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 맑은 개울처럼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4:12-15)
녹취자: 김경애
지금부터 한 1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한지 불과 3, 4년 지났을 때였는데 그때 제가 책 한권을 쓰고 마지막으로 서문을 쓰는데 차를 몰고 어느 산을 갔습니다. 치악산이었습니다. 때가 4월 초순이었는데 아직 봄은 오지 않았고 겨울기운이 남아있던 때였는데 몇 년 내에 그런 일이 없었을 정도로 4개월 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계속 날이 가물어서 걱정이라고 그러던 때였습니다. 실제로 눈도 별로 오지 않아서 가보니까 가는 길에 정말 땅이 모두 메말라있고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밭을 갈고 심을 때가 되었는데도 물이 없어서 곡식을 심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상황이 안 좋을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혼자서 조용히 명상을 하면서 치악산을 걷게 되었습니다. 한고비 두 고비 걸으면서 치악산 속으로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4, 5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그 산속에서는 어른 키 두 길이 넘는 시퍼런 물이 계곡을 넘치며 한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이 워낙 큰 산이니까 넉 달씩 그렇게 비가 오지 않아도 여름철에 머금고 있던 물들을 산속깊이 품었던 물들을 쏟아내면서 밤이나 낮이나 어른 키 두 길이 넘는 큰 계곡을 넘치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흘러들어도 흘러들어도 모자람이 없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다른데서는 가물어서 씨를 뿌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그 치악산의 벌판들은 넉넉히 물댄 동산과 같이 그 물을 공급받으며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 그렇구나! 결국 우리의 목회라는 것은 교회가 사랑하는 성도들을 밭이라면 그 밭을 김을 매고 농사를 지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물을 공급해주셔야 하고 그 물을 공급하는 통로가 목회다. 그래서 만약에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높은 산처럼 깊은 계곡처럼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된다면 한두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잘 자라고 그렇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오늘 읽은 이 아가서에 나옵니다. 알다시피 이 동산은 왕만 들어와서 감상하고 쉴 수 있을 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왕의 비밀스러운 정원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 아가서에 나오는 그 풍경을 이제 그리고 있는데 그 풍경을 보니까 아주 아름다운 풀과 아주 좋은 향기를 내는 약초들, 그리고 많은 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진귀한 약재들이 가득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꽤 넓게 포진하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각종 열매를 맺고 약재를 만들고 향기를 뿜어내는 그런 기름진 정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고 더듬어 더듬어 가보니까 마지막에 나오는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샘물이 있었습니다. 아무나 그 샘물에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봉해져있었지만 봉한 거기에서 나오는 샘물이 그것이 이 언덕을 타고 흐르면서 그 물길이 닿는 대로 거기에서 각종 아름다운 화초들이 자라고 값진 열매, 뿌리, 약초들이 자라면서 그 동산을 지극히 아름다운 동산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정말 우리의 목회사역이란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이 사역이라는 것이 원천이 어디에 있고 그 원천에서 나오는 목회가 목회되게 만드는 기름지게 만드는 그것이 어떻게 흘러들어가서 우리의 목회를 비옥하게 하느냐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목회사역은 이 세상의 장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공이나 실패를 이야기하는 기준이 이 세상에서 사업을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 돈벌이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겨보면 정말 이렇게 물댄 동산과 같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그 목장을 잘 돌보아서 그 목장에 들어오는 양무리들마다 쉼을 얻고 그리고 성장하고 아름다운 목장을 이루는 교회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잘 안되어서 마치 거친 황무지와 같이 여러분 혹시 산자락 아래에 몇 년 동안 일구던 과수원을 주인이 이사 가면서 버리고 간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전히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매달립니다. 그러나 먹을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포도나무에 포도가 매달리기는 하는데 어쩜 그 나무도 그렇게 주인이 버리고 간 것을 아는지 열매가 맺히기는 맺히는데 도저히 내다팔거나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나 와서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과수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가 없다고 누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목회자가 되어서 큰 교회를 이루고 그리고 또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이 세상에서 주목받는 유명한 사람들이 교인들이 되고 목사님 월급도 많이 주고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뭔가 영광을 누리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재는 것은 이것은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기면 우리의 목회에는 성공한 목회도 있고 실패한 목회도 있습니다. 물론 성공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공력을 모았다는 점에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아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목회와 그렇지 않은 목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책을 쓴 것은 지금부터 약15년 전입니다. 그 책이 지금까지 거의 십만 부가 팔렸습니다.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 번씩은 읽어보고 들어봤던 이야기인데 그 책이 쓰이고 나서 한 5, 6년 동안은 아무튼 전국의 사모 세미나에 부지런히 불려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도 하필이면 꼭 교회로 전화가 오는데 몇 통화를 받다가 나중에는 정신건강에 안 좋아서 내가 아예 받지를 않았습니다. 사연은 안타깝지만 나도 목회를 하고 일을 하는 사역인데 그것을 다 상담을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정말 말로 옮길 수 없는 수많은 사연을 안고 목회를 하고 지금도 한 10년 전에 갔던 그 사모세미나에서는 어느 교단이었는지 이만큼쯤 모였습니다. 밥을 먹는데 거기에 있는 목사님들이 주최 측인데 밥을 먹기 전에 잠깐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 오늘 강의는 정말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우리 노회에서 열 명의 교회 중 세 명의 교회가 목회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 명의 못하는 교회가 사모 때문에 목회를 못하겠다고 목사가 백기를 든 교회가 30%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사모가 백기를 들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목포댁이라고 그럽니다. 