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수련회 개회예배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2-23)
녹취자 : 오희열
이 설교는 수련회에 와서 열 번은 더 한 것 같습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고 해서 늘 더 했는데, 2000년대 초반쯤인가 교역자 수련회에서 한 시간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교역자들이 눈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여기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외국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합니다. 재능이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다른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주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잘 장사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은 땅에 묻어두었다고 주인이 돌아와서 그 한 달란트를 돌려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달란트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영어의 talent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재능”입니다. 저는 한 번도 저를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냥 부러워할 뿐이지 나는 거기 감히 미친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비유는 내 마음에 별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한 달란트의 비유는 결과가 안 좋았기 때문에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고, 나한테 딱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두 달란트 맡은 종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십시오, 제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했더니 그 주인이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라” 이 구절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다섯 달란트 맡은 종에게 한 칭찬과 똑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최선을 다한 사람이 느끼는 기쁨은 그 성취의 분량과 관계없이 최선을 다한 사람의 양심 안에서 느끼는 자유와 행복이라고 결론지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제일 먼저 주인이 칭찬한 말은, “잘하였도다” 했습니다. 이것은 만족입니다. 누가 이렇게 저렇게 했다고 하면 저도 가끔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잘했다, 정말 잘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 말은 만족입니다. 충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모자라는 것이 없이 내 마음이 원하는바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의 첫 번째 목표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리는 것, 그 이유는 내가 이 길에 들어선 것이 나를 감동시킨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길에 들어섰지 다른 것 때문에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만두고 싶고, 그만하고 싶은데도 나를 붙잡은 것은 사람의 인연이나 혹은 먹고 살아야겠다는 호구지책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나를 여기에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만족을 드리기 위한 소명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만족입니다.
어떤 제조 공장을 하는 회사에 갔는데 이런 말이 앞에 크게 써 붙여있었습니다. “Customer’s satisfaction”, “소비자 만족을 위해서 우리는 이 제품을 생산한다” 우리는 소비자 만족이 아니라 God’s satisfaction입니다. 하나님에게 잘했다는 만족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사역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만이 자기 신앙을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성에 있어서, 마음에 있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모두 드려서 하는 것은 대충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는 항상 사우나에 가서 이발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별로 안 예쁜 것 같아서 미장원을 갈까 하다가 몇 년 전에 미장원을 갔습니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사우나에서는 15분이면 염색이 끝났는데 미장원에서는 머리를 깎고 염색을 하고 두피관리를 하고 나왔는데 두 시간 반, 세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어떤 때는 원고를 가져가서 고치면서 머리를 할 때도 있는데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를 하고 왔더니 6층에 있는 직원들이 “목사님 머리가 다른 때와는 달라요. 좋은 데서 하셨나봐요.”하는 것입니다. 이발소 가면 커트를 막 하는데 미장원에 가니까 머리를 조금씩 조금씩 다 묶고 잘라내는데, 나는 거울을 봐도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돈도 비싸지만 그 시간이면 내가 원고를 한쪽 더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잘 못 가는데 어쨌든 정성을 많이 기울여서 하는 그것이 주인이 보기에 참 잘했다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대충 네비를 찍으면 홍천으로 갑니다. 정성껏 찍으면 설악산으로 옵니다. 내가 누구와 약속을 했는데 조금 늦게 되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정말 미안해. 교회에서 일하다 보니 조금 늦었는데 5분 후에 도착하니까 금방 만나자.”하고 연락을 했더니, “걱정 마세요, 목사님. 천천히 오세요. 저는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했는데 내가 도착했는데 그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도착했는데 왜 너는 없니?”했더니, “목사님 우리 약속장소가 푸쳐스컷이에요.”, “올라토가 아니고?”, “아니에요, 푸쳐스컷이에요. 제가 올라토로 가겠습니다.”하는 것입니다. 약속 내용을 확인해보니까 장소가 푸쳐스컷인데 올라토에 간 것입니다. 