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사 10:3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구속 역사의 한 위대한 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던 복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에게 열리는 계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군대는 한 부대가 약 육백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 부대에 여섯 명 정도의 백부장이 모여서 상급자의 통솔을 받으며 나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변방에 있는 경우에는 약 천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니 아마 열 명 정도의 백부장이 한 부대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고넬료는 어마어마하게 지체 높은 사람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중급 정도 되는 군대의 장교로서 복무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명망을 얻은 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고넬료를 구속 역사의 한 위대한 장을 여는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함께 쓰임을 받았던 인물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도들 중 으뜸가는 사도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부어졌던 성령의 위대한 역사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모든 전 세계에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첫 장을 연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10장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복음을 통하여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도입하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II. 말씀하시는 하나님
제일 먼저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여심에 있어서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만약에 이름 없는 자들이 이 일을 했더라면 진실성을 의심받았을 것이고 과연 하나님께서 정말 이방인에게도 그렇게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하는 걸 가지고 문제로 삼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가까이 하는 것 자체가 율법에 금지된 것이었기 때문에 시비가 일어날 소지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베드로를 바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삼으셔서 그 증인으로 삼았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수가 있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두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A. 기도자를 쓰심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기도자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됩니다. 가이사랴라 하는 곳에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을 멸시하고 헬라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런 적대감이 자리 잡고 있던 시대에 이 이탈리아 사람이 어떻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백성을 구제하고 깊은 기도 속에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제 9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정한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을 칭찬하면서 한 가지 지시를 내렸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해서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에게서 일어난 첫 번째 사경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건한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선택해서 이 일을 받들기 위해 욥바로 보냈습니다. 이튿날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 때 베드로 역시 기도 시간이 되어서 관습을 따라서 지붕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당시 지붕은 시멘트가 없었기 때문에 탄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무 같은 것을 걸쳐 놓았고 진흙을 바르고 또 그 사이사이에다가 수수깡이나 옥수수대 같은 것들을 넣고 풀 같은 것을 넣어서 단단하게끔 만들어서 사람이 올라다닐 수 있을 정도의 무게는 감당할 수 있는 지붕이었습니다. 아마 거기가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경건하게 기도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그 지붕에 올라갔고 그 시간은 6시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정오였던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고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서 그가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데 사람들이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황홀한 중에 또다시 환상이 펼쳐졌습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워져 있는 환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땅에 기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들과 기는 것과 또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에 익숙해진 사람이었고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들이 섞여 있는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행 10:14) 그런데 두 번째 소리가 들렸습니다. “···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그릇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의미를 알 수 없을 그때에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문 밖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베드로가 그때의 그 환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행 10:19 下)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을 만나서 이제 갈 결심을 하고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고넬료를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행 10:22) 이런 소개였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 하나님의 큰 뜻이 있는 줄을 알고 드디어 고넬료의 집 가이사랴를 향해 발걸음을 이튿날 옮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왕? 아니었습니다. 군주?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학자?