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이재호
어떤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금융업계에서 잔뼈가 굵었고 꽤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막히는 것 같고 밤이면 잠을 잘 수가 없는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고 기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우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병원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의사도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갖 사진을 찍고 촬영을 해 보았지만 마지막 돌아오는 진단은 신경성이라는 진단 밖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급기야 직장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서 사직을 하고 돈은 많이 벌어 놨기 때문에 돈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너무 허무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사람이 어딘가 아주 뛰어난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가 있으니까 거기 한 번 가보라는 충고를 받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병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의사가 있었고 의사는 다른 의사와는 달리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귀 기울여서 잘 들어주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모든 것을 말하고 난 다음에 의사는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힘드시겠습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선생님을 꼭 고쳐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제가 어떻게 치료를 받아야 되나요? 약을 먹어야 됩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의사는 책상에서 무엇인가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는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약을 지어주면 저것을 가지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집에서 복용하라나 보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의사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쓴 처방전을 봉투에 담드니 풀로 단단하게 붙였습니다. ‘선생님, 여기에는 처방전이 들어 있는데 약국으로 먼저 가지 마시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밥이 되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당신 혼자서 조용히 이 처방전을 뜯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내용은 그 속에 적혀 있으니 집에 가서 보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밤 시간이 되어서 자기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에 스탠드에 불을 켜고 선생님이 준 편지 봉투를 가위로 잘랐습니다. 과연 뜯어보니까 처방전 같은 것이 나왔습니다. ‘이름 아무아무개,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을 합니다. 그리고 약의 종류, 구약, 약의 이름,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5번씩 물없이 천천히 씹어서 드시오.’ 이 사람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처방전을 꾸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혼자 분을 삭혔습니다. ‘원, 내가 살다 보니까 별 것들이 다 나를 조롱하는구나’ 하는 마음에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 날 밤에도 역시 밤새도록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새벽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그 때에 이 사람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의사라면 약을 팔던지 수술을 하던지 무엇인가 의료행위를 해야지만 돈을 벌 텐데 이렇게 아무 자기에게 소득도 없이 시편 23편을 읽어 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각하면서 혹시 하는 마음에 엉금엄금 기어 가면서 쓰레기통에다 버린 그 처방전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처방전을 펼친 후에 그는 조용히 저 장롱 위에 얹어 놓았던 먼지가 하얗게 쌓인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는 옛날에 교회를 다녔지만 요즘은 직장에 바쁘다는 이유로 교회를 안 다닌지 오래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고 보니 주일날 이외에는 돈 쓸 날이 없어서 골프 치고 놀러 다니느라고 교회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시편 23편을 폈습니다. 이것을 하루에 5번씩 복용하라고 하는데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에 한 번 읽고, 아침과 점심 사이에 한 번 읽고, 점심과 저녁 사이에 한 번 읽고, 저녁 먹고 한 번 읽고, 잠자기 전에 한 번 읽고, 이렇게 5번을 천천히 씹어서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을 들고 다닐 수 가 없으니까 옆에 카드를 하나 놓고 시편 23편을 펜으로 썼습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 다닐 때 많이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시편 23편을 모두 적어서 실제로 그 의사가 하라는 대로 아침이면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에 한 번 읽고, 밤에 잠들기 까기 이렇게 5번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5번을 읽으니까 일주일이면 35번이고 4주 한달이면 140번이고 두달을 읽으면 280번 아닙니까? 한 달 좀 더 읽으니까 이제 카드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편 23편을 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두 달쯤 흘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집에 앞마당을 거닐면서 시편 23편을 어제처럼 똑같이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런데 인생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엇인가 마음 속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다 낡은 커다란 콘크리트로 지은 집이 스스로 버티다 버티다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고 이 사람은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땅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눈물이 거의 없이 살아온 사람인데 그 날 새벽은 특별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의 마음에 구조물들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더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물 속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 인생에 비극과 슬픔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재수가 없고 운이 나빠서 자기가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것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졌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편 23편을 외우다가 마지막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비극은 목자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데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왔고 자신 밖에 몰랐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고 비로소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엄중한 상황이 닥치자 그는 스스로 자기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사람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스스로 시편 23편을 읽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후에 이 사람은 병이 나아졌겠습니까? 아니면 더 심해졌겠습니까?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없이 사는 사람의 마음의 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문제는 하나입니다. 돈이 없어서 그 돈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건강이 없어서 그 건강을 주시는 누구입니까? 혹은 생명을 거두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모든 것을 뜻대로 되게 하시는 분을 누구십니까?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가족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마치 쌀이 없고 옷이 없고 가구가 없고 난방이 안되어서 문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그것을 못 사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문제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자기 잘난 줄 알고 씩씩하게 사는 것,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죄는 자기를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자이신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비극과 슬픔의 원인인데 그 뿌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다윗이 언제 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은 비록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이것은 절대로 다윗이 어린 시절에 혹은 젊은 시절에 쓴 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이 확실히 왕이 되고 난 후에 아니면 거의 죽음을 눈 앞에 둔 인생의 말년에 쓴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목동이었다면 무슨 원수들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원수들 앞에 상을 베푸신다고 그랬는데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기름으로 머리에 부으셨다고 했으니 이것은 젊었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인생을 달관한 사람의 필치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3토막으로 나뉩니다. 첫번째 토막은 1절입니다. 1절에서는 여호와가 목자라는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2~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시인에게 목자가 되시는지를 차례대로 설명을 한 것입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에, 5절에서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토막은 6절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 6절입니다. 이렇게 시편 23절은 6절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경회 5번 동안에 한 번 모일 때마다 한 절씩을 설교할 것이고 마지막날에 어쨌든 다 못할 것 같기 때문에 5절과 6절은 모두는 못하겠지만 5절을 중심으로 마지막 6절까지 살펴보면서 사경회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간 중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시도록 그렇게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성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함이 여러가지로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함은 세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주 이렇게 세 성함이 등장합니다. 이 세 하나님의 성함은 각각 똑 같은 하나님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강조하는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님이라는 성함은 이것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하나라는 숫자에다가 ‘님’이라는 존칭을 붙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말이고 원래 이 성경은 쓰여 지기를 이스라엘 말로 쓰여 졌습니다.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히브리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수천년에 쓰던 언어인데 지금도 거의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아난 언어입니다. 그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엘로힘’입니다.
