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강의
녹취자: 문미경, 정윤미
21과 보겠습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의롭다, 칭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justipication이라고 합니다. 라틴어는 ‘유스피카치오’ 영어로는 ‘justipication’이라고 하는데 자꾸 사람들이 정당화라고 번역을 하는데 신학에서는 이것을 칭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혹은 의인이라고 번역하고.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Ⅰ. 칭의의 성질과 요소
1. 칭의의 성질
칭의란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행위입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칭의의 정의를 말하는 겁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합니다. 두 번째,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심. 세 번째, 하나님의 법적행위, 혹은 사법적 행위입니다.
칭의는 중생이나 회심이나 성화와 같이 갱신의 행위나 갱신의 과정이 아니므로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칭의는 몇 가지 특별한 점에서 성화와 차이가 있습니다. justipication은 죄인 밖에서 즉 하나님의 법정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죄책을 제거해줍니다. 죄책과 오염에 대해 배웠을 겁니다. 죄책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입니다. 그리고 오염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생겨난 부패입니다. 오염은 성화에 의해 해결이 됐고 죄책은 칭의에 의해서 해결이 됩니다. 죄책은 단번에, 영원히, 한 번에 해결이 되고, 오염은 점진적으로 일생동안 해결이 되지만 살아있는 동안 완전히 오염을 제거하지 못하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십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성화는 인간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써 죄의 오염을 제거해주며 계속적으로 일생을 걸쳐 행해지는 과정입니다.
2. 칭의의 요소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두 가지 요소를 구별합니다.
칭의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 용서는 죄의 용서...적극적용서는 사랑입니다. 근데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자녀 삼으신다는 겁니다.
A. 소극적 요소
칭의에서 허락된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반복을 인정치 않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의 용서를 위해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책은 사라졌으나 죄책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남아있어, 용서받지 못했다는 감정을 조장시키므로 사죄의 확신에 대한 위안을 반복적으로 요청할 필요가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니까..시간이란 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때 우리의 고백에 기초해서 용서해 주신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면서 현재, 과거, 미래에 있는.. 과거의 죄는 이미 지은죄고 현재의 죄는 지금 남아있는 죄고 미래의 죄는 가능 태로 존재하는 죄이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죄책은 없습니다. 문제는 죄책이 없다할지라도 그렇게 해서 영원히 모든 것을 완전한 것으로 끝내 버리시면 구원 받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구원 받은 다음엔 하나님을 의지할 일이 별로 없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예수를 잘 믿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더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동의가 안 되십니까? 예전에는 나쁜 짓 하고 죄 짓고 그래도 양심의 가책만 있었지...그렇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교회를 나오면 더 괴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몰랐을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 하나님을 알고 나서 느끼는 가책은 다른 겁니다.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지면 예수를 안 믿을 때 보다 더 괴롭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것이기 하지만 중간지대는 없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아니면 안 믿는 거 두 개중에 하나지..중간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 오라..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이상끝’, 그러지 않으시고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하고 당신과 함께 멍에를 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엔 아무 의무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일반 종교에도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예화) 요새 제가 성리학 책을 읽고 있는데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주희나 이퇴계 같은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이냐’이것을 고민하면서 말하자면 그것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학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란 말은 참 재미있습니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학문의 목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고닦으며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크게 두 가지 의무가 있는데 하나는 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야 하는 존재이고 불결한 영혼이니까.. 그다음은 또 하나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인가 창조적인 행위를 더하여야 하는 것...그런 사람이란 겁니다.. 그것이 치인이고 수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학문을 해야 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도 이 학문을 하지 않고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술도 마시고...이건 행복이라고 본인이 착각을 하는 거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을 해야 합니다. 학(學)은 배운다는 뜻이고 , 문(文)은 질문의 뜻..이것이 학문입니다. 질문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밖으로 들어오는 가르침입니다.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생각입니다. 이 두 개가 엮어져서 이것들이 기술을 가르치는 겁니다. 기술, 혹은 기예.. 이게 무슨 기예냐 하우 투 리브(how to live)...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삶의 기예다. 생의 기예....생의 기예를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 이 지혜는 지식과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서 이것이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선조들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주희가 얘기합니다. ‘도(道)가 있습니다. 도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도를 깨달아야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데 인간이 이 도를 그냥 들여다보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도 자체를 경(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공경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경외’.입니다. 도 자체를 섬기면서 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도를 부지런히 찾다보면 이(理)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뭐냐면 학문과 이치를 깨닫는데 이게 우리로 말하자면 ’신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가 그냥 깨닫는 게 아니라 수많은 성현들의 말씀을 참고하면서 이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보처럼 아, 이게 이치가 여기 있구나..이제는 이 이치를 깨달았으니 내가 도를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소인의 생각입니다.. 이만 있는 게 아니라 기(氣)가 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기가 막 살아나서 애(愛)를 일으켜야 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 기가 활발하게 일어나서 애를 일으키고 여기에서 정동이 발생합니다. 이와 기가 만나서 이것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일을 인간이 해야 하는데 이 다스리는 것이 심(心)...마음입니다.
이것을 다 깨달은 후에는 배운 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학을 이야기하는 거하고 통정적 신앙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하고... 이것을 얘기하면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학자가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야하는 길인데 모든 인간이 이를 안 하니까 학자라도 이 길을 가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때 가르쳐 주는 건 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이 지혜를 가르치는 일인 것입니다. 보고 부끄러웠던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이렇게 깨달아서 이게 어느 쪼가리를 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다 알았는데 성경을 가지고 가르쳐 주는데도 심(心)따로 이 따로 기 따로 다 쪼가리 흩어져서 개판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이용해서 자꾸 딴 짓을 하는 겁니다. 거기서 기쁨과 즐거움을 뭐 얻으려고 하는데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느냐..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자세로 학문을 해야 되는 거냐에 대하여 쭉 나열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기치인입니다. 불신자들도 이렇게 이치를 깨닫고 일반 계시만 주워 모아서 이걸 깨닫는데 특별계시를 받은 성경을 가지고도 그것을 몰라서 도 따로 이따로 기따로. 이 속에서 정신이 없어서 산지사방으로 찢어져서 예수를 믿자니 두고 온 세상이 아쉽고 세상에 가자니 예수가 아깝고 구원받은 사람처럼 살자니 너무 부담스럽고 구원 안 받은 사람처럼 살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일평생을 세상에 가도 너는 우리를 배반한 사람이라고 치이고,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서는 너는 아무래도 회심안한 것 같다면서 치이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서 만날지는 가봐야 압니다.
