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TS 특강
녹취자: 배미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김원장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 날 동안 수업하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죠?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교수님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거의 들어오실 분들은 거의 들어오신 것 같은데 안 들어오신 분들은 빨리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모인 것은 두 편의 설교를 듣고 설교와 기도 그리고 목회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받고 답하기 위해서 이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먼저 설교나 강의를 두 편을 들으셨는데 먼저 들은 설교가 기도에 관한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 들은 설교가 예배에 관한 것일 겁니다. 그래서 먼저 이거를 들은 소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몇 사람만 지적해서 들은 이야기를 좀 해보라하고 그다음에 질문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마음을 기울여서 설교와 강의를 들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것을 자기의 몸에 익히지 않으면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온몸과 삶으로 익히면서 공부를 해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의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응답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번 질문을 올려주십시오.
이제 저를 비춰주십시오. 질문을 잘 들었습니다. 열렬한 기도는 잠깐이고 너무 많은 기도가 형식화 되어 있다는 고민이었습니다. 질문은 ‘열렬한 기도가 어떻게 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라는 것 같습니다. 핵심을 짚으셨습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렬함과 그리고 지속성입니다. 아무리 열렬해도 지속적이지 않으면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지속적으로 기도해도 열렬함이 없다면 그 기도는 형식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열렬함도 없고 지속성도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상 신앙생활은 안 하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마음은 교회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고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인들을 기도하게끔 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열렬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설교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잘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자기가 감동받은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설교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평가하십시오. 그리고 설교에 정성을 많이 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너무 길지 않게 쓸모없는 말을 다 빼고 꼭 필요한 말을 친근하게 좋은 예화와 함께 열렬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은혜를 주시도록 일주일 내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마음에 은혜의 불이 붙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키십시오. 기도 운동을 하십시오. 매일 언제 어디서 얼마큼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지 결심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잘하는지 확인하십시오.
기도는 운동과 같습니다. 운동하고자 하는 마음이 왈칵 일어난다면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 세 시간 동안 마라톤을 달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열렬함에 불을 끄지 않도록 목회자가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크고 작은 기도 모임들을 만드십시오. 거기서 목회자가 먼저 열렬히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오래 기도가 계속되게끔 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것 소개해드릴까요? 교회를 기도로 세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두 몇 시에 어디서 얼마큼 기도할 것인지 다 약속을 합니다. 당연히 인터넷에서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그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문자를 보내게 됩니다. “당신이 기도를 약속한 시간입니다. 지금 기도하십시오. 열렬히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자극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장소를 정해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기도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먼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기도 안 하고 기도하라고 그러면 위선입니다. 자기가 개인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르침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다음 2번 보겠습니다. 누가 질문을 한번 읽어주시겠습니까? 질문의 요지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데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려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마치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일까요? 칼빈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는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을 시키시기 위해서 기도라는 방편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응답 받습니다. 그걸 통해서 우리가 훈련을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훈련이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의지하면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그 훈련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안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큽니다. 그렇게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계시지만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또 한가지 사실은,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아 재수 좋다. 아 참 행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기도한 사람은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주권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기차는 어디든지 갑니다. 하늘로 갈 수도 있습니다. 땅속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물 위로 갈수도 있습니다. 기차가 가려면 반드시 뭐가 있어야 합니까? 레일이 있어야 됩니다. 레일이 없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기차를 공중으로 보내고 싶으면 공중에다가 철길을 놓는 것입니다. 땅 속으로 보내고 싶으면 굴을 파고 철길을 놓습니다. 그 철길이 기도라면 그 위를 지나가는 기관차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기관차는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도하게 하셔서 그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주권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 있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도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3번을 누가 한번 읽어주십시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우리 기도대로 들어주시는 것, 그다음에 우리 기도대로는 아니지만 바꿔서 들어주시는 것, 그다음에 세 번째 우리가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 주시는 것.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예를 들 필요가 없겠죠? 왜냐면 우리는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봅니다. 두 번째 예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우리 기도대로 들어주시지 않고 바꿔서 들어주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 강남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리로 이사 오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기도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랐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교회를 세우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아직 모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시죠? 사도바울이 원래 아시아 쪽으로 전도를 나가려고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니아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게 하셨습니다. 결국은 선교의 뱃머리가 유럽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럽을 돌아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남미와 아프리카로 내려가도 다시 일본을 거쳐 한국에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까지 선교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하나님이 아시아로 못 가게 하셨는지 다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유럽 쪽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교학자들에 의하면 만약에 아시아로 그때 복음이 들어갔다면 기독교는 소멸되었을 거라고 예측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당시에 서구 세계관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가 변질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모두 답을 얻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최선을 다해 기도 했고 야고보는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여기서 답을 못 내린다 해도 하나님 좋으신 분이다라고 믿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기둥 같은 지도자를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의 죽음을 통해 신앙을 견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이런 종합적인 관측이 가능합니다.
