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2._교역자수련회(상반기)폐회예배
폐회예배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녹취자: 박나리
아침에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여러분과 함께 설교로 나누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린도교회는 돈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제가 고린도를 가봤는데 바로 그 앞에 바다가 있고 어마어마하게 큰 아고라, 국제시장의 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아주 무역이 활발하던 곳이었고 당연히 돈이 많았습니다.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언덕 위에 있고 아주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세속의 정신이 침투한 것입니다. 그래서 파당의 문제를 만들어내고, 많은 분파를 만들어냈습니다. 도덕적 해이를 가져왔습니다. 또 한 가지는 물질 사랑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세속화되어가는 가장 큰 조짐이 물질에 대한 집착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많이 주신 사람인데 물질을 탐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도 탐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은 세속주의의 아주 뚜렷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사도가 마음 아파했습니다. 영적인 혼란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참을 만 했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일이었습니다. 자기가 혼자 예수님의 지명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데 누가 보았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다 지켜본 사람들이지만,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분 나쁜 루머까지 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은근히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물질을 탐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노골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으나, 빙빙 돌려서 물질을 취하여갔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사도 바울은 한 편으로 마음이 아프고 한 편으로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잘 마음을 다스리면서 교훈을 줍니다.
15절은 아무리 읽어도 여러분이 뜻을 잘 모르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번역을 해 드리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통해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 보면 이렇게 안 되어 있고 지금 제가 해주는 해석이 가장 근접한 해석입니다. ‘내가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매우 기쁘게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허비되리라; 비록 내가 너희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너희에게 덜 사랑을 받을지라도’가 15절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지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첫째는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일은 남의 영혼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을 보면 눈앞에 당면한 것으로는 돈이 있고 없고, 건강이 있고 없고, 외모가 아름답고 그렇지 못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습니다. 획일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남자들에게는 돈이 권력이고 여성들에게는 미모가 권력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문광고에 피부가 권력이라고 나왔는데, 제가 실소를 금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게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생 자체가 천양지차입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너무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은 물질의 설국열차와 비슷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자연의 양상이고 그 사람의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영혼에 달려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로,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그의 존재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의지는 아름다운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목회자는 그것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연설로 정치권력을 잡는 사람들은 연설 한 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눈물바다가 되게 만들고 감동을 줍니다.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예술가들을 보면 노래 한 마디를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술을 좋아하지만,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 내지는 좋게 말해 승화입니다. 현실 자체를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내가 너무 외로운데 예술이 없다면 그것이 비참한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외로움을 달래면 외로움이 해석이 되고 승화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은 슬픔에 잠겨 있는 내 인생을 예술이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이 바꿔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철학도 공부하고 보니까 너무 아름다운 학문이고 마음에 놀라운 위안을 줍니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각도를 통해 인생을 봄으로써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가 한계입니다. 내 현실을 바꿔주지 못합니다. 현실을 보는 눈을 조금씩 바꾸고 입체화 시켜줄 뿐입니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관계를 갖습니다. 그 영혼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꿔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으로는 삶의 의욕을 주거나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그것을 바꾸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양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은 은혜를 받아도 같습니다.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은 은혜를 받아도 그렇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라고 하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목회자의 중요한 관심은 네가 누구이든지 어떻게 살든지 어떤 성격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고, 머리를 장발을 하고 땋고 다녀도 아무 상관이 없고,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러한 반성을 하게 됩니다. 정직하게 반성을 합니다. 나는 영혼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입니까. 목회자들은 그것을 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연세 많으신 어른이 건강검진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에도 교인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완강하게 건강검진을 거부하셨다고 합니다.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영혼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물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자기가 돌보는 지체들에게 내가 영혼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직설적으로 물어보십시오. 