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삶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 오희열
여호와가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은 2절에서부터 차례대로 왜 자신이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를 체험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자기의 쓸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자신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소생의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 마지막으로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하늘의 불꽃놀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느다란 빛을 그리며 높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때까지는 그 불꽃의 아름다운 모양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절정에 올라간 다음에는 작렬하듯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시편23편을 불꽃놀이라고 말한다면 5절은 그 불꽃이 가장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작렬하듯이 터지고 있는 그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잔칫집 문맥입니다. 하객들이 모두 모여서 신랑 신부가 한 가족을 이루게 된 것을 모두 축하하고, 주인은 오랫동안 저장해 두었던 질이 좋은 포도주를 내 놓습니다. 그리고 가득 부으면 그 잔이 넘치고, 넘치는 그 잔을 서로 부딪치면서 건배를 하고 있는 그 광경입니다. 시인은 아주 탁월한 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위에 온 우주를 바라보는 미학가로서의 눈이 있었고, 온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신앙이 있었고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기쁨으로 가득 찬 환희의 장소인, 그 잔칫집의 문맥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의 말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단어를 최근에 써 본 적이 있습니까? ‘가슴 벅찬 기쁨’, ‘환희’, ‘가슴시린 감동’, ‘넘치는 희락’ 현대인은 쾌락을 따라 살지만 우울해보입니다. 기독교인의 존재가 선교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돈 때문에 행복해지고 인기가 있어서 행복해지고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은 세상의 이교도들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감동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뻐할 때, 그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주목합니다.
여러해 전에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나서 한국인 목사가 살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갔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전에 우리 버스가 그곳을 지나갔고 그 뒤에 그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아프가니스탄은 전도할 수 없습니다. 아웃리치를 갔지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허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체들이 가서 한 일이, 그 도시와 협의를 해서 갈 곳 없는 아이를 한 군데 모아놓고, 먹이고 씻기고 돌보고 노래하고 율동을 가르치면서 한국 문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철저한 무슬림 사회였습니다. 마지막 날 여성인 부 시장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시장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우리 아이들에게서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주 큰 기쁨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 아이들과 살도 섞이지 않고 피도 섞이지 않았고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해 줄 수 있는지, 그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나는 너무 궁금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 부시장이 얘기했습니다. “당신들은 언제 어디든지 우리나라를 방문하겠다고 요청하면 내가 책임을 지고 허락해주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날 밤에 두 명의 여자 청년이 우리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크리스찬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한 절도 읽어 준 적이 없었습니다. 찬송도 부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 얘기도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그 기쁨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디에선가 온다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감지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여기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이 안에 영혼의 빈 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채워져야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인간의 영혼은 먹고 입고 마시고 좋은 곳에 시집 장가가고 사회에서 대접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영혼까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진통제와 같습니다. 잠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영혼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게는 해 줍니다.
여러분 중에 마약을 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마약까지는 아니어도 마리화나를 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 것을 흡입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몰입해 들어갈 때는 너무 판타스틱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 후에 느끼는 공허감은 더 큽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그전에 느낀 자극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더 큰 것을 찾게 됩니다. 영국의 사상가 가운데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 1874.5.29–1936.6.14)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중이다.” 이 말은, 영혼은 먹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는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데, 그 영혼의 비어있는 잔, 그래서 정말 곤고한 상태를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쾌락에 빠지고 세속적인 일에 매몰되면서 인생을 허비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수유리, 수유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서울 외곽이고 지금은 서울이 더 넓어졌지만 옛날에는 거기가 서울 끝이었습니다. 