4번 질문을 받겠습니다. 이 질문을 설교자의 입장에서 하는 것인지 설교를 듣는 교인의 입장에서 하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교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칩시다. 완전히 질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자가 성경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까? 천사도 성경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설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제 말은 완전합니까? 완전하지 않죠? 그런데 여러분 제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에 앉아있습니까? ‘저 김원장은 성경을 완전히 알지 못해.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어.’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그러면 주님께 가는 날까지 누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또 성경을 쓰는 사람은 완전합니까? 이렇게 되면 불가지이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두 몰라도 성경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 한에서 확신하고 있는 한에서 설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설교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 이 질문을 했을까요? 그러면 더 이상하죠? 본인도 성경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설교하는 자가 성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가르칠 수 없다고 믿는다면 누가 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운다구요? 이단이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질문하는 입장이 설교하는 입장이든지 교인의 입장이든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친다라고 생각이 많이 된다면 둘 중 하나겠습니다. 설교자가 가짜든지 아니면 자기가 판단을 잘못한다든지 둘 중에 하나이겠습니다. 설교자가 가짜라면 그런 사람하고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하고 있지는 아닌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도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성도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도 자기 양의 음성을 안다.’ 설교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설교 듣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러면 설교자가 하나님에 대해 말씀 할 때에 설교를 듣는 사람은 이해합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 그렇게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질문입니다.
5번, 설교가 논리적이지 않고 지루하게 느껴진답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봅시다. 처음부터 항상 그랬습니까? 아니면 어떨 때는 논리적이고 감동적인데 요즘에 와서 논리적이지 않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항상 설교가 그랬습니까? 만약 항상 그랬다면 그가 실력이 모자란 사람 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설교하는 사람 밑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설교가 논리적인 적도 없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요즘 와서 논리적이지 않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에 설교가 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맛나를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에이씨 맨날 맛대가리 없는 맛나야. 우리가 매일 이것만 먹고 어떻게 살아. 아, 고기를 먹고 싶다.’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변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그런 설교자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제발 설교가 논리적이고 감동적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해보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설교자를 평가하는 것이 교만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애를 썼는데도 설교자가 게으르고 공부도 안하고 설교 준비에 성의도 없어서 기도도 안 해서 계속 이렇게 설교를 한다면 설교자를 위해 많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전해주고 싶다면 이름을 밝히지 말고 여러분인지 알아 볼 수 없게끔 익명으로 편지를 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겠노라고 전해주십시오. 너무 자주는 하지 마십시오. 몇 년에 한 번 정도만 하시면 됩니다.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됩니다.
6번입니다. 이 질문도 역시 같은 생각이 듭니다. 체계적인 것과 은혜로운 것이 서로 대적한다고 생각하나보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학교 교육이 체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학교를 많이 다니면 다닐수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텐데 그러면 사람이 지식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방해가 되겠습니까? 체계적이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한다면 잠깐은 귀를 기울일지 모르지만 체계적이지 않아서 사람은 금방 짜증이 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두 편의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체계적이지 않나요? 개혁신학에 부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엇인가 제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안하고 있다고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저렇게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신학에 입각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뭔가 더 좋은 일이 일어날 텐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체계도 없고 신학적인 입장도 없이 아무렇게나 설교하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지식이 없고 체계가 없어서 능력 있는 설교를 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은 바보 같은 설교를 만들어 냅니다.
