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북산교회세미나 2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 9)
녹취자: 김경애
그러면 이제 아까 시간에 우리들이 영의 요소와 진리의 요소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예배는 설교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경배를 올리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입는 시간이니까 사실은 설교보다는 예배가 훨씬 더 큰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우리들이 예배인도에 들어가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일이 있어야하는데 결국은 설교가 자신의 역할들을 제대로 해내지 않고는 예배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제대로 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더 넓게 보면 예정도 들어가지만 그렇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그 일이 예배의 중심에 굳건히 서서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러면 실질적으로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그 이야기도 예배의 감격에 빠질 준비가 다 되어있는데 자기들을 빠뜨리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요소라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을 해서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그 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나서 제일 먼저 바뀐 것이 예배였는데 그 예배가 예전에는 이해를 무시하는 예배였습니다. 신학을 하시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해를 통해서 그래서 인간의 지성으로써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가 전달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라티아 인 퓨사’ 라는 이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주입되는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미사를 드리는 이 현장에 들어오기만 하면 본인이 어떤 깨달음이나 그 다음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나 이런 것에 상관이 없이 여기에 성체를 받고 하면서 여기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영혼 속에 주입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말하자면 공로가 된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미사를 드리는데 열심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 자체가 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종교개혁자들은 여러분들이 아는바와 같이 인문주의자들입니다.
이 인문주의는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르네상스 운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중세교회에 의해서 억압되었던 교권으로부터 인간의 자율과 자유를 되찾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자율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인간이 예전처럼 교회가 시키는 대로 생각 없이 움직이는 인간이 되면 안 되고 생각을 하고 사고를 하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지성이 무시되었느냐하면 그것은 아니고 강조가 되는데 이 지성이 어떤 지성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이러니까 무조건 이렇게 생각해라.’ ‘교회가 이렇게 믿으니까 이렇게 해라.’ 그것을 따라가고 고분고분 하는 지성이 아니라 인간이 자율적이고 자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모든 가치 판단의 중심에 서있다고 믿는 그런 종류의 지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들을 이런 것들이 쭉 물려 내려오면서 이게 14세기에 일어났던 르네상스 운동과 물론 뒤로 가면 더 많이 나오지만 14세기부터 시작되었던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에 의해서 이런 기운들이 퍼지기 시작하는데 이게 인문주의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문주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하면 역사나 그 다음에 철학, 문학, 예술,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에 있어서 항상 주인공이 누구였습니까? 인간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가장 바람직한 모든 사고와 사상의 전범(典範)들, 전범을 어디서 발견하느냐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에 고대의 그리스의 문학작품 같은 것들을 원전으로 직접 읽으면서 하자는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인문주의의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전부 다 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문주의가 이렇게 되면서 둘로 나눠지게 되는데 인문주의가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나가기는 했지만 완전 인간자율과 자유를 부르짖으면서 인간중심으로 나가는 인문주의가 있었고 기독교 인문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이 있는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여기에 있고 신이 있습니다. 신이 있으면 인간이 여기 있으면 이런 세속적 인문주의자들은 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문주의자들은 그것이 아니라 신을 인정하면서 신이 ‘이렇게 하라.’고 그래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것, 이것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도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교회와 교권에 의해서 하나님이 명령한 것도 아닌 것들이 막 인간에게 억눌려서 부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는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을 가지고 보니까 사실은 정말 신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라고 그러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인데 그런데 교회와 교권에 의해서 인간을 수탈하기 위해서 하는 이 엉터리없는 무자비한 것들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고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느냐하면 인간이 다시 인간의 지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전부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나와서 그냥 예배당에 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공로가 되는 이런 사상은 미신이다. 이것은 미신이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역사를 거꾸로 역추적해서 여태까지 기독교가 어떻게 교회를 가르쳐왔는가를 보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좋은 신앙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서 ‘아, 그렇구나!’ 