그 단어는 어디서 왔을까? 학자들은 크게 2가지로 가정을 하는데 ‘알라흐’ ‘두려워하다’라는 동사에서 왔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맞다면 하나님은 두려우신 분,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 그래서 이럴 경우에는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두려워 벌벌 떨 정도로 무서우신 하나님,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라는 성함이 왔다고 보는데, 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하나님의 성함은 ‘엘로힘’ 이라는 단어가 ‘울’에서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토리 나무’입니다. 도토리 나무와 하나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면 바람이 많이 불어도 뿌리를 깊게 내려서 마지막까지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도토리 나무였다고 합니다. ‘강하다’라는 뜻으로 쓰였고 거기서 하나님이라는 복수 명사가 온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측을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이라는 이 성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성함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신들 위에 가장 강하신 분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성함은 하나님을 소유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모든 있는 것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주’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그 분이 자신과 세계의 모든 것의 소유와 처분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주’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마지막이로 ‘여호와’라는 이름인데 원래는 ‘야훼’ 였다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에서 온 변형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이라는 뜻일 것이다고 본 것입니다. ‘야훼’ 라는 성함은 나머지 두 하나님의 성함보다 가장 거룩한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이 여러 개로 불리지만 호적에 등록되어 있는 이름은 딱 하나 밖에 없듯이 하나님의 고유한 성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성함을 입에 언급하는 것 조차도 매우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듯이 하나님의 본명이 그렇게 거룩하게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년에 한 번씩 하나님의 본명을 말한 다음에는 회개를 할 정도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겼고 이 성경을 베껴 쓰는 사람들은 쓰다가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따라서 다시 붓을 빨아서 이 글자를 필사할 정도로 존귀히 여긴 하나님의 존함이 ‘야훼’ ‘여호와’라는 성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성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이름이냐하면 아닙니다. 이 이름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이름이 처음 계시된 것이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에게 계시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이 이름이 계시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이 이름을 투사시켜서 그렇게 되었고 원본에는 출애굽기에 등장할 것이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그 말은 모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하나님이나 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고백한 것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한 백성으로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 한 사람, 한 가정을 택하고 이스라엘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최초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선택한 백성으로 삼으셔서 특별한 은총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성립하게 된 것이 바로 애굽을 탈출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것이 나라로써 서게 된 것이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써 비로서 나라로 서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이 여호와라는 말 그 자체는 그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 사실을 고백하는 시인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매우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에 새겨야 될 것은 하늘에 계신 그 분이 나의 여호와이시다 그냥 온 세상 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모든 것을 그 분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그 분의 것이라는 소유주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이 세상사람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아야 될 사람이다 라는 자기 확인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우리의 인생을 비교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구별된 사람입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윤리가 따로 있고 우리를 지배하는 윤리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냥 이 세상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이 세상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을 그들은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근본적인 뼈대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두번째로 여호와라고 했는데 여호와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이것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늘에 계신 그 절대자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중학교 1학년인데 학교 수업시간에 과학을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중학교에 와서 천체에 대한 것을 배우면서 너무 신비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선생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그것을 내가 알면 여기서 너를 가르치고 있겠느냐? 너희 집이 어디냐?’ ‘우리집은 서울 목동입니다.’ ‘그래?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거라. 온 세계가 다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여 있는데 너희 집 화장실에 빨간 등이 하나 켜져 있다. 거기에 8마리의 날파리가 돌고 있다. 그 중에 세 번째 날파리가 지구다. 그리고 우주는 온 세계의 빽빽하게 지어진 아파트라고 생각해 보아라. 너는 그 세 번째 날파리의 등때기에 붙어서 사는 세균의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이 있는데 이 태양은 항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전체가 가스 덩어리입니다. 불길입니다. 불길이 수십억 년째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태양도 에너지가 다 해서 마지막에 폭발을 일으키면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정도까지 삼키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수십억 년 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별 주위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이런 식으로 같이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도는 지구를 따라서 도는 별이 있는데 그것이 달입니다. 달 주위를 자기가 지구를 다라 돌듯이 도는 별들이 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계속 타오르는 태양 주위에 위성이 260개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태양이 속해 있는 별들의 세계를 ‘우리 은하계’라고 부르는데 바람개비 모양으로 되어 있는 원형의 무리입니다. 거거에 모여 있는 별들이 약 2000억개쯤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태양 같은 것들만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딸려 있는 식구들을 모두 합하면 칼세이건이라는 천문학자는 약 4조개가 될 것이다 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래서 달까지의 거리는 36만km 정도 밖에 안되는데 태양과 똑 같은 또 다른 항성은 엄청 멉니다. 500억짜리 동전에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이 500원짜리 동전안에 들어간다면 태양 같은 별은 가장 가까운 것이 서울과 대구 사이의 거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 거리에 있는 별들이 수없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북두칠성에 있는 별은 700만년 정도의 거리를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이 우리 은하계입니다.
