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 오희열
오늘 말씀드릴 것은, 올바른 신학함, 지식과 사랑의 결합, 신학을 열심히 공부함, 그리고 별이 빛나던 밤에, 이런 순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릴벡 총장님께서 소명의 체험이 목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단순히 설교하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신적인 강제력을 느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아낭케(anatkh), 숙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소명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똑같이 강조해야 되는 것 하나는 소명의 체험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그 소명을 끝까지 유지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소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소명의 체험은 순간적인 체험일 수 있지만 소명의 유지는 지속적인 성화 속에서 maintaining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올바른 신학함’이라는 것은 지식과 사랑이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ledge of God’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attributum’,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이고, 그리고 ‘modus operandi’,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본질로 직접 보고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을 우리들이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시행되는지, ‘modus operandi’ 이런 것을 통해서 알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knowledge of God’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이것에 필요한 것은 심미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알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떨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분에게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경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존 칼빈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식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pietas et scientia(경건과 학문),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아까 말씀하신 유명한 제네바의 문장입니다. 하트가 손 위에 있고 거기에 그 글들이 쓰여 있습니다. 여기 나옵니다. “주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기꺼이 진심으로” 그래서 ‘pietas’, ‘경건’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학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목표 자체가 단지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신국론』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 “진실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똑같은 사상을 칼빈이 물려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히스베르트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 라는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개혁파 전통주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위트리트 대학의 교수로 있었고 영국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네덜란드의 ‘나보르 네포르마티에’라는 제2의 종교개혁의 기치를 듭니다. 이 사람이 신학교 교수 생활을 아주 이상적으로 하는데, 제가 이런 문제를 기독신문에 제안을 했습니다. 교수들의 집이 학교 안에 있어서 방과 후에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서 같이 먹고 같이 대화를 나누고 성경공부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승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실제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example로 그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분이 쓴 책을 영어권에서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라틴어와 화란어에서 대부분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있는데, “Regeneration”이라는 작품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 제가 착가했는데 최근에 이 사람의 책 중에서 한국어로 번역이 된 책이 있는데, “Spiritual Depression”, 『영적 침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 이 위대한 신학자가 쓴 책인지 의심할 정도로 아주 practical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를 아주 깊이 다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사람이 제안한 것이 소위 precisionism 이라는 엄정주의인데 여기서 ‘엄정’은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엄정해야 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따르려고 해야 한다는 신앙의 엄정성을 강조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엄정성이 곧 순결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를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일하고 유일한 엄정의 기준이다. 거기로부터 그분의 양식, 형상이 이루어진다. 율법과의 합치와 일치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만약 이러한 일치의 매듭을 건너뛴다면 종교에 있어서 지지되어야 할 것들은 의심스럽게 남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가르침이 엄정하고 삶이 엄정할 때, 그 다음 매듭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올바로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은 말하자면 경건과 학문, 지식과 사랑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엄격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엄정성을 가르쳤다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옥스포드의 ‘홀리클럽(Holy Club)’에서 시작된 소위 English Methodist 운동이 있습니다. Methodist는 오늘날 우리에게 감리교라고 번역이 되지만 원래 이 Methodist는 ‘Method’, ‘방식’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무슨 방식이냐 하면 ‘Method of living a life’, ‘삶을 영위해가는 방식’이 그 시대 그리스도인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Methodist’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소위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결국은 신앙의 결과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modus’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결핍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삶에 있어서 modus가 결핍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식과 사랑이 신앙 안에서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지식은 가져도 삶으로 표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English Methodist 의 가르침이나 개혁자들만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Modus vivendi, Copia dicendi”,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느냐에 의해서 가르침이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퓨리탄의 전통을 보면 존 오웬을 비롯한 많은 퓨리탄들이 코멘터리를 쓰고 그 제목을 이렇게 붙이길 좋아했습니다. “Practical Commentary on 130 of sums”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Practical Commentary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modus vivendi , way of living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인 신앙의 전달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조지 휘필드는 18세기 영국 역사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전설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적 Methodist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제 1차 대각성 운동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뉴잉글랜드에도 큰 영향을 준 전설적인 설교자였습니다.
