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북산교회세미나 1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녹취자: 김경애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 왔습니다. 장춘, 대련으로 지나다녔지만 XXXX 제가 시간이 안 나서 못 왔습니다. 이번에는 작년 1월쯤 북산교회 목사님의 편지를 한통 받았는데 아주 간곡하게 제 책을 읽고 은혜를 받은 것부터 시작해서 이곳에 한번 오셨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 마음이 움직였는데 작년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났습니다. XXXXXX 세 번밖에는 안되지만 같이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고 XXXXXXXX 우리 같이 성경구절을 읽고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을 많이 하다가 오늘 저녁을 먹기 전에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고 그리고 오늘 저녁을 먹은 후에는 계획대로 된다면 설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는 우리가 교회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림으로써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올바르게 되고 우리도 목회를 하면서 좋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선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사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사실 떼어놓을 수 없는 예배의 의무죠. 그래서 이 예배를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고 또 예배가 목회의 중심적인 기능대로 그렇게 사역을 해야지만 교회가 견실하게 서나갈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는 제가 처음 왔기 때문에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수없이 많은 교회를 보면 사실 이 예배가 이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거의 중심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말씀을 드리면 벌써 한 10여 년 전인데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적인 단체에서 한국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을 앙케트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나온 사람들은 대상으로 문 앞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설문의 내용 가운데 무엇이 있느냐하면 ‘오늘 방금 들은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했습니까?’ 그런 설문이 있었는데 95%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중에서 절반은 방금 드린 예배중의 설교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사람들이고, 다섯 명의 사람들을 확인한 결과 3일후에 다시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3일전에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의 설교가 어디였는지를 아직도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3명은 3일 사이에 잊어버렸고 두 사람은 기억하고 있더랍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좀 우스운 질문 같지만 종교개혁 직전의 교회 상황과 아주 유사합니다. 당시에는 예배에 화려한 복식들과 그 다음에 순서와 형식들이 도입됨으로써 말씀을 제쳐놓은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미사에 의해 이런 예배현상들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예배를 예배 자체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배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최고의 존경과 경외심을 표현하는 신앙의 중심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예수를 만나고 회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예수를 만나고 회개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제일 처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와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 말씀을 듣는 것들이 예배 중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항상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배는 그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마음이 상하실지 모르지만 묻고 싶습니다. 여기계신 분들은 예배를 인도하거나 아니면 남이 인도하는 예배에 예배자로 참석하든지 어쨌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눈물로 예배드려본 것이 언제입니까? 예배는 드렸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격스럽고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온 교인이 눈물바다가 된다든지 아니면 온 교인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사람들이 ‘정말 이 시간이 구별된 시간이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그런 예배의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여러분이 스스로 한번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부터 한 18년 전에 제가 아직 목사를 안수받기 전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를 늦게 받았습니다. 제자들하고 같이 받을 정도로 늦게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부교역자로 있었을 때의 교회가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역사는 오래된 60년 정도 된 그런 교회였습니다. 예배 순서가 세어보니까 23가지입니다. 그런데 항상 11시에 시작해서 12시 5분에 끝납니다. 정확합니다. 못 끝나면 목사님께서 마지막의 찬송을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서까지 12시 5분에 마칩니다. 그러니까 계속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이 의식 속에서 이 예배가 자기 마음의 중심에 없기 때문에 교회를 일찍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5분전 되면 사람들이 막 몰려 닥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요새는 한국에서는 다 차를 가지고 오니까 주차장에서부터 생난리가 납니다. 어쨌든 5분전에 사람들이 밀려닥치기 시작합니다. 이쪽에서 이미 성가대 반주가 시작되고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⅔밖에 안 왔습니다. 그리고 15분에 걸쳐서 교회는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면 일어났다 앉았다하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제 설교시간입니다. 예배가 복잡해지니까 설교시간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20분에서 25분이 약간 안 될 정도의 설교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설교시간을 못 견딥니다. 그래서 2층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목사님도 원고를 봐야하니까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하고 교인들도 고개를 숙이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앉아서 온갖 일들을 하면서 예배시간을 때웁니다. 주보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개척할 때부터 주보를 안 만들었습니다. 주보를 만들어서 설교시간에 주보를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펜으로 틀린 글자를 고칩니다. 