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들(2022.10.28._용산대성교회집회 저녁3)
5. 불꽃으로 사는 길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
녹취자: 김경애
이제 드디어 시편 23편의 끝자락에 오게 되었습니다.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축포를 쏘면 소리는 크게 나는데 희미한 연기를 내면서 작은 불꽃이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터집니다. 그리고 찬란한 불꽃을 발하면서 아름다운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되고 불꽃은 거기서 끝납니다. 시편 23편 5절이 바로 그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지점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고,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신다고 설명한 후에 마지막 6절에서 미래를 향한 자신의 결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여기서 문맥이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잔칫집에서 잔치가 끝나고 하객들이 신랑신부를 축하하면서 손에 든 잔에 포도주를 가득가득 담고 서로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기쁨을 시인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이던 시절인데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학생 하나가 은혜를 많이 받고 꽃다발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죽어가던 영혼을 교수님이 말씀으로 살려 주셨다며 꽃다발을 선물하며 친구와 같이 왔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인테리어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의 큰 회사의 회장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인이시고, 미술을 전공했고 남편이 큰 회사를 경영하는데 얼마나 남편이 사랑해 주는지 남편하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유럽으로 출장을 가고 지금이야 유럽 가는 것이 일도 아니지만 그때가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쉽지 않았습니다. 미술관을 다니고 인테리어 제품을 만들기 위한 견학을 하면서 남편에게 미술 전문가로서 조언도 해주고 그렇게 사는 부부였고 남편이 아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교회의 목사님이 모든 교인들이 시기할 정도로 그 여 집사님을 예뻐하셨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충성스럽고 교회에 늘 봉사하고 심지어 남편이 회장님이니 교회에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목사님이 미워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습니다. 심방을 오셔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집에 심방을 가셨으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복을 비셨을 것입니다. 심방이 다 끝났는데 자기도 모르게 목사님 앞에 가서 목사님의 앞섶을 붙들었답니다. 그리고 펑펑 울었는데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답니다. “목사님이 저를 그렇게 사랑해 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축복을 많이 하셨지만 목사님 저는 지금 마음이 텅 비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목사님 앞섶을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지만 심방을 하다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목사님도 너무 당황하고 그렇게 상황이 끝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약간 갱년기 우울증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독특한 케이스였습니다. 자기가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그러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근심거리는 없답니다. 그런데 돈도 많고, 남편도 너무 사랑해 주고, 교회에서도 사랑을 받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데 딱 하나 흠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온 몸속에 여기저기 혹이 나는 것입니다. 원인도 알 수 없답니다. 장에서 떼어내고 위에서 떼어내고 하면서 계속 수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짝 마른 것입니다. 그러던 끝에 제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학생이었으니까 강의를 들으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게 되며 예전에 왜 그랬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빈 잔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만 채워질 수 있는 잔입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인간은 무엇을 가져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도 14조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재벌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살을 했겠습니까? 신문기사를 읽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습니다.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영혼은 미친 듯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헤르만 바뱅크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참 불가해한 존재다.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것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야 하는데 그 영혼이 허할 때 결국 영혼의 병든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오늘날에 이런 쾌락 제일주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이런 문화 그리고 미친 듯이 먹으러 다니고 구경하러 다니는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뒤바꿔서 미친 듯이 퍼먹는 먹방, 매일 맛집을 찾아서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돌아다니고, 여행이나 다니고, 그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것은 자신의 영혼의 허함을 메꾸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수유리를 아십니까? 수유동이라고 강북에 있는데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는데 구급차도 아니고 택시에 누가 실려 왔습니다. 건장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남자를 메고 와서 지금 방금 쓰러졌는데 정신이 없으니 선생님이 살려 달라 하니 응급실에 눕혔습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운명하셨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 환자분도 까만 양복을 입고 까만 넥타이를 매고 와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나가고 유족들이 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의사생활을 20년 이상 했는데 이런 기묘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을 처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손을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힘이 떨어져서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이쪽 손은 폈는데 이쪽 손은 쥐고 죽은 것입니다. 참 이상하다 하며 사람들이 나가고 난 뒤 이 사람이 죽은 것은 안됐지만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의사가 새끼손가락부터 펴보았습니다. 화투 2장이 툭 떨어집니다. 화투 한 장은 뒤집히고 한 장은 엎어져서 궁금해서 그 화투를 폈더니 3, 8광땡이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신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너무 신기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 양반이 상갓집에 와서 밤새도록 화투를 치다 보면 남자들은 그날 누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인 목적 자체가 위문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때 한번 실컷 화투를 쳐보려고 온 것입니다. 저는 화투를 치지 못하는데 도리짓고 땡인가 뭔가 랍니다. 계속 돈을 잃었습니다. 새벽이 되었는데 판돈이 깔렸는데 3, 8광땡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사를 해보니 왜 3, 8광땡이 들어오면 그렇게 충격을 받은 일인가 했더니 설명을 들으니 화투를 5장씩 준답니다. 3장을 묶어서 패를 맞추고 나머지 2장을 가지고 랭킹을 겨루는데 규칙이 복잡했습니다. 1자가 2장 들어오면 1땡이고, 2자가 2장 들어오면 당연히 2땡이고 올라갑니다. 8땡, 9땡 올라갑니다. 8명이 화투를 친다면 ‘어떻게 할 거냐?’ 자기는 아무래도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으니까 “나는 포기하겠다.” 나는 해볼만 하다면 낸 돈만큼 돈을 더 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중 한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빠지겠다.” 나머지 사람이 또 돈을 더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번, 5번씩 걸 수 있답니다. 