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신대원 개강수련회 (2012. 3. 6)
목회자의 신앙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 1:80)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앞길을 예비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는 구약으로 치면 마지막 선지자였고 신약으로 치면 신약과 구약 사이를 잇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끝 말라기서에서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끝나고 신약 복음서의 기록이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상한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으로 알려진 이 사람은 예수의 오시는 앞길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일생을 살았는지는 성경에 간단한 기록들로 나타납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선지자로 등장을 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몇 편의 설교를 남기고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삶도 목이 잘린 채 어린 여아의 소반에 머리가 올려져 선물로 바쳐진 비참한 인생을 마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손가락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광야에 울려 퍼지는 고고한 선포를 듣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정적의 관계에 있던 헤롯까지도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했고, 완악했던 유대인들조차도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어놓은 위대한 말씀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동안 외로운 광야에서 연단된 그의 영성을 통해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신학공부를 한 사람 치고 허접하게 인생을 살면서 이 교회에서 쓸데없다고 발에 치이고 저 교회에서 발에 치이다가 비굴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신학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사람의 영광과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니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소명을 받았다면 이 길에서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신앙적인 야심이 우리에게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큰 교회를 해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겠다는 세속적인 갈망이 아니더라도, 있으나마나한 물위의 거품처럼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상품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두고두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일하셨던 위대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작품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로 태어나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남들과 똑같은 과정을 밟아서는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세례 요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몇 편의 설교를 위해서 가혹하게 긴 30여년의 세월 동안을 외로운 광야에서 준비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아마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광야에 보내졌고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돌봄을 받으며 광야의 거친 모래바람을 친구삼아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털옷을 입고 추위를 피하며 자신의 일생을 준비해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II. 역사와 사람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사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역사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꼭짓점 삼아서 줄을 이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역사입니다. 물론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고, 새로운 시대이니 하나님은 예전과 같지 않은 다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기이한 성력의 능력,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하고 밝은 빛, 놀라운 중생과 회심의 능력, 말씀의 탁월한 능력은 인간이 만든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뚜렷하고 명쾌한 이해를 가져야합니다.
A. 성경의 역사
먼저 성경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세계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본떠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 유일한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은 탁월한 지성과 의지의 올곧음을 가지고 모든 자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짧은 시간에 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의 지성의 능력은 그야말로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여 죄가 들어옵니다. 모든 창조의 세계에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광채를 어둡게 만드는 저주가 내리고,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은 영적으로는 철저한 어두움이, 지적으로는 철저한 눈멂이, 의지에 있어서는 충동적이고 자기의 지성에 굴복하지 않는 오만함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무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놀라운 능력으로 세계를 구원하실 계획을 펼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책속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타락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죄와 타락을 통하여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보여주실 수 없었을 찬란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의 빛을 세계 속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타락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이 세계를 하나님의 지혜로 경륜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역사는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브라함이라는 중요한 선택받은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본격적인 계시가 주어지기 시작하고 그의 가문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전수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시대까지 내려갔다가 모든 계시들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높은 산이 하나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모세라는 인물의 산이었습니다. 그는 불세출의 지도자였고 영적인 인물이었고 세상의 학문에도 탁월했던 카리스마를 가진 놀라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구약성경 중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다섯 권을 저술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주셨던 위대한 계시들을 해석합니다. 이것을 노래한 것이 시편이며 이것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한 글들이 바로 선지자들의 선지서입니다.
모세가 지나고 모세만은 못하지만 찬란한 햇빛처럼 기적의 중요성보다는 믿음의 역사성을 보여줬던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후부터 그 산은 급격히 높은 산에서 내리 깎아내리며 낮은 골짜기를 형성하면서 별 볼일 없는 시대를 지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또 한 번 아주 중요한 인물이 높은 산처럼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직임적인 선지자를 도입하고 왕의 제도를 도입한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셔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또한 신구약을 통틀어 높은 준봉을 이루는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한 인물입니다. 그 후 높은 산은 몇 세기를 큰 봉우리 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이사야라는 좀 높은 봉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에 자잘한 봉우리들이 각각 자기의 특색을 나타내며 산맥을 형성하게 되면서 결국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산맥에는 비할 수 없는 태양과 같은 분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세례 요한 다음으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이 산맥과 산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산중의 하나라기보다는 무든 산 위에 높이 떠있는 태양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B. 교회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신 후 사도들이 등장하게 되고 높은 봉우리를 형성하며 달리게 됩니다. 이때 모든 봉우리들이 히말라야라면 에베레스트 같은 높은 산이 하나 떠올라 구약에 나타난 모세나 다윗과 함께 어깨를 겨루는 높은 산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가요, 목회자요, 교회개척자요, 철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절반이상을 저술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이제 산맥이 조금 낮아지는가 싶더니 계속 내려갑니다. 이 후 속사도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고 고만고만한 높이에서 그 시대가 끝나고 다시 봉우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오리겐(Origenes, 185-254)이나 이레네우스(Irenaeus115-202) 같은 교부들이 등장하게 되고,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라는 매우 중요한 교부 한사람이 높은 산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오류와 진리를 한꺼번에 용암처럼 토해놓는 화산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높은 산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남긴 중요한 저작들은 개혁신학, 보편교회 신학의 중요한 기초석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서 그가 얼마나 대단히 높은 산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높은 산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고만고만한 교부들이 이어집니다. 그 후 기독교 역사에서 최대로 높은 산과 같은 높은 봉우리 하나가 나타납니다. 누구도 그 산맥을 바라보는 일 없이는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심지어 서구 역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3-430)입니다.
제 생애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네 명의 인물 중 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대단한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책을 읽은 다음 어느 책의 저자도 이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라고 고백을 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의 신학과 철학이 오늘날 위협을 받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튼튼합니다. 시간과 선과 악에 대한 사유같은 주제들은 아직까지도 이 사람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없고, 종말이 오는 날까지 이 사람에게 주신 계시의 빛에 신세를 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도 그 비판하는 방법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배웠다.’라고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중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그만한 학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45/676-749)이라든지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5-1160),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가 나타납니다.
11세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에 영향을 끼쳤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등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했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본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기독교 사상의 집적을 이루었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은 아주 순결한 생활을 지향하는 경건한 신학자였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주님만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공부만 해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유혹 하라고 예쁜 여자를 공부방에 들여보냈습니다. 예쁜 여자가 들어와서 그를 유혹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난로로 갔습니다. 그는 난로를 열고 불타고 있는 장작개비를 꺼내서 ‘마귀야 물러가라!’로 외쳤고 그 여자는 쫓겨났습니다. 그리고는 벽에다가 십자가를 그리고 ‘저는 주님만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12세기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등장합니다. 또한 루터가 이뤄 놓은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고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등장합니다.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열립니다. 천재적인 학문의 역량과 깊은 경건을 소유한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교개혁 1, 2세대가 굵은 붓으로 그린 커다란 종교개혁의 대의를 미세한 붓으로 상세하게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겨놓습니다.
저는 6, 7년 전쯤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눈을 뜨고 받았던 충격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너무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개신교도인 것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는 개혁파의 교인인 것에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6세기에는 커다란 종교개혁의 산맥이 형성되면서 화란, 영국, 스위스, 독일로 퍼지면서 거대한 학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때에 발전된 신학의 깊이와 광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때 또한 저의 학문적 스승 중 한분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 등장합니다. 저는 존 오웬의 저작을 20년 이상 탐독했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손님이 오실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 열린 교회 담임목사는 존 오웬 목사이고 저는 부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우리 담임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 정도로 존경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위대한 청교도도 영국으로 뻗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곁가지 중에서 위대한 인물 중 한사람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만난 다음부터는 청교도에 대한 재미가 시들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탁월한 사람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W. Perkins, 1558-1602), 에드워드 레이, 리처드 백스터, 토마스 구딘, 리처드 십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 몇을 제외하면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 대륙의 정통주의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17세기에 존 오웬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성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변증신학강요』를 쓴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 높은 산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인물들이 계속해서 다시 낮은 산을 그리면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18세기에 와서는 급격하게 산들이 낮아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그 산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이상한 언덕들이 나타나는데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산맥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는가 싶더니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미국대륙에서 역사상 아우구스티누스와도 겨룰만한 위대한 사상가 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라는 18세기의 인물입니다. 19세기에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20세기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등등의 인물들이 나타나고 또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같은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개혁주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이제 자잘한 신학자들과 유구한 개혁신학의 전통을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작은 산을 이루면서 살아가며, 우리도 그 중 한 구릉과 같은 세대입니다.
이렇게 인간창조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달려온 이유는 하나를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역사의 중심은 구원의 역사이고 구원역사의 핵심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인물들이었고, 이들의 출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하는 사실에는 추호도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우시고 만드시는 방법은 나무로 조각을 하거나 돌로 구멍을 파고 두드려서 석상을 만드는 것 같은 방법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보면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에 대하여 신실한 믿음과 신앙과 인격으로 반응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훌륭한 인물들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결정되어 태어난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결정론적인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속에서 관계를 맺으시며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국은 누구의 것인가?’ 정문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만 들어오는 곳’ 이렇게 쓰여 있고 들어가서 뒤를 돌아보면 ‘회개하고 믿은 자들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두 개의 간판이 천국에 써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철학적인 이야기를 위트 있게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준비해갈 때, 역사 속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III. 목회자의 소명
그렇다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 목회자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제가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고 어느 신학교에서 면접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나이가 좀 많은 학생이 신대원 과정에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냈습니다. 면접을 할 때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소명이었습니다. “당신은 왜 그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오시려고 합니까?” 그랬더니 목회를 하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목회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였습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대답하기를 “교수님, 저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저는 오직 효도할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감적으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저에게는 80세 넘은 노모가 계십니다. 그분의 평생소원이 제가 목사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자식을 낳은 보람을 안겨드리려면 유언과 같은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시고 그 할머니를 신학교에 보내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게 “왜 신학교에 오시려고 합니까?” “목사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누가 압니까?” “우리 집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우리 집사람이 금식기도를 했는데 주님이 네 남편은 소명자이니 신학교를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에 가시고 부인을 보내십시오. 제가 보기에는 부인이 소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사업에 실패한 것, 대학에 떨어진 것, 취업이 안 된 것, 결혼을 하려다가 실패한 것, 심지어는 결혼하고 이혼한 것, 이런 것이 어떻게 소명의 증거가 됩니까? 이런 허접한데서 소명의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도구로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명을 간증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신학의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혼내시지 않는 한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A. 그리스도와의 만남
소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소명의 주가 되어야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사건
소명은 사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의 예수는 이단 중 괴수요, 그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을 신성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기치 못했던 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사도 바울을 짓눌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의 판단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인간이 또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구약에 보면 모세나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거나 죽음 후에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시 살리셨다고 믿는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고 부활했습니까? 죽은 것도 사실이고 부활한 것도 사실이라면 둘 사이에서 신적인 조화가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을 받으셔서 죽으신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그는 의로우시고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신 사실과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지성의 벼락을 맞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세윤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신적인 강제력’의 경험입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이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강제력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나는 이제 복음을 온 천하 만민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바울의 가슴속에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신학, 목회, 선교, 모든 사역의 핵심이며 진원지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세계 속에 밀려들어 옵니다.
밀려들어와서 모든 관심이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로 집약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한 후, 다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아름답게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자신이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다 버리고 오직 그 일에만 나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바쳐 영혼을 구원하고, 참다운 인생의 길이 어딘지 몰라서 방황하는 이전의 나 같은 사람들을 이끌고 싶은 신적인 강제력이 내 안에 역사할 때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것 없이 신학을 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래서 소명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그 정도까지 말씀하시면 내게 소명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결하고 더러운 일은 소명 없이 신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소명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도 다른 데로 갈 데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밥을 먹어야합니다. 그것이 가장 구질구질한 인생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욕하는 것 가운데 제일 더러운 욕이 있답니다. ‘이 자식아, 너 그따위로 살려면 차라리 성령 받지 말고 목회질이나 해라.’ 이것이 미국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욕설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책을 쓴 이후로 20년 동안 약 200명의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전과를 시키거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재수를 하거나, 아니면 졸업을 해서 자동차 회사에 취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일이 교회를 위해서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교도들은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는 교회의 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명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십시오. 하나님께 옵션을 드리십시오. 기도하다가 나를 죽이시던지, 소명이 있다고 확인을 해주시던지, 소명이 없다고 확인을 하여 세속적인 직업으로 돌아가게 하시던지 어느 길을 가든지 살아있는 한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2. 아가페(Agape)와 까리따스(Caritas)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아가페’(Agape)와 ‘까리따스’(Caritas)에 대한 경험이 생겨나게 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예수를 믿어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충분히 행복한데 더 행복하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동기를 가지고는 누구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했고 고등학교시절부터 졸업한 이후까지 정말 생애에서 덧없는 방황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전율이 들 정도로 두려웠습니다. 길거리에 피어있는 풀 한포기와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열아홉이었습니다. 자살할 결심도 여러 번 하고 실연도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나에게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책읽기는 저에게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읽었던 책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빠져들어 가지만, 빠져들 때는 행복하고 박수를 치고 싶은데 다 읽으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인간으로 아침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됩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의 빛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상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관점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게 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I was blind but now I see.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며, 헤세드에 대한 경험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사랑에 대한 나의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가 혼자 살 수 없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 에로스의 사랑이었다면, 에로스의 사랑이 도구가 되어 믿음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게 되니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저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을 ‘지순애(至純愛)’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은혜의 작용이 가져단 준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으로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행할 의무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게 되면 사랑이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되는데, 이 사랑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할 모든 대상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아마레데움’ 뿐만 아니라 ‘아마레데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의 지평의 융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로부터 나와서 모든 창조세계를 휘돌고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은 그 흐름 속에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치와 존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중심이시고, 나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세계를 통하여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우주적인 회귀 속에 있는 한 수단일 뿐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나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흐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회심하기 전에는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 살았는데,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펼치시고 마지막은 모든 사람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사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잊혀지고 하나님만이 온 땅과 우주에 가득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는 이 사랑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자체가 둘로 나눠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해야 되는 사랑이나 모두 하나의 원천에서 나와서 하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인 대상을 통하여 흘러가고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우주적인 순환의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은 잊혀져도 주님은 기억이 되고 자신은 낮아져도 하나님은 높아지시기를 원하는 거룩한 갈망들이 가득히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B. 소명 없는 신학공부
소명이 없이 신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이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저의 머리를 철퇴로 때리는 것과 같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소명 없이 신학교에 갔던 어떤 비참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고 마지막에는 신비주의와 영매술에 빠져서 비참한 생으로 마감을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사람이 ‘나는 떡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신학교에서는 떡 대신 저에게 돌을 주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머리 좋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가서 자유주의 신학을 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분이 피로 세우신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알고, 그 속에서 한 피붙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올바른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되는 것을 안 사람들은 결코 그런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빠질 수 없습니다. 신앙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와서 독초와 같은 신학을 후배들에게 먹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그나마 남아있었던 경건의 싹을 자르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그 위에 소금을 뿌려버려서 죽여 버립니다. 그런 신학에는 경건의 향취가 없습니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라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는 자신의 책속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라고 못 박았습니다. 결국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는 체계적으로 공부를 못하면 인간적인 세속주의에 흐르게 되고, 공부를 잘하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게 됩니다.
화란으로 유학을 간 제자에게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이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 대부분이 ‘어떤 책을 구해 달라. 어떤 책의 복사를 해달라’는 개인적인 부탁이었습니다. 그러나 편지마다 빼놓지 않고 쓰신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기도 많이 하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소명이 없다면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학교에서 밥을 먹는 것이나 입시학원에서 가르쳐서 밥을 먹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소명이 없는데 언변이 좋아서 어떤 교회를 맡아서 갔다고 칩시다. 소명이 없는데 회사를 경영해서 먹고사는 것이나 교회를 운영해서 먹고사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소명이 없으면 신학공부를 계속하면 안됩니다.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 학문을 하는 주체보다 무한히 큽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학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다른 어떤 학문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학문의 목적 자체가 학문이 아니라 소명이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은 사람에게 신학은 아무 쓸모없는 개발에 편자입니다. 편자는 말발에 다는 굽이고 개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말의 발에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저는 제 신학자의 양심으로, 목회자의 양심으로 이야기 합니다. 신학생 중에는 거듭남이 신뢰되지 않은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소명은 나중의 문제입니다. 소명은 비중생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중생자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중생이 신뢰가 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인데도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은 매우 불행해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가장 좋은 길은 모두 소명을 받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면 소명이 없는 사람들은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소명이 있을 때까지 개교회에 가서 열렬하게 평신도로 봉사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결심하면서 다시 세워야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리가 아닌 이유는 소명을 받으면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도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서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열렬하게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정직하고 올곧은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서 치열하게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시시한 소명은 없습니다.