그렇게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믿으라고 하는구나!’ 신앙을 갖게 만들고 그리고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앙이 없을 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신앙 때문에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하는 이러한 신앙의 기운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제일 먼저 교회에 나오면 가르쳐야합니다. 그런데 이 가르치는 것이 예배 속에서 가르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그 다음에 교육을 통한 가르침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예배를 통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하겠습니까? 설교 자체가 배울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설교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들으면 안 될 이야기, 전혀 쓸데없는 이야기, 그런 것을 하겠습니까? ‘착하게 살아라. 기도를 많이 해라. 전도를 많이 해라.’ 쉽게 이야기하면 좋은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가르침으로는 안 되고 기독교 사상을 가르칠 수 있는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가르쳐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하면 설교 자체가 내용을 가진 설교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서 차분차분하게 교회가 믿는 신앙의 교리를 가르쳐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까 이야기한 소위 이야기하는 ‘알레 데리.’ ‘진리 안에서’ 그랬습니다. 진리의 요소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자,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회중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단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예배가 진리의 요소를 가진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할 것이 아닙니까? 첫째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설교할 때 이 설교가 진리를 전달해주는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러면 어느 목사가 올라갔는데 예배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설교가 정말 성경의 진리를 풀어서 올바르게 해석해서 전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설교를 들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그대로 풀어서 올바로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그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것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여기에서 훌륭한 진리의 말씀이 설교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이 설교를 이해할 수 없으면 혹은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다면 그러면 이것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이제 교인들의 예배의 자세가 아주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예배당에 나올 때 예배를 드리려는 마음만 가지고 있지 설교를 깨달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하면 딴 짓을 하고 아니면 졸고 그렇지 않으면 예배시간에 딴 책이나 읽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하러 어느 교회에 갔습니다. 한 3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3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니까 돈도 많은 것이 아닙니까?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이크에 대고 설교를 하면 소리가 윙윙거리며 울리는데다가 예배드리는 내내 저기서 망가진 환풍기가 덜커덩거리면서 계속 돌아가는데 그 시간에 망가진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망가져서 계속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교인이 3000명이 모이니까 교회가 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목사가 전화 한통만 하면 새것으로 달아 줄 텐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평소에 그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 목사가 설교를 하고 성도들이 귀를 잘 기울여서 그 말씀을 깨닫고 하는 것들이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릴 때에 진리의 요소는 진리를 선포만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는 이해되어야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들을 때에 지성을 집중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자하는 의욕이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에게 교육합니다. 예배시간에 예배의 자세는 부동자세입니다. 가능하면 눈도 깜박거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눈이 많이 아프니까 눈만 깜박거립니다. 교역자들부터 훈련합니다. 예배시간에는 부동자세다. 군대에서 참모총장이 와서 연설하면 부동자세입니다. 움직인다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경외심을 가지고 왜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똑바로 딱 앉아서 시종일관 이렇게 앉아서 듣고 메모하고 싶으면 간단하게 메모하고 그것이 예배이지 몸을 가누지 못해서 그렇게 하면 되겠느냔 말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달렸느냐하면 목회자 자신에게 굉장히 많이 달렸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이 바라볼 때에 ‘목회자가 이 설교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는 시간으로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구나!’ 이 느낌을 갖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사람들의 영혼이 운명과 직결된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몸부림쳐야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리처드백스터라는 인물을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키더니스트 라는 곳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저도 그 지역을 가보았는데 이분이 17세기의 청교도입니다. 존 오웬과 같은 시대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1600년대니까 지금부터 400년이 넘었습니다. 그 마을에 가면 아직도 그 목사님을 그리워하는 후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철저한 청교도였습니다. 