판돈이 보통 때보다 3배 내지 4배가 커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일어서는데 딱 보니까 3자하고 8자가 나온 것입니다. 무엇이냐? 너무 좋아서 쇼크를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 아이들이 ‘우리 아빠는 어떻게 돌아가셨어?’ 하면 그 아내가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으셨는데 여러분들은 뭐가 다릅니까? 세상에서 살면서 뭐가 다릅니까? 요만한 화투를 가지고 보다가 충격을 받고 쇼크로 죽었는데 여러분들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강남의 땅문서, 오피스텔 문서, 회원권, 수표 그런 것을 가지고 울고 웃고 심지어 사람을 서로 해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돈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의 인생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변심을 하게 됩니다. 옛날의 그 일을 새카맣게 잊고 다시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육신을 위해서 살던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는 SNS하지 않습니다. 하다가 하다가 두 달 전에 카톡을 개통했습니다. 카톡을 하지 않으니까 관공서 가서도 일이 안 되고 음식점에서도 음식 나왔다는 문자가 안 옵니다. 그래서 지조를 꺾고 카톡을 개통했는데 그것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날 가서 사진 찍습니다. 그 사진도 그냥 거기에 나온 대로 그렇게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그것을 점 빼고 색칠하고 심지어 앱에 들어가면 아예 얼굴도 길게 해주고 눈도 동그랗게 해주고 키도 크게 해주고 어깨는 줄여주고 허리는 줄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다 있습니다. 그런 앱에 들어가서 다 해서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여러분들이 가끔 보지만 그런 것에 몰두하다 보면 자기 진짜 인생과 꾸며낸 인생 사이에 경계가 불분명해집니다. 수백만 명의 팔로우를 거느리고 있던 호주의 인플루언서가 어느 날 고백했습니다. ‘모든 사진은 다 가짜다.’ ‘내 얼굴도 가짜다.’ 그렇게 커밍아웃을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그렇게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비의 즐거움, 쾌락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빠지면서 사람들이 영혼의 빈 잔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내 잔이 넘친다고 말하는 것은 넘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살면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습니까? 이런 단어를 쓴 적이 있으십니까? 기쁨, 환희, 감격, 희열, 감동 이런 단어들이 우리에게 낯선 단어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들이 물건을 소비하면서 느낄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감동, 아무리 많이 기뻐해도 결코 공허해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꽉 차오르는 환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주시는 영혼의 만족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때문에 이 빈 잔이 가득 채워져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웃음이 없습니다. 너무 우울합니다. 언제 한번 배꼽이 빠지도록 그리고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오도록 웃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를 믿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건을 써본 사람이 그 물건에 대해서 아주 만족하고 칭찬할 때 다른 사람들도 물건을 사고 싶을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삶을 살 때 그 때 복음이 팔리는 것입니다. 말은 안 해도 나도 저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전도입니다. 그렇게 불안한 사람들에게는 평안을 보여주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위로받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꽉 찬 상태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은혜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언제? 왕이 되었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쾌락을 즐겼을 때?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겼을 때? 아닙니다. 언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부어주셨을 때 자신의 영혼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없는 만족의 삶을 살 때 그때 이 시인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시인은 특별한 이렇게 기쁨을 누리며 환희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주께서’ 라고 나오는데 원래 히브리어성경에는 ‘당신이’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번역할 수 없으니까 주께서 라고 번역했는데 ‘당신이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므로’ 내 영혼의 빈 잔이 꽉 차서 넘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위험은 허무입니다. 허무는 절망과 통합니다. 그런 허무감 때문에 인간들이 수없이 많이 자살하고 정신병의 증세를 보이고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 합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단단하게 마음을 챙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성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갱년기가 됩니다. 반드시 한 번쯤 마음에 감기가 옵니다. 그 감기 때문에 영혼이 못 일어날 수 있습니다. 노년에는 노년의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남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튼튼한 멘탈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시인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감격을 누리게 된 것을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는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번역이 차분하게 돼서 오해를 안 하는데 옛날에는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많은 교인들이 그 상을 학교 졸업식에서 받는 상으로 오해했습니다. Prize로 오해했습니다. 이 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숄함’이라는 단어인데 식탁입니다. 상 중에서도 밥을 먹는 식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밥을 티탁자 같이 야트막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밥상이었습니다. 소파 같은 데에 비스듬히 걸친 채 다리를 꺾고 밥을 먹는 것이 그 당시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테이블입니다. 그러면 그 상을 베푸셨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큰일이기에 시인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감격하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식사에 대한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지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는데 동양문화권의 경우 성경이 쓰인 이스라엘도 사실은 넓게 보면 서양이 아니라 동양 문화권에 속합니다. 그 문화권에서 보면 거의 비슷한데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형제 됨이라는 요소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우리 양반과 상민이 있었는데 여행을 하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양반이 상민과 함께 한방을 쓸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양반과 상민은 결코 겸상을 하지는 않습니다. 한상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먹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인 신분과 위계질서입니다. 옛날에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 계실 때 당신이 시집을 왔는데 온 식구가 27명이었다는데 그 식구들이 모두 한군데서 밥을 먹습니까? 그런 방이 시골에 있지도 않았거니와 예법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이 여러 개가 각 방에 있습니다. 안방에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도 못 들어가고 아빠가 들어갑니다. 내가 나이가 어리면 거기에 깍두기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반찬도 다릅니다. 그 다음 건넌방에 엄마, 고모, 삼촌의 밥상이 차려지고 며느리의 밥상은 마루에 차려집니다.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부엌에 멍석을 깔고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올라가고, 내가 올라가고 승진하는 것처럼 구조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동양문화권의 식사에 관한 예절입니다.