2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동네의 의사가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글을 읽고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사가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새벽 4시가 조금 지나자마자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 하나를 업고 왔습니다. 갑자기 쇼크로 쓰러졌다고 살려달라고 했답니다. 진찰을 해 보니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얀 보자기로 덮었고 잠시 후 가족들이 몰려왔습니다. 멀쩡한 남편이, 아버지가 죽었으니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의사는 사람 죽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에 슬플 것도 없었습니다. 우는 가족들을 쳐다보다가 그 죽은 사람을 보니, 대개 아기가 태어날 때는 손을 쥐고 태어나고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쥐고 한 손은 펴고 죽어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이런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뭔가 하고, 가족들이 잠시 나간 사이에 그 쥔 손을 펴보니까 화투 두 장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것을 보니 38광땡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고, 문상에 가서 밤새도록 화투를 쳤습니다. 판돈이 많이 쌓이고 밤새 돈을 잃기만 했습니다. 한참 열 받고 있었는데 새벽에 끗발이 붙었고 돈이 이만큼 쌓였습니다. 패를 돌렸는데 딱 보니까 38광땡이 들어온 것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38광땡이 들어오면 왜 그렇게 놀라운 것이냐고 했더니 룰로 정하기 나름이지만 판돈에 정한 것의 세 배쯤을 더 내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판돈이 100만원이면 400만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패를 보여주는데 옆 사람이 “너는 뭐냐?”했더니, “3, 3, 3…”하다가 “으악!”하고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나중에 그 자식들이, “엄마, 우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셨어?”하면 뭐라고 얘기해주겠습니까? “화투치다가 38광땡이 나와서 너무 좋아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하겠습니까? 태어날 때는 아무데나 태어나도 괜찮습니다.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지만, 제가 수없이 집회를 다녔지만 여러분처럼 우울한 회중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우울합니까? 꼭 독일에 온 것 같습니다. 진짜 우울합니다. 심각한 침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웃었지만 여러분은 좀 다릅니까? 그 사람은 요만한 동양화 두 장을 가지고 38, 38 하다가 졸도했지만 여러분은 좀 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집문서, 땅문서, 그것보다 조금 더 큰 학위 같은 것 말입니다.
오늘 성경은 인간의 영혼의 빈 잔이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앞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던 인생의 가장 곤고한 시기를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와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경험한 것입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일평생 처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 첫 키스를 하고 돌아오는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 속에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왕위가? 수많은 나라에서 들어오는 조공이? 수많은 귀빈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의 영혼의 빈 잔을 넘치게 채워준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그 신령하다고 해서 신비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신비하지 않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은 신비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도 있고 모양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볼 수 없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크기를 잴 수 없습니다. 냄새도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사랑에 빠지면 사람의 품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얼굴이 멋있게 생기면 모든 여자들이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답 좀 해 보십시오. 대답할 얼굴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답을 못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렇지만 남들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자들은 절대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자들의 착각입니다. 위로가 되십니까? 잠깐 놀다가 헤어질 사람으로서는 매력을 느낄지 모르지만 자기의 인생을 실어서 그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여자의 매력을 끄는 것은 능력입니다. 남자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돈이 많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외모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물론 능력이 뛰어난지만 얼굴이 구둣발로 밟은 것 같다면 안 되겠지만, 끌린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얼굴이 예쁘면 모든 남자들이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텅 빈 남자들은 그럴지 몰라도 조금이라도 속이 있는 남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는 별로 든 게 없고 얼굴이 예쁜 것을 백치미라고 하는데, 백치미는 유효기간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머리가 텅 빈 것을 세 번만 확인하면 실증이 납니다. 생각 있는 남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지성이 있을 때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성을 사용해서 남자를 깔보고 무시해서 만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면 도망갑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지식이 있다는 것이 확인 될 때 매력을 느낍니다. 지식이 있어도 워낙 얼굴이 아니면 안 되겠지만 같은 값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성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 상관없이 자기기를 좋아한다면 생각 없는 남자일 것입니다. 