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자를 부르심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중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최연희
이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의미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할 일이 없었던 제자들은 이제 다시 고기잡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칼빈 목사는 그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부활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그냥 일상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라고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 제자들이 가서 다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일해도 고기를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너희에게 고기가 없느냐 물으시면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그렇게 해서 이제 고기잡이를 했는데 이게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그때 부르심을 받았던 때하고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요한이 베드로에게 아 저기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라고 하니까 이제 베드로가 물에 뛰어들어서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로 달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그물을 끌어올려보니까 막 물고기가 꽉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그걸 끌어 올려오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오래 따라다녔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도 몰랐다는 점에서 신앙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또 옛 직업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자신의 힘으로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크게 4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첫 번째 하신 일은 식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얘들아 이리와라 그리고 아침을 먹어라 하시고 가보니까 예수님은 이미 거기에 이제 숯불이 있는데 숯불을 피워놓고 거기에 떡과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지금 잡은 생선이 있으면 좀 가져와라 그러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터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식탁을 차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제자들을 맞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식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는 우리나라하고 비슷한데 ‘식사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그냥 단순히 밥을 먹는 행동이 아니라 형제됨 혹은 가족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식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야곱이 그 교활한 라반의 집에서 그렇게 거의 종처럼 머슴처럼 살아서 결국 재산을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큰 복을 주셔서 아내들과 함께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뒤늦게 소식을 듣고 라반과 그 자식들이 추격을 합니다. 결국 잡아냅니다. 하나님이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손대지 마라라 엄중히 타이르셨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 야곱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화해를 하고 그리고 이제 그들을 보내고 난 후에 함께 나눈 것이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돌무덤을 쌓아주면서 ‘여갈사하두다’라고 칭하면서 ‘이제 이 돌무덤을 넘어서 내가 너를 추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평화롭게 살자’라는 언약으로 끝내고 한 행동이 식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 식사는 형제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백성들이 함께 식탁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시절에는 하나님이 새벽마다 만나를 내리셔서 온 이스라엘을 밥상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그렇게 함께 밥을 먹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부름을 받은 한 형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생각은 예수님 시대에 와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 중 하나는 왜 너희 선생님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세리들과 함께 마시느냐 이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너무 거룩한 사람들은 그런 속된 죄인들하고 어울리면 안 되었습니다. 그 비난을 받으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의로운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라고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끊임없이 식탁을 나누시면서 교제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자신의 형제로 하나님 안에서 한 피를 나눈 형제로 받아들여 주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요한 사도는 밧모라는 섬에서 이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계시를 봤습니다. 그때에 라오디게아교회에 계시하시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거기서도 똑같이 또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의미하냐 하면은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나누고 있는 생명적인 교제를 이것을 식탁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바 이 언약의 피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성찬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냥 식사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식사, 빵이 있고 포도주가 있는 식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의 성찬을 기릴 때에 초대교회에서는 요만한 빵과 요만한 잔으로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식사를 하면서 그것을 먹으면서 ‘주님과의 생명적인 교제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다’라고 하는 것을 식사를 통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이 그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 하신 것이 당신 자신이 아침상을 차려놓고 그 해변에서 기다리셨다고 하는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쉽게 이야기해서 배신했지만 예수님은 아직도 여전히 이 실패한 제자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생각하시고 생명적인 교제를 나누어야 할 형제들로 생각하시면서 식탁을 차리고 계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 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경이 우리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유대인의 관습에 익숙해져있었던 이 제자들에게는 이것은 아주 특이한 광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웃어른이 식탁을 아랫사람들을 위해서 차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부인 경우에는 그렇지만은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소 주부도 아니고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본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이제 그 새벽에 시간에 어디서 마련한 것인지 숯불을 피우시고 거기다가 떡과 고기를 정성스럽게 구우며 그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고 하는 이 사실은 제자들에게 굉장히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분이 부활하신 분으로서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아직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나타나셔서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숯불에 (고기와) 물고기와 떡을 굽고 계시는 그 장면은 생경스러운 동시에 엄청난 감격으로 다가왔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한결같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나중에 사도요한이 돌아왔지만 어쨌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외로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제자들이 그렇게 할 것을 모두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그 죄를 짓기도 전에 예수님은 이미 마음속에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혼자 그 십자가를 지고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지금 그것이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지만 대사가 안 나오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왜?