지금은 선교를 가기 전에 선교지의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갑니다. 옛날에는 아예 그런 문법이 정리가 안 되어서 만약에 중국 같은 경우에는 지금도 53개의 종족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보통화를 쓰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중국말이 통하지만 옛날에는 53개 종족이 각각 다른 말을 씁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 소수민족에게 선교를 가려면 할 수 없이 선교사가 무조건 거기를 들어가야 합니다. 왜? 언어를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습니다. 들어가서 손짓, 발짓하면서 자기가 ‘이렇게 먼 나라에서 왔는데 당신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 온 몸으로 바디랭귀지를 하면 소통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외국 사람이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왔으니까 동네 촌장들이 장시간 동안 회의를 합니다. 이 이방인을 받아들인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회의를 하고 결국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활짝 웃으면서 나와서 맞이하면서 ‘당신들이 여기서 살아도 좋다.’
그리고는 이제 마을회관 같은 곳에 모여서 잔치를 합니다. 가보니까 이 서양문화권에 있던 선교사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나옵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처녀총각이 결혼하면 빠지지 않는 잔치요리가 있는데 그것은 뱀국입니다. 큰 뱀을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국을 끊여서 그것을 먹어야지만 하는데 우리로 말하지만 잔치국수입니다. 그런 음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을 수 없습니다. ‘웩’하면서 못 먹을 것 같다고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입니다. 끌려갑니다. 결국 죽이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선교사는 자기가 왜 죽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이제 너를 우리의 형제로 받아주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 형제의 제안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같이 살고 싶어 하면서 형제가 되기는 싫다는 것은 스파이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여행을 가서 현지인들과 아주 친해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엇이든지 주는 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거의 호들갑을 떨면서 너무 맛있다고 하면 좋아합니다. 입장을 바꿔보십시오. 외국인이 왔는데 김치와 된장찌개를 주었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웩하고 토하면 그 사람과 친해지겠습니까? 김치를 주면 맛있다고 하고 고추장을 먹으면서 혀를 내두르면서 맵기는 한데 결코 멈출 수가 없다고 하면서 퍼먹는 사람이 예쁘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형제 됨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고생을 많이 하던 끝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어쨌든 삼촌재산을 많이 빼앗았습니다. 딸들과 함께 아이들을 거느리고 도망을 칩니다. 걸렸습니다. 아들들과 함께 미친 듯이 따라잡아서 붙잡았습니다. 죽이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지 말라.’ 야단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까 라반이 ‘왜 그랬느냐? 너희를 축복해서 보내려고 했는데 왜 그렇게 인사할 새도 없이 도망을 갔느냐?’ 며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을 같이 먹는 것입니다. ‘증거의 무덤’이라는 돌무더기를 쌓으면서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서 내가 너를 추격하지 않겠다며 호의를 베풀면서 끝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서 탈출해서 광야로 갑니다. 그때 제사를 드리는데 화목제를 드리면 화목제의 절기의 음식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합니다. 제기동이라는 곳에는 선농단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과 백성들이 모두 나와서 기우제를 드립니다. 기우제를 드리면서 소를 잡습니다. 각을 떠서 국을 끊입니다. 임금과 백성들이 똑같이 그 제사 드린 소를 끊여서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농탕인데 나중에 설렁탕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것이 동양문화권이나 어디나 다 음식이 이렇게 형제 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희 선생님은 왜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다.’ 며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시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그 광경이 너무 놀랍고 충격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감히 그런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과 밥을 먹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당신이 그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식사라는 방법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남기고 가신 것도 똑같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시면서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분부를 본받아서 사람들이 와서 지금처럼 요만한 떡을 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유언을 받들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먹으면서 같이 떡을 떼고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이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사서 가운데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The water is thicker than blood.’ ‘물은 피보다 진하다.’ 여러분들은 거꾸로 알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어쩔 수 없이 핏줄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것은 그 물은 세례를 받는 물입니다. 그 물은 육신의 핏줄의 피보다 훨씬 진하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형제들의 사랑이 육체의 핏줄로 태어난 형제보다 더 뜨겁다는 것을 그렇게 아름다운 말로 묘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그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물은 피보다 진하다.’ 여러분들도 물이 피보다 진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뒤로 넘어오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갇혔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교회에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 그리하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또 먹는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나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인데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생명의 관계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식사라는 것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라도 쪽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갔는데 그때는 부흥회도 무식하게 새벽에 하고, 또 아침에 해달라고 해서 아침에 하고, 또 밤에 해달라고 해서 밤에 하고 사람을 한번 불러다가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는 젊었을 때인데 새벽에 기도하고 저도 기도를 한두 시간하는데 자꾸 뒤에 와서 장로님들과 목사님이 오셔서 기침을 합니다. 기도는 그만하고 빨리 아침을 먹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가서 아침을 먹습니다. 아침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서 바로 옷을 갈아입으면 오전 집회를 해야 합니다. 오전 집회를 하고 나면 가까이서 먹고 들어가서 쉬었다가 저녁때에 나왔으면 좋겠는데 굳이 좋은 것을 대접한다고 또 차를 타고 갑니다. 숙소에 돌아오면 3시 반인데 5시 반이 되면 또 밥 먹으러 가자고 와서 기다립니다. 고역이었습니다. 그때에 어느 장로님이 진짜 좋은 한식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라도는 원래 맛집이 많습니다. 40분을 차를 타고 데려가서 6명이 앉아서 상을 받아서 조금 먹다가 지쳐서 쉬면서 궁금했습니다. 전부 사기그릇에 담아서 반찬이 나오는데 그릇이 몇 개가 나오는지 봤습니다. 뚜껑이 있으면 2pc입니다. 세었는데 180개까지 세다가 포기했습니다.