존 웨슬레도 역시 똑같았습니다. 감리교를 창설하고 종교적인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했고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 사회가 거의 프레스 되었을 때, 거기서 신앙운동으로서 새로운 도덕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던 아주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든 공통점은 이 사람이 개혁주의는 아니지만 지식과 사랑이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서 삶 전체를 움직이는 영향력이 되도록 그런 방식의 신앙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은 지식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academic intelligence, 학문적인 지식과 pastoral practice, 목회적인 실천이 함께 연합되어서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가는 것이 traditional reformed ministry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신학이 설교와 분리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는 단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유장한 기독교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인데, 설교가 더 이상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윤리적인 가르침, ethical teaching 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진정한 지식과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개혁주의적인 목회의 전통을 계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학함’이란 지식이 있고, 경건이 있고, 그것들이 목회사역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것이 바로 reformed tradition of ministry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evangelicalism, 복음주의라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복음주의의 뿌리가 개혁주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의 뿌리가 더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은 소위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Revivalism, 부흥주의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에 존 웨슬레, 조지 휘필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부흥운동, 이런 것들이 결국은 복음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전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개혁주의는 굉장히 뿌리가 깊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는 중세의 전통적인 신학과도 연결이 되고 그 이전의 인문주의, 르네상스, 기독교 인문주의와도 연결이 되고 그 뒤로는 중세와 연결이 되고 그 뒤로는 보편교회의 신학인 동방신학과 서방신학, 초대교회의 신학으로 연결이 됩니다. 더 깊이는 사도, 속사도 시대로 연결이 됩니다. 물론 구약 신학으로도 연결이 됩니다. 이런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데에 비해서 이 부흥주의는 사실 18세기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에 뿌리를 둡니다. 신학적인 뿌리가 약합니다. 여기서는 지적인 전통을 굉장히 중요시 하고 여기에서는 개인적인 체험과 종교적인 경험을 매우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서로 배척되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이것이 이것을 반성하게 하고 이것이 이것을 반성하게 하면서 바람직한 복음주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주의는 분명히 어두운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18세기 말에 미국 켄터키에 있었던 revivalism의 역사 같은 것들은 대표적인 사건인데, 이런 것들은 굉장히 pentecostal 합니다. 그러면서 목회자직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성격을 배태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의 지성적인 전통을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접할 수 있는 마크 A. 놀(Mark A. Noll)의 책 가운데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ism America” 인가하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부흥주의가 들어오면서 탈 사상적이 되고 그러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커다란 사상의 힘을 상실하게 해 버렸다는 지적들을 남깁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부분들도 가지고 있는데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 그리고 근대 선교운동에 이바지하고 사회개혁에 공헌한 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18세기 말에 켄터키 지방에 있었던 부흥운동의 모습입니다. 굉장히 신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피워놓고 집회를 하고 뜨겁게 찬양을 합니다.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주장하고 누구든지 성령의 불을 받으면 preacher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Wonderful freedom”, “놀라운 자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 시대에는 제도를 따랐지만 이제는 성령의 역사로 자신들이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되어서 누구든지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직의 질서에 도전하게 됩니다.
이안 머레이(Ian William Murray)라는 영국 사람은 “Revival and revivalism”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서 부흥주의가 남긴 어두운 그늘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현재 목회를 하다가 성장의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들이 신학적인 검증 없이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을 그때그때 성과중심의 목회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경고해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반드시 역사와 함께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같은 사람, 이 사람은 지성보다는 감정,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들을 많이 남기게 됩니다.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굉장히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무디의 부흥운동을 이렇게 보시고, 20세기에 오순절운동등이 일어나면서 ‘pentecostalism’(오순절주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조지 휘필드가 설교하고 있는 장면인데, 사실 조지 휘필드는 Calvinistic Methodists(칼빈주의적 감리교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분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 메튜 헨리(Matthew Henry)였습니다. 이 사람이 남긴 주석 전권 네 권을 읽고 마지막에는 무릎 꿇고 한 번을 읽을 정도로 그럴 정도로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이러한 Revivalism(부흥주의)에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복음 사역자로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특히 이 사람 때문에 길거리에서 하는 설교들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방문했을 때, 조나단 에드워즈가 질문을 합니다. 어떤 설교에 있어서 충동의 문제, impulse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질문했더니 대답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충동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라고 비판을 하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때 주관적인 충동을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복음전도사역에 있어서는 견실한 협력자이기는 했지만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conflict 가 있는 사이였습니다.
