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대 개강수련회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김경애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편이 언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가 다윗의 말년에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목가적인 풍경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뒤에 보면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라는 구절이나 혹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는 구절은 단순히 목동시절에 당한 자연적인 어려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의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며 겪었던 모든 난관과 시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지는데 모든 히브리 시의 작시법이 그러하듯이 1절이 총론적인 고백이고 그 제목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는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마지막 6절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어떤 삶을 확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시를 모두 설교하기 위해 저의 경험상으로 18시간이 필요한데 저에게 3시간밖에 안주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절중 일부, 내일은 3절중 일부, 마지막 날은 5절중 일부를 설교하는 것으로써 아쉽지만 이 개강수련회에 대하고자합니다.
먼저 1절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시인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고백함으로써 이 위대한 시의 첫 장을 열고 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합니다. 왜 하필이면 시편 23편의 첫 절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 즉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묻는 것은 사소한 질문인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존함이 여러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 존함은 한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뒤에 동사나 또 다른 명사나 형용사를 덧붙여서 하나님을 서술하는 또 다른 별칭으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여호와 닛시’라는 존함들이 바로 그런 서술적인 명칭이 덧붙여진 존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존함이 성경에는 크게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세 가지 하나님의 존함은 제일 먼저 야웨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구약학자들은 여러 갈래로 설명을 하는데 어느 것 하나도 완전히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설명은 없습니다. 어쨌든 아마도 ‘존재하다’라는 단어 ‘하야’라는 히브리동사의 고어형태인 ‘하바’에서부터 파생된 ‘페트로그라마톤’ 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무튼 야웨라는 존함이 있고, 두 번째 이름은 엘로 힘이라고 되어있는 히브리단어 우리말로 하나님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하나님이라는 존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가 주님이라고 번역되는 ‘아도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존함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 혹은 소유권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로 힘이라는 단어는 모든 만물들 위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엘로 힘의 유래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들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알라흐’라는 두려워 떤다는 동사에서 엘로 힘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도토리나무라는 의미를 가진 ‘울’이라는 명사에서 엘로 힘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풍과 모든 비바람을 견디고 꿋꿋이 서있는 그런 강한 힘의 상징으로써 ‘엘’ 이라는 명사가 왔고 그것의 복수가 엘로 힘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엘로 힘은 모든 만물들 위에 강하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야웨라는 단어는 나머지 두 하나님의 존함보다 훨씬 더 존귀한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로 힘과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자주 자유롭게 발언하였지만 야웨라는 단어는 감히 부를 수 없어서 히브리어성경에 쓰기는 야웨라고 쓰고 모음은 아도나이의 모음을 찍고 읽을 때는 야웨라고 쓰인 단어를 주님이라고 읽을 정도로 이것을 구약에서 ‘깨래’와 ‘깨티브’라고 이야기합니다. 쓰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존중될 정도로 야웨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본명이고 아무고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교육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 이름을 한번 부르고는 회개를 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엘로 힘이나 아도나이라는 단어가 아닌 야웨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시는 유명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아직 여호와로는 너희에게 계시하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라는 이 존함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암시해주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모든 이방민족에게도 계시된 이름이었고 주님도 보편적인 존함이었지만 야웨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존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삶의 어떤 상황에서 이것을 노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 노래했든지 하늘에 계신 그 지존하신 분을 야웨라고 부름으로써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언약관계를 상기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인 동시에 또한 자신이 그 하나님과 언약 속으로 부름을 받아 언약백성이 되었고 그럼으로 그 존귀하고 위대하신 분과 가족관계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신앙의 대의가 무엇인지가 잊히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부르기도 하고 농담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는데 만약에 구약의 이스라엘시대 같았으면 모두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기본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무한한 우주와 공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은 이 시간과 모든 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분으로써 온 땅과 만물위에 무한히 크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탁월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앞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를 생각하며 커다란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한하고 완전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떨림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이끌림 그러니까 그 무한한 두려움에서 오는 떨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사랑,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고 싶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끌려 다가가고 싶은 하나님이심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상 밝은 태양을 맨 눈으로 보면서 태양이 무엇인지를 관찰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그분이 하신 일을 보면 대충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매일 매일의 삶에 바빠서 현실에 코 