여기에서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라고 했는데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성경을 가슴에 안고 한참을 울먹였습니다. 그것은 ‘차려주시고’ 라는 동사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 ‘아라크’라는 단어는 군대용어로 많이 쓰였습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을 ‘아라크’라고 하고 병이나 기구 같은 것들을 나란히 쭉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라크’라고 하고 오늘 여러분들도 ‘아라크’하는 동작으로 단정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밥상을 보면 대접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딸이 하나밖에 없는데 결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너무 좋아서 ‘그래 네가 제 나이에 시집을 가는구나! 너무 좋다. 그래서 누구냐? 한번 데리고 와봐라.’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왔는데 엄마 아빠가 봐도 한눈에 이 사람은 아닙니다. 한눈에 직업이고 뭐고 무엇을 보아도 별 볼일이 없고 이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지마라. 네가 아직 나이가 많이 든 것이 아니니까 좀 더 찾아봐라.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꽂혔습니다. 콩깍지가 씌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는데 자기 인생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결혼하라고 허락했습니다. 결혼하는데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사연이 많았지만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다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전화했습니다. ‘엄마 신혼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퉁명스럽게 ‘그래 알았다.’ ‘엄마 우리 내일 인사 갈 거예요.’ ‘그래 와라.’ ‘엄마 우리 점심때 갈 테니까 밥 줄거지?’ ‘그래 알았다.’ 그러면서 툭 끊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신랑이 배고프다고 밥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신부가 ‘자기야 걱정하지 마. 조금 있으면 엄마한데 갈 건데 엄마가 엄청나게 많이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릴 거야. 우리 조금 더 굶었다가 속을 비우고 가서 마구 먹자.’ 그러고 남편과 함께 선물 하나를 사가지고 집으로 온 것입니다. 틀림없이 지금쯤은 지지고 볶고 냄새가 나고 왁자지껄할 줄 알았는데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어 ‘엄마 우리 왔어.’ 그리고 갔는데 아무 소리가 안 들립니다. 엄마가 베개 베고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 왔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왔냐?’ ‘아빠는?’ ‘아빠는 볼일이 있다고 나가셨지.’ ‘장모님 세배를 받으십시오.’ ‘세배는 뭐하나?’ 세배를 합니다. ‘엄마 우리 점심 줄거지?’ ‘그래 먹고 싶으면 주마’ ‘우리 배고파 빨리 밥 줘!’ ‘그래’ 그런데 이 딸의 느낌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엄마가 반찬을 많이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나보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요리를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셨나 보다 하며 기다렸는데 엄마가 밥을 해준다고 나갔는데 1분 만에 밥상을 들고 왔습니다. ‘배고프지? 먹어라! 자네도 들게!’ 하며 밥상을 가져왔는데 귀퉁이 떨어진 소반에다가 먹다 남은 밥 두 그릇하고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를 가지고 그 밥에 물을 부어서 가지고 왔는데 놓는데 상을 너무 세게 놓는 바람에 물이 튀었습니다. ‘차린 것은 별로 없네만 많이 드시게!’ 그런 밥상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밥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싫어 왜 왔니? 우리 딸이 너와 엮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결혼은 했지만 나는 자네를 사위로 생각할 수 없네.’ 거기에 수많은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50대 초반의 부인 한분이 부천에서 안양의 열린 교회까지 왔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어쨌든 자기의 고백으로는 이 교회에 와서 자기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교역자회의 시간에 교역자에게 보고가 올라오는데 ‘목사님! 아무개 집사님이 계시는데요!’ ‘그분 나도 알아.’ ‘그분이 목사님에게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답니다.’ 굳이 시간을 내면 되니까 안 된다고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집에서 밥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해라.’ 왜냐하면 저는 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압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하고 42년이 지났는데 반찬이 왜 이러냐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여자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냥 말없이 제가 차려먹는 주의입니다. ‘양말 어디 있어? 내 와이셔츠?’ 이런 이야기를 42년 동안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했습니다. 바지가 뜯어지면 세탁소에 가서 꿰매든지 아니면 내가 바늘로 꿰매든지 했습니다. 왜? 자기도 바쁘고 기도도 해야 하니까 될 수 있으면 폐를 안 끼치려고 하고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부부사이가 안 좋으냐? 하면 아닙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벼운 말다툼을 한 것이 25년 전입니다.
