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콘서트
녹취자 : 오희열, 오지윤
행복콘서트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의 주제가 “행복”입니다. 이 세상에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도 지금보다는 나중에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이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이 행복은 어떻게 우리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긴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기차가 처음 출발하는 출발역에서 마치 기관사가 기적을 울리고 출발하듯이 여러분에게 오프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 않은 시대는 없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집니다. 저는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지 않았고, 이 세상에 빛이 되기 위해 예수를 믿은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은 삶이 너무 불행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싶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제 교회에 와 보니까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실제 교회 안에는 행복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기는 했는데 그들조차도 자기가 왜 행복한지를 잘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더 우스운 것은, 불행한 사람들은 자기가 왜 행복하지 못한 지를 더더욱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놀라웠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철학적인 질문들이 다 묻혀버렸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갖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을 갖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예전에 잃어버렸던 철학에 대한 사랑과 사색에 대한 도전을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에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을 추구하고 갈망합니다. 그런데 행복해보이지는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성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는 것 사이에 중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모순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행복이 고대 철학부터 시작해서 행복에 대한 관심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쭉 전개되어 오다가 현대에 와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어마어마한 물질적 자원들이 쏟아지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사는 정신에서 물질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 이것이 행복을 나타내는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늘 인간은 물질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더 많은 물질을 누리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꿈꾸고 바라는 바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데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소비하면서 그 행복을 찾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비해서 행복해질 조건을 갖추려고 하는데 그것은 돈 버는 것이 아니면 이 세상에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시작했는데 지금 와서는 자기 자신을 가스라이팅 하면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그것이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는 현대의 모순된 두 자아상입니다. 이런 가운데 사상적으로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현대에 들어오면서 진리에 대한 가치기준을 전부 거부하는 풍조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행복이라는 본질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걸쳐있는데 그런 점에서 진리와 비슷합니다. 내 밖에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그것이 나와 관련 맺지 않으면 그 진리가 나의 행복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복도 객관과 나 사이에 걸쳐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족하기만 하면 무조건 행복이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만족은 살인범에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만 행복하면 나는 행복한가? 그것은 또 아닙니다. 객관과 주관 사이에 걸쳐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객관적인 기준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정신적이고 영원한 것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감각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고 어마어마한 기술문명이 발달되어 나오면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찾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대화하던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어떻게 내 기대에 그렇게 못 맞춰줍니까? 나는 항상 뺨을 맞대고 자고 싶은데 당신은 누가 옆에서 접촉하는 것을 싫어 하잖아요.” 그래서 챗봇에 들어가서 “내 아내는 뺨을 맞대며 자고 싶어 하는데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질문했더니,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네 가지 지침을 차례대로 주는데 완벽한 카운슬링이었습니다. 챗봇에 들어가서 시연해보니까 정말 심각하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고난주간이 다가오는데 무슨 설교를 할지 질문하면 뭘 설교해야 할지 가르쳐주면서 이 순서대로 무엇에 강조점을 두고 설교하라고 하니까 이제는 설교자들이 설교를 해도 그 설교가 AI의 산물인지 설교자 자신의 설교인지를 의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생각과 관계가 없는 곤충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행복의 모본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여행을 떠나보시겠습니까?
(패널 소개)
(영상 1)
(질문 1) 이종환 교수님,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이종환 교수) 철학에서는 어떻게 대답하느냐를 이야기하기 전에 철학이 뭔지부터 이야기하고 행복이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철학 교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 가지 편견들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뭔가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사실 이 북콘서트를 몇 달만 일찍 했으면 여러분의 그 편견에 부합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까지, 코로나 기간 약 3년 동안 머리를 길러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습니다. 코로나가 대략적으로 끝날 즈음에 머리를 잘라서 기부했습니다. 지금은 굉장히 정상인 같은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머리를 기르고 교회를 다닐 때는 교회 성도들이 저를 굉장히 무서워했습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도인 같다는 생각도 하고 말싸움을 잘 하는 사람, 말로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이 있기도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현실의 문제들과는 괴리되어 굉장히 추상적인 이야기들, 우리 김남준 목사님도 추상적인 말씀을 많이 하시기도 하는데, 철학하는 사람들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지금 3월에 대학에서는 신입생들이 들어오는 시기입니다. 저희 과 신입생들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서 만나서 1박 2일간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들 철학과에 들어오면 늘 걱정하는 것이, 이것을 어디에 써먹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굉장히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도인같이 살아가니까 현실의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현실적인 것들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주로 합니다. 그래서 행복과는 거리가 굉장히 먼 것 같습니다. 저희 신입생들도 철학과에 들어오면 어디에 써먹냐고 하면서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제가 준비한 첫 번째 그림을 보시면 이 사람은 탈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 서양철학에서 가장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이 탈레스에게 사람들이 했던 질문이, “그 철학해서 뭐합니까? 어디에 써먹습니까?”였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질문입니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쓸모가 있는지 입증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그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사진을 보십시오.