우리의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들어섰으니까 하나님 앞에 잘 보이고 믿음으로 열심히 살아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사람이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학문 없이는 안 됩니다. 학문을 오늘날 생각하는 것같이 학식이 아닙니다. 학식이 많아도 학문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학식이 별로 없는데도 학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학문이 뭐냐면 바로 삶의 기애(氣愛)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가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책의 문제를 해결하시겠지만 우리가 저렇게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을 못 살기 때문에 이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고통이 생기게 됩니다. 분열이 생기고 고통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용서는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 실지도 모른다는 무서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 용서를 비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B. 적극적 요소(양자됨)
칭의로 인해 자녀로 삼으십니다. 신자들을 자녀의 위치에 두시고 상속은 물론 자녀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신자들의 이런 법적 아들 됨은 중생과 성화를 통한 도덕적 아들 됨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도덕적 아들 됨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다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동화에 같은데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왕자가 죽자 왕의 늘 시름 속에서 살다가 민정시찰을 나왔는데 다리 앞에 뛰어든 아이가 있었는데 준수하고 똑똑하게 생겼는데 잃어버린 왕자와 얼굴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데리고 갔다더라... 그래서 공주와 결혼시켜 사위를 삼아 왕위를 물러줬다더라.....하는 이야기처럼 아무리 얼굴이 죽은 왕자와 비슷해서 데리고 왔어도 이 왕자는 왕가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욕도 하고 세속에서 놀던 경박한 놀이도 잊지 못해서 그리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도를 익히면서 천천히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그렇게 왕의 자녀다운 성품과 생활을 갖추어 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2. 칭의의 시간
칭의는 사중적 칭의.. 즉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마지막 심판에서의 공적 칭의를 말합니다.
A.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이것은 사색적입니다)
관념적인 의미로 이 칭의를 설명해보면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의 뜻으로 신자들에게 이미 설명된 것이므로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나 이 설명은 죄인의 칭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 가운데서 작정된 것과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된다는 결과를 구별해야만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은 구원하실 사람을 미리 정하셨을 것 아닙니까 그들을 의롭다함을 미리 결정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시간적으로 아주 오래된 칭의로 보는 겁니다.
B.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칭의에 대한 말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칭의는 보편적이고 순수한 객관적인 처사이므로 개인적 칭의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을 때에 우리도 그 부활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라고 할 때 이는 칭의의 근거를 대속을 통해서 마련한 겁니다.
C.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진정한 칭의 교리)
칭의에 대해 말할 때,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관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전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칭의...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밖으로부터 오는 은혜 그것을 나에게 적용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모두 가리켜서 칭의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칭의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칭의의 도구요, 칭의가 전용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냐고 말할 때 우리는 크게 네 가지로 말해야 합니다. 첫째 공로적 원인으로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그다음엔 도구적 원인으로서 믿음, 그다음은 유효적 원인으로서 성령, 그렇게 해서 유효적 원인, 작용적 원인으로 얘기도 되는데 그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겁니다. 칭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한 의로 여겨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의나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파의 잘못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인간의 칭의에 근거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인간 자신의 의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면 믿음 자체가 의다..라고 최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3. 칭의 교리에 대한 반대
몇 가지 반대설이 대두됩니다.
A.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인간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B.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이 자신들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시고 죄인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선언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선언하시는 겁니다.
(예화) 군대에서 상사가 ‘자네 오늘 대한민국의 군인이야 알았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은 국가가 필요해서, 그리고 국가가 그걸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군인답게 똑바로 살라고 상기시키는 겁니다. 또한 ‘여러분 신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정신 똑바로 살아라...라는 이야기입니다. 선언하시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선언인겁니다.
(예화)여러분 연애해보았습니까? 남자들은 덜 할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고백을 받아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라는 고백...그 고백을 자기 만날 때까지 여자에게 수없이 많이 하고 다녔다...한다면 그럼 그 남자를 잘못 고른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고백에 책임감이 없습니다. 표준적으로 보면 여자가 일생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해본사람이 ‘일생에 당신이 스물 여덥 번째입니다.’라고 하면 그런 스물아홉번의 고백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입니다.’ 말로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은 부정형입니다. 정해지지 않은 것. 일단 고백을 하고 나면 여자의 마음은 확정됩니다.
그래서 호물로게오라고 하는 고백은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떨 때는 고백이 탄원보다는 훨씬 중요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하나님 자녀답게 살도록 도와주세요 네네네! 라고 탄원하기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힘을 우리에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고백을 일생을 어쩌다 하는 사람하고 만나야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 사람하고 만나서는 안됩니다.
C. 또 어떤 학자는 칭의 교리가 인간들로 하여금 도덕적 생활을 무관심하게 만들기 쉽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죄인들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왜 죄인들이 개인적 경건에 마음을 써야만 하는 겁니까? 그러나 칭의는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하므로 이것은 진정한 경건생활을 위한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그리스도와 실제로 생명력 있는 연합을 이룩한 자는 도덕적인 면에서 무관심할 리가 없습니다.
칭의의 교리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구원에 있어서 진정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절대의존적인 사상을 내포합니다. 바깥으로부터 내려오는 주어진 칭의입니다.
Ⅱ.성화와 성도의 견인
성화의 본질과 특성
성화란 죄인을 순결케 하시며 죄인의 전성질이 아니라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이고 은혜로우신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화는 인간의 내부생활에서 일어난다는 면에서 볼 때 칭의와 다릅니다. 성화는 법적행위가 아니라 재 창조적 행위이며, 재활기적, 대체로 장기적 과정이며, 현세 생활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는 겁니다. 성화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지만(초자연적인 사역으로서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신자는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정해주신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 성화에 있어 하나님과 상호 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하는데 즉, 성경공부, 기도, 예배에 참석, 성도들과 교제 등..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북돋게 하는 의지 방편들..과 같은 것을 부지런히 활용하고 거기에 참여하도록 순종을 요구받는 것이 인간의 처지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화란 중생에서 이미 주어진 것들로부터 단순히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새 생활에 힘을 북돋으며..증진시키며, 견고케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데 하나는 인간성의 오염과 타락의 점진적 제거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는 새 생활의 점진적인 발전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자연히 전생애에 영향을 줍니다. 내적 인간의 변화는 외적 생활에 있어서의 변화를 반드시 동반해야 합니다. 인간이 성화작용에서 상호 협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악과 유혹에 대한 반복적인 경고와 거룩한 삶을 위한 끊임없는 권고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화의 소극적인 측면은 부패성과 죄로부터 정결해지는 것, 성화의 적극적인 측면은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헌신을 말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교회에 와서 맨 처음에 허기지고 무지가 꽉 차 있다가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너무 기쁩니다. 그리고 섭취합니다. 그렇게 은혜 받고 섭취할 때에 그에 합당하도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은 살게 되면 금방 그 진리의 말씀과 깨달음이 꺾여 집니다. 성경말씀의 미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들어보십시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계속 들어야만 합니다. 말씀미각을 회복하라는 시리즈는 기도 하고 들으면 반드시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게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자연히 전생애에 영향을 줍니다. 내적인간의 변화는 외적 생활에 있어서의 변화를 반드시 동반해야 합니다. 인간이 성화작용에서 상호 협력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악과 유혹에 대한 반복적인 경고와 거룩한 삶을 위한 끊임없는 권고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2. 현세에 있어서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가 인간의 각 부분에 영향을 주지만 신자의 영적 성장은 현세에서 불완전한 채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한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만 합니다. 신자들의 생활은 육과 영 사이의 항구적인 투쟁의 생활인데 심지어 가장 잘 믿는 자라도 아직도 죄를 고백해야 하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보다 더 완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소위 완전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는데 그들은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자가 되고 나면 어떻든 죄를 안 지으려고 한다라는 점에서는 옛날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완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완전하다고 말을 하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에서 말한다, 그러나 완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인간이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이라는 말은 죄에서의 자유를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아와 욥, 아사는 완전한 자라고 불렸지만, 이 완전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탑임이라고 나오는 이것은 perfect라는 뜻보다는 순전함 온전함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입니다. 역사는 그들이 죄가 없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요한은 분명히 새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과 신자는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했지만,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해 준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한권 사서, 우리 공과 공부도 다한 것입니다. 꼼꼼히 읽어 보면,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일생을 사는 데에 있어서, 성화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해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더 좋은 방법을 택한다면, “죄와 은혜의 지배“가 22개 tape인데, 그것을 한 시리즈씩 읽으면서 책의 순서하고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하므로, 먼저 tape를 듣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책을 들어가서 꼼꼼히 읽고, 그리고, 2번째 읽을 때에 각주까지 읽으면서, 그렇게 정리를 하면서,”죄와 은혜의 지배“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이 2 권은 목차만 놓고 여러분들이 유창하게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까지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화에 관한 것을 완벽하게 정리를 해놓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성화의 문제를 가지고 도전을 합니다.