17년을 목회하셨고 처음 그 마을에 부임했을 때 270가정이 그 마을에 살았는데 17년 만에 목회를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청교도 박해령에 의해서 오마에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교회가 오마에로 추방되고 설교를 못하도록 약 2,000명의 청교도들이 박해를 받는데 그러는 바람에 결국 목회를 못하게 되셨는데 그런데 엄청난 학자였고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이 270가정이 있는 그 마을에 교회가 있었는데 부임했을 때에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한, 두 가정이었는데 17년 목회를 하고 떠날 때는 한, 두 가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방도 아주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매순간 죽어가는 한사람도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설교한다.’ 그것입니다. 그분이 쓰신 수많은 책 가운데 대표적인 책이 ‘회심’이라는 책입니다.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까? 꼭 읽어보십시오. 회심입니다.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교인들도 아주 진지해지고 열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리의 요소가 교회에 있기 위해서는 첫째, ‘목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성경말씀을 제대로 받아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교하고 교인들은 자신의 설교에 집중하게 하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준비를 철저하게 하셔야합니다. 그것을 하기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셔야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최고의 설교를 하셔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만 이 진리를 제대로 전달하는 설교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설교합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그 전하는 설교의 중심이 성경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 성경읽기입니다. 목회자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문제를 어디서 발생하느냐하면 설교를 하기위해서 성경을 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 구절을 설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주석을 펼쳐놓고 찾습니다. 그 다음에 좋은 말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읍니다. 그리고 예화집을 찾아서 모읍니다. 그리고 설교를 만듭니다. 이것은 설교를 조제하는 것입니다. 논문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할 때 그때의 선지자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겠습니까? 앞에서 선지자들이 행한 이야기를 쭉 펼쳐놓고 좋은 것을 몇 줄씩 다 골라 모아서 그래서 설교를 했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을 때에 항상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누구에게 하나님이 말씀이 임하니라.’ 기억나십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와 예이 데바르 엘로힘 엘 알 베’ 등등이 나오고 여기에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누구누구에게.’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는 공통적이 묘사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나갑니다. 그런데 호세아서에 보면 어떤 말이 나오느냐하면 1장 4절에 보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이것은 히브리어로 ‘베’라는 전치사입니다. 여기서 이것은 into의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호세아는 인간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사람 속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을 관통하고 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자신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임하는 것,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이 사람이 가치관, 그 다음에 인생관, 세계관,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설교자가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청중이 먼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좋은 설교를 할 수 없고 아마 좋은 설교를 했다면 아마 그것은 허위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목사로 태어나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예배에 감격이 있고 영혼들이 깊이 변화되는 일들이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진 않는다.’ 라고 말하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깊이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원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습니까? 우리도 성경을 펼 때에 하나님께 설교를 듣고 감격을 하고 그래서 새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뉘우치고 그러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들어간 것입니다. 매일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을 잘 때까지 밭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그물을 들고 나가서 고기를 잡고 밤늦게까지 고기를 잡다가 돌아오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기 잡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농사짓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핸드폰에 대해서 특강을 해달라고 그러면 원고를 준비해야합니다. 왜? 자기가 평소에 사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언제 가장 힘이 나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감동받은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는 설교를 하면 아무 성경 본문을 읽든지 마지막에는 기도를 열심히 하자고 하고 끝납니다. 전도에 미친 목사는 아무 성경 본문을 읽어도 마지막의 결론은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하자.’ 로 끝납니다. 