더 이해 안 되는 질문이 뒷줄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이성을 초월하시는데 설교에 대한 평가와 전제가 너무 많으면 설교가 인위적으로 되지 않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사역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설교는 누가 듣습니까? 이성이 없는 짐승이 듣습니까? 아니면 이성을 초월하는 사람이 듣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열렬히 설교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건 거짓말이야. 꾸며낸 이야기야.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때 ‘말도 안돼.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나. 거짓말이야.’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인성이 뛰어난 게 아니라 철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성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으로 초월한 세계를 경험하고 그거를 사람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고, 그리고 이성을 초월하는 것은 설교하는 순간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그것이 믿어지게 하는 것이 이게 설교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공을 많이 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설교가 올바로 설교하고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평가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평가해야 합니다. 개혁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많은 관점 중 가장 성경을 정확하게 보는 관점이라고 보기 때문에 개혁주의를 좋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7번 들어가겠습니다. 설교가 가장 중요하지만. 설교만 가지고 모든 것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주일날 수요일 날 설교를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들을 습득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성경을 깨닫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공부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성경자체를 공부하는 것과 교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이 목회하는 곳에서 교리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이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 성경, 계시를 다루는 서론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교회 그다음에 미래의 왕국, 이런 것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이 적다고요? 적고 많은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아이를 어떤 사람이 열 다섯명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딱 한 명만 낳았습니다. 그러면 엄마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다섯 명에게도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한 명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에이 하나밖에 없는데 뭐, 뭘 가르치겠어. 짐승처럼 살게 내버려 둬. 어차피 한 명이잖아, 세 명이라면 내가 가르쳐보겠는데 한 명인데 너무 작은 수잖아. 짐승처럼 살라고 해.’ 여러분들이 엄마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유 세 명이잖아. 세 명이면 밥을 먹여야지. 한 명이잖아. 그냥 굶으라고 해. 아니면 쓰레기나 먹으라고 해.’ 그렇게 한다면 그건 애미도 아닙니다. 한 명을 열 명처럼 생각하면서 놓고 가르치십시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조직신학을 여러분 스스로 잘 요약해서 또 그렇게 잘 요약된 책들도 있습니다. 그거를 정통교리에 입각한 것을 친숙하게 천천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신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인간은 왜 그 복된 상태를 잃어버렸는지,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거를 천천히 가르쳐야 합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 세례받을 때, 직분을 받을 때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좀 더 자세히, 좀 더 자세히 그러면 설교와 연관시킬 수 있겠죠? 그런데 설교가 이런 기독교의 진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요. 세상 사는 이야기나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성도들의 신앙은 점점 약해집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8번입니다. 성도들이 심방을 싫어하고 불편해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교회를 향해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에 목회자도 만나고 싶지 않고, 교인도 만나고 싶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은 믿고 싶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주목해 주지 말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가는 익명의 신자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속마음까지 그럴까요? 그건 모릅니다. 두드려 봐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심방은 개인의 마음을 여는데 매우 유용한 목회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심방을 너무 인위적으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거기도 코로나 많이 있죠? 우리도 코로나를 많이 겪었습니다. 한국의 방역 시스템이 아주 잘 돼 있었던 것은 여러분 알고 계시죠? 어떤 사람이 코로나 확진이 되면 집에서 못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관청에서 양식 박스를 보내줬습니다. 저도 받아보았습니다. 라면, 죽, 탕, 밥, 세정제, 소독제 등등 필요한 것이 굉장히 큰 박스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게 즉시 옵니다. 근데 그거를 가지고 밖에 나갈 필요 없이 삽니다. 일주일 동안 못 나가니까요.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에게 코로나가 확산이 됐습니다. 정부에서 도저히 이걸 다 배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기세가 좀 약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코로나가 걸려도 그냥 중증으로 가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이제 더 이상 코로나 키트를 배달하지 않겠다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는 결정했습니다. ‘정부가 안하는 것을 우리가 하겠다.’ 그래서 교인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문자가 오면 교회는 즉시 그 박스를 먹을 것을 준비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 앞에 놓고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입니다. 교회의 교역자입니다. 코로나 걸린 걸 위로드립니다. 일주일동안 못 움직이실텐데 불편하시겠습니다. 여기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들을 박스에 놓고 갑니다. 우리가 떠난 후에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당신의 건강회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교인들이 감동을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지금 나갈 수도 없는데, 같이 사는 식구들이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데 나 혼자 있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못 나갑니다. 난감하겠죠? 