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가르치는 사람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5:2)
녹취자: 김경애
무엇인가 가지고 오셨는데 그것을 보실 필요도 없고, 메모하실 필요도 없고, 제 이야기만 가만히 들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쳐다보지도 않을 메모인데 보시면 뭐합니까? 여기를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는 아마 교사생활을 20년, 30년 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이제 막 희망차게 시작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를 보면 교회 교육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애들을 낳지 않습니다. 하나 혹은 잘해야 둘입니다. 셋도 아주 드뭅니다. 이제 이런 상황이 되는데다가 또 옛날에는 애들은 교회를 다니는데 부모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거꾸로 부모는 교회를 다니는데 애들이 안다는 경우가 많아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경고하면 말을 들었는데 이제는 애들이 부모를 말 듣게 하는 세상이니까 이제 부모도 자기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통계가 나왔는데 2500년까지 이 추세로 가면 한민족이 없어진답니다. 35만 명이 남고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인구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들이 교사의 책임과 사명이라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사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교사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교사를 하던 시절을 돌아보아도 아이들을 심방하기도 하고 또 심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기도 하고 또 주일이면 한 달에 한 번씩 특별활동도 하고 저 같은 경우도 아주 은혜를 받아서 한동안 은혜를 받을 때 연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애들하고 연애를 하면서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나가기 전에 애들 전부 교회에 모이라고해서 애들 하나하나를 붙들고 기도하고 데리고 학교 앞에 가서 학교에 집어넣고 나는 전철을 타고 출근을 했습니다. 돌아오면 아이들이 교회에 모여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같이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그랬습니다. 얘네 들은 아무리 선생님이 나오라고 그래도 저녁때 자장면 하나만 사주면 오케이입니다.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공부도 가르치고 이렇게 교사가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면 그런 많은 일은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은 본질적인 일이고 어떤 일은 비본질적인 일인데 교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여기에 대한 답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찾고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 앞장에 보면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치신 후에 예수님이 팔복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 그 팔복 산에 모였고 예수님은 높은 곳에 앉으셔서 좌정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에는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시작하셨는데 입을 여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댐에서 수문을 열자 물이 확 쏟아져 나왔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입을 열자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러분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성경책이 없었습니다. 성경책 자체가 두루마리로 되어있어서 당시에 구약성경밖에 없었는데 구약성경 전체를 합치면 한 수레는 될 정도의 분량이었기 때문에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설교 원고도 없이 성경도 펼치지 않으신 채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모인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까 아마도 예수님이 꽤 큰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입을 열고 예수님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어디까지 갔겠습니까? 5장에서 6장을 지나 7장까지 흘러갔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전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셔서 전달하신 내용의 골자만을 모아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거기에서 천국시민의 자격과 삶에 대해서 꽤 긴 강론을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내 짐작에는 짧으면 세 시간, 길면 다섯 시간 가량 하나님의 말씀을 쭉 전하셨을 것이고 그중에서 골자만을 추려서 이렇게 산상수훈이라는 성경의 한부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하신 본질적인 사역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위로하시던 사역도 예수님의 사역이었지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사람들을 깨우쳐 그들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구주이심을 믿도록 증거하시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하신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수많은 일을 하지만 교사들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성경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정체성은 성경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국교회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굉장히 이러한 정의에 대해서 엇가고 있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제는 어린이 사역이든지, 청소년사역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진리를 교육하는 이 일이 교회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행사를 만들어서 그래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 일이 말하자면 상당히 중요한 교회의 할 일인 것처럼 이렇게 인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교육의 방식에 전면적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교회가 된다면 5년, 10년 뒤에는 교회는 굉장히 쓰디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변화된 성도 한사람이 어느 날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듣고 깊이 반성을 하면서 20년 전에 그렇게 열심히 자기가 교사생활을 했는데 그때 가르친 애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20년 전의 주소록을 수소문하고 수소문해서 자기가 가르치던 약 20명 정도 되는 고등학생들을 20년 만에 다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20명중에 2명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20년 전의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순수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도 20년 전에는 애들이 지금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제쳐놓은 그런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약에 이런 상태로 나가서 20년 후가 된다면 우리가 가르친 30명을 찾아도 1명이 교회에 출석한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운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자, 첫째 줄, 둘째 줄, 셋째 줄 일어나십시오. 까만 옷 입은 자매! 일어나보십시오. 상 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이쪽, 저쪽 세 번째 줄 나란히 다 일어나십시오. 18분이 계신데 그 앞에 두 분 더 일어나십시오. 이중에서 교사가 아닌 사람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교사입니까? 