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강의
녹취자: 조은상
15과를 봐야 하죠. 순조롭게 나가고 있습니다. 15, 16과 쉽습니다. 17과가 약간 어려운데, 일반적인 이야기들이라 여러분들은 특수반 학생들이니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예수 믿는게 쉽지 않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부하다가 보니까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소원은 교리반에서 배우는 이 공부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수준입니다. 열린교회 수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정도가 이 교리반을 소화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소화하고 그리고 이제 뭐 구역장들 정도 되면 좀 트뤼팅이나 아니면 무슨 빌헬름 아브라켈 이나 이런 사람들의 조직신학 한세트 정도를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고 수업할까요? 싫으면 관 두고, 어려분 마술램프와 지니 알죠. 어떤 사람은 참 착하고 마음도 좋았는데 펑 하더니 핫바지 입은 지니가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뭘 해드릴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이 사람이 갑자기 뚱딴지 같이 남아메리카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뭐든지 다 들어주니?”“아 그럼요”“아 그럼 여기 남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대륙까지 고속도로를 놔 다오. 그러면 내가 여기서 비행기도 안타고 차 몰고 아프리카 까지 가겠다”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짜증을 팍 내면서 콘크리트가 얼마나 부어야 하고, 바다가 얼마나 깊은데 그런거 해달라 그러냐고 다른걸 이야기 해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러면 한가지 소원이 있는데, 우리 아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있게 해줘”그랬더니 이 지니가 짜증을 팍 내면서 “몇차선으로 놓으면 되겠어?”라고 했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이 있네요. 파악하셨습니까? 교리반 끝날때쯤 막 웃으실 것 같네요.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지니도 들어줄 수 없어서 차라리 페루에서 아프리카까지 고속도로를 놓는게 훨씬 쉽다고 하는데 이 정도되야 쉬운거 아니에요 지니도 못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마을을 제가 가르쳐 드리잖습니까.
121쪽 그리스도의 신분입니다. 지난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의 존함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존함에 대해서 공부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15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16과 17과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분’과 ‘상태’라는 말을 상호교차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율법과 율법 앞에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특수한 의미로 ‘신분’이란 말을 사용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을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이었으나 높아지셨을 때는 율법을 초월한 주님이시다. 자연히 이 두 가지 신분은 생명의 상태와 조화를 이루면서 동반하게 되며, 이들은 몇 가지 단계로 언급된다. [강독]
낮아시진 신분은 그리스도의 비하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높아지신 신분은 승귀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비하의 신분은 5개로 나뉘는데, 시간적인 순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성육신, 두 번째 그리스도의 고난, 세 번째 그리스도의 죽으심, 네 번째 그리스도의 장사지냄, 다섯 번째 지옥에 내려가심입니다. [강독]
첫 번째 성육신, 외워야 합니다. 두 번째 고난, 그다음 죽으심, 장사지냄, 지옥에 내려가심. 이해되었죠? 외워볼까요? 보지말고 제일먼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난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죽기까지 복종해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다음에 죽으신 다음에는 부활하기 전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장사지내셨습니다. 그 다음에 지옥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제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입니다.
그다음에 승귀의 신분입니다. 여기서부터 꼭지점으로 해서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 됩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죠?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다음에 무엇 하십니까?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거기에서 계시다가 그다음에 세상 끝날에 어떻게 하십니까? 재림하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맨 먼저 비하의 신분,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지냄, 지옥에 내려가심 그 다음 올라가는 승귀,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앉으심, 재림하심입니다.