그런 은하계가 관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대개 학자들이 추정하기를 2000억개쯤 모여 있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라고 봅니다. 그것을 관측할 수 있는 데까지이고 관측하는 못 하는 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거리를 멀게 보는 사람은 9600억광년이라고 보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150~160억년 정도 빛이 달려가면 도달할 크기다라고 보는데 이 우주는 끊임없이 초당 2000km 정도씩 팽창을 하고 있습니다.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아무런 짐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우리 은하계뿐만 아니라 모든 은하계들이 전체가 수조개의 별들이 초속 220km를 날아가면서 함께 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별에 태어나서 거기서 살다가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생입니다. 결국은 무한한 이 우주를 바라보면서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주에 내려온 것이 21살 때였습니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러분 모두 세월이 그렇게 흘러 간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그린랜드에 있는 상어는 460년을 삽니다. 그리고 거북이 같은 것들도 수 백년을 사는데 인간은 기껏해봐야 80~90년 100년을 넘는 사람은 희귀합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가 알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부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하나님은 있다 없다 내 생각이 맞다 내가 모든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보고 최고의 가치가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삶이 바로 죄라고 부르는 삶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한한 격차를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분이시고 자기는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분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써 신앙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깔보기 시작하면 신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데 무섭기만 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두려운데 도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점점 더 그 사랑으로 빠져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요체는 하나님을 향해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이 두개가 함께 자신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두려움이 없다면 이끌리는 사랑이 참일 수 없고 이끌리는 사랑이 없다면 이 두려움은 진정한 신앙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항상 있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 경외의 정체는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입니다. 더 많이 더 많이 두려워해야 하는 하나님, 더 많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 그것을 동시에 느끼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서 역사해서 삶으로 말로 고백하면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앞에 복을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복을 주시면 주실 수록 이 땅에 당신의 복을 더 많이 펼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뒷집 아저씨같이 그렇게 편하고 쉬운 분입니까? 마구 까불고 때로는 무시하고 대들어도 되는 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요즘에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필요하면 언제나 가서 이용할 수 있는 자판기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자기 마음대로 흘러갈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도움을 주면 곧 잊어버립니다. 그런 신앙이 젊었을 때 뿐만 아니라 머리가 하얗게 되어 가는데도 똑같이 그런 신앙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위대한 여호와이시고 그 여호와를 시인은 성함을 부르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은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여호와이신데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자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임을 신앙속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라고 하는 이 말은 결국은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실 목자가 양을 키우는 사람만 목자는 아닙니다. 짐승을 키우는 모든 사람은 목자인데 시편 23편에는 양이라는 한 단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23편을 읽을 때마다 자신이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양도 그냥 보통 양이 아니라 아주 깨끗한 풀밭 위를 뛰어노는 하얀 어린양, 순결한 어린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그지같이 살아도 자신은 그렇게 깨끗한 어린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동물 가운데는 긍정적인 짐승이 있고 부정적인 짐승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짐승에는 돼지, 뱀, 거미 이런 것들은 우리가 들으면 기분 좋은 동물들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동물은 강아지, 양, 토끼 이런 것들은 아이들이 이름만 들어도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동물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문맥이고 이 책이 쓰여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문맥에 의하면 양이 마냥 긍정적인 동물만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같거늘’ 분별이 없는 짐승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 고분고분 순종하면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는 그런 그림을 그려내고 이미지의 일부가 채택이 되면서 예수를 어린양이라고 부르게 되고 또 우리를 어린양으로 부르게 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험한 욕이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이랍니다. 다른 욕은 들어도 참는데 그 욕을 들으면 가장 모욕 받는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머리는 나쁘고 욕심은 많고 자기 관리를 못해서 지저분한 사실은 눈같이 깨끗한 양들은 없습니다. 양털에 수많은 똥들이 묻어 있고, 저는 한 번 영국에 갔다가 너무 목장이 아름다워서 들어섰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온 풀밭이 똥덩어리입니다. 한 가운데를 들어갔는데 나오지도 못하고 갈 수도 없고 난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멀리서 볼 때 양 떼들이 풀을 먹는 풀밭이 아름답지 실제 거기는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온갖 똥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속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사는 게 양입니다.
