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녹취자: 허혜숙
시편 23편 3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조금 정리를 해 드리자면 시편은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고 첫 번째 토막은 1절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어떻게 시인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토막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미래의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오늘 새벽에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시 23:2)라는 구절이 가르쳐주는 바였습니다. 3절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내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이신 것을 깨닫게 됐다’ 이런 뜻입니다.
매우 어려운 단어가 여기에 나옵니다. ‘내 영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영혼이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것이 사람이다’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물건을 볼 때 몇 가지 부속품으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려면 조립하는 공장에 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맨 처음에 창조될 때 몇 가지로 되어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흙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의 ‘아파르’인데 그것은 먼지입니다. 티끌, 먼지나 티끌 같은 것을 모아서 하나님이 사람을 빚으십니다. 이것이 육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흙으로 빚은 사람 속에 후~하고 숨을 불어넣으시는 행동으로서 영혼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을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시는 동작을 후~ 하는 것으로 묘사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이 창조가 되어서 육체와 영혼이 만나자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 둘이 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아버지 어떻게 되셨어요?’ 물으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육체는 땅으로부터 지음 바 되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도 어른한테 똑같이 ‘past away’ 돌아가셨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잠시 있다 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하늘에 있는 영혼도 아니고 죽은 뒤의 영혼도 아닙니다. 시인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는 항상 하나님 앞에 내기를 하듯이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제가 믿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수준에서 우리에게 응답해주십니다. 그것이 다분히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때로는 물질적인 것인데도 그렇게 응답되는 기도 속에서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들이 쌓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낮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더 놀라운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주실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영혼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 마음과 정신의 기원이 되고 또 우리의 육체를 통제해서 결국 살아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무엇인가를 결정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그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위인은 말하기를 ‘육체의 생명은 영혼에 있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라는 것이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색깔이나 모양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크기는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영혼이 내 머리 끝부터 발 끝 사이 어디에 있는 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지 우리 아버지한테 가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40kg이었다가 시집가서 하도 먹었더니 80kg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40kg는 영혼이 없고 80kg는 영혼이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80kg가 되든 120kg가 되든 아니면 60kg로 시집을 왔는데 40kg가 되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영혼은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양이나 색깔 같은 것들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영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주 활기차고 영혼이 건강하면 사람이 자기가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행복하고 활기찹니다.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이 살아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가엾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그랬는데 ‘소생시키신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로 ‘하야’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반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목자로 모시면서 살아왔던 이 다윗도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됐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처럼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소생시키신다, 다시 살려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생 시키신다’라는 뜻은 쉽게 말하면 천천히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확 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꽃나무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물을 뿌리고 하루 자고 나니까 확 살아났을 때 아, 저것이 소생했구나, 다 다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왜 여기 있지?’라고 벌떡 일어나면 ‘아, 깨어났구나, 소생했구나.’ 그럽니다. 똑같은 용법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영혼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심지어 로마서 8장에도 보면 ‘너희가 욕심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그렇게 나옵니다. 욕심을 따라 살면 즉시 처분을 받아서 처형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던 영혼이 죽게 된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를 향한 경고가 아니라 신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의사들도 죽음의 정의를 확실히 못 내립니다. 어떤 사람은 기준을 이야기합니다. 심장이 안 뛸 때, 뇌의 활동이 멈출 때, 등등 이야기하는데 심장이 멈췄는데도 충격기를 갖다 대서 충격을 주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 무엇을 놓고 죽음이라고 볼 것이냐고 할 때 뇌가 더이상 활동하지 않을 때 뇌사를 죽음의 판정기준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확실하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외국의 잡지에 보니까 20세 때 코마상태로 들어가서 거의 모든 것이 멈췄는데 20년 만에 깨어납니다. 20세의 아이가 사고로 말하자면 코마상태로 들어갔는데 의사들이 절대 못 깨어난다고 했는데 40세가 되어서 깨어납니다. 그가 열아홉 살 때 아이를 하나 낳았었는데 그 아이가 자기 나이가 될 때 깨어납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있었던 일을 거의 모두 기억을 합니다.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빨리 호흡기를 떼라, 편안하게 죽게 내버려 둬라, 누가 그 말을 했는지를 다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데 죽음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정확히 정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죽어있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은 우리가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습니다. 죽어서 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시체의 국물이 슬슬 흐르기 시작하면 확실하게 죽은 것입니다. 냄새가 나고 시체의 국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진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소멸이나 아니면 타살로 생명이 끝나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의 영혼을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베소서 2장에서 보면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너희들을’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영혼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죽는다는 표현을 할까? 이것은 죽음의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가 죽었다.’ 의미가 명확합니다. ‘사람이 죽었다.’ 명확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었다.’, ‘정신이 죽었다.’, ‘사상이 죽었다.’ 할 때는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무슨 주어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뒤에 나오는 설명하는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영혼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뭘 보면서 색깔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엇을 해야되겠다 라고 결정하는 것, 이런 것 자체가 다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은 육체가 그런 작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도 똑같이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어떤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보다 더 깊게 생각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결정을 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은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성경이 왜 우리보고 죽었던 영혼들이라고 말하느냐? 그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생명의 기운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거나 원래 영혼을 만드신 목적대로 영혼이 작용을 잘 안 하거나 문제를 일으킬 그 때에 그 영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 육체가 죽으면 행실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죠? 완전히 죽어서 시체 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육체가 뭘 하겠습니까? 그냥 퍼질러진 채 누워서 썩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혼이 죽었을 때는 죽음의 행실들 (dead works)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사기 간음 살인 험담하는 것 당 짓는 것, 이런 것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영혼이 죽은 상태일 때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자에게서 그렇습니다. 이제 개념이 이해가 되시죠? 어떻든 영혼이 그렇게 죽은 것 같은 때를 이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었다’라는 그 말은 아무것도 못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혼으로서의 생명이 현저하게 결핍되어있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면 자기 힘으로 일어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사지가 자유롭게 움직일 때 육체가 충분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도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남산 같은 것은 한걸음에 막 올라갈 수 있고 내려올 수 있고 한라산이라도 한 번 모자 쓰고 등산복 입고 눈발이 휘날리는데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아 한라산이 두 배쯤 높았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육체의 생명이 아주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런 것을 살아있는 육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생명의 기운이 자꾸 빠져나갑니다. 그렇게 무리하게 산에 올라갔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기운이 점점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혼도 똑같습니다. 