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에서는 사도였지만 세속의 신분으로 말하자면 어부 출신의 그렇게 많이 배우지 못한 평범한 서민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고넬료는 핍박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지위를 소유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기라성 같은 벼슬자리를 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급 장교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세계 선교의 한 장을 여는 주인공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둘 다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 두 사람을 기도 속에서 묶어주시고, 묶은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감추어진 위대한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전파될 것이었고 성령은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부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위대한 역사를 기도하는 사람 두 사람을 선택하여 도구가 되게 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공생에 등극하신 이래로 이루어진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점으로 이어본다면 기도와 기도를 이으면서 그 역사는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데리고 다니던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삼아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 파송할 그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 간절히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에 사도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성령과 권능을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진리의 말씀과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구속사의 한 장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후에 우리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의 대업이 완성되었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심으로 그 대업의 종지부를 찍으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가는 광경을 조금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기도할 그때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 성령 강림 사건을 계기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고, 가슴에 불꽃이 타오르는 전도자들이 되어서 그 복음을 온 땅에 실어 나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복음의 불을 지폈고, 이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서 교회가 큰 두려움에 놓였을 때 교회는 굴하지 않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서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 선교의 모든 역사의 한 그 지점에는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던 그 사람, 이름 없는 사람을 통해 동토의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봄바람이 불게 하셨고 얼음같이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냇물처럼 그 복음의 물결이 다시 흐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기도가 바로 복음의 문을 여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집안에 태어나서 너무나 곤고하게 살아가.' ‘내 가족들은 나를 왜 고통스럽게 하는 거야?' ‘나는 피해자야.'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사회가 어렵기 때문에 사업이 엉망이야.' ‘그것 때문에 나는 너무나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어.' ‘도대체 신앙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왜 하필 왜 이런 남자를 내 남편으로 만나게 해서 내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할까?' ‘나의 인생은 이 남자 때문에 희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여자를 선택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까? 자녀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경제생활 때문에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건 모두 주연 의식이 아니라 단역 의식입니다. 영화에는 주연 배우들이 있고 주연 배우는 죽지도 않고 쓰러지지도 않습니다. 폭탄이 쏟아져도 살아나고 단역 배우는 총소리만 들려도 쓰러집니다. 왜 여러분이 하필이면 단역 정신을 가지고 삽니까? 그렇게 문제가 많은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셨고, 내가 여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이 가정을 모두 바꿔 놓을 것이라는 기대는 왜 하지 않습니까? 사업이 어렵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 나를 주연으로 사용하셔서 나뿐만 아니라 나와 거래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런 주연 의식을 왜 가지지 않습니까? 왜 총소리가 나면 먼저 쓰러지는 사람들이 됩니까?
여러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던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보디발의 집이 큰 복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이나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끌려온 히브리 종 한 사람 요셉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집 안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종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별 볼 일 없는 종을 주연으로 사용하시고 보디발과 보디발의 부인은 단역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주체의식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에게 소명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주역으로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내 남편이 바뀔 것이고, 내 아내가 변화될 것이고, 그리고 내 자식이 희망이 없지만 나 같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하면 주어진 여러분의 상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위대한 장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체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못합니까? 왜 자신감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기도자를 사용하셔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지 않고 계속 밀려나서 살면 단역 배우로 계속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남이나 원망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가족들이나 원망하고 그다음에 부모나 원망하고 자식이나 원망하고 남편이나 아내나 원망하고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행복하시면 그 길로 가십시오. 나와 교인들은 당신이 간 그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우리 기도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면서 새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B. 말씀을 주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두 사람에게 모두 보내셨는데, 천사를 통해서 말씀을 주시지 않고 사람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천사는 그냥 고넬료에게는 베드로를 모셔오라 했고, 베드로에게는 고넬료가 사람을 보냈으니 가라 거기까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 베드로에 의해 전해지고, 사람 고넬료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 놓으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니 여러분이 이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오, 그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천사를 통해서 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실 때에 우리의 지성에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의 손을 붙잡았을 때 마치 우리가 악수할 때 온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정이 우리의 지성 속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주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신앙의 고민이 없이 일주일을 살다가 온 사람들은 예배 시간을 통해 답이라는 걸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있고 갈망이 있는 사람, 기도가 있고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말씀 주시기를 기도하셔야 됩니다. 