박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가 얼마나 위대한 세계인지 잘 생각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밤하늘의 눈을 들어서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온 어두운 하늘에 촘촘히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밤하늘에 우리가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별들의 수는 6,000개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과학자들은 대충 이 우주의 크기를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서의 길이를 약 150억 광년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학설들을 보면 이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고 초당 약 2,000㎞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우주가 공간이라면 그 우주공간이 끝난 밖은 무엇이기에 팽창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공상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이 무한히 큰 우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우주는 이런 우주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우주가 세포처럼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무한한 우주를 구성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멀티유니버스이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단일한 우주론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과학자들은 약 150억 광년 어떤 과학자들은 960억 광년의 크기의 우주를 상정합니다. 이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대부분 지구나 달이나 수성이나 목성 같은 행성들이 아니라 태양처럼 한 자리에서 찬란하게 불타고 있는 항성들만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항성들의 숫자를 기준으로 수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데 그 모여 있는 무리 큰 한 덩어리를 가리켜서 우리는 은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지구가 속해있는 항성이 태양이고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가 바로 우리 은하계입니다. 우리 은하계는 바람개비 모양으로 되어있고 좌우에 길이가 약 20만광년 정도를 달려가야 하는 길이이고 접시처럼 되어있는데 중심부를 제외한 좌우의 날개부분의 두께가 900광년에서 1000광년 되는 정도 되는 크기이고 그 속에 모인 모든 항성들의 숫자는 약 2000억 개 정도 되고 칼세이건이라는 과학자는 모든 행성들과 항성들의 수를 합할 때 아마도 우리 은하계의 별은 약 4조개 정도 될 것이라고 봅니다. 태양은 이 우주 은하계의 중심으로부터 약 26,000광년 떨어진 왼쪽 하단에 위치해있고 그 작은 태양 하나는 2000억 개의 별들 중 하나이고 그 작은 별 주위를 8개 혹은 9개의 별들이 돌고 있고 그 세 번째별이 지구입니다. 그리고 이 온 우주는 그런 일천억 개 혹은 이천억 개의 별들이 모인 은하들이 약 일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가 모여 있는 것이 이 우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우리 은하계는 약 이천억 개의 항성과 행성까지 포함해 4조개의 별들이 질서 있게 회전하며 도는 동시에 이 4조개의 별 전체가 초속 220㎞로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습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 작은 별들이 500원 동전 안에 들어간다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다른 행성은 서울에서 대구쯤의 거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국자모양으로 되어있는 북두칠성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별이 가까이 보이는 것 같지만 약 800만 광년이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고 하니까 이 우주의 크기와 넓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끝없는 우주의 별들은 최소한의 나이가 40억 살에서 100억 살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별일이 없고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어야 겨우 80년에서 90년을 살다가 사라집니다. 이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를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몇 번 창조하려고 애를 쓰다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겨우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있을지어다.’ 라는 말 한마디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소위 이야기하는 매크로니즘의 세계 그 대우주의 세계를 우리는 잠시 생각했지만 그게 마이크로코스미즘 미시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거시세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과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것 못지않은 수많은 질서와 아름다움이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세계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와 물질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최근 2년 동안에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서 양자역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전문적인 공부는 아니겠지만 신학의 이해를 위해서 양자물리학을 공부했을 때 신학에서 이해될 수 없는 많은 진리들이 사실은 과학 속에 엄청난 자료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의 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설명드릴 수 없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접하고 있는 이 물질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법칙이 미시세계에서는 통용되고 미시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법칙이 초거시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사물들의 이치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지성과 의지가 이 세계 속에 드러난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무한한 우주와 끝없이 펼쳐진 무한대의 규모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부르고 있지만 여호와를 부르고 있는 이 시인은 존재론적으로는 그 하나님과 상대도 될 수 없고 관계조차도 맺을 수 없는 아주 미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존재의 격차는 인간과 벌레사이에 있는 격차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격차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의 위대함은 바로 그가 힘으로는 당나귀 한마리만도 못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육체의 단단함으로는 한줌의 흙덩어리도 안 되지만 그 연약한 인간이 눈을 들어 지성을 통해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의미를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이 세계가 창조된 의미와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치를 깨달으면서 그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신앙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휴머니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모든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커다란 손해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큰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우리에게 경고하시며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정해도 거기에 계시고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도 하나님은 행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지복의 상태는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당신께 순종하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을 경배하라고 말씀하시고, 당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은 결코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를 때 그는 그 마음속에 있은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세계를 당신의 손가락 하나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티끌만도 못한 이 시인이 감히 ‘나의’ 라는 소유격을 사용해서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존재론적인 격차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실 수밖에 없는 그분을 어떻게 자신의 소유격을 사용해서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 청년들과 대화를 하면서 좀 심각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뭐냐 하면 교회에서 설교를 많이 들은 청년들이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니까 세상 철학자들을 찾아가서 상담을 합니다. 