‘밥을 한다고 합니다.’ ‘안된다고 해라. 그냥 갈비탕이라도 좋으니까 그 집 근처에서 먹고 가서 예배만 드리도록 하자.’ ‘네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래도 집에서 밥을 하겠답니다.’ ‘안된다고 해라.’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꼭 밥을 집에서 대접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할 수 없어서 알았다고 하고 심방을 갔습니다. 2층 방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본인과 언니 두 사람도 오고 그러면서 자기가 은혜를 받은 간증을 하면서 그렇게 감격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식사 하셔야죠?’ ‘그럽시다.’ 약 20분 뒤에 소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상이 들어오는데 상을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이 들고 들어오는데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큰 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요즘에 그런 상을 구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음식이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상인데 꽉 찬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상했습니다. ‘아니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한번 먹으면 끝나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하느냐?’ ‘목사님 이 상을 차리기 위해서 한 달을 준비했습니다.’ 한 달 전에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검토하고, 열흘 전에 김치를 담그고, 일주일 전에 무엇을 하고, 삼일 전에 무엇을 하고, 마지막으로 전날에 언니 두 사람을 부르고 도와줄 집사님을 불러서 네 사람이 요리를 해서 모든 것을 데울 것은 데우고 새로 할 것은 새로 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정성을 드려서 하느냐? 이 음식을 차리는 시간에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 뭐 하러 이렇게 하느냐?’ ‘목사님 성경도 읽었고 기도도 했습니다. 여러 소리하시지 말고 드세요.’ 이것이 반찬이 두벌 세벌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씩 놨는데도 양쪽에 꽉 찬 것입니다. 도저히 젓가락을 아무리 뻗어도 사정거리에 닿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 앞에서 앉아서 무릎을 꿇고 반찬을 날라다 줍니다. 이게 제가 태어나서 먹은 최고의 식사였습니다.
집에서 요리하고 그 식탁을 차려서 내놓았습니다. 이 시인이 받은 밥상이 쪽 소반에 담겨진 찬밥에 물 말은 밥과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가 아니라 아라크의 밥상인 정찬입니다. 훌륭한 요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런 밥상을 차려서 네 귀퉁이의 줄로 묶어서 하늘에서 내려 보내셨나 봐요.’ 자기의 마음의 감격을 표현하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자신의 대우가 분에 넘치는 대우였다는 것을 지금 그렇게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정성을 기울여서 차려진 아름다운 식탁이 놓여있는데 그 식탁을 누구에게 베풀어준 것입니까? 원수앞에서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원수라기보다는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고 있던 그때에 그 원수들이 모두 보는 눈앞에서 하나님이 보란 듯이 아주 화려한 식탁을 차려 주시면서 이 다윗과 나의 관계는 이렇게 상을 차려 주고 겸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다. 너희는 함부로 이 다윗에게 손대지 말라. 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나에게 도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상을 내게 베푸시고’ 라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상은 못 받아 볼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 기울인 밥상 그것을 하나님이 시인에게 차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교제입니까? 가족으로서의 생명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은혜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이런 밥상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밥상을 차려 주십니다. 정말 지쳐서 인생을 살다가 너무 힘들면 숨 쉴 기운이 없습니다. 이제는 기가 막혀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말씀의 식탁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식탁에는 아주 들어보지 못했던 진기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양식처럼 차려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만나를 받고 감격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150만 명에서 250만 명은 될 만한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약에 먹을 것을 조달한다면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만나였겠지만 지겨웠을 것입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고 꺼이꺼이 울다시피 하면서 애굽에 있을 때는 참외도 먹고 마늘도 먹고 그랬다고 광야에서 고기도 못 먹는다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변심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인생의 벼랑 끝까지 가 있고 우리가 완전히 궁핍해서 죽을 것 같은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그 음식을 먹고 그것으로써 우리의 영혼에 위로와 힘을 얻게끔 해주셔서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말씀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이 시인은 그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리고 고통 받고 괴로워하던 그날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잔이 차고 넘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로부터 받는 밥상 영적인 밥상입니다.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은 우리 돈으로 사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돈으로 사먹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도 맛있는 저녁을 사주셨는데 돈만 있으면 사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이 말씀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주면 책은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야 합니다. 사다가 쌓아놓아도 괜찮습니다. 작가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출판사가 계속 돌아가니까 권장할 만한 바입니다. 쌓아놓았다가 폐지로 팔아도 출판문화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식이 되려면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자신의 갈급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밥상입니다. 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예화를 들었던 그 자매의 경우에는 육체적으로 먹을 것이 너무 풍성합니다. 거의 준 재벌의 집안입니다. 없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잔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너무 곤고하고 괴로우니 통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들어가니까 마음의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내 잔이 넘친다고 감격했던 이유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참된 만족은 세상으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 믿은 사람이 다 행복합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행복한데 교회에 왜 안 나옵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를 믿었지만 잘 못 믿으면 차리라 예수를 안 믿을 때보다도 더 불행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을 모를 때는 아예 이런 빈 잔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술 한 잔에 시름을 달랠 수 있었고, 다이아반지 하나에 한 달을 행복할 수 있었고, 강남아파트 하나에 일 년쯤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마음의 회포가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채워지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무엇인가를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을 추구하고 살고 그 즐거움에 빠져서 영혼의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몸부림치지만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허무감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미친 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철이 빨리 들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만족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드십시오. 그러면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허무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해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가? 오늘이라는 내게 주어진 이날들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아멘.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의 식탁을 받으면서 영적인 생명이 충만해졌을 때 그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면서 환희와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인생의 목자이십니다.’ 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입니다.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 기름은 감람유 올리브입니다. 올리브유를 가지고 사람에게 붓는 것인데 이것을 그 당시에 기름부음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움직이는 세 가지 아주 중요한 직분이 있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이 세 직분을 받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왕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하면 자기가 왕인데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세상 왕의 개념은 일단 이 나라의 왕이 되면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재산이 다 내 것입니다. 그것을 소위 이야기하는 가산제국가라고 합니다. 