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 목회자 부부세미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 빌 1:8
녹취자: 이병두
어는 목사님이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커다란 고목나무를 만났답니다. 나무가 큰데 구멍이 뚫려서 속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고목나무를 쓰다듬으면서 고목나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얘야! 너는 목회도 안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에 구멍이 크게 뚫어졌니?” 이것은 정말 이 목회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는 한 예화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목회가 재미있다는 목회자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더군다나 목회가 신난다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언제까지 목회를 해야지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전도사 때부터 계산을 하면 꼭 30년을 목회를 했는데, 아직도 목회는 내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고 설교는 이렇게 엉망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목회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란,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 한 것, 그것이 목회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복음사역, 우리 목회를 움직이는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 핵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인들에게 이 심장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것이었고, 생명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장기 중에 심장만큼 하나님이 깊이깊이 숨겨 놓으신 장기가 없습니다. 간도 있고 콩팥도 있지만 물렁물렁한 배에 쌓여 있어서 칼에 한번 찍히거나 부딪치면 금방 손상을 당합니다. 그런데 심장은 폐 저 뒤쪽에 감춰 놓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앞뒤로 두꺼운 콘크리트 같은 갈비뼈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나가다가 부딪혀서 심장이 터졌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속에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핏줄이 어떤 책에 보니까 약 12만 킬로미터라고 하는데, 그 어마어마한 핏줄에 피를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심장은 일생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합니다. 멈추는 것이 바로 심장마비이고 죽음입니다. 이 심장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박동이 멈추면 불과 몇 십분 안에 온 몸의 세포는 괴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 심장이고, 우리의 모든 인체 중에서 이 심장에 신세를 지지 않는 장기는 없습니다. 폐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셔도 피가 아니면 그 빨아들인 산소를 온 몸에 전달해 줄 수송수단이 없고, 온 몸에서 내 보내야 하는 탁하고 더러운 독성 물질들도 전달 할 운송수단들이 없습니다. 피가 그 일들을 하고 그 모든 피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심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한경직 목사님이 텔레비전에 나오셨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세계적으로 큰 교회을 이루셨는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했더니, TV를 보는 사람들은 ‘제가 기도을 많이 했습니다. 설교을 잘했습니다. 교회 운영을 열렬히 했습니다.’ 이런 답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전쟁이 나서 이북에 있는 사람들이 그냥 남쪽으로 다 쏟아져 내려 왔는데, 제가 유학을 했기 때문에 (유학을 하셨습니다. 유학중에 폐가 안좋아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미군 부대에 가서 ‘우리 남한 사람이 불쌍하니 물자 좀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텐트도 얻어오고, 구호 물자도 얻어오고, 옷가지 버린 것도 주워 오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교인들이 그렇게 고마워하면서 교회에 모이기 시작해서 부흥이 됐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듣는 사람,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한국의 영적인 지도자가 어떻게 교회가 부흥했냐고 물었더니, 미군부대 가서 구호물자 얻어 와서 나눠 주었더니,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니 안 그렇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분의 독특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사람마다 아무개 교회는 사람들 많은 신도시에 세웠으니까 그렇게 잘되지, 아무개 교회는 돈 많은 유력한 장로들이 뒷돈을 대니까 교회 건물도 번듯하고 그 건물보고 사람들이 모이는 거지, 아무개 교회는 목사님이 널리 알려졌으니까 이름보고 사람들이 몰려오는거지, 사람들은 교회의 성장을 다 그렇게 목회자와 외적인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런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성장하는 모든 교회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성장하는가? 성경적인 교회의 성장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을 가르치는데도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가 싫다고 떠난 사람들이, 이단의 교회에는 꾸역꾸역 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함부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치만 그 모든 것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외적인 수단일 뿐이고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그 교회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가진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 살다가, 또는 얼마나 큰 교회를 목회하다 죽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목회를 하는 그날 동안 하나님 앞에서 마음 아프게 하지 않는 목회가 무엇인지를 딱 한 가지만 여러분에게 말씀에 입각해서 가르쳐 드릴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진심인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라고 말하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어떤 종류의 심장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하나의 분수령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생애로 나누어집니다. 