소명을 받으면 마음에 불타는 것이 있어서 자기가 소명을 받은 것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뛰어야합니다. 소명은 욕망에 의해 입증이 됩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 사람의 욕망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서있을 때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윤리적인 문제로 욕을 먹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이유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목회자의 소명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IV. 소명의 불변성과 가변성
A. 과거적 소명의 한계
그렇다면 소명은 불변하는 것입니까? 가변적인 것입니까? 소명의 불변성과 가변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 과거적 소명의 유익
먼저 과거의 소명의 유익을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는 것’(빌 3:10)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 그 한길로 달려가는 것이 이 사람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마지막 단계는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교리가 나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께 붙잡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하나니’ 라는 신앙 고백이 생겼고, 그것이 푯대가 됐습니다. 앞의 푯대가 있기 위해서는 뒤의 푯대가 분명해야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유혹에 흔들리며 침체에 빠질 때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주셔서 죽든지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 나를 온전히 바치도록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며 신학을 하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소명을 받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소명을 받을 때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청년집사였습니다. 그 때 영혼들이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께 어린 영혼들에게 은혜를 달라고 일주일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5일째 되는 날 교회에 가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5일 동안 금식을 했으니 많이 지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뜨거운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가슴이 깊이 녹아들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이제 당신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도전하셨던 것을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소명의 순간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며 아주 유익합니다.
2. 과거적 소명의 한계
a. 지속적 헌신을 보장하지 않음
그러나 과거적 소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명 자체가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혹시 교회에서 비리를 저지르고 나쁜 일을 해서 비난의 표적이 되면 저 사람은 원래부터 소명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젊은 시절에 치열하게 기도생활을 하고 소명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존경하지 않는 목회선배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뺀질거리고 숙제도 안내고 컨닝이나 했을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얼굴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소명은 중요한 헌신의 동기이지만 지속적인 헌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받아도 쓰레기같이 살 수 있습니다.
b. 지속적인 성화를 보장하지 않음
둘째는 지속적인 성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가 되면 우주공간에 로켓을 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주공간에 로켓을 쏘면 무중력상태로 들어갑니다. 만약 시속 일만㎞로 튕겨나갔다면 계속 일만㎞로 날아갑니다. 주위에 어떤 커다란 위성을 만나지 않는한 똑같은 등속으로 계속 날아갑니다. 소명을 감동적으로 받으면 자동 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셨을 때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했을 때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바울도 소명을 확실히 받았음에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희랍어로 갈라디아서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보면 현재완료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 없이는 성화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c. 지속적 성장을 보장하지 않음
셋째는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 3학년쯤 되면 1학년 때 설교했던 원고를 보면서 얼굴이 붉어져야합니다. ‘그래도 그때가 순수했어’라는 태도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이런 내용으로 설교를 했을까? 정말 부끄럽다.’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목회를 할수록 부패하고 더러워질 상황과 기회들이 우리에게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성숙해 가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 와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을 심방할 때마다 그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에 온지 얼마나 됐습니까?” “5년 됐습니다.” “그렇다면 5년 전에 당신을 지금의 당신이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변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힘적인’(physical) 방식과 ‘설득적인’(persuasive)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힘적인 방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경향성을 심으시는 것인데, 중생시에 이러한 일이 우리의 영혼에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신령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new sense)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설득적인 방식은 도덕적인 설득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날마다 내 안에 추한 것을 발견하여 자기 사랑을 버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는 자료들의 정수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새로운 감각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면서 예전보다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초월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도록 개인적인 영적 부흥과 지성의 설득을 동시에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초월적 사랑의 경험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최근에 저는 개혁주의의 저명한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앨빈 플란팅가’의 자전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유명한 철학자이고 여러분이 아는 젤레마의 제자입니다. 그가 처음 기독교철학을 시작했을 때 철학계안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사역을 30년 이상 했습니다. 현재는 미국의 철학자 가운데 네 명 중 한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자전적인 글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산이 너무 좋았답니다. 그것도 혼자 가기를 그렇게 좋아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산 아래에 텐트를 치고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산을 올랐습니다. 높은 산을 오르는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산과 하늘 위에 가득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들었습니다. 마치 1733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숲속의 체험과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두 번 했다고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처음에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예일 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숲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라는 찬송시를 묵상하면서 숲속을 산책하다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찬란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한 것을 경험합니다. 마치 시편에서 시인 다윗이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엎드러져 하나님은 탁월하게 아름다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데 자신은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간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어느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첫 시간에 나이 많이 드신 교수님이 오셔서 “내가 신학을 하는 여러분에게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집적거리지 말고 한 사람을 깊이 공부해서 일평생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그 사람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럴만한 인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추천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무척 감동을 받고 교수님의 말과 같이 그대로 한 착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존 파이퍼 목사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영적인 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이렇게 초월적인 방법으로 주어지기도하고 설득적인 방법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점점 거룩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20세기 개혁주의의 설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설교자들 중 마틴 로이드 존스를 제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니서전트라는 인물이 로이드 존스에 대한 평전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존스』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권의 로이드 존스 박사님의 평전을 읽었지만 토니서전트의 책이 결정판이었습니다. 토니서전트는 실제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깊이 흠모했고 그의 밑에서 부목사도 하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수천 편 들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전에 있어서는 가장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글속에서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장중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은 바로 ‘설교자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는 제발 무슨 훈련학교, 뭐 배우는 학교 이런 곳에 다니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나중에 졸업을 하고 나서 6개월이면 다 섭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를 통해 이론적인 토대를 탄탄하게 갖추는 것입니다. 지금이 기초를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시작하고 나면 책을 읽지 않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 읽어서 수요예배에 쓸 수 있는 책이나 읽지 기초를 놓는 책들은 읽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3000만원어치의 책을 샀습니다. 어떤 책은 2년에 걸쳐 집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잘 팔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달 만에 슬슬 쓴 책은 수십만 부가 팔립니다. 그중의 하나가『게으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게으름』은 월요일에 보면 수요예배 때 쓸 수 있는 그런 책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출간된 『개념 없음』도 잘 팔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개념 없음2”를 내 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책을 읽으면서 탄탄하게 이론의 토대를 쌓아야 합니다. 철학은 평생 부전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시작해서 가능하면 동양철학과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까지는 아니어도 대강의 내용들을 파악해서 가능하면 현대 비겐슈타인 이후로 전개되고 있는 분석철학까지도 대략의 골격에 대해서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현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입니다. 그러면서 공부에 역량을 길러가야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많이 듣던 이야기입니다. 신학교 1학년에 들어오면 부흥사랍니다. 요즘은 부흥사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매우 열렬하다는 의미입니다. 2학년쯤 가면 목사의 수준 정도가 된답니다. 목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2학년 때 목사라고 할까요? 그리고 3학년쯤 되면 장로의 수준이 된답니다. 졸업하고 나가면 집사의 수준이 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쯤 되면 평신도의 수준이 된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받고 나서는 불신자의 수준이 된답니다. 이것은 결코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며 영적으로 성장해 가십시오. 그렇게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B. 소명을 유지하는 길
1. 소명의 유지: 지식 + 사랑
마지막으로 소명을 유지하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 소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사랑이 둘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자들은 지식에서 분리되지 않은 사랑,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은 지식 이 두 가지를 끝까지 붙들고 꿈꾸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지식은 경건과 결혼한다.’ 지식과 경건의 결혼, 결합 이것이 바로 신학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열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학교에 살면서 학생을 소그룹으로 모아 성경공부를 하고 소위 Precisionism이라고 하는 엄격주의를 도입해서 할 수 있는 한 성경대로 학생들이 살도록 철저하게 지도했습니다. 우리가 소그룹공부를 경건주의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경건주의가 그의 제자들의 영향이 종자씨가 되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학생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으며 학생들과 함께 일생을 같이 했습니다. 그는 이런 신학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신학자는 신학만 공부하고 신학을 하기 싫은 사람은 목회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기 싫은 사람은 혹은 목회를 못하는 사람은 학자가 되고 공부에 재능이 없거나 하기 싫은 사람은 목사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개혁주의의 전통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미국을 기준으로해서 18세기말 이후에 생겨난 현상들입니다. 원래 개혁주의 안에서는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에 소명이 있다고 하는데 의대에 들어갈 실력이 안 된다면 그 소명은 가짜입니다. 똑같이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사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져서 20세기 초반 올드 프린스턴 시절만 해도 걸출한 신학자들의 명단과 걸출한 설교자들의 명단이 일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설교 속에서 신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에 있어서 한 번도 신학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차피 신학을 따라서 설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삽시다. 북한동포를 도웁시다. 노숙자에게 밥을 줍시다.” 이렇게 설교하는데 거기에 무슨 흠을 잡겠습니까? “신학이 이렇다!”라고 또렷하게 이야기해야함에도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교파의 특성들도 다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고신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온누리에서 하는 것처럼 찬양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를 설명해 보십시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왜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붙들어야하는 것이 바로 지식과 사랑입니다. 물론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풀지 못하고 인생이 끝나고 말 것입니다.
저는 30대 중반에 신학의 모든 분야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통합을 이루는지를 영적으로 경험했고 40대 후반에는 모든 학문이 어떻게 결합을 이루면서 이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를 정말 놀라운 은혜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평생에 눈을 못 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뿐만 아니라 인접학문들 인문학, 자연과학, 이런 것들을 공부해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폭넓은 안목을 갖도록 부지런히 독서를 해야 합니다. 공부는 하지도 않고 숙제를 내주면 친구 것 베끼기나 하고 그리고 책 한권 레포트를 내라고 하면 어차피 교수님들이 다 못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첫 페이지 10장만 읽고 소설처럼 써서 내고 점수나 받고 그저 낙제를 안 하고 B, C나 받으면 된다고 하면서 학교를 다니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혼란한 상황 가운데 데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거리는 늘 최루탄이 날아다녔습니다. 학교사태 때문에 데모를 하고나면 국가사태가 있고 그 사태가 좀 잠잠해지면 다시 학교사태가 일어나고 그렇게 반복되었습니다. 모든 책들이 앞 30페이지만 줄이 그어져 있고 나머지는 전부 다 레포트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따라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3학년이 되어도 나중에는 조직신학의 순서도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기꾼이 됩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지식이 나오고 모든 지식은 다시 하나님께로 회귀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 안목은 신학만을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이런 모든 책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되 항상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어야합니다. 성경과 신학이 있어야합니다.
2. 소명의 영역: 신앙
그래서 소명의 영역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공부를 좀 못해도 소명이 살아있습니다. 학교를 갈 때도 그냥 못갑니다. 전도지를 들고 지하철에 가서 역무원들에게 끌어내림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믿으라고 계속 전합니다. 교회에 가서 어린 영혼들에게 설교를 하다가도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우리와 신학적인 입장은 다르지만, 찰스 피니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출근길에 맨해튼 거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답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은 지옥에 갈텐데 나는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울었답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학교든, 집이든, 교회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소명은 신앙에서 유지가 됩니다.
a. 신앙의 질료-신학의 형상
신학과 신앙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빵의 재료라면, 신학은 그 빵을 빚어내는 제빵사의 손입니다. 신앙은 질료이고 신학은 형상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불특정하고 설명하기 힘든 신앙적인 체험들이 신학에 의해서 올바르게 빚어질 때 그것은 아름다운 하나님에 관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빵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제빵 기술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빵을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죽이 있어야 빚을 것이 아닙니까? 설교시간에 어디서 주워들은 생명 없는 이야기나 하고 아침마당이나 오프라윈프리 쇼에 나올법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떠들면서 주일 오전 마당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생생한 신앙체험은 합니다. 기도시간에 주님을 만나서 너무 뜨겁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마음이 막 불타오릅니다. 그런데 신학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공상을 하면서 자기 갈 길을 막 가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서 엄청나게 선교를 했는데 지금 문제가 무엇이냐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자생적인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체험은 많은데 그것을 빚어낼 수 있는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상상 속에 빠져 자기 스스로에게 ‘내가 주님이 직접 보낸 사도다.’ 그러면서 ‘내가 너를 목사로 임명하노라.’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바로 잡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b. Stigmata tou Jesu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면서 살려고 하는 비장한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그 몸부림은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의 흔적(stigmata tou Jesu)’입니다.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도다.’ 흔적은 당신의 노예라는 표시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예수의 소유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 이렇게 예수께 붙잡힌바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에게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대들이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신앙생활만 잘하면 다 용서한다. 내가 항상 괴로워하는 것은 ‘저 인간이 신앙생활을 안 하는구나!’ 목회자인데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합니다.
c. 신뢰할 수 없는 사역자
우리들이 신뢰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진지한 설교의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본 적이 없는 당회장, 간절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기도 인도자, 간절한 전도자였던 적이 없는 선교사,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평생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일학년으로 들어온 신입생들이 있습니다. 첫 학기에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그럴 때 보면 사람이 인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 녀석은 왜 저렇게 껄렁껄렁 하지?’ 30년 후에도 똑같이 그렇게 삽니다. ‘쟤는 처음부터 목회할 생각이 없나봐, 공부해서 교수할 거라고 하는데 목회가 진짜 소명일까?’ 그 친구는 지금 출판사 2층에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목회의 소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뭐든지 한 자리 해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책위원이든지 과대표이든지 내가 맡아야 한다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총회 언저리에서 계속 돌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공부시간에 계속 엎드려 자는 애들이 있습니다. 말을 시키면 ‘주님이 어제 내게 말씀하셨는데…’하고 말문을 엽니다. 그러는 애들은 지금도 그렇게 목회를 합니다. 그때 말은 없지만 진실해 보이고 성실해 보였던 사람들은 지금 어느 교회든 맡아서 목회를 합니다. 저희 때 60명의 M.div를 뽑을 때 1,200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선택된 사람들이었지요. 그 당시 우리 클래스에 70명 정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입학한지 30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그 70명 중 목사가 된 다음 변하여 새사람이 된 사람은 딱 둘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일학년 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정말 딱 두 사람 뿐입니다. 나머지는 그 모습 그대로 천국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공부를 하면 목회를 못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여기 강단에 세우면 안 됩니다.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가 후질수록 목회에 문제가 많습니다. 신학교가 엄격하고 철저하면 신앙이 없어도 상식은 지킵니다. 그나마 안하면 막 나가기 때문에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저는 교육전도사를 쓸 때 다른 사람을 고르지 않습니다. 신학교가 총신이 좋아도 사람이 총신보다 훌륭하면 나는 지방 신학교에서도 사람을 씁니다. 교사를 잘했던 사람을 교육전도사를 시키면 백점입니다.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습니다. 교육전도사 생활을 잘했던 사람을 부목사 세우면 틀림없습니다. 부목사를 잘했던 사람을 담임목사로 부르면 실수 안 합니다. 절대로 없었던 것들이 생겨나는 법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신앙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한 책’의 사람
세 번째는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책을 많이 공부해도 철학시간에 들어가면 철학공부를 안하면 완전히 인간이 안 될 것처럼 설명합니다. 저쪽에 갔더니 실천신학을 안 하면 다 쓰레기라는 것입니다. 전도학 시간에 들어갔더니 전도를 안 하면 다 필요 없다고 합니다. 여기 성경신학을 가니까 성경신학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기 조직신학으로 가니까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을 모르면 그것은 꿰지 않은 구슬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신학을 모르고 조직신학을 배우는 것은 독단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다가 눈을 뜨고 보니까 3학년 2학기입니다. 소용없습니다.
제가 총신에 다닌 것은 하나님께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은 만났습니다. 그중의 한분이 돌아가신 김희보 박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백세가 거의 다되셨는데 살아계신 이상근 교수님 두 분이었습니다. 그분들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김희보 교수님은 열심히 공부하셨습니다. 그분이 항상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전도사님들, 학생들, 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신학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발견하든지 성경에다가 새까맣게 기록을 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고민이 마지막에 성경본문에 대한 고민으로 수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님, 오늘 설교이십니다.” 그러면 나는 그분이 원고를 들고 가시는 것을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아침 9시에 설교면 아침 8시 반쯤 창가에 앉으셔서 성경을 읽으십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설교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설교자의 설교보다도 학생들을 울렸습니다. 그것이 한 책의 사람입니다.