목회를 포기한 사모입니다. 목포댁입니다. 목포에서 온 분들은 섭섭하시겠습니다. 그러면 사모님들이 그중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사모가 된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래도 다 목사가 소명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것처럼 나름대로 소명이 있어서 이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소명의 길로 불렀습니까? 아, 우리 남편과 목회를 한번 해서 성공하면 그때는 대박이 터지는 것이다. 그때는 진짜 로또 맞은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한번 그렇게 밀어보자. 그러면서 목회자의 사모가 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한때에는 그래도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께 은혜를 받고 처음에는 예수를 믿을 때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는 계획이든지 목회를 해야겠다는 계획은 없습니다. 원래 이 소명이라는 것은 이 일을 생각하다가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다가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하나님 없이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 다인 줄 알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은 결코 예수를 믿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아주 절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 같은 죄인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경험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그래서 깊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고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을 거스르며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이 더러운 죄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구나!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는 나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럴 때 나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감동은 나에게 밀려왔지만 즉시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잃어버린 영혼입니다. 아, 나처럼 인생의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이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를 주기 위해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을 모르고 아직까지도 방황하며 사는 그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 어떤 사람은 자신이 비참을 알면서 비참해하고 어떤 사람은 비참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비참해합니다. 저 비참한 인간들을 예전의 나와 같은 저 형편없는 인간들을 내가 돕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서 그런 감정이 일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게 밀려와서 이제는 그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종사하며 살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런 소명을 여러분의 남편도 받았고 여러분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면 지금이라고 깊이 기도하고 그 소명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타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여러분 중에 정도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없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할 수 없어서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다 전하고는 이 사람들을 양 무리처럼 모아서 그래서 아프면 치료해주고, 굶주리면 먹이고, 깨닫지 못하면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깨우쳐주고,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것처럼 이 양떼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목회는 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으로 하여금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세상의 불쌍한 인간들을 돌보시는 그 사명을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 계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구속의 사역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 영혼을 위해서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섬기셨던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 계승의 두 가지가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우리 모든 사람들은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으로는 살아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집니다. 육체의 죽음은 호흡이 멎고 뇌의 활동이 정지되고 그리고 피의 흐름도 그쳐서 육체의 생명의 기운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피가 흐르거나 혹은 호흡을 함으로써 영혼이 생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육체는 죽으면 멸절하지만 영혼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한번 창조하신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만나서 인간이 된 다음에는 우리가 죽어서 지옥을 가도 그 영혼은 살아있고 부활의 날에는 다시 우리의 몸과 합해져서 그래서 멸하지 않는 몸이 되고 멸하지 않는 그 몸으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고 지옥에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이 인간의 영혼이라면 영혼의 죽음의 의미는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어있을 때에는 우리들이 아무 일도 못하지만 영혼이 죽어있을 때에는 죽어있는 영혼에 합당한 행실을 행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죽은 행실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 미움, 분쟁, 다툼, 살인, 온갖 정욕으로 짓는 많은 죄들은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움직이면서 육체를 움직여서 만들어내는 모든 악과 더러운 일들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죽음의 정의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그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이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깊이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서 영적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이고 그것이 바로 중생이고 이 중생을 의식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 영혼들이 하늘나라에 간다고 우리들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은 구령의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보느냐하면 아! 저 불쌍한 영혼! 지옥에 가는 영혼! 