3. 성화와 선행
성화는 자연히 선행의 생활로 인도한다. 이러한 선행의 생활은 성화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선행은 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리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 나오는 행위이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행해지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행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중생된 자들만이 행할 수 있다.
예화) 이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인류역사상 인간이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인간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개인의 행복과 그 다음에 개인이 함께 접촉하고 사는 사회의 질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조화가 쉽지 않습니다. 왜 국가가 뭐 하는 것이, 사회가 뭐 하는 것이 내 이익하고 충돌 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윤리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윤리이고,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적용될 때에 정치입니다. 그래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내포와 외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인으로 줄어들면 윤리학이고, 이것이 확대되면 정치학입니다. 윤리의 문제가 이것을 해결해 준다. 그렇게 보는데, 근데, 이 윤리를 이야기 하자면 여기에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이 기준이 무엇이냐, 이것을 놓고, 인류의 정신이 깨기 시작하면서, 항상 2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런 기준이 이 인간 밖에 있다. 이것이 도 일수도 있고, 아니면, 신 일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의 자연 본성, “나투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툴리우스라고 하는 키케로의 사상이나, 아니면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이나, 아니면, 성리학이나 뭐 도가나 이런데 다 의장 사상이나 다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교인은 아니지만,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전도를 했는데, 그 사람이 열심히 읽어 보더니, 성리학하고 너무 기독교가 비슷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말은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도라고 하면, 근데, 이러한 것이 바깥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바깥에 있는 것을 인간이 깨달음으로써 “아!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하는 말하자면, 법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견해이고, 두 번째 견해는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 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이 인간 안에 있는 본성과 인간 밖에 있는 도는 일체를 이룬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대표적인 사상입니다. 이것은 동양 사상만이 아니라 사실은 스토아 철학 같은 데서도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키케로가 “선과 악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너무 빨리 보고 싶어가지고, 옛날에 쓴 책이지만, 잘 몰랐던 그 제목을 탁보고 너무 반해서 미국으로 주문을 하고 왔습니다. 한쪽은 라티어로 되어있고 다른 한쪽은 영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읽었는데, 너무 실망을 했습니다. 선과 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 그 인간의 거짓된 본성 속에 끊임없이 속고 사는 존재인데, 그것을 끊임없이 그 어리석음과 거짓에서 벗어나서, 참된 인간 본성을 찾아가는 그 과정이야 말로, 그것이 바로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인내천이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곧 신이다, 그것이 이제 놀라운 발전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런 사상들이 언제 들어오게 되었느냐 하면,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지배되는 중세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그다음에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 하게 되니까, 레나스키멘토라는 이태리어에서 왔는데, 레는 다시고 나스키멘토는 탄생입니다. 라스코라는 희랍어 단어에서 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태어나다, 다시 태어남, 무엇이 다시 태어 나냐 하면,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다시 태어나는 것, 인간에 대한 인식이 재탄생하는 것, 재탄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인간 안에 있는 이 본성의 위대한 가능성을 발견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르네상스를 거쳐서 계몽주의 오면서 활짝 꽃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본으로 하는 사상입니다. 인간을 자기중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성 안에 있다고 본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런 기준 보다는 인간의 본성 안에 이것들을 찾아간다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 하면, 도덕에 대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무엇이 참된 도덕인가라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도덕을 2번의 견해에서 보면, 이것이 개인의 행복이 사회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그것이 가장 도덕적인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도덕의 기초자체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간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영원히 버렸다, 저주아래 있다, 거듭나야 된다, 회심하지 않으면 넌 안 된다, 아무, 희망이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런 정신에서 보면, 완전히 망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있는 종교가운에서도 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생과 회심, 성화, 견인 이런 교리는 현대인의 인본주의 적인 사고방식에 보면, 가장 고루하고 미신적인 교리이고, 가장 역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비인간적인 교리라고 본다. 그러나 진정한 도덕이라고 하는 것, 도덕이라는 말자체가 무슨 뜻이냐 하면, 도는 객관적인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덕은 주관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이것이 여기에 합치되는 것 의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유교에서는 이 덕을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 하는 착한 성품”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을 덕이라고 본 것입니다. 덕자 들어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덕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도는 그 객관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성과 주관성이 함께 결합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입니다. 도에 대해서 얼마나 인간이 주관적으로 가까이 갖는가의 대한 평가입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이 2개가 합친 것입니다. 주관성과 객관성이 합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도 자체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덕도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에,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안보고, 이 도덕자체가 하나의 거룩함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도덕자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까 이야기 했듯이 2가지가 있었듯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어떤 창조적인 행위를 보태고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헌신 하면서 살다보니까, 이 사람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거룩함과 도덕의 관계입니다. 