4. 그리스도를 사랑함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 L.A를 방문했을 때 집회에 갔더니 그 집회하는 교회에서 “목사님, 디즈니랜드를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 필요 없다. 우리 선생님 한 분을 찾아다오.” 그리고 이상근 박사님을 찾았습니다. 찾아갔더니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94세가 되셨는데 혼자 절뚝거리면서 살고 계셨습니다.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엎드려 절하고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20여 년 전에 당신을 조교하던 김남준 전도사입니다.” 그리고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책 한권을 드렸습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시면서 “어? 당신이 조직신학 책을 썼구먼!”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외로우시죠?” 그랬더니 그분이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인가? 우리 주님하고 늘 같이 있지!” 돌아오는데 눈물이 얼마나 났는지 모릅니다. 나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분처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마음을 쏟아 기도함
신앙적인 준비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보에티우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매일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30년 전이지만 이 학교에서 빨간 벽돌로 지은 곳이 유일한 교사(校舍)였습니다. 거기를 오르내리던 기억이 납니다. 아침에 8시에 버스가 도착하고 8시 30분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양지가 각별히 아름다워 유혹을 받았습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 빼서 숲속을 산책할까? 채플실에 들어가서 기도를 할까? 결국은 후자의 욕망이 항상 이겼습니다.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 항상 눈물이 났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너무 가난해서 분유를 살 돈이 없었습니다. 학교 등록금은 450,000원인데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는 70,000원이었습니다. 그러면 생활에 대한 고통과 사역에서 오는 괴로움이 한 몸에 엄습합니다. 채플실에 들어와서 마음을 쏟아놓기 시작하면 서럽도록 눈물이 났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채플실에서 매달려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한 학기가 끝나면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영혼은 깊은 때가 묻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여름수업이 끝나면 일주일, 가을학기 수업이 끝나면 일주일을 강원도에 있는 기도원으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꼬박 일주일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인생인데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게 해달라고 금식기도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기도원을 내려오면서 서로 보따리를 짊어져주며 말했습니다. “우리 정말 주님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들이 되자.” 그중에는 저처럼 좀 큰 교회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교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신학교 시절에 흘렸던 기도의 눈물들은 여전히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서러움과 고통, 괴로움과 눈물, 교회에서의 부당한 대접, 생활에 대한 염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깊은 고통, 공부만 하자니 생활의 염려가 있고 사역을 하자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교회에서 주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매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점심을 굶고 생명의 말씀사까지 걸어 가서 원서 한 권을 사가지고 옵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벅찼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역사에 쓰임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간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지만 평범하게 살아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산에, 언덕에 올라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나이가 들면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을 금식하고 나면 온갖 육체의 결함들이 생겨납니다. 때로는 회복할 수 없는 건강의 손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할 수 있습니다.
V. 결론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든지 거기에 기준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동급생이 아니고 목회를 후지게 하는 선배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자긍심을 품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존 오웬, 존 칼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존 웨슬레 같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학교는 다르고 출신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졸업한 학교가 있습니다. 바로 광야의 신학교입니다. 이렇게 등록금을 내는 신학교가 아니라 선생이 따로 있는 신학교가 아니라 주님이 친히 교장이 되셔서 여러분을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는 신학교입니다. 간절히 마음을 찢으며 물같이 마음을 쏟아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모든 고민들을 한꺼번에 녹여내는 그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를 바라볼지라.] 신앙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총신신대원 개강수련회(2012.3.7)
목회자의 인격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I. 들어가는 말
한순간 불꽃같은 생애를 살았던 세례요한은 결정적인 순간에 타오를 수 있도록 긴 세월동안 광야에서 준비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준비되어지지 않으면 결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위해 사람을 준비하시지만, 이 준비는 하나님의 준비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사람도 의지를 가지고 지성으로 헌신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치열한 준비에 자신을 바칠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는 준비의 시간과 실제로 사역하는 시간이 구별되어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시간이지 준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와 같이 신학교에 입학했던 학우들 중 이미 몇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중에 어떤 학우는 재학 중에 신학을 공부하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 사역을 위해 힘쓰다가 죽으면, 주님을 위해 어떻게 섬기고 봉사했는지를 보고 하나님이 심판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다니다가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으로 심판을 하겠습니까? 그의 생애를 헤아리실 때에 무엇을 가지고 헤아리시겠습니까? 목회자가 되기 전에 죽었으니까 별로 헤아릴 것도 없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사소한 일상의 삶들이 주님의 보좌 앞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고 그 행한 것을 따라 그는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 3년 동안 살아가는 원동력이 학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매일매일 살고자 하는 새로운 결심과 각오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린 시절부터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래 바람이 이는 광야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놀라운 역사를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사가랴의 아들이던 평범한 사람이 우리가 아는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고 한 누가복음 3장의 이 보도는 전형적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사의 소명 기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소명 기사는 히브리 본문에서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선생에서 제자에게로, 손에서 물건을 넘겨받듯이 물려받은 지식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까지 선지자에게 이입됩니다. 그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신적인 가치관을 갖게 되고 역사와 모든 민족을 바라보는 시야를 새롭게 갖게 되어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의 소명을 따라서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경험했고,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을 때 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사악한 욕망을 간파하고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회개 없는 세례를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들의 삶을 규탄 하였습니다. 그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잠시 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선포와 일치하는 메시지였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사역하다가 불꽃처럼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놀라운 일은 그가 성경에 등장해서 활동을 한 시기는 아주 짧은 시기이지만, 그와 정치적인 대적관계에 있는 헤롯조차도 그에게서 어떤 강력한 권위와 거룩함의 영향력을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의 인격적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고 의로운 인격은 어떻게 형성 되었을까요? 물론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그의 인격이 매우 특별하게 성령의 임재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적인 본성과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아주 놀라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 있는 긴 세월동안 살아가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한사람의 설교자로서 그의 외침에 적합한 인격으로 변모 되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을 에는 것 같은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자기를 깎고 다듬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준비하다가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그 외침은 그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겨서 고고한 울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전율처럼 다가갔던 것입니다. 요한의 외침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을 끝낸 이후부터 하나님의 기록된 예언이 그친 어두운 시대에 울려 퍼진 최초에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길거리에서 어귀에서 사람들이 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촌스러워 보이는 이사람, 약대털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했을, 그리고 석청과 메뚜기를 음식 삼으면서 들판에서 살았던 이 사람이 외칠 때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학교시절에 철저하게 신앙이 기반이 되어서 언젠가 본격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외칠 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인격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금 그릇이 있고 질그릇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금 그릇은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던 것이었고 질그릇은 아낙네가 깨끗이 씻어 엎어 놓아 바짝 말린 그릇이라면 여러분은 국밥을 어느 그릇에다 담아먹겠습니까? 개밥그릇에다가 국밥을 담아주는 것을 금 그릇이라는 이유 때문에 먹을 사람은 여러분 중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II. 목회자를 세우심
A. 성육신의 원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는 말씀이지만 이 불변하고 영원토록 있는 진리는 풀처럼 이슬처럼 사라져갈 사람들의 사역에서 이 세상에 전달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 바로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삶과 인격, 섬기는 모든 것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수없는 증거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디오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람들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을 두 눈으로 직접보고 두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위대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종처럼 사신 섬김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는 그분의 치료는 병든 자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셨고, 무지한 자들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일러 그들을 깨우쳐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은 무지한 자들도 당신의 형상을 받은 당신의 자녀들로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 앞에서, 심판을 앞둔 예루살렘 성 앞에서, 눈물 흘리며 통곡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은 이 세상의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더 이상 추가할 수 없는 찬란한 계시였던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해 말씀으로만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 생애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마지막에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의 죄의 대가로서 형벌을 받으시고 비참하게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주님께 이르는 거룩한 새롭고 산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이었습니다.
요즘은 모두들 황금빛으로 칠해진 성경을 갖고 다니는 것이 유행입니다만 원래 성경은 전형적으로 빨간색이 칠해져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이 성경 진리가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 성경의 진리를 위해 피를 흘렸다라고 하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황금빛으로 칠한 것을 보면 오늘 우리 기독교의 정신이 이 성경의 색깔에 반영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원리가 그대로 목회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여기 예전과 같이 한 공간을 담지하고 시간 안에 사람들이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 복음서 속에 기록되어있고 신약 속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오디오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사셨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우리에게 육화될 때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몸소 들려주실 뿐 아니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을 목회자로 세우셔서 자기의 양떼를 돌보게 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목회자를 통해 배울 뿐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볼 수 있게 하기위하여 목회자를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구도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I am the Way.” “내가 곧 그 길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道)”삼아 따라가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관심이 없는 목회자는 이미 목회사역을 그릇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말 교회에서 진리가 관심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라고 말씀하지만 많은 성도들은 “다른 곳에서 길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는 다른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목회자들을 다른 구원의 길을 성도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다른 신앙의 동기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소명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하나가 결핍되어있으면 그것은 결코 소명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안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행복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도 온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여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 가운데 살게 된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없다면 목회의 소명은 여러분에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존 칼빈은 자기의 책속에서 하나님이 천사가 아닌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죄인들 중에 같은 형제에 지나지 않는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도 아닌 사람을 세워 그를 통해 교회를 목회하게 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들을 목회자로 세우심으로 모든 목양을 받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바라보면서도 목회자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완벽한 사람일 수 있겠고 또 우리가 선한 동기를 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목회를 시작하는 그 순간 완성된 인격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세월이 흘러가고 지나가면 과거의 세월들, 목회했던 우리 인격에 대한 수치심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과 우리가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모본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는 완벽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본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허쉴 포드 목사님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재미있는 예화를 남겼습니다. 밤바다에 배를 띄우고 종에게 어느 주인이 말했습니다. “노를 저어라.” “주인님 어디로 모실까요?” “북극성을 보고 계속 노를 저어라.” 한참 지난 다음에 노예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인님! 아무래도 북극성을 지나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다에서 노를 젓는다고 해서 그 배가 하늘을 날아 북극성에 닿을 일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은 북극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바다를 항해해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극성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북극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별을 바라보고 갈 때에 올바른 항로를 갈 수 있기 때문에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본받아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구도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또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한 형제로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생각은 다르고 성향과 모든 의견들이 달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 한 분을 사랑하고 그 진리라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그러한 다양성 속에 일념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통일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통일, 소위 ‘일치’라고 하는 concordia는 하나의 획일화된 일치가 아니라 하모니로서 일치입니다. 여러 가지 다름이 조화를 이루면서 어우러져서 교향곡과 같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면서 하나님 한 분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젊은 설교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자기와 인생을 위한 이 세상에 비전이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는 비전을 품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비전을 버린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아름다우시고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모든 좋은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께 매료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도열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를 도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그 기쁨을, 희열을 느끼는 도열의 삶,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복음, 그분의 삶의 발자취 안에 있는 그 찬란한 진리에 매료되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이 세계와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을 관상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의 증언에 의해 이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지식” 이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저의 언어로 좀 더 정확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지식” 이것이 바로 “신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동반되지 않는 신학은 의미가 없고, 인격과 동반되지 않는 삶은 위선이거나 위약이거나 위헌이거나 셋 중에 하나입니다.
B. 지복과 Imago Dei
그러면서 우리는 여기서 지복과 ‘이마고 데이’(Imago Dei) 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에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즉, 첼렘과 데무트를 따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형상과 모양은 많은 구약 학자들이 이어동의적인 언어, 말은 다르지만 뜻은 서로 같은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에서는 다른 해석을 말하지만, 우리는 두 단어가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보고 이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 안에 있는 형상이고 이 형상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 지성이라고 말합니다. 지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모든 세계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인데, 이것은 지식과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능력으로 나누어집니다. 소위 멘스(mens)라고 하는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사물들을 아는 것인 라티오(ratio)라는 이성과 직관을 통해 모든 사물들을 논리를 초월해서 인식할 수 있는 인텔레겐티아(intellegentia)라는 오성의 기능으로 나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속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인텔렉투스(intellectus), 지성을 통해서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행복이 아니라 지적인 행복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시되는 모든 행복은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지성으로 누리는 지극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고통 받는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지복을 상실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시는 완전한 행복이 영적생명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완전한 지복의 삶이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인간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를 경험하였습니다. 모든 영혼의 기능에는 죄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칼빈주의에서는 ‘전적타락의 교리’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상당한 기능들은 죄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영혼의 기능 중 일부를 하나님이 남겨두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을 아는 종교의 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을 누릴 수 없고 영혼과 신, 초월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갈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갈망이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의 인도를 받지 못할 때 수많은 이방의 종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갈망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극단적인 쾌락에 빠지게 됩니다.
체스터턴이라고 하는 영국의 사상가는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만들어 내고 때로는 세상의 극단적인 쾌락에 자신을 매몰시켜 던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1960년대의 올덕스헉슬리 같은 사람이 사람들에게 초월적인 자기의식 세계 속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에랙스같은 약물들을 권고하고, 이것들을 널리 퍼뜨려 젊은이들을 마약에 중독되게 하였던 것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우리는 오히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내적인 기반인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인식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신앙은 산산이 파괴되어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게 망가졌습니다. 이런 내적인 인식기능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됨으로써 창조 시에 모든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광휘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객관적인 대상도 어두워지고 그 어두운 대상을 볼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기능도 망가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많은 인간들 중에 우리보다 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완고한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우리의 영혼에 지성의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만의 눈을 버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잃어버렸던 하나님형상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인 지복은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세계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고, 모든 문제들은 인간의 노력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자원의 분배, 올바른 정치제도의 수립, 좋은 교육, 질병의 퇴치, 미신의 타파, 문명의 척결, 삶의 환경의 개선, 이 모든 것들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학에 들어선 사람들은 이 모든 일들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 세계를 바꾸고 불행한 인간의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의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C. 목회자와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시는 것과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과 하와 안에 온전히 있었던 것이고 그 후로는 죄로 말미암아 상실 되었습니다. 그 후로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주신 온전한 형상을 담지한 인간이 어떤 인격과 어떤 삶의 사람이 되는지를 확인 할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 같이 역사를 움직이는 일에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위대한 인물들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약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앎을 가질 수가 없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시간적으로 먼저 있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구속 주 하나님을 아는 일을 통하지 않고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구속주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통해 앎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한 이중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속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참된 인간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아담과 하와 안에 있었으나 후에 사라진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예수가 담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어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바’ 라고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은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다.’ 25살에 목사가 되어서 29살에 절명하였습니다. 그는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 예배를 인도하기위해 강단에 올라서면 설교를 시작하기 전 모든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 분이 저렇게 거룩하신 분이시라면 지금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라고 생각하면서 흐느껴 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성공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1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에게는 간절한 꿈이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강단에 올라설 때에 예배 사회자가 “오늘이 우리 김남준 목사님이 열린교회에서 마지막 설교하십니다.”라고 말하는 은퇴의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교인이 지금보다 한 10배쯤 많아져서, 35.000명이나 40.000명 되는 것이 제 소원이 아닙니다. 간절한 두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제가 4천편의 설교를 쏟아내었습니다. 마지막 날 설교 할 때는 아마 7천편쯤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개척할 때부터 설교를 들었던 성도가 마지막 성경본문을 읽을 때에 어떤 설교가 나올지 예상 할 수 없는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열린교회를 떠나는 그날이 살아온 날 중에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날이 되고, 살아갈 날 중에서는 가장 예수님을 적게 닮은 날이 되는 것, 그 두 가지면 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기를 사모하십시오. 교회를 향한 목회자의 최고의 섬김은 참된 신자가 됩니다. 목회자가 아니라 참된 신자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는 하나로 집약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안 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III.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A. 목회자의 자격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이론을 토대로 목회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목회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해 전에 책이 한권 나왔습니다. 어느 의사가 쓴 책인데, 제목이 『나는 외과의사다』(강구정. 사이언스북스, 2003)입니다. 지금은 외과의사 지망을 안 하는데, 의료사고도 많이 나고 잠자고 있어도 핸드폰이 울리면 달려가서 수술 해야 되는 고달프고 돈도 못 벌기 때문에 외과 의사를 안 한답니다. 그래서 요즘은 쉬운 거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주장은 의사 중에 의사는 외과의사라고 하면서, 외과의사가 될 수 있는 자격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독수리의 눈, 이것은 바로 지성입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간이 어디 있는지 심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되겠습니까? 찬연하게 공부해서 고도의 지성을 가져야 합니다. 15년 전에 CMF라고 의료인 선교단체에 자주 다녔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대생 수업이 일주일에 43시간 내지 45시간이라고 합니다. 총신은 공부 더 시켜야 합니다. 일주일에 50시간씩 했으면 좋겠습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는 사자의 심장입니다. 어느 병원의 복도에서 간호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맹장수술은 수술도 아니에요. 2센티만 자르면 돼요. 꿰매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요.” 문을 열고 보니 간호사가 환자가 아닌 칼을 들고 달달 떨고 있는 의사에게 하는 말입니다. 심장이 손톱만 해서는 의사 못합니다. 의사는 종양이 있다고 하면 칼로 배를 확 열 수 있는 박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두부를 마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상처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죄로 인해 곪아터졌으면 칼로 갈라서 바꿔 끼우든지 잘라내든지 하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교회를 지하실에서 일곱 명의 교인으로 교회를 개척했고 지금 있는 열 명의 장로들은 모두 제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해 전 설교가 끝나기 전에 ‘이 교인들이 나를 쫒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육성으로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저는 40%는 교회를 떠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그래 내가 쫓겨나면 고생 끝 행복시작이야 내가 어디를 간들 이만 못한 교인을 만나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담대한 담력이 있어야 됩니다.
