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김경애
Ⅰ. 들어가는 말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할 말씀의 제목은 아름다움과 신학이라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회를 하다가 정말 목회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볼 때에는 정말 아닐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또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처음부터 소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소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소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 어떤 내용을 다룰지 목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순서는 Ⅰ. 들어가는 말 Ⅱ.올바른 신학함: 지식과 사랑의 결합 A.개혁주의의 목회의 전통 B.부흥주의의 어두운 유산 C.하나님의 아름다움 Ⅲ. 신학을 열심히 공부함 A.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B.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Ⅳ. 별이 빛나던 밤에 Ⅴ. 맺는말 이런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먼저 아까 말씀드린 문제 제기에 있어서 목회자가 어떤 자기의 소명을 따라서 사역하고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소명을 체험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소명의 체험의 핵심은 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깊은 체험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자기가 단지 설교하기로 결심하거나 목회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저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지성에 벼락을 맞는 그런 사건으로써 자신의 인생의 중심축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는 깊은 경험 속에서 목회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목회의 체험이고 이런 목회자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그런 부인할 수 없는 강력한 영적인 경험, 회심의 경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두 번째는 그 소명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소명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소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순간적인 영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이전에 받은 그런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의 경험이 자신 안에서 계속 반복되고 그리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이런 경험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지만 이런 신앙의 경험들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올바른 신학함
그 다음을 보시면 올바른 신학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지식과 사랑이 이상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단순한 과학적인 지식과는 다릅니다. 과학적인 지식들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의 삶과는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이 사랑으로 화합하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학교 문장에 보니까 ‘삐에따 세뜨 아카데미아’ 라고 나오는데 원래 칼빈은 ‘삐에다스 스껜띠아’ 라고 했습니다. 경건과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지식과 사랑이 결합됨으로써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게 하는 지식이 되고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시면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신학의 목표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서 그래서 그 지식에 붙들려서 살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목표이고 또 자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것이고 지식과 사랑의 성장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개념은 우리들이 사물이나 물건을 아는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아띠리브뜸(attributum)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과 모두스 오페란디(modus operandi) 그 성품이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사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어서 비참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불쌍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한 시행방식입니다. 인간의 일생은 신자의 일생은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이 어떠함과 그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배우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알게 되고, 신뢰하게 되고,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의 목숨까지도 우리 주님께 의탁할 수 있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을 보자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심미적인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들이 시장에 가서 날이 추우면 아무것이나 사서 입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거울 앞에서 몇 번씩 입어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어떤 것이 아름다울까? 내가 입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고 나도 기분이 좋은 그런 아름답고 편안한 옷일 뿐만 아니라 편한 것으로 말하면 사실은 운동복이 제일 편하지만 우리가 입었을 때에 어떤 것이 나에게 잘 어울리고 정말 좋은 것일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키가 작다면 세로로 줄이 쳐진 옷이면 키가 커 보일 것이고 또 너무 많이 먹어서 몸집이 뚱뚱해졌다면 그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면 검은색 계통의 진한 계통의 옷을 입어야지만 사람이 날씬해 보입니다. 그런 뚱뚱한 사람이 옆으로 무늬가 있는 오렌지색이나 하얀색을 입으면 더 거구가 되어 보일 것입니다. 얼굴이 하얀 사람은 하얀 옷을 입어도 예쁩니다. 얼굴이 거무죽죽하고 빈티가 나면 짙은 색의 옷을 입어야지만 그나마 얼굴이 삽니다. 그래서 밝은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사람이면 미모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어야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고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화장품 선전이 나오면 자기도 바르면 그렇게 될 줄 알지만 사실은 원판이 다릅니다. 옷 사는 가게에 가서 마네킹을 보면서 저것이 예쁘겠다고 하는데 그 체구와 그 얼굴이어야지 그 옷이 어울리는 것이지 아무나 입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을 심미적인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본받고 그 아름다움을 따라서 사는 것을 배워가면서 자기도 그렇게 살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 그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사실은 정상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려면 공부하면서 수시로 ‘야, 정말 예쁘다.’ 