그 다음에 헌금이 나오면 얼마나 나왔는가 보고 그 다음에 교인들의 소식을 다 읽고 이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졸고 그런가하면 핸드폰이 울리면 핸드폰을 예배시간에 꺼야 되는데 핸드폰을 고개를 숙이고 그 밑에서 핸드폰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핸드폰을 들고 그 다음에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는 핸드폰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벨이 울리면 그것을 들고 예배시간에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 예배당에는 하나님이 없다. 내가 심지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오신다면 내가 오시지 말라고 말리겠다.’ 거기에 왜 하나님이 오셔야합니까? 그런 태도를 하면 한국에 가서는 대통령은 그만두고 서울시장도 못 만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려고 나온 사람들의 태도가 그러느냐 말입니다. 처음부터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 앞에 경배를 올려야겠다는 생각 그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군들을 무엇을 하시는지 아십니까? 설교시간에 예배 끝나고 나면 여전도회 남전도회 할 때 무엇을 할까 그것을 노트를 하고 시간을 때웁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교회 전체가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안 보이는 하나님의 통일적인 통치와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그것도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혹은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함께 은혜 받는 우리의 지체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서있는 한 백성이구나!’ 이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에 있어서 identity 동질성을 유지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여기서 느끼셨을 것입니다. 옛날에 평신도 때 신앙생활하면서 함께 회개하고 은혜 받았던 사람들은 굉장히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교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서 번지고 있는 이 이기주의와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제대로 못 만나서 공동체 의식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극장을 가도 한국에서는 15분전에 가서 기다리는데 예배당에 그렇게 갑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났으면 그냥 천천히 나가면 되는데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을 만났으면 만난 것이 감사해서 좀 기도하고 못 만났으면 내가 왜 예배시간에 주님이 내게 은혜를 안주실까? 일시에 밀려나옵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그러면서 천천히 나가야하는데 일시에 위험할 정도로 밀려나옵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예배당의 육중한 문이 열리면 돌계단을 내려서 사람들이 내려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쁘게 나오면 어디 갈 곳이 있는지? 어디를 놀러가든지 아니면 밥을 먹으러 가든지 아니면 집에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텔레비전을 보든지 셋 중의 하나입니다. 예배에 올 때에는 우울해보였는데 예배가 끝나고 나면 행복해보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예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목사님께서 당신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교인들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면 보통 1시 가까이 되어야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중학교 때쯤 되니까 1시간 40분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은 1시간 40분까지 예배드리는 데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한시간만에 끝나는 것이 거의 목표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인들은 계속 교만해져갑니다. 그래서 교회의 아이들을 계속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교회가 지금 이제 교인들이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시간에 간절해지는 것들이 한국을 기준으로하면 1980년대 중반정도에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선교학자들이 많은 통계를 가지고 통계를 내는데 국민소득 5,000불이 분기점이랍니다. 5,000불까지가 종교에 대한 간절함이 유지되다가 5,000불이 딱 넘게 되면 돈맛이 들면서 그 다음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000불 정도가 되면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최근에 여러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영국에 제가 자주 갑니다. 영국에 가면 지금 어느 정도냐 하면 여성 하나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직장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 직장 상사가 ‘그것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자기가 교회를 다니는데 십자가 목걸이를 맘대로 못하느냐고 그러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랐습니다. 그래서 법원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졌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하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종교에 대한 과신이나 홍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어느 날 남자 돌아와서 목사님이 여기에 계신데 ‘목사님 우리 둘이 오늘 결혼하는데 주례 좀 서주십시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사내자식 둘이 무슨 결혼식이야? 나는 안 돼.’ 그러면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게 영국도 다 잘살게 되면서 그렇게 변질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라고 예외겠습니까?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제 2의 서울이라고 그러셨는데 좋은 뜻에서는 좋은 것이겠지만 나쁜 뜻에서는 나쁜 것도 많이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들을 뒤집어엎고 제대로 목회다운 목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옛날에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순진하게 목사님 말씀이라면 고분고분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는데 넓적다리를 꼬집으면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듣던 그 때의 교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예배시간에 더 커다란 말씀의 은혜가 예배시간에 주어져서 사람들이 꺾어지지 않으면 그러면 교회가 옛날같이 세워지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이런 일들이 예배당마다 다 일어나고 있는데 그 주범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주범은 목사입니다. 