셋째는 여인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외과의사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잘합니다. 만두 하나 못 빚는 사람들은 외과의사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밀한 목회의 기술입니다. 한석봉 엄마가 불 끄고 떡을 썬 것처럼 이 기술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공부를 조금 한다고 하면서, 신앙이 조금 있다고 하면서 목회의 기술자체를 아주 하찮게 알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바보입니다.
그래서 요약하면 intellectus인 지성, spritualitas인 영성, ars인 기술이 구비되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서서히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히 계속해서 그 길로 가야 합니다.
B. 인격적으로 준비됨
1. 목회와 리더십
그래서 우리는 인격적으로 준비가 되어 가야 합니다. 첫째로 목회와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연단을 받는 것은 지도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총신에서 3년 열심히 공부한 후에 교회에 가서 사찰하려고 신학교 들어온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사찰이 하찮고 우습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영역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결국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섬기면서 그 일을 하는 때도 있고 혹은 누군가의 섬김을 받으면서 해야 되는 때도 있고 혹은 누군가와 협력하면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퀴즈를 한번 내겠습니다. 한 마리의 사자에 의해 영도되는 일천 마리의 사슴의 무리와 한 마리의 사슴에 의해서 영도되는 일천 마리의 사자 중 어느 집단이 더 무서운 집단이겠습니까? 전자겠습니까? 후자이겠습니까? 결국은 사자와 같은 지도자 한사람에 의해서 영도되는 그만 못한 성도들이 훨씬 강력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의 리더십은 어떻게 보면 너무 쉽고 어떻게 보면 너무 어렵습니다. 교회는 목회자가 지도자이긴 한데 아무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도 그렇습니다. 공부 안하고 말 안 듣는 학생들은 벌을 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수단이 학교에 없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크롬웰 시대 때에 사실은 총장이 없는 부총장으로서 총장 역할을 하면서 옥스퍼드를 책임 맡았습니다. 이 사람은 탁월한 학자인 동시에 아주 탁월한 행정가였습니다. 빚더미에 허덕이고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옥스퍼드에 들어가서 크롬웰의 후원을 받으면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훌륭하고 인격적인 교수들을 초빙해서 개혁신학을 가르치게 하고 학생들에게 복지와 편의시설을 제공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안하고 까부는 인간들은 붙잡아다가 지하 감옥에다 가두어버렸습니다. 총신도 그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치열하게 공부하도록 차꼬에 채워서 집어넣어야 됩니다.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소인배형 리더십과 성자형 리더쉽입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는 보스가 되고 싶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신실한 신앙으로 주님을 섬겨도 만족이 안되고 자기의 똘마니들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실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보다는 자기의 똘마니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단을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어떤 과업이 하나 주어지고 그 과업을 다 수행하면 공동체가 찢어지고 자기 똘마니들과 똘마니 아닌 사람들로 갈라지게 됩니다. 가는 곳에 항상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렸을 때는 엄청 비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잔인하리만치 가혹합니다. 이런 사람은 리더가 아니라 보스이며 그를 따르는 사람은 똘마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예수의 종이지 사람의 똘마니입니까?
이에 비해서 흔하지는 않지만 조용조용 성자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신이 보스가 아니라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맘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리더십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5, 6년 전에 서점가를 휩쓸었던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책을 읽어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의 탐험가였고 모험가이며, 북극을 정복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조난을 당해서 그는 1200km를 항해하여 구조를 요청해야 했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1200km를 항해한다고 하는 것은 발동기도 없던 시대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올지 가다가 죽을지 오다가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누군들 그 위험한 항해의 길을 자기와 마음이 맞는 사람을 데리고 떠나려고 하지 않는 지도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직접 구조대에 자처했고, 집단 중에서 가장 속 썩이며 위험한 공동체를 모두 데리고 구조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수개월동안 1200km를 항해하고 도움을 청했을 때 위험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떠났기 때문에 자기는 위기를 만났지만 남아있는 대원들은 모두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요구되는 리더십입니다.
괴로움과 고통은 자신이 짊어지고 편안하고 좋은 것은 성도에게 돌리려고 하는 마음, 자신은 잊혀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아로 새겨지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하는 사람. 바로 그런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어느 날 검은 가운을 씌워주고 당회장으로 임명할 때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항상 회의만 하면 핏대 올리고 혈기 부리고 편 가르던 사람들은 지금 총회 가서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 같이 라면 먹으러 매점에 내려가도 매번 얻어먹으면서 돈 한번 안 내던 사람들은 지금 만나도 돈 안 냅니다.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히고 이타적인 리더십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고 말했습니다. 너희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지도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2. 겸손과 예의
둘째는 겸손과 특별히 예의입니다. 제가 최근에 『개념없음』이란 책을 썼는데 정말 잘 팔립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면 선물할 사람들이 생각이 난답니다. 실제로 이 학교 학생 이 제안을 한 가지 했습니다. “목사님 기왕 쓰시는 길에 이것은 평신도 개념없음으로 하고 신학생 개념없음으로 하나 더 쓰십시오. 제가 백가지의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개념없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나는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영성, 탁월한 소명, 헌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가치는 보편가치의 토대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실력 있는 목사, 영적인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신사가 되라고 항상 목회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목회를 하면 아주 비천하고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부터 사회적으로 여러분과 비교될 수 없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폭 넓은 인간들을 만나서 선생 노릇 해야 되는 사람들이 목회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과 예의입니다. 너무 겸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예의바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에티켓에 관한 책도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모른 채, 어느 한 순간 목회자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목회자에게 쏠립니다. 그런데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이 안 됩니다.
저희 집안이 모태신앙은 아니었는데 우리 부모님들은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시다가 저희가 결혼을 한 후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저희와 함께 살던 고모들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학생일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모두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도 예수를 안 믿으셨기에, 고모들의 소원은 안 믿는 식구들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교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조금만 권면해주시면 우리 온 가정이 예수를 믿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방을 받아본 적이 없다가 오신다니까 우리 식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며칠 전부터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준비했습니다. 목사님이 오셨고 예배도 아주 은혜로웠습니다. 끝나고 목사님이 “가족 여러분, 이제 다음 주에 꼭 교회 나오셔야 됩니다.” 누구도 싫다고 말 할 사람이 없을 만큼 딱 익은 곡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식사가 들어왔습니다. 나무로 만든 소반에 음식을 정성껏 차려서 갖고 들어왔습니다. 때가 점심때가 지났기 때문에 목사님은 우리 가족들과 정말 맛있게 드셨습니다. 정말 온 집안이 화기애애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과일과 차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눈을 의심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다가가 이 사이에 음식물이 끼셔서 젓가락으로 열심히 쑤시시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쩍 벌리고 혁대를 풀고 벽에 기댄 채 집요하도록 쑤시는 것입니다. 가정 복음화가 20년 연기 됐습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여러분이라면 인터넷이나 아니면 수강료를 내고서라도 현대인의 에티켓에 대해서 배우겠습니다. 어느 날 호텔에 갔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참 대화를 하는데 어느 목사님이 티슈를 뽑아 거기에다가 커피 프림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은 프림으로 닦으면 가죽이 튼튼해진다고 말하시면서 구두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카펫에는 하얀 프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예화는 수 없이 많습니다.
어느 날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느 신학대학원 학생이 간절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 책을 읽고 정말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는 모 지방에 있는 신학대학원 졸업반 학생들입니다. 목사님을 찾아뵙고 신학적인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면 우리 친구 10명이 올라가겠습니다.’ 저도 정말 바쁘지만 간곡히 편지를 써서 ‘그럼 올라오십시오. 제가 3시간의 시간을 내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올라와서 좋은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이 구겨 신은 운동화에 추리닝 차림으로 서울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이야기 했을 텐데 그냥 내버려뒀습니다. ‘어쩜 저렇게 무례할까, 과연 저런 사람들이 불신자가 섞여있는 가정에 가서 저런 태도가 용납될 수 있을까?’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고민을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교회 여전도사를 내보내야 될 텐데 정말 고민입니다’ ‘왜 사역을 잘 못합니까?’ ‘사역만 못하면 참겠습니다.’ ‘그럼 왜 그러는데요?’라고 하니까 ‘말하기도 창피합니다.’ 이 여전도사님은 사역도 못하고 기도도 잘 안하는데 특기가 먹는 심방에는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같이 가면 주 요리가 항상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생선을 예쁘게 찜을 해서 알록달록하게 해놨다든지, 갈비찜을 해놓고 그 위에 고명을 얹어서 예쁘게 해놓든지 합니다. 그런데 그 여전도사님이 항상 먼저 그 음식에 공격을 해서 다 헤쳐 놓고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먹을 거니까 너 먼저 먹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은 쫓겨났습니다. 제발 예의 바른 사람이 되십시오.
3. 인내와 견딤
a. 모함을 참음
세 번째는 인내와 견딤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는데 모함을 참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악의를 가지고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파멸시키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서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 참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참아야 됩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크지 않고 100여명 정도 모이는 교회라서 식구들처럼 모든 교인들이 서로를 아는데 청년부 자매 하나가 배가 불러오는 것입니다. 아기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되면 교회를 떠났을 텐데 자매는 남산만한 배를 가지고 계속 출석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교회에 문제가 되어 교회 어른들이 불러 누구 아이인지 물어봤습니다. 자매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아기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래전에 사모님이 소천하셨고, 혼자 사택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가 가끔 가서 빨래도 하고 밥도 해드린 것입니다. 목사님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노회에서 면책되고 퇴직금도 못 받고 자매가 낳은 아이를 안고 쫓겨났습니다. 온갖 욕설을 다 받으면서 치욕스럽게 떠났고 교회 명예도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때까지 이 자매는 교회에 계속 출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부흥회가 있었는데, 자매가 은혜를 받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 하던 어느 날 저녁에 공개석상에 나와서 울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사실은 그 때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목사님을 모함해서 쫓아내고 싶어 하는 어느 집사가 있었는데 그 유부남의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의 사주를 받아서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가 발칵 뒤집혔고, 목사님을 수소문해서 찾았더니, 강원도 사북에서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가 되어 5년 동안 아이를 양육합니다. 그 때 마침 교회에 계시던 목사님은 떠나게 되었고 그 목사님을 다시 청빙해서 평생을 목회하셨는데 거의 성자의 대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 고소와 고발이 난무하고 아마 칼부림이 일어 났을 것입니다. 누가 그 누명을 쓰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함을 받을 때조차도 그리스도를 향한 평상심을 잃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칼빈 시대에 있었던 볼쉘 논쟁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기억하십니까? 이 볼쉘이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람 칼빈을 비난하고 다녔는데 그 비난한 내용을 제가 직접 문헌에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칼빈은 어떤 여자든지 건드리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색광이고 여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동성연애자이며 미친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악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목회자를 괴롭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 악을 악으로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선생님이셨던 김희보 교수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악과 더불어 싸울 때에는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싸움하는 그 순간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싸우지만, 악인과 싸우는 투쟁은 그 투쟁 자체가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b. 비난을 견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근거 없는 비난도 견딜 줄 알아야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악의적인 비난을 잘 들어보십시오. 나를 향한 악의적인 비난 속에는 나에 대한 선의의 칭찬 속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느 정도 허물을 덮게 만들어 주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비난은 사실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해주기로 결심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종종 큰일은 아니지만 오해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해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내가 해명을 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데, 이 정당한 해명의 과정을 거치면 나에 대한 오해는 풀리지만, 누군가 진실을 밝혀 이 사람이 미워하지 않던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어야만 내가 비난의 누명을 벗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은 미워하게 되고 누명을 벗은 나는 사랑해주는 것도 아니며 다 같이 미워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오해를 벗기 위해서 무엇을 해명하는 그 과정 자체가 아주 구차하고 더러운 과정이라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해를 받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마다 즐겨 읽는 시가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은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저는 교역자들끼리 고자질을 하고 편을 가르고 정말 치고 받고 싸우는 것도 봤습니다. 그런 것은 조폭 집단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모두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나는 아파도 때로는 오해를 받아도 교회는 온전히 남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마음입니다.
c. 혈기를 버림
혈기를 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직회원들이 제직회에 모여서 뭔가를 의논하고 있는데, 전도사 한 사람이 교회 문을 발길로 뻥 차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입니다. 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 앞에서 “당신들 내가 전부다 감옥에 집어넣어 버릴 거야.” 그러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교역자가 수련회를 따라갔습니다. 가서 수영복을 입고 자매들의 어깨를 감싸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제직회에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돌아보지는 않고 혈기를 부린 것입니다. 젊은 남성 전도사들에게 얘기하는데 아무 자매하고나 어깨동무하고 그러지 마세요. 굉장히 안 좋은 버릇입니다. 항상 1미터쯤 떨어져서 이야기를 하십시오. 둘이 앉아있을 때는 방문 열어놓으십시오. 오해받을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교계에서는 끝없는 소송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결국 교회는 모든 일치를 깨뜨리고 도덕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지 참 걱정입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4. 정직과 올곧음
a. 정직의 학교에서
정직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총신이 정말 좀 총력을 다해서 정직한 학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교수가 되어서 수백명의 레포트를 받았는데, 똑같은 내용의 레포트들이 있었습니다. 비교해보니 내용은 같은데 한 학생은 명조체, 다른 학생은 필기체 이렇게 낸 것입니다.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온 인간들이 그럴 수 있습니까? 그리고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출석을 대신 해줍니다. 지각을 했으면 정정당당하게 와서 지각이라고 하고 지각할 수 밖에 없으면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게 지도자의 자세입니다. 누구에게 부탁한 사람도 나쁘지만 그 부탁을 들어준 사람도 나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그런 부탁을 받으면 ‘주 앞에 바르게 살아라’ 하며 충고를 해야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부탁을 받았다면, 그런 정도의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양심이 혼탁한 인간이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받는 것입니다. 한번만 까칠하게 해보십시오. 누가 부탁하겠습니까? 한 시대에서 진리를 외치는 선지자의 모습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제일 혐오스러운 사람이 레포트 베껴 쓰는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교수로 있는 동안에 끝까지 양보하지 않고 싸웠던 것이 부정행위였습니다. 부정행위를 치열하게 잡아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시험에서 두 학생이 결국 컨닝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이 졸업을 못할 위기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실에 3일 동안 매일 와서 한번만 봐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3일째 되는 날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교수님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그래 물어봐라.”,“ 교수님은 의인이십니까?” 그래서 “나는 의인 아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7년 동안 신학교 다니셨는데 한 번도 컨닝한 적이 없으십니까?”, “없다”, “한 번도 없으십니까?”, “없다” 만약에 제가 컨닝을 한번이라도 했으면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물어보는 그 학생들 앞에 어떻게 제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력서에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이력서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잡지를 받았는데 거기에 내 글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고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뒤로 넘기니까 다른 어떤 교수님의 이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수님의 이름은 덮고 잡지를 펼쳐서 우리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읽어 봐라.” 쭉 읽더니 “무슨 느낌이 드느냐?” “이 내용은 목사님이 쓰신건데요. 목사님 책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 이것 목사님 책에서 내가 읽었는데.” 펴보니까 다름 사람 이름입니다. 인용한 출처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신학생이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칼날 같은 양심을 가지고 이런 문제와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신학교에 가서 컨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다들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러냐고 합니다. 그것이 별것 아니면 어떤 것이 별것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신앙의 양심에 관한 것인데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습니까?