이런 감탄사가 수시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신학함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공부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아마 성주주일 한권씩 나누어드렸을 것입니다. 나갈 때 드릴 것입니다. 두 권을 드릴 것인데 하나는 성수주일이라는 책과 작은 책을 드릴 것인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김남준 목사의 책과 설교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입니다. 신학용어사전입니다. 저는 개념을 앞으로 내려오던 개념을 그냥 받은 것도 있지만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거나 그것을 수정하거나 고치거나 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해해야지만 제 책을 읽는 데 좋을 것 같아 두 권의 책을 드린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너무 너무 드리고 싶었던 책은 사실 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었는데 이것이 너무 비싸서 아무리 계산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45,000원이어서 아무리 계산을 해도 도저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만 주고 다른 학교는 안줄 수 없어서 그래서 결국은 총신도 망설이다가 못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여러분에게 보여만 드리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이 책을 제가 4년 동안 썼는데 이 책의 4번째 Chapter 를 지금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을 여러분이 구해서 읽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5,000원짜리 책이어서 제가 이것 3권을 써놓았는데 1권이 나왔습니다. 교정을 보는 데만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다음 책이 아마 내년쯤 나오고 그 다음 책이 후년쯤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제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이억 원 어치의 책을 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이 비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열흘 만에 3,000부가 모두 나가고 그 다음에 재판을 찍어서 재판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신앙고백으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신학이라는 것은 우울하고 힘든 학문이 아니라 아주 예쁜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학문입니다. 심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연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자기가 살아온 인생길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나를 오묘하게 인도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있지만 앉아 계신 여러분 중에서 나만큼 가난하게 신학교를 다닌 학생은 있기는 하겠지만 아주 지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다녔고 그러면서도 저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제가 공부를 하다가 서너 번 쓰러졌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무 가난해서 영양실조로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속에서도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지난날을 회상하면 정말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해서 그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심리적인 능력을 가질 때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너무 높으시기 때문에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도망가고 싶지 않은 이끌리는 사랑을 함께 느끼면서 그러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선생님을 그렇게 존경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지만 또 저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무엇을 시키려고 부릅니다. 그러면 너무 떨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떨리니까 부자연스러운데 이상하게 다른데 가고 싶지는 않아서 선생님 옆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경외의 감정입니다.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하면 하나님에 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는 것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려면 비유를 하자면 여기서 어떤 신학을 배워서 그것들을 빚고자 한다면 그것을 빚을 수 있는 반죽 덩어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신학의 질료라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의 질료는 책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날 때 그것이 신학의 질료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제빵사이면 무엇 합니까? 반죽이 없습니다. 그런데 밀가루를 집채만큼 갖다놓으면 무엇합니까. 빵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질료와 형상이 모두 같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이 형상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그 신학으로 빚어서 정말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설교가 되게 하고 삶이 되게 하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질료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합니다.
제가 제 생애에 있어서 주님을 깊이 만난 적이 많이 있지만 제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중요한 대 전환이 21살 때 회심의 사건이었고 그 다음에 제가 주님을 20대 때에는 안 만날 때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났지만 신학적으로 깊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던 때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원래 구약을 전공했는데 언어를 좋아했고 특히 히브리어, 우가리도를 좋아했고 우가리도는 제가 혼자 600페이지 사이러스 토판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아카도 라든지를 좋아했고 아마 내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유학을 가서 지금까지도 진흙덩어리를 붙들고 씨름을 하고 박사 논문이라고 써서 한국에 와서 학교에서 설을 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모두 버렸습니다. 히브리어는 지금도 하지만 버리고 청교도 설교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사실은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자가 갑자기 되었습니다. 그리고 50세가 거의 되었을 때 주님을 한번 깊이 만나고 우주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0대 중반에는 신학의 다양한 분과들이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경험했고, 40대 후반과 50대에 다 왔을 때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들이 어떻게 심포니처럼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도 책을 많이 모았지만 그때부터 미친 듯이 책을 모았습니다. 55,000권을 모았습니다. 신학교 도서관보다도 훨씬 더 양질의 도서입니다.