그리고 열심히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목사는 게으르고 거짓된 사람들에게 야단을 칠 수 있는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사가 평생 전도하라고만 설교하다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평생 거짓말하지 말라고만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것들이 필요하냐하면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표준과 자신의 표준을 비교하면서 그렇게 되고 그렇게 살려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치고 그러는 가운데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사가 이번 주에 성경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했다고 해서 항상 교인들도 그런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가 전혀 은혜 받은 적이 없는 말씀을 설교해서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희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설교를 입으로 하려고하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자신을 변화시킨 다음에 이 설교가 다시 나오도록 그렇게 설교를 준비해야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가 살았을 때 설교를 듣고 나서 은혜를 받은 교인이 물었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하시는데 시간이 얼마나 드셨습니까?’ 스펄전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데 일평생 걸렸습니다.’ 물론 오늘 한편의 설교준비는 어제 했을 수도 있고 그저께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쏟아놓기 위해서는 일평생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예배의 설교가 피상적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가 변화되는 경험이 거의 없이 설교를 직업적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설교가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권위가 안 서는데 예배가 감격에 빠진다는 것은 그것은 조작입니다. 다분히 조작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 목회와는 상관없이 성도들이 마음에 찔리게도 해주시고 은혜도 받게 해주시고 심지어는 사고를 당해서 회개도 하게 해주시고 하니까 목회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깊이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깊은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목사님이 대접해주셔서 우리가 오늘 맛있게 저녁을 먹었는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먹은 음식들이 모두 우리의 생명을 활동하게 하는데 필요한 영양소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갓난쟁이나 애들 입에다가 그것을 쑤셔 넣으면 아이가 죽지 살겠습니까? 그것을 엄마가 먹고 젖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먹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분은 성경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하면 성경의 어떤 내용을 읽습니다. 읽으면 이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러면 이 성경을 깨닫는다고 할 때 열사람이면 열사람이 똑같은 성경을 보면서 다 똑같이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원래에 이 배경에 무슨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성경을 놓고 깨달은 것이 이 사람은 이만큼일 수 있고 이 사람은 요만큼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석학에서 선이해라고 부릅니다. 혹은 전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여기에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읽을 때에 ‘아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 깨달음이 여기 전체를 휘돌면서 이 A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해석하게 만들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 로마서는 누가 썼습니까?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임명받은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베드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인데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이 더 위대한 예수님이냐? 바울이 만난 예수님이 더 위대한 예수님이냐? 라고 묻는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다 순교를 불사할 정도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베드로도 바울 못지않은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는 베드로서를 썼지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로 이어지는 이 서신서들은 기독교를 웅장한 우주적인 Frame으로 그려냅니다. 특히 에베소서를 교회 우주적이라고 말한다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 우주적인, 예수 우주적인 그런 서신입니다. 엄청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은 학식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딱 만났을 때에 이 정신세계 속에서 휘돌아오면서 우주와 이 모든 세계들이 한꺼번에 선명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요약하자면 그러면 우리 설교자에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교를 설교답게 하려면 첫 번째 조건이 뭐냐 하면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 본문을 통해서 주님을 정말 제대로 만나서 하나님의 설교를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유용한 용도가 무엇입니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고 혼나고 바르게 되고 의로 교육하게 되는 것들이 이 신앙의 경험 속에서 설교자 안에서 계속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새로운 세계들에 대해서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아까 말씀 드렸듯이 요만한 사람은 성경을 보고 깨달아도 항상 이만큼밖에 안되니까 이 정신과 지식의 세계를 계속 확장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신학공부입니다. 목사 되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따야하는 신학교 졸업장용 신학공부 말고 신학 공부를 계속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요즘 읽고 계신 신학 책이 무엇입니까? 요즘에 공부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가 무엇입니까? 요즘에 감동을 받고 있는 신학저자가 누구입니까? 남의 설교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저는 요새 존 스토트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루터의 칭의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일고 있는 중입니다.’ 라든지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라든지 계속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머릿속은 신학공부만이 아닙니다. 일반 학문에 대한 공부도 같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학문과 신학의 관계는 기초와 건축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일반학문 공부를 계속해야합니다. 