그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열두 사도를 세우신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까지는 예수님이 혼자 하시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0장을 기준점으로 사도들을 세우시고 사도들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사도적인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생애를 갈라노은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예수님께 배우는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10장을 분수령으로 하여 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아포스토스’라는 이름입니다. ‘사도’라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혹은 먼저 파송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파송하셔서 당신만 따라다니던 제지들을 이제는 파송하셔서 당신이 없는 곳에서도 당신이 행한 것과 같은 능력으로 당신처럼 말씀을 전파하고, 당신처럼 병든 자들을 고치고 당신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보낸 곳이 유대인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잃어버린 양들에게 예수님이 사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려고 결심을 하셨겠습니까? 먼 관점에서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지만 짧은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 마음이 크게 움직이신 사건이 있었고, 이 일을 예수님이 결단 하시고,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열 두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셨던 것 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마태복음 9장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추수할 일꾼을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예수님이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부르시고 추수꾼으로 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황하는 양떼를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지만, 이 때는 예수님 마음이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특별한 마음은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민망히 여기셨다’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에스프랑크리스데’라고 나오는데 원래의 뜻은 ‘창자까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즉, ‘창자가 흔들린다’ 이 뜻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의 영혼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것을 창자라고 본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곳이 감동을 받아서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마음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려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마음이 제자들을 사도삼아 이 세상에 파송하게 하신 동기이고, 우리를 목회자로 불러 이 세상에 보내신 그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그렇게 모질게 박해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모함을 하고, 아시아에 들어와서 목회 할 때에 수 많은 간사한 꾀로 사도바울을 괴롭혔던 유대인인데도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내 골육 친척 중 몇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할 정도로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슴이 저몄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이 사도바울은 예수께 배웠고, 자기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질고 표독스럽게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던 인간까지 그렇게 사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슴 저미는 은혜를 깨달으면서, 예수의 심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린교회를 19년째 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목회자들을 교회 안밖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게 있습니다. 하늘문이 열린 목회가 있고, 하늘문이 닫힌 목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옳을 수도 있고 목회가자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일단 교인들에게 무엇인가 마음에 맺혀서 원망하는 마음이나 원한을 품은 사람치고, 하늘이 열린 목회를 하는 것을 저는 본적이 없습니다. 목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한 말도 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목회자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일을 위해서 돕자’이러는데 말들이 없습니다. “교회들도 제법 규모도 있고 그러는데 그까짓 것 돈 얼마나 된다고 좀 도우면 안되냐?” 그랬더니 어느 목사님이 저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교회가 제법 크지만, 김목사님과 입장이 다릅니다. 창업사장하고 고용사장하고 똑 같습니까? 목사님이야 도와주자 하면, 교회에서 아무 말 안하고 말을 듣지만,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은 50만원 쓸려고 해도 장로님들이 당회하자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잘 이해가 안갔습니다. 그런 곳에 있어보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 사실 그런 환경 속에서 목회자가 어떻게 자존감을 가지고 목회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치 않겠습니까? 어디 그 뿐 입니까?
(예화) 어느 교회는 집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한없이 기력이 빠져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새로이 교회에 부임해서 10년이 됐는데, 10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나는 뭔가 해 볼려고 했고, 장로님들은 하지 말라고 싸우면서 10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기서 보낸 인생이, 젊음이 아깝다는 것입니다. “장로님! 우리교회 이래선 안됩니다. 왜? 주일만 교회에 옵니까? 평일에 노는 성도들을 불러다가 성경공부를 가르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를 가르칠만한 방들이 필요하니까 몇 개만 만듭시다.”했는데도 허락을 안 해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를 참 사랑하시나 보군요?” 그랬더니 “목사님! 우리 교회 가장 말 많은 장로님이 추수 감사 헌금을 2,000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 가난하고 어려우시니까 그렇겠죠?” 했더니 목사님이 “목사님 그 장로님 부산에 빌딩이 두채나 됩니다.” 정말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예화) 최근에 우리 노회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신도시 개발이 되면서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개중에는 한 100억씩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 냈다는 사람을 거의 못 들어 본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모였을 때 아주 심하게 질타했습니다. ‘차라리 그러면 십일조가 비성경적이라고 정면으로 도전을 해라.’ 아니 50만원 벌었을 때는 5만원씩 꼬박꼬박 내다가 100억 보상금이 들어오니까 10억을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내자니 너무 양심이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박목사님을 불렀습니다. 1,000만원, 2,000만원 쥐어 줬습니다. 그것이 자기돈 입니까? 그리고 교회에는 십일조를 안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습니까?