이렇게 그 영특하시기 때문에 시험문제로 굳이 쉽게 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특한 사람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낮아지신 신분은 우주의 통치자로서 위업을 버리고, 인성을 취하사,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굴복하셨다는데 있다. 첫째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육신이 되셨다. [강독]
예수님의 인격이 몇 개라고 했습니까? 하나입니다. 무슨 인격입니까? 신적인격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없으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본성은 몇 개입니까? 이성 일인격이 기독록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성은 무엇입니까? 신성과 인성. 예수님의 본성이 몇 개냐고 물어보면 둘이라고 해야 합니다. 인성과 신성 두가지를 가지고 계시나 인격은 신적인격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은 원래 신성이신데, 신성으로서 신의 인격을 가지신 분인신데, 인격의 인격 없이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인간의 몸을 가지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 일인격의 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 인류 중의 한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만일 그가 재세례파의 주장과 같이 하늘에서부터 인간성을 부여받았다면, 성육신은 참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경은 동정녀 탄생을 가르쳐 준다. 이 이상안 출생은 시초부터 죄의 오염에서 인성을 보호해 준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다. [강독]
인성은 인간의 몸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육체적인 관계에 의해서 태어났다면 그러면 그 인성은 반드시 죄에 오염된 인성이 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가 죄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원죄의 오엽으로부터 보호된 가운데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의 고난이 최후적 고통에만 국한 된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전생활이 고난의 생활이었다. 그의 생활은 주가 종되신 생활이었으며, 저주받은 세상에서 무죄한 생활이었다. 사탄은 공격했고, 백성은 배반했으며, 대적들은 괴롭혔다. 영혼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보다 격렬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혹 받으셨고, 불의한 세상에 억압 받으셨고, 지워진 죄짐에 의해 눌림을 받으셨으므로,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 [강독]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난 그러면, 세시간에 국한시킵니다. 세시간이 아니라 여섯시간 동안 십자가에 메달린 것, 그런데 이제 그렇게 좁은 의미에서 고난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자면 정말 빈민가에 가서 선교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빈민을 선교하기 위해서 평상시에는 여러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도의 가난한 빈민의 자리에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동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난이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무한대의 질적인 차이를 가지신 그분이 사람의 세상에 오셨으니까 그런 고통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육체적 죽음을 생각한다. 그는 불의한 사건의 결과나 암살자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판결에 의해 죽으셨고, 죄인으로 간주되셨다. 로마의 십자가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저주된 죽음을 죽으셨던 것이다. [강독]
(중간에 잘 안들립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성령님을 통해서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까? 성령님이 역사해야 구원 받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로 이야기 하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에 관련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것이 결과라면 결과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통상 한마디로 대답이 안 나올 때는 쭉 분류해서 어떻게 하면 전체적인 것을 포괄하는 교리적인 진술에 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첫째가 뭐냐하면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공로적 원인 그다음에 도구적 원인 그 다음에 세 번째 유효적 원인 그 다음에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27번 읽었는데도 잊어버렸습니다. 2년간 안했더니,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27번 읽었습니다. 저자가.
공로적 원인은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공로적 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입니다. 도구적 원인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유효적 원인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 믿을 리가 없는 사람인데 믿게끔 만들어 주신 것은 성령입니다. 또 은혜입니다. 자 이러게 이야기 하면 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느냐 믿음으로 받는다. 아무것나 믿으면 됩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햐지’ ‘은혜를 주셔야지’이런 적은 산발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얼마나 현명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구원은 결과이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원인이 있는데,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원인을 크게 세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첫 째 원인은 그리스도의 속죄적 원인이 공로의 원인이 되고, 그 공로를 토대로 믿음이 요구가 되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성령님이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유효적 원인이라고 한다라고 말하면 모든 것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제 명쾌하게 정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무엇이냐면 믿음은 그러면 아무것이나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esus die for us”이 네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for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첫째 우리를 대신해서, 그 다음에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세 번째는 무엇이냐면 우리를 대표해서, 이 의미를 for라는 하나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 한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이 분 안에서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내포적으로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표하여 그로 말이암아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for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것이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우리 모두를, 구원받을 모두를 대표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나는 믿습니다.’이럼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장사 지냄,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치 고난의 최후 단계이었던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지 아니했던가? 그러나 이 말은 아마도 그의 능동적 고난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의 장례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된 자로서 인식했던 바 낮아지심의 한 형태인 것이다. 인생이 흙으로 돌아감은 죄에 대한 형벌인 것이다. [강독]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흙으로 돌아가실 수가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신게 아니고 장사지낸 후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심, 음부에 내려가시고 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성도들을 해방하기 위해 그들이 갇혀 있는 선조 림보로 내려가셨다고 말하며,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기간에 흑암의 궈세에 대한 그의 승리를 선포하며 기념하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많은 개혁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상징적 표현이라고 본다. 1. 동산에 그리고 십자가에서 지옥을 고통을 당하셨고, 2, 사망의 상태에 있어서 가장 낮아지신 상태에 들어가셨으니 이것을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강독]
