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 인턴십 특강
녹취자: 김명진
이 책이 데뷔작이 아니라 데뷔작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그 책이 나오고 네 번째 책이었는데 제가 책을 썼을 때가 42살 이었습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책을 쓰고 나서 경상도 지방으로 집회를 갔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은 전도사이고 사모님하고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여섯 살이나 일곱 살짜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셋이서 프라이드 차를 타고 가는데 아이는 뒤에서 까불고 놀고, 부부가 차를 타고 가는데 뜬금없이 아이가 장난을 치더니 “아빠, 아빠 설교자 맞아?”, “그럼, 설교자이지?”, “불꽃처럼 타올라?”, 이 아이가 한글을 아니까 아빠 책상에 굴러다니는 책을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가끔 타오르는데 어떤 여자가 물을 자꾸 붓는다.”,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 물 붓 지마. 아빠는 그냥 타오르게 나둬. 설교자잖아.”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뼈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려운 것은 결혼을 하고 같이 가는 것입니다. 독신은 독신대로 아마 져야할 십자가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두 사람의 마음이 일치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그런 것을 잘 못 느끼고, 형제들에게도 그런 것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남자, 여자가 만나서,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는데 그게 딱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성격을 하나님이 마음이 딱딱 맞는 사람들을 짝을 지어주지 않고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짝을 지어주셨습니다. 그것을 결혼에 있어서 보합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하기 전에 “우리 기분도 그런데 호텔에 가서 식사나 할까?”했을 때 자매가 “좋지” 하면서 박수를 치면, 연애할 때는 참 신나는데 결혼 할 때 그렇게 살면 거덜 나는 것입니다. 남편은 바람이 잔뜩 들어가서 “오늘 좋은 날인데 그까짓 것 한번 쓰자.” 그러면 “된장 끓여 놨으니까 속차려.”이러면 이게 분위기가 깨지는 것 같지만 장기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지혜를 터득하는데 상당한 세월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험상궂게 싸우지는 않고 말다툼하고 그러는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말다툼 한 지가 18년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둘이 마음과 생각이 딱 맞아도 그 길을 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사모님이니까 사모님은 사모님대로 외롭고 이해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힘든 것도 많겠지만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저 같은 경우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억압감, 사역의 중압감,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가정에서도 제 할 일을 하지 못한다는 압박감, 이런 것들 때문에, 야간 신학대학원 다니고 3년은 총신대학원 다니고, 하여튼 7년 동안에 항상 마음속에 눈물이 꽉 찬 상태로 7년을 보냈습니다. 따로 무슨 기도를 준비할 필요가 없이 앉으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런 어려움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잘 소화해내면 그것이 우리를 성숙시키지만 소화를 시키지 못하면 아주 패역한 사람으로 우리 자신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왔을 때 자기가 옛날에 교회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고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다 극복해서 상처가 찬송이 되는 사람은 괜찮은데 그게 안된 사람은 자기는 그 교회에서 피해를 입었지만 그 다음 교회에 가서는 가해자가 됩니다. 저쪽 교회에서는 피해자가 되었는데 거기에서 굽은 성품과 잘못된 태도들이 다음 교회에 가서는 자기가 가해자로 변신을 합니다. 그것을 소화해야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성화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십자가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가리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시련과 역경들이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소화할 때, 그때에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풍부한 신앙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사람을 연단되게 만들어서 풍부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한국교회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이 사모의 지위와 위치가 통일 된 것이 없고, 어떤 교회는 사역자를 쓰는 조건이 사모님은 출석하지 않겠다는 것이 조건입니다. “너만 와서 교역하고 너희 가족은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것”이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이 사람들의 지위가 애매하고 또, 사모라고 지각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휘젓고 다니고 귀찮으니까 아예 애들까지도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직장생활이지 사역이 아닙니다. 사역은 부부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서 모든 것을 바쳐야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편과 함께 모든 삶을 공유하면서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매일 남편에게 뭐도 안 해주고, 뭐도 안 해주고, 뭐도 안 해주고, 그렇게 투덜대고 있으면 계속 상처가 쌓이고 망가집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역자는 이혼에 있어서 안전하다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마구 이혼합니다. 얼마나 빨리 이혼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외국에 유학한 사람의 경우는 갈 때 데려간 아내와 올 때 데리고 오는 아내가 바뀌어 있습니다. 심지어 애들 까지도 바뀌어 있습니다. 