상식을 넓혀가고 그래서 세상을 알고 그래서 어떻게 역사가 흘러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내 교회나 하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면 자기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배를 잘 만듭니다. 한국도 배를 잘 만드는데 요즘은 조선공업이 중국 쪽으로 자꾸 넘어간다고 그래서 긴장들을 하는데 40만 톤, 60만 톤짜리 배도 만듭니다. 그러면 그 배의 크기가 어느 정도냐 하면 축구장 5개를 합쳐놓은 크기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길이가 축구장 4개 내지 5개를 합쳐놓은 길이가 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 사람이 섰습니다. 나침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북쪽으로 가라.’ 그래서 이 사람이 축구장 5개만한 어마어마하게 넓은데서 서서 나침반을 보니까 이쪽이 북쪽입니다.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확신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북쪽으로 걷고 있다. 왜?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배가 남쪽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면 자기는 아무리 북쪽으로 걸어가도 배 자체가 남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계산에 안 넣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이 성경과 신학공부만 하고 일반학문과 역사를 모르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망망대해에 배가 이렇게 하나 떠있는데 때로는 여기서 북쪽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여기에서 GPS를 띄워서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자기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설교자로서 자신을 준비해 가는데 가장 중심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입니다. 여기에 깔때기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학문과 경험이 다 있습니다. 이 깔때기에 수없이 좋은 것들이 다 들어갑니다. 마지막 요건은 어디에 놓여있어야 하느냐하면 이렇게 놓여야합니다. 성경책을 읽는 이 위에 놓여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트를 하나씩 준비하셔서 성경을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읽어나가는데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설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듣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천천히 읽어나갑니다. 이때에 성경의 원어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다면 아주 좋고 잊으셨다면 그러면 대조성경이라도 놓고 원어하고 대조를 해가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하면 성경을 읽고 있으면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는 것 같으면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감동이 옵니다. 안 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감동이 오면 여기서 멈추고 반복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감동이 오는 것 같은데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진도를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 감동을 받았는데 두 번을 읽었는데 더 감동을 받으면 깨달아지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입니다. 열 번이 될 수도 있고 60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세월이 좀 먹는 것이 아니니까 천천히 읽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이 속에서 설교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설교하려고 펼치지 말고 설교를 들으려고 펼치셔야합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다른 일들이 하도 많아서 그것을 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때에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삶과 모든 것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그때에 뭐가 됩니까? 그때에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그 다음에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책망이 있습니다. 뉘우쳐야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바른길을 가르쳐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고 나서 여기서 그 다음에 설교를 들었으면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깨닫고 그 다음에 교훈을 받고 뉘우치고 고치고 바르게 하고 그렇게 하고 그럴 정도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힙니다. 커다란 것이야 잊히지 않지만 그때에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설교를 들려주셨는데 이것을 만약에 내가 아니라 교인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들은 이 말씀을 증거한다면 내가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그것을 요 시간이 지나기 전에 기록해야합니다. 이게 2005년 1월 13일 아침 8시쯤 성경을 읽기 시작해서 10시쯤 은혜를 받고 10시부터 적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밤 9시 24분까지 적었습니다. 중간에 두어 시간 쉬었습니다만 그렇게 적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으면 그 다음에는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도를 하면서 설교를 해야겠는데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이 교회 돌아가는 상황이 이런 설교를 하고 싶다. 그리고 찾아보니까 옛날에 내가 은혜 받은 것이 있지! 그러면서 펼치는 것입니다. 펼치면 대충해도 약 석 달 정도는 설교할 수 있는 정도의 분량입니다. 여기에서 그때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⅓을 가지고 제가 240p의 책을 한권 썼습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한번 깊이 은혜를 받고나면 한 6개월 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제가 17년 목회를 하고 새벽예배 말고 4,000번을 설교했답니다. 나는 안 세어봤는데 우리 직원들이 세어보았는데 4,000편의 설교가 다 원고 없이 한 것입니다. 그것을 전부다 녹취를 해서 있는데 책꽂이로 방하나 가득입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무슨 설교를 하지?’ 그렇게 고민할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그렇지만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항상 설교하고자하는 것이 설교해야할 시간보다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일 년에 네 번 부흥회를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신년에 부흥회를 하고, 고난주간에 새벽부흥회를 하고, 여름수련회에 가서 기도원에 가서 부흥회를 하고, 가을에 사경회를 합니다. 