영혼도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너무 가엾고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진리를 전해줘서 고쳐주고 싶고 무지한 사람들을 보면 깨우쳐주고 싶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물질로 돕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데 이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으로 관찰할 때는 생명이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관찰할 때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생활을 비교적 오래 하신 분들이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고 오셨을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그때가 요즘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눈물이 막 쏟아지고,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너무 사랑하고 구역의 식구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자기 식구처럼 가서 돌보면서 그렇게 봉사하면서 그 사람이 자기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 때문에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의 바닥이 납니다. 지금 그러신 분들이 꽤 있는걸로 여겨집니다.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그러면 괜히 사람들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하러 성가대에 와서 마지막에 얼굴을 붉히면서 가고 교회에 밥 푸러 왔다가 아무것도 아닌 반찬 몇 가지와 서로 국자하고 주걱 들고 한바탕 하고 앞치마 팽개치고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성질이 나가지고. 교회에 와도 짜증, 집에 돌아가도 짜증, 내가 왜 이러지 할 정도로 짜증이 나고 기도도 하기 싫고 교회 봉사도 하기 싫고, 뭐든지 못해, 못해, 못해, 못해 신앙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생명이 뚝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유식한 말로 영혼의 침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영혼에 우울증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 영혼의 우울증, 영혼의 침체라는 것은 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너무 교회가 오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사경회를 했습니다. 1년에 네 번을 했는데 제가 30년 동안 인도를 했습니다. 어른들은 사경회를 하고 아래층에서는 교육관에 다 흩어져서 유치부 학생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교회학교가 다 사경회를 합니다. 중고등학생들은 어른들하고 예배를 봅니다. 제게 비서가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 한 자매가 딸이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예배를 다 마쳐서 집에 가자고 딸한테 전화를 하는데 딸이 받자마자 딱 끊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했더니 또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얘가 왜 그러지?’ 하고 있는데 문자가 띵 하고 왔어요. ‘어린아이가 지금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렇게 전화를 하면 은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온 것입니다. 그러더니 조금 있으니까 또 문자가 띵 하고 왔어요. ‘나만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기도하는 모든 친구들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기다리세요.’ 그것은 뭡니까?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면, 은혜를 받으면 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때는 교회 오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내가 이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이 교회 한 모퉁이를 섬길 수 있다는 것, 너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교회에 와서 새 가족인데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하루는 간증을 했습니다. 자가가 우는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깼답니다. 자기가 대성통곡하면서 울어서 이불이 흠뻑 젖었답니다. 그래서 왜 울었느냐고 했더니 꿈에 누가 나타나서 너는 열린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자기를 교회에서 내쫓는 꿈을 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울었는지 이불이 흠뻑 젖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은혜받았을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그 꿈을 통해서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멘 하지 말라고 해도 다 아멘을 합니다. 막 감사해서 속에서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뭐든지 짜증이 납니다. 뭐든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죽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남편이고 아내고 애들이고 다 꼴 보기 싫고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외톨박이로 있는 것 같고 마지막에는 하나님도 꼴 보기 싫어집니다.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 뒷방에 가서는 보약을 챙깁니다. 먹던 녹용인데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영혼이 이 사람도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왜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될까? 시편에서는 영혼이 이런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고통이 계속될 때, 고통 자체가 영혼을 깊이 침체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이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믿음으로 능가 할 때에는 오히려 더 불이 확 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재 경험해 보셨습니까? 불이 납니다. 나무나 이런 것에 불이 붙을 때는 물을 뿌리면 꺼집니다. 그런데 기름이나 화학 약품에 불이 붙었을 때 물을 뿌리면 불길이 그 물을 받으면서 확 하고 더 일어납니다. 물을 뿌리면 큰일 납니다.
그런 것처럼 고난이 왔을 때 믿음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하면 그 고통이 침체의 이유가 안 되는데 믿음이 그것이 안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 계속되면 그때 이 고통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깊은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욥 같은 사람입니다. 욥이 고통을 당했는데 처음에는 그 고통을 능히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되고 친구들이 와서 계속 자기를 잘못 했다고 하니까 마지막에는 침체에 깊이 빠지면서 하나님 왜 가엾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이런 뜻으로 내가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날에 내가 죽은 아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불신앙적인 탄식을 늘어놓게 됩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모를 때, 지식이 없을 때 인간은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진리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도 계속 배우면서 진리에 눈을 떠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절대로 손에서 떼지 말아야 할 것이 성경입니다.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책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또렷하게 답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읽고 계신 성경이 어디입니까?’ 할 때 ‘어디 있더라? 구약 여기저기 읽죠.’ 이것은 안 읽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할 때 ‘그것이 무엇이더라?’ 그 사람은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즉시 ‘이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슴 저미는 기도의 제목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저요? 특별히 하고 있는 일은 없는데요?’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아니면 전도국 대원입니다. 아니면 나는 1교구 제1 구역장입니다. 아니면 김 아무개 초신자를 이끌 책임이 있는 양육자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사명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네 번째 ‘요즘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책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잡지책이나 선데이 서울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TV 프로는 몰라도 됩니다. 이 네 가지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 제가 나이가 많아서’ 뭐가 많습니까? 살아있지 않습니까? 눈 보이지 않습니까? 돋보기라도 쓰고 책을 읽어야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마지막까지 하던 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을 안 하니까 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무지하게 되면 그것이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는 대표적인 한 예시가 이제 시편 73편에 나옵니다. 시편 73편에 아삽의 시라고 나오는데 아삽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는 매일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데 하나님은 매일 혼을 내시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믿어서 되겠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야, 네가 진짜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 그래서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 하면서 회개하면서 살았는데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그러면서 오래간만에 눈을 들어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보니까 자기가 생각하던 것하고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형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가 샘 날 정도로 잘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만한 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저렇게 까불고 살다가 죽을 때는 아마 비참하게 죽겠지 했는데 죽을 때에도 고통 하나 안 느끼는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죽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재앙이 없이 삽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말씀 앞에 은혜를 받고 잘 살아야지 했던 것이 다 쓸데없는 짓이었구나’라고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침체가 어느 한순간에 훅 하고 그를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지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깨집니까? 그것이 큰 고난을 당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깊은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나니까 당연히 이 시인이 옛날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 같은 것을 받기에 싫어지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연해 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게 된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가면서 번개 같은 생각이 휙 하고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태까지 자기가 본 것은 이 세상만 본 것입니다. 성소에 딱 들어가서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는데 인생은 잠깐이고 그 후에는 우리가 성막에 들어가듯이 하나님을 뵈옵는 때가 오고 모든 인간은 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딱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이 너무 형통하고 잘 살고 죽을 때도 웃으면서 죽고 개 같은 나쁜 짓만 했는데 꽃에 둘러싸여서 수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으면서 영광중에 들어갔는데 저 휘장으로 들어가는 때까지만 본 것입니다. 휘장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그때까지는 무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휘장 이쪽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니까 자기같이 사는 사람은 너무나 억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식으로 바보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퍼뜩하고 정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왔는데 휘장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갑자기 황폐하게 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깨달은 것입니다. 지식이 딱 들어오고 나니까 이 죽었던 영혼이 확 살아나면서 뭐라고 고백을 하냐면 “하나님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제가 주님 앞에 짐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내 오른손을 붙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아멘. 고백하면서 영혼의 침체에서 훅 하고 살아납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진 것입니다.