이게 대충 네비게이션 찍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가려면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지 약속 장소를 확인하고 가야 하는데, 정성을 기울여서 해야만 그것이 마지막에 잘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을 다녀와서 공항에 내리는데 50대 중년 여성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 긴장을 했습니다. ‘우리 교인인가보다, 아니면 누굴까?’ 하고 있는데 , “목사님은 저를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 설교를 한 5년 정도 남편과 함께 유튜브에서 청취하고 있는 애청자입니다.” 하니까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배재대학교 교수입니다.”, “배재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Thanatology을 가르칩니다.”, “아, 죽음학을 가르치시는군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도 가르치시겠네요.” 했더니 너무 반가워했습니다. 그분과 두 번째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데, 자기가 쓴 책을 보여줘서 잘 읽겠다고 하며 받았습니다. 우연히 책 쓰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책을 쓸 때 몇 번이나 교정을 보는지 물어보시는데 “제가 최근에 쓴 책은 20교를 봤습니다.”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세 번, 네 번, 많이 보면 다섯 번으로 끝냅니다.”, “아닙니다. 26교를 보면 30교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많이 보면 많이 볼수록 확실히 완벽한 문장이 됩니다.” 정성을 많이 들인 것은 항상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줍니다. 세상은 그런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막 했건 빨리 했건 늦게 했건 상관하지 않고 잘 해내기만 하면 그걸로 오케이입니다. 왜? 성과만 나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잘하는 사람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서 일을 하는 그 결과를 하나님이 더 기쁘게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과정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요소는, 지혜 내지는 기술입니다. “잘했다”고 할 때는 그것이 지혜롭게 잘 되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1900년대 말에 천진에 갔을 때 일인데, 어떤 설교 청취자가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네 교회의 목사님을 설득해서 저를 초청해서 중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인테리어를 하는데 그 당시에 4500만 원을 들여서 했답니다. 당시 4000만 원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4억이 훨씬 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복장이 터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책꽂이를 멋있게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한 달 걸려야 만들 수 있다고 했답니다. 날짜가 빠듯하니 조금 빨리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하니 절대 한 달 걸리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면 그렇게라도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인테리어에 눈썰미가 있는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집을 수리하면서 다 뜯었으니까 아예 집에서 작업을 하더랍니다. 한 일주일쯤 있다가 와서 보고 헉! 하고 놀랐답니다. 책꽂이 두께만 한 나무를 싣고 와서 줄자로 재면서 책이 들어갈 구멍을 파고 있었답니다. 일주일을 팠는데 4분의 1밖에 못 판 것입니다. 한 달 걸려서 그 나무에 책이 들어갈 공간을 다 파냈다고 합니다. 이음매가 전혀 없는 통나무로 된 책꽂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도 기가 막혀서, 왜 일을 이렇게 하느냐, 나무판으로 짜서 붙이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사람은 평생을 그렇게 해서 책꽂이를 만들어 온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은 책꽂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답니다. 왜? 이쪽에서 압력이 가해지면 우지직 하고 부서지는 가구지만 이렇게 파내고 기름칠을 해서 만든 것은 명품이라는 것입니다. 책꽂이는 대개 책을 많이 넣으면 주저앉지만 그 책꽂이는 수백 년을 써도 주저앉지 않고 완벽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와서 저녁때까지 그 한 구멍을 판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속이 터져서 나는 그런 명품 책꽂이는 필요 없으니 집어치우라고 하고 가구점에 가서 사왔다고 합니다. 기술 내지는 재능에 있어서 하기는 하는데 빨리, 완성도 높게, 훌륭하게 한 사람들에게 “잘하였도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기술을 연마하고 익혀서 생활의 달인 말고 교회의 달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대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착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벌써 끝자락에 있지만 긴 세월을 살았고 우체국장을 하면서도 열세 명의 직원을 거느려봤는데 하나님이 참 공평하신 것은, 성격이 좋은 사람에게는 일을 잘 못하는 성품을 주셨고, 주셨다기보다는 잘못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데리고 있는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듭니다. 일을 너무 잘하고 훌륭하게 하는데 그 사람을 파트너로서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함께 일하기에 굉장히 힘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어려움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어려움을 통하지 않고는 나와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그 사람에게는 내가 없는 훌륭한 것들이 있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람도 쓰시고 저 사람도 쓰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존 스코펙이라는 정신과 의사이자 상담심리학자가 글을 썼는데, 악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해가는 긴 글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참 재밌습니다. 