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바티칸시티에 있습니다. 교황이 사용하고 있는 개인 서재 안에 있는 그림입니다. 교황이 심각한 문제나 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 신학적인 문제들을 사색하는 개인 서재에 실제로 이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철학은 그런 종류의 사유와 관련된 것이고 고민과 관련된 것인데, 제가 철학과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항상 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다른 학문과 다른 점은,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 보통 많은 사람들은 지혜가 무엇인가? 아까는 행복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셨는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혜를 알고 있으면 좋겠다, 그것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생각하지만, 철학은 사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활동하고 어떤 것을 욕구하고 바라고, 지혜를 욕구하고 바라는 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입니다. 다른 학문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 번역에는 “학”자가 붙어있지만 원래 그리스어에서는 “동사”입니다. 어떤 종류의 활동입니다. 그러면 어떤 활동이냐?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 그것이 철학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까? 아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는데, 쉽게 말해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그 “잘”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모든 사람들은 잘 살기를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인트로 때도 말씀하셨고, 영상에서도 보니까 인간과 로봇이 다른 점이라는 것은 맨날 행복 이야기를 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살고 싶어 하는 활동이 바로 행복입니다. 철학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잘 사는 것이 무엇이냐? 왜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살기가 힘들어서 입니다. 여러분 살기가 많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저도 살기가 참 힘듭니다. 사실 오늘 주일에도 이런저런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있어서 오늘 오후에 오는 게 피곤해서 힘들다고 생각하면 왔습니다. 사는 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에 태풍이 온다고 하면 한 일주일 전부터 기상청에서 예보를 해서 태풍의 진로를 알려주고 그 진로에 있는 곳에는 계속해서 대비하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언제 태풍이 올지, 언제 갑자기 날씨가 추워질지, 언제 갑자기 더워질지 다들 몰랐을 것입니다. 사는 게 힘듭니다. 우리보다 그런 것이 훨씬 더 힘듭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옛날에는 전쟁도 많았습니다. 이 그림은 트로이 전쟁인데, 우리는 그나마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전쟁의 위협이 강한 나라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끊임없이 전쟁들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욕망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쟁과 자연재해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내가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런 괴로움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철학에서 맨 처음부터 다뤘던 문제입니다. “잘 산다”고 할 때 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어떤 지향점을 갖기 보다는 이런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것들로부터 피하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행복의 목적이었습니다. 요즘에 현대에 와서 이런 생각들이 다시 인기를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며 그 욕망에 계속 이끌리고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게 되니까 불행해집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여러분이 많이 보셨을 텐데, 2차대전 때 영국 정부가 내세웠던 구호였습니다. “전쟁이 오기 전에도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계속 하던 일을 하시오.”하고 영국 정부가 사람들에게 요구했던 구호입니다. 요즘 이런 종류의 철학이 다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철학을 처음 했던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인들, 특히 스토아학파 사람들인데, 다음 사진을 보시면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추구했던 행복이라는 것은 “아파테이아”였습니다. 외부의 어떤 조건들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흔들리지 말고 자조하면 사는 것, 그러니까 더 많이 바라지 말고 더 많이 욕구하지 말고, 밖에 전쟁이 난다고 해도, 태풍이 온다고 해도 흔들리지 말고 네 할 것을 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스토아 철학이 2010년대 이후에 다시 유행하는 중입니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너무 발전해서 그러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까지 무엇을 얼마나 바라야 하는가의 문제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철학에서는 특히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다음 사진을 보시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 이 철학자는 스토아학파나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욕구들을 계속해서 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끝이 없는데 그 욕구를 없애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욕구도 계속해서 발의하고, 거기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고 고통으로 피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 그래서 인간 각각의 사람들이 원래 자기가 해야만 하는 마땅한 일들을 하고 사는 것, 아까 철학이 어떤 활동이라고 했는데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래 그 적합한 자기의 기능, 고유한 기능들을 잘 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규정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원래 해야만 하는 고유의 활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양 철학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다뤄지는 문제인 다음 사진에 나타나는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로마 시대 무덤에 붙어있던 모자이크인데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그노티스 아우톰”, “네 자신을 알라”입니다. 네가 원래 해야만 하는 기능, 네가 원래 바라야만 하는 욕구, 네가 바라야만 하는 정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적절하게 그 안에서 행동하라는 것, 이것이 서양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입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2시 예배 때도 똑같은 설교를 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설교를 잘 들으셨으면 여러분이 지식을 잘 아는 것과 그 지식이 여러분의 삶의 각각의 부분에 연결된다고 하는 것을 목사님께서 굉장히 많이 강조하셨는데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런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을 보시면 제비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유명한 속담을 사용합니다. 하나를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훈련 되어져서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자기 자신이 원래 바라야만 하는 내용들을 알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욕구하고 훈련하는 삶,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철학에서의 문제로 남는 것은 그 각각의 자신을 안다고 했을 때 어떤 기준으로 알 것이냐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의 의견이 다 갈리고 정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아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데에서는 결국 주관성으로 흘러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바라는 것은 100억짜리 집을 가지고 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틀렸는지,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근거들을 철학에서는 지금까지 분명하게 제시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너 자신을 알아서 그것을 계속해서 추구하고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삶이 행복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진리의 근거들을 철학 자체가 아직까지는 제시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금 길어졌는데 이렇게 마치겠습니다.