이렇게 4번을 합니다. 그것을 17년을 했습니다. 68번의 부흥회를 한 것입니다. 한 번도 외부강사를 안 불렀습니다. 교인들도 원하지 않고 나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폭탄처럼 무엇을 퍼붓기 위해서 사경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나는 이 글자를 참 좋아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경을 살피는 모임입니다. 아까 지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찬찬히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말씀을 맡은 종입니다. 그러면 어미가 되어서 요리사처럼 밥을 잘하는 사람도 있겠고 기본적으로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미가 되어가지고 나는 밥은 안하겠다고 파업을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밥하는 은사가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해서 그래서 자기가 실력이 부족하면 더 꼼꼼히 준비를 해서 설교 원고를 외우다시피 해서라도 주일날에는 말씀으로 꽉 찬 가운데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서 퍼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승부를 걸어야합니다. ‘약을 팔아도 저렇게 팔면 지나가는 사람이 절대 안사겠다.’ 그렇게 설교를 하면 그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워낙 능력이 없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 보셨습니까?’ ‘해 봤냐?’ 온전히 매달려서 제가 전도사 시절에 한참 설교준비에 심혈을 기울일 때는 원고 작성하는 것만 24시간이 걸렸습니다. 글자까지 완전히 다 타이프 쳐서 교정까지 본 다음에 외우고 올라가서 설교할 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이 설교 끝나고 나서 숨이 껄떡하고 죽을 사람처럼 그렇게 설교해야합니다. 그렇게 해도 교인들은 그 설교를 우습게 알고 졸고 자고 하는데 올라가서 목회자 자신이 그런 결단과 몸부림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예배시간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짓기 위해서 일주일씩 금식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은 많이 있고 30일 혹을 40일을 금식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말씀을 열어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여러분들은 보셨습니까? 이번 설교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을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인가 우리의 사역이 본질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늘 공부해야합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너무 공부를 안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모아놓고 제가 싫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사실은 한국에서나 여기에서나 목회라는 것은 대동소이하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을 만나고 목회하고 교인들은 여기저기 목사를 끌고 다니면서 밥을 먹이고 그러면서 그저 세월을 한 십년 보내고 나면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하고 뻥이나 치려고하고 그러면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저의 지론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실력이 없는 목사는 절대로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진실해지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해야하는데 그것이 목회자가 가능합니까? 지도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모든 거짓과 허위와 위선이 나옵니다. 그리고 권위주의가 나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고 그리고 신학공부를 하고 틈나는 대로 상식을 넓히고 공부를 해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말로 잘 정리를 해서 그래서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게끔 설교를 준비해서 그래서 설교단에 올라갈 때에는 이 말씀이 자기가 온전히 젖은 가운데 외치면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박윤선 목사님이라고 아십니까? 박윤선 주석가라고 하시면 다 아실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50이 넘으셔서 한성교회라는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녁예배 때마다 이화여대교수가 왔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단에 속한 교파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6개월을 다니면서 부목사님이 물어보았답니다. ‘교수님 이제 박 목사님 설교를 한 6개월 듣고 나니까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이 교수가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정말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주 말이 맞는지 우리 박 목사님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변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태도입니다. 저 연세에 저 사람이 외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저렇게 자기의 온 생명을 걸고 외칠 수 없을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면 확신하지 않는 한은 저렇게 외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입니다. 목사님 바둑 좋아하십니까? 안 좋아하십니까? 저는 바둑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조금 둘 줄은 아는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일본이 바둑의 역사가 굉장히 깊은 것으로 아는데 그 기사들이 둔 바둑의 기보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 기보 가운데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흑백을 놓고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이 졌습니다. 너무 너무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바둑판에 엎드려져서 절명했습니다. 실화입니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기보가 아직도 토혈국이라고 해서 내려옵니다. 한번 오락처럼 두는 바둑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이게 지금 설교가 놀이입니까? 애들 장난입니까? 교인은 온통 졸고 장난치게 만들어놓고 목사는 검은 가운을 입고 문 앞에서 만면에 미소를 짓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악수를 하는데 내가 목사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교회에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까? 나는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한 번도 그런 인사를 안했습니다. 