대부분이 아니라고 하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무엇 때문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지 그것을 물을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의 영혼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구제를 안 했습니까. 선한 일을 안 했습니까. 착한 인격으로 살라고 외친 사람이 아닙니까. 영혼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사용하고 내어준다고 했습니다. 둘 다 같은 단어로 ‘spend and be spent’라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 은혜롭게 쓴 것 같이 ‘허비하다’는 것입니다. 소비하다는 것인데 조금 이상하니까 허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치가 작은데도 왕창 쓰는 것이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두 번째 발견한 것은 목회자는 허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허비합니까? 영혼을 위해서 끊임없이 쓰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뒤로 꿍쳐놓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돈 한 푼 없이 살라든지 모든 명예를 버리고 살라든지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모님들이 더 잘 아시만 아이들이 무엇을 해달라고 합니다. 마트 갔을 때 장난감을 하나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어, 걱정하지 마’ 하고, 그 다음날 바비 인형을 사달라고 하면 ‘어, 걱정하지 마’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무엇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이 아이를 위해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장난감을 계속 사주면서 돈을 허비하면 이 아이가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뒤로 꿍쳐놓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사역을 할 때 희생과 힘든 것을 먼저 생각하면 결코 도전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 10월에 발사체를 쐈습니다. 그것이 왜 의미가 깊었냐면 예전에는 위에 것은 우리가 만들고 발사체가 없어서 소련에 위탁해서 몇 천 억씩 주고 쏘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되겠어서 우리 힘으로 발사체를 쏴야겠다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노력을 하고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도와줬습니다. 결국은 발사체를 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700km에서 펼쳐져야 하는데 13초 정도를 덜 타서 고도에 못 미쳤습니다. 더 올라가야지만 태양으로 가는 원심력과 지구에서 당기는 구심력 사이의 조화를 이루면서 태양과 지구 사이를 도는데, 못 미쳐서 떨어졌습니다. 뭔가 원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찾아냈습니다. 점검해야 할 기계가 2,600 항목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10월부터 면밀하게 다 찾아냈습니다.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결국 1조 3천억 원 프로젝트가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는 사역을 하면서 도전을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 일을 하는 데에 얼마나 많이 힘이 들고 고생할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비용을 먼저 생각합니다. 명백하게 저 영혼과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산이 너무 많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허비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못합니다. 너무 힘듭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늘 상투적으로 달고 다니는 말이 그것은 너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너무 많은 수고가 들어갑니다. 엄두를 못 냅니다. 한 번 엄두를 내서 도전을 내서 자신을 허비해보면 허비할 수 있는 힘이 점점 늘어나고 위축되어서 안 하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도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목적어가 없습니다. 허비하고 또 나 자신까지 허비될 것이라고 했으니, 추측할 때에 아마 이것은 물질이라고 생각을 하고 NIV에서도 ‘everything I have’를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뭔지 모릅니다. 어쨌든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너희를 위하여 허비하고,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 조차도 수동태로 ‘허비되리니’ 라고 했습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허비한다는 것은 누구한테서 배웠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허비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었던 사람에게 제자들이 야단을 쳤습니다. 무슨 뜻으로 이렇게 허비하는지 삼백 데나리온이 나갔겠다고 하니, 그 여자가 잘 한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행하여 기념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허비입니다. 무언가 목회를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은 결정적 차이가 허비하고자 하는 기꺼움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목회가 되는 사람들은 허비하는 마음이 기꺼이 무엇이든지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지만 목회가 됩니다. 영혼들은 기가 막히게 압니다. 목회자들이 한 발은 자기 사역에 들여놓고 한 발은 땅을 딛고 있어서 언제든지 물이 차오르면 뒤로 뺄 수 있는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든지 아니면 두 발을 다 물 속에 넣고 내가 물과 함께 죽으리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목회에 있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주저 하는 것, 뜻을 세우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것, 이런 것들은 하나의 성향이 아니라 성향 속에 죄가 깃들여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 앞에 쓰임을 받았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일종의 단호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하기 위해 나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결의를 보여줍니다.
일본 사람들의 오락은 바둑입니다. 중국에서 온 것이 변형되었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있습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면 조금 긴데, 두 가문이 막부에서 커다란 대척점에 서 있었습니다. 가문을 대표해 사람들이 나와서 무예도 있지만 바둑으로 경기를 겨뤘습니다. 그래서 바둑을 둡니다. 흑이 여기를 두니 백이 여기를 두었다는 기보가 아직까지도 내려옵니다. 인터넷에 ‘토혈국’라고 쳐보면 나옵니다. 한 사람이 졌습니다. 불계로 졌습니다. 돌을 내려놓고 졌다고 하고 너무 억울해서 거기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서 피가 바둑판 위에 낭자하게 쏟아집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가 혀를 깨물어서 피를 토한 것이 아니라, 심령을 다 바쳐서 바둑을 뒀는데 지니까 너무 원통해서 피가 솟구치는 것입니다. 피로 낭자하게 바둑판이 젖었다는 기보가 아직까지 내려옵니다.
내가 맨 처음에 기독교 작가로 부름 받고 책을 쓸 때 항상 문제가 근면한 열심이 문제였습니다. 신학적이지 않고 근면한 열심이었습니다. 지금은 빗나가도 좋으니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교정해줄 것입니다. 빗나간 열정도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다른 목사들이 목회를 해도 열정을 절제시킨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뭐 좀 해라, 이것은 어떤가, 이것 한 번 해봐라, 조사해봐라 했지, 좀 진정하고 너무 나대는 것 아니냐, 진정하고 열정은 좋은데 좀 가라앉히라고 한 일이 없습니다.
