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목회자 세미나 아침채플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 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인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사람이 나아가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민12:1-8)
녹취자: 이새봄
너무나 유명한 성경 본문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해서 장가를 또 들었으니까 후처를 취한 것인데, 뭐 이거야 이제 기독교 윤리학, 성서의 윤리학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기뻐하셨다기보다는 당시의 이런 제도들을 하나님이 묵인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마도 인류가 아주 미약하니까 그러니까 그 구약의 인류들을 창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용인하신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어쨌든 지금 문제가 되는 핵심적인 상황은 그게 아니라 구스 여자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틀림없이 새까만 흑인이란 말입니다. 이 여자를 취해서 장가를 들었을 때 이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할 정도니까 백성들에겐 이미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태도를 보니까 모세는 비난받을 때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였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무엇을 의미하냐면 모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추호의 부끄러움이나 가책이 없이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언약백성들의 사상들을 좀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스라엘 사회의 이 언약 공동체의 성격이,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공동체가 굉장히 폐쇄적인 공동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고 아주 개방적인 공동체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구속사 속에서 구체화되면서 이제 언약백성들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것이지, 그래서 그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백성들은 그 언약 안에서 언약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외양적인 각종 모든 혜택들을 차별 없이 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그 언약에 적극적으로 화응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언약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적 부르심에 화응하였느냐 하면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한쪽으로는 이렇게 삼각형의 구조로 본다면,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언약의 테두리를 이렇게 치셨는데 한쪽에서는 계속 하나님의 언약에 불응함으로써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할례를 받고 언약에 참여하였는데도 불신앙 때문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그 사람들은 언약 안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언약이 주는 그 구속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계속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주 분명하게 그 언약의 비조지만 거기서 이삭과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둘다 언약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불신앙으로 언약백성에서 빠져나갑니다. 한쪽에서는 불신앙으로 계속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 바깥에서는 맨 처음에 하나님이 부르신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인데도 언약 속으로 계속 들어옵니다. 여러분은 유다지파에 속했던 갈렙이 출신이 어딘지 기억하시죠? 가나안 원주민 출신입니다. 그낫 족속 출신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여성도 마찬가지이고 남성도 마찬가지이고 할례받은 사람이 불신앙으로 빠져나가고 이쪽에서는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이 신앙고백과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수없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8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났을 때, 뭐라고 표현하냐면 “중다한 잡족들이 따랐다”고 나오는데, 히브리말로 ‘에레브 라하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거기서 ‘에레브’는 한사람 사람을 가리킨 게 아니라 종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종족이 ‘라하브’,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다종족에 속한 사람들이 따라왔는데, 아시다시피 그것은 이제 애굽에서 이스라엘 처지와 같이 그렇게 붙잡혀온 이방인들로써 봉사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해서 형성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징은 뭐냐하면 일단 그 사람이 누구든지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들어와서 허입이 되면 그러면 일체의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 흐르는 언약사상이고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히브리어로는 ‘베카’라고 나오는데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라도 구약의 이 공동체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돼서는 안 되고 개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어떤 것들이 있냐 하면, 언약백성들 속에서는 긴장이 흐르게 되고 그 다음에 외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말하자면 복음적인 효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문제를 어느 정도 풀 수 있습니다. 