목사가 이 예배에 대해서 한없이 괴로워하고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하는가 하고 괴로워하고 자기가 몸부림을 치면 그렇게까지는 안 되는데 예배를 그렇게 인도해서 교인들을 절반이상을 재우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고 나왔는데 여러분 예배라는 것이 말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사람들이 마음이 부드러워지는데 예배시간에 은혜를 못 받으면 예배를 드릴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고 은혜에 면역이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웬만한 것 가지고는 감동을 안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려서 작년엔가 우리가 합동측 총회에서 시골교회에서 목사, 장로 기도회를 했습니다. 1,500여명이 모였는데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인도해놓고 그렇게 예배가 그 모양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주범은 결국 목사와 장로들이 합작을 해서 그렇게 만들었는데 교인들이 예배를 인도해서 예배가 은혜가 넘치면 은혜를 받는 것이지 교인들이 그 은혜가 싫다고 예배를 이렇게 드리자고 대드는 교회를 보았습니까? 그것도 설교라고 하고 예배는 그렇게 만들어놓고는 장로하고 목사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리고 예배당에서 나가는 교인들하고 악수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한없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대로 돌아가서 구약시대로 넘어가 봅시다. 구약시대 때에도 똑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이후에 즉시 두 가지의 은총을 주시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면서 자녀를 낳는데 그리고는 결국 죽습니다. 왜? 정녕 죽으리라고 그랬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 중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의 제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때문에 하나님은 못 만나지만 그러나 이제 제사의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죄에 대해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제사장을 통해서 열어주시고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영적인 생명을 받으면서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죄를 지으니까 그것은 계속 막히는 통로가 되니까 제사는 반복되어서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받을 영적인 축복을 받는 유일한 통로가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제사의 제도가 사사기에서 넘어가서 선지자들에게 오게 되면 이제 이 제사 제도를 놓고 제사장과 선지자들 사이에 심각한 갈들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다툼의 패턴이라고 그래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제사를 안 드렸습니까? 우리가 제물을 철철이 드리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난 제사를 받은 적이 없다. 마음으로 나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애꿎은 짐승들만 가지고와서 목을 꺾고 죽이지 말라.’ 그리고 심지어는 에스겔에 넘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성전 문을 누가 와서 닫아버렸으면 좋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선지자가 전해줍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제사라는 그 제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고 계시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수단입니다. 그 제도 안에 그런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수단이고 그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우리가 죄도 용서받고 그 다음에 은혜도 받고 계시의 새로운 말씀도 깨닫고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 마음속에서 제사의 제도를 이해하고 그 제사의 제물을 드리고 경배하기 전에 자신의 중심이 먼저 하나님께 바쳐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싫은 것입니다. 왜? 그것은 주머니에 있는 돈이나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다는 것은 예배시간에 ‘바쳐야지’ 그런다고 해서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의 중심이 되어야지만 그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써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뇌물의 개념을 가지고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어디서 배우느냐하면 고대 근동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신관들은 문화적으로 같은 고대 근동의 문화 안에 있으니까 그 신관은 뭐냐 하면 이 신들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그래서 제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은 매일 무엇인가 먹으려고 하는 걸근대는 귀신입니다. 그것들이 심통을 부리면 난리가 나고 그 다음에 가정도 어려워지고 질병도 걸리고 흉년도 옵니다. 그래서 그 신들을 공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옛날에 우리 민속XX을 보면 건물 짓다가 터줏대감한테 제사를 먼저 드립니다. 그것이 무슨 터줏대감은 뭐고 복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10층을 지을 건축비로 50층이 올라가게 해달라고 그러거나 아니면 땅을 팔 때 여기서 금이 쏟아지게 해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심통을 부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달래는 것입니다. 그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엄청난 모독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원래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 땅과 만물위에 아주 뛰어나셔서 존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이 관건적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잡신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가서 교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예배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고자하는 열심도 없는데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왜 나오느냐고 솔직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대답이 한결같습니다. 안 나오면 찜찜해서 그렇답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나온답니다. 그것이 결국은 시대가 그렇게 많이 변했어도 타락한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보여주는 이 태도는 이런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해서 그래서 예배드리기 전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예배시간에 우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 자체가 목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그것은 정신병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데 이것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목표는 뭐냐 하면 적을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는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을 깊이 경배하고 높여드리는 그것은 예배시간에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공동체가 모두 함께 주님을 만나면 그러면 변화됩니다. 여러분은 목회를 해보셨으니까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고 교만하고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알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목회를 하도록 부름을 받은 목표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목회자인 우리 자신이 주님을 예배시간에 만나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분이 한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제는 정말 엄청나게 더 힘든 때가옵니다. 