그런 것은 뭐냐 하면 신학에 눈을 뜨고 보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신학 안에 뿐만 아니라 신학 밖에 있는 많은 학문들에도 묻어 있고, 심지어는 하늘의 빛나는 별에도, 미생물 한 마리에도, 흐르는 시냇물에도, 주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신학을 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보여드린 책을 더 넓게 크게 본 신학입니다. 우리는 신학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학을 하니까 이것이 학문이 웅장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문들을 비교해가면서 보고 나면 이 신학이 얼마나 웅장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는 했지만 많이 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도 느끼는 것은 ‘나는 티끌 같은 존재다. 인류에 도도히 흐르는 바다와 같은, 해류와 같은 지성사 속에서 내가 아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오히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뿐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A.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
존 칼빈이 여기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종교개혁을 이끄는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이고 최종적으로 이분이 제네바에서 자리를 잡고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다가 쫓겨나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마틴 부저에게 목회적인 훈련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교인들을 목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가지면서 진짜 첫 번째 제네바에서의 사역의 기간이 교육전도사 시절이었다면 두 번째는 진짜 담임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면 세계가 다릅니다.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목회에 자신이 있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부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마 영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삐에따스스켄띠아(pietas et scientia) 밑에 보면 Cor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님이시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저것이 제네바의 칼빈의 문장에 나오는 글이고 손에다 마음을 하트를 그려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하나의 심벌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경건과 학문의 일치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학문의 추구, 학문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적 경건의 추구 이것은 모두 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개혁주의의 목회의 전통은 철저하게 지식과 사랑, 그 다음에 사상과 윤리, 이것이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사람 됨됨이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합치를 추구했습니다.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Gisbertus Voetius) 라는 인물인데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였고 이 사람은 아마 기독교역사에서 가톨릭을 가장 잘 알았던 몇 명의 학자 가운데 하나였고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그런 드라이스칼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메마른 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 사람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은 번역된 것이 거의 없고 영어로도 번역된 것이 별로 없는데 최근에 한글로 책 한권이 나왔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spiritual depression ‘영적 침체’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것을 읽어보면 마음이 굉장히 뜨거워집니다. 아주 얇습니다. 이것이 과연 세기적인 학자가 쓴 책일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프리시니즘이라고 해서 엄격주의를 제창합니다. 자, 학생들 졸지마세요. 등을 떼고 똑바로 앉으세요. 극장의자 같은데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으면 어떻게 합니까! 나도 집에 가서 자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이 사람이 학생 여러분의 모습을 보았으면 혼냈을 것입니다. 엄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도저히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의 이치에 맞지 않는 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문자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엄정함 곧 엄격함만을 말하는데 이는 인간 행동의 정확함 혹은 완전함이다.’ 뭐에 대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 곧 교훈에 일치하고 참으로 신실한 자들에 의해서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무슨 뜻입니까? 신실한 자들은 이렇게 이렇게 살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실 때에 그것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이 온전하지 못해도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도달할 수 없습니다. 도달할 수는 없는데 그렇게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입니다. 하얀 종이를 놓고 동그란 원을 그려보라고 할 때 우리 머릿속에는 찌그러진 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컴퍼스로 그린 것 같은 똑바른 원이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립니다. 우리는 죽도록 그려도 그렇게 완벽한 원을 컴퍼스로 그린 것처럼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못 그려도 생각은 항상 그렇게 하면서 그려야지만 원 비슷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엄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엄정함을 요구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하나님께서 엄정성의 근거이고 유효인이시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따라야 한다. 두 번째로 그렇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다. 절대적으로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완전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도록 그런 능력을 주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유효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함이시며, 완전함이시며, 정확함과 순결함을 좋아하시고, 당신의 자녀들 또한 그러기를 바라신다. 둘째로 말씀은 단일하고 유일한 엄정함의 기준이다. 거기로부터 그분의 양식 혹은 형상이 이루어진다. 율법과의 합치와 일치하면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만약 이러한 일치의 매듭을 건너뛴다면 종교에 있어서 지지되어야 할 것들은 검증되지 못한 채 의심이 남을 것이다. 오늘날 같이 이렇게 대충대충 살아가는 시대에는 깊이 곱씹어 볼만한 제안입니다.
그 다음에 이런 엄격주의가 엄정성을 이야기 하는데 그 엄정성의 근거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메서디스트 운동이라는데 감리교라고 번역이 되는데 사실은 감리교라고 번역을 하면 안 되고 메서디스트라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에 보면 The Oxford Holy Club 이라고 나옵니다. 존 웨슬레를 비롯해서 거기에서 신앙클럽을 만들고 18세기의 영국이 정말 산업혁명과 함께 매우 부패하고 도덕이 무너져갈 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엄격하게 빠르고 구별된 삶을 살고 그리고 옥스퍼드에서 이 Holy Club이 주동이 되어서 그런 운동을 합니다. 메서디스트 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식주의자들입니다. 삶의 방식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방식주의자라는 뜻입니다.