그런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처음에 신학을 시작하고 혹은 사역을 시작할 때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 어떤 습관과 태도를 몸에 익히느냐에 따라서 일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그 처음의 길에 들어 설 때에 서로 소통하고 함께 목회의 길을 가는 방식을 몸에 익히면 크게 빗나가지 않고 갈등이 생겨도 작은 갈등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태도가 익혀지지 않으면 엄청나게 틈이 벌어지면서 문제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모님이 반드시 신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남편을 능가해서 남편이 하수처럼 보여서 여러분이 지도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편과 신학적인 토론이 가능한 상대가 되어야합니다. 아니면 남편이 워낙 뛰어나서 훌륭한 제자가 되든지, 어쨌든 남편과 신학적인 대화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도 공부를 하지 않는데 사모님들이 공부를 하겠습니까? 남편이 기본적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신학의 토대 위에서 목회를 하고 인생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아내가 공유해서 해야 하고, 남편은 그런 것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아내로부터 자극을 받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목회의 길에 들어 설 때 돈 많이 벌어서 호사스럽게 살다가 죽고 싶어서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사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좋은 목회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으로 써도 수 십 권을 써도 다 못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 하자면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학문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와 신앙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 회심의 체험이라든지, 신비체험을 말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 길로 들어서게 했던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항상 그 사람은 마치 인공위성이 지구를 두 시간 반에 한 바퀴 씩 돌지만 그러나 한 번도 지구를 만난 적이 없듯이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을 말하지만 만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생에 있어서 목회에 들어서 한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매일 매일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전에 자기가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거룩하심, 이런 하나님의 성품들을 경험하는 영적인 깊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감사하게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7년 동안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제 생애에서 특별한 때 몇 번을 제외하고는 신학교 다닐 때가 신앙생활이 가장 충만했습니다. 7년 동안에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져서 헤매고 기도도 안하고 그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건강했고, 제가 굉장히 건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산을 오르는 것은 잘 하지 못하지만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고 사역하는 것은 할 수 있었습니다. 간간이 신학교 다닐 때, 학부 때도 있었고, 신대원 다닐 때도 그랬고, 신대원 졸업하고 THM에 있을 때도 그랬고, 목회하면서도 몇 번 그런 계기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깊이 몇 년에 한 번씩, 3년, 4년, 혹은 십년에 한 번이라도 주님을 깊이 만나서 내 존재와 삶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주님을 만나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의하면 개인적인 부흥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전부다 피상적이고 가볍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말도 번지르한데 무게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인 권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답이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 정말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그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목회를 돕는 사람이니까 남편은 빡세게 고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아야 하고 나는 천천히 받아도 된다고 생각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제가 아주 존경하는 영적인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를 했지만 부인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귀족집안 출신이었고 사치하는 여자였습니다. 절대적으로 사치했다는 것 보다는 대가 집에서 귀족으로 살았으니까 쓰던 가락이 나오던 것입니다. 에드워즈도 좋은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밑에서 총장도 나오고 부통령도 나오고, 수많은 사람이 후손들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에드워즈 목사님이 설교 때문에 출장을 갔을 때 그 집을 비운 사이에 외부강사가 와서 말씀을 전했는데 거기에서 그 부인이 깊이 변화를 받고 주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에드워즈와 아주 특별한 연합이 이루게 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만났을 때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잘 되지 않았던 사람이 미가엘과 다윗입니다. 미가엘이 다윗이 좋아서 결혼을 했는데 수준이 맞지 않아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주님을 부부가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도움이 됩니다. 영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경험한 신앙의 세계보다 훨씬 탁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깨달아야만 사모함이 생깁니다. 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리움이 생기지 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리움이 생기겠습니까?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들이 공부를 너무 하지 않습니다. 안 해도 탁월하게 하지 않습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 김용옥 씨 입니다. 사상은 나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깊이 존중합니다. 내가 울산에 내려가서 집회를 했습니다. 