높아지심의 신분, 승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시고 죄인을 위해 의와 영생을 준비하시므로 계약적 의무인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시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훌륭한 존귀와 영광으로 면류관을 쓰시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네 단계로 구분되어야 한다. [강독]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인간성, 육체와 영혼이 그 본래의 아름다운과 강함을 회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이름으로써 되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부활한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다. 그런 이류로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라고 불리워 질 수 있는 것이다. [강독]
이게 무슨 뜻이냐면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후에 우리 성도들이 부활할 때에 어떤 몸이 될지를 예수님이 제일 먼저 첫 번째 열매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셨다는데 대한 하나님의 선포였다. 2. 부활은 칭의, 중생,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3.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강독]
예수님의 부활은 선포이고 상징이고 원인입니다.
승천, 승천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의 필연적 완성이었으나 독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승천은 지상에서 하늘로,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인성을 따른 중보자의 유형적 상승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강독]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이것은 하나의 정신과 영혼만 아니라 육체까지 옮아가는 상태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저한 영화를 내포한 것이다. 루터파는 승천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는다. 승천을 조건의 변화라고 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인성이 어떤 신적 속성의 완전한 기쁨에 들어가시어서 영구히 편재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 그의 희생을 성부께 나타내기 위해 성소에 들어가 보좌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다. 그는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와 더불어 하늘 처소에 거하게 되었고 그의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하늘에 있는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강독]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 하나님의 우편이란 표현은 문자적으로 취급될 수 없으나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말하는 상징적 지시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동안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며, 우주를 통치하시며, 그의 완전한 희생에 근거해서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신다. [강독]
육체적 재림. 그리스도께서는 산 자와 죽은자-이것은 영적으로 산자와 죽은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심판하러 오실 때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최절정에 달하게 된다. 분명히 그의 재림은 육체적이고 유형적이 될 것이다. 증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신 것과 같이 오시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 여러군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목적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신 목적으로 오실 것이다. 재림은 그의 구속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강독]
16과 그리스도의 사역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직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강독]
선지자직,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예언했다. 선지자라고 말씀하셨고, 메시지를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장래 일을 예고했고, 독특한 권위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 계시를 받아서 이 계시를 구술적으로나 가시적으로 백성에게 전달해 주었다. [강독]
거기 줄치셔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선지자를 뭐라고 합니까?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라는 말을 미리 말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자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의미에서 예언자입니다. 우리가 예언자라는 말을 쓸 때 預言者 이렇게 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사실은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豫言者 이것은 미리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기능이 선지자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일부의 기능입니다. 이것이 본업이 아닙니다. 예언자가 미리 미래를 투시하면서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만 하나님이 살짝 말씀해 주시는 것이고, 나머지는 말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의 활동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에 상황을 모세오경을 기준으로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말할 때 예수님이 지금 오시면 불법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 우리가 윤리의 표준이 되잖습니까? 그 당시에는 모세가 우리의 시대에 오면 악한 사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것이 관심이었습니다. 기준 자체가 아주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언서를 구약에 나타난 모세의 오경을 다른 자기의 시대에 선지자가 해석을 해준 설교가 예언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줄치십시오. 그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사역은 율법을 도덕, 영적 면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선지자로 일하셨다. [강독]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일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셨다는 것 보다는 그 말씀을 전달해주시는 그러한 일들을 제 2위의 성자께서 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발화된 말씀을 생각할 수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발화된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발화된 말씀은 아니고 신적인 인격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지성적인 말씀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발화된 말씀이냐, 아니면은 하나님의 지성으로써의 말씀이냐라고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해당합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할 때는 전자에 해당합니다.