조지 휘트필드는 18세기에 영국의 아주 탁월한 설교자였고 칼빈주의 설교자였습니다. 존 웨슬레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고 18세기 미국의 2차 대각성운동 때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 때 일어난 각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개혁주의적인 메서디스트 신학의 기틀을 다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역시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만약에 어떤 것을 지식으로만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런 교리적인 입장은 마귀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아주 혹평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은 지식과 사랑에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는 강조합니다.
그 다음에 존 웨슬레가 바로 굉장히 조직적인 분이었고 두뇌가 탁월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체력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났다니까 대단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리교를 창시했고 종교적인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했습니다. 칼빈주의자는 아닙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해서 영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이라는 것은 요약을 하자면 지식과 사랑의 결합이고 그래서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이 어우러진 삶 전체를 포괄하는 말하자면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들을 계승해 나가는 것 그래서 지식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느냐하면 신학과 설교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신학이 없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설교의 탈신학화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의 정신훈화시간입니다. 그런 것이지 사실은 진정한 기독교 설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설교는 단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에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그를 자극해서 그래서 경건을 실천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신학과 설교가 분리되어 있는 오늘날의 이 현실은 매우 심각하게 위험하고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학함이란 결국 지식과 경건이 결합되고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 같은 기독교지도자들 즉 목회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사랑하게 된 것들을 실제로 목회 속에서 실현해서 그런 이상을 따라서 자신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부흥주의의 어두운 유산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복음주의가 있습니다. 에반젤리칼리즘이라는 것들을 어떤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뿌리가 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라는 것 자체는 자유주의 신학과 씨름을 하면서 사실은 20세기에 생겨난 용어입니다. 그런 이반젤리칼리즘이라는 복음주의라는 것은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창조라든지 삼위일체, 인간의 죄인 됨, 그리스도의 구속,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등 이렇게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독교의 골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교리들에 대해서 지지하는 것을 우리들이 복음주의라고 이야기하고 더 넓게 복음주의를 이야기하면 사실은 이단을 빼고 가톨릭에 항거하는 모든 개신교의 지류들을 복음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더 넓게 잡으면 사실은 이단종파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개혁주의의 뿌리라고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뿌리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의 이 복음주의는 19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부흥주의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심지어는 20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부흥주의라는 뿌리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주의라고 하는 이 뿌리가 말하자면 옥석이 함께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 때에는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한 부흥이었고 또 오류가 섞이는 부흥의 현상들을 지도자로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잘 통제해 나가면서 이 부흥이 기독교 선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나님의 생명력을 넘치게 하는데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미국에서 선교의 역사라는 것이 1차 대각성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복합적으로 고려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흥주의의 긍정적인 요소는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근대 선교 운동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위가 될 뻔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들이 출판이 되면서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깨웁니다. 헨리 마틴이라든지 짐 엘리어트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선교에 지망하게 되고 근대 선교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 사회개혁에 공헌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긍정적인데 부정적인 것은 목회자 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인 성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목회자가 되려면 굉장히 지성의 자격을 중시했고 아주 높은 지성의 수준과 그리스도를 만난 깊은 체험,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성경을 가지고 신학을 하고 많은 학문들을 이해하면서 신학의 폭을 넓혀갔는데 이것이 생겨나면서 누구든지 불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지성적인 전통들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아까 조지 휘트필드 같은 사람들이 이런 것을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18세기의 켄터키지방의 부흥회를 하는 장면인데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이 강조 되고 소위 이야기하는 Wonderful Freedom 이라는 것인데 제도를 따라서 목회자가 되고 하는 것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지 아니하는 시대의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놀라운 성령이 기름 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Wonderful Freedom 놀라운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되었고 이제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며 성직의 질서에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안 머레이 같은 사람이 Revival and Revivalism 이라는 책속에서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이들은 설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두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교사와 복음전도자로 임명 받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 서광이 비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 전통적인 직위와 직무들은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하기를 주장하고…….’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하고 깊은 사상을 설교하는 기독교의 깊고 유장한 사상을 설교해야하는데 그런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목회사역을 공격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그런 점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의 중국 같은 데는 이런 현상들이 심각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너를 목사로 임명하노라.’ 그것이 요즘에 나오는 신사도운동 같은 것입니다. 굉장히 역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D. L. Moody가 2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는데 이성보다는 감정,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부흥주의입니다. 