(예화) 돌아가신 이준표 목사님이 시골교회 가서 목회를 하는데, 장로님이 얼마나 자기를 괴롭히는지 기도하면서 ‘하나님! 저 장로 좀 고쳐 주십시오. 바꿔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셨답니다. ‘걔는 나도 못 바꿨다. 네가 바꿔라!’ 농담이신지 진짜 응답을 들으셨는지, 전 책에서 읽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우리 목회자라고 해서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 아니고, 다 핏줄 받아서 태어난 인간인데, 우리도 누가 잘 한다고 하면 기쁘고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싫은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렇게 목회자 앞에서 노래를 불러 주어야 될 사람들이 ‘당신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면서 그렇게 괴롭힙니다. 저는 후보 목사들을 만나면 어떤 때는 정말 불쌍합니다. 내가 가서 장로들 붙들고 좀 사정을 하고 싶습니다. ‘이 목사들 좀 봐 주십시오! 제가 밥도 사주고, 책도 줄 테니까 한번 만 봐 달라고!’말입니다.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니 5년, 10년 목회를 해도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들하고 그냥 싸우다가 지치는 것입니다.
(예화) 동창들이 모였는데 안식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19년 됐는데 안식년을 아직 못 갔습니다. 그래도 아마 한 달 정도 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일은 꼭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직 난 못 갔어?“ 라고 옆에 있는 친구들이 이야기하니 목사 하나가 핏대가 팍 세우면서, ”그렇게 목회할 필요 없어, 안식년 안가고 열심히 목회 해봐야 교회 알아주는 놈들 하나도 없어. 다 찾아먹어! 왜? 안 찿아 먹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친구 교회 개척한 친구 아니지?“ 맞답니다. 청빙 받아서 갔답니다. 가서 너무 괴롭히니까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목사님 말이 맞습니다. ”나무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구멍이 뚫렸냐?“
(예화) 손양원 목사님은 요즘 서울에서 뮤지컬을 할 정도로 한국교회에 유명한 분이고,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이 미국에도 번역이 되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따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지금 같으면 거의 한국 교회의 성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목회하실 때 그렇게 목사님을 내쫓지 못해서 갈구는 교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로가 됐습니다. ‘참 나도 가능성이 있다.’ 저는 그렇게 야비할 정도로 괴롭힌 받은 적은 별로 없습니다.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교회에서 일어나는 황당한 일이 있으면 아직도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라고 물어 봅니다. 그런 일은 별로 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괴로울 때마다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야, 그렇구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도 싫다는 교인이 있었다는데, 나야 그만 못한데 종종 나를 싫다는 사람 가끔 한둘 만난들 그게 뭐 그렇게 대수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위로를 받는 적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모두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것을 자기가 속에서 은혜로 해결을 못하고, 교인들이 자기에게 악하게 대할 때, 악으로 갚기 위해서 마음에서 미움의 칼을 뽑으면, 사실은 저 사람을 찌른 것 같은데 저 사람을 찌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찌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엊그제 밤에 제가 여기서 산책 하다가 조금 뛰었습니다. 그런데 넘어졌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이쪽을 탁 짚었는데 인대가 늘어나고, 아주 좋은 옷이 그냥 바닥에 긁혀서 주욱하고 찢어지면서 구멍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이렇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발 너 때문에 이 깁스하게 됐다’고 하면, 발을 칼로 찍는 거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온 몸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칙입니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어떠한 목회의 축복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럼 목사도 사람인데 섭섭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제가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목회자인 나는 괴로움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찬송)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저는 19년 전에 일곱 명의 교인을 데리고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자리는 저도 몰랐는데 두 번 교회가 망하고 나간 자리였습니다. 꼭 유령의 집 같은 지하실을 페인트를 칠하고 청소를 하고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제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정말 가장 비참하게 죽어도, 받은 은혜가 더 큰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찌 괴로운 일이 없었겠습니까?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괜찮아!’ 기도가 아닙니다. 제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괜찮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밟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처음 우리가 목회의 길로 들어설 때 금마차 타고 다니고, 선지자로서 비단 옷을 입으려고 이길에 들어 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어떤 말도 되지 않는 악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행할지라도 그럴 수도 있어,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생각을 해야 됩니다. 마음에 쓴물이 우러나오는데 거기에 실려 가면 빛이 비치겠습니까? 잊어버려야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해 팔려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가시면서도, 누구와 대화를 하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판 그 제자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서 운명하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나쁜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이 그렇게 악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그런 인간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를 아프게 하고 목회자에게 고통을 줍니다.