정근호 목사님 교회에 가서 했는데 목사님이 자기 집에서 묵자고 해서 저는 호텔보다 좋았습니다. 뒷방을 하나 줬는데 저녁 집회를 마치고 잠이 안와서 눈을 떠보니 『동양불교 난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잠이 안와서 펼쳐서 읽었는데 690페이지를 새벽까지 다 읽었습니다. 왜 읽었냐하면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사랑하지 말자』라는 책을 읽었는데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서서 절반을 읽었습니다. 사상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사상과 다릅니다. 내가 깊이 그 분을 존중하는 이유는 내가 만난 한국의 철학자 중 가장 해박한 사람이고 해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을 자기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연결시킨 사람입니다. 결론은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 진지함을 지닌 철학자가 별로 없습니다. 역사, 정치, 경제, 생명공학, 물리학, 천문학, 모든 것을.... 그런데 십 년전 책과 지금 책이 또 다릅니다. 그 만큼 학문 깊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교부들이, 교부 압니까? 예수님 죽으시고 그 다음 사람들이 사도들이었고, 사도들이 죽으면서 남긴 제자들을 속사도교부라고 합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라든지 바울의 제자 글레멘트라든지 이런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지나간 다음에 나온 사람들이 2세기의 변증가들이라고 불리는 교부들입니다. 우리가 교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교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키폴리아누스, 테르투리아누스, 예레메우스라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하는데 그 시기가 로마에서는 사상적으로, 1세기 때는 정치적으로 핍박했는데 하도 번져나가니까 이번에는 기독교가 믿는 것이 말짱 거짓말이라고 사상적으로 핍박하던 시대입니다. 그때 변증가들이 나오게 되고 이 사람들을 교부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교부들의 시대가 어거스틴까지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이후부터는 중세 교부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중세 철학자들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13세기 14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나오고, 15세기 종교개혁이 나오고, 중세 말기에 종교 개혁이 나오고,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 근대 이후에 현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도들과 교부들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처럼 삶이나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그러면 정신적 위안을 위해서, 혹은 종교적인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 볼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의라는 말을 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에 귀의 했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불교에 귀의 했다는 말은 잘 씁니다. 그만큼 오늘날 기독교는, 불교는 전통적으로 출가해서 불자가 된다는 의미는 귀의입니다.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식, 인생의 철학, 이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인생의 지혜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가족까지도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맨 처음에 똑같은 개념의 종교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당시에 귀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사고방식, 인생관, 사상,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만 살아간다. 그것을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철학,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하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인류가 여태까지 해 온 모든 인생에 관한 질문과 모든 고통에 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누구이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은 인간이 타락하면서 즉시 시작했던 고민입니다. 그런 고민을 가장 대량으로 자유분방하게 쏟아놓았던 시기가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그리스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에 가보면 철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땅이 정말 기름집니다. 뭐든지 씨만 뿌리면 저절로 곡식이 맺힙니다. 게다가 노예가 있어서 노예들이 다 해줍니다. 그래서 할 일이 없으니까 누워서 나는 여기에 왜 이러고 있지? 나는 어디에서 왔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저 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계절이 바뀌고 식물들이 생장하고 변화 되고 하는 것들이 무슨 힘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을 많이 하면서 200년, 300년 동안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고민을 다 쏟아 놓습니다. 그런데 답을 찾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사실 그것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정답이었다면 그 시대에 가장 많은 천재들이 태어났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독교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던지는 질문에 답을 주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는 수많은 고민, 저는 어렸을 때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무서웠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 두 번째는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 가족이나 교회, 친구, 선생님을 포함해서 아무도 내 고민에 공감해준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답을 기독교가 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모든 인생의 고민을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남으로써 답을 찾았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렇게 된 것이구나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깊이 깨달은 이것을 우리와 똑같이 고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의 빛을 나눠줘야 합니다. 