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야비하게 배반하고 도망간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약간 생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뭘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만나니까 제일 반가워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예수님을 안 버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 일이 그대로 실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한 성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제 성공한 삶을 살고 성령 충만할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생명적인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는 있지만 주님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는 어떤 수준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주님과 가까이 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멀게만 느껴지십니까? 한없는 거리감과 그리고 소외감이 느껴지십니까? 낯섦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주님을 멀리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자기를 버리고 떠난 제자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고기를 굽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앞뒤로 뒤집으면서 타지 않도록 그리고 맛있게 구워지도록 떡을 앞뒤로 뒤집으면서 먹기 좋도록 그렇게 굽고 계셔서 제자들이 앞에 와서 함께 앉았을 때에 가장 먹기 좋은 식탁이 되도록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그렇게 일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근엄한 아버지의 할 일이 아니라 자상한 어머니의 할 일입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실패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과 함께 조반을 먹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예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생명적인 관계가 끊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살아오지만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믿음의 부요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풍성한 식탁을 먹으며 그 안에서 한없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식탁에서 우리는 영혼의 힘을 얻고 그 식탁에서 먹은 생명의 교제의 효과 때문에 우리들은 세상을 이길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주님과의 충만한 교제 속에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누리며 말씀의 식탁으로 영혼이 풍성해지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실패했다면 여러분에게 더더욱 이런 식탁이 필요합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봤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고 허탕을 친 사람들이라면 실패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주님의 이런 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이렇게 변함없이 여러분들에게 생명의 교제를 나누어 주시는 우리 주님께 나아와 그분과 사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조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이 없었습니다. 말을 할 처지가 안 되었습니다. 왜요? 보기 좋게 자신의 맹세를 져버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부인했으니 그 예수님 앞에서 자기는 부인할 수 없는 배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얼굴을 들고 예수님의 안부를 묻거나 혹은 자기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모든 제자들의 심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이 한 일 그 자체가 그들의 양심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그렇게 강한 질책을 양심에 받으며 그들은 마음이 깊이 오그라들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그 거룩한 눈빛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고 비겁하게 배신했던 그 기억들이 이 제자들로 하여금 양심의 기력을 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먼저 말을 하시기 전에 조반을 충분히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말없이 침묵 속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에너지를 썼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었겠습니까? 게 눈 감추듯이 구워주시는 생선과 떡을 그저 받아먹으며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아요? 이건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이 베드로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신 후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에 이말 저말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바요나’, ‘바요나’는 아람어로 ‘요한의 아들’ 그런 뜻입니다. ‘바르’가 아람어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요나 시몬’, ‘요나의 아들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러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를 더 이상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그러면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그 이름을 그게 같은 이름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면서 당신이 바꿔주신 이름을 부르시는 대신 옛날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너의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그런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신앙고백은 너 개인의 고백이 아니라 이후에 모든 교회가 함께 그 터 위에 서야 할 위대한 신앙고백이요 믿음의 제목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도망간 이 사람에게 ‘반석 같은 믿음이여’라고 하면 베드로가 몸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그 이름을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당신이 버리게 하신 그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이 이 베드로를 받아주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본래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감사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리고 감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없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보려다가 도저히 혼자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를 믿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여전히 예수그리스도를 안 믿는 이유는 넉넉히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감사를 잊어버리고 우울하게 사는 이유가 뭐죠?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럴까요? 간단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왜? 자기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를 얻으면 두 개를 갖고 싶고 두 개를 얻고 나면 세 개 네 개를 갖고 싶은 것입니다.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가지면 전부를 자기가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뇌가 그치지 않는다고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뇌의 원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끊임없이 고뇌를 끊지 못하게끔 인간을 그렇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의 원래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생의 마지막 벼랑 끝에 서서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때 그때 우리는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우리가 돈을 원했어요? 