그런데 그중의 몇 사람이 아주 탁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벙커에 모아놓고 열강을 하고 상담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하던 청년들이 거기에서 회심을 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웃고 있지만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책도 읽고 몇 명의 철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강의를 열심히 청취하고 있습니다. 어쩜 그렇게 유식하고 달변인지 저는 머리가 숙여집니다. 언제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는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책, 역사자료, 심지어 옛날의 소설, 역사기록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유수로 파헤칩니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친구들은 말은 너무나 능하고 우리라고 하면 미안하고 나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을 읽은 사람들인데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지성의 벼락을 맞아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는 지성의 벼락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교만이 충천한 것입니다. 충천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내가 모든 가치판단의 중심이고 모든 행복의 근거이고 모든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왜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철학을 통해서는 제시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그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신앙 때문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니까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자라면 자기는 무엇이라는 이야기입니까? 사실 이 시편 23편의 양이라는 이야기는 한 단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양을 기른 사람만이 목자가 아닙니다. 소를 치는 사람도 목자고 우리나라처럼 개를 기르는 사람도 목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목자시고 나는 돼지나 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파란 풀밭에 하얀 양 한 마리가 뛰어가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목자시고 늙은 사람들도 자기보고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어린양입니다. 사는 것은 엉터리로 살아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 어린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또 우리들을 수많은 짐승 가운데 꼭 양에다 비유하셨을까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코리안 컨텍스트에서는 양이 매우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법 없이 살 사람을 양이라고 그러는데 그런데 팔레스티안 컨텍스트에서는 부정적이고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이란 이라크 쪽에 사는 사람들의 최대의 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양 같은 놈이랍니다. 양 같은 놈은 머리가 나쁘고 지저분하고 고집이 세고 줏대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중동에 가서 건설할 때 중동사람들이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양 같은 놈이라고 그러면 안 참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양이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양의 한 단면입니다. 또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는데 결국 거기도 보면 연약해서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양으로 묘사됩니다.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순결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양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양이라고 성경이 묘사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각각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의 기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색깔로 변신한다든지, 뿔이 있다든지, 날카로운 이빨이나 다리 등등 심지어는 냄새를 풍겨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는 짐승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아무런 방어 장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양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너희는 처음부터 나를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교만하게 사는 것이 불신의 삶이고 회심은 자기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예전에는 자신이 스스로 교만하여 내 마음대로 나를 주인 삼으며 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겠습니다. 라는 표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나는 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지혜가 부족하니 당신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라는 뜻이고, 간절한 기도는 내가 내 힘으로 살수 없으니 나를 붙들어 인도해주십시오. 라는 의뢰의 행동이고, 그리고 복종과 순종은 나의 뜻을 날마다 꺾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도 진정한 행복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대의는 하나님께 대한 어린아이 같은 의존에 있는 것입니다.
총장님이 지금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믿지 않지만 사례금이 적어서 교회봉사를 하지 않는다. 교회도 그러면 안 되지 사례금을 많이 주어야지 왜 조금 줍니까? 아니 그러니까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순교할 때는 순교를 하더라도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교회도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자신들이 조금 덜 먹더라도 전도사님들은 생활할 수 있게 해주어야합니다. 한이 맺혀서 그럽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저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가난 그러면 자신 있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신학교시절을 지나서 자신이 있습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5만원인데 교회에서 사례금을 7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몇 번을 쓰러졌는데 왜 그랬는가 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면 그 고통도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1년에 한 번씩 메뚜기 떼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면 안 됩니다. 평신도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목회자가 그러면 됩니까? 