제사상직. 구약은 구속주가 제사장이시라고 예언했다. 신약에서는 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이 있는데 히브리서다. 다른 책도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을 말해준다. 줄치십시오. 예언자는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하지만, 제사장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는 일을 한다. 둘다 선생이었으나, 예언자는 도덕적일 것을 가르친데 반해, 제사장은 예법(제사법)을 가르쳤다. 제사장들을 하나님꼐 나아가는 특권, 백성 대신에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다. 히브리서에서 제사장이 백성들 중에서 대표로 뽑혀 인정받고, 활동하며, 속죄를 위해 제물과 희생을 드린다는 것과 중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독]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사죄를 위한 희생을 드리는 것이다. 구약의 희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예시해 주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어린양, 유월절양이라고 불리워진다. 신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역을 말해주고 있다. [강독]
중재.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위한 큰 희생을 드릴 뿐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에서 함축적으로 우리의 보혜사라고 불리워졌다. 요한일서에 나타난 용어는 분명히 돕기 위해 부름 받은자, 타인의 소송을 변호하는 자를 의미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말해주고 있다. 중보사역은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끔 잘못 되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은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독]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우리에게 오고, 우리의 것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올려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나 헌신이나 사랑이나 모든 것도 하나님께 직접 올라가기에는 결함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중보자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되어서 그분께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니 혹시 우리가 충성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충성을 인정해 주셨다면 그것은 충성한 우리 덕분이 아니라 우리의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는 충성을 기쁘게 받아주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경배와 헌신의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그런 사상을 정확하게 소개해 드린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사랑받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부터 개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아들인 성자에게 부어주시고, 그 성자에게 부어주신 사랑은 그의 신부인 교회에게 주어지고,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영적인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요새 계속 설교되고 있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중보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중보직은 중보기도나 십자가에서 죽음 만이 아니라 영원히 창조조차도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지막에 이 세상이 완성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왕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으로 우우적 통치에 함께 참여하신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재인으로서 그리스도가 부여받으신 왕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줄치십시오.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향한 영적 왕권, 우주를 향한 왕권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강독]
영적왕권. 성경은 어려곳에서 이에 대해 말한바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통치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왜냐하면 그 왕적이 영적 영역이며, 마음과 생활속에 이뤄지며, 구원이라는 영적 목적을 가지며, 말씀과 성령이라는 영적 수단으로 실시되기 때문이다. [강독]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다시 읽는 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은 자기 백성을 향한 통치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이다. 왜냐하면 (1) 왕권이 영적 영역에 속한 것이며, (2)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뤄지며 (3) 구원이라는 영적 목적을 가지며 (4) 말씀과 성령이라는 영적 수단에 의해서 이것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의 모임과 교회의 통치하신과 보호하심과 완서에 이바지 한다. 이 왕권은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다.
이것은 하나의 왕적인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가르킵니다. 통치권이 미치는 것이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강독]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가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사는 모든 자, 즉 보이는 교회에 거하는 모든 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강독]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있다 말찌니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일 설교를 잘 들으십시오.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생활속에 있는 현재적이고 영적인 실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미래의 소망이다. 미래의 왕국은 본질상 하나님 지배가 마음 속에서 확립되며, 현재의 것과 동일하다. 이말은 미래의 왕국은 유형적이며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강독]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안에서 이뤄지지만 마지막에는 마음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계속에서 장소적으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던지워 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들로 이뤄져서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장소를 포함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그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준다. [강독]
이것이 무슨 뜻이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끝까지 복종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만주의 주가 되셨잖습니까? 그래서 구속 사역을 다 완성한 다음에 예수님이 하실 일이 끝났기 때문에 왕권을 하나님께로 돌려드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왕권은 끝난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 왕권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만 구원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구원받은 상태가 계속되어서 불멸한 인간의 영혼과 몸을 입는 것 처럼 그리스도의 왕권도 영원할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주적 왕권. 우주정 왕권은 그리스도의 원래의 왕권과는 미치는 영역이 동일하지만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 왕권은 교회를 위하여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맡겨진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로, 개인과 백성의 운명을 다스리며, 세상의 생활을 지배하시며, 이 왕권을 그의 구속적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시며, 그 왕권을 통하여 세상서 일어나느 위험으로 그의 교회를 보호하신다. [강독]
어떤 학자들은 속죄의 필연성을 부인하며 하나님은 어떤 만족을 얻음 없이도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간과할 수 없으시므로 이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신다고 가르친다. [강독]
여기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속죄에 대해서 나올 때 속죄에 가설적 필요론과 필연적 필요론이 나옵니다. 가설적 필요론은 무엇이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필연적 필요론은 하나님 조차도 당신이 정하신 율법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가설적으로 세워놓으신 필요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것을 따르셔야 했다는 것이 필연적 필요론입니다. 우리는 대게 의견이 나뉘지만 개혁파에서는 대게 두번째 필연적 필요론을 훨씬더 우리들이 신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무한하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반역의 행위 이것이 결국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이 필연적이 되게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만족시키는 길이었다고 우리는 봅니다. 괜히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속죄의 성질. 속죄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다. 두번째 그 속죄는 대리적이었다. 세번째 속죄는 능동, 피동적 순종이다. 그 다음에 속죄의 범위가 나옵니다. [강독]