교회 오기만 하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징조입니다. 아니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습니다. 노인이 계속 졸기 시작하면 죽음이 가까워진 거야, 이생에서 못 잔 잠을 지금 자는 거야, 그 잠이 끝나고 나면 죽음이 데려가는 거야. 나이가 80-90이 먹어도 예배시간에 앉으면 몸은 너무 쇠약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담요를 두르고 있어야 하지만 두 눈은 죽는 순간까지 초롱초롱 진리에 빛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무지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지만 영혼의 깊은 죽음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보다도 더 중요한 세 번째는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이 죄가 우리는 흔히 뭔가 행동을 했을 때 그때 이 행위를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죄가 아니고 악입니다. 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성향입니다. 그 정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받은 사람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면 몰려다니는 사람이 모두 자기 같은 사람하고 몰려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 누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여러분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아니면 ‘오늘 아침에 기도하셨어요?’ 아니면 ‘저는 오늘 성경을 읽어서 이렇게 은혜를 받았어요.’ ‘사경회를 했는데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런 말을 하면 슬며시 일어나서 집에 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면서 누구는 왕년에 은혜를 안 받았나? 아니꼬와서, 그것은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러는 것입니다. 죄가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감정입니다. 죄의 반대말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싶고 죄가 마음속에 쌓이면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싫어합니다. 반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만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영혼이 침체가 된 것이 맞다. 왜냐하면 확실히 지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 죽음의 증상이 내게 있다, 더럽게 밉고 자식들도 원망스럽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왔을까?’ 하고 교회도 못마땅하고 마음에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자식이고 남편이고 다 필요 없어’ 이런 말을 함부로 뱉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의 증상이 있는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신문에 난 적도 없고 내가 무슨 돈을 훔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를 때리거나 폭행을 한 적도 없고 무슨 횡령을 하거나 경찰에 조사를 받은 적도 없는데 무슨 죄를 지었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접시처럼 생긴 납작한 비커에 차가운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큰 개구리 한 마리를 올려놓았습니다. 신기하게 개구리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밑에서 심지를 조절해서 불을 붙였습니다. 천천히 1초에 0.04도씩 온도를 올렸습니다. 마지막에 개구리가 푹 삶아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논에 사는 개구리들을 데려다가 뜨듯한 물에 집어넣으면 개구리가 아, 참 시원하네 하면서 사우나 하듯이 들어갔겠습니까? 아니면 튀어나왔겠습니까? 튀어나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이슬 젖듯이 사르르 아주 작은 죄들부터 사르르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는 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온 죄들이 자기 전체를 지배하면서 들어온 죄는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파괴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남아있는 은혜들을 하나씩 하나씩 파괴합니다. 기도의 눈물이 사라지고 말씀의 감격이 사라지고 예배의 기쁨이 사라지고 교제의 행복이 사라집니다. 가족들이 사랑스러운 마음도 사라집니다. 하나하나 사라지면서 이기심만 자기 안에 가득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군인들이 개울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처럼 생긴 사람이 오더니 부하 세 명에게 포대자루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너희들은 가서 지금부터 여기에 돌을 한 사람당 50kg씩 가져온다. 실시.” 군인들이 복창하고 “실시”하면서 돌멩이를 주우러 갔습니다. 한 사람은 무식해서 딱 50kg 될 돌을 찾아서 간신히 들고 자루에 메고 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20kg 30kg 두 개의 돌을 찾아서 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너무 똑똑해서 이것을 지고 어디까지 갈지를 모르는데 저렇게 큰 돌멩이를 지고 가면 어깨가 남아나겠는가? 생각하며 공깃돌 천 개를 주워서 50kg를 채워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다음에 내리는 지휘관의 명령이 황당합니다. “이제 이 모든 돌멩이를 원래 있던 자리로 갖다 둔다 실시”한 개 가지고 온 사람은 한 군데 밖에 안 갔기 때문에 정확하게 즉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두 개 가지고 온 사람은 여긴가 저긴가 하다가 가보니까 자국이 있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천 개의 공깃돌을 가지고 온 사람은 한 개도 제 자리에 못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습니까? 세 개 다 50kg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참 살기가 좋아졌습니다. 요새 안 하는 것이 변소 푸는 것을 안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아예 변이 흘러갈 수 있는 통로를 따로 만듭니다. 지하에 묻어서 한꺼번에 화장실을 정리하고 나면 그것이 하수도로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받는 관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쭉 빨려 들어가서 다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를 버렸는가에 따라 나중에 계산을 해서 돈을 내는 것입니다. 옛날에 지은 건물들은 지하에 똥통을 파야 했습니다. 우리가 20년 전에 교회를 지을 때도 그렇게 정화조 통을 파서 분뇨가 교회 건물에서 모두 모이는 것입니다. 700명이 사용할 수 있는 정화조 통을 건설을 해서 허가를 받고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이 온 것입니다. 2천 명씩 오니까 그 당시에 이것이 1년에 한번만 퍼야 되는데 이것이 6개월도 안 돼서 꽉 차서 넘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구청에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똥차를 보내줍니다. 그 똥차가 올 때는 이상하게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곡을 울리면서 옵니다. 베토벤이 그것을 하라고 작곡한 것은 아닌데 꼭 새벽시간에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그리고 서서 파이프를 갖다가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입니다. 유리에 게이지가 쭉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몇에서 시작했습니다. 적고 마지막에 올라가서 5천 리터를 펐습니다. 하고 5천 리터 곱하기 얼마 하고 구청에 “납부하세요” 하고 갑니다.