부자가 되기를 원했어요? 아니면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했어요? 아닙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으로서 주체성 있게 그리고 든든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을 세상에서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모든 믿음의 순간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자기 자신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고통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름은 요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위대한 신앙고백에 동참하며 교회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조차도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아와서 다시 두 번째 은혜를 받기를 바라십니다. 도대체 뭘 잘한 일이 있어요? 예수님 배반하고 그리고 자기의 맹세를 저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완전히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예수께서 이렇게 이름을 부르시는 이유는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 위대한 사도여서가 아니라 능력을 많이 받은 사도여서가 아니라 일을 많이 한 일꾼이어서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요한의 아들 시몬 너 자신이 내 마음에 사랑이고 너는 내가 너를 만나는 그 순간 너는 내 마음에 별이 되었다. 그래서 너를 사랑한 것이다.” 실패했으나 그는 예수님을 버렸으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라 부르시는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주고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진실. 여기서 진실이라는 것은 그냥 fact,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부합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것을 팔아서 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능력보다 더 소중하고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아니면 거기에서 말하자면 믿음이 생길 수도 없고 더군다나 거기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따위의 일들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시편을 넘겨보십시오. 일장 이장 삼장 사장 넘기면 어느 곳에서든지 시편은 피가 묻어있습니다. 부르짖는 고함소리, 원한에 맺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울부짖음이 그 안에 있습니다. 경건의 몸부림입니다. 다윗은 시편 전체의 거의 절반가량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편이 거의 모두 그런 핏빛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이에요? 어떠한 가식도 없이 완전히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온갖 미사여구와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말로 주일 기도 시간을 채우는 기도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마치 그 업체들이 발송한 그 DM같은 것입니다. 뜯어볼 필요도 없는 기도들입니다. 마음속에서 간절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실패하고 비참한 모습인가 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 그 모습을 가지고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살고 있든지 못 살고 있든지 실패했든지 성공을 했든지 여러분들이 있는 그 자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첫 번째 발걸음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실패한 사람이다.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면서 그러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이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대로 그 사람 자체로서 주님이 사랑하셨고 비록 당신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했지만 그 광경을 예수님이 모두 지켜보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은 이 실패한 베드로가 당신과 만날 날을 기다리시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음에 어두운 그늘은 예수를 버린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지 베드로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베드로를 받아줄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곤고하게 사는 여러분 어떤 처지에 있던지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가십시오. 굳이 베드로가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충분합니다. 그분께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다시 주님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원을 아뢰며 주 앞에 다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도 번역이 가능하지만 ‘네가 이 물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뭐냐하면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거보다 네가 더 사랑하느냐 그런 뜻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을 더 사랑하느냐’ 혹은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물고기들을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던지신 질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원래 요한복음의 부록입니다. 20장으로 끝나면 딱 맞는 성경입니다. 뭐라고 그러냐 하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20:31) 라고 말했으니까 이게 요한복음을 끝내기에는 기가 막힌 맺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21장은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에 붙어 있는 부록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이 부록을 썼느냐 하면 베드로를 위한 목적으로 이 부록을 쓰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전체의 마지막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까지 만약에 20장에서 끝나면 이게 사도행전 1장하고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안 되냐면 사도행전 1장에서는 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이 실패한 이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도 나타납니다. 근데 요한복음까지 사복음서를 모두 통틀어보면 제자들이 회개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고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갔다는 걸로 그들의 행적은 끝납니다.
사실상.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 쓰레기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사도행전에서 바로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로 나타나냐에 대해서 뭔가 설명해줄 것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야지 누구든지 그것을 보고 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람들이 실패했지만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구나 라는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모든 사람을 다 상대하지 않고 베드로를 그 제자들의 대표자 삼으셔서 하나님이 그가 가진 지도력을 회복해주시는 것을 21장을 기록한 목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은 아주 놀라운 그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지혜지만. 어쨌든 실패한 제자들 자기를 포함한 제자들이 어떻게 사복음서에서 모두 실패하고 예수를 배신했는데 이제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만났고 더 이상 그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다는 이야기로 기록을 하기 위해서 부록으로 이 요한복음 21장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해가세요?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이런 질문을 안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열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성격이면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 너냐 아니 안 죽고 살았네? 네가 죽는 데까지 따라간다며? 나는 죽었는데 너는 살았구나. 그 맹세는 어디 갔냐.’ 저는 그렇게 물어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현재입니다. 현재, 가정법 현재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죠?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왜? 