이 거룩함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자기 마음의 충심적 합치, 충심적 사랑을 그분께 드리는 것,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따라서 이 길을 가야된다고 생각하면서, 한사람이 걸어가고 걸어온 발자취가 도덕스러운 것이 됐다라고 하는 것과 인간의 본성 안에서 무엇이 선할까라고 하는 것을 사회의 배경에서 공리주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선을 만들어 놓고, 이 사람이 도덕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고 걸어가는 그 길 사이에는 처음에는 이렇게 차이가 거의 없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벌어지면서,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차적 선, 혹은 이차적 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완전히 합치 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한 경건, 여기에서 비롯되는 도덕과 이것들을 모두 빼버리고, 인간의 본성을 향해 찾아가려고 하는 도덕사이에는 비슷해 보이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완전한 일치를 있을 수는 없고, 언제가 이것들이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아주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을 도대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하고 싶으면,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시리즈가 있는데,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그 시리즈로 들어가서 다섯 개로 된 시리즈인데, 그 시리즈를 차근차근 들어보세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설교했던 시리즈 중에서 중요한 시리즈를 계속 들어야 하며, 그래서 기초를 다져야 하고,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또 계속 듣고, 그러면서 우선 14년간 들어야 할 그 시리즈에 충실하세요. 곧 이어서 21년짜리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설교를 들어도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어떤 때에는 들어보려고 애를 써도 별로 정리가 잘 안되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그런 사람들 있죠?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6층에 맨 끝에 가면 유리로 만든 연구 자료실이 있는데, 데이터베이스 실이라 DB실이라고 되어있는데, 거기에 가서 녹취 헌신자 신청을 하세요. 녹취할 사람이 없어서 신청하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녹취 다 끝났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원고지 40만매 불량입니다. 여태까지 한 것이, 근데 다 따라 잡았습니다. 그래서 설교 끝나면, 한주 후면, 녹취가 탁탁 나옵니다. 활동하는 사람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녹취를 하면서 글로 쓰면서 설교를 들으면, 듣는 것의 3배입니다 집중도가 신학적으로 정리가 쫙 되고 교리 반까지 다하고 나면, 정리가 쫙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인들이 100명도 안모였을 때부터 녹취 헌신자 모집해서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금방 하려고 하면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그것을 한자 한자, 지금은 mP3도 있고 그렇지만, 옛날에는 카세트 켜놓고 발가락으로 누르고, 그 다음에 스톱 누르고 이렇게 하면서 다 했는데, 그 녹취하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변화가 되었고, 우리교회 지금 교회 다닌 지 15년 이상 넘은 사람 중에서 녹취헌신 해가지고 오래도록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간증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녹취 헌신 가서 해달라고 꼭 해달라고 하세요, 사람이 다 찼는데요. 그러면, 목사님이 가면 해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 이름 팔고 하세요. 해달라고 해서 가지고 가서, 한편 만 한번 해보세요. 한 시리즈만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아마, 굉장히 새로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공부하고, 설교를 들으면, 설교에 30% 정도만 소화하고 나머지 70% 정도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흘려보내요 그러니까 예배들을 때에 은혜를 받는 것 말고, 텍스트를 펴놓고 공부를 하면서 이게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은혜 받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하다고 내가 방황하던 사람을 그리고, 많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정신 차려가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비중 생된 자라도 일반 은총을 따라 율법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으며,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적뿌리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이 율법에 대한 진정한 내적 순종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화)이 문제를 그래도 시원하지 않다, 좀 더 확실하게 해결하고 싶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철학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이 부흥과 개혁 사에서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을 가지고 공부하십시요. 쉽지는 않지만, 신학대학원생도 좀 힘들어 하는데,그래도 한번 공부를 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요? 내가 제일 독서할 때 허무 할 때가 다 읽었는데, 모두 이해 될 때에 화가 납니다. 그러니까 나의 지성은 대단하지 않은데, 이 저자가 얼마나 후진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었을 때에 90% ~95% 정도가 이해되고, 5% 정도가 잘 이해가 안돼서 누구한테 막 물어보고 싶은 그 책이 진짜 좋은 책입니다. 그런데 읽었는데 5% 10% 정도는 이해가 되고, 나머지는 다 모르겠다, 그것은 나쁜 책입니다. 아직 그것을 읽을 수준이 안 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책은 읽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이제 엉뚱한 이야기 막 하고 다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좋아요? 모르는 것이 탁 있다는 것, 쾌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것을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고, 저자한테 전자 우편 보내고 싶고, 그럴 때에 그 책이 진짜 좋은 책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쉬운 책 보지 말고 어러운 책을 봐야 합니다. 참된 미덕의 본질을 한번 보십시오, 정 못 읽으면 책꽂이 꽂아 놓으면. 남들이 와서 “어휴, 저런 책도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 만해도 책값은 될 것입니다. 영어를 좀 잘 하시는 분들은 에드워드를 직접 읽으시면 더 낳을 수도 있습니다. 영어하실 수 있는 분들은 에드워드 전집 한질을 적금을 들어서라도 사세요. 한질 사는데 260만 원 정도 할 것이며, 싼 것입니다. 진리가 거기 담겨있습니다. 나는 책가지고 비싸다는 사람은 제일 싫어요. 진리가 그 속에 담겨있는데, 그리고, 부지런히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아무 책이나 읽지 말고 우선 오늘 만해도 지금 여러분들이 한 3개월 읽고 들어야 될 정도의 양을 소개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꾸준히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고를 때 아 이 책을 읽고, 다른 사람한테 한번 내가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야지. 이런 마음으로 책을 고르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때,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잘 살기위해서 읽는 것이지 사람들한테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이제 부지런히 읽으세요. 못 읽더라도 내가 계속 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그래야지 이제 책이 계속 찍힐 수 있으니까 정 못 읽겠으면 사서 다 모아가지고, 고물상주고 다시 사고 그러더라도 책을 계속 찍을 수 있게, 문서선교회에 이바지하세요. 우리교회는 여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니까, 부지런히 가서 읽으세요. 진짜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너무 잘 이용합니다. 매일 감사하데요. 자기는 이런 교회생활이 꿈같다고 합니다. 책 살 필요도 없이, 이 책이 또 이상한 책이 아닌가. 고민할 필요도 없지,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절대 한 번도 안가요. 그래서 얼마 전에 당회 할 때에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서부터는 교회에서 집사 시킬 때, 장로 뽑을 때, 권사 뽑을 때, 도서관을 다녔는지 조사하고, 경력 조사하라고, 몇 번이나 이용했는지 가서 도서관에서 책 다 보고, 그리고, 또 다른 책을 빌려보고 계속 이러면서, 게을러서 못합니다. 우리교회처럼 정리가 잘되어있는 교회가 없습니다. 책 정리 다 되었습니다. 교역자들이 무슨 설교 시리즈 스터디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분명하게 절차를 밟으면, 원고로도 내어줍니다. 그러면, 원고가지고, 완벽하게 되어있습니다. 설교하고 나면, 그 다음날 요약본이 올라오는 교회인데, 얼마나 잘되어 있는지요. 그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해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서 부터라도 빨리해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회심이 없이는 성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으면,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력자체가 없는 그런 것을 잘 설명한 책이 “아기야 엄마가 기도해 줄게” 아기가 기도해 주어야 할 엄마도 많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깊이 자녀들에 대해서 도전 받는 것이며, 그러면서 일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즐거워요.