악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악인은 착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악인이 악한 사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악하기로 따지자면 우리 모두 다 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의 기준에 모두 미치지 못하고 또 어떤 때는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사람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못 미치는 것만큼 우리가 악하다는 점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고통을 주는 악인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악을 많이 행하기 때문에 악인이 아니라 자기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을 반성할 능력이 없이 확신을 굳어진 사람, 모든 사고방식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는 교정할 이유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그 틀에 맞게 움직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을 예전에도 한 번 읽었는데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쿵! 하고 마음에 다가온 것이, 진짜 우리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 악하게 하는 것은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반성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을 절대시하면서 누구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 심지어 그가 만일 상사라면 어쨌든 일을 해내야 하는데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그렇게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스 라이팅시키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틀 속에 우겨 집어넣으려는 사람들이 악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감옥 속에는 의외로 착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냐 하면, 80% 이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감옥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밖에 많이 있지만 어떤 상황을 만나지 않아서 범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지 언제든지 그 상황을 만나면 감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 어느 정도의 착함을 주셨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게 살도록 당신의 성품의 닮은 것을 우리에게 심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지난주 구역장 공부에서 중생한 자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 생명, 성향으로서의 생명과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그 이후로부터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속에서 우리는 수없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대부분은 흐린 날씨나 바람 부는 바다 때문에 겪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면 살아가야 할 사람들 때문에 겪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깨뜨려지게 하셔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넓혀가게 하십니다.
심리테스트 같은 데서 나오는데, 사람을 딱 보고 자기 취향이 아니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단박에 단절하고 연락도 안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가진 경우가 많고 심하면 우울증세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자기를 누군가가 완전히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실은 실현될 수 없는 환상입니다. 내가 누구 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해줬는데 그 사람이 나를 생각하면 절대 외롭지 않고 혼자 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썼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도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그래서 인간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외로움의 물결은 한쪽으로 계속 움직일 때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외로움입니다. 살아가는 과정 전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깎으셔서 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그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무골호인처럼 남이 뭐라고 하든지 다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 하실 때 가지셨던 그 선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그 선을 즐거워하고 그 선 안에서 나와 모든 이웃이 살기를 원하는 마음가짐, 그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내가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고 나와 다르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자꾸 끊어내려는 성향, 한 번의 그런 만남으로 강력한 피해의식을 느끼면서 그 사람이 싫어지고 배타적이 되고 자기 스스로 통제가 안 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문제가 꽤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기도도 해야겠지만 정신과적으로 정확하게 진단을 받고 약도 먹고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빠집니다. 우울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러면서 점점 고립화되어가고 내면화되어가면서 증세가 깊어지고 더 깊어지면 공황장애 같은 것으로 발전됩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제일 중요한 것은 죽을까봐 염려해야 하고, 불행할까 봐 염려해야 하고, 고통받을까 봐 염려해야 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살아있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마땅한 값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착해져 갑니다.