말하기도 굉장히 역겹지만 온갖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근시간에 안 하고 새벽기도 하고 있는 그때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오는 것입니다. 베토벤이 저렇게 자주 나타나도 되나? 그런데 그것을 분뇨 수거차를 똥차를 보면서 느끼면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국자를 퍼내서 그것을 믹서에 잘 갈았습니다. 채에다가 몇 번씩 받쳐서 건더기 하나도 없이 거의 노란 물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으로 만든 예쁜 스프레이 곽에 집어넣었습니다. 카페트가 깔린 아주 아름다운 호텔에서 그것을 공중에 휙 하고 뿌렸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작은 분말이 확 퍼집니다. 그런데 멀리서보면 그것이 더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왜? 뿌릴 때 멀리서 보면 그것이 뭔지를 모르니까 그냥 향수를 뿌리나보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건더기를 출렁거리며 가는 똥차에 든 똥이나 몇 번을 걸러서 거의 보이지도 않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서 고급 호텔 위에 퍼진 그 똥 수증기나 본질은 다릅니까? 똑같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건더기가 출렁거리면 ‘어휴’ 이렇게 하는데 분말로 확 뿌릴 때는 ‘어 예쁘네’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간이 적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한다든지 돈을 훔친다든지 아니면 간음을 한다든지 이런 큼직한 죄는 가슴이 졸려서 못 합니다. 그런데 자잘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리가 안 된 체 몇 년이 쌓이는 것입니다. 갑자기 더러워진 집이 청소하기 쉽습니까? 오랫동안 걸쳐서 더러워진 집이 청소하기 쉽습니까? 갑자기 아니면 오랫동안. 오래된 집이 청소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깨끗하게 집을 치워놨는데 애들이 비가 와서 흙탕물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걸레질 한 번 하고 애들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으면 끝납니다. 그런데 침대나 싱크대 같은 것은 한 번 박아놓으면 못 움직입니다. 15년 만에 싱크대를 갈게 된 것입니다. 뜯어내고 나니까 장판 색이 변해있는 것인데 아무리 엎드려서 수세미로 닦아도 안 닦아집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냐하면 ‘죄’라고 할 때 신문에 오르내리고 십계명에서 살인이나 간음하는 그런 죄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죄들이 쌓이면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영혼을 죽은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 눈이 나빠도 더러운 물건이 큰 것이 떨어져있는 것은 다 보입니다. 그런데 눈이 보통 좋지 않으면 오랫동안 곱게 쌓인 먼지 같은 것이 구석에 있는 것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아는 지식의 깊이가 더해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리 할 때도 대충하는 사람은 슬슬 하지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계량기를 갖고 1g을 따지면서 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율이 배합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음식 맛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자기가 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뛰어난 성경에 대한 지식, 죄와 은혜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지만 그 죄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런 깊은 영혼이 죽는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할 때 고통을 통해서 그렇게 됩니다. 시편의 절반가량을 다윗이 썼습니다. 그런데 보면 모두 신앙적인 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간에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가 수도 없이 나옵니다. 자기가 그랬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깨닫게 되어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지 않았을 때는 당연히 고통 때문에 침체에 빠지고 무지했기 때문에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깨달으면서 그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렇게 자기가 범죄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 세 가지의 어떤 것이든 간에 마지막에 이 영혼의 죽음의 상태에 벗어나서 충만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영혼의 생명을 되찾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입니까?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회개를 잃어버린 지가 너무나 오래된 것입니다. 여러분 54년 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교회에 나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진짜 훌륭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습니까? 은혜받을 때는 눈물 없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고 기도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교회를 안 다니셨지만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다녔습니다. 내가 다닌 것이 아니라 고모들이 업고 다녔는데 내가 기어 다닐 때 다니던 교회에 가서 45년 만에 설교를 했습니다. 정말 감격적이었습니다. 그 교회 모습이 그대로 생각이 났습니다.
보십시오. 그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서울 시내가 말도 못하게 못 살았습니다. 고대 앞에 포장도로가 없었습니다. 나가서 보면 번듯한 건물이라고는 관공서하고 학교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판자촌이었습니다. 판자촌도 아니고 천막 쳐놓고 사는 수준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다녀봤지만 제가 35개국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모든 교회가 다 눈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본 교회에 대한 기억입니다. 작은 교회 큰 교회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자 상상도 못했습니다.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렸는데 어린 마음에도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무슨 소리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나면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뚜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찬양도 그냥 부르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때 엠프가 있습니까 마이크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부자 교회만 마이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당시 목사가 되려면 목소리가 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실한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음의 상태로 계속 내려가기는 하는데 그것을 거기에서부터 확 소생되는 일들은 잘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나면 아주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 아, 내 마음이 너무 가벼워졌다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죄의 무게입니다. 또 하나는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영혼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가장 고통받았던 때에 그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 속에서 영혼의 힘이 솟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영혼이 소생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그 죄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리셨구나 하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을 때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가장 미운 것이 누구냐 하면 죄가 미운 것이 아니라 죄가 미운 것은 나중 문제이고 죄가 미운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그것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알고 보니까 죄는 자기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깊은 후회의 감정이 바로 회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때 뼈저리게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때 그때 그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죽이시는지 아십니까? 죄를 지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정말 잘 살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하고 계속 비교를 합니다. 바리세인 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갔던 바리새인처럼 ‘나는 저 사람처럼 간음도 안 했고 토색질도 안 했고 저 사람처럼 십일조를 떼어먹지도 않고 나는 이만큼 살아왔습니다.’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전혀 인정을 안 하시고 혼자 떠들다가 돌아갔고 세리도 올라와서 하나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왜? 살아온 날들이 너무 부끄럽고 자기의 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이미 바꿔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가슴을 치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리고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 산 사람은 안 만나주시고 죄지은 사람만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했기 때문에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일에 증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23편은 다윗이 왕도 되고 간음죄도 지고 그런 다음에 말년에 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시에 내용들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인생을 회고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아마 자기도 실감이 안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목동 시절에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노래하던 때였으면 절대 그런 죄를 지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영혼이 거의 기운을 잃어버리고 죽은 자처럼 된 상태에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눈에 딱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하고 반대 된 사람이 창세기의 요셉입니다. 요셉이 혈기 충천한 젊은이였습니다. 평범한 청년이라면 그 보디발의 아내가 당연히 젊지 않았겠어요? 보디발이 12년 연상의 여자와 결혼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까 이 여자는 아직 젊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하고 하룻밤만 자면 진짜 그 집안이 자기 것이 될 정도로 권세를 행사할 수도 있고 젊음의 정욕도 있는데 ‘나와 동침하자 아무도 없지 않느냐’ 그랬더니 ‘아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 둘밖에 없는 방에서 ‘우리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 그래도 쉽게 이야기하면 어린 종 요셉을 성추행하려고 덤벼드니까 겉옷을 팽개치고 도망한 것입니다. 차이가 뭡니까? 요셉이 절대적으로 다윗보다 신앙이 뛰어났다? 아닙니다. 우열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필이면 그 유혹을 받은 때에 다윗은 영혼이 거의 죽어있었고 요셉은 영혼이 충만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단숨에 팽개치고 뛰어나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아시죠? 사모님이 오정모 사모님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처녀장가를 드셨습니다. 오정모 사모님은 젊은 나이인데 생활력이 강했고 믿음이 거의 순교자 신앙이었습니다. 들리는 야사에 의하면 주기철 목사님께서 마음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마지막 면회를 가서 목사님 조선의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마지막 면회였다고 합니다. 그런 여자하고 안 살기를 다행이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치열하게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그 이야기를 다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돌아가시고 오정모 사모님한테 부하를 보냈는데 궤짝이 하나가 왔다고 합니다. 