(권호 교수) 깊이 있게 잘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늘 받았던 질문 같습니다. What is happiness? 행복이 무엇이냐? Happiness는 I, C 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Identity. 두 번째로는 무엇을 하며 살지를 아는 것입니다. Calling. 즉, 분명하게 내가 누군지를 알고 선명하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상태, 그 상태에서 몰입하는 intensive 한 감정과 그 열매가 저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무엇을 해야 할 지 아십니까? 김남준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책 12페이지에 나옵니다. 그림을 보여주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엇을 갖기 위함이 아니요,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되기 위함입니다. “됨”, “됨”에서 “함”이 나오고 “함”에서 “가짐”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즉, 무엇인가 되는 것입니다. Identity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뉴욕을 다녀왔는데 브로드웨이에 여러 뮤지컬들 중에 아직까지 인기 있는 것이 라이언킹입니다. 왕이었던 아빠 사자가 죽고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눌려서 삽니다. 점점 커 가면 왕국을 보호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물을 고양이처럼 먹는데 아빠가 물속에서 나와서 “Simba” 합니다. 기억나십니까? “Simba, You should know who you are.”, “네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Simba, You should know who you are.” 그때 roaring합니다. 확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됨”,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누구이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흔들리지 않고 지향성을 가지고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몰입이 만들어내는 열매, 그것을 부분적으로 때로는 나중에 맛볼 때 그것이 행복인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 저는 이종환 교수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그렇게 행복에 대한 진지한 논고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 사람과 로마 사람들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행복을 원하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에 이를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하고 토론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통일적인 원리가 있고 그 통일적인 원리를 중심으로 질서 지어진 삶이 될 때, 그것이 모든 시련과 역경의 의미를 해석하게 만들어주고, “아파데이아”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는 무정념의 상태의 초탈도 아니고, 현실에 매몰되어 요동치는, 행복할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불행할 때는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요동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일 지어주는 원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성으로 찾아가는 행복의 한계입니다. 그것을 기독교 변증가들이 나타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세워져온 철학사에서 최고선 같은 개념들을 신학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 궁극적인 원리가 바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이시고, 그 최고의 선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창조되어 부분적으로 선을 지니게 되었다고 보니까, 그것이 어거스틴에 와서는 그것을 다 종합하면서 정리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데 있어서 빼놓지 말아야 할 논의가 프루이와 우티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인피니티브인데 프루이는 “향유하다”, 우티는 “사용하다”인데 사용하는 것은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프루이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이 없는 궁극적인 누림의 상태, 그것을 “향유”라고 표현합니다. 향유의 대상은 하나님이고 초기에는 하나님만 향유의 대상이라고 봤는데 후기에 가면서 어거스틴의 마음이 변하면서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궁극적인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사용해야 할 것을 향유하려 들고 향유해야 할 것을 사랑하려고 들 때, 거기서 사랑의 질서가 전복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원리가 하나 있고 원리에 의해서 모든 것이 통일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전복된 사랑의 질서에 대한 애착을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원인도 똑같습니다.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해지는 것이지, 불행해지려다가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계속해서 5세기에 보에티우스 같은 천재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더 규명되다가 철학이 신학 속으로 들어오고 일체가 되어 철학적 신학이 움직이게 됩니다.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등장합니다.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는 신학적으로 거의 90%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을 제법 읽은 사람도 아퀴나스를 읽기는 난해합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설명할 때 이제까지 교회의 선생이라고 하면 어거스틴 밖에 없었는데 어거스틴이 사용했던 틀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틀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교회와 자연에 대해서 가장 총체적이고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철학자가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 위대한 스승”은 자연스럽게 아우구스티누스였는 아퀴나스가 등장하고 난 후부터 아퀴나스가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들어와서 식자들 속에 퍼지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랍제국이 발전된 것을 보면서 문물의 교류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오래전에 기독교 세계관과는 맞지 않는다고 축출해서 모두 내쫓고 책들도 폐기했는데 그것이 들어오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투스마그누스라는 선생님에게 배우는데 알베르투스마그누스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를 완전히 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설명을 굉장히 멋있고 웅장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난잡합니다. 이 사람의 아주 어려운 것을 기가 막히게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 제자가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아퀴나스였습니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지고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했습니다. 거기서 행복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모호했던 주제들, 최고선이나 인간의 행복, 진리,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연관시키면서 기독교적으로 통일적으로 설명해냅니다. 