저 영혼을 정말 회개시켜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투철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목회자들 자신도 이미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운명이라든지 하나님의 심판이라든지 그리고 죽음 이후에 있을 이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하면 인간은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처럼 지금도 행복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행복에 보험을 드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든지 아니면 남편 대신 와서 강사로 설교한 사람이 누구든 지간에 아주 적나라하게 우리 어렸을 때 들었던 복음! 회개하라는 외침!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지옥의 심판이 있다는 엄중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생각보다도 우리가 무엇인가 우리의 목회의 중심 선로를 심각하게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목회자들이 교만하고 목회자들이 교만해지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사모님들도 함께 교만해집니다. 목회가 잘되지 않으면 한없이 비참해지고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주신 사명이 아닙니다. 자신의 교회를 무슨 자신의 기업체처럼 생각하는 이런 태도들은 이런 것들은 목회의 본질에서 심각하게 이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진 채 살아가는 비참한 영혼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눈물이 없다면 그것은 산에서 물이 마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 곳에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참답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만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기독교 역사의 위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거기에 우리 형제들 말고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할 때 거기에 하나님 말고 누가 계십니까?’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닮은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곳에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조금 주시면 이런 일로도 봉사하고 저런 일로도 봉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을 위해서 봉사하는 그 일에 헌신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그러면 목회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소명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사이즈가 얼마나 크고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하는 것은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많이 모이면 돈도 많고, 집도 좋은 것을 사주고, 생활비도 좀 더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얼마나 많은 영혼이 그 교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입니다. 지방에 집회를 하러 내려갔습니다. 거기서도 꽤 큰 교회인데 담임목사님은 자기들 집회가 있어서 어디로 가고 나는 집회를 하는데 부목사님들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같이 집회를 하고 같이 나를 숙소까지 바래다줍니다. 그런데 같이 차를 마시면서 자기교회의 자랑을 많이 합니다. 담임목사님은 지금 이 지역에서 한창 뜨고 있는 목사님인데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가 세배, 네 배, 다섯 배는 커져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장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뭐라도 배우고 싶어서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인지 자랑을 합니다. 내가 가만히 듣다가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신학을 어디서 하셨습니까?’ 같은 교단이니까 당연히 ‘총신에서 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목사님은 중생에 대해서도 배우셨고 회심에 대해서도 배우셨겠지요?’ ‘네!’ ‘성도가 회심 없이 중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굳게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죠?’ ‘그렇습니까!’ ‘당신이 여기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장년교구를 돌본다고 그럽니다. 몇 명이냐고 그러니까 자기가 맡은 교구가 800명 정도 된다고 그래요. ‘그러면 목회자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밤에 모두 죽으면 그 사람들 중 몇 명이 구원을 얻은 것 같습니까?’ 그랬더니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한 30%쯤 하늘나라를 갈 것 같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나에게 무엇을 그렇게 자랑하느냐?’ ‘당신이 돌보고 있는 양떼들 중에 800명의 양떼들 중에 열사람 중 세 사람 정도가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나머지는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인데 그중에 5년 10년 된 사람들도 있다고 그럽니다. 나는 10년 동안 예수를 안 믿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10년 후에는 변화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한테 무엇을 자랑하고 싶으십니까?’ 처음에는 그 형제를 나무랄 생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알아볼 생각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따끔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형제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목회자가 자기의 양떼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보면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가 아픈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30년 40년 전에 볼 수 있었던 그런 목숨을 건 목회의 열정이 현저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세속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의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께 만들어서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변화된 사람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하는데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그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목회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훌륭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모여 앉으면 세상의 재미없는 모임이 사모들의 모임과 목회자들의 모임입니다. 만날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성지순례 갔다 온 이야기, 교회 땅 사는 이야기, 말 안 듣는 장로 혼내준 이야기, 그러니까 무엇인가 목회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을 위해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나를 다 버려도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야겠다는 구령의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발이 부르트도록 나가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지 못하면 교회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람이라도 생각하면서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어떻게 하면 그 영혼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의 기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나는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이 일제 강점기 때보다 예수 믿기가 훨씬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배반이냐? 