궤짝을 열어보니까 돈과 땅문서가 가득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사람이 막내아들이 주광철 장로님입니다. 저도 그 분을 뵌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그것을 보고 “가지고 가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돌려보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산 것이지 다른 정치적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옆에서 이 아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어머니가 너무 미웠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 그 궤짝 받으면 졸지에 갑부가 되는데 필요 없다고 보내면서 너무 섭섭해하는 아들을 앉혀놓고 성경을 펴서 의인의 자손이 굶주리는 법이 없다고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각적으로 죄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침 그때 늘 그렇게 충만하게 살다가 하필이면 그때 영혼이 완전히 바닥을 친 것입니다. 그 여자를 본 순간에 자기의 살아온 모든 날이 떠오른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은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 얘긴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도 못 받았고 형제들의 사랑도 못 받았고 자기를 좋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그 여자도 별로 자기를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본 순간 한눈에 확 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강력했습니까? 그 여자가 막 오라고 보디발의 아내처럼 유혹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냈습니다. ‘목욕하는 저 여자를 데리고 와라’, 데리고 와서 동침을 합니다. 그 여자도 잘 이해가 안 가는 여자였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그러면 됩니까? 아이가 생겼습니다. 죄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교묘한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무 괴롭습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니까 생각이 납니다. 제사를 드리면 되겠구나, 그래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은 있는 것이 돈인데 재물이 없겠습니까? 자기를 위해 봉사해줄 제사장이 없겠습니까? 임금이 제사를 드리겠다는데 얼마나 봉사를 잘하겠습니까? 수없이 제사를 드렸는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결론을 스스로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상한 심령은 히브리말로 ‘레버리슈바르’인데 깨어진 마음입니다. 그리고 통회하는 심령은 히브리어 원어로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고기 같은 것을 갖다 놓고 뼈고 기름이고 할 것 없이 망치로 계속해서 떡이 되도록 두들겨 내치면 떡처럼 흐물흐물 해지는데 그것이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제사 무용론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거기에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비로소 깨어지면서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밤에 자다가 이불 속 자기 몸에 손을 넣어보니까 생전 못 보던 사람의 몸입니다. 뼈만 남았습니다. 왜? 너무너무 괴로워하니까 하나님이 금식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너무 괴로워서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우리 중에 그 사람처럼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왜 그런 죄인에게 벌레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죄를 지을 때보다 열 배나 더 진심으로 회개를 했기 때문에, 죄로 유명해졌으나 회개로는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오늘의 기도 제목은 ‘나의 죄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은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으실 리가 없는 기도제목입니다. 왜?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의 죄를 회개하고 싶습니다. 나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교묘하게 외면하고 얼굴을 돌리고 이렇게 비겁하게 도망치면서 살았는데 살아온 삶이 전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업을 하면 말아먹고 뭐 좀 되나보다 하면 풍파가 일어나고 또 뭐 좀 되나보다 하면 가정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우환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만 힘든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하고 엮이는 모든 사람이 함께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의 근원이 아니라 염려의 근원이고 화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왜 그렇게 삽니까? ‘내가 너를 만난 것이 내 인생의 정말 복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일생을 살아도 모자랄텐데 ‘내가 진짜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가 되는 것은 너를 만난 것이다. 너는 나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사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거기 있어도 울어 말미암아 고마워하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의 자리에 있는데 남편이 고마워합니까? 남편의 자리에 있는데 아내가 너무 고마워합니까? 자녀들이 고마워합니까? 부모가 고마워합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이기고 은혜가 거의 죽어서 영혼의 생명이 거의 사라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다시 살아납니다. 죄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못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는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죄를 지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해석을 하면서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고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인물도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의 최고봉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생애를 시편을 통해서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으며 깨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참된 도리를 다윗을 통해서 본 것입니다. 플라톤이나 철학자들을 통해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때 묻지 않은 경건, 주님을 향한 참사랑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정결한 마음을 여기에서 읽어내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얼마나 지나간 것 같습니까? 한 시간 20분 지나갔습니다. 매일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잠깐 지나간 것 같죠? 매일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드라마도 한 번에 50분씩 해서 1회, 2회, 보는데 5회만 보아도 250분 네 시간 10분인데 화장실 가면서도 아까워서 보는데 설교는 20분 넘어가면 온몸을 비비꼬고 난리를 칩니다.
오늘 목사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목사님께서 내년에 목회에 절체절명의 양보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뭡니까?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책이 80세를 찍혔습니다. 한 번 찍는데 2000부에서 5000부를 찍는데 80번을 찍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예배의 감격에 깊이 빠지고 나면 그 예배의 시간이 가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저도 사람인데 여러분들이 비비꼬고 듣기 싫어하면 주섬주섬 담고 끝내지 그래도 이 설교를 하면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 눈치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설교를 한 기록이 쉬지 않고 다섯 시간 21분을 한 기록입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섯 시간이 흘러간지 몰랐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사랑하는 표입니다.
사람이 죽어있는 것 같은 때에는 고깃국을 끓여다주고 보신탕을 사다주고 전복죽을 끓여줘도 다 싫습니다. 그런데 입맛이 살아나면 계속 냉장고랑 찬장을 뒤집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너무 먹고 싶은 것입니다. 야채는 야채라서, 고기는 고기라서, 생선은 고소해서, 간식은 달아서 맛있는 것입니다. 막 몸이 아파져서 죽을 것 같다가도 한 끼만 잘 먹고 아침에 일어나면 힘이 불끈 솟아납니다. 그것이 영혼이 소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회개해야 됩니다. 바쁘시면 가십시오. 회개해야 합니다. 깊이 그리고 여러분들이 ‘새집을 주십시오. 새 차를 주십시오’ 그런 기도는 응답이 안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제발 소원이 있습니다. 나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사경회를 했는데 15년 동안을 교회를 나왔는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를 실어다주려고 교회에 나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15년 만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아멘. 여러분들의 남편은 어떻습니까? 배도 나오신 분들이 있죠? 깊이 기도하십시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떤 교인이 새벽마다 남자 신발을 하나씩 가지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왜 새벽기도에 신발을 가지고 오나? 자고 있는 남편의 신발을 매일 새벽마다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신발부터 왔습니다. 신발 임자도 오게 해 주세요.’ 우리는 웃지만 본인은 얼마나 간절했으면 새벽마다 남편 신발을 한 손에 두 짝을 들고 와서 교회에 와서 오죽 안타까웠으면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것이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만 가능하지 살아있는 영혼이 아닌 사람은 불쌍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회개가 영혼을 소생시키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너무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 그때 그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보면 나이가 들면 노인네들이 되면 아주 어린애들과 젊은 사람들을 보는 눈빛이 그윽해집니다. 그것이 뭐냐면 어쩜 저렇게 예쁠까? 아이들도 보면 어쩜 저렇게 예쁠까? 노인네들일수록 보면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갓난아이들, 유아들, 유치부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노인네들입니다. ‘할머니 저리 가’ 왜? ‘냄새 나’ 그런데 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그 다음에 젊은 여자,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 순서로 싫어합니다. 개도 싫어합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있으면 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밥 잘 주는 사람, 그 다음에 어린아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같이 놉니다. 개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먹을 것이나 들고 오라고 하면 겨우 와서 얼른 받아먹고 얼른 도망가기를 손주가 용돈 뺏어가지고 바로 사라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생명이 충만하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 생명이 가장 충만할 때가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 그때 우리 나이와는 상관이 없이 영혼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까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왜? 우리 모두 꽃 같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사진을 이렇게 보면 ‘아, 정말 예뻤구나, 나도 참 아름다운 때가 있었구나’ 하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육체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은 언제나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만 사랑할 때.