왕의 소유가 되는 것이고 정권을 얻은 순간 땅의 모든 소유 심지어는 백성들의 목숨까지도 자기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한데 그것을 얻어서 쓰면서 사는 것이 국가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이 아니라 진짜 왕은 하나님이신데 왕의 임무는 자기는 명목상의 왕이고 진짜 왕은 하나님이신데 자기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질서대로 나라를 다스려서 자기 마음에 기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기쁜 나라로 만드는 것이 왕의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셔서 자손들이 복을 누리고 번성하게 하셨지만 이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라를 망하게 하시거나 왕을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것이 왕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무엇이냐 하면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아야지만 이 마음에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에 자기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그 은혜의 힘으로 현실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인간은 늘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이 불결한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제도인 제사를 가지고 죄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주고 기도해줌으로써 이 사람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잠시나마 교제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은혜를 받으면 그 힘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무슨 임무입니까? 제사장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이었습니다. 항상 제사장은 사람 편에 서서 하나님께로 나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 속에 쭉 내려오는 전통이 이 제사장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맥락도 없이 툭 나타나서 ‘너희 그렇게 살다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망할 줄로 알아라. 하나님이 너희를 매우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눈앞에 다다랐으니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역병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리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사는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당시의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와서 모세오경을 기준으로 놓고 자기시대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마치 물을 때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 시대 사람들은 ‘모세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설교했던 사람들이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 모두 이 임무가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 개의 직임 office라고 하는데 그 세 개의 직임이 마치 솥을 올려놓은 가마솥의 밑을 받치고 있는 솥발과 같습니다. 두 개로는 설 수 없습니다. 하나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세 개는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느 일이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여전도회장 한번만 해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부서 하나를 맡거나 담임목사를 하면 어렵습니다. 부목사일 때는 안 그랬는데 담임목사가 되니 갑자기 흰머리가 막 났습니다.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물며 왕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사장이, 선지자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름을 붓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부을 때 그때에 하나님이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놀라운 지혜와 열정과 순결함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경륜이 서로 달랐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다음에 약속을 따라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시면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면서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면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고 불순종하고 은혜생활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성령이 고갈됩니다. 거의 불신자와 다름없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성자처럼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미워하는 사람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달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님이 그렇게 우리 가운데 언제나 충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게 하신 후에 성령은 다시 떠나십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불순종하고 악을 행할 때 진노의 표현으로 성령이 떠나시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다윗의 전임자였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실 때 충만한 성령을 받았는데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기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고 이렇게 선을 넘다가 결국 교만의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정신병자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다 보았습니다. 그 기름부음을 다윗이 세 번 경험했습니다. 그 세 번의 경험 가운데 특별히 첫 번째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고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예수를 안 믿으셨습니다. 나중에 믿으셨습니다. 어둡고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내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우리 집에 고모 두 분이 계셨는데 두 분이 다 교회에 잘 다니셨습니다. 나를 업고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그 교회에 가서 제가 45년 후에 가서 그 단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3살, 4살, 5살 때 다니던 교회에 다니던 그때의 광경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에 다녔는데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거짓말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랬고 교회에 나와서 볼 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본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만날 교회에서 싸우고 또 진중하게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없이 교회에 와서 손에 피가 나도록 박수만 치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을 사람들 속에서 보면서 저는 그냥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는데 철둑길을 따라 가는데 갑자기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사춘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풀밭에 엎드려서 논두렁 사이에 엎드려져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는데 성경을 옆에 내려놓고 통곡하면서 내가 왜 우는가 하는 질문이 크게 세 가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은 정말 있는가?’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그치고 결심했습니다. ‘신 따위는 없다 다 인간이 지어낸 것이고 설령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에 참견하는 것은 사절이다. 나는 이제 신 없이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때가 14살 2개월 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그러면서 인생의 갈 길을 찾았습니다. 6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는데 자신만만해질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너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타락한 것은 아닌데 자살할 마음도 가졌습니다. 그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것이 아닌가? 이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순간에 저는 전도하는 사람도 없어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주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의 인생론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포근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철학과 사상과 예술도 나에게 줄 수 없었던 어떤 놀라운 평안을 주는데 하나님이 손에 만져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날이 75년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니까 20명, 30명 정도의 교인이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풍금에서 울려나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서 어릴 때 부르던 찬송가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제 왔으니 주님을 찾아 주여 나를 맞으사 받아주소서’ 그리고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다고 까불었는데 이제 눈에 보는 것 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마음에 와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기독교에 귀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개척교회였는데 목사님이 멀쩡한 청년이 하나 왔으니까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그분도 50대를 넘으셔서 20, 30명 되는 교회를 하는데 신학을 하신 분인데 너무 귀했습니다. 가을에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저에게 11월에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나왔는데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그러니까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학습을 거치지 말고 바로 세례를 받아라.’ 목사님 말씀이라 감히 거역할 수는 없는데 고민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교회까지 25분, 30분 걸어야 하는 길이었는데 11월이 제법 추웠는데 매일 교회에 나갔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주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회 한구석에서 주님을 믿는 것은 알겠는데 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제가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인데 내가 이렇게 살던 사람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을 기도했는데 결국은 세례를 받을 마음을 주셨습니다.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11월 중순이었는데 꽤 추웠습니다. 유리창에 성에가 끼었습니다. 집도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몸도 약했습니다. 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키는 174에 허리 27인치 몸무게 56kg의 청년이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사진을 보면 멋있습니다. 그때 그러고 옷을 빨아 입고 저는 원래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대학도 떨어지고 붙었을 때는 돈이 없어서 못가고 이렇게 시련을 겪으면서 떡장수도 하고 배추장수도 하고 그러면서 힘들게 보냈습니다.