고신측과 합동측이 연합한 적이 있었습니다. 합동총회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만장일치로 총회장을 하시던 분 가운데 한상동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고신출신이신데 신학교 들어오면서 바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학교를 다니려니 얼마나 고달프셨겠습니까? 그런데 조직신학나 성경신학 시험은 답을 모르면 설교라도 쓰면 교수가 0점은 안 주는데 영어시험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앞이 깜깜하여 주님 이름만 계속 불렀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가 삐딱하게 앉아서 시험지를 자꾸 이쪽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순진한 한상동 전도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기보고 얼른 받아쓰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시험지를 덮어놓고 뒷산에 올라가서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내가 이 학우와 이 학교를 다녔고 나를 잘 아는 학우인데, 평소에 내 신앙과 인격이 얼마나 너절하게 보였으면 나에게 시험지를 보여주면 내가 보고 쓸 정도의 인격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러고도 내가 무슨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그 날 덮어놓고 백지를 내고 산으로 올라가 회개한 그 사람은 후에 고신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입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완벽하게 owner system입니다. 한 학생이 컨닝하면 학생들이 그를 지적해서 고발합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더블 백을 매고 육군병장을 달고 일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너 같은 놈하고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육군사관학교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이다. 치욕스럽다. 너는 나가라." 그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어 시험을 보는데 학우들이 컨닝을 합니다. “컨닝하지 맙시다. 주 앞에 바르게 합시다.” 하니까 저 뒤에서 “그런 말 하지 맙시다.”라고 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b. 공짜를 미워함
저는 공짜를 미워합니다. 언젠가 개척교회를 할 때인데 어떤 신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수요예배를 앞에 앉아서 드리고 나서 “교수님, 잠깐 뵐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아직 목사 안수를 안 받았을 때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는 신학교에 다니는 3학년 학생입니다. 등록금을 낼 기간이 가까워 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습니까? 그럼 그렇게 어려운데 어떻게 지금까지 학교를 다녔습니까?” “교수님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다녔습니다. 등록금을 낼 때만 되면 늘 까마귀를 보내주셔서 저의 등록금을 채워주셨습니다. 기적으로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이 긴 겨울방학동안 무엇을 하셨습니까? 공부에 전념하셨습니까?” 그랬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치열하게 기도하느라고 시간이 없으셨습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열렬하게 교회 봉사하셨습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에는 30만원을 보태드리겠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30만원은 그 학교의 등록금이 거의 다 될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정말 공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교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평생 잊혀 지지 않을 하나의 지침을 주겠습니다. ‘구원 이외의 모든 공짜는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아주 부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저는 이유 없이 교회의 중직자들에게 밥을 안 얻어먹습니다. 제일 싱거운 사람이 만날 이유도 없이 “목사님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하는 사람입니다. “그 시간 있으면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고 해라. 밥만 먹다 죽은 귀신이냐. 무슨 밥이 그렇게 먹고 싶은가?” 괜히 만나서 왜 그렇게 합니까? “목사님, 좋은 곳에 가서 대접하고 싶습니다.” “싫다. 필요하면 내가 가서 사먹을 수 있다.” “목사님, 그렇게 까칠하게 해서 목회됩니까?”
어느 날 부산 교회에 집회를 하러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강사를 잘 대접하고 싶으니까 우리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서 직원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열린교회입니까?” “네.” “김남준 목사님이 저희 교회 집회에 내려오십니다.” “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인데 김남준 목사님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십니까?”하고 물었답니다. 내가 그렇게 가르친 것은 아닌데 이 직원이 “목사님, 우리 목사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변화되십시오.”했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사무실의 직원이 그 정도니 교역자는 어떻겠냐고 하시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짜 좋아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도 무엇이든 공짜로 주거든 거절하십시오. 유혹을 뿌리치고 단호하게 거절하십시오. 선의로 느껴져도 거절하십시오. 거절할 수 있는 데까지 거절하십시오. 그래도 피할 수 없거든 일어나지 말아야하는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 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도움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들은 그런 성향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이것은 80년대에 일어난 실화입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 전화가 옵니다. 그 자매는 담임목사님과 통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전화를 받아보니, “목사님, 안녕하세요. 한 달에 한 번씩 기독교방송국에 새벽설교 내보내시죠?”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 설교를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그 설교의 힘으로 요새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목사님, 사실 저는 여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복을 많이 주셔서 큰 회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네가 돈을 많이 벌었으니 우리나라에 고생하는 신실한 목사님들이 많으니까 그분들을 성지순례로 섬겨 드려라. 그래서 존경하는 목사님 30분을 섬겨드리려고 하는데 목사님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요.” 합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모든 경비는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대겠습니다. 목사님은 시간 내서 따라 오시기만하면 이집트부터 예루살렘까지 성지순례를 시켜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고 짐을 싸서 공항에 가니까 진짜 30명 정도의 목사들이 모였답니다. 거기에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1박 12일을 떠났는데 당시로서는 최고급 호텔, 제일 좋은 음식으로 대접 받고 그 사장도 바쁠텐데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심부름을 합니다. 너무 감사하게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 날, 이제 숙소에 들어가 잘 시간인데 오늘 밤이 마지막 날 밤인데 모임이 있으니 회의실로 모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밥 먹고 나서 쉬다가 모두 모였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당시에 한국 교회가 치열하게 투쟁하던 이단의 깃발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목사님들. 이제까지 우리 교주님이 대주는 돈으로 먹고 마시고 노셨습니다. 사진도 있고 증명도 남겼습니다. 이제 우리 교단에 협조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국교회에 가서 폭로 당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로입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교회에서도 등록금 내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만 받으십시오. 돈을 주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잘 다니고 있습니다. 더 선한데 사용하십시오.”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릴 때부터 습관화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생활이 넉넉해져도 이 습성은 떠나지를 않습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이 저를 만났을 때 이 세상에서 제일 책 읽는 습관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이랍니다. 책을 받아보고 돈도 안내고 전화를 걸어서 소리치면서 주의 종인데 깎아달라고 그런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정말 올곧게 가야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돈 문제입니다. 돈 중에서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서 낭비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소위 얘기하는 판공비라고 해서 영수증 없이 사용하는 눈 먼 돈들입니다.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 심지어 몇 억의 돈들이 오갑니다. 그것은 세상에서도 안하는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 때문에 진리를 전하고 선포하는 일에 심각하게 방해를 받습니까? 그렇게 돈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사람의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결국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지도자 한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올바르게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일 년 예산이 80억이 넘습니다. 제가 4500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지금도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은 10원도 없습니다. 제가 “담임목사 앞으로 1억 정도만 영수증 없이 쓰는 돈으로 해 놔라.” 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안합니다. 신앙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연말이면 공인회계사법인에서 와서 교회를 일주일 동안 샅샅이 감사합니다. 공인회계사가 전에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공동의회에 와서 교인들 앞에 회계 감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서 깨끗한데 누가 무섭겠습니까? 지도자가 그 문제에 대해서 결백하면 무한대로 도덕을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은 신학교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5. 고난과 기도
a. 스트라디바리우스
고난과 기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봅시다. 1600년대 후반부터 1700년대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기를 제조하는 사람이었는데 바이올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하프 등 약 1100개 정도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650개 정도 남았습니다. 저도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을 생전 처음 봤는데 시가로 45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때는 항상 1등석을 타도록 요구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가 막힌 악기가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악기를 제조한 장인의 탁월한 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모진 언덕에 몇 십 년 동안 자라도 조금밖에 자라지 않는 그런 차지고 옹진 나무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캐나다의 아이스필드에 가보니 어른 키 정도의 나무를 안내하는 사람이 수령 300년짜리라고 합니다. 여건이 너무 안 좋으니까 성장을 못합니다. 그런 나무를 채집을 해다가 소금을 뿌리고 그늘에 말리고를 수 없이 반복해서 절대로 변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제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별될 수 있는 나무 자체가 아주 희귀합니다. 그것이 악기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b. 고난의 두 얼굴: 성화와 패역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습니까?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한편으로는 아주 패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주 거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전도사로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고난을 많이 받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면 전도사를 사람취급도 안 합니다. 그냥 거의 일꾼 취급입니다. 요즘은 대우가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 때에는 정말 심했습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님은 전도사 때에는 학대를 받아야 주의 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비굴한 느낌이 들 정도까지 가혹하게 하는 교회를 우리들은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상식 이하의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일 년에 한 번씩 이력서를 내면서 메뚜기처럼 교회를 옮겨 다니면 진실한 종이 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오고 한 교회에서 햇수로 8년, 그 다음 교회에서는 햇수로 7년, 그 다음 교회에서 햇수로 2년을 있다가 열린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한 교회에 가면 오래 그 교회를 섬기고, 옮길 때에는 금식기도를 하며 많이 기도한 후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옮겨야 합니다. 갔으면 오래 참으면서 인내하고 거기에서 고난을 이겨야합니다. 박한 대우, 인격적인 학대, 교인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무관심, 때로는 물질 문제에 대해서 아주 인색해서 학비 한번 보태주지 않는 것까지 참아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 ‘보복적 모방심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학대받으며 전도사생활을 한 사람들이 담임목사가 되면 교역자들을 거의 종처럼 짓밟습니다. 반말하고 하인취급하고 교회를 자기 회사처럼 생각해서 자기가 사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면서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커다란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7년 동안 신학공부를 하면서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때가 저에게는 가장 복된 시간들이었습니다.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 가득하던 때였습니다. 학교는 기약 없는 휴교에 들어가고 저는 인생의 가장 쓰라린 고난의 때를 맞았습니다. 오랫동안 사역하던 교회를 햇수로 8년 만에 사임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이라는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 전념하기로 하고 학교 옆에 방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무슨 섭리가 계신지 큰 고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너무 사랑하던 우리 할머니는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힘들게 직장생활해서 얻은 퇴직금으로 전세를 구했는데 집 주인이 사기를 치고 도망을 갔고 겨울에 빚쟁이들이 매일 와서 길가로 나가라고 우리에게 독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최루탄을 먹고 폐렴에 걸려서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던 때에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가야했습니다. 하루에 15,000원씩이었는데 그것은 우리 한 달 생활비가 15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출혈이었고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는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책상에서 일어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쓰러졌습니다. 몇 번을 겪으면서도 이것이 무슨 이유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고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학생들은 휴강이라고 모두 흩어지고 남은 학생들은 한가롭게 배드민턴도 치고 족구도하고 여기저기서 뭘 먹으면서 떠들었는데 나는 공부하다가 오후 4시쯤이 되면 5층 신관에 있는 채플실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없고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원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인생이 워낙 벼랑 끝에 서니까 하나님 앞에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세 시간을 매일매일 기도했습니다. 더운 여름철에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속옷도 러닝셔츠도 티셔츠도 바지도 모두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5층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시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도 지셨는데 나도 이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예비하시네]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가 다시 주저앉아서 벌레만도 못한 이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고난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총을 찬양하며 한편으로는 괴로움의 눈물을 또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그 잔인한 여름을 거의 다 보내고 가을이 다가 올 무렵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지는 않지만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 5층 채플실에서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던 신학이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의 달콤함에 대한 초월적인 경험이었습니다. 평생을 고난의 벼랑 끝에서 가시밥을 먹으며 죽어가도 그분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면, 나의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아름다움을 증거 할 수 있다면,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티끌만큼이나마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을 것 같은 그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이 올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한분께 마음을 쏟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 고난의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배운 눈물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던 경험들은 이후에 목회를 하면서 나의 모든 기도생활에 척도가 되어서 어떤 경우에도 성령충만하다고 교만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기도의 사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읽어보셨습니까? 나는 그 책을 모두 6권을 샀고 6번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매년 읽으려고 노력하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헌신하여 28살에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 때문에 숨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생애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똑같이 구원해준 하나님의 자녀 중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짐승처럼 사는데 브레이너드는 어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았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는 수십만 명을 전도한 위대한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기로 영국에서 출판했을 때 그 일기책은 헨리 마틴, 짐 엘리엇 같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이 젊음을 그리스도를 위해’라는 고백 속에서 선교지를 향하여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그는 자주 기도의 동산에 올랐습니다. 어느 생일날의 일기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가는 때에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나는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땀과 눈물을 쏟아 부으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기도가 끝마쳤을 때 하늘의 달콤함이 내 마음에 밀려 들어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 잃어버린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그가 기도하다 일어난 언덕에는 붉은 선혈이 하얀 눈 위에 가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를 위해 살고 또한 마치 주를 위해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신의 젊음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불태우며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젊음의 날들을 나태와 허비, 위선과 거짓, 태만과 가치 없는 일에 대한 몰두와 허탄한 일을 좇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며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 사람의 생애의 일기를 보면서 어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똑같이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도대체 내가 살아온 날들 중에 정말 주님께 기도한 날이 있었는지 반성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를 본받아 사당동에 있는 동안에 일부러 추운 겨울을 틈타 새벽마다 얼어붙은 땅위에 엎드려 기도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처럼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기도의 삶을 경험하면서 우리에게 고난은 기도가 없으면 상처와 패역으로 남고 기도가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양약이 될 것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하소서.]
치열한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한 시대를 흔들어 놓는 설교자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묻는다면 나는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설교자는 기껏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IV. 결론: 하나님을 추구하라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속히 지나는 바람과 같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우리의 인생의 길이는 그 풀끝에 매달려 있는 이슬에 지나지 않습니다. 꼭 한 번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지 않고 열렬히 공부하지 않고 보내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내일입니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치열해지십시오. 열렬한 사람이 되십시오.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부르든지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인격의 특징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보석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지성적 준비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눅1:80)
I. 본문해설
빈들에서 어린 아이가 성장을 해서 거의 30세가 되었습니다. 메뚜기나 주워 먹고 꿀이나 따면서 살만 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세례 요한이 성장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지적인 준비 없이 영적인 준비라는 것이 가능했습니까?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선배 예언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의 계시를 사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빚어져 갔을 것이고 화룡점정과 같은 중요한 사건이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놀라운 사건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II. 신학이란 무엇인가?
A. 기독교의 힘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의 힘이 사람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사용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위에 권능을 더하심으로 세상 사람들의 무지의 어두움을 밝히고 굽어진 의지를 감화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심대한 사역이 바로 복음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독교의 힘, 무엇으로도 파멸하려고 애를 썼지만 파멸되지 않고 버텨온 2천년 기독교의 힘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것을 가시적 영역에서의 힘과 비가시적 영역에서의 힘으로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1. 가시적 영역: 사상+윤리
가시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의 두 날개는 하나는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였습니다. 두 가지는 언제나 같이 갔습니다. 그래서 사상은 하나님을 아는 길이요, 윤리는 그렇게 알고 사랑하게 된 하나님을 자기의 지성과 의지속에 구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능하고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에게는 이 세상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의 성품이 사랑이시며 이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자 하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완전한 기쁨과 사랑 속에서 관계를 맺고 계셨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더불어 관계를 맺게 하시려고 그 완전하고 충만하고 무한하신 신성으로서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된 이 세계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찬란하게 보여주었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영원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당신 자신의 위대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시간의 세계 속에서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안에 넘치는 사랑과 지혜로써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영혼을 주셔서 지성과 의지의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파악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 사랑에 감화를 입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을 펼치면서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바로 사상의 힘이고 윤리의 힘입니다.
오늘날 신학생들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두 가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은 미래의 교회에 아주 짙은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가 2천년동안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사상을 이해하며 굳게 붙들고,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무엇인가 착하고 좋은 일을 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법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돈과 부정행위 좋아하고 남의 레포트 베껴 쓰는 것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시중에서 팔고 있는 복사본 들고 다니면 오늘 저녁에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 불법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개인의 재산을 아주 소중하고 신성하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미국 책 중에 의학책, 공학책 같이 한 권에 20만원 하는 책들을 한국에서 들여와 복사를 해서 4만원씩 다시 미국에 수출을 했답니다. 그것을 본 미국의 저자들과 출판사들은 한국이 정말 쓰레기 같은 나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거짓과 불법으로 찍힌 책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학문을 한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모독입니다. 법이 없었을 때에는 몰라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말 경에 이미 법이 확정되어서 못하게 되어 있고 현행법에 걸립니다. 가끔 제가 복사판을 사면 업자가 오고 먼저 저작권 시효가 끝났는지 확인을 합니다. 어느 날 업자가 사전을 가지고 왔는데 너무 좋은 사전이었습니다. 그 사전은 2년 전에 제가 560만원 주고 구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50만원을 주고 판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복사판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뭐냐고 물었더니 장로랍니다. 그래서 “당장 그만 두십시오. 당신은 예수께서 오시는 날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런 비양심적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제게는 시효 끝난 것 아니고는 납품할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없으면 안사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복 주십니다.
이렇게 세상은 사상에도 관심이 없고 윤리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새는 새인데 두 날개가 잘렸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배를 비비며 삽니다. 미래의 교회가 어떠한 모습일지 생각해보십시오.