어쨌든 도대체 하나님이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부르셨고 또 넓게는 우리 모든 인간을 양이라고 불러 주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할 것입니다. 동물이 수도 없이 많은데 하필이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를 양이라고 불러 주셨을까 궁금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동물은 모든 동물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실제로 본 영상인데 임팔라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염소보다 작습니다. 매우 빠릅니다. 뿔은 솟아 있습니다. 임팔라가 풀을 뜯고 있는데 저기 멀리서 바람을 마주 보고 냄새도 못 맡게끔 포복을 하면서 기어가고 있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자는 배가 매우 고팠습니다. 드디어 가까이까지 접근을 했고 어린 임팔라는 계속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발견을 하고 박차고 나가서 임팔라를 쫓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안 다음에 임팔라는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는 점점 좁혀졌습니다. 이제 한 번만 발을 뻗으면 임팔라를 쓰러뜨리고 물어뜯을 기세였는데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서 도망을 가던 임팔라가 180도 회전을 하면서 그냥 사자랑 충돌을 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한 60cm 되는 뿔이었는데 사자의 옆구리를 뚫고 등으로 튀어나왔습니다. 한덩어리가 되어서 굴렀습니다. 사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임팔라는 피 묻은 뿔을 빼서 도망을 갔고 사자는 거기 쓰러졌습니다. 옆에서 촬영하던 사람들이 계속 추적을 한 결과 결국 며칠 있다가 이 사자는 그 부상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뿔입니다. 코뿔소는 코에 뿔이 있고 임팔라는 머리에 뿔이 있고 심지어 염소도 뿔이 있어서 박습니다. 사슴이 순한 짐승입니까? 싸울 때는 무섭게 싸웁니다. 뿔을 바위에 갈아서 상대방을 찌릅니다. 카멜레온은 변신을 합니다. 기린은 목이 길어서 멀리 있는 적을 먼저 봅니다. 빠른 다리를 가진 짐승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빨은 풀을 껌처럼 씹기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는 이빨이지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이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빠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그래서 길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근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은 뚝뚝 떨어져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앞에 있는 양들의 엉덩이에 가까이에 붙어서 무리를 지어서 다녀야지만 길을 잃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 잃어버린 양은 많이 나오지만 스스로 돌아온 양이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양이 가지고 있는 시력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뿔이 있는 데 그 뿔은 누구를 공격하기 위한 뿔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두같이 말려서 얹혀 있는 일종의 디자인이지 누구를 쓰러뜨리고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그런 공격용 무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적의 위험에 노출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을 돌보면서 살게끔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야생에 양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의 동물입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에게 양은 도시락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양은 높은 곳에서만 삽니다. 보통 짐승들이 못 올라오는 아주 높고 위험한 곳만 다닙니다. 추락사도 많이 합니다. 아주 재주가 뛰어나서 거의 70도 80도 되는 바위 위를 오르기도 하지만 추락사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멸종위기의 동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양이라고 부르셨습니까? 양이 너희를 의지해서 살도록 창조된 것처럼 너희 인간은 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 되었느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뛰어납니다. 힘으로는 당나귀 하나도 이길 수가 없는 그런 정도의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가 더 많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키 160cm 밖에 안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독수리가 와서 채 가기에 좋은 몸집입니다. 그런데 살아남았습니다. 지능이 매우 매우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릴라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천 마리가 모여서 회의를 해도 어린아이 지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놀라운 지능 때문에 이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입니다.