예수를 믿을 것이냐? 칼을 들이대는 시대였기 때문에 배반할 사람은 배반하고 믿을 사람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회에서 목숨을 걸만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나는 전 세계를 다니지만 나는 단연코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전 세계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미국? 어림없습니다. 교회 하나를 지으려고 해도 온 주민이 공청회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10명만 반대를 해도 교회를 지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땅을 사놨는데 주민들이 모여서 투표를 했는데 여기에 교회가 들어올 수 없다고 그러면 못 짓습니다. 투표를 하면서 당신네 땅이지만 이 나무들이 너무 좋으니까 나무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교회를 짓게 허락해줍니다. 그리고 나무를 피해가면서 예배당을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기독교국가도 교회를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저기 수동면에 내려가서 2층을 얻어서 십자가 선팅을 붙이고 찬송을 부르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는 전 세계에 아무데도 없습니다. 완벽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죽을래? 살래? 그러면서 핍박의 칼날을 우리의 목에 대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개척을 안 해봤으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못합니다. 나도 적금을 깨뜨려서 1,500만원을 가지고 지하실에서 일주일에 네 번을 물을 퍼야하는 그 열악한 곳이었고 흉가였습니다. 그 25평되는 예배당에 가서 돈도 없으니까 청소를 하고 예배당의 페인트칠을 하는데 어느 신사 한 분이 오셨습니다. 오더니 나는 예배당을 하려는데 와서 혀를 쯧쯧 차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누구십니까?’ ‘나는 이 근처에 있는 목사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왔소?’ ‘교회를 하려고합니다.’ ‘쯧쯧쯧 여기는 교회가 안 되는 곳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 지하실에서 두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가 문을 닫고 교회가 떠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해봤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가난도 있고 동네사람의 핍박도 있을 수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나 공산당 치하처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더 많이 싸워야할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은 점점 더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예전에는 아파트에 전도 나가서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다음에 믿을게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지금 바빠요.’ 그러는데 지금은 문을 두드리자마자 쌍욕이 나옵니다. 입에 담을 수 없게 욕을 하면서 미친것들이 돌아다니면서 누른다며 보는데서 문을 열고 인터폰을 들고 경비실에 전화를 해서 잡상인들 들여보내지 말라고 그러는데 당신들 모가지 나가고 싶으냐면서 욕을 해댑니다.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경멸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옛날의 그 정도 가지고 안 되고 그보다 더 뜨거운 기도와 무엇인가 그 사람들이 행복하냐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곤고합니다. 너무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더 치열하고 열렬해야합니다. 말로만 아멘을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일본의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고 나옵니다. 바둑을 둘이서 두다가 이쪽 사람은 한쪽 계파를 대표하고 이쪽 사람은 저쪽 계파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바둑으로 내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졌습니다. 실화입니다. 지니까 너무 억울해서 자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피를 쏟고 거기서 절명했습니다. 그것이 토혈국입니다. 아직도 기보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면 바둑을 두다가도 지면 너무 억울해서 그냥 피를 토하고 거기 엎드려져 절명을 했는데 소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무슨 목회가 애들 장난입니까? 사회가 이렇게 강퍅하고 복음을 안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사실은 잘 받아들여질 때에 우리들이 5의 영역을 가지고, 5의 열정을 가지고, 5의 희생을 가지고 이 일을 했다면 지금은 8, 9 아니면 이 인간들이 이렇게 강퍅하면 내가 이 아파트 앞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피를 토하고 정문에서 죽어버려야겠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웃지 마십시오.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목회의 본질을 지향하는 정신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교회는 돈이 없어졌느니, 뭐가 어떠니, 재판이 일어나니, 싸움이 일어나니 그러면서 분쟁들이 교회마다 날마다 그치지 않고 신문지상에 도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만약에 우리가 맨 처음에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만약에 그 정신이 10%만 남아있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다 그렇습니다. 가끔 교인들이 와서 위로합니다. ‘목사님 힘드시죠?’ ‘뭐가?’ ‘심방도 하시고 책도 쓰시고…….’ ‘안 힘듭니다.’ 물론 힘듭니다.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가서 무슨 구루마를 끌고 생선을 토막 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이만큼은 다 합니다. 무슨 목회를 어마어마하게 희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십자가 사랑에 비하면 이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져서 교만하고, 적은 사람은 아예 낙망하고 실망해서 더 이상 아무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님이 맡기신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령의 열정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손꼽아 세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금주에 교인이 얼마가 모였는가가 아니라 금주에 어느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새사람이 되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치열한 구열의 열정 가운데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지는 때가 두 번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의 영혼이 불쌍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여기에는 사심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여기에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요구하시는 헌신은 얼마큼인가? 