그렇게 해서 사실 기독교가 아퀴나스에 의해서 세계정신을 품어 안고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기독교가 거센 새로운 사조를 이기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품을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의 노른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위 하나님에 대한 지복직관,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데서 오는 진정한 행복, 라틴어로 “비지오 데아피티카”라고 하는데,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행복에 대한 관점이 지성주의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가면서 중세철학들이 붕괴하는, 윌리엄 오캄이나 쿠자누스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유명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가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는 그런 철학적인 체계 속에서 지성중심적인 행복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점프를 해서 진정한 행복은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고 하는 복음적 행복관을 내놓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철학도 많이 알았으니까 이 조화를 꾀하려고 하다가 선택한 것이 경건의 행복이었습니다. 복음을 내가 실제로 누리는 것이 경건을 통해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 바깥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아쉬운 이야기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 행복론이 확 축소되면서 주관주의적인 경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르네상스 이후에 계몽주의로 넘어와서는 스펙트럼이 다양해져서 사람들이 무신론자부터 시작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까지 다 걸쳐있는데, 극단적인 사람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총체적으로 모든 스펙트럼에 있는 인문주의자들이 공감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은 신 앞에서 순전한 사람이 되고 이 공동체의 복락에 이바지하는 보람 있는 삶을 통해 인간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이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자유주의시대가 오면서 “신 앞에”라는 것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을 드높이는 시대가 오고, 인간이 모두 합의할 수 있는 공통된 이성이 모든 원리를 질서지우는 최종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이와 똑같은 애매모호함이 그리스 로마시대의 철학적 애매모호함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성을 그 자리에 놓았는데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인류가 겪은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이성을 보좌에 앉혀놓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며 자유주의 시대에도 그것을 찬양했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같은 원리, 도덕공감론 같은 책에서도 나오는 인간에게 있는, 그리스어로 “신테레시스”라고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도덕 감정, 도덕공통 본성에 의해서 세계는 질서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여지없이 아니라고 뭉개버린 사건이 1,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는 7천만 명 이상이 죽으면서 인간이 어떻게 저런 광기를 부릴 수 있나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한 예가 독일 사람이 러시아 병사 두 그룹을 포위해서 생포하게 되는데 한 그룹이 60만 명씩이었고 모두 120만 명을 생포했지만 처음부터 그들을 먹이고 재울 계획이 없었습니다. 모두 집단적으로 굶겨서 죽이는 참혹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면서 문학적으로 이야기하는 다다이즘이나 허무주의,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성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욕망에 상당한 정당성을 두어 욕망을 위로 올리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그 모든 것을 원리짓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니까 우리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도덕의 원천이라고 부르짖는 해체주의적인 상황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 정신이 본격적으로 구현된 것이, 70년대 히피운동 같은 것으로 번져나가게 되고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 온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그런 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안 합니다. 그리고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누가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없는 평안한 삶, 그것이 행복이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병들고 늙어가고 죽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 지에는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끊임없는 마취입니다. “꽃길만 걸을 수 있다, 행복할거야, 괜찮아, 너는 이길 수 있어, 너는 소중해.”라고 이야기하는데 고립사한 사람들의 집에는 항상 그런 책들이 서너 권씩 꽂혀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에 매우 적합한 시점에 와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2)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원하는데 정작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권호 교수님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권호 교수) 답을 드리기 전에 마음이 아픕니다. 아련함이 느껴집니다. 저도 이 고민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글을 소개해보면, 깊이 읽는 여덟 가지 복 33페이지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우리는 소유함으로, 소유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행과 고통이 다만 지상의 자원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이 소유함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진단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19페이지에 나오는데, “인간의 고통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는 자원의 결핍을 가져왔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자원이 결핍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책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읽고 목사님의 지적인 도전, 정신적인 휘저음, 다시 한 번 넓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 나름대로 청년들을 생각하면서 분석해봤습니다. 제 말로 바꾸어보면, 첫 번째 이유는 identity에 관한 문제인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질적인 것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로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를 학벌, 재력, 또 특정 능력을 가지고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긴 합니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누구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소유와 물질로 증명하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됩니다.