(예화) 어는 교회에서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12월 31일에, 12월 마지막 주 주보와 그 전해 마지막 주 주보 2개를 갖다가 어는 장로가 담임목사 앞에 내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왼쪽 것은 작년 12월 마지막 주 주보고, 오른쪽 것은 금년 마지막 주 주보입니다. 교인들 통계를 보십시오! 2명이 줄었군요. 일 년 동안 그 많은 사례비 받으시고, 그 많은 성도들을 부리시고, 마지막 2명의 교인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 월급 그 대우해주면, 저는 당신보다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 목사의 그 수치심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어떻게 목회가 교인 숫자가 전부이겠으며, 또 목사가 생활비를 받고 교회의 섬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게 무슨 세상의 회사도 아니고, 2개의 주보를 갖다 놓고 교인을 왜 이것 밖에 못 모았냐고 족침을 당할 때 그 수치심이 어땠겠습니까?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괴로움을 당할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게 목회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원래 일어나는 일인데 일어났구나!’ 마치 땅 밟는 사람이 신발에 흙 묻듯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렇게 잘해주고, 우리 목사님 훌륭하다고 하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좀 불안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경기 중 휴식시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아주 뭐 커다란 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작은 일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회자가 언제나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너무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해명을 하면 그 사람 마음은 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해명을 하면 그 사람이 전혀 모르고 있던 몇 사람이 잘못됐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고, 즉시 나를 사랑하게 되느냐하면 그런 예는 거의 없습니다. 할 말은 없어질 것입니다. 난 떳떳하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이 사람이 몰라서 괜찮게 생각하던 몇 사람들을 까발려서, 사실은 그 사람들이 잘못됐기 때문에 당신이 나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자체가 아주 구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53장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면서, 무엇이라고 묘사했습니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다’ 정말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속이 물러터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러터질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때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저를 어떻게 쥐어짜는지, 날 미워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마음에 안드신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심장에 병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심장에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전 그런 사람이 아닌데, 며칠에 한 번씩 자다가 심하게 잠꼬대를 하면서 잠이 깨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잠꼬대가 아니라 펑펑 울든지 소리소리 지르고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냥 모르고 자는데 매일 매일 기도하면서 은혜로 누르는데, 이 속에서 인간의 육정으로는 지금 부하가 너무 많이 걸린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조그마한 티코에다 컨테이너 이삿짐을 실은 것입니다. 그러니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면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위로의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마음을 다 쏟아 놓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말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신기하게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영혼이 그렇게 가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눈물을 흘릴 때는 내가 괴로워서 서러워 울다가 마지막에는 그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서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예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거짓말처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왔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옆에 와서 함께 울고 있으면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내가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목사님, 내가 잘못했어요.”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 되는 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참 평화가 목회자의 가슴속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왜 기도하라고 할 때 그렇게 괴롭고, 오죽했으면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그 집은 참 안됐지만, 그 돌아가신 목사님 댁에 심방 가서 하마터면 유족들 만나서 ‘축하합니다!’ 그럴 뻔 했습니다. 왜 그렇게 괴로워하던 마음이 그렇게 평화롭게 됐냐고 누가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그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즉, ’모든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들도 정말 쩨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졸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평화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평화가 있으면 사람이 대범해집니다. 평화가 없으니까 콩 튀듯 하면서, 사람이 아주 졸렬하고 잘잘해 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괴롭혔다고 또 복수를 합니다. 