예수님을 버렸는데 어떻게 옛날에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미래형으로 물어보신다면 ‘네가 나를 사랑할 것이냐?’ 물어보신다면 또 답변할 수 없었겠죠. 왜요? 아니 옛날에 주님을 다 버린 기억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그 맹세를 지키겠다고 다시 또 두 번째로 호언장담을 할 수 있겠어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어보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셨습니다. 현재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할 말은 없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는 사랑한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사랑하는 네 주님을 그때 버리고 도망갔느냐 하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똑같이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예수님이 또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글자도 안 바꾸고 똑같이 물어보셨습니다. 세 번째 물으시니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진심을 의심하고 계시나보다 그러고 말하기를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마치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던 것입니다. 왜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에게 옛날 일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 세 번을 질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이제 이 사람을 미래에 잠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쓰임을 받습니까? 공부 많이 한 사람?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 아닙니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 쓰임을 받는다면 돈이나 학식 때문에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 사명을 맡기시면서 예수님은 네가 무슨 공부를 했느냐 어디에서 훈련을 받았느냐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술 먹고 그리고 나쁜 짓을 하고 죄를 짓고 그렇게 하는 것 정욕에 빠지는 것 이것만이 타락이 아닙니다. 그리고 타락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처음 사랑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모든 것이 타락입니다. 목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도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고, 목회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의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오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그 목양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동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제가 90년대에 중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오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저를 그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때 제가 거기서 설교를 하고 담임목사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중국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옆에 있는 사역자가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연세가 이제 그때 이미 너무 많으셔서 기력이 없어 보이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젊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다 버려두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열심히 전도하면서 아름다운 교회를 일궈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문화 대혁명이라고 하는 사회개혁 운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반체제 인사들 잡아들이기 시작하고 그리고 종교를 박멸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예수 믿고 교회를 한 것밖에 없는데 결국은 재판을 받아서 15년 노동 교화형에 처해져서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15년 동안에 가족과의 편지, 전화, 면회 일체 할 수 없도록 완전히 단절된 가운데서 한순간에 가족들과의 인연이 끊어진 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15년 동안을 뼈 빠지게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만기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어디였겠어요? 전화도 없던 시대니까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들어오는 광경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1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때보다 더 가난해졌습니다. 동네에 가니까 완전히 다른 동네가 되어있었습니다. 자기네 집을 가까스로 찾아가 봤더니 집에 아무도 없고 집은 다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 동네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고 ‘우리 집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랬더니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버렸고, 둘째 아들은 아편중독에 걸려서 그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끌려가고 두 아들이 그렇게 망가지는 것을 보고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을 보고 너무너무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남은 것입니다. 너무 슬퍼서 마당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며 우는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더라고 합니다. ‘얘야 네가 그래도 나를 사랑하느냐’ 선명하게 들리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하나님 예, 주님 제가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사랑 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런데 눈앞에 들어오는 그런데 눈앞에 저는 이 교회가 여기 이사 오기 전에 작은 교회로 있을 때부터 세곡교회를 알았습니다. 사십 제가 칠 년 전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후에도 가끔 지나다니면서 이 교회를 짓기 전에 교회를 봤습니다. 120년이 되셨잖아요? 한번 이런 생각 안 해보셨어요? 120년 전이면 여기 호랑이들이 어슬렁거리고 다니던 때입니다. 여긴 진짜 깡 시골이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뭐 보고 여기에 왔을까요? 여길 뭘 먹으려고 여기에 왔을까요?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여기에 왔을까요? 누가 그 선교사를 이리로 보냈을까요?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을 버리고 왜 여기에 보냈을까요? 그 사람도 부모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을 것이고 가족과 흩어지는 것 괴로웠을 것이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기오면 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120년 전이니까 120년 전이면 언제에요? 1900년대잖아요. 조선시대입니다. 조선시대.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순교할지도 모릅니다. 근데 왜 왔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120년의 교회 역사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그분들이 세운 터 위에서 모든 것을 거저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이 자기 집보다 교회를 사랑했을까요? 생명보다 교회를 사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들이 그렇게 모든 좋은 것을 버려두고 이곳을 택해서 여기서 그렇게 사셨을까요? 여기 전부 다 논밭이었습니다. 가난한 그 농사짓는 사람들이 다니던 그렇게 교회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어요?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찬양)
숨질 때에 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쁨으로 교회에 나오던 때 살아있는 것이 너무 감사했던 때 그리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늘 울어도 눈물로서는 갚을 수 없다고 믿었던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요즘은 어떠십니까? 주님이 바라보실 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만 사랑할 때와 자신의 죄를 회개할 그 때 하나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언제였습니까? 언제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사랑은 감동이고 사랑은 눈물입니다. 사랑은 뜨거움입니다. 사랑은 어쩔 줄 모르는 자기버림입니다. 감격이 있습니까? 사랑의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과의 연애에 빠진 그런 열정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까?