물론 설교 준비는 모두 끝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포될 때는 또 다른 말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살다가 보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힘들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에게도 고통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두 가지 사실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인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절대로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나빠 보여도 결국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굳게 가져야 됩니다. 이해할 수 있을 때나 이해할 수 없을 때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아주 가슴 쓰라린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마도 제 생각에는 다섯 살 아니면 여섯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충치가 생겼습니다. 대화라는 시골에 강원도에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빨을 뽑아야 되는데, 그때는 치과라는 것이 그 동네에 없었고 그냥 의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를 엄마가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 언니 둘이 다리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내 어깨를 붙들고 의사 선생님은 내 턱을 벌리면서 펜치를 들이대고 그냥 뽑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그때 처음으로 마취 주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뽑아내면서 의사가 하던 말이 어린 저의 귀에도 쟁쟁합니다. ‘어느 무식한 인간들이 애를 이렇게 잡았냐?' 하나도 안 아프고 툭 하고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붙들고 펜치를 들이대는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다 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소리소리 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하여튼 아이가 충치 때문에 고생을 하고 뭘 먹지도 못하니까 좋게 해주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 코코가 아팠습니다. 코코, 오래간만에 나옵니다. 코코가 아픈데, 약을 안 먹습니다. 약도 되게 비싸서 5만 원이나 됩니다. 그 약을 주사기에 넣어가지고 입에 집어넣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수건으로 감고 그냥 (잡을) 때, 얘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습니까? 난리를 칩니다. 그래서 사료로 유혹을 하면서 입을 벌리고 그 속에다 주사기를 쭉 해가지고 집어넣었습니다. 얘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났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선한 일이었단 말입니다. 하나님도 종종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이 나쁘게 보이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왜 그런 일이 꼭 필요한지를 우리가 모릅니다. 그것을 모두 안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성만 가지고 살면 됩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며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고 하는 그 신뢰를 굳게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런 좋으신 하나님인데 나를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다른 일을 통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신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믿으려면 여러분이 믿는 거고, 안 믿으려면 여러분이 안 믿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주님을 믿게 만드십니다. 마지막에 굴복을 시켜도 의지를 설복시키셔서 마지막에 여러분 의지로 굴복하게끔 만드십니다. 급한 사람은 빨리 하시고 더딘 사람은 늦게 하시지만,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떠한 위기를 만나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를 잊지 않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변화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세상에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모두 동원해서 살아본 결과 여러분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았지만 뚫어진 전대에 쏟아 붓는 은화나 금화 같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저장할 수 없는 웅덩이에다가 물을 저장하고자 했으니 여러분의 생명이 거기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기대할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갖는 것 말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이 바뀔 때 여러분의 인생이 바뀐 것을 이전에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전에 여러분의 인생을 바꿔놓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지금은 왜 못하시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지금도 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있었던 믿음이 지금 여러분에게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사경회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경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고넬료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리고 베드로를 모셔왔습니다. 사실 이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 당시 이미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웬만한 사람은 아마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을 정도였고 자기는 또 예루살렘 교회 교인도 아니고 이방인입니다. 가이사랴 라는 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는 이방인 중에 한 사람이었고 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아주 무식하게 봤습니다. 그런 속에 있는 사람이 감히 베드로를 만날 것이라고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경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보면 인류 최초의 사경회였습니다. 인류 최초라고 그러면 웃기지만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이방인 세계에서 있었던 최초의 사경회였고 첫 번째 강사가 베드로였고 주체자가 고넬료였습니다. 그리고 청중은 고넬료와 고넬료의 가족과 친척들과 고넬료의 친구들 그리고 권속들이 모여서 첫 번째 청중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 전에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고넬료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그의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부하들, 심지어 친구들까지 당연히 이 중에 이방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고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고넬료에 의해서 설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경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예수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알고 여러분만큼 복음을 몰랐는데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경건하고 구제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사람에게 인격적인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에 목을 메고 있습니다. 