신학교에서 아주 좋은 카메라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런 일이 신학교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가 안 됩니다. 15분 정도 잠깐 나갔다가 왔는데 카메라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상과 윤리의 힘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2. 비가시적 영역: 은혜
다른 하나는 비가시적 영역의 힘입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으로, 사상이 분명하고 윤리가 뚜렷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적인 타락의 교리를 믿습니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렇게 행할 수 없는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도 풀지 못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비의 영역에 속하며, 이성의 눈으로 안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Grace,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을 가능하게 묶어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혜이며, 이 둘은 은혜에 의해 지탱이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세 가지 모두에서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런 삼각형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위해 성경과 신학을 통해 구도의 비결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성적인 사람, 윤리적인 사람으로 준비되며 또한 영적인 사람으로 준비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신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들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 공부를 잘 하면 가르치면서 먹고는 살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사상은 없지만 윤리적인 사람이라면 운동권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이 두 가지가 없으면서 은혜만 있다면 신비주의로 떨어질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B. 지성과 감성의 진자운동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이성을 매우 중시하고, 한 쪽에서는 감정을 매우 중시합니다.
제가 교리 설교를 한다고 한국 교회에 소문이 나니까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계속 교리 설교를 하시면 교인들 머리만 커져서 문제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너무 지성적으로 많이 가르쳐서 문제가 된 교회를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가서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 교회는 상상 속에나 있지 현실 속에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수 많은 교인들을 양육해 보다가 신학대학원 입학하고 1,2학년 된 학생들이 교인들로 등록을 해서 교리반에서 시험을 봅니다. 평균 점수가 20-40점 나옵니다. 등록한 교인 10명 중에 5명은 삼위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삼위일체를 아는 사람들 중 8명은 양태론자입니다. 너무 가르쳐서 문제가 되는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외국에서 이런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 자체를 신비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무 지성 중심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지성의 스위치를 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아주 무지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지성이 신앙의 중심인가 아니면 정서가 중심인가, 의지가 중심인가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진자 운동을 했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의지는 정서 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관찰해 보면 초대교회 생명력 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불길이 식어가고 로마의 물리적인 핍박의 단계를 지납니다. 그리고 아주 정교한 논리로 기독교가 헛된 것이라는 것을 사상적으로 공격합니다. 이 때 아주 유능한 변증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기독교 신학을 열심히 변증 하면서 점점 기독교가 지성중심으로 흐르게 됩니다.
1. 사도시대: Motanism-Gnosticism
그러면서 교회에 생명이 식어가고 있을 때 이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몬타누스주의(Motanism)입니다. 몬타누스 자신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면서 극단적인 신비주의적인 운동을 펼치고 터툴리안 같은 저명한 교부들도 그 유혹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런 운동들은 극단적인 신비체험과 열정, 감성을 중시한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2,3세기에는 시계추가 정반대인 지성쪽으로 가면서 아주 거대한 지성주의적인 이단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스티시즘(Gnosticism, 영지주의)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지식이기 때문에 미천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구원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본질을 지성에 두는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2. 수도원운동(4~10세기)과 Scholasticism
그러면서 다시 수도와 개인의 체험, 내적인 광명과 직관을 중시하는 수도원주의로 흐르게 되었는데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성 안토니우스같은 사람에 의해서 수도원주의가 시작됩니다. 수도원주의는 4세기부터 시작이 되어서 10세기까지 장시간 계속되게 됩니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지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바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입니다. 스콜라주의는 11세기에서 14세기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스콜라주의는 그리스 철학의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 세계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영적인 은사, 체험같은 것들을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신앙적인 열정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교의 관할 안에서 교회의 권징은 더욱 철저해지고 성경 해석은 엄격하게 교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3. 신비주의(J. Tauler, Eckhart, H. Suso,14-5세기)
14세기에서 15세기에는 다시 시계추가 반대편으로 가면서 체험과 열정, 내적인 교통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중세 후기의 신비주의는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 요한 타울러(J. Tauler), 하일리 수소(H. Suso) 같은 사람들과 얀 후스(Jan Hus)의 영향으로 나중에 생겨나게 된 공동생활의 형제단인 로이스 브리크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소위 새로운 경건 운동이라 불리우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라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에카르트는 정죄되고 교황 요한 2세는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의 상당 부분을 이단으로 공포해 버렸습니다. 차가운 스콜라주의의 늪에서 기독교 신앙을 건져내고자 했던 어떤 하나의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4. Devotio Moderna-종교개혁(16세기)
이렇게 출렁 거리다가 16세기에 와서 실로 오랜만에 지성과 감성의 중심을 잡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불변하는 계시의 말씀을 성경에서 찾고, 그리고 소위 이야기하는 ‘스피리투스 쿰 베르보’(spiritus cum verbo),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경이라는 신앙고백을 낳았던 종교개혁이 태동되게 된 것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교회의 강단은 지식과 감정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개신교 안에서 분파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첨예한 교리 논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는 성찬론과 교회론에 대한 논쟁들, 이런 속에서 논쟁을 위해 다시 스콜라주의가 체택되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거치면서 16, 17세기까지 건전했던 신학들이 18세기로 넘어가면서 1825년을 마지막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경건과 지식의 온전한 결합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성으로 흐르게 됩니다.
5. 개신교스콜라주의- Nadere Reformatio(17-18세기)
이런 상황 속에서 교리 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건 운동이 일어나는데 바로 17세기 말과 18세기에 일어났던 ‘경건주의 운동’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종종 간과하지만 이 사이에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네덜란드에서 일어납니다. 역사적으로 ‘나데레 레포르마티오’(Nadere Reformatio) 라고 하는 제 2의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운동이었습니다. 보에티우스, 윌리엄 에임즈같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었고, 특히 보에티우스가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 청교도 운동에서 일어나던 생생한 신앙의 감격을 영국에서 경험하면서, 네덜란드는 16세기 이전에 온 기독교 종교개혁의 신앙이 열기가 식는 것을 보면서 커다란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식과 청교도의 탁월한 경건을 결합시킬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신학교에서 대대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분이 학교 안에 기거하면서 소그룹을 만들고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치면서 엄격주의를 도입해서 학생들이 철저하게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생활하도록 자신이 또한 모본을 보였습니다. 후에 여기에서 교육을 받고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경건주의 운동의 종자씨가 된 것입니다. 이때에도 지성과 감정이 아주 철저하게 중심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7,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독일의 할례대학을 중심으로 진젠도르프 백작과 후랑크푸르트의 목회자였던 슈페너등에게서 일어난 이 운동은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근대의 복음주의 뿌리가 경건주의 운동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그들의 기치는 순수했던 의도였지만 그들은 교리를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였지만 삶의 실천, 인류의 평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에 마음을 쏟으면서 체계적인 신학을 일부러 거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200년 후에 할레 대학이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6. Pietism(18세기)- 이성주의/자유주의(18중-19세기)
이러면서 경건주의의 물결도 끝나게 되고 여러분이 역사에서 아는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계몽주의의 망명아래 기독교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쓰러져가게 됩니다. 그리고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이성주의도 계몽주의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7. 오늘날: 자유주의, 신비주의, 다원주의(20후-21세기)
오늘날은 삶의 태도에 있어서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유주의, 동시에 과학주의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무엇인가 초월적인 것을 꿈꾸는 신비주의와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다원주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인본주의운동들이 아주 혼란스럽게 얽혀있는 세대로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목회자가 된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목회를 위해서 신학을 준비하는 것이고, 교회를 위해서 신학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C. 신학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신학은 결코 학문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외치는데, 절반만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학은 틀림없이 학문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도 절반만 맞는 것입니다.
학문의 모든 체계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의 능력은 크게 라티오(ratio)와 인텔레겐티아(intellegentia)로 나뉘어집니다. 라티오는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것입니다. 학문의 모든 구조는 인과관계를 두 가지 방법으로 추론합니다. 분석과 종합이라는 방법으로 같은 것들을 갈라놓고, 다른 것들을 합치면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내서 이것들을 이으면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는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가에 대해 예측하는 것이 학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학문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너무나 값진 선물입니다. 그리고 학문을 통해서만 인간은 여러 방면에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면서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자기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의 학문이라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 학문의 내용을 잘못 채운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 우리들은 학문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학은 여전히 발견한 성경의 진리들, 믿음으로 알게 된 지식들을 인과관계 속에서 엮으면서 체계를 형성하고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는 체제를 세운다는 점에서 틀림없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대상이 되는 개체가 인간보다 작은 물체나 사물, 사물 현상이 아니라 신입니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셔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종교 행위 안에서 일어난 모든 지식들이 신학의 질료가 됩니다. 질료의 신학이 형성이 되면서 학문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신학을 잘 하려면 두 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믿고 철저히 공부해서 학문의 기술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학문은 학문이지만 다른 학문과 어깨를 겨룰 수 없는 아주 고유한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학문의 목적도 주님을 더 잘 경배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
여러분은 아마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신학 과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수한 신학자들은 오히려 신학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보에티우스의 제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이론실천신학』(Theoretico-Practica Theologia) 라고 하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두 권의 조직신학 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책 두권이 생애에서 성경 이외에 최고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인용하려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모태가 이 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고, 제가 아는 친구가 미국에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doctrina는 교리, 여기에서는 신학입니다. vivendi는 삶. Deo per Christum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는 것 그것이 신학이 라는 것입니다. 신학에 대한 이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신학이 목적하는 바는 내가 한 인간으로서 how to live the way of living,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지만 내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행복한 것인가 입니다. 이것이 신학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예전에 철학이 찾고자 하였던 답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지식이 있어야지만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자기의 책『Doctrina』이렇게 말합니다. ‘praecepta vivendi et regulae credendi.’ 직역을 하면 살아야 할 교훈들과 믿어야 할 규칙들입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과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와 정확한 연결을 이루면서 흘러나옵니다. 그의 모든 삶은 신념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고를 하면서 사는 인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스트리히트를 그대로 영어로 인용을 합니다. 찾아왔습니다. 그의 전집 22권 86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e doctrine living to God by Christ.....It comprehends all Christian doctrines.....and all Christian rules directing us living to God, by Christ.’ 그에게서도 똑같습니다. 신학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가르침과 모든 규칙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Living'에 신학의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2. 삶의 sophia로서의 개혁신학
오늘날 신학에서 심지어 개혁신학에서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아주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항상 교리를 다루기 전에는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다루었습니다. 그 때 항상 일치하게 신학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혹은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한 지식이었습니다. 조금씩은 달랐지만 대의는 항상 신학이란 ‘vivendi’(Living)였습니다.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티끌 같은 인간이 사는 삶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몽주의를 거치고 19세기, 20세기 넘어오면서 완전히 실종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삶의 sophia, 삶의 지혜로서의 신학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을 진술해야 할 교의학에서는 이것이 실천신학의 분야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거기로 던져 버리는데, 실천신학 또한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실천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모든 신학의 목적이 바로 ‘the way of living’,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후 2:2). 어떤 사람은 그 구절 하나를 딱 자른 다음에 십자가 위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십자가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신학의 지평을 보면서 어디에다 십자가가 서야 하는지를 알 때에 진짜 ‘the centrality of the cross’, 십자가의 중심성이 확립이 됩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아주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십자가가 됩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주부터 십자가를 설교해야지 생각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눈물은 참 많이 흘렸지만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교할 재료는 몇 주 분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저의 십자가의 탐구의 시작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마 교회 개척하고 설교한 주제 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십자가 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혜, sophia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 당시에 사람들이 찾던 philosophy, 철학입니다. 철학에서 찾던 것이 있었는데 결국은 못 찾았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복음이라는 방법으로 계시해 주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묻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본래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데 이것이 망가지고 고장이 나서 다른 데로 갑니다.
인간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법은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인간이 참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일의 길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것은 하나의 또 다른 과정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도에 부합하는 합목적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상 이 문제를 아주 탁월하게 다룬 신학자가 우루시누스라고 하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전체를 살 돈이 없으면 우선 급한 대로 8권을 사십시오. 8권이 ‘윤리적 저술’입니다. 거기에 고린도후서 13장 강해와 천지창조의 목적, 그리고 참된 미덕의 본질, 이런 것들이 실려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논문들입니다. 그것을 치열하게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내용들을 찾아보십시오.
3. 삶의 체계로서의 경건
여러분은 개혁신학을 공부하되 현대에 있는 개혁신학을 공부하지 말고, 개혁신학의 본류를 계속 찾아가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지금은 실종되어 버린 이 주제에 대한 유장한 담론들이 어마어마하게 나옵니다. 지난번에 이 학교에 오신 리차드 멀러 교수님은 17세기에 대해 가장 탁월한 석학이신데 17세기 저작 목록이 9만 타이틀을 가지고 계시다고 합니다. 거기서 밀림에 들어온 것과 같이 어마어마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깊이 만났고, 윤리에 있어서도 탁월한 사람들이었으며 소명감에 불탔고 천재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시대를 개신교 교부들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나 중세교회의 교부에는 오류가 많이 섞였는데 이 교부의 시대는 아주 탁월합니다. 거기에서 자양분을 가지고 와서 오늘날의 신학으로 풀어내어 이 시대에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주고 충격을 받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세계를 어떤 의미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어떠한 위치이고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간다는 필연적인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너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말을 있게 하라의 의미입니다.
결국은 참된 경건은 우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나쁜 짓만 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컨닝하지 말자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이 담겨도 그것은 악인이 방귀 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체계가 아닙니다. 경건은 삶 전체를 포괄하는 체계에서 우러납니다. 그래서 사상이 없는 경건이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III. 우리 시대에 신학을 한다는 것
A. 거목의 숲을 꿈꾸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생각이 뚜렷하게 나는데 온 국토가 민둥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였냐면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땔깜으로 쓰다가 이제는 나무가 없으니까 곡괭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서 뿌리를 뽑아가지고 말려서 뿌리를 톱으로 잘라서 불을 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홍수철이었습니다. 홍수가 나면 그 토사가 어마어마하게 쓸려 내려와서 전부다 물난리가 났습니다. 그 후 1960년도 초에 접어들면서 정부가 강력하게 산림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정말 평가받을 일이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도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는 무엇이라도 작은 가지라도 꺾지 말라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네가 이렇게 서 있는데 네 손가락을 분지르면 좋겠니?” 이런 이야기 할 때면 아무도 웃지 않고 심각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울창한 숲을 이룬 것입니다. 나무와 산의 관계는 나무가 어렸을 때는 산의 신세를 집니다. 산에 묘목이 심겨지면 주위에 있는 부엽토들이 습기를 보존해주고 산 아저씨도 오고 가고 하면서 나무가 점점 자랍니다. 그래서 큰 나무, 거목이 됩니다. 미국에 가보니 진짜 자이언트 숲, 메타쉐콰이어 숲인데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열두 명이 손을 잡아야지만 나무를 감쌀 수 있었고 3200년이 된 나무였습니다. 높이는 120m쯤 되는데 나무를 자르면 그 위에서 30명이 둘러 앉아서 수건 돌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나무들이 쫙 뻗어 있습니다.
이런 나무들이 되게 되면 이제는 나무가 산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무의 신세를 집니다. 허허벌판이던 그곳에 습기가 보존이 되고 부엽토들이 떨어지면서 벌레들이 살기 시작하면 새들이 날아옵니다. 그리고 작은 동물들이 살기 시작하고 큰 동물들이 와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씨앗들이 바람에 날려 흩뿌려지면서 작은 새끼나무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의 큰 나무가 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씨를 뿌립니다. 자기가 거목으로 있는 동안에 많은 나무들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숲입니까. 나무들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고 형나무와 동생 나무들이 아빠나무처럼 크고 싶어서 기지개를 폅니다. 숨을 들여 마시면 숲속의 공기가 싱그럽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조국교회의 역사가 바로 그러한 나라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큰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광을 위해서 신학을 하지 말고 십자가를 위해서 신학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거목의 숲이 사라져 가는 살림 황폐화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들을 만나면 늘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20명 학생 가운데 19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살아있는 사람 말고 죽은 사람도 좋으니까 말해 봐라.” 그런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을 찾지 못했고, 죽어있는 분은 만나려면 책을 읽었어야 하는데 책을 읽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사상이 전해져 내려가야지 스승과 제자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승이라는 것은 사상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졸업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배운 것이 전혀 쓸데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선생님들이 쓸데 없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유용지용의 지식은 소용의 지식이고 무용지용의 지식은 대용의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배워서 누구든지 오늘 배워서 내일 사용 할 수 있는 지식은 소용의 지식입니다. 조금만 쓰는 지식입니다. 진짜로 크게 사용하는 지식은 오늘 배워서 내일 도저히 쓸 수 없는 지식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집을 읽는 것이 신학공부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읽지 말아야 할 설교집이 있습니다. 오늘 읽고 내일 쓸 수 있는 설교집은 모두 좋은 설교집이 아닙니다. 읽은 다음에 바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설교집은 좋은 설교집이 아닙니다. 읽는데 이것이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 앞으로 어디로 나가는지 맥이 안 잡히고 도저히 어떻게 요약을 해야할지 모르는 설교인데 다 읽고 나면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용지용의 지식이지만, 대용의 지식인 것입니다.