4.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 두 번째 보면, “견인의 은혜”란 신자의 심중에 일어나는 신적 은혜가 계속 되고 완성되도록 역사하는 바, 성령의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 교리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쳐 준다. 이것이 견인의 교리는 아주 핵심적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사람은 버리시지 않는다. 이것이 견인입니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 노선 외에서는 찬성을 받지 못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그렇게 지켜주실 것이면, 왜 배교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나? 왜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시는가? 배교할지도 모른다고, 배교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이러한 경고와 권고는 구원을 잃어버리고 다시 타락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 같으며, 배교의 실례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입증해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 경고와 권고는 다만,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인간에게 견인 은혜의 사역에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언급된 배교자들은 참된 신자였다는 증거가 없다.
토마스 맨턴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에 “그들은 왜 배교하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200페이지에 대한 책인데, 이것은 이 마지막에 대한 확실한 질문을 줍니다. 아주 잘된 책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과연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또 예수를 믿고 성직자까지 되었는데, 하나님 앞에 배교한 사람들은 어떻게 봐야 되는가? 배교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이 분명하지 않은데,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정말로 중생한 사람은 배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배교는 한번 약해져서 뭐 내가 안 믿겠습니다. 혹은 내가 교회에 이제 안다니겠습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기독교에서 돌이켜서 이교에 빠지거나 무신론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되느냐, 진리의 빛에 강력한 비춤을 받은 사람들, 그러나 그 비추어지었지만, 그것은 지성에 비추는 빛에 불과하고 이것이 마음 깊이 내려가서 열매를 맺은 신앙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씨 뿌리는 비유에서, 구원 얻은 사람은 오직 옥토에 떨어진 그 사람 하나에요. 나머지는 구원 얻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일시적인 신앙일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진정으로 영원한 배교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기초들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견인을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굉장히 웃기는 이야기가가 나옵니다. 이야기 하자면, 견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끝까지 성도들을 한번 구원한 성도들을 붙드신다. 견고하게 하신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 견인은 사실은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견인(堅忍)은 견고하다 견자에다 인내하다의 인자인데, 영어로는 perseverance 라고 하는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굳게 붙들며 살려는 성도들을 굳게 붙드신다! 이렇게 이 공식을 하나 외우시면 됩니다. 견인의 교리는 이것은 말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적 역사입니다. 성화와 마찬가지로 회심과 마찬가지로, 중생은 일방이에요? 협력이에요?, 칭의는 일방이에요? 협력적이에요? 성화는 일방이에요? 쌍방이에요? 견인도 일방이 아니라 쌍방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세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다음에 설교하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예수께 접붙여 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으로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것이 떨어졌다 붙었다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주님이 오실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런데, 주님이 딱 오실 때에 마침 여기에 딱 붙어있는 순간에 주님이 오시면,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잠깐 떨어져 있는데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get out입니다. 좀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거룩하고 완전하신 성품에 맞게끔 구원을 해석 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23과
비교적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의 성질이 교회의 본질인데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23과서부터 교회의 성질이 나오고, 23과가 교회가 무엇인가? 그다음에 24과서부터는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 정치와 권세의 문제가 나오고, 그다음에 말씀과 성례이야기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성찬에 이야기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론이 마감이 되는 것입니다.
1. 교회에 관한 일반적 고찰
“부르다, 불러내다” 히브리어에서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고, 구약에서는 “칼, 에다”라는 단어들이 사용 되는데, 어쨌든 이 두 명칭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무리들“으로 이런 의미의 이야기입니다.
(1) 신약용어의 다양한 의미
대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예배를 목적하고 모였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지교회를 의미한다. 지교회라고 하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한정된 지역에 소수들이 모여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수가 모일수도 소수가 모일수도 있고 지역에 기반을 해서 모이는 것을 이야기하고, 이 용어는 가정적인 교회, 곧 집에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것이 일번입니다. 두 번째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불문하고, 현재나 과거를 불문하고 믿는 자의 모든 무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인 교회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2) 교회의 본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신교가 아니라 개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성질에 관한 견해에 차이가 있다. 구교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주로 사제들로 구성되고 있는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그 본질을 찾는다. 신교는 이러한 외적인 관념을 깨고 성도들의 무형적이고 영적인 교통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교회는 그 본질적인 성질에서 볼 때 모든 시대의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포함하지 않는다. 교회는 불신자로서는 참가 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적인 지체이다.
(3) 교회의 구별
a. 투쟁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지상에 현존하는 교회는 계속 싸우는 교회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고, 불신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마귀들과 싸우는 세상이니까, 투쟁적 교회, 전투적 교회라고 말하고, 천상의 교회는 세상의 창검 대신 승리한 나라이므로 이미 싸움이 끝난 상태의 교회 이므로, 천국에서는 싸우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천상적 교회는 승리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지상교회 = 전투적 교회, 천상적 교회 = 승리적 교회, 이렇게 알고 있으면 됩니다.
b.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데, 이 교회가 영적 성질에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는 무형적이므로 무형적이다. 누구는 이 교회에 속하고 안속하지는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왜 여기에는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들만 회원이 되니까 그런데 그것을 대충 누가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판단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교인들의 신앙고백과 행위 면에서, 말씀, 성례의 사역 면에서 외형적 면에서 유형적인 것이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장로교 신앙을 지지하고 고백한다. 우리는 이러한 성례 교리를 지지 한다. 이런 면에서 유형적이 되는 것입니다. 모였을 때에, 건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은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가 아닙니다. 모인 사람의 이 무리가 유형적이냐 무형적이냐를 놓고 볼 때 영적인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보이는 교회 이렇게도 나누기도 합니다. 가견교회 불가견교회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c.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적 교회에만 적용된다. 보이는 교회를 가지고 다시 유기체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로 나누는데,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 면에서와 세상에 대한 공동적인 반항에서 유형적이며, 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무와 형체 면에서도 유형적적이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세상에 대해 함께 반항하면서 산다는 점에서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일 수 있도록 들어난다는 점에서 유기체적인 동시에 유형적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로서의 독특한 직무와 형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독제를 택하는 교회는 감독제가 있을 것이고, 장로교회는 장로가 있을 것이고, 회중교회는 그런 것 없고, 직접 민주주의를 행사 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직무와 형체 면에서 유형적입니다.