중심이 성경말씀이고 이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버내드 앰이라는 학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할 때는 계몽주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진리를 발견했지만 이 진리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살게 되었을까? 그들을 움직이는 현대의 사상과 힘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이해할 때 사람들에게 올바로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양은 어마어마하게 방대합니다. 그래서 감히 웬만한 사람이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방대한 양입니다. 그 모든 지식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은,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유명한 한 세기의 한두 명 나왔던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남편 중에는 천성적으로 탐구의 정신이 있고 성실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아주 게으릅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교수들이 레포트를 내주고 푸쉬를 하니까 할 수없이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면 사역이다 뭐다 핑계를 대면서, 핑계가 아니라 실제로 바쁘니까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3년, 4년이 되면 현저하게 퇴보해서 머리가 굳어져서 설교집이나 재미있는 예화집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굳어진 머리가 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비극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열심히 독서를 해서 남편을 자극해야 합니다. 자극을 할 때 어려운 책 한 권을 읽고, 이런 것도 못 읽었냐는 듯이 대들면 남편이 반감이 생겨서 “그래, 너 잘났다. 나는 목회하느라 바빠서 책 읽을 시간도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책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남편이 반 쯤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을 합니다. 대답을 하고 나서도 왠지 찜찜할 정도의 수준을 질문을 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라도. “여보, 네브라스카라는 학자가 말했는데 모델의 개념이 뭐야?” 네브라스카도 모르고 모델도 모릅니다. 그러면 짜증이 납니다. 상당히 많은 양을 읽고 이 정도면 남편이 절반 쯤 대답을 하겠다. 다 아는 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고 자극이 오는 것, 그러면 대답을 해주고도 왠지 찜찜합니다. 그러면 자기는 틀림없이 가서 찾아봅니다. 자극을 하면서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인격이 문제가 됩니다. 인격이 성숙하면 모든 방면에서 자신이 제일 나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오히려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대화가 끝나고 나면 업그레이드 된 기분입니다. 그런 것을 못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가 다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 사람은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엄청난 발전이 있고 깊은 유대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총신대생들도 보면 신대원에 있는 사람이 학부에 있는 사람과 결혼을 많이 합니다. 수법이 비슷합니다. 성경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가르쳤는데 남자로서는 매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얼굴도 못생기고, 학교도 그저 그렇고, 그런데 전도사님이니까 성경을 가르치는데 너무 은혜롭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신앙으로 교통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연합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매는 파혼하고 그리로 갔습니다. 그것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연합이 이루어 져야지, 그래도 우리가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인데 풍선이나 터트리고, 이벤트나 해주고, 초콜렛이나 사주는 것으로 연합을 찾으면 너무 애완견적인 연합이지 않습니까? 뭔가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이 이루어져야지 사모님들이 대화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이 남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물론 강아지 밥을 주었느냐? 애기가 똥을 쌌다고 하는 것도 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대화라는 것은 이야기를 했는데 듣고 나니까 내 안에 무엇을 형성을 하고, 듣고 나서 반응을 하니까 저 사람 안에 무언가 일어나고, 상호적으로 포메이션 하는 것을 대화라고 합니다. 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책도 읽지 않고, 남편 사역에 관심도 없고, 더구나 영혼에 대한 사랑에 깊은 관심도 없습니다. “여보, 여보, 그때 청년부에 어려운 자매 있는데 어떻게 됐어? 내가 요즘 계속 기도하고 있는데 어때?”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사모님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투덜댑니다. 대화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합을 이룰 수 있는 대화를, 그러면서 가장 좋은 것은 책을 읽고 학문적인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편들보다 조건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많습니다. 계속 책을 읽고 깊이를 쌓아가고 나중에 남편들이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받고 싶은 관계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두 가지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공부하고 세 번째는 신실해야 합니다. 일체의 성실과 근면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근면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네 번째는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와의 모든 관계 속에서 수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상처를 간직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의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속에서 녹여 낼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