그렇게 끌리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때, 그때 사랑이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헤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명처럼 엮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신비한 것으로 어느 날 들어와서 금이빨을 만들고 쓰러지고 하는 것, 저도 여러분을 몇 번이든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밀면 됩니다. 쓰러뜨리는데 안 쓰러지면 강퍅하다고 얘기합니다.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일부러 쓰러집니다. 쇼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희열입니다. 희열과 기쁨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 때문에 가슴이 벅차도록 만들어주었는지, 그게 무슨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이 쪼개지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기 때문에”, 두 번째,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사와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서양 사회에서도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도 아무하고나 함부로 밥을 먹지 않습니다. 더구나 동양전통에서는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brotherhood”를 나누는 것입니다. “형제됨”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양의 문맥과 아주 흡사한 것들이 이스라엘 사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있으면, 양반의 상황이 어쩔 수가 없어서 하룻저녁 주막에 머물게 되면 상민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은 잘 수 있지만 밥은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형제가 된다는 의미인데 어떤 식으로든지 상민과 양반은 형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상민과 양반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가족들 안에도 존재했습니다. 옛날에 우리 할머니가 시집을 오셔서 같이 사시는데 가족이 42명이었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외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큰 집에서는 42명이 다 들어갈 수 있는 큰 방을 만들어 놓고 구내식당처럼 상을 쫙 펴놓고 밥을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방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옛날사람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나눕니다. 안방에 큰 상이 차려지면 거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는 들어가시지만 우리 엄마는 못 들어갑니다. 거기는 반찬도 다릅니다. 거기서 드십니다. 그리고 옆방에 우리 엄마, 나, 동생, 이렇게 해서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마루에 상이 차려지고 어린 조카들이 먹습니다. 그 다음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종들이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시고, 우리 집 사람은 남겨두고 제가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승진하는 것입니다. 반찬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질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교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은 중국선교를 갈 때 말을 다 배우고 갑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부족 언어가 하도 많아서 다 배우지 못하고 갑니다. 그것을 가르쳐줄 문법도 없습니다. 그러면 들어가서 실제로 부딪히고 바디 랭귀지로 그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살다가 언어를 습득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교사가 가서 지도를 펼쳐놓고 우리가 이렇게 먼 미국에서 왔다, 우리는 잠시 온 것이 아니라 당신들과 같이 살고 싶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수염이 긴 촌로들이 모여서 장신간의 회의를 하고 통과가 되면 활짝 웃으면서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을 받아줍니다. 그리고는 마을회관 같은 곳으로 이동해서 거기에서 환영하는 만찬을 차려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명사회에 있던 선교사들은 본적도 없고 먹어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요리입니다. 중국은 날아다닌 것 중에서는 비행기 빼놓고, 물속에 있는 잠수함 빼놓고, 다 먹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광물질도 먹습니다. 지금도 만주 쪽에 가면 결혼식을 올리면 우리나라의 국수처럼 결코 빠지지 않는 필수 요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뱀국입니다. 팔뚝만한 뱀을 여러 마리 사서 동태 토막 내듯이 토막을 내서 무우와 넣고 끓입니다. 그것을 먹어야만 결혼식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자들을 보고 국수 먹을 때가 됐다고 하는데 거기서는 뱀국 먹을 때가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음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을 갔더니 전갈도 요리로 나왔습니다. 왜 그런 것을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은 중국에 갔는데 계속 탕이 나오기에 너무 맛이 좋아서 계속 먹다가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보았더니 바퀴벌레 이만큼과 거북이 한 마리가 들어있더랍니다. 상상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고양이를 잡아서 요리해주니까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선교사가 못 먹겠다고 얘기를 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으면서 고함이 터집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선교사들은 끌려가서 참수를 당합니다. 자기가 죽는 순간에도 왜 죽는지를 모르고 죽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같이 살고 싶다고 해서 호의로 받아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고 가족과 가족으로 맺어주는 의식이 식탁을 제공받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똑같습니다. 광야에서 식탁을 나누는 것,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사람이 화목제의 제물을 먹는 것, 이것이 예식인데 그것을 싫다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은 같이 살고는 싶지만 너희들과 가족은 되기 싫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럼 스파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엄청난 모독이 된 것이기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시인으로부터 밥 먹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십시오. 