부흥주의는 사실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Revivalism이라고 하는데 인위적으로 어떤 조건을 맞추면 그런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무디는 아주 순수하고 열정이 있는 전도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탈신학화를 가져온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20세기에 와서 오순절운동 같은 것으로 극단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성경에 있는 참딘 기독교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신학이 별로 없습니다. 너무 간단합니다. 성화론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 신학적인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지 휘트필드가 길거리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고 사람들이 회개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런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길을 열어놓고 길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이 훨씬 더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휘트필드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조지 휘트필드가 나이가 더 많았고 에드워즈는 이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영적인 파워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그러나 한때 설교했을 때에 휘트필드의 기록에 보면 자기가 설교했을 때에 이 젊고 선한 에드워즈 씨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으면서 자기의 설교를 들었다는 장면도 묘사를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 두 사람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분은 당대에 최고의 지성인들 중의 한사람이었고 이분은 평범한 설교자였습니다. 이분이 스승처럼 생각하고 설교 자료를 활용한 주석가가 매트 헨리입니다. 이분이 그분의 대작을 4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충동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때 주관적인 충동에 의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를 달리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마스던이라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연구한 역사학자이고 신학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평가를 받는 사람인데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휘트필드가 충동을 따르게 하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정직하게 꾸짖었을 때에 그 순회 설교자는(순회 설교자는 휘트필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잘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 오히려 냉정하게 그 지적을 무시했던 것 같다. 두 복음전도자는 굳건한 협력자로 만났지만 가까이에서 함께 사역을 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C.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결국은 성경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고 그런데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 모든 세계에 다 묻어있지만 성경에 가장 그 아름다움의 진수가 녹아있고 그 이유는 성경이 구속사역을 주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모든 역사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고 그래서 복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참답게 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의 구속사역을, 복음을,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면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터득해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적인 경건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로, 인격으로, 삶으로,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써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분과 한번 만났는데 그랜드 램필드에서 만나서 두 시간 동안 같이 식사를 했는데 마스던교수가 같이 앉아서 기독교신앙이 무엇인가?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사상으로 목회를 했는가? 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같이 대화를 하면서 서로 투합한 것이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가 목사와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Logic on fire 즉 불붙은 논리이고, Eloquent reason 즉 웅변하는 이성 혹은 감동시키는 추론 이것이 설교다.’ 그래서 설교란 불붙은 논리입니다. 신학을 설교해서 사람들이 세계와 인간과 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서 새로운 사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의 몸에 접붙여진 새로운 영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룩한 의무와 마음이 하나로 묶여집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밥을 먹고 싶으면 먹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살이 찝니다. 왜냐하면 먹기 싫을 때가 별로 없고 맛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있으면 있으니까 먹고, 없으면 못 먹으니까 또 먹고, 비가 오면 당기니까 먹고, 추우면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먹고, 온갖 핑계를 대면서 계속 먹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이 자기의 생각을 배반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습니까? 옷을 사러 갔더니 ‘그 사이즈는 없습니다.’ 그럴 때 자기가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무를 딱 정해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건강과 모든 것을 위해서 어떤 생활의 원칙을 정할지를 가져야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이것만 가지면 안 되고 마음을 거기에 묶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과 의무가 합치가 되어서 움직이도록 할 때 그때 소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진리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깨달으면서 내가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워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서 지식과 은혜, 진리와 사랑의 일치를 은혜를 통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진실해져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자연 속에서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면서 사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합니다. 그러면 정동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정동은 뭐냐 하면 원래 국어사전적으로는 커다란 감정입니다. 그런데 내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지성이 어떤 사물을 인식하고 인식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출렁거리는 움직임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되고 같은 방향으로 계속 반복될 때 그것이 성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음식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떤 특정한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음식을 생각하면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것입니다.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런 음식이 눈에 띄기만 하면 안 먹고는 배기지 못하고 그 단계가 지나면 아무리 음식이 없어도 그 음식에 대한 상상이 떠오르고 상상이 떠오르면 향기와 맛까지 느껴져서 침이 흐르고 코가 벌름 벌름거리게 됩니다. 그 음식이 삼겹살일 경우에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게 됩니다. 계속 살이 찝니다. 실컷 먹고는 앉아서 허리와 배를 주무르고, 또 먹고, 그러면서 모순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에 관해서는 반대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정동이 일어나면 마음에 그것이 같은 방향으로 반복되면 사랑의 성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 큰 힘을 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처지와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마음의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회를 해서 사람들에게 갖게 되기를 원하는 방향입니다.