무제한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유명한 간신이 있습니다. 그 간신은 얼마나 아첨을 잘했는지 세 살 먹은 자기 아들을 삶아서 탕을 끓여서 바쳤습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해보려고 아첨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식을 탕으로 끓여서 임금에서 바칠 정도로 아부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 헌신은 무제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구령의 열정이 불타야합니다. 다른 것은 하지 마시고 교회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데 너무 크면 다 못하겠지만 그러나 하는 데까지 해보십시오. 정 안되면 집사 명단이라도 놓고 집사 40명의 명단을 놓고 한번 기도를 많이 하면서 필요하면 만나기도 하고 부교역자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이 아무개 집사님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표시를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충격적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끌어안고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라는 유명한 청교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형제를 위하여 울 수 없는 사람이 누군가가 그를 위해서 대신 울어주어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남편 때문에 사모생활을 잘 못하겠다? 30%는 이해가 갑니다. 남편이 너무 아닌 길을 가면 사모가 너무 힘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주님 앞에 갔을 때에 ‘너 왜 사모가 그렇게 밖에 못했느냐? 너 때문에 내 양 무리들이 엉망이 되었다.’ 그럴 때 ‘주님 저도 하나님 앞에 굉장히 잘해보려고 했는데 우리 남편 그 인간이 안받쳐주어서 내가 이것 밖에 못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내가 충분히 이해한다. 모든 책임은 네 남편에게 지운다. 너는 큰 영광을 받아라.’ 그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모들은 목사 때문에 못 하겠다고 하지만 내가 만난 많은 목사들은 사모 때문에 목사를 못하겠다고 그럽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사도로 세운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며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럴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민망히 여기셨다고 그랬습니다. 희랍어로 ‘에스프랑스떼’라는 단어인데 원래 무슨 뜻이냐 하면 창자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창자가 흔들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깊은 내면의 세계가 고통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당신의 일꾼들을 세우신 동기입니다. 목회자들의 영광은 학식이나 이 세상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을 충만히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거기에 오셔서 담임목사가 되셨더라면 영혼들을 위해 울고 기도하고 돌보실 것 같은 그 마음으로 돌볼 수 있도록 이 안에 깊은 우물 같은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목회자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구령의 열정에 불타야합니다. 요즘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이 전도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영혼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교회는 교회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는 평신도들을 대거 고용해서 그래서 전도만 하면 교인들이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한명을 등록시키면 삼만 원, 아파트가 들어서면 가서 미리 종이로 만든 교패를 온 아파트에 다 자기교회 교패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는 오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오게 하고 못 오게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조폭들입니다. 조폭들이 그것을 관리합니다. 거액의 돈을 가져다주고 ‘우리교회는 여기서 전도하고 다니게 하고 다른 교회는 못 들어오게 하십시오.’ 하고 교섭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정말 티끌만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교회 그 자체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사람을 풀어서 일당을 주고 등록을 시켜서 그래서 그것을 보험수당처럼 하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불신자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나쁜 영향을 갖게 되는 아주 중요한 동기중의 하나는 뭐냐 하면 전도하려고 저 인간들이 경쟁하는구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떠나서,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 진리를 너무 많이 떠나서,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엾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집을 찜해놓았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이 전도를 하다가 30년 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그러는데 그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맛있게 차도 마시고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마지막 헤어질 때 ‘오늘 정말 즐거웠다.’ 그런데 XXXXX 이게 목회입니까? 이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입니까? 이것은 정말 단 10명을 목회하다가 굶어죽더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맡기신 두 번째 임무가 무엇이냐 하면 요한복음 10장에서 보면 풍성한 삶입니다. 풍성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넉넉하게 부어져서 그래서 그 넉넉한 것 때문에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기독교 집안은 아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철들기 시작하면서 내발로 교회를 갔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와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정말 윤리적인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청소년 시절을 6년 동안 지독하게 방황했습니다. 자살을 하려고도 몇 번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구원의 길이 어딘가? 그때 매일 아침마다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집이 가난했느냐하면 물론 집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무서운 것은 두 가지도 아니고 딱 한가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도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야한다는 것 그것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피어있는 풀포기 하나 발아래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가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난한 삶입니다. 풍성한 삶의 반대입니다. 