세례를 받으니 깨끗하게 옷을 빨아 입고 가서 무릎 꿇고 앉았습니다. 목사님이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는데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님이 손을 얹고 기도하시는데 갑자기 여기부터 따뜻한 기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맨 밑바닥까지 내려온 다음에는 몸이 공중에 붕 뜬것 같은 느낌이 들고 몸에 아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가 힘들게 살아온 날들, 하나님을 멀리멀리 표독스럽게 떠나서 입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그 쓰레기 같은 철학자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면서 마치 자기가 인생과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을 떨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자가 되어서 살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자살을 결심하기까지에 이르게 된 비참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면서 내가 주님을 얼마나 멀리 떠났나를 생각하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한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참을 울다가 눈을 떠보니까 예배는 진작 끝나고 사람들은 다 갔습니다. 예배당에 몇 사람이 왔다가 갔다가 하는데 눈을 떠보니 주일 점심때 햇살이 환하게 성에 낀 유리창 사이에 비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결심이 생겼습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날들이 너무 후회되고 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시는데 내가 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멀리 떠나 그렇게 비참하게 메마른 땅을 헤매면서 죽은 자처럼 살았던가? 그것이 너무 후회가 되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나에게 설득해주던 수많은 문학가들과 사상가들을 향하여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회개의 기도가 모두 끝나고 나니까 모든 욕망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삶을 살아서 나는 그분 때문에 기뻐하고 그분은 나 때문에 기뻐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성령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 4년 후에 결혼을 하고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직장에 다닐 때였는데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교회에 갔습니다. 본 교회는 너무 멀어서 동네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는데 얼마를 기도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 갔습니다. 엄청 추웠습니다. 목사님도 일찍 기도를 끝내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12월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온 몸이 콘크리트 바닥에 난방 없이 돈이 없어서 유리창을 못하고 비닐을 쳐서 붙여 놓았습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눈을 떠서 강대를 쳐다보니 내가 너무 한심했습니다. 내게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데 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 내가 정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지! 내가 만약에 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벌벌 떨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엾어서라도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려와서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손을 땅에 대고 손 위에 얼굴을 댔는데 콘크리트 바닥이니 얼음바닥이었습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그 당시에는 스티로폼도 없었으니까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데 죽을 것 같이 추워서 심장까지 오그라듭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얼어서 두 다리에 동상이 걸려도 일어나나 봐라.’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원래 떠들썩하게 기도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혼자 조용히 묵상하면서 소곤소곤 기도하는 사람인데 몇 년 전에 일어났던 일보다 더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강대가 눈에 보입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대 한가운데서 크기가 농구공, 배구공보다는 작고 핸드볼 정도의 크기의 불덩어리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저기서 쭉 천천히 천천히 내게로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기도하면서도 ‘저게 날아오면 내가 맞을텐테 내가 저것을 맞아도 되나?’ 성령의 불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만 하는데 드디어 그 불이 내게 날아왔습니다. 머리에 맞는 것 같았는데 충격은 느껴지지 않고 갑자기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상한 말이 입에서 기도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데 온 추위가 모두 사라지고 온 몸이 열렬하게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내가 다 버립니다.’ 그리고는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신다고 말로는 하지 않으셨는데 마음속에 모든 근심이 사라지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마음속에 충만해졌습니다.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기도한 다음에 출근시간이 되어서 일어났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그까짓 밥상을 받으면서 느끼는 그런 행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연애를 할 때의 기쁨이라든지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기쁨이라든지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한참을 눈물로 울며 기도하다가 기쁨으로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변함없이 주의 종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가는 길은 몰랐지만 그렇게 만나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내가 이렇게 더러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벅찼습니다.
모두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충만한 은혜였습니다. 그것이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당연히 그런 영적인 기쁨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아무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거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식탁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이 시인은 가시밭길 같은 인생길을 걸었지만 그러나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영혼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는 은혜를 받았고 행복할 수 있었고 기쁠 수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시인은 가슴 벅찬 감격으로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고 나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쳐야 하는데 눈빛이 너무 그윽하셔서 제가 6절 마지막을 짧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마지막 6절 결론 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산 사람의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시며 인자한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게 믿으면서 세상에 속지 않고 그렇게 변함없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며 인생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는데 아직도 정해진 교회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도 있는데 그 나이 되면 이제는 어딘가 뿌리를 내리고 사랑하는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머리가 희끗희끗한데 아직까지 가정이 없다면 아니 결혼을 안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한번 결혼을 깨먹고, 두 번 깨먹고, 애들은 흩어지고 두 번째 부인하고 난 애들과도 헤어지고 싸우고 돌아다니면서 머리가 허예졌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일수도 있고 학자일수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 잠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어차피 그냥 시간이 지나면 가진 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여행을 가려도 기운이 없습니다. 옷을 살 돈은 있는데 이것을 입고 가서 보여줄 데가 없습니다.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옷을 입을 수 없는데 오만 원짜리 입으면 뭐하고 오십만 원짜리 입으면 뭐합니까? 패션? 패션도 젊었을 때 패션이지 어차피 안 어울리는데…….