조지 마스던(George M. Marsden) 이라는 이 분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휫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가 정직하게 꾸짖었을 때 그 설교자는 잘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 그 주제를 무시했다. 두 복음 전도자는 굳건한 협력자로 남았지만 가까이에서 함께 사역하기에는 그 방식이 너무 달랐다.” 이런 이야기를 자기의 책인 에드워즈 평전에 남기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학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라는 것 자체는, 목회자가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 때문에 그 아름다우신 주님을 소개하고, 소개받은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사모하고 아름답게 transforming되고 그래서 결국은 함께 그 아름다움을 enjoy 하는, Enjoy in beauty of God, 이것이 바로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묻어 있겠습니까? Bible 이야기를 하셨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계시에 묻어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계시가 History of Redemption 입니다. History of Redemption 은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relationship 을 맺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가장 많은 성품들이, 속성들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미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입니다. The Bible is the essence of the beauty of God.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The Bible is the book about beauty of God, The Gospel is the essence of the beauty of God. 이렇게 definition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이 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The love of purpose, 목적애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benevolence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아모르 베네 볼론티아”라고 해서 “박애애”, “Love of benevolence”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그 성품에서 비롯되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이 세계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속사역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속사역을 본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목회 사역 속에서 사람들이 구원받고 변화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인류 역사자체를 어떻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오셨는가 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할 때,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감격을 경험하면서 신학을 공부해야만 그 공부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The essence of Pastoral ministry is the showing the beauty of God. And Teaching the beauty of God, by language, character, personality, and his life.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목회의 본질입니다.
조지 마스던 교수와 만났습니다. 아마 세계적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가일 것입니다. 만나서 약 두 시간동안을 강가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 둘이 일치하게 합의에 도달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였습니다. 목회자가 아니라 목회의 본질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목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28:46).
이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다. 목회의 본질이, 목회자가 심미자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뜨리뷰티움’, 속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그래서 그 행복을 성도들에게 전해주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보여주는, 그래서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고 할 때,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것을 가르친다는 것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아주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쓴 “preaching and preachers”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설교가 무엇이냐, preaching as logic on fire, logic은 이성과 doctrine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on fire는 성령과 사랑, grace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어떤 theological logic을 deliver 하는 것입니다. delivering the theological logic,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설교자가 자기 설교 속에서 확고하게 붙드는 신학이 없다면 그것은 정신훈화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는 반드시 theological 해야 합니다. the preaching all someone must be theological. 또 하나 이렇게 얘기합니다. the preaching is eloquent reason. reason은 그야말로 doctrine and theory를 의미합니다. eloquent는 유창함입니다. 무엇 때문에? affection, love, grace, experience,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란 아주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어떤 신학은 preaching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학적인 어떤 결과를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신학을 통해서 성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목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목회의 소명, calling of ministry를 이야기하자면, 소명을 우리가 한번 체험해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소명의식이 계속 자신 안에 불붙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도바울에 있어서 더 확장된 사도바울의 ministry, 그리고 그의 모든 신학을 안으로 계속 수렴하면 하나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목회자의 체험을 이야기할 때 이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모든 사업이 다 망하고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calling의 evidence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증거가 되어야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이 evidence of calling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시간이 없지만,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해서 설명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첫 번째 명제는 “Jesus was crucified.” 자기의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But he is risen.”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둘 다 fact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사실은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Incompatible. 왜냐하면 만약에 예수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었다면 하나님이 살리셨을 리가 없고, 살리실만한 사람이라면 죄인이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confused된 것입니다. 거기서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둘 다 fact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고 죽은 이유가 우리의 죄 때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를 살리실만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대속의 교리가 벼락처럼 그의 지성을 치고 들어오면서 인류의 모든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At last he became to the man of the christ centered man.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인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우주와 세계의 역사를 보는 하나의 중요한 관점으로 도입이 된 것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탁월하게 발전시킨 사람이 church father 중에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이라는 교리를 유장하게 발전시켜서 기독교의 역사관을 확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에베소서 1장 10절 등을 중심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엄청난 교회사의 비밀들이 이 안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가르쳐드리지 못하는 것들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어쨌든 그 소명들이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뿐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내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려하나니”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은 그 불붙는 소명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the grace of justification이 아니라 the grace of sanctification 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성화되어 가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이 자신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자신의 전 존재를 드리고 싶어 하는 사랑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 진리와 사랑이 은혜로 역사함으로써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진리를 탐구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르게 신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정동, affection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출렁하면서 아름다운 것 때문에 사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사랑이 disposition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거룩하심, 무한히 위대하심, 완전하심을 우리들이 체득해가는 것입니다.
