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이란 무엇인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1-8)
녹취자: 조경훈
모든 신학교가 위기에 휩싸여있습니다. 제가 총신신대원에 입학할 때 M. Div. 정원이 60명이었고 응시하는 학생이 1,200명이었습니다. 20:1의 경쟁률을 뚫고 M. Div.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작년에 미달을 겨우 면했고 올해 첫 미달이 되었습니다. 이 현상은 앞으로 점점 심각해져 갈 것입니다. 이런 형편은 총신이 겪기 전에 다른 많은 신학교들이 이미 겪은 바이고 외국도 심각합니다. 특히 영국에 가보면 옛날에 유수했던 신학교들이 이제는 많은 학교가 문을 닫았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이 백인들은 더 이상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유색인종들 아프리카계나 아시안 계의 이민자들이 신학을 채웁니다. 그만큼 신학교의 위기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희망이 없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나간 시대의 영광에 연연해하지 말고 어떻게 양질의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고신과의 인연을 잠깐 이야기 해 보면 저는 고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를 지낼 때 담임 목사님이 고신을 정말 사랑하시는 합동측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한상동 목사님의 제자였고 고신에서 조사생활을 하셨습니다. 박희천 목사님이라고 지금 95세가 넘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 댁에서 6개월 동안을 같이 사시면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시면서 가르침을 받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한상동 목사님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고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갖게 되었고 또 저를 고신에서 많이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은 비화인데 고신에 어느 목사님이 고신으로 귀순하실 의향이 없냐고 그래서 제가 마음에 준비가 안 되서 아직 귀순을 못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동료애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모두 아는 이야기니까 배경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진짜 사명자가 되는 길이 무엇이냐? 그 소명이 어떤 방식으로 오는 것이냐? 4가지 요소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소명은 내가 머릿속으로 ‘목회를 해야 되겠다.’라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하늘로부터 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 소명이 어떤 방식으로 임하는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매우매우 다양하지만 확실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소명의 증거, 소명을 받았다는 표징이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것은 모든 평신도들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 이것이 소명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 연민이 어떤 종류의 연민이냐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저 허무한 사람들 때문에 가눌 수 없는 슬픔과 복받치는 열정 때문에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소명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영광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에는 굉장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원해서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는 선택으로서 그것이 소명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뭔가 목회 사역에서나 신학 연구에서나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소명을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7살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은 37살의 아들이 있습니다. 목사가 됐는데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항상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저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종일관 매일 기도하는 기도 제목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명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원래 3가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에 속해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에 영향 아래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유다이즘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는 회심한 이후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관점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단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정오에 빛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 빛이 무엇이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빛이라는 형태가 독특한 형태가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미 빛이 가진 신학적인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종의 쉐키나를 경험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쉐키나가 크리스톨로지컬 한 컨버전을 한 것입니다. 기독론적으로 전환이 되어서 여호와의 위대한 쉐키나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영광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한 사건을 통해서 그는 완전히 미몽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두 가지의 확신입니다. 하나는 예수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는 확신과 두 번째는 이방인은 쓰레기다. 라는 하는 두 가지 심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역사의 전개와 발전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신학의 씨앗이 됩니다. 그 종자 씨를 가지고 선교적으로 목회적으로 발전하면서 우주론적인 기독론 내지는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고 모든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바와 같이 사도바울의 기여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이 존경은 하고 있지만 누군지는 잘 모르는 어거스틴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일들이 밀라노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비적으로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마니교의 미몽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마니교, 영지주의 같은 이단들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사람이 마니교의 미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면 밀라노에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벌컥 오르면서 그 유명한 톨레레게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존 오웬과 아주 유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경험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시편 주석에서 그가 말하기를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신비로운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은 종교개혁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됐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이야기를 바울처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만 회심의 경험이 세 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개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비텐베르그의 탑에서의 경험, 거기서 하나님의 큰 영광을 보고 어느 날 그가 고백하기를 뭔가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고 칠흙같은 어두운 하늘이 갈라지는 것 같으면서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이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그가 종교개혁가로 헌신하게 된 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 때만 그랬을까요? 