네가 나와 주셔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여기 있어서 네가 교회한테 감사해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우리 담임목사님께도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그 사상이 안 맞습니다. ‘아이 그렇게 먼데서 오시고 감사합니다.’ ‘담임목사님!’ ‘왜?’ ‘목사님은 뭐가 감사합니까?’ ‘아휴 전도사님은 아직 몰라서 그렇지 교인들이 이렇게 먼데서 나오는 것은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바둑 한판을 두다가도 지니까 확 하고 피를 뿜으면서 그 판위에 엎드려져서 죽어버렸는데 이게 무슨 설교 한편이 바둑 한판입니까? 바둑도 그렇게 두면 죽는데 말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기본적으로 설교의 영향력이 없는 목사님들은 기본적으로 진리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자신이 설교를 해서 외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십시오.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평범한 말로 전했을 때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 위해서는 혀에다가 기름을 바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자기가 설교하고자하는 진리대로 몸부림치며 살아온 날들이 있을 때에 그 짧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깊은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분을 아십니까? 일본의 작가입니다. 일본의 목사님인데 우리나라의 김재동 목사님 같은 사역을 하시는 분입니다. 588같은 창녀들을 찾아가서 전도를 하고 그러니까 기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 창녀들에게 그렇게 전도하고 창녀들을 돌보아준다고 새 사람이 됩니까?’ ‘거의 새사람이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렇게 선행을 베풀고 그렇게 진리로 돌아오도록 외치십니까?’ 목사님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가서 인생의 생기를 찾으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목회의 모든 타락은 자신도 변하지 않는 것을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위선과 거짓들이 나옵니다. 설교하러 어느 목회자가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우리는 금방 압니다. 저 설교가 베낀 것인지 아니면 생각 없이 하다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설교집과 주석에서 짜깁기해서 간신히 읽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압니다. 성도는 더 잘 압니다. 청교도 가운데 존 기데스피 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모임에 참여해서 기도를 하는데 이 목사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늘 기데스피 목사님의 기도문을 그대로 활용합시다.’ 청교도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한토막입니다. ‘아무개 목사님이 기도해주시겠습니다.’ 기도를 안 합니다. 아무리 눈감고 기다려도 기도가 안 나옵니다. 그러더니 마지막 순간에 ‘오, 주님!’ 딱 한마디를 했는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가슴깊이 울려 퍼지는 진심이 담겨있는 한마디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어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설교하면서 자신도 하나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있을 수 있는 그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에 한동안 한 10년 이상 안 나갔습니다. 90년도에 그만두었으니까 한 11년 동안 안 나갔다고 그러는데 어느 학생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누가 나에게 설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를 한수 적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미당선생의 시를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하찮게 생각하다가 가만히 묵상을 해보니까 그 친구 말이 너무 틀림없습니다. 우리들은 국화꽃이 활짝 피면 이것의 종자는 무엇이고 누가 이런 국화꽃을 피울 기술이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사실 비밀은 소쩍새가 울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국화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동양적인 감각에서 독특한 인용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골백번을 읽어도 이해를 못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소쩍새는 올빼미 과에 속하는 새입니다.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 와서 우는 것입니다. 울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그날 국화꽃이 핀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목사님들에게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자격은 신학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입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니’ 이 구도의 관계라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도 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도에 맞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만들었습니다. ‘보혈의 샘’ 보혈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보혈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큰집을 사주어서, 좋은 차를 사주어서, 생활비를 아주 많이 주어서 그래서 기쁜 것이 아니라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말씀으로 꽉 차야합니다. 그래서 퍼서 설교를 해도 이 안에서는 계속 나옵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주일날 설교를 하고 교인들을 떠나가면서 ‘아 주일예배는 또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하는가?’ 설교할 것이 이렇게 마음에 가득 있는데 일주일이나 기다려야지 성도들을 교회에서 만나는데 말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설교할 것이 없어서 고민입니까? 그것은 매주간 그것은 설교할 것이 없는 것은 설교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를 가장 잘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를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목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박 목사 요즘 신앙생활 잘해?’ ‘김 목사는 신앙생활 잘해?’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목사니까 다 까만 가운을 입고 목사라고 사회적으로 그러니까 ‘목사님 요즘 신앙생활 잘하세요?’ 이렇게 물어보는 교인들은 물론 없습니다. 그것은 개념 없는 교인입니다. 그렇지만 뻔합니다. 잘 안하는 목사도 많은 것을 아십니까? 신앙생활 속에서 설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보혈의 삶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매일 매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때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혈의 삶입니다.