여러분들 꼭 읽어야 될 책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세 개의 시리즈가 있는데, 이 시리즈를 여러분들이 숙독하세요. 사실 교리반이 너무 짧습니다, 한 학기 하는 것, 최소한 1년을 해야 합니다. 1년을 하고, 절반을 하면서, 그러면, 그동안에 뭐 일주일 한권정도씩 책을 읽히면서, 계속 이렇게 나가면서, 1년 정도 하며는 굉장히 실력이 많이 늘고 좋아질 텐데, 그러면 이제 교리반 지망생들이 너무 작아지니깐, 조금만 어렵게 하면, 막 사람들이 “목사님이 고 3때도 제가 이렇게 공부 안했는데요?”, 당연하지, 고 3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지금 훨씬 더 좋은 학교에 갔겠지요? 당연히 공부 안했지요. 그런데 “어휴 너무 힘들어.” 이러는데 처음에는 제가 이렇게 마음이 성화가 덜 되었을 때에는 그런 소리 들으면, 더욱 빡세게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중간고사 볼 때에 나이 드신 분들이 청심환 들고 와서 먹고 시험보고 그러셨습니다. 지금은 이제 제가 성화가 되어서, 여러분들은 진짜 좋은 시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뭐 2주 3주에 한 번씩 책 한권씩 읽으라고 했고, report내고, 그리고, 확 2 번만 떨어지면, 확 잘라가지고 못 들어오게 하고, 이랬는데, 지금은 얼마나 좋은 때입니다. 매주 시험 보는 것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쁨 표정을 지으면서 “아멘” 해야 합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신신당부하는데, 꼭하세요.
예화) 여러분 인생의 날이 많은 것 같아도, 그게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탁 사가지고 와서, 혹시 BMW라고 들어보셨냐고, 그래서 들어봤다고 했더니, 이것이 그 차라고 BMW 760 시리즈, 우리나라에 몇 대 되지 않는 2억 8천만 원짜리 차를 탁 몰 고와서 이차가 얼마나 좋은지 아시냐고, 총으로 쏴도 구멍이 안 뚫어진다고, 뭐 총 맞을 일을 하고 다녔나 총으로 싸도 안 뚫어진다고, 진짜 총으로 쏴도 안 뚫어지고, 독가스가 들어오면 스위치를 탁 누리면, 그 안에서 독가스를 다 제거하고 신선한 공기를 보내줍니다. 그 정도입니다. 760 시리즈 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것이 760입니다. 의전차로 가끔 타고 다니는데, 진짜 튼튼하게 만든 차이고, 정말 좋은 차입니다. 바퀴가 찢어져도 80K로 달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차입니다. “목사님 이차가 얼마나 빠른 줄 아십니까?”, “그래 얼마나 나오는데?,” 300K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대단하다, 근데 달려봐라” 그러니깐, “지금은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달리지도 못하는 차를 왜 타고 다니느냐”, 라이트가 안 들어오는데, 차가 굉장히 좋습니다. 라이트가 안 들어오는 차를 뭐하냐고, 막 놀리니깐, 그럼 “제가 달려보겠습니다. 같이 타실래요?”, 그것을 내가 왜 타겠습니까?, 300K로 달릴 수 있는데 라이트가 안 들어온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문학적으로 이해하자면, 난 예쁘게 태어났습니다, 자동차 껍데기 예쁜 것입니다. 우리 집에 돈이 많아! 시트가 푹신푹신한 것입니다. 나 공부 많이 했습니다. 최첨단 장치가 달린 것 입니다 나는 앞날에 대한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계를 잘한 것입니다. 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300K로 달릴 수 있습니다. 잘나셨습니다. 불이 없어서, 못 달리는 것입니다. 그 라이트와 같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실제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요즘은 완벽하게 사라진 한국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참되거라 바르거나 그다음에 슬기롭자”, 슬기로운 어린이 슬기라는 말이 완전히 없어 졌습니다.
이 슬기가 바로 지혜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말을 계속 퍼뜨려야 합니다. 오늘도 자녀들에게 슬기로운 자가 잘생긴 자 보다 낫단다, 그러면서, 못난 딸을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딸이 예쁜 딸보다 더 낫단다, 이렇게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슬기가 우리로 하여금 참되고, 그 다음에 바르게 만들어 줍니다. 참 되거라 바르거라 그렇게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슬기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슬기의 엑기스입니다. 그것을 라이트를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데 이 교리를 잘 터득하면, 이렇게 자기 인생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탁 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세 시리즈인데, 첫째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두 번째,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 세 번째 “성도의 공동생활”, 이 세 시리즈를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책과 cd와 mp3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예 책에 아주 달렸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는 책이 있고, MP3도 있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있습니다. “성도의 공동생활”은 책이 없습니다. 이번에 만들고 있습니다. 내년도에 공과 계획이 있습니다. 내년도의 공과가 이것 끝나고 나면, “성화와 기도”를 하고, “성도와 기도”를 4주를 하고, 그 다음에 끝나고 들어갈 책이 성도의 공동생활입니다. 출판실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MP3도 있습니다. 이 순서대로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2006년도 설교 했는데, 이 시리즈 설교를 하면서, 교인이 200명이 줄었습니다. 1월 달에 자기네 교회 섬기다가 힘드니까, 12월 달 쯤 다 정리하고, 새 교회 좀 가 보려고 열린교회에 사람들이 우르르 온 것 입니다. 1월 달에 확 150명 정도 확 늘었고, 항상 그렇습니다. 그런데, 왔다가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자기들 교회로 다 돌아갔습니다. 다 돌아갔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진짜 나쁜 짓이구나.”, 다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교구 교역자들이 막 울었습니다. “전도사님 내가 다음 주에 등록할게요, 목사님 제가 다 다음 주에 등록 할게요 제가 1월 달에 교회 옮길게요. 교회 옮기면 심방 좀 오세요.” 그랬는데, 꽝 하고 터졌어요. 그리고 이제 다 가버렸습니다.,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그리고도, 인제 한 2년 있다가 다시 온 사람들은 다시 받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 보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충격을 준 시리즈 이었습니다.