과거로 돌아가 보면 우리들이 기억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기독교가 캄캄한 위기속에 들어갔을 때 베네디툭스 같은 성인이 수비야코라는 곳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우리가 아는 베네디툭스가 되어서 그가 외친 것이 ‘오라 에틀 라보라’ ‘기도하고 일하라’를 외쳤습니다. 이후에 기독교가 한참 혼란스러울 때 나왔던 도미니쿠스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서 ‘오라엣 라보라’라는 베니디툭스 수도원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컨템폴라리 에트 콘템플라타 트레데레’ ‘진리를 관상하라’ 관상되어진 것을 ‘알리스트레데레’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라’. 쉽게 얘기하면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묵상한 후 그렇게 묵상되어진 것을 설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한 인물이 나폴리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천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는데 나폴리 대학에서 자기를 가리킨 선생들 못지않은 학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끌리게 되어서 그들의 공동체를 방문하게 되고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 인물이 나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 사람이 도미니코 수도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뿐 만 아니라 그의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요한 타올러, 마이스트 에커하르트 같은 쟁쟁한 사상가들이 나오게 됩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소명의 출발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퍼킨즈라는 신학자는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신학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다는 사실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머지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경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영광의 용례는 크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 번째로 본체적 영광, 하나님 자신입니다. 두 번째로 발산적 영광입니다. 그것은 쉐키나입니다. 어느 장소에 하나님이 오신 것처럼 경험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경험이나 사도바울의 경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로 효과적인 영광,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의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학식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소명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통적으로 역사 속에서 합의를 이루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겨우 직업에 지나지 않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집단적으로 누가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커리큘럼 속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깊은 만남입니다.
저는 그것을 M. Div. 과정을 마치고 Th.M. 1학년 때 생애적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원래 이런 목회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세마이틱 랭귀지(Semitic Language)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대원을 다닐 때 혼자서 히브리어 성경 전권의 3분의 1을 파싱하면서 읽었습니다. 사이러스 고든의 우가레틱 텍스트를 완독하고 토판을 읽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순간 그런 것들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저는 불타는 설교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청교도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에 초대교회 교부들과 근대 신학자들 등등에 대한 저의 학문의 폭을 넓혀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게 되니까 칼빈이나 위대한 인물들을 읽었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전에는 흑백사진이었는데 그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비로소 그 모든 책들을 읽을 때 총천연색 동영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이 선행이 돼야 됩니다. 그것은 커리큘럼을 통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를 찾는 한 사람의 구도자로서 간절히 매달려야 됩니다. 어떤 갈망으로 매달려야 하는 건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의 한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름 없는 수사였던 시절에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는 굉장히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금식하고 고행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퀴나스야! 너는 무엇을 원하기에 나에게 간절히 부르짖느냐?’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한테 밤새 금식하며 울부짖느냐?’ ‘하나님! 당신이 저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거들랑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주님은 제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주권적이니까 사도바울처럼 들이닥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절히 영광스러운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며 진실하게 매달릴 때 거기서 주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거기서 시작이 됩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했듯이 차마 내가 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지경이옵나이다. 이렇게 더럽고 비참한 인간이옵나이다. 그런 탄식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똑같은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저내리요’ 인생의 황혼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가 한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리스어로 프로토스, first입니다. 죄질의 순서대로 사람의 줄을 세우면 맨 앞자리에 올 사람이었고 그것이 사도바울 자신의 인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영광의 경험이 유지되고 있으니까 그 영광의 빛 아래서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망하게 되었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극단적인 파괴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파멸당할 지경이 되었도다.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정한 자로서 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존 뉴턴이 노예 상인이었다가 목회자가 됐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지막에 약간 치매 끼가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걱정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아무리 치매가 걸린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정말 더러운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를 흘려주셨다는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작사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상태는 dependence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시는 장소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속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창조의 의도 자체가 모든 만물이 자연적으로 당신을 의존하게 하시고 모든 도덕적 피조물들이 심정적으로 당신을 의존하게 하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고 그렇게 의존하는 마음을 버렸을 때 아담과 하와는 범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구속사 속에 나타난 인간의 반역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떠나 독립하는 정신으로 살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의존이 상대적인 의존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존입니다. 