고민을 들어보면 모두 초점이 자기밖에 없습니다. 나의 경제, 나의 신분, 나의 처지, 나의 건강, 나의 모든 것, 처음에 나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나로 끝이 납니다. 그거는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과 함께 살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늘 한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사람 인(人)자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사람 인(人)자라고 하는 것은 막대기 두 개를 기울여 놓은 것인데, 인간은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막대기가 두 개 걸치듯이 걸쳐져 있는 데서 사람 인(人)자라는 글자가 유래하였다고 어려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나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자들이 다른 의견을 내놨습니다. 이것은 막대기 두 개를 걸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문자를 다 해독을 하면서 나오는 게 어떤 사람을 공경하는 예(禮)를 갖추기 위해서 사람이 절하는 모습에서 사람 인(人)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禮)를 갖추는 짐승이기 때문에 이걸 동물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예(禮)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약에 외딴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예(禮)라고 하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배하는 도리가 예(禮)입니다. 그리고 그 윤리적인 기반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을 향하여 어떤 존재인가 하는 처지를 알고 그 분수 속에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공경의 예(禮)를 갖추는 것이 인간이라는 글자의 유례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는데 관심사 자체가 모두 자기로 시작해서 자기로 끝나고, 그 모든 것이 만족되어도 충족되어도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채워진 만큼 욕망은 증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하나님도 채우실 수 없을 정도로 무한대의 욕망입니다. 마지막은 어떤 욕망입니까?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위에 올라가야지만 만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욕망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인간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살면서 관심사를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향해서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격적인 감화력이고 영향력입니다. 고넬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비록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끼쳤고, 그 사람들을 이방인들을 위한 이 첫 번째 사경회에 초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기를 마치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한마음이 되어서 간절히 기도하던 유대인처럼 그렇게 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A. 순종을 결심함
무엇을 위해서 한 마음이 되었습니까? 그들은 순종할 결심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오셔서 무슨 말씀을 자신들에게 주시든지 자신들은 그 모든 것을 진리로 알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전 삶을 기울여 거기에 순종할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감히 강사로 초청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꿈도 꿀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을 보시고 최고의 강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인류 최초에 이방인을 위한 부흥집회를 하나님이 고넬료의 집에서 열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게끔 만들어 주시고,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차별이 없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월요일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퇴근을 하려고 비서실로 나오는데, 월요일이니까 아무도 출근을 안 했습니다. ‘따르릉’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실로 온 전화인데 받지 말고 그냥 갈까 그러고 막 나가다가 멈칫하면서 그냥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그랬더니 상대방이 “여보세요, 거기 열린 교회죠?" “예, 그렇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목회하는 목사입니다." “김남준 목사님하고 좀 통화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김남준 목사인데요." “아 그렇습니까, 목사님!" “전화로 너무 죄송한데, 저희는 지방에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려고 하는데, 꼭 좀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못 간다고 그러려고 했습니다. 저는 너무 바쁜데 시골 지방이라고 해서 거기까지 시간을 할애하는 게 그래서 “제가 바빠서 못 갑니다."라고 말하려고 그랬는데 그 목사님이 먼저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전 교인이 아홉 명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못 간다고 그러면 아홉 명이어서 안 간다고 하는 게 될 테니까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러면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그리고 기대감을 가지고 제발 그 날짜에 나의 일정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고 봤는데 하얗게 비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목사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집회하러 내려갔습니다.
제가 가장 작은 교회에서 집회한 예였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가서 열렬하게 집회를 했습니다. 그 교인들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전 교인이 아홉 명인데 어디서 꾸어왔는지 열네 명이 모였습니다. 그 열네 명을 모아놓고 열렬하게 3일 동안 집회를 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느낌이 뭐냐 하면 그 아홉 명이 구백 명처럼 보였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에 너무 갈급해서 ‘무엇을 말씀해 주시든지 모두 받아들이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앉아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차린 것은 많지 않지만 매 끼니마다 아주 정성스러운 식탁으로 저를 섬겼습니다. 저는 수백 교회, 천 교회도 넘지 않겠습니까? 다녀본 가운데 또렷하게 기억이 남는 그 모시로 유명한 한산 지역에 있는 2층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의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그 분위기가 그대로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마음도 말씀을 전하면서 순종할 결심한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순종할 결심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이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시겠습니까?