일본 오키나와에 가니까 수족관을 만들어 놨는데 여태까지 본 수족관은 장난입니다. 길이 10m 정도 되는 고래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산 채로 잡았습니까? 그것을 또 어떻게 거기까지 운반했을 지 도무지 신기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입니다. 코끼리는 5톤이 넘습니다. 그런 코끼리를 자유롭게 잡아서 인간이 길들여서 전쟁에 사용하고 물건을 나르는데 사용합니다. 소는 그렇게 길들여서 밭을 갈고 논을 갈고 마지막에는 잡아서 뿔은 도구로 만드는데 쓰고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의 최고의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지능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게는 없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뛰어난 점인데 문제는 그 정신 때문에 인간이 너무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한 것이 7시 20분 정도였습니다. 딱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2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는 시간에 34분에 한 명씩 자살을 합니다. 2021년에 죽은 20대 전체 중에서 죽은 20대 절반은 자살로 죽었습니다. 자살이 아주 많은 나라입니다. 10만명당 8명 정도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자살합니까? 옛날에는 그랬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지는 않습니다. 굶어 죽습니다. 문제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을 때 그 때에 인간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편하다고 선택을 해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자살로까지도 광범위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식량을 조달하고 자기보다 커다란 10톤씩 되는 고래도 잡아서 어항 속에 집어넣고 5톤짜리 코끼리도 길들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인간이지만 정신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폭발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여러분, 자녀들 중에 사춘기 자녀들을 데리고 있는 부모들이 있습니까? 아이들을 잘 기르셔야 됩니다. 그들은 절대 건드리면 안됩니다. 왜 그러냐고 자꾸 따지고 그러면 안됩니다. 엄마가 10줄로 물어보고 아이가 1줄로 대답을 해도 그건 그렇다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중입니다. 엄마나 아빠가 자꾸 건드리면 화살을 엄마, 아빠에게로 돌려서 대판 싸워버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신과 싸우는 것 보다는 보이는 부모와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열 받게 하지 말고 어렸을 때 많이 사랑해 주면서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신의 온전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지만 인간은 자살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아무 동물도 스스로 자살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인간만 그렇게 자살을 합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죽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너무나 바르게 살고 싶어서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견딜 수 없고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바르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사는 것이 허락이 안 되기 때문에 죽는 것이 자살입니다. 인간만 그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은 의지의 표현입니다. 굉장한 의지의 힘입니다. 결국은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비록 육체적으로는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정신은 그런 복잡하고 뛰어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양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자신을 땅에 있는 것이고, 마치 조회 시간에 국기에 경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인공위성이 지구 주위를 2시간마다 한 바퀴 돌면서 몇 년째 돌고 있지만 지구와 만난 적이 없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은 자신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들의 삶에 경고장을 보내기 위해서 오늘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시인이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자기도 한 때 목자였던 사람이었고, 양들을 인도했었는데 자기가 양을 인도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도 자기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양을 목자로서 인도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제일 먼저 강조해야 될 것은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여행하고 있던 한 여행객이 어디에다가 쓴 글입니다. 크지 않은 도로를 타고 달리는데 도로 이 쪽에도 풀밭이고 도로 건너편에도 풀밭입니다. 이쪽에서 양 떼들이 수백 마리가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도로 사이를 걸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목동이 오줌이 마려웠습니다. 그래서 양들을 두고 저기 뛰어가서 사람 안 보이는 곳에서 소변을 보고 있으니까 양 떼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들이 멈춰 섰습니다. 그래서 경적을 울리고 라이트를 깜빡였지만 양들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목동이 와서 ‘가자’ 하고 부르니까 아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동이 양을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말 같은 것은 다릅니다. 말은 다 풀어놔서 풀을 먹입니다. 밤이 되면 카우보이들이 말을 달리면서 말들을 위협합니다. 포위를 합니다. 그리고 총을 쏘면 말들이 놀래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목동들이 포위망을 좁히면서 총을 쏘면서 말들을 몹니다. 말들이 미친듯이 달려가면서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면 우리 속으로 들어가고 문을 닫음으로써 목동들의 하루가 끝나는 것입니다. 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가 앞서서 인도하면 그 목자를 따라가면서 양들은 따라옵니다. 빨리 달리라고 뒤에서 총을 쏴도 양들은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눈이 남 보이기 때문에 항상 보이는 거리에서 목동이 양떼들을 지팡이로 인도하지 않으면 양떼들은 어디로 가야 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목동이 양들을 인도하는 방식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데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항상 인격적인 방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주일을 지켜야 합니까? 안 지켜야 합니까? 주일을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큰 일이 일어난다. 둘째 아무 일도 없다. 첫째입니까? 두 번째입니까? 큰일이 일어납니까? 요즘 왜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결석을 합니까? 모두 죽었습니까? 지난주에 결석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가서 죽었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도 대담하게 교인들이 교회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한다고 하는 데 그 많던 교인들은 어디 갔습니까? 꽉 차야 되지 않습니까? 500명 교인이면 500명쯤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400명쯤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안 나와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수없이 실행해 본 결과 안 나가도 별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면 사고가 나서 죽는다고 하더라.’라고 하면 무서워서 어떻게 교회에 안 나오겠습니까? 온 사람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동기 자체가 무서워서 왔기 때문에 너무 두려워서 왔기 때문에 목표 자체가 안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금 안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첫 번째, 큰 일 난다. 두 번째, 별 일 없다. 첫 번째입니까? 두 번째입니까? 첫 번째 하자니 너무 대담한 것 같고 두 번째 하자니 너무 두렵고, 그것이 심정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주일을 빠져도 좋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스스로 깊이 깨닫고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에 교회를 가려고 했습니다.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내내 힘들게 직장생활을 했는데 토요일 날 밤늦게까지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수를 막 하고 시계를 보니까 벌써 11시 10분 전입니다. ‘큰일났다’ 생각하고 세수를 하고 눈곱 띄고 로션 하나 바르고 코트를 하나 걸치고 막 가려고 하는데 따르릉 하고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세요?” “야, 니 친구 아무개야. 우리 모두 오늘 관악산에 등산하기로 했잖아. 왜 아직도 안나와? 빨리 나와” “안돼, 나 오늘 교회 가야 돼!” “무슨 교회냐? 놀러가야지? 이 좋은 날. 잔말 말고 빨리 와.” “안돼, 나 진짜 교회 가는 중이야.” “그러면 올 때 성경책을 가져와. 