첫째 속죄는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를 수 있었다. 속죄를 주로 죄인을 감화하여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키시므로, 죄인을 하님께 돌아가도록 공헌했다고 흔히 말한다. [강독]
이것이 말하자면 감화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보면서 사람들이 찔려서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덕적 감화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속죄의 본질적인 성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잘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범죄한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피해를 입을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속죄는 우리에게 감화를 주기 위한 속죄가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이 무엇인가 손해를 보신것에 대한 공정한 갚음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의 첫번째 개념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혜택을 얻게 되는 것은 두번째 입니다. 어떤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은 속죄의 1차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죄인에게 화해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대한 죄인의 화해는 2차적 목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강독]
이 만족은 어떤 만족이냐면 한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손해 보신 것에 대한 공의를 따르는 만족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속죄적 죽음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해 되셨습니까?
2번. 속죄는 대리적 속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개인적 속죄를 요구하셨지만, 죄인들은 요구에 응할 수 없습니다. [강독]
그것은 무엇입니까? 모두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죽어버리면 그 속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모두 파멸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되기 때문에 대리적인 속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지은 자을 죽음으로 형벌하시는 것은 원칙을 지켜서 죽음을 받으시되 예수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고 자기의 아들은 대신 살리시는 그것이 바로 속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아주 현묘한 조화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그리스도를 대리자로 세워 사람을 대신해야 한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께서는 대리자로 인간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 속죄를 대리적 속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범죄를 당한 편에서 속죄를 위한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1)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위에 놓였으며, (2) 그가 죄를 짊어지셨고 (3) 죄인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독]
속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피동적 순종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중적 순종으로 구별하는 것이 통례이다. (1)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것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신데 있다. (2) 피동적 순종은 형벌을 담당하시고 빚을 탕감하심으로 고난을 당하신데 있다. [강독]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결정적인 처형을 피동이라고 보고, 당신 자신이 기꺼운 마음으로 물론 십자가도 예수님이 마지못해서 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면서 온전한 순종으로 사신 것을 능동적 순종이라고 보고, 어짜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의 형벌을 치르지 않으시면 구원의 길을 예비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그리도께서 하는 수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내게서 빼앗기 때문에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게 내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서 내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어느 하나도 피동적 능동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순종의 삶을 사셨다는 능동적으로 보고,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면 죽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피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둘로 구별하진 않지만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1) 고난 당하심에 있어서도 능동적이셨고 (2) 율법을 복정하심에 있어서도 피동적이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죄인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공을 세워 놓으셨던 것이었다. [강독]
그 다음은 속죄의 범위. 모든 교파 중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 알미니우스 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말은 그들의 견해대로 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예외없이 구원하기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도된 취지가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실제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구원할 가능성 만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확립해 놓으신 것이고, 실제적인 구원은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강독]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됩니다. 쓸데없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이것은 중대한 모순이 됩니다. 이런 견해들이 교회 역사에 항상 나왔습니다. 초점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자기 결정적 능력이 하나님의 작성을 선행한다 능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하더라도 내가 안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구원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인간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선행을 또는 믿음 조차도 행위로 간주하여 믿은 공로라고 주장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까 이야기 한것을 가르켜 보편속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보편 속죄는 속죄만 보편적이었다는 것이 속죄를 의도한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보편 구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개혁파 교회는 제한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받은 자만을 구원할 목적으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으며, 그 목적은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가능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생명을 버려 주신 모든 자 하나 하나를 구원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생명을 버리셨다고 말한다. 즉 그의 양무리와 교회, 선택받은 자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가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모든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가 세상 모든 민족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종류와 모든 계급(특수한 계급이 아니라 어떤 계급의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독]
여기서 모든 민족이라는 것은 모든 민족, 숫자적인 모두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 계층, 인종 이런 면에서 모든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과를 더 나가겠습니다.