작년에 학력고사 1등 하신 분 이름이 누군지 아십니까? 재작년 화학노벨상 받으신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빨리 잊는데 그것으로 우리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취업도 못했는데 물질로 우리를 증명합니까? 여러분 그게 일부이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시편 139편 13, 14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여기서 “만드셨나이다”는 “사카크”라는 단어입니다. “덮다, 엮어 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우리를 피부로 덮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계획으로 덮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니라” 여기에서 “노리오트 리폴레오티”라는 히브리 단어는 “두렵고도 경이롭다”는 뜻입니다. Beyond discription, What a wonderful, 이런 뜻입니다. 내가 나를 동의할 수 없어도 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물질에 기반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하고 있고 창조의 행위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인가 예비하시고 그 계획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만드신 바”는 그 유명한 “포이에마”입니다. 영어로 번역될 때는 workmanship, master piece,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증명하십니까? 저는 사실 여덟 가지 복을 읽으면서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내가 20대에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짖었다, 존재가 흔들렸다” 이런 목사님의 글들을 보면서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합니다. 저희 집은 모두 탑클래스입니다. 전교 1, 2등을 했고 누나는 유명한 방송작가이기도 하고 동경대에서 유학도 했습니다. 저도 탑클래스였습니다. 뒤에서... 거의 꼴찌를 했습니다. 지금은 저를 좋아하지만 제가 최고로 뚱뚱했을 때가 대학교 때 48kg이었습니다. 얼굴의 3분의 1이 없었고 제 별명은 권뼈, 권코였습니다. 왜? 보이는 게 뼈와 코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이 책을 굉장히 많이 읽는 집안이었는데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 그때 유명했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이런 책을 읽었는데 제가 누군지를 더 몰랐습니다. 『수레바퀴 밑에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 뭐냐? 탕! 총 한 방을 쏘면 은빛 탄알에 피 묻히며 쓰러지는 게 인생이다.” 제가 거기에 밑줄을 긋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뮈의 책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것을 보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때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수련회에 참석했고,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엔토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 “권호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미국에서도 많이 간증했는데, “I love my son as you are.”, “너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공부 못해도 돼, 못생겨도 괜찮아, 능력 없어도 돼, You are my son. 내가 너를 사랑해.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준 거야.” 이 말씀을 하실 때 제가 바닥에 꿇어앉아서 두 시간을 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복을 논할 때 결국은 identity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20대에 부르짖었던 그리스도 안에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어떤 사람됨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더 이상 학벌로, 가진 것으로, 내가 가진 외모로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그 창조자의 손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우리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물질적인 것으로 증명하겠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너무 심한 비교와 경쟁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비교와 경쟁으로 인해 내 안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2021년 6월 영국의 킹스컬리지에서 28개국 국가 시민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보고서에 따르면 열두 가지 갈등의 항목 가운데 일곱 개의 항목에 우리나라가 거의 탑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갈등 지수가 세계에서 1위입니다. 우리는 맨날 옆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비교와 경쟁이 우리를 죽입니다. 이렇게 비교와 경쟁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 방법 중에서 김남준 목사님께서 역설, 으로 “우리는 온유한 자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온유함은 겁먹어 기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아부하거나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꿋꿋함과, 너무 말이 멋있습니다. 거룩한 꿋꿋함과 연단된 성숙함을 가진 성품입니다. 사람에게 부드럽고 친절합니다. 너그럽고 관대합니다. 자, 어떻게 경쟁과 비교 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것을 온유하게 풀어낼 수 있는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애통함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 독한 사람이 아니고 여유 있으면서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애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애통하게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애통하면서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75페이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기에 세상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Oh my God!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기에 세상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눈물 없는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래서 여유롭고 정말 온유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보고 울지 마시고, 지금도 우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 하나님 앞에서 울지 않으면 목사님 말씀대로 세상 앞에서 울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모으지 않으면 세상 앞에서 비참하게 손을 모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면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contentment, 만족입니다. 만족. 모든 상황 속에서 충만한 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갈등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닙니다. 갈등의 반대말은 사명을 향해 가는 자족입니다.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을 했던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이 ‘자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주관적인 자족이 아니고 내가 누군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경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은 사람이 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울면서 그 눈물 섞인 눈을 뜨고 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주님 믿었는데 누가 보고 버린 참고서를 주워다가 고무지우개로 지워서 보고 학비 내는 것이 어려웠는데 어떻게 자족합니까? 그런데 내가 누군지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그 자족함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때 너무 어려웠을 때 왜 나만 이렇게 사냐고 하면서 김남준 목사님의 설교 테잎을 들었는데 나보다 더 한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바닥이었으면 우리 목사님은 바닥의 바닥이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뚫고 나온 이야기를 하시면서 아직도 기억납니다. 지금도 찬양을 잘 하시지만,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하시면서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하시면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찬양을 들으면서, “그래, 나 하나님의 아들이야. 나 예수님께 갈 거야. 목사님도 걸어가고 나도 걸어가면서,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주님만 보며 갈 거야!” 그래서 죽지 않고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행복을 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질문 2) 이종환 교수님께도 코멘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종환 교수)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에 저를 부르신 것은 아마 두 분 목사님들의 은혜로운 말씀과는 다른 관점을 듣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실 거 같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다 좋은 말씀인데 그래도 돈이 있으면 좋고 명예도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들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들 하십니다. 그럴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바탕으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시고 책을 읽다 보면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순환논리가 아닌가, 결국 이렇게 해서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설득될 것인가? 혹은 내가 교회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게 아니고 사회생활도 하고 사회의 여러 다양한 가치와 사람의 생각들을 계속해서 만나실 텐데 거기 가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더 문제일 것 같습니다. 교회 오면 편하실지 모르지만 밖에 나가시면 더 불편합니다. 저는 지금 반대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고 그리스도인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많이 해 보지 않아서 되게 불편합니다.