이 시리즈 원고를 3일 동안에 천매를 써놓고, 그 원고는 안보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빨간책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나온 책입니다. 이것을 쓰기 전에 제가 박사학위 논문 8편을 한 달 동안 읽고 이 설교를 준비한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여러분들이 20권 정도 읽어도 정리 될 수 없는 내용들이 여기에 정리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회론을 지금 쓰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교회론, 이런 식의 교회론을 지금 쓰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옵니다. 보편교회의 신학의 기초해서 이제 교회에 관한 교리를 이야기 하고,그 속에서 우리들이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어떤 식으로 실제의 삶을 지혜롭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특히 이 “성도의 공동생활”은 성도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러니깐, 이 세 개를 기본적으로 읽어야지만, 기본적으로 들었을 때에 그때에 아 교회가 무엇이구나, 그리고, 내가 이 교회에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열린교회 에서는 이렇게 자기네 교회 대해서만 이야기 하지 않고, 자꾸 보편교회, 우주적인 교회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보이는 교회보다는 열린교회 라고 막 이렇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도자이니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가 다 모르지만, 적어도 그러나 내 의식 속에서는 보편교회 속한 하나의 작은 지체일 뿐이다, 이런 사상들이 어디에서 나온 거라고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은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교회에서 거의 말하자면, 남에게 망아지 같이 교회 생활 하는 사람들한테는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는 꼭 들어야 됩니다. 정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혼나야 합니다. 정신 좀 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교회의 하나님은 사랑은 한 230 page 정도,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은 통치는 170 page정도 성도의 공동생활은 200 page 정도 밖에 안 되니까 전부다 합해야 600 page 정도 밖에 안 되는 책이고, mp3도 3개니깐, 내가 보기에는 바짝 덤벼들어서, 두 달만 하면 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가르쳐 준 것만 6개월 치 가르쳐 준겁니다. 그러니깐, 부지런히 시간이 없으면 덜 자요, 돈이 없으면, 덜 먹고,이러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렇게 도를 찾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뭔가 자기도 손해 보는 것이 좀 있어야 합니다. 덜 자고, 덜 먹고, 그리고 매달려서 공부하고, 그렇게 하면서, 깨달아서, 무지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사랑으로 섬기면서, 하나씩 하나씩 그 잘난 척 하지 말고, 가르쳐 주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잘난 척 하기가 쉽거든요, 자기가 뭔가 잘 알았으면, 사람들에게 위에서 동전 던져주는 것처럼, 이런 거 알아, 이런 거 알아, 내려가서 무릎을 끊고, 자기보다도 무지한 사람들을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그 진리를 가르쳐 줄때에 바로 진정한 경의 정신이 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 속에서 깊이 말하자면, 그 이황의 표현에 의하면 융회된 “융합이 되고 함께 어우러진” 융회라고 하는데, 이 융회된 그러한 그 진리가 자신을 통해서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을 하면서 인간이 사는 것입니다. 자기도 존귀한 사람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인생이 어두움 속에 있을 때에, 아무 희망도 없을 때에, 돈으로 명예로도 뭐든 거라도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에, 그때에 전해진 진리 그때 가르쳐준 인간으로 사는 삶의 길, 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겠어요, 여러분들은 인생이 바뀌게 되지 않나요? 그러면, 지금도 그런 필요성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진리를 깊이 터득해서 어떤 교제의 순간에서라도 그들의 영혼의 유익이 되게끔, 그들을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불러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그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 교회의 정의
그 다음에 교회의 정의 그랬죠, 꼭 시험에 나옵니다, “무형적 교회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아 택함을 받은 자의 영적 무리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성도들의 영적회합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형적 교회란 참 신앙을 어린아이처럼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라 정의 할 수 있다, 우리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회원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량 책에 보면, 마지막 5과가 토투스 크리스투스라는 제목이 나와요. 토투스 크리스투스 라틴어로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보이는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무슨 뜻이냐 하면, 엄밀하게 말하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 회원이 아닙니다. 열심히 망원경으로 쫘악 보면서, 아, 재는 구원 받았으니깐, 내 형제야, 재는 형제 모습을 하고 성경 찬송 들고 와서 방끗 방끗 웃지만, 너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너는 마귀의 자식이야, 이렇게, 나는 너에게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어, 진정한 의미에서는 얘네들만 교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토투스 크리스투스 영어로 말하면, Wholly christ의 교리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가를 여기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2006년도에 이 설교를 듣는 것은 커다란 충격 이었습니다. 저쪽에는 잘 모르고 이곳에 와서, 10년 6개월 지났을 때에 가장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시리즈 몇 개를 곱으라고 한다면, 첫 번째, 죄와 은혜의 지배, 2003년도, 그것이 일번이구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던 시리즈가, 배교적 예배애서 돌이키라, 세 번째 충격을 받았던 시리즈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들도 모두 다 충격을 주었지만, 그러나 더 굉장히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 한 시리즈가 별로 없으니깐, 꼭 공부를 해야 합니다. 꼭 들어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차에 껴 넣고 ,차를 타고 다니면 서, mp3로 들어보세요. 맨 유행가나 그런 거 듣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영혼에 도움도 안 되는데, 이런 시리즈를 계속 들으면서, 은혜도 받고 이러면서 새로운 삶을 사면 얼마나 좋은지요?
- 교회의 속성과 표지, 속성이라는 말은 여러분들이 지난번에 이해하셨지요? 속성에는 세가기가 있다.
a. 교회의 통일성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따르면, 이 속성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체로서의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b. 교회의 거룩성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의 교리, 교훈, 예배, 권징 등에서 찾으려는데 반하여, 프로테스탄트는, 개신교는 완전한 성결로 이끄는 새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원리 면에서 거룩한 그러한 교회의 회원들에게 준다.
c. 교회의 보편성
“로마 카톨릭은 특별히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구교가 전 지구상에 퍼져 있으며, 종파들의 총수보다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람 인구가 기독교 인구보다 훨씬 많습니다. 늘어나는 속도도 지금 굉장히 빠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던 것이, 기독교 인구는 지금 굉장히 많이 줄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영향권에 있었던 사람들이 불교나 아니면, 이슬람이나 이런 쪽으로 개종하는 예도 많고 무신론으로 가는 경우도 훨씬 더 많기 때문 이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러한 물리적인 숫자를 가지고 보편성 이야기 한다는 것은 웃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교는 무형적 교회를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 보는데, 이유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든 이라고 하는 것은 종류, 부류, 계층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숫자적인 모두 라기보다는
-. 교회의 표지,
표식이라고 쓰는데, 이것을 표지라고 읽어요, 영어로 sign입니다. 혹은 외적 특성, 세 가지 인데, 참된 교회의 삼 표지 그러는데, 3 표지설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으로 해서 2 표지설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의 참된 전파, 하나만 해서 1 표지 설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개신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이야기를 합니다. 즉 개혁파에서입니다.
a. 말씀의 참된 전파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전파되고 있는가? 그 참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완벽에 가까운 진리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은, 그런 교회가 그런 기준을 가지면 너무 소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까지는 안봅니다. 그 설교를 그 교회에서 선포되거나 가르쳐지는 내용들을 접하면, 최소한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참된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그 설교를 듣고, 교회 가르침을 따르려고 그랬는데,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던지, 아니면, 아예, 구원에 개념 같은 것들을 전달을 안 해준다던지, 그럴 경우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가르치거나.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덜 가르치거나, 잘못된 것을 더 가르쳐셔, 그리고 그 가르침에 빗나감이 심각해서 도저히 그 교회에서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는 참된 기독교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이럴 경우에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를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첫 번째에 넣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b. 성례의 정당한 집행
“카톨릭과 같이 성례가 말씀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성례는 신적 제도에 따라서, 합법적 성직자들에 의해 성도들과 그의 자손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문) 미국에서 목회하는 친구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막된 교인들이 많이 왔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 부임해서 가니깐, 성찬을 아무나 막 와서 먹고 마시더래요. 그래서 가서, 이 성찬은 성경적으로 세례 받은 사람만 참여할 수 있고, 세례 받았더라도, 교회에서 치리 받고 있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고, 뭐 그러면서, 성찬 자격을 이야기를 다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설교를 듣고,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권사님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아직 세례를 안 받았는데, 계속해서 성찬을 먹었는데, 어느 날 젊은 목사가 오더니 성찬 먹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권사님이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뭐에요”,그러니까 “우리 남편이 목사님보다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못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그까짓 포도주 한잔하고, 빵 쪼가리가 몇 푼이나 된다고, 그게 아까워서, 우리 남편 여태까지 먹던 것을 그만 먹으라고 그러시느냐고요.” 황당한 일입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다닌 교회가 교회 이었나에 대해서 중요한 의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야기를 듣는데, 웃기는 것이 아니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을 권사라고 세워 준 사람은 또 누구에요?