절대적인 의존이 출발하는 것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정말 아무 가치가 없는 비참한 인간이다. 라고 하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카도쉬,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에서 자기가 존재론적으로 미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덕적으로는 자신이 불결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누군가의 중보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 마음이 구현된 것이 상하고 깨어진 심령,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51편에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레브 다끄예’입니다. ‘다끄예’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뼈째로 짖이겨긴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게 고신의 정신이었고 총신의 정신이었습니다. 80년대 총신이 합신하고 찢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당동에 숲이 있었는데 새벽과 밤이면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그 동산에 가득했습니다. 편안한 물질주의적인 환경 속에서 그런 정신들이 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깊은 인식이 신학적으로 절대적인 의존의 강령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절대적인 의존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순종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정결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핀셋을 가지고 와서 입술을 지져 버립니다. 선지자가 심장을 지진 것이 아니라 입술을 지진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사역이 바로 설교 사역입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학생들 속에서 설교자가 잘 안 나옵니다. 우리 때도 드물기는 했습니다. 신학교 3학년 때쯤 되면 올라가서 한 스피치를 하면 저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스치고 지나간 사람이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집니다. 그게 느껴지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요 1:6-8) 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빛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가 설교할 때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정결하게 되는 경험에서 오게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더러운 죄인인데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 깨끗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육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 되어서 땅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에 대해서 누군가가 묘사하기를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항상 발뒤꿈치를 들고 산 사람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정결하게 되고 나면 그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조지 윗필드가 있습니다. 그분을 존경해서 그분의 설교를 모으는 일에 몰두했던 30대가 있었습니다. 그가 매일 점검하는 체크리스트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1번의 질문이 ‘나는 오늘도 열렬하게 기도했는가?’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조언을 드리자면 지금 같은 때 전기를 많이 읽으십시오. 초대와 중세와 근대를 막론하고 청교도를 막론하고 읽으면 제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 정결함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깊은 기도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있었던 일입니다. 토요일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깊이 만나고 나니까 영혼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2년 동안을 토요일 날 교회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참 신기한 게 기도를 하다보면 잠깐 지나갔겠지 했는데 새벽녘이 훤하게 밝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마지막을 하겠습니다.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누구를 보낼까? 그럴 때 ‘Here am I’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시옵소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 때문이 아닙니다.
한 때 바울신학의 관점의 논쟁에 영향을 많이 끼쳤던 김세윤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divine enforcement 신적인 강제력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강제력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사로잡히면 무엇인가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가는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제력의 형태로 어떤 ‘아낭케’, 숙명이 되어서 나를 어딘가로 내미는 것입니다. 자기 비전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비전은 자신의 비전을 허물어버리는 데서부터 진정한 하늘의 비전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듣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그것이 설교든지 목회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 때 자신의 존재의 의미는 하고자하는 목회사역과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동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일사각오의 신앙이고 지사충성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들의 교단에 밑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역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게 선교일 수도 있고 목회일 수도 있고 교수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가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베어있어야 됩니다.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위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깊이 발견하고 자신의 목숨을 다 쏟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설교, 목회, 활동 속에 마지막으로 뿌려져야 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입니다. 그 피의 정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죽는다고 하는 죽음의 정신입니다. 그 속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의 사도 바울적인 표현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는 일체의 고백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고통하시는 상황 속에서 자신도 끝없는 고통을 느끼고 그리스도께서 환희를 느끼시는 지점에서 자신도 환희를 느끼면서 사랑의 일치, 의지와 목표의 일치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이 장엄하게 찬란하게 꽃피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칼빈의 아내 이델레뜨 드뷔르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 뭔지 아십니까? 나 죽으면 지체하지 말고 재혼해. 그런 게 아닙니다. 기운이 없어서 죽어가던 이델레뜨가 갑자기 손을 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당신을 찬송합니다. 나는 당신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그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이 절대 안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준비 잘 된 사람을 안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안 하십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을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드러내셔서 역사 속에 부각시켜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보여주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