그래서 요즘에 예배는 어떻게 됩니까? 한국에서 첨단을 달리는 교회들은 이 예배에 지루하니까 즐기는 요소들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힘을 기울여서 성가대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악기를 도입한다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전통적으로 근엄하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온 교인이 나와서 함께 춤을 춘다든지 말입니다. 미국에는 최근에 목사 한 사람이 있는데 예배당을 지었는데 체육관처럼 똑같이 지었습니다. 그리고 팬티바람으로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링이 있습니다. 가운데서 권투를 하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별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랬더니 뭐냐 하면 이제 전통적인 예배의 방식 자체가 현대인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현주소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 우리들이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교회의 현실과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나라에 우리들이 4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마니를 깔고 천막을 하나 치고 그 다음에 호롱불 하나 켜놓고 막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것도 자기네 땅에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유지에서 했습니다. 그러면 부술 것도 없습니다. 천막 하나 쳐놨으니까 철거하면 또 설치하고 하다가 구청에서 지칩니다. 그러면 차라리 불허를 받아라. 그러면 온 교인이 눈물로 기도해서 헌금을 모아가지고 가서 땅을 받아서 벽돌로 짓고 그렇게 했습니다. 교회를 지으면 교회가 섰습니다. 지금은 통계가 나왔는데 한국에서 100개의 교회를 세우면 3년 안에 60개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3년이 지나면 더 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세워진 교회 100개 중에서 다섯 개 정도만 남는 것입니다. 안되니까 무너졌다가 또 다시 세우고 안 되니까 무너졌다가 다시 세웁니다. 왜 상가에 음식점을 차렸다가 안 되면 문을 닫고 족발 집을 하다가 냉면집을 하고 냉면집을 하다가 안 되면 곰탕집을 하는 것으로 바뀌듯이 계속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것이 숙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15년 전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이 100,000부정도 찍혔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만들던 사람이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겠지만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셨는데 아주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자기 친구에서 선물했습니다. 그 친구가 그 책을 보고 엄청난 찔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드리는 예배는 배교에 가까운 예배다.’ 그리고 가족들을 모아놓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아빠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을 보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배교에 가까운 예배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예배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우리가 고치자.’ 그래서 매일 주일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온 가족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헌금도 교회에 가서 주머니를 뒤져서 헌금을 했는데 헌금도 미리 준비를 하고 그리고 예배 시간에 임박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찍 가서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6개월 동안 그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감격에 빠졌겠습니까? 못 빠졌겠습니까? 결과가 어떠했겠습니까? 못 빠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 평신도가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예배의 감격에 빠지기 위해서 벼랑 끝에 섰는데 밀어서 던져주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일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목회자 자신이 ‘예배가 다 그런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의 타락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에 보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저렇게 예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안 찾으십니다. ‘이렇게’ 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배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나니’ 방식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 그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하면 신령의 반대말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이거나 육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신령하게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진정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거짓이거나 가식이거나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그런 의미에서 ‘진심으로’ 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본문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 무엇 안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이렇게 됩니다. 그 안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방식의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사실 ‘프리마’ 라고 나오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영’입니다. 