왜 여기서 모세가 이렇게 흑인하고 사랑에 빠졌느냐, 이런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새까만 여자를 얻어서 자기 부인이라고, 내 교인들에게 내가 우리 집사람, 뭐 그런 상상하는 것은 안 좋지만 우리 집사람이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고 쳤는데 내가 입술이 확 뒤집어 진 새카만 여자와 결혼을 하면 당신들은 그 다음 주일날 정문에서 만났을 때 “아유 사모님”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굉장히 힘들 것이다, “사모님 기도해주세요.” 뭐 “식사 같이 하시죠” 그럴 수 있겠느냐, 아마 잘 안될 것이다, 그것이 뭐냐하면 편견이었습니다. 편견. 모세는 그런 점에 있어서, 편견에 있어서 자유로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뭐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은 아닙니다만은, 목회자는 하나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억압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프리하트(free heart)를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 누구입니까. 에프에프 브루스(F. F. Bruce)라는 사람이 바울을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라고 이름을 지었잖습니까. 그렇게 자유를 주어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진정한 억압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핵심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했는데 미리암과 아론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미리암은 사실 미리암 덕분에 모세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아론은 모세를 대신해서 선지자 노릇을 했던 형이 아닙니까. 이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고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신랄하게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이렇게 이렇게 행동하는데 배신감 느끼지 않으세요?” 저는 “아니요, 배신감 느끼지 않습니다.” “교인들에게 실망하신 적은 없습니까?” “아니요, 실망한 적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워낙 잘하시나보죠?” “아니요.” “그 왜 그럽니까?” “기대를 건 적이 없기 때문에 실망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교인은 사랑해주어야 할 대상이지 내게 사랑하기를 기대할 대상이나 아니면 이미 엄청난 성도가 되었으니 이놈은 신뢰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몇 달 전에 시찰회에서, 제가 요새 시찰장입니다. 분쟁이 난 교회를 다니면서 수습하느라고 골치가 아픈데, 시찰회로 모였습니다. 가을에 그래서 에드워즈 파크에서 이제 바비큐를 하고 목사님들이 앉아서 저녁이나 먹자, 하고 먹는데, 대개 먹고는 부지런히 가는데 나무 그늘 아래서 바비큐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자기 목회하는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이 양반들이 안가, 밤늦게까지 11까지 안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후배 목사님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의교회 출신으로 여기다 개척을 했고 한 친구는 구의에다 개척을 해서 그래도 뭐 한 2년 동안 몸부림, 한 3년 몸부림치더니 백 명 모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서 절반이 나뉘고 그러긴 했는데 어쨌든 자기끼리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했으니 서로 잘 알 것 아닙니까. “하, 개척교회를 할 때에는 3년까지는 참 환상인데, 신혼인데 3년 후서부터는 갈등이 생기고 막 그런다” 옆에 있던 목사가 무릎을 치면서 “맞아 맞아, 3년까지는 정말 새로 장가든 것같이 그렇게 좋고 신혼살림 같더니 3년 후서부터는 갈등이 생기고 고통을 준다.” 그러더니 나보고 “목사님도 그랬지요?” 그래서 “뭐가요?” “3년까지는 너무 환상적인데 그 다음서부터는 사이가 갈라지지 않아요?” “저는 그런 적 없어요.” “왜요?” “저는 그렇게 교인들과 그렇게 가까워져 본적이 없기 때문에 갈라져 본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다 쓸데없습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장로, 권사 뭐 기대 걸면 안 됩니다. 그냥 코 찔찔 흘리는 어린애 취급하면서 그냥 애들이다, 언제든지 따뜻하게 해주면 좋아하고 조금 차갑게 해주면 토라진다, 그렇게 살아야지, 그걸 무슨, 아유 저 사람은 뭐 어떻게, 그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목회라고 하는 것은 말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실망을 느끼고 배신감을 느끼게 되면 목회의 정신이 찌그러집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그래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교역자들 보고도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절대 쓸데없이 교인들하고 몰려 다니지 말고, 모여라 할 때에는 한 사람이 모이든 두 사람이 모이든 그것은 개인적으로 모이라, 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라, 라고 한 거니까 목적이 분명해야 된다, 그리고 절대로 교인들에게 쓸데없이 밥 얻어먹지 말고 한번 얻어먹었으면 한번 사고, 절대로 밥 얻어먹지 말고 개기지 말고, 그렇게 하면 목회가 안 된다. 세상에 완벽하게 자기만을 신뢰해주고 밀어주는 그런 관계, 그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그럼 외롭지 않습니까, 누가 그러는데, 외롭죠. 정말 외롭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외롭습니다.
제가 토요일날도 새벽 5시까지 못 잤습니다. 교회에 공사하는 문제가 있는데 8억인가 9억에 견적이 나왔는데, 죽어도 난 이 교회에다 8억, 9억을 집어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기도하면서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나 말고 누가 잠 못 자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나 말고 잠 못 자겠습니까. 그러니까 목회는 그렇게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 외로움을 사람을 통해서 풀어 보려고 생각하면 반드시 사람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주님 한분을 위로로 삼으면서 매일매일 걸어가는 그런 삶이 되어야합니다.