그저 한번 옮기면 그냥 3년이고 4년이고 주님이 가라고 하실 때까지 그냥 거기에 엎드려서 먹든 굶든 헌신하고 충성하고 살아야지 그 속에서 연단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신앙의 대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이고 또 한 번은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는 순간입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순간은 뭐냐 하면 독립심을 파괴하는 때입니다. 결국은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사는 잘못된 독립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기도가 가장 잘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할 때에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고 싶을 그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시인은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앙을 통해서 그렇게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셨는데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맘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하나님은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형통한 것을 좋아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갖도록 매일 매일 노력해야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뒷 절을 설교하고 마치겠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라는 것은 결국은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이 시인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말들은 카우보이들이 총을 쏘고 채찍질을 하면서 인도하지만 양은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목자들이 목소리를 들려주면 양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목자의 인도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언제나 인격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격적인 신앙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억압과 폭력, 강제 이런 것이 아니라 구김살 없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지성으로 알고 마음의 감화를 받아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자기를 복종하는 그런 인격적인 복종과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의 성장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신학공부 자체는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쳐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자신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지식과 객관적인 신학이라는 학문의 지식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신앙은 학문에 의해 굳게 되고 우리의 학문은 신앙에 의해 튼튼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라는 사람이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고 믿기 위해서 나는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열렬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탁월하게 학문에 전념해야합니다. 그래서 책상에서 공부를 하느라고 팔꿈치가 닳고 강대에서 엎드려 기도하느라고 무릎이 닳고 이 두 부위가 닳을 정도로 경건과 학문에 동시에 몰입함으로써 신앙이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들이 종종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약점까지도 용납하시면서 그 약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어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목회하던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지방에서 올라온 똑똑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일류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지방에서 올라온 한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이 청년은 당시 서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태어나서 본 시험 중에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었답니다. 운전면허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시험에 떨어졌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군대에 가서 그때에는 3년씩 고생을 했는데 무슨 시험을 보니까 중위를 달고 가서 6개월 만에 제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중등부실 저쪽에서 어느 집사님과 이야기를 한참 길게 이야기를 하기에 ‘왜 그래?’ 그랬더니 ‘전도사님 아무개가 하도 공부를 안 해서 저 집사님이 속이 상해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청년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사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아니 어떻게 공부를 못할 수가 있어요? 아니 일부로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안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할까요?’ 이해가 안 된다는데 나는 이해가 잘되는데 말입니다. 자기는 고3때도 8시간씩 잤답니다. 학원은 근처도 안가고 정말 공부를 그렇게 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아니 그게 전도사님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못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 잘났다.’ 그리고는 두 달 정도 지났는데 안색이 아주 안 좋아 보여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전도사님 나는 살맛이 안 납니다.’ ‘왜?’ ‘창피해서 말하기도 싫어요.’ ‘왜?’ 하도 공부만해서 체력이 저하되는 것 같아서 그 당시에는 테니스가 유행이었는데 학교 근처에 있는 테니스 학원에를 들어갔답니다. 선생님께 테니스를 배우는데 일주일을 하는데 정말 안 되더랍니다. 어느 날은 코치가 공을 집어던지면서 신경질을 내면서 야단을 치더랍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못할 수 있느냐? 여기서 7년을 가르쳤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면서 왜 못하느냐고 그러더랍니다. 여기 책에 다 나오고 내가 다 가르쳐주는데 왜 못하느냐고 그랬답니다. 그때 생전 처음으로 ‘아, 공부도 못할 수 있겠구나! 될 것 같은데 안 될 수도 있겠구나!’ 깨달았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다 획일적으로 평가합니다. ‘이 전도사는 일을 더 잘해. 이 학생은 공부를 더 잘해. 심지어는 이 학생은 저 학생보다 더 예쁘고 저 학생은 이학생보다 더 부자라네 얘는 똑같이 들어왔는데 똑같이 가르쳐도 공부를 잘하고 얘는 공부를 못해! 똑같은 악기를 가르쳤는데 얘는 만날 낑낑거리는 소리만 내고 얘는 제법 연주를 하네!’ 이렇게 다 사람들은 각자 우리를 획일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고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는 우리의 약함이나 부족함 우리의 결함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모든 상처와 문제까지도 이해하시면서 그들을 붙들어주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모든 만물위에 높고 뛰어난 위대하신 하나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나타나셔서 나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이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고 이것을 가지고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았으니 누군가를 위해서 이것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은 오늘 여기에 왜 계십니까? 그리고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같은 죄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 나 같은 죄인을 승복시키시고 기쁨으로 당신 앞에 부르시는 은혜의 하나님께 깊이 설복된 가운데 인격적인 신앙으로 주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매일 매일 섬기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정말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과 보람 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개강수련회에서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