Ⅲ. 신학을 열심히 공부함
A.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리고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미학적 관점의 서술이고 그 거룩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하심과 무한한 완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해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 그분이 얼마나 완전하신 분인지를 인식하는 과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책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세계 속에서 이런 것들이 경험되어지는 것이니까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어떻게 있든 지간에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그 마음과 그 감정을 깊이 전수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중 누가 자신이 선포한 바를 온전히 살아내었고 지금도 충분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설교와 삶의 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야 되겠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온전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러나 앞으로도 못 이루겠지만 마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목회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반드시 목회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잘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인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설교를 잘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반드시 들을만한 설교의 풍부한 내용을 갖추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이 있는 판단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만보다는 겸손을 배워야하고 어떤 지식도 성경진리 만큼 권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기독교의 지성은 유순한 지성이라고 그랬습니다. 무엇인가를 알고 확신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더 완전한 지식에 의해서 언제든지 순복하고 유순하게 그 진리에 자기의 신학적인 견해를 내어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지성, 신학을 하는 사람의 지성입니다.
그래서 순자의 권학 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則亦及之 功在不舍’ 천리마가 한번 크게 뛴다고 하더라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노둔한 말이라고 할지라도(그냥 평범한 말입니다.) 늙고 둔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거기에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駑馬十駕라고 합니다. 十駕라는 것은 열흘을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則亦及之는 거기에 미칠 수 있다. 功在不舍는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데에 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천재가 너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천재가 아니니까 저런 말을 읽으면 위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없는 천재성을 가지고 투덜거리지 말고 천재가 하루 갈 길을 나는 열흘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덜 자고, 덜 먹고, 덜 놀고,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 똑똑한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하는데 멍한 사람들은 공부도 안합니다. 그래서 격차가 점점 벌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말고 아직도 젊으니까 치열하게 공부를 해서 어차피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인데 그렇게 하십시오.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썼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참으로 뛰어나다.’ 라고 생각을 하게 한 책은 여러 권이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예외였는데 한 사람은 철학자 플라톤이었고 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그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진짜 이 사람은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사람의 위대한 지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6개월 정도 기도했습니다. 너무 서러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누구인데 이런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열심히 노력해야 겨우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 대충 쓴 것도 나는 꼼꼼히 연구해야지만 겨우 이해하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차별대우를 하십니까? 나에게도 천재성을 주십시오.’ 그랬더니 응답을 받았는데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거기서 아멘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천재성을 포기하고 그냥 평범한 사람 중에 챔피언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보면 살리에르가 막 열심히 작곡을 해가지고 왔는데 모차르트가 와서 ‘그것을 왜 그렇게 하세요? 이것은 어때요?’ 하는데 자기 노래는 잊히고 이 사람은 계속 기억이 됩니다. 나중에는 절규합니다. ‘I am the champion of the ordinary man.’ 나는 모든 평범한 사람 중에 챔피언이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평범한 사람 중에 최고라는 뜻이 아니라 아주 대표적인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것을 자기가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한 말입니다. 제 아내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월요일에는 교회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데 주일에 눈이 너무 아팠습니다. 8시에 나가서 설교를 한번 하고 링거를 맞고 누웠습니다. 밤새도록 앓았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공부하러 나가는 시간에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그 몸을 해서 어디를 가느냐고 합니다.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공부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아니 만날 하는 것이 공부인데 그만하고 여태까지 공부한 것 가지고 해도 죽을 때까지 우려먹고 살다가 죽어도 될 텐데 무슨 공부를 또 하느냐?’ 고 합니다. ‘나는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의 막장으로 내려가 그날 쓸 땔감을 캐다가 그날 하루 가족들을 위해 불을 피워 살게 하는 광부와 같을 뿐이라오.’ 무엇이 있습니까? 리스트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루를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피아노가 알고, 이틀을 안치면 자신이 알고, 삼일을 안치면 청중이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귀찮고 싫으십니까?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소명이라면 진리를 전해야 할 소명이기 때문에 진리에 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B.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그 다음 이 신학이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 신학은 거룩한 진리로 나타납니다.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올바르게 공부하면 할수록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제 서가에 들어가면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가에 들어가면 책들이 나를 부릅니다. ‘목사님 나 좀 읽어주세요.’ ‘저도 여기 있어요.’ ‘지금 방금 도착했어요.’ ‘나는 그렇게 오래 전에 사다 놓고 안 읽으세요?’ 그런 책 중에서 우연히 봤는데 유니우스의 신학전집인데 책을 열어보니까 프레더릭 윌리엄 그로샤이더 라는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신약학 교수였습니다. 이 사람의 서가에 있던 책이 내 서가로 온 것입니다. 19세기 때부터 살았던 사람이고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유명합니다. 주석에 보면 이 사람의 인용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저런 책도 나 좀 읽어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모두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습니다. 