그래서 내 교회가 커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크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만나면서 웃을 수 있지만 이런데 오면 저는 쉬는 시간입니다. 편한 시간입니다.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일하시는 목사님도 바쁘시겠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그런데 그래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부 다 세속적인 부분입니다. 내가 명예가 올라가서 기쁘다. 어디 가니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쁘다. 이런 것은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게 보혈의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두려움 없이 목회를 하는 비결에 대해서 내일 아침에 이야기할 것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뭐가 무섭기에 할 이야기를 못하고 제가 교회를 7명을 데리고 직접 개척했습니다. 17년의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꼭 한번 내가 개척을 해서 17년이 되는 교회지만 어쩌면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교인들이 나보고 교회를 떠나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예배에 관해서 ‘배교의 예배에서 돌이켜라.’ 그것을 10주간 설교했는데 교인들이 데모해서 나를 나가라고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보따리를 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서 벌판에서 다시 개척한다. 상관없습니다. 이까짓 사회적인 그리고 설교시간에 아주 추호의 두려움이 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잡아먹을 듯이 설교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하면 죽고 이 목회자의 영광은 설교자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구냐에 대한 identity가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identity로 자꾸 갑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은 정확했습니다. ‘우리의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를 뿌리고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이것이 목사에 대한 identity입니다.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목사가 될 때에 좋은 집에서 넉넉한 사례비를 받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까? 교회가 커지니까 목사님의 집도 조금 나은 것으로 드리고, 차도 좀 나은 차를 사드리고 없었을 때야 걸어 다니시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좀 목회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엄정해야합니다. 그리고 내 영광은 교회의 크기나 세상에서의 평판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다음 세대에 나를 어떻게 생각해줄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주님이 주시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날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오늘날 XXXX들이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목회자의 마음속에 피 묻은 복음의 말씀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설교를 그렇게 해도 교회를 실제적으로 운영하고 자기가 살아가는 것하고 딱 맞아서 말로써 이 말과 실제의 삶과 일치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깨지면서 사람들이 신뢰를 자꾸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 오늘 저녁시간에는 성경을 항상 중심에 놓고 성경읽기에서 은혜 받는 사람들이 될 것. 신학을 계속 공부할 것, 성경을 연구할 것, 일반학문들의 끈을 놓지 말고 매일 독서할 것 그것입니다. 제가 제일 경멸하는 일이 목사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한국에서는 하는데 여기서는 안하실 것입니다. 한때 볼링을 했습니다. 요즘은 또 넉넉해지니까 골프를 치러 다니고 그럽니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모여서 공부를 해야지요. 공부를.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아, 목사님 무슨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세요?’ 저는 저 가방을 항상 메고 다닙니다. 주일날 양복에다가 저것을 메고 설교를 하러 올라갑니다. 왜? 나는 공부하다가 설교하러 올라온 학생이다. ‘그 연세에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집사람이 그럽니다. ‘하라는 애들은 공부를 안 하고 하지 말라는 남편은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진 사람입니까? 나는 매일 석탄을 캐러 막장으로 내려가는 광부다. 그래서 한 양동이를 한주일 동안 퍼가지고 와서 주일날 불을 때서 성도들을 데워주고 그러면 다 떨어지니까 월요일 날 다시 막장에 내려가서 코가 새까맣도록 탄을 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목사의 일생이지 무슨 이 세상에서 영광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공부하자. 그래서 말씀을 더 깊이 있게 그리고 그 말씀을 선포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혈의 삶을 살아라. 그런데 제가 사실은 XXXXX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교분이 없었는데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돌아와서 그것을 전해주는데 우리 교인들이 우리 집사람도 XXX 처음에 이 목사님이 신학생이었습니다. 22년을 감옥에 갔습니다. 수용소 생활을 22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어떻게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더니 그러니까 면회도 없었습니다. 22년 동안 어떻게 찾아서 갔는데 아내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한테 갔고 아들 하나는 마약중독자가 되어서 살다가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것입니다. 마당에 주저앉아서 쓰러지면서 통곡을 하면서 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당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얘야,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는 너무 가슴 아프지만 그러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게 극복할 수 있는 삶입니까? 여기에서 모든 샘의 근원이 있습니다. 가르침과 진리 그렇게 해서 살다가 어느 순간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는데 그게 목회자의 일생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사역입니다. 그 희생이야말로 고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갚아야하지만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