고난주간에 교회에서 심각하게 질병에 걸려서 고통 하는 지체들을 고난주간에 심방했습니다. 그때에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50이 넘도록 방황을 많이 하시다가 열린 교회에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아직까지도 예수를 잘 안 믿는 상황이었는데 부모님도 오시고 동생도 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오빠! 오빠도 나 같은 처지가 되어보면 아마 예수를 믿는다고 그럴 거야.’ 그런데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니까 예수를 믿어라.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분은 매년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아주 착실하게 하시는데 건강검진을 받고 한 6개월쯤 되었는데 목이 좀 이상하고 힘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혈액암 3기에서 4기로 넘어가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 기쁨이 확 솟아나더랍니다. 제일 먼저 동생에게 달려갔습니다. 나를 봐라. 나도 한다.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병원에 찾아갔더니 머리를 다 깎았고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기쁩니다. 하나님이 이 쓸데없는 인간을 이렇게 사랑해주시니 그렇게 중요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충만함! 그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물론 가난한 셋방살이를 못 면하고 그냥 고통 하다가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는 것, 질병에 걸려서 그냥 고통을 받다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 그것도 풍성한 삶의 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강한 그것이 있어야하는데 기갈을 하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를 하다보면 너무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 사람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잘 믿게 되면 돈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은 갑자기 하나님이 돈을 주셔서 오늘 은혜를 받고 내일 통장에 입금되는 그런 기적 거의 안 일어납니다. 우리 교인중의 어떤 사람은 정말 죽을병에 걸려서 예수를 믿고 놀랍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죽는데 천사도 그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 기쁨과 소망이 가득차서 나한테 마지막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목사님! 이 지상에서 XXXXX 하나님이 저를 부르셔서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예루살렘에서 만나요!’ 그러면서 죽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학생 하나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술고래입니다. 아빠가 들어오면 애들 보는데서 엄마를 때리고 애들에게 발길질하고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일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아빠에요. 엄마한테 ‘엄마, 아빠를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쌍한 영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돈이 그 아이를 그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돈을 얼마를 준다면 그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하는데 남의 교인 하나가 매일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렬하게 기도는 못하는데 어느 날은 새벽기도를 하고 가려고 하는데 ‘목사님! 나는 이 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 기도를 좀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혼하게 기도해주세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남편이 교회를 잘 못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우리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술고래였는데 심방을 갔는데 민망합니다. 남편이 직장을 잘 다니다가 간이 안 좋아서 간경화가 되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거기에다가 치매와 중풍까지 와서 침을 흘리면서 지팡이를 짚고도 잘 못 걸었는데 그런데 심방을 가면 그렇게 이혼하게 해달라던 그 자매가 심방을 가면 민망해서 심방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담임목사가 갔는데도 끌어안고 뽀뽀를 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풍성한 삶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예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것이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다 포기하는 것 그래서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삼아서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진리를 몰라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의 재능을 베풀고, 그들로 하나님 앞에 복되게 하게하는 그 영적인 섬김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들에게 공급해주는 이게 바로 우리가 목회를 하게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목회자도 인간입니다. 내가 그런 풍성한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 과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대치할 수 없는 의무는 무엇이냐 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목회의 모든 과정이 꿀을 먹는 것처럼 달콤할 때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쓰라린 고난이 오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이 와도 하나님 앞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그 무엇을 일러주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교인들이 보면서 저분이 가르쳐주신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까하는 것을 그 목회자와 사모을 통해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가장 살아있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 세포들이 3개월이면 모두 새 세포가 됩니다. 단 예외가 있는데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나머지 세포는 죽고 다시 새로운 세포가 나서 3개월 후면 우리 몸이 3개월 전의 세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60조개의 세포로 우리의 몸이 이루어져 있는데 그 이루어지는 몸의 세포들이 죽습니다. 죽어야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죽는데 그 죽음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의학적으로 네크로시스라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뭐냐 하면 세포가 다 늙어서 이제 힘이 없이 죽는 것입니다. 노인네가 기력이 떨어져서 죽듯이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충격을 받아서 세포가 부서져버려서 죽는 것입니다. 괴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죽음이 있습니다. 전문용어로는 아토프롭시스라는 죽음입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런데 세포가 자살을 합니다. 한 세포가 자살을 하고 죽어버리면 아직 살 수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하면 자살하는 그 순간에 ATP라는 화학에너지가 나옵니다.