사경회에 은혜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뭔 소리를 하는지 한번 가볼까?' '한번 참고해 볼까?' ‘마음에 맞으면 삼키고 마음에 안 들면 뱉어버리면 되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예배 속에서 설교 속에서 주님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무엇이든지 주님이 말씀해 주시면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 여러분 만나주시지 않았습니까? 마음으로 순종을 준비하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복받은 사람들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을 결심할 때 은혜를 주시며 그 사람들이 사경회를 위한 최고의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B. 하나님 앞에 있음
두 번째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고백합니다. “···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下) “하나님 앞에 있다”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뒤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회초리를 맞고서라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모든 집안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내세울 만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깨우쳐주시고, 잘못하신 것이 있으면 고쳐주시고, 그리고 죄 지은 것이 있으면 책망해 주시옵소서.' ‘그래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나님 뒤에서 사는 것보다는 야단을 맞고서라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이 이 안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입니다. 한번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엄마 아빠의 무릎을 오가며 아이가 뛰어놉니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 아빠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터득합니다. 활짝 웃는 아빠의 얼굴과 그리고 미소 띤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는 그 엄마의 무릎팍보다도 더 행복한 장소를 찾지 못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오라고 해도 엄마의 눈빛 앞에서 사는 이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행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은 최고의 행복이고 지복입니다. 이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온유한 심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청결한 마음의 사람,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그분의 은혜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경험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오는 이 완전한 자유와 기쁨은 마음에 차고 넘쳐서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듭니다. 역경과 환란이 있으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인간의 한계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의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도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는 그 이면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헤어지는 슬픔이 있었고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멀리 떠난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그 외로움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는 기쁨을 터득하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어두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다시 여러분을 깨닫게 하는 은혜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인생의 단역의 정신으로 살려고 합니까? 환경이 밀기 때문에 나는 밀려날 수밖에 없고, 우울하고 불안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앞으로 일생도 기대할 것이 없다라는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나 흑수저, 금저, 은수저 타령이나 하고 있을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수저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밥을 퍼먹고 사는 게 문제입니다. 고칠 수 없는 것은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받아들일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고칠 수 있는 것은 온 힘을 다해서 고쳐야 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 바보같이 밀려나서 남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다른 사람의 이 발길 저 발길에 채이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단역 같은 존재로 인생을 살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신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응답을 받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말씀을 듣고자 함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下) 자기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라고 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를 고치라고 하는 것, 그리고 나의 생활에 대한 모든 태도를 바꾸라고 하는 것,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신다면 기꺼이 나의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내가 고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만나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이런 생각의 교만으로부터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잘 사셨습니까? 만족하십니까? 살림 형편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제 살 만하십니까? 여러분의 지혜를 믿고 살았습니다. 한두 번은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여러분의 지혜가 여러분을 속이면 이제는 그 지혜를 불신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바뀌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뭐합니까? 허긴 교회 오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모두 끝나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먹으러 놀러 여행하러 구경하러 모두 산더미처럼 몰려다니고 함께 쓸려 다니는데 교회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거기인 것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인생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대로 사는 것이 좋았더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일을 지키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그대로의 삶을 원하지 않고 바뀐 인생을 원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패배 의식이 젖어 있습니다. ‘이제 나는 안 된다.' ‘나는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몸부림 쳐도 나의 인생의 이 깊은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깊은 웅덩이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깊은 진창을 헤매기 때문에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바다가 출렁거리기 때문에 닻을 내릴 그런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폭풍이 일기 때문에 항구를 향하여 계속해서 항해해야 할 필요성이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앙 아닙니까?
현실의 부정에서 신앙이 오는 것입니다. 현실을 긍정하고 이 현실의 노예가 되어서 살려고 작정을 한다면 우리에게 도대체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우리 마음 먹히는 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되지 않는 그 마지막 지점이 절망인 것입니다. 그 절망과 함께 삶의 모든 기대가 사라질 때 인간은 허무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허무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죄짓고 쾌락에 빠지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인생도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사실은 여러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인 것입니다.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의 감화를 받아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고 인생에 대한 단역의 정신을 주연의 정신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인생에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제자들의 말씀을 듣는 사람과 듣지 않는 사람에 대한 운명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슴을 부여안고 나는 외롭다고 소리쳐 보십시오. 아무도 여러분의 비명 소리에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인생의 소외와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해결되고,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탕물 같은 그 차가운 맛에 한 모금 마시고 그 뜨거운 뙤약볕에서 더 목마른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무슨 기대를 그렇게 겁니까? 우리 주님을 믿고 바뀌어진 인생을 살기로 결심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별 볼 일 없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최초로 사경회 집회를 인도하고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고넬료와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보다 여러분이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알았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여러분이 다시 한번 마음을 모으고 주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시겠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로마서 10장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정신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말씀의 은혜를 받고 제발 다른 인생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살아서 숨 쉬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고넬료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도(道)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어떤 정신으로 사시겠습니까? 총소리만 나도 쓰러져 죽는 단역의 정신으로 살다가 그렇게 불만족스럽게 인생을 마치겠습니까? 아니면 이와 같은 나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꿔 놓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문제가 있는 이 환경 속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나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주역의 정신으로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바뀐 인생을 살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