B. post-modernism과 탈신학화
사상을 던져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 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신학화입니다.
1. 모더니즘의 출현과 몰락
모더니즘은 근대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종교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던 중세를 폐기하고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이 판단의 최고의 기준이고 권위가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을 해도 여기에는 공통적인 도덕적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 통일적인 것들을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이 근대주의였습니다.
근대주의는 데카르트를 통해서 도입이 됩니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독창적인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데카르트의 사상은 14세기 스콜라주의가 붕괴되고 중세시대가 무너지면서 이 안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서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적인 재료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원소들이 태어납니다. 이것들을 종합하면서 독특한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구축합니다.
2. 탈근대와 가치상대주의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무너집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류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성은 신뢰할 수 없다는 선언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선언은 이성이 합니다. 그 말은 믿을 수 있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등장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에서 절대적인 가치라고 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이제 해체주의, 허무주의, 다음에 실존주의 같은 것들이 들어오고,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치들이 모두 상대주의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신 똑바르게 차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이 시대 정신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휩쓸려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냥 단순하게 학문의 차이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과학, 의학, 요리, 심지어 수학, 패션, 조경학, 음악에까지 전방위적으로 들어오고 심지어는 15초 광고 카피에도 이러한 정신에 잠식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분명한 잣대가 있으면 판단을 하지만 잣대가 없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면서 자기도 상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괜히 교리를 가르쳐서 뚜렷한 입장을 밝혀서 서로 반대편의 사람들을 만들고 그런 것들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정신에 물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스케 마티조’라는 단어인데 틀에 찍혀 내는 것입니다. 이 시대 정신에 의해서 계속 찍혀 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형식을 가졌지만 내용은 이미 다 양보해서 세상의 정신으로 꽉꽉 채워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날 여러분이 잘 아는 조엘 오스틴입니다. 가끔 해외 집회 가면 조엘 오스틴 집회를 틀게 됩니다. 어떤 날은 내복바람으로 앉아서 30분을 이야기 합니다. 청산유수고 발음도 깨끗합니다. 얼굴은 짜증나도록 예쁘게 생겼습니다.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3. 지식의 대상: 하나님+세계+인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사상에 대해서 굳은 신념을 가지고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상은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상은 무엇에 관한 지식인가? 그 지식의 대상이 셋인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입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반이 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물론 교리를 가르치지만, 1, 2년쯤 다니면 교리반에 들어와서 저와 같이 공부를 합니다. 루이스 벌코프 책으로 공부를 하는데 『Manual of Christian Doctrine』을 14주 동안 서론부터 종말론까지 공부하고 매주 시험을 봅니다. 그리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봐서 90점이 넘어야 합격이 됩니다. 합격이 되면 그 때 비로소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교사, 구역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3-4년이 지나 고급 교리반에 올라오게 되면 라틴어에서 직접 번역한 기독교강요 6권으로 된 2,400페이지를 공부합니다. 하루에 150페이지씩 정확하게 시험을 보면서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봐서 85점을 넘으면 합격이 되는데 합격해야 임직투표에 나올 수 있습니다. 안수집사나 신학지식이 없으면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 직분은 꿈도 못 꿉니다. 저는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복창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데카르트가 말했습니다. 원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Si fallor, sum’, 내가 만약에 오류에 빠진다면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4. Studeo, ergo sum.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스투데오 에르고 숨’(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의무는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백처럼 ‘인텔렉투스’(intellectus), 지성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식을 통해서 행복을 얻게 됩니다. ‘Studeo, ergo sum’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무엇을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공부할 대상은 세 대상인데,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입니다. 보편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장 잘 계시되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고 이 지식으로 안내하는 가장 훌륭한 교과서는 성서입니다. 그것이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부 하라고 촉구하고 회개시키고 일깨워 잠자는 그의 지성을 깨워 행복으로 그를 인도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면 목회자의 자리에 서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preaching’이라고 하는 설교자를 위한 잡지가 있는데 맨 뒤에 어느 신학교에서 입학생 모집 광고를 내면서, 목사가 앉는 하얗게 낡은 목재 의자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을 찍어놓고 ‘It's not easy chair’, 이것은 아무나 쉽게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영광도 없고 존귀도 없고 돈 방석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대접을 받는 자리도 아닙니다. 만물의 찌끼와 같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강대에 놓인 목사의 작은 의자는 ‘It's not easy chair’, 쉽게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닙니다. 쉽게 앉을 수 있는 의자라고 생각하면 지금부터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C. 개혁신학: 그 불멸의 가치
우리들이 진리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도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진리를 이해하고 붙들 것인가. 불멸의 대안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개혁신학입니다.
1. 외로운 섬 하나,「기독교강요」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중세는 종교개혁과 반대기 때문에 잘라내고 종교개혁 중에서 마르틴 루터는 너무 주관주의에 치우쳤으니까 잘라내고 나면 칼빈만 남습니다. 아래는 베자 이후부터 이성주의로 기울었으니까 잘라내고 칼빈의 설교와 주석은 너무 기니까 잘라내면 외로운 섬 하나『기독교강요』만 남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천여명이 넘는 이 학우 가운데 『기독교강요』를 완독한 사람이 10%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강요』는 우리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한 정도의 성도가 방금 예수를 믿어서 본격적으로 성경 읽기 전에 입문서로 기독교신앙에 대한 개요를 파악하라고 쓴 책입니다. 칼빈은 특별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마어마한 개혁주의 유산으로 흐르는 그 많은 줄기 중에 한 줄기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칼빈의 신학사상을 형성했고, 형성된 칼빈의 개괄적인 사상이 어떻게 구체화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공부 없이는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신학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역사적 맥락의 개혁신학
a. 보편교회와 그리스철학
그래서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개혁신학을 공부해야 되는데 그것은 보편교회와 그리스철학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항상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양쪽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가 있습니다. 원래의 기독교 신학은 어떠한 형태도 필요가 없는 생생한 삶의 고백이었는데 건방진 신학자들이 아는 것이 그리스 철학이니까 그 틀에 기독교 사상을 쑤셔 넣는 바람에 기독교가 변질된 것이라는 설명이 최악의 견해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고 초기에 이야기 합니다. ‘아,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는 얼마나 똑같은가. 우리 플라톤 선생님 저작 중 단어 몇 개만 고치면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의 진리인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항상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리스 철학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하는 아주 중요한 얼개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의 영향으로 잘못된 것들과 유익하게 이바지한 것들을 구별하는 세심한 분석 작업과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끝낼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만약 사람의 몸이라면 눕혀 놓고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철학이 어떻게 잘못 들어 왔는지 분석할 때 외과의사 같은 아주 세밀한 칼을 가지고 다뤄야 합니다. 푸줏간에 있는 사람처럼 고기 썰 듯이 잡으면 안 됩니다. 푸줏간의 아저씨는 소고기, 돼지고기 구분만 해서 칼로 내리치면 찢어지지만 수술 하는 사람은 작은 신경줄 하나를 건드리냐 안 건드리냐에 따라서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고 정상인이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상당한 양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b.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인문주의의 이해 없이는 종교개혁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저작을 단 6개월만이라도 읽어 보신분이 계신지 궁금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스쳐지나가는 사람이고 우리는 칼빈이라고 생각해서 읽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소중해서 간직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c.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중요성+한계
그 후에 공부해야 할 부분은 개혁파 정통주의입니다. 17세기에 황금기를 이룹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1560년경부터 1725년까지입니다. 17세기가 알토란같은 시대인데 어마어마한 학자들이 나와서 찬란하게 꽃을 피웁니다. 총신에 에보가 들어왔다고 하니 들어가서 보십시오. 입을 벌리고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개혁파 교인인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원천이 있습니다. 개혁신학의 원료들을 공부하게 되면, 개혁신학의 본래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놀라운 이해를 갖게 되고 오늘날의 신학이 발전하고 있는 면도 있지만, 어느 면에 있어서 왜소해지고 관심사가 축소되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정말 성경적이고 사변도 뛰어나고 가톨릭과의 싸움도 능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변론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와의 적실성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끔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가 안 됩니다. 서철원 교수님이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학교에서 열심히 개혁신학을 가르치는데 어느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목사님 말 듣고 개혁신학 했다가 교회가 안 되면 목사님이 책임지시겠습니까” 라고 했답니다. 자기 설교가 개혁주의적이고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개혁주의적이기 때문에 교회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와의 적실성 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어느 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근본조항이고, 어느 것이 비근본 조항인지를 따지면서 현대와 교감을 하면서 목회를 하고 개혁신학을 현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상당한 반성과 공부와 성찰이 필요합니다.
IV. 그러면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A. 교과과정에 충실할 것
그러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강의를 듣고 보니까 학교 공부에만 매달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먼저 권면하고 싶은 것은 교과과정에 충실하십시오. 학교에서 배우는 커리큘럼을 부지런히 따라가십시오. 그 대신 자기가 특별한 관심사가 없는 한 공부를 넓게 펼치지 말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M.div 수준의 공부를 아주 집약을 해서 그것을 집중해서 소화하십시오. 여러분 중 강의 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하고 레포트 쓰는 경우 있습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도 그럽니다. 그것은 전부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학생인 우리에게 모든 교수님들의 강의가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만약에 강의가 만족이 안 되면 앞자리에 앉아서 하얀 노트를 펴고 수양을 하는 기분으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정자체로 적었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데, 계속 적습니다. 수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성에 도움을 줍니다. 그 대신 수업 내용을 학기 끝나기 전이나 더 욕심을 내자면 월요일부터 금요일 안에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요일부터 월요일, 공휴일, 방학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들을 보면서 독자적으로 공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세월이 지나면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됩니다.
B. 신학적 사유: 준비와 학문들
1. 언어습득에 몰입할 것
그러면 신학적인 사유를 위해서 어떤 준비와 학문들을 할 것인가?
첫째는 언어습득에 몰입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아무것도 필요 없이 쭉 읽으면서 한글 성경 참고에 넣어 둘 정도로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부지런히 공부해서 펼쳐놓고 어디가 번역이 잘못 되었는지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까지는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희랍어는 오래 못했지만 히브리어는 정말 재미있어서 하루에 3-4시간씩 3년 정도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도움이 많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영어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영어를 읽기만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쓰고 말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대 영어뿐만 아니라 좋은 작품들이 19세기, 18세기, 17세기,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의 작품들도 옛날 문법을 공부하면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영어를 숙달해야 하는데, 이것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한번 영어에 완전히 빠져 몰입이 되어서 꿈을 꿔도 영어가 떠오를 정도로 한 2-3년 해야지만 겨우 영어가 보입니다. 영어가 간단한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게 독해를 해 낼 수 있도록 읽어야 합니다.
그래도 모자랍니다. 저는 처음에 라틴어는 왜 배워야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혁파 정통주의와 교부들을 만나면서 라틴어가 왜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라틴어를 공부하십시오.
욕심을 더 내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하기를 원한다면 화란어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화란어와 독일어 그리고 중세 불어를 하면 아주 좋습니다.
2. 인문학적 소양을 강화할 것
둘째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강화해야 합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문학, 역사,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문사철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옛날 같지 않아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상당히 많이 열려 있습니다. 강좌도 많이 열리고, 인터넷도 되고 마음만 먹으면 사실 공부할 기회가 많습니다.
3. 특히 철학에 대해 공부할 것
셋째는 특히 철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총체적인 역사의 맥락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한 사람일수록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맥락이 끊어진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일수록 철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작년에도 리차드 멀러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철학공부와 신학공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더니, 아주 딱 잘라서 철학적인 지식 없이는 신학 공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어느 철학 사상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항상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eclecticism 이라고 하는 절충주의적인 방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상을, 성경의 내용들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툴로서 쓰는 것입니다. 무슨 철학을 공부해야 하면 우선 그리스철학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누스라는 사람을 염두해두는데, 플로티누스는 상당한 강조점을 가지고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엔네아데스(Enneades)는 기독교신학을 조직화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친 책이기 때문에 반드시 숙독해야 합니다.
4. 자연과학에 대해 관심 가질 것
넷째는 자연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으로부터 7-8년 전에 1년 동안 과외선생님 불러서 천문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신학 자체 안에서 정보지 못했던 신학의 아름다움을 천문학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책도 읽고 자료들도 계속해서 봅니다.
5. 현대사회와 세계관을 공부할 것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가 『Evangelical Disaster』라는 책을 씁니다. 『복음주의의 위기』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아주 중요한 사상가니까 반드시 탐독을 하고 전 작품들을 숙독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에 나왔던 낸시란돌프 피어스나 혹은 찰스 콜슨 같은 그런 후학들의 작품도 광범위하게 읽고 섭렵해서 여러분 사상의 자양분으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다섯째는 현대사회와 세계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프란시스 쉐퍼와 그의 제자들인 로저 콜슨, 란돌프 넨시, 란돌프 피어시, 그리고 마이클 호튼, 특별히 데이비드 웨일즈의 4부작을 반드시 필독해야 합니다. 대단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해서 현실 사회를 움직이고 이 시대의 정신과 규칙들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C. 신학 자체의 분야들
1. 교의학과 성경신학의 중심성
신학 자체의 분야들로 들어가서는 교의학,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에 대한 책들은 굶더라도 계속 사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대원 졸업할 때 한 3천 권 정도 책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피 눈물 나게 모았던 것입니다.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것입니다. 생각 없이 있으면 졸업할 때 책꽂이 하나도 못 채웁니다. 책에 대한 탐욕은 안 되지만, 적당한 욕심을 가지고 책을 모으십시오.
2. 보편교회의 신학
a. 초대교회 교부들
그리고 그 다음에 보편 교회의 신학을 공부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서 공부 안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 이레네우스(Irenaeus), 오리게누스(Origenes),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갑바도기아 교부들 중에서 유명한 세사람 나지안수스의 그레고리(N. Gregoprius,), 바실(Basilius), 니사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issa)는 매우 중요합니다. 터툴리아누스와 이레네우스는 반드시 공부하십시오.
b. 중세교회 교부들
중세로 넘어가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일평생 읽을 결심을 해야 합니다. 저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전공한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났는데 모두 신앙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다입니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 선악, 시간, 자유, 이런 것만 해도 한 학기씩 공부해야 할 정도로 분량이 방대합니다. 그런데 한글로 다 번역이 안 되어 있어서 영어로 꼭 읽어야 합니다. ‘The Work of Augustinus', WA같은 책은 가장 최근에 번역된 책들입니다. 구입하고 돈이 없으면 NPNF나 혹은 학교에 있는 FC(Father of Church), 가톨릭에서 나오는 120권 정도로 나온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런 시리즈들을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부지런히 읽어가야 합니다. 2차 자료를 읽지 말고 원전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중요하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다마스쿠스 요한, 동방 교회의 마지막 교부입니다. 그 다음은 안셀름(Anselmus)입니다.
다음은 피터 아벨라르도스(Peter Abelardus)입니다. 헬로이즈가 그의 연인인데, 헬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이 아주 유명합니다. 소설로도 나왔습니다. 아주 유명한 천재적인 사변 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의 개념 중에서 중요한 것이 ‘비인칭적 선행 개념’입니다. 반드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칼빈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있는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의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는 결정적인 영향을 칼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주 대사변가였습니다.
다음은 여러분이 생소하겠지만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두 사람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아비첸나(Aviccena)와 아베로에즈(Averoez)라는 사람입니다. 아비첸나는 이븐첸나라고도 불리우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18세기에 이미 모든 학문을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랍철학이 중요시 되는가 하면 사실 십자군 전쟁이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군 전쟁 나기 전까지는 로마에서 가르치기를 기독교국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혜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이교도들은 짐승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아랍제국을 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자기네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학문의 체계가 갖춰져 있고 대학이 서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학문이 발달 할 수 있었는지 보니까 아비첸나, 아베로제 같은 인물이 나왔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죄해서 다 소각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남은 자료들을 이 사람들이 입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갖고 자신들의 학문의 체계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기독교국가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빅토리아누스 같은 사람이 번역을 해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 저작을 라틴어로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전부 다 정리가 되어서 싹 없애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희랍 철학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도입해서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아랍철학이 중요하고, 특별히 여기에서 알가자리파와 알파리비파라고 나오는데 한쪽에서는 믿음 제일 주의이고, 한쪽에서는 지성과 믿음을 겸하여 가야 한다라고 하는 양파가 나옵니다. 그 알파라비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대철학자 가운데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한 사람 정도만 기억을 하고 공부를 하면 됩니다. 이 사람은 유대교의 맥락에서 풀어놓았습니다. 물론 이전에 알렉산드리아 필로 같은 사람을 공부하면 매우 유용합니다.
c. 스콜라주의
그리고 스콜라주의로 넘어오게 되는데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프란치스코학파의 보나펜츄라(Bonaventura),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나오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사실은 개혁신학과는 안 맞는 면도 많이 있지만,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생소하겠지만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거의 60% 이상이 토미스트들입니다. 토미즘의 사상을 다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신학의 방법론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도 토미스트 신학적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반드시 공부해야 됩니다.
d. 14세기 스콜라주의
14세기 스콜라주의로 넘어가면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부활을 하고 둔스 스코투스(Duns Scottus)라고 하는 중세철학의 마지막 관문이 나옵니다. 첫 번째 문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었고 마지막 닫는 그 문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tus)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e. 근대로 가는 길목
그리고 이제 근대로 가는 길목에 윌리암 오캄(William Occam), 그리고 유명한 실재론, 유명론, 관념론 논쟁에 대한 역사가 나옵니다.