우리 교회에서 세례 받으신 분 손 들어보세요. 몇 분 계시네요? 우리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회심했는가? 100% 구별하지 못하겠지만, 힘을 다해서 구분 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지식의 내용이 없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데, 파이퍼 목사님이 이런 예를 드셨습니다.
(예문) 이 가방이 있는데, 이 가방에 이것이 dollar입니다. 이십만 불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서서, “자 부탁 좀 합시다.”, 이러더래요. “무엇을요?”, “이 십만 불이 여기에 들었는데, 당신이 좀 잠깐만 맡아주세요.”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이십만 불도 미국사람도 큰돈입니다. “당신이 좀 맡아 주세요. 내가 지금 여기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깐, 당신이 맡아주세요.” 병원의 로비에서 이렇게 딱 있는데 맡아주세요 그러니깐, 근데, 이 사람이 물어 본 것입니다. “저를 아세요?” 그랬더니,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알지요. 당신 우리 바로 뒷집에 사는데, 동네에 쭉 이야기를 들으니깐 당신이 그렇게 정직하고, 친절하고, 그런 교수님이라는 평판을 제가 들었습니다. 자, 이 많은 돈을 당신한테 충분히 맡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그래서, “난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좀 맡아주십시오”. 깜짝 놀랐습니다. 이십만 불이나 되는 큰돈을 얼굴도 안보고, 주민등록증을 맡기라는 이야기도도 안하고, 그냥 맡아 달라고 문만 열고 가지고 갈 수 있는데, “아니 이렇게 큰돈을 왜 나에게 맡기십니까, 어쨌든 맡아 주세요. 당신 나 아세요. 알긴 내가 당신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럴 때에 이사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조롱당하는 느낌 것과 같은 받지 않나요? 무슨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는 주님 사랑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래야지,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것이 누구인지 무엇이 상관이 있어요? 아니, 신이시던지 귀신이던지 그게 나하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냥 사랑만 하면 되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죠? 지식과 사랑은 항상 같이 갈 때에 거기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성경적으로 올바른 교리들을 가르쳐주었는데, 그것을 안 믿거나, 잘 못 믿거나 할 때에 권징을 통해서, 심하면, 교회에서 퇴출합니다. 너는 이 교회에 속하는 회원이 아니다, 그리고, 짤 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접붙여 진 것하고는 어떻게 되느냐 그냥 뚝 잘라져서 나간다 이렇게 보는 것은 카톨릭에서 보는 견해입니다.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의 몸인데 짤라낸다, 나중에 구원 받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교회하고 교통 할 수 없고(excommunion), 출교된 사람과 만나서 계속 교재를 하면 그 사람도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형벌이 유효하지 않게 되지 않나요? 잘라내는 것입니다. “성례의 거룩성을 보호하는데 꼭 필요한 것 입니댜.“ 성찬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보편성이 없는 전문적인 질문은 지금 여기서 내가 답하면 너무 비경제적이니깐, 일단 보편성이 있는 질문에 몇 개 들어온 것에 대해서 답하겠습니다.
(질문) 성품을 말할 때에 예를 들어 우리가 닮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 또는 예수님의 성품 중 어느 것이 옳은 표현인가요? 둘 다 맞는 것인지 아니면,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답변)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품이라 그러는데 속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품이란 말은 우리 인간 편에서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은, 예수님의 속성 따로 있고, 하나님의 속성 따로 있고, 성령의 속성이 따로 있으면, 이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 삼체가 됩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삼위라고 하는 것은 인격을 이야기 하지만, 위격 혹은 인격을 이야기하지만, 일체라고 하는 것은 몸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적 본질이 하나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신적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속성도 당연히 하나의 신적 본질에 속한 속성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속성, 성부의 속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거죠 다만,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삼각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억나시지요? 삼각형을 설명했습니다. 그렇듯이 인간의 창조와 관련 할 때에는 성부가 우선 적으로 개입을 하셔서, 그리고 구속을 할 때에는 성자가 ,구속을 적용하는 구원 행위에서는 성령이 이렇게 우선적으로 역사하시지만, 다른 두 위도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배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성령이 어떠한 그 구원역사에서 어떤 행위를 행하실 때에, 성부성자성령 중 어느 위가 우선 적으로 개입하시느냐, 어떤 위가 부차적으로 개입하시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신적 본질이 개입하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다. 다만, 우리들이 예수님의 성품 이라고는 종종 이야기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은 삼위의 하나님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보여주신 모든 성품은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 전체에 속한 성품이지, 그리스도 성자 자신에게만 속한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가 내려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랑을 보여주시지만, 그 사랑은 성자 만의 사랑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가 자비를 베풀어 주셨지만, 그 자비는 예수님 한분의 자비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비다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문제를 잘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몇 년도 인지는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미” 그 시리즈를 여러분들이 본다면, 지금 질문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깨끗한 해답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질문이 나오면, 그것을 단답형으로 듣지 말고, 그 뿌리를 캐어서, 정확하게 그 근거를 찾아내야 합니다. 오늘 진짜 많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질문 2)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항상 하나님에게 적용 되었나요?
(답변)이것은 무엇 이냐하면, 이렇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나요? 이 아버지 되는 자격을 가리켜서 부격(fatherhood)이라고 하는데,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intell trinitarian fatherhood, 그다음에 creative fatherhood, 그다음에 adopted fatherhood입니다.
Intell Trinitarian fatherhood가 무슨 뜻이냐 하면? 삼위일체내의 부격,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는데, 그때에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냐 아들이냐 성령이냐를 이야기를 할 때에 이 아버지, 이것이 첫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그 다음에. creative fatherhood의 뜻은 창조주의 부격,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 이시다 라고 할 때에 그런 의미에서의 창조주적 부격, adopted fatherhood 이것은 우리가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라고, 이야기 할 때에 이것은 양자적 부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아버지가 무엇을 의미하냐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성경전체를 통틀어서 본다면, 아버지라고 하는 이 표현이 2가지 인데, 위격적 아버지, 그 다음에 본질적 아버지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것으로 볼 때에 위격에 있어서 성자가 아니고, 성령이 아닌 하나님, 부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본질적 아버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 삼위일체가 삼위이지만,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적 본질 자체를 아버지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여기에는 모두 삼위가 포함 됩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라고 기도 하셨을 때에는 이 위격적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했을 때에는 본질적 아버지 인데, 그 아버지 속에 당신 자신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성령을 제외한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한 하나님 이시니까요. 그래서 그 아버지를 본질적 아버지, 위격적 아버지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