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5-26)
녹취자 : 김세나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그 마음의 필요는 실제로 공급되는 것보다 훨씬 앞서가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사이에서 ‘염려’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는 인간의 번뇌가 끝이 없는 이유가 바로 욕망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모두 성취되고 나면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던 기쁨은 잠깐이고, 그 다음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이 생겨나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사회에는 번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확실히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는 번뇌를 가져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한 권사님이 꿈을 꾸셨는데, 커다란 망태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어디엔가 길을 걸어가면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 앞에 끊임없이 검은 보자기가 떨어지더랍니다. 그것을 큰 집게로 계속 담아서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는 시커먼 마귀같이 생긴 것이 끊임없이 검은 물건을 던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망태에 담다 담다 도저히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망태에 눌려 땅에 엎드러졌는데도 계속해서 집게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검은 물건을 망태에 끊임없이 담다가 꿈이 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근심과 염려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이상한 심리는 그 염려와 근심을 웬만해선 놓아주려 하지 않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제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을 불안과 염려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이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 때문에 그렇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단벌옷밖에 없으면, 무엇을 입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넥타이가 하나밖에 없으면 무엇을 맬지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옷이 여러 벌이 되고, 넥타이가 개수가 많아지면 양복장 앞에서 거울을 보면서 자꾸 망설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특별히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입니다. 의, 음, 식, 주, 이 네 가지는 생존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잠시동안도 이 네 가지는 떨어져서 지낼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으로 우리의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것을 경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에 대한 염려가 지나칠 때, 인간은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치시면서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먹으니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의, 식, 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것은 내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에 사랑의 욕구는 또한 지배의 욕구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이기적인 지배욕 때문입니다. 누군가 만약에 정을 주지 않는다면, 가스라이팅 같은 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운데도 어떤 사람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그 사람이 그 애정의 관계를 이용하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할 때 가스라이팅 같은 것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사랑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마치 모든 불행한 사람이 불행해지려다가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행복해지려다가 불행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또한 모든 사람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데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 떄문에 자신도 불행하고 상대방도 불행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인가 먹고, 마시고, 입고, 어느 집에 거주하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소중히 여기고, 그러한 사랑을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으면서 사는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그 질서속에 들어가 있을 때만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 그 욕망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서 이탈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불행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질서라는 것, 특히 사랑의 질서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비유를 하자면, 이 우주의 크기는 사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대충 생각하는 것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길이를 150억 광년 정도로 봅니다. 실제로 우주의 끝이 아니라, 현대 과학으로 관측할 수 있는 범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 길이를 잴 수 없습니다. 이유는 끝없는 폭발과 함께 우주의 공간이 넓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빅뱅 이론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지만, 빅뱅과 함께 순식간에 수십억 승의 일 사이 어마어마한 우주공간이 생겨난 것처럼, 그와 같은 폭발과 함께 우주가 계속 커져가는 증거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몇십 년 전의 관찰한 것과 비교해 볼 때 같은 별들 사이의 거리가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우주 끝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우주 안에 모든 작은 은하들, 항성들과 행성들, 위성들이 함꼐 모여 일정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고 욕망하되,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욕망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그 질서를 이탈하게 되면 끊임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많은 우상이 있는 것 같아도,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그 보좌를 겨룰 수 있는 단 하나의 우상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물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히브리 사람들의 어법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어법과 매우 비슷합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진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종의 시샘입니다.