낮에는 우리랑 놀고 저녁 때에 교회 가. 너의 하나님은 낮에만 오시고 저녁 때는 안 오시냐? 너의 하나님은 출근하시냐?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나 계시다매.” 낮에는 우리랑 놀고 밤에는 교회 가라하고 전화를 툭 끊는 것입니다. 끊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교회를 갈까? 등산을 갈까?’ 마음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서 예배드릴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왜? 그 긴 설교,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리는 목사님의 끝날 줄 모르는 긴 설교, 여기저기서 졸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 우울한 예배의 분위기, 재미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가며 이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닐고 너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성경책을 가방을 넣으면서 ‘그래, 내가 저녁 예배에 가기로 하자.’ 하고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봄날의 따뜻한 햇살이 쫙 비추고 잎사귀들이 파릇파릇 나기 시작하고 함께 흥얼거리며 친구들과 만나서 떠들면서 등산을 하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3분의 1쯤 관악산을 올랐는데 “우리 너무 배고프다. 이제 더 올라가지 말고 여기 어디서 얘기나 하고 놀자.” 그러고 평평한 곳을 찾아서 돗자리를 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각기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맛있는 도시락을 자기 것까지 싸 왔습니다. 너무 목말랐습니다. “얘들아, 나 물 한 병 다오. 나 물 좀 마시자.” 그랬더니 “우리는 이게 물이야.” 하고 내 놓는데 맥주였습니다. “맥주는 나 교회 다녀서 술은 안 마셔. 나는 물을 먹고 싶어” “물은 없어. 이것이 음료수야.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야.” “아니야, 술이야” “우리 투표해볼까?” 그랬더니 8명의 친구가 모두 맥주는 술이 아니고 음료수라고 투표를 했습니다. “이것이 음료수니까 먹어라” 할 수 없이 한 모금 먹었는데 그동안 오랫동안 먹지 않았는데 입맛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맛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통 먹고 도시락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먹다 먹다 보니까 오후에 되니까 8 깡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나하게 취해서 친구들과 함께 사이좋게 이야기하면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관악산이 돌계단이 가파르게 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내려오는데 갑자기 무엇을 밟았습니다. 바나나 껍질이었습니다. 미끄러졌습니다. 몸이 공중으로 붕 올라가나 했더니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는데 앰뷸런스가 왔습니다. 멀리서 이런 저런 소리가 들립니다. ‘큰일났다. 큰일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부서진 데가 없구나. 아작이 났다. 아작이 났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몇 주 동안 있다가 온 몸의 깁스를 아직 못 풀었습니다. 너무 너무 교회를 가고 싶어서 교회 가겠다고 하고 와서 안내 위원의 인도를 받으면서 교회에 와서 깁스를 감은 채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주일을 빠졌더니 이렇게 내 몸이 박살이 났습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은 너무너무 무서운 분이시니까 절대 주일을 빠지지 마세요.’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자매처럼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담대하게 주일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진짜 이렇게 살아도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노예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든지 주일을 지키든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오는 진심을 가지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비결입니다. 하나님 앞에 얻어맞을까 봐 ‘누구는 하나님 잘 믿지 않다가 쫄딱 망했다더라. 하나님 제대로 믿지 않다가 큰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맨다더라.’ 그런 말 너무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일 불러 가셔도 오늘은 내가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20년 30년 후에 불러가도 내일 불러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의지하다가 주님께 가겠습니다.’ 라는 신앙이 인격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알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하면 2시간씩 드라마를 정주행으로 1편, 2편, 3편, 4편, 5편 어떤 날은 몰아 보기로 하루에 8편씩 보면서도 소파에서 꼼짝도 안 하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에는 한 시간의 설교도 못 들어서 용을 씁니다.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연예할 때 기억 안 나십니까? 저는 우리 집사람하고 연애를 할 때 아침에 만나서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8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것이 연애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어디서 나옵니까?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흘러나오는 그 믿음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교육하라고 그럴 때 인격적으로 교육하려면 말이 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안 통하면 서로 대화가 안 통하는 데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불가능 한 것입니다. 벽창호하고 무슨 인격적인 관계가 생깁니까? 대화가 되어야지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도 늘 대화할 수 있는 관계는 무엇 때문이라도 끊어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늘 대화가 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마음에 안 든다. 내 아이들의 깜냥이 거기 밖에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아예 공격을 해서 관계를 깨뜨려서 엄마, 아빠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그런 끊어진 관계를 가져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인격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전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느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주시고 하는 교감이 있을 때 그 때 철이 드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끌려 나오고 벌 받을까봐 교회에 나오고 아니면 그냥 왠지 일주일 내내 교회 안 나오면 찜찜하니까 교회에 나와서 때우는 식으로 교회에 나와서는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신앙생활을 해도 마지막에 죽을 때는 두려워 떨면서 천국인지 지국인지 감도 못 잡는 가운데 죽음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연조? 교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사람들이 수십 년 다닌 사람들이 교회 힘들게 합니다. 연조? 연조가 잘 못 되면 곤조가 됩니다. 은혜 없이 횟수만 흘러가면 알을 못 낳는 폐계닭 같이 전도도 안 합니다. 거룩한 행실도 없습니다. 그냥 오래 다녔을 뿐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조라는 것은 매일매일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습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 앎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 앎
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캐나다에 가서 사람 키 두 배 정도 되는 나무를 봤습니다. 아주 어린 나무인데 가이드 하는 사람이 저 나무가 300살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땅이 너무 험하고 바위덩어리라서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300년이 되었는데 사람 키 두 배 밖에 못 자란 것입니다. 기름진 땅에서 나무가 300년을 자랐으면 아름드리 나무가 됩니다. 연조? 은혜를 많이 받으면서 세월이 흘러가면 큰 나무가 됩니다. 큰 나무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없이 세월만 흘러가면 말라 비틀어진 분재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되는 마음, 그 말씀과 은혜에 깨어진 마음, 그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흐르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깊은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면 큰 나무가 됩니다. 그 씨가 흩어져서 수많은 자손들이 믿음으로 번성합니다. 나무들이 크게 자라면 벌레들이 모이고 벌레들이 모이면 새들이 모이고 열매들이 떨어지면 들짐승들이 모이면서 생태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교회라고 하는 산에 묘목으로 여러분들을 심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연조가 오래됐는데 분재처럼 자랍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이 흘렀는데 거목처럼 자랍니다. 어떤 사람은 막 심은 나무로 묘목처럼 자랍니다. 