교사도 똑같습니다. 옛날 30년 전 내수동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는 모든 교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사 중에 1/3은 너무 오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렸습니다. 오버를 하면 사람들이 항상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말립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보기 힘듭니다. 기꺼이 자신을 허비하리라는 욕심과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소중합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양현식 목사가 청년부 사역을 했습니다. 한 녀석이 증발을 한 것입니다. 일체 연락을 누구에게도 안 줍니다. 돌고 돌아서 친구로부터 정보를 얻었는데, 강남 삼성동 어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3일을 삼성동에 있는 편의점을 뒤졌습니다. 결국은 찾아냈습니다. 꼭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정도의 목표가 있고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내가 찾아내겠다, 내가 하겠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나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하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땀과 눈물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피를 쏟으면서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는 게 그게 아니라, 당신의 아들 몸 자체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화목제물로 주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다 가지고 있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 안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제 삼으시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애착과 탐심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진짜 영혼이 진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부자 청년마저 ‘예수님,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물어보니, 예수님이 평소의 가르침과 약간 상반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조지 엘런 라드‘라는 신학자는 그것을 가리켜 다음처럼 해석했습니다. 그 가르침은 영생을 얻으려면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거저 얻는 구원을 가르치시던 분이 그 날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 청년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오고 근심과 걱정에 싸여 사는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꺼이 자기를 허비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강대 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영혼들이 내 설교를 듣고 회심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의 나그네 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 소용 없습니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이하드’ 시리즈로 떼돈을 번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기사에게 전화하면 바로 자기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옵니다. 브루스 윌리스입니다. 데미무어와 이혼하고 아마겟돈에 나온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실어증이 와서 말을 할 수 없고 연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다 헛된 것입니다. 그 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사랑의 크기입니다. 도전을 하십시오.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런 것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내가 너희를 더욱 사랑하는데도 나는 너희에게 덜 사랑을 받을지라도’ 입니다. 사람의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제가 열린교회에서 잊히지 않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참 힘들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고 목회를 하면서 사기가 침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랬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조울증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증상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름에는 감정적으로 힘들어했었습니다. 재정부에서 이상한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 앞으로 목적 헌금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목적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지 왜 나에게 하냐고 했지만 어쨌든 전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무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십 여 년 전 일입니다. 예쁜 봉투에 김남준 목사님께 드린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뜯어보니 은행에서 바로 찾은 신권으로 만 원짜리가 백만 원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 출판사에서 인세를 많이 줄 때이므로 그 돈이 나를 감동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손 편지를 썼는데 나에게 쓴 것이 아니라 시 같이 썼습니다. 나에게 돈이 많다면 목사님 허리도 고쳐드리고 싶고 나에게 돈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다고 쓰면서 마지막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역하면서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게 해주어야 합니다. 농담으로라도 디스하지 말고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항상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서 따뜻하게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글, 편지, 선물, 미소 모든 것들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누군가 우리를 위로하면 그것이 사람에게서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합니다. 설교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덕은 자기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자기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해도 괜찮고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특히 목회자는 너무 험한 일이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이 일을 계속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사람에게서 구하면 아주 추한 목회자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의 품을 파고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고난을 이기고 역경을 이기고, 때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으며 그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받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오는 직접적인 사랑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경건입니다. 기도생활이나 말씀생활이 환경에 따라 출렁거리면서 묻어가면 안 됩니다. 수련회 왔으니까 거의 기도시간이 없다고, 사역을 하니까 특별한 때니까 거의 기도 못한다 말씀의 은혜도 거의 못 받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생명처럼 붙들고 내가 이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아무도 내가 너희를 풍부하게 사랑하고 나는 너희에게 덜 사랑을 받을지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사랑으로 모든 시련을 이기면서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목회자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물어봅니다. 대담한 사람입니다. 목사님 은퇴하시고 뭐하실 거냐고 합니다. 주제넘게 물어봅니다. 내가 한 방 날렸습니다. 나도 열린교회를 은퇴하면 뭘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안 할 것은 있는데 어디선가 저 멀리서 열린교회를 생각하면서 서럽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것은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소원은 이것입니다. 은퇴하는 그 주일이 살아온 날 중에서 가장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날이 되고, 살아갈 날 중에서는 제일 조금 주님을 사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영광에 들어갈 그 때에 일찍이 도달한 적 없던 최고의 사랑에 도달해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안고 그 분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영혼을 위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 목회자는 허비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목회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