아이 둘이 있는데, 한 아이가 조금 아픕니다. 그래서 안 아픈 아이에게는 보통 음식을 주고, 아픈 아이에게는 고기국물을 끓여 밥을 말아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못 먹은 한 아이가 말하는 것이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미워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두 사랑이 궁극적으로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그 보좌를 서로 앉으려고 겨루는 단 하나의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물질입니다. 물욕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조국교회에서는 이 개념이 확실히 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왠지 교육이 잘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 소유와 생명이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기본입니다. 일생동안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 고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것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고 이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찬양)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 인정하고, 자신은 자기의 소유가 없이 그리스도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얻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이 샘솟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영이 살 때는 거룩한 열망이 솟구치고, 육이 살 때는 육적 욕망이 솟구칩니다. 이 둘이 함께 싸움 박질을 하면서 괴로워하는 그 모습이 로마서 7장에 나와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요” 했던 바울의 탄식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사도도 그러한 탄식을 경험하였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경험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유일한 주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라고 하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어떤 것들을 사랑해도 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질서에 복종시키면서 살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리들이 매 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마음의 염려를 그분께 토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 분께로부터 응답을 받으며 살면 마음의 근심이 생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고 나면 해결의 길은 잘 모르겠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으면 예전에 있었던 강렬한 욕망이 정말 쓸데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것을 기꺼이 버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을 소유하고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정면으로 똑바로 들여다보고 인간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 깨달은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 해 전 그리스의 선박왕으로 한 시대를 휘날리고 절대로 재혼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과 결혼을 한 오나시스는 한 때 마리아 칼라스라는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를 내연녀로 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 사람의 조카 손주 쯤 되는데,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9천 억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젊은 사람은 그 유산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할아버지,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얼마나 불행해지는가를 보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길이라 생각하고 유산을 전액 사회사업에 기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신앙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인생의 허무를 꿰뚫어보면 결국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욕망 떄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빼앗기고 살 때 가슴 아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그릇이나 음료수 물병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자유. 그래서 안셀무스라는 사람은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면서 선언을 하게 됩니다. 교황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 그것으로 끝이 나야 하는데 영국은 독특하게 교황이 임명한 사람 어깨 위에 파드로라는 견장을 왕이 나와 얹어줌으로써 비로소 대주교가 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아주 탁월한 학자였고, 교회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에게 이 파도르를 씌워주기 위해 일부러 와서 앉았는데, 그 순서에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왕이 씌워 주어야 할 파도르를 자기 스스로 목에 걸쳤습니다. 온통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있을 때, 왕은 엄청나게 당황하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때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자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일로 그는 실로 오랜 세월 동안 귀향살이를 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고난 받는 생애를 살지만,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영국에 방문했을 때 캔터베리 성당에 갔습니다. 경비에게 여기가 안셀무스가 목회하던 교회인가 물었더니, 깜짝 놀라고 반색하면서 “수많은 관광객이 오지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맞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 위대한 안셀무스가 목회하던 곳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교회의 자유는 곧 성도의 자유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그랬으니, 한 주인은 하나님이고 한 주인은 물신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가 지나쳐서 결국 물질 그 자체를 숭배하게 될 때 그것은 곧 세상을 향한 사랑이 되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 사도 요한이 아주 감명 깊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물질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시 말해서 욕망을 섬기는 삶이 되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한 믿음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이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마실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의 경건에 도움이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까지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굶게 하지 않으시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로서 세심하게 보살피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리의 마음에 지속되는 한 물질에 대한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름과 염려, 근심과 걱정은 어떤 것들입니까. 나는 이 긴 세월 예수를 믿었는데, 이 정도의 사람밖에 못 되었을까. 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정도밖에 안 될까. 왜 나는 좀 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일까. 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확신하며 나 자신을 모두 쏟아부어 본 적도 없으면서 아마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다른 것인가 보다고 쉽게 생각을 바꾸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이 여러분들의 생각에 주를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소비하고, 어떤 것을 더 가지고 무엇을 남들에게 더 자랑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로 염려를 이루고 있습니까. 한 사람이 무엇을 열망하고 염려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염려하고,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긴 교훈의 마지막 끝이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원래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에 대해 뜨거운 열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을 통해 어떻게 확장되어 가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번성해 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거기에 마음을 쏟고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영적인 번영과 교회의 위대한 영적인 성장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여러분들은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염려는 끊임없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결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