시인이 얘기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늘에서 큰 상에 줄을 매달아서 수많은 반찬이 담긴 밥상이 내려왔다는 뜻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기 ‘상’은 ‘밥상’인데 사람들은 ‘prize’로 생각합니다. 히브리말로 ‘슐한’입니다. 이것은 식탁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식탁은 티 테이블처럼 나지막합니다. 그리고 옆에 소파 같은 것이 있어서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를 합니다. 그러한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풍성한 어떤 식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라도 지방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데려가는데, 새벽에 집회하고 오전에 집회해서 빨리 숙소로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한 없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그렇게 40분 이상을 가서 어느 음식점을 도착했는데, 진짜 전라도 지방의 음식은 한국 최고입니다. 음식이 나오는데 한없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갔는지 보여주면 좋을 텐데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이미 배가 꽉 찼습니다. 그래서 저는 먹지 않고, 하도 심심해서 이 여덟 명이 먹는 상에 접시가 몇 개가 나오는지를 세어보았습니다. 200개가 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 있는 작은 뚜껑까지 헤아린 것입니다. 저것을 설거지 하려면 죽어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없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가슴이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베푸시고’라는 단어였습니다. 히브리말로 ‘아라크’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군대에서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군인들이 대열을 지어서 공격을 하거나 이동을 하는 것, 물건을 질서 정연하게 늘어놓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식탁은 간단하게 차려진 식탁이 아닙니다.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평소에도 딸 때문에 너무 속상하고 개념이 없어서 힘들어 했는데 어느 날 시집가겠다고 데려온 신랑감이라는 친구를 보니까 진짜 마음에 들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이미 콩깍지가 씌워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내일 가서 인사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엄마는 무심하게 대답합니다. “엄마, 밥 해 줄 거지?”, “그래.”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신랑이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합니다. 밥하기 싫어서, “참아, 점심때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 놓고 기다릴 거야.”하고는 선물 하나를 사서 갑니다. 전을 부치고 음식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조용합니다. 웬일인가 하고 “엄마, 나 왔어.”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도 없고 엄마 혼자 목침을 베고 주무시다가 부스스 일어납니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가셨어?”, “바쁘다고 어디 나가셨어.” 절 받으시라고 절을 하고, “엄마, 우리 배고파 밥 줘.”, “그래”, “밥 줄 거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부엌에 가서 덜그럭덜그럭 하더니 1분 만에 상을 차려 왔습니다. 상 한쪽 구석이 떨어지고 밥풀이 달라 붙어있는 그런 상에, 먹다 남은 밥 두 그릇에 찬물을 부어서 제사 지내듯이 숟가락 두 개를 꽂고 젓가락 두 개를 놨는데, 반찬이라고는 수많은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고추장 하나가 딱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배고픈데 들게.”하며 상을 탁! 내려놓는 바람에 물이 찍, 하고 쏟아졌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상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위에게 장모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싫어!, 어떻게 우리 딸이 너 같은 자식하고 엮어졌니? 넌 우리 집안의 쓰레기야!”라는 메시지가 그 밥상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별로 실감이 나지 않으십니까?
저는 교인들을 심방하는데 집에서 밥 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반찬 한 가지를 만들기 위해서 주부들의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를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리를 조금 합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갑니다. 요만한 한 접시를 요리하려면 도마를 몇 번을 물에 씻어야 합니다. 시장에 가서 사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부분 바깥에 가서 갈비탕을 먹든지 하고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가 먹든지, 아니면 식사 시간을 피하든지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은 한 50대 초반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 집에 심방을 가기로 했습니다. 교역자를 통해서 밥을 하겠다고 하기에, “하지 마라, 힘든데 하지 말고 갈비탕이나 먹고 때우자.”고 전했더니, 그래도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한다고 합니다. 그럼 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심방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말씀을 전하고 한 30분 간절히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 식사를 하고 가십시오.” 하며 상을 들고 나오는데, 세 명이서 상을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교자상인데 젓가락을 들고 손을 뻗어도 사정거리에 미치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냐?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니? 내가 무엇이라고 이런 대접을 받겠느냐? 차라리 이럴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지…”했더니 이 자매가, “목사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했습니다. 드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 점심상을 차리기 위해서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열흘 전부터 장을 봐서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만들고 사흘 전부터 본격적으로 하고 당일 아침에 요리 잘 하는 자기 언니까지 불러서 세 사람이 만들어서 점심에 예배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갖다 놓은 것입니다. 나는 일평생 살면서 그 밥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자매가 하는 얘기가, “제가 이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서 내 인생이 바뀌었고, 목사님이 평생에 우리 집에 한 번 이상 올 가능성이 없는데 기도하면서 준비했습니다.”