충성스러우면서도 사람을 품고 갈 수 있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의 이상입니다. 좋은 리더는 아주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동지들을 많이 얻고, 나쁜 리더는 큰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수많은 상처를 남깁니다. 회복하기 어려운 인간관계를 남깁니다. 업적을 이루어 한두 명의 상사에게는 칭찬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충성되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종들은 주인을 섬기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충성된 종은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와 같고 게으른 자는 이에 초, 눈에 연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괴로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 “정말 충성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우리 인생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여기까지가 늘 하던 설교였는데, 오늘은 그 다음을 한 번 더 보려고 합니다. 23절 하반절입니다.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여기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내가 네게 많은 것을 맡기리니” 이것은 하나님이 더 귀한 일에 너를 써 주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록펠러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부자였고 록펠러는 자기가 지은 사재를 털어 지금의 UN본부 건물을 지어 헌납했습니다. 록펠러는 억만장자가 된 후에도 비교적 독실한 신앙을 가졌고 철저히 십일조 생활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강철왕 카네기는 자기가 번 돈으로 은퇴하고 난 후에 미국 전역에 3300여 개의 도서관을 짓습니다. 오직 그 한 일에만 자기의 유산을 다 쏟아붓습니다. 거기에 책을 가득가득 채워 넣어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공이 없어서 돼지를 잡으면 나오는 돼지 오줌보를 묶어서 축구공 삼아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돼지 오줌보나 차고 놀던 아이들이, 동네마다 도서관이 생기니까 새카맣게 몰려들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20년 후에 미국을 바꿔놓았다고 합니다. 그 카네기가 사원으로 직장생활 할 때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메모의 달인이었습니다. 상사 앞에 갈 때는 항상 메모지를 가지고 가서 지시받은 내용을 깨알같이 메모해두고 그 사항을 반드시 실천하고 이행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정을 받고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일도 잘하는 사람에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일이 나에게 많이 와서 너무 힘들면 당연히 상사에게 이야기해서 “제가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좀 조정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참 내가 바보구나. 그러니 사람들이 다 나에게 일을 떠맡기지.” 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참 유능한가 보다. 내가 확실히 일을 잘하나 보다. 그래서 일이 나에게 오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거의 80%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일을 맡기면 그것에 합당한 지위와 자원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 F 케네디의 태생은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흑인들만큼이나 멸시를 받았습니다. “아일랜드인도 출입하지 마시고 니그로도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거의 흑인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은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가 일할 곳이 없어서 항구에서 하역하는 일을 하다가 돈을 좀 모아서 아일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고향집 주막 같은 것을 차렸습니다. 거기 노동자들이 고향 생각을 하면서 고향 음식을 먹고 술을 한 잔 마시면서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랬는데 그 가게가 굉장히 커지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가 끊임없이 사업 활동을 하고 심지어는 마피아와 결탁하여 밀조도 하면서 어마어마한 갑부가 되었고, 그러면서 아이젠 하우어 같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치자금을 대주고 밀어주면서 나중에 영국대사로 발탁되고 서서히 정치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행적은 가톨릭 신자였고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그의 행적을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유능한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시고 더 크게 써 주신다, 그때 여기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많은 사람들은 주인의 즐거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박박 기면서 한 달에 300만 원 받아 가는데 자기는 전용기 타고 왔다 갔다 하고 골프채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1년에 200억, 300억씩 받아 가니까 그 사람의 즐거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여기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뜻은,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혈연공동체처럼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열린 빌딩을 우리에게 판 사장의 이름이 임태수라는 분입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세수도 못 하고 하루 종일 흥정하고, 그날 제직회까지 하며 거기 오라고 해서 78억에 그 빌딩 계약서에 사인한 것이 2004년의 일이었습니다. 20년 전입니다. 진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왔는데 그 빌딩이 없었다면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 사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CEO로서 나와 거의 같은 입장인데, 나는 비영리단체의 CEO이고 그 사람은 영리단체의 CEO니까 서로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이라고 해서 제가, “그래도 가끔 보면 정말 회사에 충성하고 사장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그런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만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좀 잘해주고 싶지 않습니까?”, “목사님, 장기를 이식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장의 마음입니다. 그 직원이 너무 아프다면 자기 콩팥 하나를 떼어 주고 살려서 함께 있고 싶다는 뜻입니다. 사장이 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일을 잘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쓰셔서 일하시는구나, 나는 목사님과 함께 일하면서 하나님의 인정을 함께 받는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그 기쁨을 내가 누리면서 사는구나!”
저는 전에도 배웠지만 특히 내수동 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를 하면서 그렇게 교회가 부흥이 되면 그렇게 마음이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내 부서만이 아니라 교회가 부흥되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좀 특별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교인의 수가 적게 나오는 날은 항상 얼굴이 우울하셨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내가 앞에 앉아있으면, “전도사님, 오늘 교인이 조금 나오니까 이 밥알이 모래알 같습니다.” 평생 그렇게 하시면서 은퇴하실 때까지 사역하셨습니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느꼈지만 교인이 적게 오는 날도 밥을 많이 먹었는데 그분은 밥을 못 드셨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 즐거움에 충만하게 참여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