그 영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붙잡아주시는 본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인간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주시고 감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 안에서라는 이야기는 결국은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새로운 방식의 예배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와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시간에 올바로 선포하는 것 이것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방식의 예배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조금 더 들어가서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면 도대체 성령은 요한복음 3장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성령이 도대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지고 오고 역사하시고 그래서 바람이 부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럼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누구에게 성령을 특별히 경험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게 하시고 하는 이런 것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어떤 조건들을 채우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획일적인 조건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인데 그러면 이제 세 요소가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여기에 설교자가 있고, 예배하는 자가 있고, 성령이 있고, 이렇게 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선포되고, 그 다음에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갈망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고, 성령은 이 예배의 현장을 축복하시고 하는 이런 삼자적인 작용에 의해서 예배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령과 진리라는 것이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구원이 완성될 때가지 계속해서 이 두 가지가 계속해서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연히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계획을 가지고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을 사랑으로써 이루어가기 때문에 인간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을 합니다. 타락을 하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 구원의 계획도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그리고 인간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이렇게 작용을 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성경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그랬습니다. 사랑은 은혜와 통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의 임무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목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의 두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은혜를 받게 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백성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철저한 말씀 탐구를 통해서 이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만들어주고 그 다음에 은혜를 받고 은혜를 알아 가는데서 자라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갈지어다.’ 그것이 바로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예배로 돌아가서 예배에서 그것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아, 그것이 아니구나!’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힘이 없었는데 살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설교로 넘어가 봅시다. 설교에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머릿속에 지식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설교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요소와 함께 그 평범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서 그 사람을 변화시켜놓는 내적인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힘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력과 영력에 대해서 그런 비유를 했습니다. 면도칼은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자를 대고 자르면 ㎜까지 정확하게 잘라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빗장이 걸려서 굳게 닫혀있는 성문을 부술 수는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큰 나무문이 박혀있다면 그러면 칼처럼 예리하지는 않아도 커다란 도끼가 있어서 그것으로 내려쳐야 문이 부서집니다. 아무리 정확해도 면도칼로 그것을 어떻게 자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설교도 진리의 요소와 은혜의 요소가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심방을 간다고 칩시다. 여기에도 심방을 많이 다니십니까? 심방을 가면 제일 별로 내용이 없는 심방이 그것입니다. 휙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잘 나와야 됩니다.’ 그것도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뭐냐 하면 사교적인 심방입니다. ‘목사님까지 왔다가 갔는데 내가 어떻게 교회를 안 나가나? 또 다음 주에 안 나가면 또 찾아올 텐데.’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서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말씀의 은혜를 끼쳐서 예배가 끝날 때에는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예수를 믿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이것입니다. 계속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 예배 속에 집약되는 것입니다. 집약이 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정확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면 그러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마련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꿈꾸고 있는 예배가 (꿈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낮은 수준이라면 ‘이 예배가 어때서?’ ‘뭐 신앙생활이 별것이라고?’ ‘이렇게 주일에 나와서 교인들 얼굴보고 그리고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가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헌금을 잘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음식하고도 굉장히 많이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 여러 해 전에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갔다 오면서 ‘목사님 선물을 사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선물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래 무엇을 사 오셨느냐고 그러니까 물 두통을 놓고 가는 것입니다. 아니 대체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으면 무슨 기념품을 하나 사오던지 먹을 것을 사오지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지만 물 두통을 두고 갔습니다. 며칠 동안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금강산 샘물’이라고 뚜껑을 따서 한잔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태어나서 여태까지 먹던 물하고는 완전히 다른 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통을 다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집안에 있는 정수기물을 못 마시겠는 것입니다. 맛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집에 있던 세통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금강산 샘물 한번 드셔보십시오. 요즘은 그 맛이 아닐지 모르지만 초창기에는 그랬습니다. 정말 다릅니다. 