지금 말씀하신 여러 요소들, 돈, 명예, 여러 가지 즐거움, 이런 것들이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세속 철학에서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잠시 언급했고, 목사님께서 이후에 쭉 설명하셨던 아리스토텔레스도 돈은 행복의 요소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너무 쉽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돈은 무언가를 사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수단을 가지고는 우리는 궁극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명예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참 좋겠다, 저 사람은 어떤 지위에 있구나!” 이런 식으로 평가해주는 것인데, 결국 그 평가의 내용은 “저 사람은 참 좋겠다.”인데 그 좋은 게 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명예도 어떤 좋음에 항상 의존합니다.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맛있는 음식, 다른 사람과의 간단한 대화를 통해 행복했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종류의 즐거움은 인간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동물들도 느낍니다. 다른 생기가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인간이라면 그것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아까 두 분 목사님, 특히 권호 목사님께서 어떻게 산다는 것이 행복인지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들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일단 그 행복의 내용들은 차치하고라도,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돈이나 명예나 즐거움들이 궁극적인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세속 철학에서 모두 동의합니다. 단지 세속 철학은 무엇이 가장 궁극적인 좋은 것이냐, 아까 목사님께서 최고선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그 최고로 좋은 것들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이나 명예나 즐거움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를 완전하게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 대답을 찾아야 여러분에게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만약 지위가 있다면 그 지위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의미가 있어서 여러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지,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여러분이 찾아가셔야 합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도, 교회에 있지 않은 사람도,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마저도 다 받아들이는 내용들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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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3 ) 기독교의 행복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김남준 목사) 책을 쓰자마자 초판이 거의 매진됐는데, 천으로된 재료를 못 찾고 있어서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외국에서 수입해와서 3월 15일에 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책을 손에 넣기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책을 쓰고나서 여러 통의 팬레터를 받았습니다. 화면으로 보여드린 것 말고도 카톡이나 문자로도 많이 받았습니다. 공통적인 내용으로는 팔복이 행복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심각한 갈등을 느꼈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규모가 있는 집단이 있었는데, 그것이 영지주의입니다. 다음으로는 마르키온 이단, 마지막으로 마니교 이단입니다. 특히나 마르키온 이단의 경우 구약을 읽을 때, 조금만 잘못해도 모두 죽여 버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신약을 볼 때는, 잘못을 하여 현장에서 잡혀와도 용서해주시고,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다시 재산상속을 해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보며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절대로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믿는 신은 결코 구약의 신일 수 없다고 하며 성경에서 구약을 잘라버립니다. 신약 중에서도 일부만을 남겨두며 나머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리하며 마르키온 정령이라는 본인 나름의 성경의 구획을 짓습니다.