그렇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러면 즉시 답장이 오죠. 전도사님 고맙습니다. 제가 아주 당황했는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주일 후에 이 사람이 다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 도움을 주었던 교역자가 연락을 합니다. “다 나으셨어요?” “이제 다 나았습니다.” “너무 다행입니다. 우리 한번 만날까요?” 만나 주겠습니까, 안 만나 주겠습니까? 사랑을 가지고 그를 돕고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교회학교에서 문고리 심방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만나주든지 안 만나주든지 그 집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주면 심방을 하고 안 만나주면 안 만나줘도 그냥 가는 겁니다. 그 집 문 앞에서 그 아이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고리에다가 편지와 선물을 걸어놓고 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양떼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무슨 선물을 들고 가느냐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병자라면 그 병자에게 필요한 것쯤 사가지고 가는 게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가난하다면 돈을 가지고 가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꽃 한 송이 들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진심으로 그를 염려하고 사랑하며 찾아가느냐입니다.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모든 교인을 심방해야합니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가정에 어떤 형편인지 알아야지 목양을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9번입니다. 법으로 모이지 말라고 코로나이니 모이지 말라고 공표가 되면 가능한 한 따라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여야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온라인 예배라는 걸 잘 몰랐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에 익숙해졌습니다. 정말 편리한 것입니다. 막히는 도로를 뚫고 교회까지 갈 필요도 없고,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탈 필요도 없고, 그냥 시간 되면 앉아서 휴대폰을 켜는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작되었는데 ‘딩동딩동’ 벨이 울립니다. 배달이 왔습니다. 받아줬습니다. 좀 예배를 드리는데 전화가 옵니다. 차를 빼달라고 합니다. 차를 빼줬습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또 조금 있다 아이가 문을 두드리면서 학교갔다 오는 것입니다. 문을 열어줍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더군다나 옷차림은 잠옷차림입니다. 세수도 안 했습니다. 쇼파에 비스듬히 누웠다가 아예 누워버렸습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거기 계시지도 않습니다.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어쩔 수 없이 온라인예배를 드린다면 이런 모든 연락을 끊고 완벽하게 문제가 안 생기게 해놓고, 그리고 정장을 하고 교회 앉아있는 것보다 더 엄숙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있습니다. 그냥 편해서 그렇게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교인들을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해야하느냐? 우선 예배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쳐야합니다. 그리고 지침을 줘야 합니다. 코로나 증상이 있다든지, 몸이 너무 아프다든지 그런 사람들은 안 드리는 것보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나오면 재밌겠다 하는 뭔가 인상을 줘야합니다. 그래서 모임을 가질 때도 ‘이번 주일에는 무슨 무슨 행사가 있습니다.’, 아니면 ‘몇 달 동안에 우리 교회 등록한 사람들을 위한 환영잔치가 있습니다.’, 아니면 ‘찬양 대회가 있습니다.’ 등등 뭔가 ‘우리 교회다’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기대할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깨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배 끝나고 1구역은 모두 빠짐없이 모입니다. 담임목사가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서 1구역만이라도 그 주일에 모두 나오게 해서 같이 도시락이라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1월에 감사하고 기뻤던 일들도 간증하고 그렇게 동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결국 교회 떠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설교청취 후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여러분들의 질문에 답변을 드렸습니다. 특이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기도회를 인도해주십시오. 또 사경회를 열어주십시오. 그래서 은혜를 받게 해주십시오. 좋은 이야기이고, 노력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을 너무 많습니다. 내가 열린 교회를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원장만 한다면 내가 다 해드리겠는데, 저도 정신없이 바쁩니다. 지금은 책 한 권을 영국에서 출판할 계획으로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습니다. 책을 쓰고 있고, 공부도 해야 되고 연말까지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지만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 스텝들하고 의논을 해서 사경회를 해서 여러분이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아주 소수만 원한다면 우린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수가 원한다면 한번 조사를 해서 그래서 합당하다면 저희가 한번 사경회를 해보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말씀을 여러분들이 교회를 가서 잘 설교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잠시 후에 목사님이 나오셔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지금 교회의 홈페이지를 뒤져보니까 중국어 자막으로 완전히 설교가 다 되어있는 것이 현재 127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들어와서 설교를 들으시고 은혜를 받으시면 제일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들의 말로 아주 쉽게 요약해서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설교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냥 설교하면 남의 설교를 도둑질하는 것이니까 설교하기 전에 “이 설교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내가 정리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 출처를 분명히 밝힌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김남준 목사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요약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고백을 하고 여러분 말로 설교를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한 주간동안 연구를 하고 28일날 우리 스텝들이 회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건의할 것이 있으면 더 건의하시구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결정된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사경회에 참석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그렇게 조사를 끝내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참작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장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