지난주에 지지난 주에 우리도 교회에서 사경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을 사경회를 하는데 어른들은 본당에 모여서 사경회를 하고 아이들은 아래층에서 교육관에 흩어져서 어린이 사경회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자매가 하나 있는데 딸이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사경회가 다 끝나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야되잖아요. 그래서 전화를 하니까 딸이 전화를 받더니 툭 끊어버려요. 그래서 또 한번 전화를 했더니 툭 끊어버려요. 얘가 왜 이러나 빨리 가야되는데 다시 전화를 하려고 그러는데 문자가 띵 하고 왔습니다. ‘어린 아이가 눈물로 기도하는데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은 은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뒤에 문자가 하나 또 왔습니다. ‘나만 방해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기도하고 있는 이 모든 친구들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지 마세요.’ 그러고 툭 끊어졌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눈물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고 기도의 간절함이 있을 때 우리는 웁니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마지막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이 질문 앞에 너무 부끄러워서 혹은 이 질문 앞에서 나 같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해주신 이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기쁨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을 흘린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요즘은 교회에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는 드라마를 보면서 그렇게 깔깔거리고 웃고 영화관에 가서는 영화를 보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연주회를 가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손수건을 꺼내서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다 돌아가는데도 객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느라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데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흘릴 눈물이 없고 기쁨의 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나이든 부부가 절대로 살기 싫고 이 인간하고 찢어지고 싶은데 애들 때문에 못 헤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무슨 사랑이 그렇게 시시해요. 그렇게 재미가 없어요.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회개도 없고 눈물이 없는 신앙생활.
주님은 오직 한 가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가 예전에 어떻게 실패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앞으로 잘할 건지 말 건지 아무 질문 안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것에 실패했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진실하게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구해 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붙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후에 예수님은 똑같이 ‘네 어린양을 먹여라’ ‘네 양을 쳐라’ ‘네 양을 먹이라’ 조금씩 말이 다르지만 똑같습니다. 하나입니다. ‘네 양을 먹이라’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많은 양떼를 부탁한다
예수님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식탁을 베푸시고 그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라고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마지막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에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내 양을 먹이는 일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제 베드로시대 때에 로마의 대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때 잡히면 죽으니까 제자들과 함께 급히 로마를 변장을 하고 탈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예수님이 걸어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 지점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저도 그 골목에 서봤습니다. “아니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유명한 쿼바디스 도미네,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들어간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야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태어난 것은 없는 것보다 더 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해주신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제2의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목적을 알 때에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듯이 내가 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때 그때 자신을 불태우며 살 수 있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명의 길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람 곁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사람에게 놀랄만한 엄청난 일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에게 일 시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역사하심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사명을 깊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거기다가 조정하는 것입니다.
먼 길을 떠나려면 요즘은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네비게이션부터 켭니다. 켜고 버튼을 누르면 줄이 생깁니다. 그 파란줄을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도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될 것 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엄마로 아빠로서 자녀로서 사회인으로서 교회 한 지체로서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나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이 세상의 자원들과 천상의 자원들을 그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하면서 사는 것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사람들만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뻐해도 후회함이 없는 행복 아무리 많이 누려도 결코 지루해 하지 않은 그 천상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고 세상이 절대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간직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이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 서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사는 그 사람 앞에 항상 있기 때문이고 그분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나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이 일을 위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이 속에서 나 자신이 실현되는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린 주일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든 혹은 구역장을 하는 일이든 장로의 사명이든 권사의 사명이든 집사의 사명이든 전도 대원의 사명이든 담임 목회자의 사명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서 아침의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때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주눅이 들어있는 제자들 그리고 이제는 어느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가늠도 할 수 없었던 이 제자들을 식탁으로 부르셔서 여전히 남아있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생명적인 교제로 그들을 불러 주셨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실패를 딛고 어떻게 회복된 사랑으로 주님을 공경하며 살아야 할 것 인가를 보여주셨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으로 다시 부르신 후에 그들에게 양떼를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 혼자에게 준 사명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은 한번 변심했지만 두 번 변심하지 않고 모두 이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가 이 세상에서 순교를 하거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에 빛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에 한 사람들이 되어서 지금도 교회를 위해 응원하고 기도하고 있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47년의 세월 그때 제 나이 이십대 초반이었습니다. 어떤 교회 직장의 동료가 자기네 교회 문학의 밤 하는데 발표하나 해달라고 해서 시외버스를 타고 오는데 한없이 시골로 달려갑니다. ‘이런 데도 교회가 있을 수 있구나’라고 하면서 왔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4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가졌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아니고 모든 것에 성공했어도 그 사랑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 실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오늘 바로 이렇게 사랑을 되찾고 자신의 사명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떠난 일이 있습니다. 눈물 흘릴 사명이 있고 눈물 흘릴 사랑의 감격이 있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주님이 계시고 나를 위해 식탁을 차려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항상 나의 마음속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우리를 불러 우리가 버려두고 온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밤에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 사명에서 이탈했다면 오늘 깊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생명의 교제를 나누어 주신 주님 앞에서 충만한 은혜를 다시 누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