두 번째 영혼이 너무 예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회개할 때입니다. 그때 그 영혼은 아주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깊이 할 때는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더 이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품속으로 들어간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그때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 속에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늙음은 찾아왔고 죽음은 우리의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일일지도 모르고 모레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일이 오늘 저녁에 일어나도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갈 때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생되어 있을 때 우리를 가장 행복한 인생의 여정을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왜? 너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을 뺏어갈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별로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애착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살아있는 영혼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죄에 대해 회개할 때 살아있는 영혼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지루해하면 지금도 그만하자고 하면 축도하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눈빛이 초롱초롱하기 때문에 계속하겠습니다. 요번에 여름에 학생들이 모여서 수련회를 했습니다. 강사가 와서 길게 설교를 했습니다. 강사가 나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사님 가지 마세요. 더 들려주세요. 목사님이 올라와서 20분을 더 설교를 하고 갔다고 합니다. 누가? 중고등부 애들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영혼을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습니다. 죽었다가 확 살아나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구김살이 없는 아름다운 영혼이 된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지워지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렇게 손가락에 깊은 상처가 있는데 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네 살 때 개울에서 유리조각에 배었다고 합니다. 수술을 했는데 시골에서 대충 바늘로 꿰맸습니다.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지는 않으나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다 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사람들은 욕하고 그래도 하나님은 그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으로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시 73;25)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죽은 것 같은 시인의 영혼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왜 그렇게 굳이 살려내셨을까? 그것에 대한 답을 시편 23편 3절 하반절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하나님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그러면 그것이 뭐냐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그것이 우선 하나만 이야기 하자면 ‘의의 길로 인도 하신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의’가 히브리어로 ‘째닥’, ‘째뎈’, 혹은 ‘째다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반대로 생각해서 불의한 길은 의로운 길의 반대입니다. 의로운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어떻게? 옛날에 다윗처럼 그런 짓 하면서 사는 것이 불의한 길입니다. 의로움과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통해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이 불의한 길이고 거기에 합치된 길이 의로운 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합치해서 살 수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다윗같이 신앙이 깊었던 사람도 안 된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까지 세 번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 세 번 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그때 임하시는 성령은 그 받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정결하게 하고 그 기름부음 받은 직무에 합당한 지혜와 충만한 정신을 가득 부어주시는 그러한 요즘으로 말하면 성령의 깊은 체험입니다. 그것을 세 번이나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결국은 불의한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것이 의다’라고 하는 하나만 가지고는 설명은 되는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런 의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또 하나의 의를 준비하십니다. 그것이 은총에 덕 입은 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그 사람에게 덧입혀주셔서 의로운 사람으로 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의는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진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의의 길로만 걸어갔습니까? 의의 길로만 걸어갔으면 영혼을 소생케 하시고 라는 고백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원래 살아있는 영혼이고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인데 무슨 영혼이 다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 펄펄 살아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영혼을 하나님이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셨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니까 그 의는 율법에 합치된 의와 은총에 덕 입은 의가 하나로 말하는 것입니다. 전자를 가리켜서 ‘율법적 의’라고 부르고 후자를 가리켜서 ‘복음적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의미에서 율법적 의는 다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복음적 의는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찬송)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하나님 사랑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눈물이 많았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원망과 시기와 분노의 눈물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깊이 감격하는 눈물, 그것이 의의 길입니다. 그런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영혼을 소생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죽을 때 천당 오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못 받아도 천국은 갑니다. 이 땅에서 잘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부도덕합니다. 그리고 앞뒤가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아예 세상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갖는 인상에 대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욕심이 없음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천주교’ 하면 착함이 떠오르는데 ‘개신교’ 하면 이기적인 것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얼마나 슬픕니까? 누가 보여준 것입니까? 종교가 보여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뇌가 굉장히 단단한 껍데기로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고 나면 속에 들어있는 것은 순두부입니다. 숟가락으로 뜰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단단한 껍질로 보호를 하셔서 길을 걸어가다가 딴 생각하다가 기둥에 머리를 쾅 박아가지고 혹이 거의 숟가락만 하게 튀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뇌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번 부딪히고 나서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헛구역질을 하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만큼 깨져서 심지어 실금이 가도 끄덕이 없습니다. 왜? 이것은 딱딱한 껍질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순두부 같습니다. 이것이 받는 것은 쉽게 받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보관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딱딱한 껍질에 닫아서 보호를 해 주는 역할이 도덕 생활입니다. 올바르게 사는데서 이 은혜가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호되는지를 설명하려면 30분 정도의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들으시고 정리하면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은혜를 깊게 받은 사람은 은혜를 주신 은혜가 크면 클수록 이 세상에서 불법을 저지르지 말고 법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절대로 비난받지 않을 그런 고상하고 훌륭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29년 전에 방배동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두 번 교회를 하려고 하다가 문을 닫고 나간 그 교회 터에서 일곱 명의 교인과 함께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3년 6개월 4년 정도 만에 교회당이 250명 정도 꽉 찼습니다.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고 설교를 하도 길게 하니까 지하실에서 공기는 안 통하는데 설교는 길게 하니까 교인들이 자꾸 졸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뒤에 공기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설교시간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계속 설교를 했습니다. 주일날 설교가 평균 100분이었습니다. 60분에 내려오면 교인들이 오늘 목사님이 많이 아프신가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상에 있는 교회로 세를 얻어서 올라가서 3년이 되어 천 명이 되어서 평촌이라는 곳,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왔습니다. 왔는데 돈이 없으니까 교회 건물을 하나 세를 들어서 가보려고 했는데 교인의 수가 벌써 1300명이었습니다. 1300명이 아이들과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구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있어도 멀쩡한 건물은 교회를 안 주려고 했습니다.