어쨌든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이 아주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야,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하셨냐?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예언도 하고 그렇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리더십에 전면적으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걸 보면서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라고 하는데 사실 이게 출애굽기 3장과 4장에서의 모세라면 불벼락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 인간들 내가 박살을 내리라’ 했을 텐데, 하나님한테도 대든 사람인데 이까짓 인간들이야 얼마나 하찮겠습니까. 그런데 많이 성화가 되었습니다. 고생길을 거치면서 성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저도 불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많이 남아있지만, 제가 항상 잘 쓰던 말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 그거였습니다. “어째 인간이 그럴 수 있냐”, 요즘은 많이 죽었다고 그럽니다. 항상 의식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이해가 안가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이니까.” 그렇게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이제 백성들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를 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이 온유함이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하나님과의 지극한 평화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 평강을 가리켜서 히랍어로 ‘에이르네’라고 하잖습니까. 에이르네. 이레네오스라는 사람 이름이 거기서 나옵니다. 에이르네라고 그러는데, 그 평강이 하나님과의 평화, 샬롬의 번역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샬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환경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 사람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미리암과 아론, 내가 너희에게도 이야기한 게 사실이다. 너희들 말고 선지자들에게 내가 말을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하고 꿈에 나타나서 꿈으로 너희들에게 비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서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똑같이 들려졌어도 그 전달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권위가 달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셨으니 대면하여 말하였습니다. 친구가 친구를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결국 무얼 깨닫냐 하면, 영적 친밀함입니다.
사람들은 이 영적 친밀함을 아주 미스티컬(mystical)하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영적인 친밀함이 미스티컬한 면이 있지만, 그래서 칼빈도 유니온 미스티컬(union mystical)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런 신비적인 성격을, 단순한 신비라고 해석을 하면 안 되고 인격 안에서의 신비라고 생각을 해야 된다 이 얘기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비하긴 신비한데 인격적인 친밀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신비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니온 미스티카 쿰 크리스토’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접붙여지는 우리의 영적인 연합이 우리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격 안에서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성을 향하여 신비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성으로서는 신비고 의지로서는 사랑의 감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왜 그랬냐 했더니 뭐라 하시냐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며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니라. 충성됨이니라”, 그래서 결국은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대면하여 마주보는 그런 친교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목회해봤으니까 알지만, 충성스러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없이 하나님이 순풍의 돛 단 것같이 목회를 하게 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도들부터 공식에 안 맞지 않습니까? 절대 그렇게 안하십니다. 오히려 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 앞에 구덩이를 파시고 헌신된 사람 앞에 산을 놓으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못 넘어갈 사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목회자, 큰 능력을 받은 목회자들 중에 평탄한 길을 걸으면서 그러면서 천국의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안일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는 누가 있고 성경에는 누가 있습니까.
저는 제가 존경하는 신학자가 넷입니다.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존 칼빈, 아우구스티누스. 최근 제가 한 4, 5년 전 정도서부터 제가 이분들의 유산을 가지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에게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번에 제방에 오시면 자료들을 보여 드릴텐데, 굉장합니다. 제가 이번에도 삼위일체 쓰면서 삼위일체를 제가 450페이지짜리 집필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드렸던 게 내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최고의 선물이다, 이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을 만난 사람들이.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 느끼는 게 뭐냐면 엄청난 어마어마한 인물들입니다. 엄청난 자원을 그것이 제 인생에 있어서 자원인데, 아무도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존 오웬, 11명의 자녀들이 다 자기 앞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인도 죽었고, 그다음에 왕정복고 되면서 오마일 영 에 갇혀서 그 핍박을 받다가 마지막에 목숨을 건졌지만, 오죽했으면 히브리서를,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를 7년 동안에 걸쳐 쓰면서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내가 이 책을 썼노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존 칼빈은 아시죠? 제가 작년에 종교개혁 여행을 11일 동안 6명과 함께 했는데, 솔직히 비튼베르크에 가서는 눈물이 안 나왔습니다. 왜? 루터하고 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완전히 혁명가이고 전사적인 삶을 산 사람이고, 그런데 피에르 예배당에 가서 제네바 에 갔는데, 앉자마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병들고 약한 샌님 같은 사람이 그 험한 자유사상가들과, 여러분 볼셴 논쟁 아시지요? 