역사가 많이 흐르며, 인류의 이성이 교만해졌을 때, 계몽주의 시대를 넘고 19세기를 지나면서 성경에 대한 비평이 시작됩니다. 역사적인 문서들을 모두 대조하며,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은 함무라비 법전을 베낀 것이다. 원래 구약성경은 하나의 문서가 아니라. 스무 개가 넘는 방대한 문서의 조각들을 합쳐서 본인이 믿고 싶은 하나님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한 비평적인 방법이 신약성경에도 들어오게 됩니다. 신약성경이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 아니다 논쟁이 생기며, 성경을 잘라내야 된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조차도,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의 최소공배수가 산상수훈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거기에 녹아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다루는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고, 그 백성들이 누구며, 그 백성들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과 윤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집과, 두 기둥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사상과 윤리, 이 두 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나 극단적인 모든 자유주의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산상수훈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눈 여겨봐야 할 부분은, 그 산상수훈의 시작은 팔복이라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며 팔복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왜 행복한 사람인지 먼저 설명함으로써 인류의 주목을 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행복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복으로 팔복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에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충격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최초의 청중에게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의 삶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고, 한 편에서는 종교적인 자유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종교적으로 많은 자유가 허락됐지만, 예전에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사회였습니다. 이제는 종교적으로 어떤 사람이 잘못돼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로마 법정의 힘을 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종교의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재정일치를 못하는 처지가 됐고, 그러한 본인 나름대로의 압박을 받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끊임없이 세리에게 수탈당하고, 로마에서 조정을 하여 총독들이 유대총독으로 가게 되면 모두 삼가 조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생기는 것은 없고, 엄청나게 고생하고, 쉽게 죽기 좋은 골치 아픈 지역으로 이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삶이 굉장히 핍절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 청중들이 가지고 있던 행복관은 종교적으로는 모호했고, 세속적으로는 당시 로마 사람들이 꿈꾸던 행복을 꿈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이 살아계신 30년대쯤에 로마 제국이 1세기 안정기에 들어갈 시기입니다. 2세기 넘어서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경제적으로는 쇠락해갑니다. 오도아케르, 게르만족의 반란으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돈을 못 줘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로마가 반도에 있을 때는 위에만 지키면 되는데, 유럽 전체를 차지한 국경을 가지고 있으니, 나라를 지키는데 용병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용병들의 월급을 주지 못해서 오도아케르의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종교적으로는 이미 사람들이 선명한 가르침들이 시들어가면서 신앙의 쇠퇴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본인들이 무엇을 따라야 진정으로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 당시에 흐르고 있었던, 흥청망청 살아가는, 로마의 정신이 병들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러한 로마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평균적인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서 생각해야 됩니다. 구약에서 복에 대한 대표적인 두 단어가 나옵니다. 에쉐르의 복과 베라카의 복이 나옵니다. 베라카의 복은 광범위합니다. 영적인 복부터 시작해서, 물질적인 복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베라카의 복은 이방인도 받을 수 있는 복입니다. 에쉐르의 복은,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영적인 행복입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이 에쉐르의 복입니다. 산상수훈의 처음 시작도, 시편 150편을 시작할 때 첫 자리에 놓은 것도, 행복에 관한 담론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완전한 행복이시기 때문에, 그 바깥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불행해지는 길입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행복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LG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패러디한 것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기술이 우리를 많이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러한 매체들을 통해서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가는 동안에는, 현실이 비현실이 되고, 비현실이 현실이 됩니다. 이것에 대한 경계구분이 어려워지는 의식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에 충실할 수 없게 만듭니다. 시간만 나면 사람들이 핸드폰을 보고, 그것이 계속 발전을 하여, 인공지능 검색이 나와서 여러 가지 지식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지식을 머리에 저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찾으면 되는데,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을 때는 검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임스 웹이라고 하는 망원경입니다. 허물보다 100배 더 가까이 정확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본 적이 없었던 우주를 내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객관적인 전망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지동설이 제기가 됐을 때, 마틴 루터와 칼빈은 끝까지 천동설을 고집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확신에 사로잡혀서 판단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우주를 보며, 지구라는 별을 보며, 지구가 절대적인 게 아니라 수많은 별들 속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듯이, 우리 삶의 행복도, 내가 만족을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만족이 객관적으로도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더 넓은 전망 아래에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질문 4) 오늘 이 자리를 함께한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남준 목사) 결론을 맺어야 될 시간이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행복을 찾아가야 되는가, 이 세상에 많은 비극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행복의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에 대해 클로징 멘트를 하며 피날레를 장식하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죄 때문에 됐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원래 좋게 창조된 세상인데, 인간의 죄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죄와는 아무 상관없이 불행해지는 경우는 극히 부분적이고, 대부분의 것들은 인간의 탐욕과 죄 때문에 이러한 불행들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팬데믹 코로나가 오기 전의 우리의 화두는 ‘소확행’, ‘욜로’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온 후에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고 6개월 만에 3만 2천 6백조의 돈이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숫자가 날아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파산하고, 누군가는 돈을 날려서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3년이 되었으니, 경제적으로 받은 피해는 큽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통해서 현재까지 상실한 경제가 3천조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또한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릅니다. 2021년도를 기준으로 쇳 값이 70퍼센트가 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게 되었습니다. 음식점에 가서 밥을 사 먹기가 힘들게 느낄 정도여서, 4500원짜리 혜자도시락이 없어서 못 팔릴 정도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소확행, 욜로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등장한 단어가 ‘갓생’이라는 단어입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욜로이자 소확행이었다면, 이른 새벽부터 목표를 정하고 훌륭하게 그것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갓생의 화두가 무엇을 지양하고 있는지는 우리에게 못 가르쳐줍니다. 