복수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멀리는 치리하는 방법도 있고, 장로가 괴롭히면, 여러 장로 밥 사 먹이고 해서 그 친구 하나 왕따 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평화가 갑자기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살아보니까 교인들이 떠나고 돈이 몰리고 핍박이 오고 건강이 안 좋고 그래도 다 상관없습니다. 두 가지만 되면 목회는 승리합니다.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설교 할 말씀만 주시면 마귀도 교회를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옹졸한 마음을 품고,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들에게 복수의 칼을 마음으로 갈면,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걷어 가십니다.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예화)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성결교회에서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이름만 대면 성결교 쪽에 있는 분들은 다 아실 정도로 그런 분입니다. 그분이 신학생이었을 때 우리와 한집에 세를 들어서 같이 살았습니다. 셋방살이를 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이니까 항상 전기세 내는 월말이 되면 세든 사람들이 잘 싸웁니다. 전기세 그 몇 백 원 때문에 싸웁니다.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세를 계산을 했는데, 그 사람이 전도사 때인데 명색이 전도사인데 분배를 하다가 좀 잘못되어 좀 많이 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 내가 이렇게 혼자 사는데 많이 내야 됩니까? 왜 내가 이렇게 내야 됩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랬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전도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 하고 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똑똑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다투니까 우리 할머니가 평생을 지나도록 누구하고 싸우시는 분이 아니신데, 그 젊은 전도사란 사람이 하도 까칠하고 경우가 없으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성품이 워낙 좋으셔서 그렇게 싸운다 그래도 ‘그 녀석 아주 못된 녀석이다.’ 이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나이도 훨씬 아래고 하니까 일체 그런 말씀 안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있다가 그 전도사가 옷을 깨끗하게 입고 찾아왔습니다. “남준이 할머니 계십니까?”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왜요?” “일주일 동안 그러고 가서 기도를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한마디도……. 그래서 성령님이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래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좋게 돌려 보내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웃집 안 믿는 할머니하고 언쟁 한마디 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보다 더 독하게 교인들에게 앙심을 품으면서도 기도 안 되는 괴로움을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원래 기도를 많이 하던 사람이고,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원래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사람이 안 되니까 이게 안 되는 것인지 되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뚫려봤어야지 막히는 게 무엇인지 알지 않겠습니까? 원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선교현장에서 토인들에게 칼에 찔려 죽는 것만 순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때로는 힘들고 억울하고 교인들이 때로는 악한 마음을 품고 나에게 괴로움을 주거나 혹은 철이 없어서 나의 목회에 고통을 줄때에, 그것에 또다시 칼을 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을 뿐 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나는 성도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성도들에게는 목회자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일이 이상한 일이고,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일이 이상한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나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회자인 우리의 마음속에는 옛날의 교인이든 지금의 교인이든 간에 추호의 미운사람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신 목회를 하는 비결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하는 교회 안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짓밟아도 그들이 여전히 복수의 칼을 거두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제 아는 친구 목사님 한분은 장로 한사람이 괴롭혀서 대법원까지 끌고 갔습니다. “저 목사 저 친구만 감옥 보내면, 난 파산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1심과 2심에서 무죄가 나왔는데, 교회의 일을 들고 대법원까지 간 것입니다. 그래도 가슴 깊이 품고 용서해야 됩니다. 그 일이 어려울 때 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악한 병정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은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은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니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눈물로 아버지께 비셨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입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할 때, 옛날 일이건 지금 일이건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티끌만큼이라도 미워하고 그들을 정죄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제 마음속에서 그들을 풀어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두 손을 들어서 마음껏 축복해서 나를 괴롭혔던 그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아도, 나는 기뻐할 수 있고 정말 박수를 칠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의 문이 열리는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심장으로 목회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