경향성의 아름다움이고 이런 모든 도덕적 연관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성경이 꿈꾸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랑해서 서로를 향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하는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넘어가겠습니다. 각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화면에 보면 지식과 인식에 떨어집니다. 저 위에 떨어지는 것이 돌멩이입니다. 넓은 호수에 저 높은 곳의 헬리콥터에서 돌멩이를 떨어뜨립니다. 떨어지면 출렁~하면서 물결이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결이 끝납니다.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는 인식과 사랑의 감정을 모순된 것이라고 보지 않고 이 지식과 사랑이 놀랍게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보헤티우스, 휘치우스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을 비롯해서 많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고민했던 것은 사랑과 지식이 어떻게 결합되는가 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그것이 떨어지는 돌멩이와 같고 그것이 감정 위에 떨어지면서 물결을 일으키는데 출렁하고 일어나는 물결을 ‘affection’ 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이면 사랑의 ‘affection’이 생기고, 그것이 추함에 대한 지식이면 미움과 싫어함에 대한 감정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번역할 단어가 없어서 ‘정동’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지금은 저를 받아들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 ‘정동’이라는 용어를 쓰는 학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처음 썼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에 ‘정동’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정’은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신앙감정론’이라는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신앙정동론’입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렇게 사랑의 감동을 반복해서 받을 때 마음의 성향이 됩니다. 아름다운 것이 없을 때도 그것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발견하게 만드는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모든 사람이 내 자식을 포기해도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가능성을 믿어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그 사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지성적인 요인과 의지적인 요인, 둘로 보았습니다. 지성적인 요인은 라틴어로 ‘수페르비아’이고 그리스어로는 ‘휘브리스’입니다.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더 잘 압니다.”라고 자기가 지성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의지적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가? 그 대답은 “내가 싫어서”.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내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기 사랑’이라고 하고 회개는 이 자기 사랑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자기가 깨뜨려지는 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 사상을 모두 계승하면서 단순화합니다. selfishness, ‘이기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에드워즈의 사랑의 신학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는 다섯 가지 정도로 꼽습니다. 첫째는 오늘날 기독교의 윤리적인 수준이 한없이 떨어지고, 최근에도 네팔에 보내는 성금을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 전국적으로 걷어서 떼어먹고 그 목사님이 감옥에 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이런 것은 굉장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이것은 사랑이 식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대에 핑계를 대지 말고 처음에 자신이 신학의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살아야 하고 성도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흐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에드워즈이 사랑의 신학이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신학입니다. 목회와 모든 기독교적인 삶에 있어서 에드워즈가 말하던 하나의 구호가 있었습니다.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에드워즈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엄청난 깊이가 있습니다. 길이로 보면 세 시간 가까이 설교되었을 것이라고 믿어질 정도의 엄청난 분량의 원고들이 남아있습니다. 철저한 원고 설교주의자였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설교는 들을 것이 없는 설교입니다. 공부만 해도 최소한 들을 것이 있는 설교를 하는데 공부도 안 하니까 들을 것도 없는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의 감격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식의 신학. 열심히 기독교의 진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 번째는 아름다움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목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의 역사와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정동의 신학입니다. 은혜가 생기게 하는 신학입니다. 그냥 들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듣고 알고 떠드느니라”했는데, 그런 지식이 아니라 진짜로 마음에 감동을 주고 마음에 정동이 일어나는 정이 출렁거리는 종류의 사역을 해야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감동과 큰 눈물과 은혜의 도가니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는 설 수 없습니다. 요즘은 교회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는데 세 교회 중 한 교회는 3년 안에 문을 닫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한 30년 전 보다 지금은 더 안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설교자가 있는 교회는 앞으로 더 부흥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안 됩니다. 정동이 우리의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지막은 조화의 신학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일체에서 시작해서 삼위로 넘어가는 서방신학자들의 견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셋에서 하나로 나아가는 동방교회의 페리코레시스 이론을 가지고, 상호교통의 이론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했습니다. 세계에 다녀보면 칼빈주의학회보다 훨씬 더 성공하고 번영하는 학회가 에드워즈학회입니다. 어디가도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맞닥뜨린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다양성 사회입니다. 지금 우리도 다문화 사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구라파나 미국은 그런 것이 훨씬 강합니다. 이런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를 이룰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주제는, 서로 하나인 우리가 어떻게 다양성을 허락할 것인가 하는 주제보다 훨씬 시의적절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 영국, 심지어는 루마니아, 체코, 모든 곳에 에드워즈의 학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오늘날은 에드워즈학의 부흥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교든지 에드워즈 전공자가 없으면 마치 근대교회사가 완성이 안 된 것처럼 생각하는 에드워즈의 부흥의 시대를 이루게 된 것도 그런 시의적절성을 에드워즈의 신학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가르칠 것을, 종교개혁자들이 주는 것과 또 다른 면들을 우리에게 많이 가르쳐주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여전히 학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서없이 급하게 설명했는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