왜 그렇게 갓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 자체가, 커다란 성공을 꿈꾸며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떠밀려가지 않고 생존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입니다. 소확행이나 욜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무했다면, 갓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허무보다 더 힘든, 비참하고 절실한 현실 속 고통의 느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상황이 언제 개선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취업난, 결혼을 포기하고, 자녀 낳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무엇을 희망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나 사치스러운 게 되어버린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찾아야 될 행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오리게네스라고 하는 인물은 엄청난 천재입니다. 이 사람은 3세기경의 사람입니다. 옥에 갇혀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버지 거기서 꼭 순교하시기를 바랍니다. 배교하고 돌아오셔서 그 더러운 돈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을, 나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거기서 영광스럽게 죽으시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편지를 쓸 정도로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박수를 친 사람입니다. 본인도 죽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엄마가 자고 있는 여섯 동생들을 보여주면서 “네가 순교하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 혼자서면 순교한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라고 해서, 마음을 돌려서 살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평생 쓴 책이 2000권입니다. 그러게나 책을 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팔복은 예수님이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서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인격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 본 사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을 누렸는지 말하는 것이고, 애통해 본 분으로서 애통해 본 자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위로를 주시는지 경험했고, 온유해 본 자로써 온유한 사람에게 어떻게 땅을 얻게 해주시는지 경험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어떻게 배부르는지, 모두 자신의 인격 안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한 분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만약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예수님이 행복하지 않고 불행했다고 이야기하면 기독교의 자기 모순적 선언이 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셨어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그분의 생애는 행복했는지, 물질적인 모든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을 누리신 생애였나 생각해볼 때는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생애에 들어서부터 그분은 끊임없이 주리고, 핍박받고, 고통받고, 눈물을 흘리신, 고난의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는데, 우셨다는 이야기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우시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윤동주의 시에서 힌트를 발견하게 됩니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예수에 대해 전혀 모순적인 시구 두 개를 대치시키게 됩니다. 고통받던 예수, 행복했던 사나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분의 생애는 고통으로 가득찬 생애였으나, 그것이 그분의 내면의 행복을 파괴하지는 못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항상 그분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 찬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사셨습니다.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셨지만, 이것은 자신 내부의 부패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안전한 세상, 죄인들로부터 온 것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그분의 고통과 눈물은 스스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어떠한 고통도 없는 완전한 행복입니다.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니까, 물질은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은, 그런 종류의 완벽한 행복이 아닙니다. 여전히 고통도 받고, 남을 위해 울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면서, 자신 내면의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함 때문에 누리는 행복이 우리의 신앙으로 지켜져서, 우리가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남에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경쟁력을 갖추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을 때 누리면서 사는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일 수가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들이 매일의 행복한 삶을 살고, 대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지 위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을 사소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됩니다. 나는 이러한 사상을 명랑한 삶에 관하여, 제 2번 설교에서 2시간 16분 23초 동안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내면의 세계의 행복이 부패로 흐르게 되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서울대 총장이, 내가 서울대를 졸업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챗봇에게 물어보니까, 네가 배운 모든 것을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인공지능이 답을 해줬다고 합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도 그런 정답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거스르며 사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경쟁력을 갖추며 살고, 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나 자신을 공급하며 사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사는 삶을 꿈꾸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살아야 될 삶입니다.
북콘서트에 나오면서 옷을 하나 새로 사 입었습니다. 책 색깔하고 맞췄습니다. 양말도 맞췄습니다. 이 옷을 고르는 순간에도 즐거웠습니다. 입고 있는 지금도 즐겁습니다. 뭐가 문제겠습니까? 매일매일 영원을 생각하지 말고, 매일매일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되, 항상 자신이 하나님 사랑에 매달려있어서 겨우 존재하는,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핏방울에 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됩니다. 내면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사랑하며 팔복의 사람이 되어가고, 외적으로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만, 외적인 것들의 추구 때문에 내면의 세계가 부패하게 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못생겼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나의 존재의 가치와 독특성, 고유성과 개별성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명예를 쫒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없음을 말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평판을 쌓는 일에 골문 했습니다.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명예가 너에게 행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평판이 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물도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죄입니다. 그 이외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안에 죄를 택하고 불행할지, 하나님을 택하고 행복할지입니다. 내 바깥에 있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존재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경쟁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 천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꿈꾸거나, 지옥을 구르면서 누리고, 누린 후에는 끊임없이 후회하게 될 그런 종류의 행복은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행복이 아니라며 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매일의 삶을 향유하고 즐거워하고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통해서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매 순간을 만족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두 가지 성격, 하늘과 대지 사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들도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