사야 되는데 돈도 없고 교회 지을 능력도 없고 땅 하나가 나왔습니다. 땅을 사겠다고 했더니 복덕방이 그것 아마 못 살 것입니다. 주인이 내 놨다가 그냥 마음이 변해서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래도 주인을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직접 간 것이 아니고 장로가 없었으니까 집사님들이 갔더니 주인이 “땅 안 팝니다. 집어넣습니다.” 그러셨습니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 이 사람들 내가 내 땅 가지고 안 팔겠다고 하는데 왜 이러나? 어서 가쇼.” “아, 그래도 사장님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땅을 팔면 당신들은 뭐하려고 그러우?”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그래요? 교회를 짓는다고요? 무슨 교회요?” “열린 교회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이상하잖아요?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아 이것 무슨 일이 있나보다. 우리 열렬히 기도하자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일주일 뒤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교회를 짓는다고 했지요?” “네.” “가져가시오. 내 땅을 팔테니 가져가시오.” 너무 감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감동을 한 순간에 밀려오는 것이 근심이었습니다. 있는 돈이 통 틀어서 재정이 1500만원 있었고 월세 보증금 5억 있는 것이 교회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했더니 이 땅이 천 평이 약간 안 되고 920 몇 평인데 36억만 주시오.
그 당시로서는 비싼 값도 아니고 싼값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가지고 있으면 계속 올라가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팔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80이 넘으셔서 다 정리하고 싶으셔서 내놨다가 땅이 계속 올라가니까 안 파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팔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계약금 3억 보내시오. 그래서 네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왔는데 3억이 어디 있습니까? 애들 이름입니까? 은행에서 빌리면 된다고요? 은행 같은 소리, 그때 제1 금융권에서는 교회는 상대를 안 했고 상호저축은행에서 이자를 25%를 낸다고 해도 교회는 믿을 수가 없다고 안 해줬습니다. 25%면 30억을 빌리면 1년 이자가 7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인 하나가 목사님 제가 3억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너무 고맙다고 꼭 갚겠다고 3억을 받아서 계약금을 쏴 줬습니다. 그런데 중도금을 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계약금을 쏴 주기 전에 36억에 해 준다고 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건축위원들이 갔다 와서 목사님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뭡니까? 했더니 그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까 한 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은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열린 교회 거기에서 공장을 하셨는데 그 직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60년대 말에 한 경직 목사님이 1년 반 동안 와서 그 직원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장로님이 30억은 계약서를 쓰고 6억은 그냥 현금으로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요즘 장관들 할 때 문제가 되는 다운계약서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연세 드신 집사님들을 다 모아놓고 부동산 하는 분도 있어서 이렇게 되는데 이것 괜찮겠냐고 하니까 80% 이상이 그것 문제가 없다고 대기업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문제 될 리가 없고 하시면 됩니다. 관례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이니까 안 되어서 회계사를 불렀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계약을 하시려면 장부를 두 개를 만드셔야 합니다.” “왜 장부를 두 개를 만들어야 되느냐?” “진짜 장부와 가짜 장부를 만드셔야 합니다. 가짜 장부는 세무서에서 오면 보여줘야 되고 진짜 장부는 꽁꽁 감춰둬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인데 어떻게 그것을 장부를 두 개를 쓰겠습니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그건 안 된다. 왜 안 된다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학습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수 생활을 할 때 학교에서 돈을 많이 빌려줘서 방배동에 42평짜리 빌라를 처음으로 집다운 집을 전세를 얻어서 들어갔습니다. 졸지에 지하실에서 2층집에서 살다가 큰 집으로 이사를 가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살다가 학교를 떠나는데 앞집에 살던 분이 교수 사모님이었는데 우리 집사람을 찾아와서 우리 아들 이름이 영래였는데 “영래 엄마, 내가 기도를 하는데 이 집을 우리 목사님한테 넘기라고 하신다” 그래서 내가 왜 하나님은 넘길 사람한테만 말씀하시고 살 사람한테는 말씀을 안 하시냐? 그랬더니 자기 집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없다고 하니까 해달라고 다 해 줄테니까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돈을 다 긁어서 샀습니다. 우리는 사고 그분들은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문제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세무서에 갔더니 세금이 얼마냐고 했더니 이야기를 하는데 그 조그만 집하나 샀는데 세금이 너무 비싼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무슨 세금이 이렇게 비싸요? 하니까 직원이 이렇게 보더니 아줌마 너무 많은 것 같으면 반만 내세요. 그래서 무슨 법이 또 그런 것이 있냐 했더니 “1억 2천인가에 산 집인데 그냥 값을 좀 깎아서 9천만 원 주고 샀다고 그렇게 써가지고 오세요” 우리 집사람이 집에 와서 “여보, 이렇게 하면 세금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그것이 말이 되냐? 집사하고 목사하고 둘이 앉아서 그것을 가짜 계약서를 쓰고 세금을 떼어 먹냐? 로마서 16장에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 국세를 다 내야지” 그래가지고 우리 아들 저금통까지 깨서 간신히 세금을 다 가지고 갔습니다. “계약서 다시 써가지고 왔어요?” “아니오” “아니 왜요?”“그냥 다 내려고요” 할 때 그 직원이 우리를 “어우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구나” 이렇게 쳐다봤겠어요? ‘어휴, 병신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주고도 존경을 별로 못 받는 사회였습니다. 그때 학습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는 안 된다. 이중장부를 쓰는 것은 이중 계약서를 쓰는 것과 똑같지, 내가 교회를 안 지으면 안 지었지 참되게 살라고 피를 토하면서 설교를 하고 자기는 가서 가짜장부를 만들어서 그것을 세금을 탈루를 하겠습니까?
그 할아버지한테 가서 그렇게 말해라 우리는 그렇게는 못 한다 하고 그 할아버지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땅을 너무 싸게 사서 초토 세라고 있었습니다. 초토 세를 물고 은행 빚을 갚고 나면 자기가 이 토지를 청산하는데 돈을 1억인가 2억을 보태야지만 청산이 된데요. 내가 교회를 생각해서 이 토지를 물려줄 수는 있지만 내가 돈을 여기에다가 부으면서까지 이 토지를 정리할 수는 없지 않느냐? 세금이 얼마입니까? 했더니 3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36억만 달라고 하는데 우리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39억 드리겠습니다. 36억 달라는 교회를 39억 주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이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사는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덕분에 사업하는 사람들이 세무감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사업을 하는데 병원을 하는데 거의 환자 수하고 수입이 비슷합니다. 이 사람들은 전부다 3천만 원을 세금 신고를 하는데 이 사람만 6천만 원을 신고를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면 세무서에서 좋아할 것 같죠? 표창장 줘야 하잖아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한테 자기가 세금을 잘못 부과했다는 것을 이 사람이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당사관이 와서 다퉜습니다. 1년 치 2년 치 서류를 모두 뒤집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의 정의의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너 잘난 척 하느냐는 것입니다. 치과였는데 다 뒤지고 나니까 20만 원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까?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답니다. 죄송합니다. 하니까 갔다고 합니다.