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서 옆의 세포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 세포가 생산과 공장 역할을 해서 몸을 지탱하고 분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몸은 약 60조개의 꼬마전구를 다닥다닥 붙여놓고 깜박깜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역설이 이루어지느냐하면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죽는 세포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세포에 이상이 와서 아무도 죽겠다는 세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안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죽으면 세포가 생존을 위해서 엄청난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몸에 있는 영양분을 막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포들이 경쟁하듯이 그 영양분을 자기에게로 가져갑니다. 영양분이 많으니까 세포수가 계속 늘어납니다. 그런데 거기서 생겨나는 세포도 똑같은 세포입니다. 그래서 죽으려는 세포는 하나도 없이 살겠다는 세포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뭉쳐진 것이 암세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들까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받았더라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입니다. 여기에 오지 말고 그냥 평신도와 만나서 그저 회사를 다니던지 장사를 해서 알콩달콩 그냥 사는 것으로 만족했어야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죽으려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주님도
어느 목회자가 나에게 물어봅니다. ‘요새 이렇게 큰 교회를 하다보면 교인들 때문에 실망하신 적이 많지요? 배신감 느끼신 적 많지요? 상처받으신 적 있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좋은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처도 받지 않고 그러십니까?’ ‘나는 교회를 하면서 한 번도 교인들에게 기대를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놀라게 한 적은 있습니다.’ ‘정말 예상을 빗나갔다.’ ‘꽤 오래도록 붙어있다.’ 정말 나는 지금도 교인이 이렇게 많이 모이도록 이유와 명분 없이 교인과 마주앉아서 밥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얻어먹은 적은 더 더욱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목회사역으로 불러 준 것은 우리를 섬기고 사랑하는 교인은 아닙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길을 걷고 있어도 목회를 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이 가라고하시니까 말입니다. 주님이 가라시니까 말입니다.
저의 19년 동안의 목회의 경험은 이것입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가 잘 죽을 때 그때 교회는 살아납니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생활입니다. 지금은 목회자나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도 예전처럼 그렇게 가슴을 뜯으면서 피어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교회는 경영되지만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을 포클레인으로 뒤집어엎는 것과 같은 확 갈아서 사람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혁명적인 일들이 일어나야합니다. 죽어있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바른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면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교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목회자인 제 남편과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고통스러운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을 때도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대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목회자의 눈물은 성도의 눈물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가 뜨거운 눈물로 목회의 고난을 이기고 주님이 피붙이처럼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울어주고 그리고 그들에게 자비를 다 드려서 XXXXX 그래서 쓴 뿌리는 그 눈물을 먹으면 그냥 타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눈물을 먹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냥 즐겁고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실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물으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느냐?’ 한번가면 5년, 8년 아니면 ‘이 양떼를 정말 사랑하느냐?’ ‘가난해도 목회를 계속 하겠느냐?’ 이렇게 뻔한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목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저에게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날은 정말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왜요?’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얼굴에 피가 진하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너무 선명해서 새벽에 확 깬 것입니다. 도저히 잠이 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예수님, 내가 목사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도록 잊고 살았습니다.’ 몇 개월 뒤에 은퇴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청년시절에 이태희 목사님 부흥회를 꽤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30대 중반정도셨는데 그 정도밖에 안되셨습니다. 많아야 40대 초반이셨을 것입니다. 그때 20대 청년이었던 저는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 오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다시 후회해도 소용이 없고 다시 돌아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두 교회만 정신 못 차리고 목회를 하면 그냥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너무 짧습니다. 마지막에 정말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능력, 그리고 그들에게 있는 기가 막힌 목회의 능력은 없어도 우리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는 되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 보내주신 이 포도원, 이것밖에 없는 줄 알고 그저 이 포도원을 위해서 여기서 나의 기도를 쏟고 주님이 액체의 생애를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이 포도원을 가꾸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렸습니다. 나의 목회사역이 잘된 것은 다 주님이 주신 것이고 못한 것은 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결단하고 혹시라도 남편이 목회를 잘 못하면 이르면 됩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들한테 이르지 말고 하나님께 이르면 됩니다. 간절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찬란한 불꽃처럼 타올라서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