그러면서 숲을 이루어 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의 심정을 느껴 보셨습니까? 주님의 심정이 느껴져서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그 자리가 눈물로 흠뻑 적셔 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울면서 기도해 본 적이 언제 입니까? 가슴을 치면서 자녀를 위해 조국을 위해 교회를 위해 목회자를 위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사랑하는 구역 식구들을 위해 자기의 형제들을 위해 불신 부모와 남편을 위해 그렇게 슬피 흠뻑 울어 본 적이 언제 입니까? ‘주님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다.’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슬피 울어 본 적이 언제 입니까?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까? 그것이 생명의 은혜입니다. 그 후에는 눈물로 크는 나무입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으로 크는 나무가 아니라 눈물로 크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는 피를 뿌리셨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 교회를 이어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배의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 깊은 기도가 있는 믿음 생활, 사랑이 있는 교회 생활,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그 첫 번째,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거기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목자라는 말 속에서 이런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진기하시고 혼 내셨지만 그것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기를 인도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진기를 받으면서도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사랑으로 자기를 이끄시기 위한 것이다.’ 자기를 혼 내시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더 찢어지신다.’ 라고 신앙의 철이 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말년에 이 아름다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일? 여러분들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나오고 싶으면 안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강제로 불러내겠습니까? 나오고 싶으면 내일 새벽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면서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아, 들어보니 굉장히 길기만 하고 가슴에 와 닿지도 않더라. 내일 가지 말아야지. TV나 봐야지.’ 그렇게 결심하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안 말리십니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가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와야 하는 의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저는 잘 안 다닙니다. 일 년에 두 교회 정도 집회가면 많이 가는 것입니다. 안 갑니다. 왔습니다.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가지고 계신 생각이 무엇일까? 헤아리는 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로 짐승 중에서도 양으로 대해주시는 이유입니다. 당신 의지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또 하나 보여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목동이 집에 돌아와서 양을 헤아려 보니 한 마리가 빠졌습니다. 언제나 사고치는 양이 사고를 칩니다. 목자는 양을 알았습니다. ‘그 양이 어딘가 떨어졌구나?’ 그리고 저녁 시간에 그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 양이 한 마리에 얼마다’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갈 데가 없는 그 양이 어디선가 슬피 울고 짐승의 밥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목자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그 양을 찾았습니다. 찾아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 성경에 보면 어깨가 복수로 나옵니다. 죽은 시체 매듯이 온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무등 태우듯이 그렇게 양을 편안하게 업고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어이! 여러분들 저녁 먹었어?” “아니요” “잠시 우리 집에 모두 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잔치를 할 거야!” “왜요?” “내가 잃어버렸던 양을 잡았거든!” 설마 그 양을 바비큐 해 주겠다는 뜻은 아닐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모두 모입니다. 양 한 마리 찾았는데 실제로 주인은 소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 주인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들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에게 남는 장사였습니까? 밑지는 장사였습니까? 아무도 ‘저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셔서 주님은 확실히 덕을 보셨습니다. 나 같은 사람 없습니다.’ 하는 사람 손들어 보시겠습니까? 누가 있겠습니까? 구원받아서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날들은 주님께 신세진 날들이었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고 심지어 죄를 지어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오히려 우리의 허물을 감추어 주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대해 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목자의 사랑 때문에 잃은 양을 찾았듯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실망시키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하여도 앙탈을 부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교부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무슨 커다란 손해라도 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기를 마치 그렇게 하지 아니할라 치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협박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만족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라고 타이르시고 매달리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지금 여기 오기 전 영국에서 온 손님을 만나고 한 서너 시간 대화를 하다가 왔습니다. 이 분은 전세계적으로 모금을 하는 모금단체의 대표인데 일 년에 걷는 돈이 3조 6천억쯤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돈 있는 부자들에게 걷어서 가난하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분이 골드만 삭스의 책임자로 근무를 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물어봤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그러니까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슈퍼볼에 당첨이 되어서 이번에 최고의 당첨금이 올라갔는데 1조 천억입니다. 누가 잭팟을 터트리면 1조 천억을 받는 것입니다. 당첨자들이 안 나오면 쌓이고 쌓여서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역대 슈퍼볼에서 당첨된 사람들을 다 추적을 해서 행복해졌는지를 봤더니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불행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10명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계를 들어서 매달 복권을 한 50만원어치 샀다고 합니다. 당첨이 되면 모두 나눠 가지기로 했는데 2천 8백억 원이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10명이 280억씩 나눠 가졌습니다. 그 10명을 추적해 보니까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주 고급차를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아내가 이혼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젊은 여자와 결혼하고 네 번째, 아주 멋있는 집을 사는데 보통 빠르면 1년 6개월, 길면 3년 안에 그 돈을 모두 잃어버리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 중독자가 되고 새로 만난 부인하고도 그 안에 다 이혼을 하고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살하는 것이 코스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그래서 신앙이 들어가고 나면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명예나 혹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이것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것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맞바꾸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나의 육체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예수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너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니면 도저히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이 죽을 것 같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명예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사랑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모든 것이 있어도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오직 하나님이 내 인격 속에 오셔서 나를 설득하시고 감동주심으로써 내 마음을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여러분 목숨 걸고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때에 그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그 죄 가운데 건져 주셨고 하나님 없이 살아갈 때 내 마음이 어떻게 지옥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다시는 거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을 받으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신앙,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 것 이외에는 또 다른 선택의 길이 없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말 그랬겠습니까? 