지금은 책은 사는데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서가에 들어가서 눈물을 흘립니다. 어느 학생이 나한테 그럽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와서 눈물이 났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목사님은 책을 못 읽어서 서가를 붙들고 울었다고 그러는데 집에 가보니 붙들 서가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답니다. 한때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바쁘다고 하는 것은 애들 장난입니다. 진짜 너무 바빠서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때가 옵니다. 뭐 일평생 한가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치열하게 살다가 불꽃처럼 죽어야지 그것이 사명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어느 한순간 박원순씨의 인생의 좌우명이 ‘과로사로 죽자’ 랍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는데 예수를 믿고 사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찰스 스펄전이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도 건강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일하십시오. 그러다가 진짜 죽을 때가 되면 살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응답받아서 살아나면 또다시 죽도록 일하십시오.’ 멋있지 않습니까?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혼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으면 육체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데 그것을 자기를 위하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공정하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젊어서 학우들이 나를 보면서 좌절에 많이 빠졌습니다.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 때문입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을 텐데 제 기록이 22시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화장실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밑에는 오강과 위에는 물 한통과 빵 한 덩어리였습니다. 그 다음 기록은 앉은 자리에서 17시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역시 밑에는 오강 위에는 물 한통과 빵 한 덩어리였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안 됩니다. 밤을 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은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아야합니다. 4시간 동안 누워 있어야합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메뚜기도 한 때입니다. 지금은 고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피곤한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만할 때 신대원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어학강좌 있을 때 하루에 150개씩 라틴어 단어를 외웠습니다. 그것이 머리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날 절반쯤 까먹지만 또 다시 외우고 외우고 하면 들어갑니다. 지금은 순교의 각오를 해도 안 됩니다. 날로 날로 새롭고 어떤 때는 글을 써놓고도 ‘누가 이렇게 글을 잘 썼나! 하면 내가 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을 통해서 많이 배웁니다. ‘아! 그렇구나!’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여러분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세 가지를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고, 목숨을 걸고 공부하기 위해서 쓰러지도록 공부합니다. 또 하나는 열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쓸데없는 자기 자랑이지만 여러분처럼 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을 다닐 때 방학하면 학기가 끝날 때마다 자동으로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씩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학기 중에 묻은 때를 깨끗이 씻어야합니다.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도제목이 1학기가 끝나고 나면 여름성경학교, 2학기가 끝나고 나면 신년교육계획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씻어내고 치열하게 기도하면서 그러면서 지금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옆에서 강의 시간에 잠이나 자고, 다른 책이나 보고, 라면이나 먹으러 다니는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세계적인 사람들과 비교해야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젊은 시절을 몸부림치며 살았는가? 비교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도 그렇게 해야지만 합니다.
그 다음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깊이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다음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구도의 정신이다. 여기서 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정신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깨닫게 되고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를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에 보여주고 이 세상도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는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목회란 죄와 타락으로 더럽게 된 것과 잃어버린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별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Ⅳ. 별이 빛나던 밤에
A. 내가 경험한 지성적 개안
이렇게 두 번의 깊은 개안을 하게 됩니다. 그때 제가 기도원에 매주 금요일 마다 올라갔는데 여기서 산책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고는 했습니다.
B. 신학함에 있어서 신앙의 역할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이고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삶을 거기에 부합시켜 주게 만드는 힘이 신앙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하게끔 전파할 수 있습니까?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존하여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구도자로 서는 것이 신학을 하는 것의 요체입니다. 이것 없이는 신학이 설 수 없습니다.
이제 성경, 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문학 특히 이런 것들을 공부해야합니다. 창조세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학문으로 다시 연결 지어서 결국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그리고 그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교회 경건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 기독교 신학을 하는 목표입니다.
C.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고 그분 없이는 창조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과 아름다움은 모든 만물에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이 지식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속의 여부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세계가 아름답게 되는 일에 소명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회의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Ⅴ. 맺는말
신학은 사랑스러운 학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참으로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최고의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공부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세상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신학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눈뜬 사람이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