구원사역의 적용 교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사역에 관한 고찰 다음에는 자연히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 죄인들의 심령과 생활에 적용되는 구속 진리에 대한 논의가 뒤따르게 된다. [강독]
일반은총의 성질
이것은 일반계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특별은총은 특별계시와 관련됩니다. 일반은총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자녀든 자녀가 아니든, 구원받은 자든 구원받은 자 아니든 하나님의 일반적 자비하심에 의해 입는 모든 혜택을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이란 마음을 갱신시키진 않지만 죄를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의 의를 증진시켜 주므로 도덕적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일반적 작용이다. [강독]
어떤 일이 있었나면 사람이 죽었습니다. 누가 살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신을 유기했는데 그 시신이 산에서 발견되었는데 손만 딱 올라온 것입니다. 마치 나좀 살려달라고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죽은지가 오개월인가 육개월이 되었으니 땅속에 들어갔으면 다 썩거나 뭉그러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손만 손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문까지. 그래서 이 손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분을 확인해서 결국은 살인자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아 진짜 악인은 벌을 받는 구나, 하늘이 내려다 보고 계시는 구나'. 그런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확고한 도덕원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되고 믿게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일반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선하게 보여지는 분량대로 모든 인간에게 차별없이 나눠주시는 일반적 축복이다. [강독]
비를 내리는 것도 하나님이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골고루 내리시는 것과 같습니다.
알미니우스파와는 달리 우리는 일반은총이 죄인으로 하여금 영적 선을 행하게 하거나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는다. [강독]
그런 점에서 일반 은총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은 인간에 의해 거절될 수 있으며 항상 거절 되는데, 기껏해야 사회적, 시민적, 도덕적, 종교적인 생활의 외면에만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자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와 유기된 자를 포함한 전 인류는 죽음에서 유익을 얻는다. 일반 은총의 축복은 그리스도 사역의 간접적인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강독]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예를 들자면, 예수 안 믿는 남편이 아내에게 사정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좀 잘 다니라고, 실어다 주고, 특히 금요기도회 가라고 하고 애들 밥 내가 해줄테니 빨리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금요기도회에서 은혜를 받고 일주일 자신이 너무 편한겁니다. 너무 순종적이고 그냥 자기가 좀 심통을 부려도 주님 생각하며 꾹 참고 하니, 혜택을 자신이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구속 때문에 일반 은총이 임한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 때 손해 보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은혜 많인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 그 따위로 하면 교회 안나갈 꺼야"
그런데 아내가 남편보다 신앙이 없어서
"아이구 잘났다 인간아. 니가 교회 안나오면 내가 겁날 줄 아냐. 네가 지옥가면 내가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하겠다."
이러면 답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 부인이 그렇게 남편을 괴롭힌 것입니다.