세상이 불의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 불의한 세상에 의로운 길을 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죄를 짓고 불의한 길을 걸어가면 은혜는 금방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자기에서 은혜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정결한 맘, 그곳에서 신령한 빛 빛이 오니 이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맘 주옵소서. 찬송가에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왜 그렇게 오 정모 사모님처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김일성이 보내온 궤짝을 점잖게 보내면서 성의는 고맙지만 우리는 이런 것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결코 굶겨 죽으시지 않으신단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라.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이 강대에서 ‘올바르게 사십시오.’라고 설교를 하는 것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설교한대로 살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성도나 목사나 마찬가지로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철저하게 세금을 냅니다. 교역자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법으로 정해지지 않았을 때 정해지기 약 12년 전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제가 판단을 하고 세무서에 가서 우리 수입이 있는 한 다 세금을 걷으라고 했더니 세무서에서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왜 안 내도 된다는데 유별나게 내려고 하느냐? 우리 목사님이 반드시 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봐 준다는데 왜 그러느냐? 그래가지고 첫해에 교역자 월급을 모두 걷으니까 세금이 6천 8백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6천 8백만 원 어치를 모든 교역자들에게 월급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왜? 부목사님들 생활비를 그때 꽤 많이 줬습니다. 그런데 왜? 무직자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치원도 공짜로 들어가고 어린이집도 공짜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가난한 사람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이잖아요? 자기네는 그래도 중 하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차도 가지고 다니고 그렇게 사는데 진짜 가난한 사람은 그 아이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것이잖아요? 그것이 공평의 원칙이냐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럼 우리 임대아파트에도 못 들어갑니다.” 못 들어가도 그것이 정의다. 수입이 있는데 있는 것을 정직하게 신고를 해야지 그랬더니 그 다음에 나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회자는 무직자 취급을 했습니다. 신용카드도 절대 안 만들어줬습니다. 그런데 신용카드 만들어주지 의료보험 되지 그다음에 국민연금 보험 되지 돈 필요하면 빌려가라고 맨날 팩스도 날아오고 문자도 날아오는 것입니다. 왜? 확실한 수입이 있다는 것이 세무서에 입증이 되니까 은행에서 그 자료를 보고 서로 돈을 빌려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기 때문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받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 소생된 영혼이 아니면 굳이 그렇게 힘든 인생을 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한눈 깔고 한풀 접고 한풀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면 얼마든지 편하고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성경에는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성함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은 영향을 안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개 한 마리가 있다고 칩시다. 한참 자다가 이 개가 봄날에 마당에서 처마 끝에서 졸다가 개꿈을 꿨습니다. 눈을 떴더니 정오의 햇빛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저놈이구나 하면서 그 해에다 대고 막 미친 듯이 개 거품을 물면서 막 짓는 것입니다. 태양의 밝기에 변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생난리를 치면서 살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을 해도 하나님은 전혀 영향을 안 받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자기 갈 길을 가십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지옥으로 가고 의로운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형통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그것으로만 끝나면 더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당신이 이 땅에 두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분신처럼 두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가 없는데 이름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인이 한 사람 왔습니다. 부산 사랑교회라는 데서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왔느냐고 하니까 부산 사랑교회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 교회가 어디에 있냐고 하니까 부산 서대신로 어디에 있다고 하니까 아, 그러냐고 온 교인이 정말 처음에 반갑다고 정말 신앙생활 잘 할 것이라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몇 년 전에 한 자매가 그 교회에서 왔는데 너무 순수하게 대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너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번도 부산 사랑교회에 가 본 적이 없는데 그 자매를 보면서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신앙이 좋은 자매가 우리 교회에 와서 저렇게 은혜를 받고 봉사하는 것을 보면 그 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이다. 부산 사랑교회는 부산에 있는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은 이 경리 단 길에서 그 교회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은 하늘에 계신데 이름은 땅에 두신 것입니다. 이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예인데 이것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인격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 건너편 고개 넘으면 후암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2년 섬긴 교회인데 섬기다가 제가 열린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그 교회를 세우신 분이 김 예진 목사님입니다. 순교사입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야비하게 총구에 짓이겨서 고문을 받으시고 시키는 대로 하면 너를 더이상 때리지 않겠다, 내 딸은 갈보요 나는 미국 놈의 앞잡이였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라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우리 딸은 그런 여자가 아니요.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총구로 가슴을 난장판으로 짓이겼습니다. 광주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분이 여기에서 목회하셨습니다. 해방촌이었습니다. 달동네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집회를 가십니다. 집회를 가면 부자 교회는 돈을 조금 줬겠죠. 가난한 교회는 닭도 주고 쌀도 주고 그럽니다. 자기 집도 가난한데 집으로 안 가시고 그것을 다 싸들고 해방촌으로 심방을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교인 집에 들러서 자기보다 더 가난한 교인을 찾아서 자기가 얻은 쌀도 주고 닭도 주고 생선도 주고 기도하면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 삶을 일평생 살다가 순교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분이 정말 훌륭한 분이다라는 그것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저분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실까?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누구한테 영광을 돌립니까? 저분을 목회자로 불러주시고 저 분에게 이런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신 사람이 저렇게 아름답다면 저분을 그렇게 사랑하고 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이실까? 그 때에 그 목회자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동네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나오지만 내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한다고 나오는데 동의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서 누가 막 욕을 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편안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사실이 아닌데 그럴까요? 아니면 달려가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겠어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이름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보장하는데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잘못 알았습니다. 변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말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렇게 하늘의 모든 자원과 땅의 모든 자원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길을 통해서 걸어감으로서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아름다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겠구나,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병든 영혼을 고치시고 굶주린 영혼을 먹이시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소생해야 될 때가 아니겠습니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삶의 문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눈감는 그 순간까지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자녀로 불러주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 소명은 우리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명입니다.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구원해 주셨습니까? 왜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거기에 불러주셨습니까? 일생동안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고 위기의 때에 건져주시고 시련의 때에 여러분들을 붙들어주신 하나님의 이 위대한 권능과 은혜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당신의 영광의 이름을 위하여 자랑스러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에게든지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구원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소명을 따라 살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생하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자던 자여 이제 깰지어다’ 이제는 더 이상 잠들지 마십시오. 늘 깨어있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찾으십시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소생함을 입어 여러분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의의 길을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