그 비열한 인간이 칼빈을 동성연애자라고 온유럽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는 껄떡쇠라고 그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끝없이 시달리면서 31가지의 질병에 시달리면서 살았던 사람이 거기서 우상처럼 만들어 놓은 거 하나도 떼버리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을 떼어버릴 때 일어났던 카톨릭과의 수많은 분쟁들 때문에 사실은 못 뗀 것입니다. 거기에 앉았는데 눈물이 확 하고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튼베르크에 가서는 나하고 루터가 서로 어울린다는 느낌이 안 드는데, 저 사람은 나하고 처지가 비슷한 것 같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지막에 결국은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멸망되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신국론>을 쓰면서 죽어가잖아요. 그리고 또 한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는 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사람 신학에는 좀 결함도 있습니다. 사실은 철학에. 그런데 가치있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 요새 비난들도 많이 하는데 물론 이제 흠이 있습니다. 흠이 있는데 그것만 조심하면 어마어마한 인물입니다. 제가 오죽했으면 어느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이 25권인데 아직 그 일레트로닉, 전자책, 이북이 안 나왔습니다. 예일에 전화를 했습니다. 만들 계획이 있냐, 그러니까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6개월 동안 사람 고용해서 이북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안 줍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CD1장에 만들어서 꽂아서 24권을 전부다 이북을 만들 정도의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오죽했으면, ‘나는 논쟁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노스햄튼 교회에서 쫓겨나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고 53세에 천연두 예방주사 맞고 죽어가잖아요. 누가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얘기는 안했지만, 츠빙글리는 결국 가펠전투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화살에 맞고 죽어가잖아요. 그러니까 총에 맞고 죽어가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고통을 받는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께 능력 받은 사람들에게 평탄한 삶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능력을 받으면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을 하나님이 그렇게 가까이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충성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충성된 삶을. 저는 우리교회 부교역자들이 이렇게 있는데 저기도 우리 부교역자 한 사람 나와 있지만, 솔직히 이야기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사랑을 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차별을 하진 않습니다. 대놓고 저사람 무시하고, 본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만 그러면 인격적으로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마음에서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뭐냐하면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도 나는 소중합니다. 제가 워낙 공부를 강조하니까 공부 잘하면 기특합니다. 그런데 공부 많이 하고 뺀질대는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공부를 못하고 설교 한번 하면 열심히 적었다가 교인들에게 그대로 가르쳐주려고 하는 우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이 기도하고 교인들을 사랑하는 교역자가 사랑스럽습니다. 아무것도 안 아깝습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한 2백명 정도씩 교인들을 떼어주고 싶다, 나갈 때. 그런데 안 가. 교인이. 그게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부교역자들 교인들이 좋아해서 부목사들이 한 7명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가서 개척을 각자 할라고 하는데 2백명씩 따라간답니다, 그러면 너무 감사합니다. 왜? 교회 공간 가지고도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니까 교인들 잘 돌볼 것이고, 그런데 안 가. 제가 오죽했으면 지난번 교회 개척할 때에는 1년 휴직을 해 줄 테니까 갔다 와라, 그랬습니다. 거기가 맘에 들면 거기 있고 맘에 안 들면 1년 후에 돌아오면 교회에서 어떤 불이익도 안 받게 해주마, 그랬습니다. 그래가지고 한 20명 해가지고 보냈는데 몇 사람은 돌아오고 몇 사람은 거기 남고 그랬습니다.
저쪽 예배당에 있을 때의 일인데 제가 여기 3층 교회 사택에서 10년을 살았습니다. 10년. 그런데 교회 사택에 있으면 좋습니다. 밤에 잠 안오면 츄리닝이라도 3층에서 입고 내려옵니다. 3층에서 내려옵니다. 기도하러 1층으로 예배당에 내려오면, 캄캄한 예배당에, 밤 10시 반, 11시 됐습니다. 그렇게 이제 내려오면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누가 저 구석에서 그렇게 웁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 양떼들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렇게 흐느껴 울면서 기도를 합니다. 교역자입니다. 그러면 정말 장기라도 이식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럽게 몸부림을 잘 치는 사람이 말을 하면 ‘참 생각을 많이 했구나. 사려가 깊구나’ 그렇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말을 많이 하며, ‘말만 많구나.’ 말을 안 하면 ‘생각을 안했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꼭같은 마음이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놀지 말고 부서져라 하고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보고 그럽니다. “나는 한 18년 됐는데 10년도 못가고” 그런 얘기를 하더니 “에휴, 김 목사”, “왜” “그 내가 아는 목사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대.” “왜?” “그거 아무도 안 알아준대.” 그러면서 그 친구 이야기가 ”찾아 먹을 거 다 찾아먹으래” 내가 그래서 그랬습니다. “그 친구, 교회 개척한 친구 아니지?” 그러니까 “맞아” “장로들에게 되게 시달리는 친구지?” 그러니까 “맞아”. “그래”, 우리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우이씨, 왜 나를 고용사장 취급하는 거야?’ 그러지만, 장로들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목사들이 고용사장 밖에 안 되게 행동을 합니다. 심지어는 고용사장도 과분하다, 라고 할 정도로 대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충성스럽게.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의 별명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하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시오” 주님의 별명이 충성이었습니다, 충성. 그래서 목사님들, 목회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과 충성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살기 원하는 바를 내가 먼저 살아가야 합니다. 충성되게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면 안 되고 여기가 나의 마지막 순교지다, 그렇게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토혈의 목회’라고 합니다. ‘토혈의 목회’, 피를 토하는 목회를 해야 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자유롭게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