영국을 갔는데 한국관광객이 와서 ‘여보 그냥 사.’ ‘이 나이에 돈 아까워할 것 뭐있어 그냥 사.’ 그랬는데 할머니가 백화점에 가서 180만 원짜리 버버리코트를 사 입고 오시는데 그냥 입고 온 옷이나 새로 산 옷이나 마찬가지인데 굳이 180만원을 맛있는 것이나 사먹지! 할머니가 버버리 같지 않은데 옷만 버버리이면 뭐합니까? 명품이라고 두르고 오셨는데 그냥 남대문패션으로 원래 입으시던 옷이 훨씬 더 화려하고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가서 150만 원짜리 선글라스를 사서 쓰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점집에 앉아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것을 뭐 하러 사오십니까?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10만 원짜리도 얼마나 좋고 동네안경점에도 15만원만 주면 좋은 것으로 맞추는데 그것을 150만원을 주고 사셨는데 젊었을 때나 그것이 어울리는 것이지 할아버지 폭삭 늙은 얼굴에 그것을 썼으니 돗자리 하나 깔고 앉았으면 딱 맞았을 것입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죽고 그것을 누가 가져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껏 베풀면서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보면서 첫날은 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흥회를 하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뭔가 냉랭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얼굴을 트느라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저께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오늘은 더 훌륭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면 두 시간 정도 더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사랑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시련을 만나면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병이 나면 병원의 치료를 받으면서 심방을 받고 극복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들으면 배고픈 때도 있고 그때마다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영혼이 침체될 때도 있는데 소생시켜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데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의 밥상을 차려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내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내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월이 흘러갑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인생의 많은 굽이굽이를 거치고 은혜를 받고 그러다가 인생의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어느 날 광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박아무개 권사님 어제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 김 아무개 집사님 우리교회에 30년이나 다니셨는데 오늘 새벽에 운명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여러분들은 못 듣지만 계속 그런 소리를 계속 듣다가 마지막에 못 듣는 날이 오는데 그날이 여러분이 죽는 날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빨리 오는지 아십니까?
저는 강원도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눈을 감으면 제 기억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그때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 유치원을 다니기는 현재 박사나 유학을 가는 것보다 힘들었습니다. 왜?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5살인가 거기에서 대화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오대산 바로 아래였습니다. 겨울이면 형들이 얼음을 지치면서 썰매를 탑니다. 거기를 따라다니던 기억, 형들이 연을 날리는데 신기하게 형들은 어떻게 연을 그렇게 잘 날릴까? 막 뛰어가다가 풀어주면 연이 하늘 높이 새카맣게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형들은 왜 그렇게 팽이를 잘 칠까? 팽이를 때리면 팽이는 쌩쌩하게 살아서 얼음판 위에서 돌아갑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피었던 풀꽃들 알록달록하게 생겼던 나무 블록들, 그리고 운동장, 다 생각납니다. 그것이 몇 주 전의 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63, 4년 전의 일입니다. 그렇게 속히 지나갑니다.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이름 없던 저를 하나님이 사용해 주셔서 조국교회를 위해서 일하게 하시고 글을 쓰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고 또 유명하게 만드셔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때 시작할 때가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었는데 엊그제 같은데 벌써 33, 34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년이면 벌써 30주년입니다. 그리고 몇 년 있으면 한 4년 있으면 은퇴를 합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갓난아이였던 아이가 벌써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손자, 손녀가 9살, 7살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월이 빨리 흘렀을까? 젊은 나이에 젊은 부인으로 교회에 왔던 사람들이 노인이 되고, 그리고 왔던 젊은 청년들이 권사님들이 되고, 심지어 주일학교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주례를 서달라고 하고, 그 아이들이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안고 교회에 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기울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서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도의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그 교회에서 태어나고, 그 교회에서 시련을 경험할 때 그 교회에서 기도하고, 그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고, 또 자신이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눈물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더 이상 교회에서 봉사해 달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제 일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는 결국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에 건강하게 교회에 나오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투병하기에 양로원, 요양병원으로 물러나서 1, 2년 더 살다가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기 전에 그렇게 정들었던 교회에 관에 누워서 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렇게 드나들었던 교회의 마당을 밟으면서 그러면서 젊은 시절부터 뛰놀았던 사연이 많은 교회, 거기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그 교제 속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모두 떠오릅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그렇게 평생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어린이가 젊은이가 되고, 젊은이가 청년이 되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자라고, 그 아이는 늙어가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마지막으로 성도를 떠나보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는 성도를 떠나보내면서 눈물이 납니다. 우리도 저분처럼 살다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면서 천국에 올라가서 계속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생활입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응원가를 부르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러분보다 앞서 주님께로 갔던 많은 분들이 그렇게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고운 것도, 젊은 것도, 부요한 것도, 건강한 것도, 결국 모두 기울고 어느 순간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에게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인연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만나지만 그때 다시 아내를 만나서 밥해달라고 할 일 없고 남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성도로서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떠날 때는 각자의 손을 놓고 혼자 조용히 미끄러지듯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5년 후 일수도 있고 10년 후 일수도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그날이 오늘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행실로 세마포로 옷을 입고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이 이렇게 성도로서 아름다운 생애를 마치고 주님 앞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