이 시인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다”고 했을 때 그 밥상이 고추장 올려놓은 그 밥상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런 밥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아무데서도 그런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식당에서 주는 밥은 영혼이 없는 밥입니다. 집에서 엄마가 만든 밥, 물론 엄마라도 영혼없이 밥을 만들어주는 엄마도 있기는 합니다. 아무거나 인스턴트 깡통 따서 렌지에 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시인이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밥상에 줄을 달아서 위에서 내려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이 정말 곤고하고 어떻게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의 식탁을 차려주셔서 그것을 먹고 새 힘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살다가 너무 기력이 없고 의욕도 없을 때, 진짜 좋은 친구가 와서 좋은 식당에 가서, 꼭 비싸지 않아도 진짜 맛있는 밥 한 끼만 먹어도, 그것은 단순히 먹고 육체의 힘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외롭지 않고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껴서 그날 밤 자살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탁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이 자신의 빈 잔이 가득차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환희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 밥상을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배가 고파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 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을 정도로 굶주려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화려한 식탁을 차려서 그것을 먹고 놀랍게 배부른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하나님은 언제나 곤고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시고 그것을 먹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엑스레이 사진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뼈를 보여주는데 어떤 사진기가 있어서 우리 영혼의 속사람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겠습니까? 겉 사람은 실컷 먹어서 이런 몸집을 가지고 있어도 영혼의 사람은 피골이 상접해서 발길로 차면 무릎 뼈가 부러질 정도로 그렇게 메마른 영혼은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어떤 참된 기쁨과 가치를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내 힘으로 야망을 이루려고 하다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끌어들여서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삐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미워합니다. 감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 준 게 뭡니까? 도와주지는 않을망정 딴지나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망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과연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고백을 하는 때가 있겠습니까? 마치 뜨거운 여름날에, 차갑기는 하지만 진한 설탕물을 마신 사람이, 마시자마자 또 다른 설탕물을 미친 듯이 찾듯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외에 기대할 삶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식탁을 충만히 누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시구나!, 이 놀라운 아름다운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성품의 끝없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이시는구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살아났구나! 정말 기쁘다!’ 이러한 체험을 해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성경, 안 읽습니다. 더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어플리케이션 해야 하는데, 존 오웬 목사님은 이것을 두 단어로 이야기 했습니다. “consideration”, “application” 성경말씀 자체를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꺼내어서 자기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기차바퀴처럼 움직여 돌아가는 것입니다. 숙고하려면 뭘 알아야 숙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를 교회는 제공해야 하고,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학교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터득하면서, 터득하는 깊이만큼 우리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합니다. 말씀을 다 배워서, “저 사람 틀려먹었구나.”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application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을 고치고 주님께 더 순종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보상으로서 더 많은 말씀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인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데 조지 휫필드가 이 책을 읽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 기독교의 신앙의 놀라운 비밀은 지식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 그때에 비로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자기의 것이 된다.”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누리고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재주나 사람의 어떤 능력있는 영향력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삶 전체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와 함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 가는데, 이 두 개의 비유를 장작과 불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푸라기를 넣고 불을 지르면 한 번에 몇 층 빌딩까지 도달하게 할 수 있지만 몇 분이나 가겠습니까? 장작을 던지면, 지식은 사랑을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야 합니다. 경건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주일에 꼭 해야 했던 일이 그런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밥이고 책은 반찬입니다. 밥이 맛이 없어도 반찬이 맛있으면 밥을 많이 먹게 되고 밥을 먹다보면 반찬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10년쯤 지났으면 집에 책꽂이 하나에는 기독교 책이 꽉 차야합니다. 돈 벌어서 밥 사먹을 때, 20파운드, 30파운드, 50파운드 하는 것은 기꺼이 먹고, 책 한 권에 1만원, 2만원이라고 하면 “아이쿠, 뭐가 저렇게 비싸!” 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책을 읽어가며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생명을 주는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에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문맥으로 돌아가면 “기름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누구에게 주었느냐하면 이스라엘의 신정 사회를 독특하게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솥발 같은 office, 직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는 왕, 하나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입니다. 왕은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왕은 자기 왕국에 자기 이상을 구현하는 세상의 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라 왕은 백성들에게는 왕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신하,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상을 자신의 나라에 구현할 책임을 진 사람이 왕입니다. 법과 통치를 통해서 그런 일들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선지자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왕과는 다른 방법으로 봉사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그 계시를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으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윤리에 대한 판단을 구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환경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오셔서 오존층이 다 파괴되고 아이슬란드 쪽에 얼음이 다 녹아내리고 남태평양의 섬들이 물에 잠기는 사건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라고 묻는 것은 굉장히 적실한 질문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모세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였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들의 사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비한 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것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아주 일부이고, 그 사람들의 주된 임무는 모세의 율법을 탐구해서 그 모세의 율법을 모세가 아닌 자기들의 시대에 적용할 때 어떠한 사회적인 윤리의 표준을 제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오늘날 목회자들이 하고 있는 설교사역과 아주 유사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범주에서 너무 멀어져 있습니다. 