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유익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녹취자 : 김세나
시인도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겪으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시편 119편은 개인의 고난의 서사를 하나님의 서사와 연결시켜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고, 또 거기에서 보다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대표적인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 시인은 진토에 붙은 것 같이 되어 버린 자신의 영혼을 한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기에서 건져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마치 헬륨가스가 들어있는 풍선과 같아서 마음을 열면, 그 마음이 끊임없이 상승해 날아가는 풍선과 같이 자기 마음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늘 향해 날아 올라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고정되지 않고 마음이 끊임없이, 손에서 풍선을 놓으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립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정신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절대로 고정화 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흘러갑니다. 생겨났다가 변하고, 변했다가 소멸하고, 소멸했다가 사라져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정처 없이 흘러가고 변하는 것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본다고 하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시인도 아마 고난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자기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처럼 비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못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고난은 대부분 우리의 마음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통해서 옵니다. 모든 것들이 잘 된 것 같고, 변함없는 것 같다고 믿었는데 어느 한순간 이것들이 요동을 치면서 우리의 삶의 질서를 원하지 않는 질서로 바꿔 놓아 버립니다. 그것이 고통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내가 있는 것, 그것이 고통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욥이 경험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고통과 무질서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환경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이 고난 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온하고, 자기가 원하는 질서 속에 있는 것을 바라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고통 받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평화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할 때는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을 선택합니다. 끊임없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애정, 욕망,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솟아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바라면 그것은 우리가 평화로울 수 없는 그러한 흐트러진 질서를 원합니다. 그 속에서 처음에는 그러한 욕망의 힘에 압도되어 그렇게 선택하지만, 시간이 잠시 지나고 나면 그것이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 자체가 좋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시인은 평안을 구하고 무질서 속에 질서를 찾고 아픔 속에서 편안함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런데도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하는 이유는 고난 때문에 자신이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을 해 보면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의 기쁨과 소망이 생기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본향에 관한 서사입니다. 이러한 것은 놀랍게도 철학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심지어 플라톤과 같은 사람도 우리의 영혼이 저 우리의 인생 건너편에서 오고, 건널 때 르떼의 강을 지나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우리의 영혼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환의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천주의 철학자들도 우리도 이 세상에 ‘게보르펜’, 던져진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인지 모르지만 그에 의해 던져진 존재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시간, 이 공간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여기는 낯선 곳이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시인이 고난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자기가 신뢰하고 믿었던 세상이 자기를 배신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난 속에서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이 세상이 자신의 완전한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 광야에서 방황했던 서사도 생각이 나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할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서사를 보면서 역시 이 세상이 우리의 완벽한 고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향은 우리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리고 내가 원래 속했던 그곳에 와 있는 느낌을 줍니다.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고향은 우리에게 편안한 마음을 주고,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안식을 줍니다. 그러한 안식처가 하나님의 품이라고 하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 받은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그 유익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고백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유익입니다.
즉,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비참한 영혼을 살려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진토에 붙은 것 같은 영혼을 살려 내시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전에는 불순종하며 살았던 그 마음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그릇 행했지만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고난이 아니면 그릇 행했던 사람이 올바르게 되는 법이 없고,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한 사람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떠나면 고통이 시작이 되고, 돌아오면 고통이 끝납니다. 또 다른 고통이 또 다른 욕망 때문에 시작될지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한번 돌아오고 나면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됩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 영혼의 상태가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떤 심정이 되는지 그리고 욕망의 결과가 어떠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지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과 욕망, 결과, 과정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 가게 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 많은 고통이 저절로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결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통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발견하고 고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고난이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황하는 영혼으로 겪는 개인의 고통의 서사를 하나님의 메타 서사에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이 자기처럼 그렇게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잠시 때리셨을지언정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서사에 자신의 서사를 연결시키면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위대한 기적에 대한 서사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개인의 고난 속에서 그러한 서사들을 되새기고 묵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늘도 그 고난이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여러분들이 겪는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뜻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실 때에도 반드시 그 복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고난을 받을 때에는 그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복을 주실 때에는 그 복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하나님의 소명이고,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는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부르심이 그 안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을 때, 괴로워 하고 아파하는 것은 짐승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난을 겪을 때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일어났고, 이 고난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진 고난인가, 이 고난을 통해서 자기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상태인지 생각하며 주님 앞에 소생한 영혼으로 변화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모든 자기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환경을 고치기 전 먼저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에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힘을 주시고, 진토에 붙었던 영혼이 놀랍게 소생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해 날아 오르는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되고 그때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죄가 죽는 것을 경험하고 큰 능력과 은혜가 우리 안에 주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 몸과 마음으로 받으면서 예전에 이길 수 없었던 현실을 이기고, 예전에 견딜 수 없었던 고통들을 견디면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그 용서의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되고, 그때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무지한 내가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시인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고난을 당한 것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짐승처럼 하나님께 대적하며 고통의 삶을 살았을텐데,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사람과의 관계를 고치게 하셨습니다. 결국 고난 받기 전과 후를 대조해보니 고난 받기 전에는 그릇된 삶을 살았고, 고난당하고 난 후에는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개인의 삶에서 겪고 있는 고난의 서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런 삶의 끝은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여러분 개인이 겪는 이 많은 고통들의 의미를 하나님의 서사에 연결지어 거기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이 시인처럼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 되도록, 그래서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했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나이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