제가 사실은 어디를 갔느냐하면 한국에 가면 전라도의 장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군산 근체에 장항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집회를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어느 교인이 목사님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그래서 가자고 그랬습니다. ‘목사님 아귀찜 좋아하세요?’ 그래서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제가 한번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귀찜을 먹는데 두 젓가락을 먹는 순간에 서울에서 먹은 아귀찜은 이것을 만들려다가 실패를 했거나 사이비로 배워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에 그 판단이 섰습니다. ‘아 여태까지 지구상에 있는 아귀찜은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데 잘못 배웠거나 아니면 보기는 했는데 능력이 없어서 실패한 것이구나!’ 그 다음부터는 아귀찜이 맛이 없어졌습니다. 마음속에 그때 그 기억이 생생해서 잘 먹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식도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세계도 결국은 식도락은 입맛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면 그러면 신앙은 영의 입맛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론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참으로 단맛을 맛본 사람들, 거기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운명인줄알고 흙탕물을 먹으면서 살던 사람들은 흙탕물을 먹으면서도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진짜 맑은 생수를 먹어본 사람들은 이런 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첫 시간의 문제지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니라고 부정해야 되는 그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는데 평신도가 ‘목사님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 아니죠!’ 여기저기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목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문제는 누가 이야기해야하는 것입니까? 목회자입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정말 교인들이 xx한 것은 교회가 하늘나라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17년 전에 열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교 선생이었고 그런데 나이 마흔에 하나님이 아주 강력한 소명을 주셔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배에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성가대도 없습니다. 나는 성가대를 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개혁주의 예배의 정신에 비추어보면 안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하는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부 다 후대에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단순한 예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광고 안합니다. 딱 예배가 시작되면 묵도, 그 다음에 일어나서 1장 찬송, 신앙고백, 그 다음에 찬송가 3장을 부르고 그 다음에 대표기도, 그 다음에 헌금, 그 다음에 설교, 그 다음에 3장 찬송 하나 그리고 축도로 마칩니다. 아주 심플하고 아무 광고도 없이 그것으로 예배가 끝납니다.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끝났으니까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새로 나온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그때도 이야기 별로 안합니다. 그 다음에 ‘한주간의 소식을 뉴스로 시청하시겠습니다.’ 그러면 교회 뉴스가 텔레비전 뉴스 하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모든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항상 교회에 나올 때에 ‘오늘은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어쩌면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이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까? 우리 예배당의 길이가 72m입니다. 예배당이 깁니다. 기둥이 7개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기둥에 화장지가 하나하나 다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 저에게 물어보셨어요. ‘예배당에 휴지는 왜 갖다놓습니까?’ 어떻게 보면 불경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목사님이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나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이제야 예배당에 휴지를 갖다놓았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교인이 들어가면서 다 빼어 가지고 들어갑니다. 한주에 한통씩 다 없어집니다. 빼가지고 예배시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예배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가끔은 예배를 드렸는데 정말 주님을 만났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감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사님들이 예배에 착념하셔야합니다. 기교로 하지 말고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밴드를 불러오지 말고 심지어는
이 세상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순간이 둘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감격에 빠질 때 그때가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에는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무한대로 순종할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이 말씀만 드리고 첫 번째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목회자가 예배자로서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되었을 때 예배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은 잘 안다니는데 옛날에는 집회를 잘 다녔습니다. 어느 교회를 갔는데 교인들이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저 뒤에서 하얀 양복을 입은 신사양반이 다리를 꼬고 계속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집회를 해달라고 강사를 불렀는데 당신 자신은 의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들어와서 여기를 돌고 여기에서 쏟아져 나와야지 그것이 진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지자의 음성입니다. 여기로 오면서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여기도 물질주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그러는데 물질주의가 들어오면 보통 단단한 신앙이 아니면 와해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예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하나님이 경험하지 않으면 함께 쓰나미에 떠밀려가듯이 그렇게 떠밀려갑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우리들이 정말 골수에 사무치는 정신을 가지고 예배에 목숨을 다해야하는 것입니다. 첫 시간이니까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받겠습니다.