3. 루터 이후 종교개혁자들과 후예
마지막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와 후기 개혁 신학자들의 형이상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후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같은 사람은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제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루터는 물론 원천으로서 공부를 하고, 루터는 다행히 컨콜디아사에서 한글로 많이 번역을 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노란색으로 된 루터 전집 영어판이 거의 다 번역이 되었습니다. 80권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을 사서 읽어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a. 종교개혁2세대
종교개혁 2세대에 넘어가서는 칼빈, 츠빙글리, 멜랑히톤, 무스쿨르스, 불링거,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오는데 버미글리가 나옵니다. 칼빈이 제네바 목회자 후계자로 여섯 번을 청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엔 끝까지 안 간 이태리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의 저작은 영어로 8권 정도 번역이 되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굉장한 저작입니다. 칼빈이 깊이 신뢰하던 신학자였습니다. 그 다음에, 휘페리우스, 비레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b. 전성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제가 강조하는 전성기 개혁파정통주의 시대에 들어가게 되면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우루시누스(Ursinus), 유니우스(F. Junius), 윌리엄 퍼킨스(W. Perkins), 영국 출신의 청교도입니다. 그 다음에 부카누스(Buccanus), 그 다음에 영국 출신으로서 화란에서 활동하였던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존 오웬의 선생님입니다. 폴라누스(Polanus), 고마루스(Gomarus), 이는 보에티우스(Voetius)의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폴리안더(Poliader)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책은 어느 것을 펴던지 만족을 줄 수 있는 거대한 저작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30% 정도는 영어로 되어 있고 70% 정도는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에티우스(Voetius), 존 오웬(John Owen), 피터 판 마스트리히트(Mastricht, W), 이 사람은 보에티우스(Voetius)의 제자입니다. 튜레틴(F. Turretin)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 유고히 빛나는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변증신학강요』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네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미국에 있는 남침례신학교에서 앨버트 몰러가 학장이 되었는데, 이분의 개인 장서가 7만권이랍니다. 그것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분이 총장이 되고 나서 자유주의로 가는 학교를 바로 잡고 모든 박사과정을 졸업한 학생들에게 거의 암기하다시피 요구하는 텍스트가 있는데 그것이 튜레틴의 『변증신학강요』 4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행이 영어로 번역이 되어 있으나 만만한 영어가 아닙니다. 이 책은 찰스 하치가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브라켈(W. a Brakel)이라는 사람이 『the Christian Resonable Service』라고 하는 화란어에서 영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아주 좋은 책입니다. 토마스 리즐리(T. Ridgely), 그 다음에 하이데거루스(H. Heideggerus)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4. 현대개혁신학을 공부함
a. 미국 복음주의의 뿌리 논쟁
현대 개혁신학에서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한 편은 미국 복음주의의 뿌리는 개혁파 정통주의라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18세기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실 둘 모두가 미국 현대복음주의의 뿌리이고 그 복음주의가 각국으로 수출 된 것입니다. 복음주의가 변질 되지 않고 복음주의를 제대로만 하면 그 뿌리는 결국 개혁파정통주의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는 역사적 사생아가 되기로 자처하는 신학입니다. 중세는 중세니까 잘라내고 이것저것 다 잘라 내니 뿌리 없는 신학이 나오고 설교를 해도 신학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학이 없는 탈신학화가 되어 사상이 없기 때문에 시대정신에 휩쓸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되는데 이 때 공부할 만한 사람은 18세기의 영적 부흥의 경건주의의 뿌리가 되면서 동시에 개혁신학을 유장하게 물려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입니다. 이 사람의 책은 26권 나와 있습니다. 지금 예일 대학 사이트에 보면 칠십 몇 권까지 나와 있는데 에드워즈의 메모를 모아둔 것 들입니다. 저도 그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는데 제본을 하면 한 40권정도 되는 방대한 저작입니다. 그 저작들을 7년에서 10년 정도 계획하여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20년 가까이 조나단 에드워즈와 친구 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책들을 십 년 정도 집중해서 읽은 결과를 이야기 하자면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헤르만 바빙크는 우리에게 현대적인 적실성을 적게 주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는 계몽주의와 싸운 사람이기에 생생한 적실성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는 스트롱(Strong)의 조직신학이 찰스 핫지(C. Hogde)를 거의 모방한 것이고 찰스 핫지(C. Hogde)의 조직신학은 튜레틴(F. Turretin)에서 거의 왔습니다.
b. 지난 세기 3대 칼빈주의자들
그 다음에 우리들이 공부해야 할 사람들이 20세기 3대 칼빈주의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워필드(B. Warfields)입니다. 아주 감사하게도 바빙크는 최근 그의 저작 『개혁교의학』이 완역되어 네 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워필드(B. Warfields)는 아직 번역은 안 되었으나 영어로 전집이 나와 있기 때문에 활용 가능 합니다.
c.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교의학
그 다음에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교의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쉐드(Shedd),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찰스 핫지(C. Hodge), 핫지(A. Hodge)입니다.
d. 현대신학자들
현대 신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우리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도 있고 달리 하는 사람도 있는데 꼭 봐야 하는 사람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 판넨베르그(Pannenberg), 몰트만(Moltmann) 입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우리와 다른 점이 아주 많고, 몰트만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이런 부분을 참고하여 읽으시고, 다행히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칼 바르트의 교의학은 한글로 번역이 되고 있으니 시간을 훨씬 절약해 줄 것입니다. 이후에 나온 사람들은 개혁파 신학자들입니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eymond), 도날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로버트 리담(Robert Letham)),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에드먼드 클라우니(Edmond Clowney),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 고든 스파이크맨(Gordon J. Spykman), 리차드 린츠(Richard Lintz),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빌럼 판 엇 스페이거르(Willem van't Spijker), 리차드 멀러(Richard Muller), 특히 리차드 멀러의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Baker Academic, 2003) 네 권의 책은 꼭 읽기를 권합니다.
5. 교회사와 실천신학을 공부함
교회사와 실천신학을 공부를 해야 됩니다. 정리하면 지금부터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렬히 기도하고 치열하게 공부하십시오.
V. 주님을 영화롭게 한 지성
A. 마르틴 루터의 승리
1519년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라이프지히에서 마르틴 루터는 당대 최고의 입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던 에크와 공개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사람은 잉글리슈타트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에크는 루터의 논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오벨리스크』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서 마르틴 루터를 공격하였습니다. 오벨리스크는 호머의 저작들 안에 있는 글에 표시되었던 사본학적인 표시인데, 이것은 원래의 본문인 것 같지 않다고 의심이 되면 붙이던 것이었습니다. 즉, 루터가 이러한 주장을 했는데 그것이 진짜 진리가 아닌 것 같다는 뜻으로 오벨리스크를 낸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틴 루터는 『아스테리스크』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아스테리스크는 호머의 저작을 사본 비평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에다가 표시를 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인문학적인 지식과 소양, 어떤 인간과 논쟁해도 우리가 믿는 개혁신앙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논쟁가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루터가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과...’라고 하며 꽁무니를 뺐다면 그것으로 종교개혁은 끝났을 것입니다. 천재적인 기억력과 폭포수와 같은 달변, 섬뜩할 정도의 통찰력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습니다. 이 때의 광경을 지켜보던 한 사람의 증언을 롤란드 베이턴이라는 학자가 자기의 책속에서 인용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중간 정도의 키로, 근심과 연구로 인해 살갗 위로 드러나는 뼈를 숫자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또렷하여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학식이 풍부하며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희랍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하여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충분히 판결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B. 영력만큼 귀한 지성
도쿠가와 이에하스시대에 본인방에 죠와(丈和)라는 인물과 그리고 이에노우 방에 겐낭인세키(幻庵因碩)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바둑을 대국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졌습니다. 바둑돌을 내려놓고 패배를 인정한 다음에 그 바둑판 옆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습니다.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죽는데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대충해서 되겠습니까. 지성이 영력 못지않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놀랍게 입증이 되었습니다.
1703년에 태어난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중 교회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3살 때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쓰도록 훈련을 받았고 6살 때 자기 생애 최초의 논문을 씁니다. 그것이 ‘곤충에 관하여’라는 논문입니다. 8살 때에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작은 에세이로 발표합니다. 그리고 예일대를 입학하기 전, 12살이라는 나이에 히브리어, 라틴어, 희랍어를 섭렵하고 4년 후 예일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2년 후에 그 학교 교수로 등장합니다. 그의 나이 18세였습니다. 16세에는 유럽의 권위 있는 잡지에 ‘거미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제가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 26권 중에 보면 『the Philosophy of Science』라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뉴토니즘에 대한 해석입니다. 에드워즈는 당대에 미국에서 뉴톤의 새로운 물리학에 대해서 가장 탁월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 10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외치던 계몽주의자들에게 큰 칼을 들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비극은 개혁주의를 열심히 배우고 나서 큰 칼도 아닌 작은 칼을 만들어서 그 칼을 가지고 가서 복음주의 목에다가 겨누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하니까 고쳐 줘야겠지만 좀 큰 칼을 만들고 나가서 이 세속주의, 다위니즘, 진화론, 과학주의, 과학실증제일주의, 실용주의, 종교다원주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청룡도를 휘두르면서 피를 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울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애 장난같이 공부를 해서 단도만한 칼로 복음주의 목에다가 겨누고 쥐 잡듯이 해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저쪽에 더 급한 싸움이 있는데도 모르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출중한 지성인 세 사람이 있었는데 프로망, 비레, 파렐이었습니다. 1536년 어느 날 로잔에서 공개회담이 열렸습니다. 가톨릭과 개혁파 신학자들 양측이 만나서 토론을 통해 도시 전체가 가톨릭에 남든지 개혁파로 돌아가든지 합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3일 동안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칼빈도 거기에 있었지만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나흘 째 되던 마지막 날은 토론의 주제가 성만찬이었습니다. 가톨릭 측의 유능한 변증가인 미마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교부들의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창백한 얼굴에 깡마른 체구의 한 젊은이가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선을 변론자 미마르에게로 꽂았습니다. 뜻밖의 인물의 출연에 의아해 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룩한 교부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중에 당신보다 교부를 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부의 이름을 들먹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존경한다는 교부의 저작을 철저히 읽지 않은 것은 참 유감입니다. 당신이 교부들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했다면 그 저작 중 어떤 구들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준비된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칼빈은 가톨릭 측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논거들이 철저히 성경과 교부로부터 이끌어져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혁파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자신들이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칼빈은 먼저 교부 터툴리안의 견해를 인용한 후 그것을 주석하기 시작했고, 교부 크리스소스톰의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히기를 “이상은 크리스소스톰의 설교 제 11장 중간 부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23장 마지막 부분이며...” 마니교도인 아디만투스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또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만투스 반박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98편 주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설교 시작부분인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8번째 설교 아니면 9번째 설교일 것입니다.” 상당히 긴 시간이 흘렀지만, 교부들을 인용하는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모인 가톨릭의 연사들 중 어떤 사람들에겐 생소한 교부의 이름도 등장했습니다. 칼빈은 원고도 책도 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기억 속에서 어마어마한 신학적 자료들을 그들 앞에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천재성이 드러난 순간이 아니라 자기 신앙에 의해서 확증되고 성령에 의해서 감동이 된 거룩한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확신에 찬 칼빈의 증언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가 적대적이라고 하는 교부에 대해서 껍데기도 못 읽어 본 사람인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그 책을 읽었더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좌중 가운데로 내린 칼빈의 결론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은혜에 의해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진리와 사실 안에서 우리를 결합시켜 주는 영적인 교제, 우리의 구세주와 연합시켜 주는 영적인 연합, 곧 성령의 주를 통하여 연합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칼빈은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연설로 말미암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회중조차도 진리에 대한 무엇인가 결정적인 판결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 교단의 한 탁발 수도사가 손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은 당대에 최고 인기를 모으던 대중적인 설교자 장 탕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웅변적인 설교로 교회당을 흔들어 놓았을 그 사람이 손을 들고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어쩌면 칼빈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의 혀는 목구멍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서가 말하는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하는 완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들은 바 칼빈 선생의 연설을 통해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동안 무지 때문에 오류 속에서 살았고, 그릇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왔습니다. 나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슬려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빕니다.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내가 그릇된 것을 가르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다. 나는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의 순수한 가르침만을 따르기 위해 성직의 옷을 벗어버리겠습니다.” 120명의 사제들이 수개월 내에 수도원을 탈출해서 개혁교회로 돌아오고 로잔은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바람 잡는 허세, 소위 이야기 하는 영력이라고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태도, 뭔가 사람들을 휘어잡으려는 정치적인 수단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심오한 능력과 강한 은혜가 있었고 거기에는 아주 분명한 지식에 대한 신념, 그 진리를 능히 확신하고 변증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창, 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엄청난 일들을 스위스 로잔에서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1. 치열하게 살며 공부하라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 공부입니다.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휴식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 나는 고3이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고3은 미팅도 안 합니다. 영화관람 같은 쓸데없는 데 시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학에 들어가서 하면 돼.” 라고 했더니 “목사님, 우리는 언제 대학에 들어갑니까?” “천국에 가서 하자.” 지금은 아직 때가 낮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공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만할 때는 내가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습니다. 이제는 몇 년 전부터 교회에서 책을 사 줍니다. 사택 준다고 할 때도 난 교회에서 10년을 살았는데 더 살아도 좋으니 사택 살 돈으로 차라리 책을 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책도 사 줄 테니까 아파트로 이사 가랍니다. 그래서 30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끔 책꽂이를 붙들고 웁니다. 그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지만 지금은 책은 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책 읽는 시간보다 더 가치가 없는 일들인가 하면 아닙니다. 대부분의 일들은 그것들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를 안 하겠습니까. 집회를 안 하겠습니까. 저술을 안 하겠습니까. 다 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덜 먹고, 덜 자고, 덜 쉬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지 휫필드가 말했습니다.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으리라.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하시고]
정말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공부 안 하면 10년, 20년 후에 이 교회 가서 한 2년 있으면 발로 차이고 어떻게 뚫어서 다른 교회 가면 한 3년 있어서 발로 차이고 이렇게 몇 번 차이고 나면 은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허접한 인생을 살려고 우리가 세상길 버리고 이 고난의 신학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잘 준비되어서 잘 짜야 합니다.
2. 은혜의 샘물 곁에서: 성경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절대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없는 사람이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자유주의자의 논리가 너무나도 정교해서가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도다.’ 라고 고백하며 매일 울 수는 없을지라도 한 두 주의 한 번 정도는 성경을 읽다가 펑펑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졸업할 때 쯤 되면 성경과 찬송 군데군데가 눈물로 우그러져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 말씀의 사람입니다.
3. 마음 쏟으며 기도하라
그러나 이 성경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리라는 것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사람일지라도 공부를 많이 하면 교만해 집니다. 자기처럼 모르는 사람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쏟는 기도 생활을 해야 감격이 있습니다. 마음을 쏟아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4.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라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2학년 때까지는 전도사를 안 하면 좋겠습니다. 결혼을 했다든지 생계형으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면 할 수 없지만 항상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을 잊지 말고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몸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망가진 교회라면 더 사명감을 느껴야 합니다. 망가진 교회에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과 함께 죽음으로써 여러분 때문에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야합니다. 마음속에서 사랑하고 찾아가고 싶고 그리운 교회가 있는 상태에서 신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선결 조건입니다. 그래서 교회 속에서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성도들과 기쁨 속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를 옮길 때는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고 옮기십시오. 그 대신 1년 있다가, 6개월 있다가 교회 도망 다니면 쓰레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가면 끝까지 봉사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VI. 결론
지금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지만 이렇게 준비된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