다윗은 훌륭한 임금이었고 뛰어난 장수였고 위대한 시인이었고 탁월한 철학가였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엄마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는데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형들을 편애했습니다. 다윗은 형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가 고백을 했겠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쌓인 것이 많으면 그 고백을 했겠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일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정말 자기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이상적인 여인을 만났는데 그것은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들 중에는 자기의 신앙을 닮은 아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자식들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강간당했다고 가슴 아픈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 강간범이 자기 배 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왕국의 반란이 일어나서 적들이 쳐 들어온다고 하는데 그 우두머리가 자기 배 속으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기를 들고 심지어 자기와 잠자리를 했던 아내들, 그에게는 어머니뻘인 여자들을 백주에 간음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합니다.
이 정도되면 이 일 중에 한 가지만 일어나도 우리는 거의 우울증에 걸릴 것입니다. 죽고 싶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모든 것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살라드 원’,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진짜 없었기 때문에 없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일, 채울 수 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물러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고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으로 행복해져 보려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돈 많이 생기면 돈 때문에 불행해지고 그 사람이 명예를 얻으면 명예 때문에 비참해 집니다.
결국은 우리의 참된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짜 부족한 것이 너무너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자기는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왜? 모든 것이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없어서 부모도 자기를 버렸고 자식도 자기를 버렸고 자기의 동료들도 자기를 배신했고 아내도 자기를 버렸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 시인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큰 사랑이 이 시인의 마음에 충만하게 넘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없어도 더 많이 있으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3살쯤 되었을 때에 기도원을 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너무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기름으로 불을 떼고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쬐는데 한 권사님이 찬송을 같이 부르자고 했습니다.
(찬양)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찬송을 부른 후에 간증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 찬송만 부르면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내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있었는데 그만 사고로 죽었습니다. 죽고 너무너무 괴로워서 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는데 이 찬송이 떠 올랐습니다.’ 잔잔한 바다로 항해하는 것 같은 인생의 큰 풍랑이 불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그 풍랑으로 인하여 내 인생을 더 먼 길로 더 빠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딸이 주님의 편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하며 이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오.’ 노래했던 바울의 신앙 고백도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인은 너무 모자란 것이 많았지만 불행한 인생을 살았고 피눈물 나는 생애를 보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충만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고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이면 충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사랑과 바꾸어서 가질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간절하던 신앙,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목말라 하던 신앙은 어디에 갔습니까? 오늘 시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인생의 고통스러운 골짜기를 지나는데도 거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고 한 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산 인격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 눈물이 되어 흘렀고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시련과 괴로움 속에서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같은 분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어린 양으로 사랑하시면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시인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아도 마지막에 하나입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물건을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있어도 그것은 불 들어오지 않는 가전제품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고 우리의 심령을 적셔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람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매맞고 돌아오지 말고 주님이 이렇게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불러 주실 때 그 때에 하나님 앞에 돌아올 날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베푸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저는 확신합니다. 기도하고 이 교회에 오기로 했을 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무엇인가 이 말씀을 하시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 비인격적인 신앙생활, 억지로 이끌려 하는 것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책임있는 한 실존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여러분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나는 여기 왔습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이것을 받을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전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지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신앙고백 속에서 사시기를 원한다면 이 인격적인 신앙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분이니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피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적셔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그 사랑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께 발견되었고 예전에는 우리들이 세상과 죄를 구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인격적인 신앙으로 주 앞에 부복하며 하나님 앞에 살고 싶어 하십니다. 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