Q)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를 들었고 저도 인터넷으로 목사님 설교 를 들어보고 이제 목사님이 강의하신 내용에 동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 은 것은 아까 목사님께서 우리 목회자가 예배에 관심을 갖고 목숨을 걸고 또 아까 진리의 말씀에 대한 것도 정말 우리가 연구하고 은혜 가운데 한다지만 제일 모자라는 부분이 저인 것 같습니다. 떨어진 다음에 은혜가 없는 것이 목회 현장입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느 때에 설교에 은혜를 받을 때가 있지만 계속 그렇지는 않단 말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이 예배 때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을 이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A)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제 이런 문제가 생겨나니까 교회 자체가 응집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해서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겠다는 것은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올바르지 않는 방식으로 들여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는 그런 것이 없었지요. 여기에서도 금이빨 소동이 일어났습니까? 안 났지요. 한국에서 일어났던 아시죠?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회를 하고나면 이빨이 금이빨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온 교회를 헤집고 다니는 것입니다. 요즘은 또 뭐냐 하면 발을 잡아당기는 것이 유행입니다. 뭐냐 하면 사람을 쓰러뜨리고 눕혀놓으면 발의 길이가 차이가 납니다. 이 발의 길이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게 결국은 우리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데서 나타난다고 그러면서 발을 잡아당깁니다. 치유한다고 그럽니다. 그런 웃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다음 시간에 식사하고 와서 제가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이 종교개혁자들 이후로 이 개혁주의자들의 정통적인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문입니다. 봉해버리셨는데 이것을 잡아당기면 이쪽을 축으로 해서 돌겠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 축이 이렇게 도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여기에 있는 지돌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 속에서 성령에 대한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그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닫는 가운데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에 있어서 중심적인 성령론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가 불과 연료의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식의 내용이 별로 없으면 지푸라기와 같겠지요.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면 한꺼번에 어마어마한 불이 일어나는데 한 트럭을 갖다 쏟아놓아도 한 10분을 타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뭐냐 하면 연료를 계속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Q) 목사님께 다녀왔을 때에 저는 목사로서 예배를 드리면서 안수 받고는 처음 예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여튼 그날에 하도 많이 울어서 진짜 그날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인도하시고 역사하심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배가 이제 말씀대로 생명을 걸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돌아와서 고민을 많이 하고 우리교회의 금년도 목표가 예배의 갱신과 회복입니다. 목사님 교회에는 주보가 없더라고요. 저희교회의 주보는 여기 있지만 채색으로 굉장히 길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예쁩니다. 한눈에 봐도 무슨 교회인지 알 수 있고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돈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집어치웠습니다. 지금 주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배를 위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다가 요즘은 예배에 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목사님이 쓰신 책을 그때 제가 읽고 사왔습니다. 그 책도 여러분 읽었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감격을 받았는데 어떻게 예배를 구체적으로 준비해야하는지 목사로서 예배를 위해서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여러 가지로 준비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나름대로 알고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 있지만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예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는지 질문합니다.
A) 그것은 뭐냐 하면 목사 자신이 자기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비록 자신이 설교하는 것이지만 천국의 이슬로 자신이 흠뻑 젖어서 예배드리기 전보다 예배를 드린 후에 정말 더 좋은 목사가 되어있는 그런 갱신적인 의미입니다. 목사하고 평신도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오늘 은혜를 못 받으면 내일 시궁창에 떨어질 수 있는 것이 목사인데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검은 가운 하나 뒤집어썼다고 무슨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그랬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의식 속에서 항상 중심에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도 공부는 하고 있습니다만 나이가 들고 몸도 안 좋고 정신없이 바쁩니다. 나이로 볼 때는 사역이 꽃필 때가 아닙니까? 그렇기는 한데 기도를 많이 하셔야합니다. 그리고 제가 예배에 대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된 것은 사실은 개척교회를 하기 전에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2년 정도를 교회에서 토요일마다 철야를 했습니다. 다른 목표는 없었고 예배였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온 마음을 기울여야합니다. 예배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회의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제사가 주님께 상달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경우에는 주보를 안 만드니까 교회소식을 소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주보는 주보대로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뉴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실을 만들어서 자기네들이 일주일 동안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취재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신문을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예배시간에는 설교필기도 못하게 합니다. 필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틀 뒤에는 설교 정리한 것이 A4용지 2장으로 인터넷에 올라옵니다. 그래서 지금 한 것이 만약에 설교라면 헌신자들이 그것을 다 정리해서 하루나 늦어도 이틀 뒤에 올라옵니다. 설교 골격이 올라옵니다. 요약이 올라옵니다.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보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매체들이 좋으니까 아이폰 가지고 치면 다 나옵니다. 그런 것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