목회자가 모두 학자일 수는 없습니다. scholar, 이 말은 자기가 스스로 나는 학자라고 외국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남이 써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목사는 학자라기보다는 academic, 학문인 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 목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목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탐구하고 신학을 연구하고 세상의 학문을 공부해서 어떻게 우리들이 살아야하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을 우리시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도덕과 믿음의 표준을 새롭게 제시해 주는 사람이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에게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달랐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중심이 아니라 전통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이 불결한 백성들을 거룩한 하나님과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일은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아도 자기 시대 이런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런 세 가지 직분들을 잘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 가지 직분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기름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때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유입니다. 감람유 자체에 어떤 신비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상징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령은 신약시대의 성령의 경륜과 구약시대의 성령의 경륜이 다릅니다. 똑같은 성령이시지만 신약시대에는 한번 믿는 사람들 속에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님이 신약성경에서는 제시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내주’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일이 있을 때 임하셔서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시고, 그때에는 탁월한 능력과 지혜, 용기, 혹은 지식적인 능력까지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고, 그를 구별되게 하시고 끝나면 다시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어 가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을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일평생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 왕으로 지명하고 기름을 부었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그 어려운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신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환희와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의 힘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눈앞에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역경과 고난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대신 기쁨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 때문에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용기를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 위대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못 참고 주저앉는 지점이 거의 비슷합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주저앉습니다.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여기서 주저앉으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가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는 지점에서 예수님을 믿어도 주저앉고, 미워하는 시점에서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는 시점에서 나도 모든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그를 용서하지 않고, 돈 좀 벌고 모든 것이 형통하면 웃고 까불고, 뭐가 좀 안 풀리고 고통스러우면 우거지상을 하고 혼자 불행을 다 짊어진 것처럼 살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예수 믿는 것이 우리를 다르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주저앉는 그 지점에서 예수 때문에 견딜 수 있었고 하나님 때문에 이길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비로소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충만하게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극복 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들을 갖게 되는 것, 사랑의 힘, 지식의 힘 이런 모든 것들이 성령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쌩쌩해도 열흘만 밥을 안 먹이면 걷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서 있을 것입니다. 육체는 끊임없이 이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육체의 필요만을 해결해주지만 영혼은 영적인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천상의 자원입니다. 지상의 자원을 육체를 위해서 필요하고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heavenly resource, 천상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천상의 자원은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자원입니다. 우리 주님께로부터 오는 자원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겹치고 인생의 모든 희망이 사라질 것 같은 때에 어린아이처럼 견딜 수가 없어서 주님께 매달립니다.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나니까 갑자기 어두운 하늘이 환해지면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세상의 자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 비밀을 불신자는 모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 비밀을 안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찬양)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얼 해야 합니까?”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희망이 있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세상의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도 성령을 구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선을 달락 하는데 누가 전갈을 주고,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부모가 있겠느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면 그 부모보다 더 뜨겁게 너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너희가 간절히 구할 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 하나님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스러운 경지, 전혀 새로운 은혜의 세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을 때, 거기서 그런 세계에 대한 그리움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가 웬만한 음식은 거의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 먹는 음식이 민물고기입니다. 완전히 안 먹는 것은 아닌데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냄새가 나고 싫습니다. 더구나 붕어 같은 것은 안 먹습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를 켜니까 전국에 있는 음식점을 소개하면서 붕어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토크쇼를 하며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며칠 있다가 차를 타고 또 라디오를 켜니까 다른 방송에서도 똑같은 얘기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을 계속 듣고 나니까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 예수 믿는 것도 이런 것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며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도 자기가 별로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없어도, 계속 이야기하고, 이 사람이 체험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돈의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다녀온 음식점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정말 맛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한 20분 듣고 나면 자기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보십시오. 그런 세계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쇼핑센터에서? 노래방에서? 술집에서? 직장에서? 해변가에서? 아름다운 숲속에서? 없습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곳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도 있고 경건서적에도 있고, 그러면서 내가 이제껏 경험한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그 세계를 알게 될 때 그 세계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던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령에 충만한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의 큰 은혜를 받아서 영혼의 빈 잔이 아름답게 채워져서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