설교자 중 누가 자기가 선포한 바를 온전히 살아내었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설교와 삶의 불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끊임없는 몸부림이 바로 소명의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사역은 마치 비즈니스를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일을 계획하고 거기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당신의 아름다움을 meditation, consideration 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 속에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그것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신학을 하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만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딱 붙어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데에서 성장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결코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평신도가 성경을 읽다가 잘 모르는 것이 나와서 목사님께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것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니까 신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로마서 9장을 읽다가 의문이 생겨서 신학교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교수님의 말씀이, 미안하다고 자기는 조직신학자라서 성경은 잘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구약신학자를 찾아갔더니 자기 전공이 구약이라서 신약은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만났더니 자기는 8장으로 논문을 썼기 때문에 9장은 잘 모른답니다. 이런 지식은 목회에서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거기서 삶의 지혜가 나오고 세계와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지적인 교만보다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지식도 성경만큼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순자가 권학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騏驥一躍 不能十步(기기일약 부능십보) 駑馬十駕 功在不舍(노마십가 공재불사)” 천리마가 있습니다.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 크게 한 번 뛴다고 하더라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아주 평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그 천리마만큼 따라갈 수 있으니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데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천리마라고 생각하지 말고 노마(駑馬)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은 천재성으로 승부하지만 나는 성실성으로 승부한다고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덜 자고 덜 놀고 덜 먹고 그리고 자기를 부수는 열심으로 성경과 신학을 끊임없이 공부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남긴 고백록입니다. 사실 저는 책을 읽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절대 교만이 아닙니다. 그 책들의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훌륭하다.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나는 한 사람의 지성에 압도당하는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어거스틴은 천재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냥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책을 120번에서 150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6개월 동안을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김남준은 누구입니까? 어거스틴은 대충 썼고, 나는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지만 겨우겨우 이해를 합니다. 왜 그는 천재로 만드시고 나는 보통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나에게도 천재성을 주시옵소서.”응답이 있었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 그리고 이제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자, 그리고 덜 자고 덜 놀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주일에 거의 설교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8시에 잠깐 설교를 하고 계속을 영상을 돌리면서 네 번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링거를 맞으면서 밤새도록 앓았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는 날이라서 가방을 매고 나가는데 아내가 얘기를 했습니다.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십니까? 쉬십시오.”, “나공부하러 가야해.”, “당신 여태껏 공부 많이 했으니까 그걸 쓰세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서 그날 쓸 땔감을 캐다가 가족들을 위해 불을 피워 사는 광부와 같을 뿐이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탄광에 내려가야 한다.”
결국은 신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것이고 이것은 거룩한 진리와 하나입니다.
제 서가에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약 6만권 정도의 책들이 있는데 서재에 들어가면 많은 책들이 소리칩니다. “목사님! 저 좀 읽어주세요!”, “목사님! 나도 금방 도착했어요! 나 좀 보세요!”, “나는 얘보다 더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나 좀 읽어주세요!” 서가에 우연히 보니까, 프레드릭 빌리헴 흐로샤이데라는 화란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신학 교수였고, 박윤선 박사나 이상근 목사님이 주석에서 자주 애용하고 있는 commentator 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오페롬띠올로지카롬”이라는 유니우스의 책이 있는데 이런 책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책들도 소리칩니다. “목사님!, 저 좀 읽어주세요!”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귀찮지 않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사지 못했는데 지금은 책은 있는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때 온 마음을 다해서 읽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공부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을 할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육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찾을 때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dirty 한 인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게 되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이고 목회란 더럽게 된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다시 바꾸는 것,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두 번의 지적인 깊은 개안을 경험했습니다. 첫째는 30대 중반에 주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러면서 신학의 다양한 분과들이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40대 후반에는 세상의 모든 학문들이 어떻게 연관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둘 다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한 때 자주 다니던 경기도에 있는 기도원인데, 그때 정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의해 압도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금요일마다 산에 올라가서 거의 밤을 새면서 기도하고 설교를 준비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놀라왔는지 밤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면 진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런 은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습니다. Philosophy try to find the truth. But the science which shows truth is theology. 철학은 신학을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입니다. 신앙은 아름다움을 누리게 만들고, The faith makes us enjoyed beauty of God, and makes ourselves attached to truth. 우리의 삶을 그 진리에 부합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해가는 그런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신학을 하는 기본적인 자세는 믿음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 그것이 신학을 위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성경에 가장 풍부하게 묻어있지만 모든 학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성경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확고한 성경에 대한 믿음과 신학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지식들이 필요한데,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이런 등의 공부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신적인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이라는 것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성경을 믿는 확고한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있는 교회에 대한 사랑, 이 속에서 우리들이 경건을 실제로 표출하면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의 소명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말했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지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데 그 전달되는 중심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시다.
성속의 여부는 지식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모든 사람이어야 하고 온 세계가 거룩하게 되는 일에 소명을 느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회의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마지막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호세아 6장 3절입니다. 우리 같이 읽음으로써 강의를 마무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하니라” 아멘
결론입니다. 신학은 매우 사랑스러운 학문이다. 그리고 신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참으로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