남편이 말하기를
"여보 그동안 미안했어. 그동안 나를 위해 많이 애썼어. 나 죽으면 절대 오래 혼자있지 말고 나 괜찮으니 즉시 괜찮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그래도 좀 눈물을 보이면서
"여보 걱정하지 마"
"아니 나하고 약속해줘. 빨리 재혼하겠다고. 그리고 여보 그 아무개하고 꼭 결혼을 해"
"여보 그녀석은 당신 사업때 그렇게 당신을 괴롭힌 사람이잖아. 당신을 괴롭힌 그 사람에게 왜 나를 시집가라고 하는거야?"
"그게 내가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야."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예화]
일반은총의 방법
일반계시의 빛, 중요한 것은 일반 계시의 빛이다. 일반 계시의 및을 떠나서는 다른 방법은 불가능 하며 헛되다. 모든 사람에 비취며 자연인의 양심을 지도한다.
정치, 인간의 정치는 이 목적에 종사한다. 정치는 악한 경향을 억제하고, 선한 질서와 예절을 촉진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강독]
정치는 나라의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야당 여당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법을 엄격하게 만들면 사람이 꼼짝 못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론. 여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는 곳에서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론 판단에 민감한 사람들의 행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강독]
여론은 이제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적 형별과 보상은 마찬가지 입니다.
일반 은총의 효과
형의 집행 유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이 그러셨잖습니까. 이 선악과를 따 먹는 날이 정녕 죽으리라. 영혼과 육체의 동시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게 행을 즉각적으로 해버리셨으면 인간이 싹 없어지니까 창조의 의미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형 집해을 연기해 주신 것입니다. 영혼을 죽이셨어도 육체의 집행은 연기하고, 거기서 자식들이 태어나고 인간들이 계속 대를 이어가면서 인류가 존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제재, 죄는 개인들의 생활에서 억제시 된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 생활에 들어온 부패성이 지연되고, 아직은 파괴적인 활동을 수행하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다. [강독]
죄는 억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이암아 들어온 부패성은 지연되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죄에 대해서 억누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나라라도 부모 때려도 되고, 마누라를 30명 50명 거느려도 좋고, 성폭행 해도 좋고, 사람을 죽여도 좋고, 재산 뺏어도 좋다는 나라는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 도덕, 종교에 대한 의식. 인간은 아직 진, 선, 미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어느 정도 인정하며, 진리와 도덕과 종교의 어떤 형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강독]
세상적 의. 자연인은 자연적 선, 의, 영적 가치는 결여되었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외부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일을 어느정도 행할 수 있다. [강독]
자연적 축복. 하나님으로 부터 수많은 과분한 축복을 받는다. [강독]
이것이 일반은총의 축복입니다.
오늘 굉장히 예쁜 책이 있습니다.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할께라는 책입니다. 열린교회 출판부에서 나온 책입니다. 아주 예쁘게 나왔습니다. 출판부 직원들이 이렇게 표지를 붙였다고 그래서 이것은 성평등에 어긋난다. 어떻게 엄마만 널 위해서 기도하면 되느냐, 그래서 뒤에다가 '아빠두' 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불만입니다. 엄마는 크게 쓰고 아빠는 조그맣게 쓰냐는 말입니다. 자매들이 만드는 데도 성평등 의식이 떨어집니다. 내가 만들었으면 똑같은 크기로 햇을 텐데. 되게 예쁘죠? 오늘 여러분 들 중에 오늘 수업에 아무도 기여하신 분이 없습니다. 그냥 여기 앉았을 뿐입니다. 오늘 이것을 최초로 이 책을 주겠습니다. 여기서 부터 네번째 앉은 안경쓴 자매 나오십시오. 이 자매를 주겠습니다. 아다시피 저 자매를 나는 잘 모르고, 그리고 오늘 수업을 위해서 특별히 도와준 것도 없고, 물을 떠다준 자매도 아닙니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줬습니다. 내가 이것을 자매에게 주겠어라고 할 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주는 것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여러분도 보셨죠. 이 자매 여기 있는지 저는 아까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뭐라고 하냐면 이것을 어떻게 받게 되었냐고 그랬더니 내가 이것을 내밀었기 때문에 이 공로로 가져오게 되었다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말이 안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그러니까 내가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을 받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안돕니다. 겨우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