반을 맡고 있지 않은 분들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 정도로 실험을 하겠습니다. 지난주일 교회에 안 나오신 분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교회는 나왔지만 주일학교에 결석하신분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러면 지난 주일에 교회학교 전체에서 아예 공과공부가 없었던 분들도 자리에 앉으십시오. 상당히 많이 앉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여러분들은 모두 그저께 몇 명이든지 애들을 놓고 공과를 가르치신 분들이십니까? 정확하게 이틀 전에 가르친 공과가 성경 무슨 책 몇 장 몇 절이었는지를 기억나시는 분만 남고 나머지는 빨리 앉으십시오. 자, 그러면 지금 계신 분들은 무슨 내용을 가르치셨습니까? 저쪽 끝부터 말씀해보십시오. 옆에 계신 분. 이하동문입니까? 자 22명이 일어나셨는데 3분이 남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은 더 심할 것입니다. 한 번 더 실험해 보겠습니다. 자, 이쪽 줄에 계신 분들 모두 일어서십시오. 오늘 잘못 걸렸습니다. 떠들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내가 비록 교사지만 주일 예배를 부득이해서 다른 교회에서 드려도 괜찮으니까 내가 주일을 제치신 분은 앉으십시오. 무슨 소린지 모르십니까? 주일예배를 빼먹으신 분들만 자리에 앉으십시오. 다 드리셨습니다. 그러면 주일날 어른들이 참석하거나 청년들이 참석하는 정규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주일날 설교한 설교본문이 무슨 책 몇 장 몇 절인지 기억나시는 분만 남고 빨리 앉으십시오. 그럼 다 앉으십시오. 13년 전에 제가 ‘예배에 감격에 빠져라’ 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 십만 부 정도가 나갔는데 몇 년간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리바이벌 되어서 다음 달에 나오는데 그 책을 쓸데 제가 흥미 있는 통계를 접했습니다. 한국의 교회 중에 복음적인 교회를 무작위로 추출해서 앙케트 요원들이 조사를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교회의 정문에서 지금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했느냐고 물었을 때 95%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절반이 신약이었는지 구약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명이 기억하고 있기에 3일 뒤에 그 5명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았더니 5명중 3명은 3일 사이에 잊어버렸고 2명만 지난주 설교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을 무엇을 가르쳤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애들이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 어떤 현상이 빚어지겠습니다. 유치부를 다닐 때까지는 엄마를 떨어져서 못살기 때문에 교회에 따라서 옵니다. 왜? 그 아이들은 껌딱지니까 말입니다. 엄마에게 딱 달라붙어서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슬슬 반항하기 시작하면서 ‘나 교회 가기 싫어!’ 그러면서 버팁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이 꼼짝 못하는 것이 엄마가 ‘맞을래?’ 그러면 통솔이 됩니다. 중학생이 되면 이제 ‘맞을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애들 덩치가 엄마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교회 안 갈래!’ 그러면 ‘너 그러면 용돈 없다!’ 그러면서 용돈가지고 협박을 하면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통합니다. 그런데 대학을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통솔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조를 잘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이 꽤 있는데 주일학교까지는 이어집니다. 중등부 때 대거 빠져나갑니다.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올라갈 때는 더 많이 빠져나갑니다. 고등부에서 대학부로 갈 때는 더 많이 빠져나갑니다. 대학에서 직장사회인이 될 때는 더 많이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육을 시켜서 결국은 다 세상 물에 타서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물을 타서 세상 물에 흘려보내고, 중학교 졸업하면서 세상 물을 타서 흘려보내고, 고등학교 때 흘려보내고, 마지막에는 거둬들이는 곡식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의 교회는 우리교회처럼 신생교회가 아닙니다. 아까 57년이라고 그러시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57년 정도가 되었을 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대학교 다니는 애들 중에서는 주일학교 때부터 다닌 아이들이 굉장히 많아야합니다. 실제 비율을 조사해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소수입니다. 이런 문제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모으는 방법은 많습니다. 여러분 동방신기를 부르면 아이들은 미어터집니다. 그 친구들이 와서 한번 노래해주고 가는데 4,500만원을 준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어느 한순간에 관심을 끌고 확 모였다고 칩시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무슨 성과가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 인간을 그렇게 간단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유전자 자체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아주 못된 독립형 유전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거듭나는 회심의 역사가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개혁주의적인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에 제가 집회를 갔습니다. 청년 집회를 한다고 해서 갔는데 담임 목사님은 어디를 가시고 한 300명이 모였는데 나중에 더 와서 꽉 찼습니다. 그러면서 부목사님 한분이 나를 따라다니면서 자기 교회 자랑을 많이 합니다. 나야 뭐 모든 교회가 다 잘되면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네 교회가 한참 뜨는 교회고 자기 목사님은 방송, 신문할 것 없이 수없이 떠서 교인들이 몰려온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좋은 교회입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님은 신학을 총신에서 공부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회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럼요.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회심이 아닙니까!’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른들의 경우 회심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까?’ 물으니까 그렇다고 그래요.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장년교구를 담당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러면 ‘장년교구를 담당하시는데 몇 명이나 돌보십니까?’ 한 팔백 명을 돌본다고 그래요. ‘그러면 팔백 명을 돌보는데 가슴에 손을 얹고 그중에서 진정으로 회심해서 거듭난 사람, 지금 죽으면 구원을 받을 사람이 몇 %나 됩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그러더니 20% 아니 30% 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혼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한테 무엇을 자랑하느냐? 당신네 교회가 뜨는데 그러면 당신네 뜬다고 자랑하고 당신네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는데 당신이 맡고 있는 양떼가 100명 가운데 30명 정도만 구원을 얻었고 나머지는 불신자로 교회를 다닌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무엇을 나한테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아이들이 다닌 다고해서 그 아이들이 예수를 믿는 아이들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기초부터 신학적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나야지 그 아이들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 그랬는데 그런 진실한 회개와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믿음, 그분이 주되심 앞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맡기는 그런 그리스도의 Lordship 에 대한 전적인 복종이 없는데 그게 어떻게 신자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인간들이 변화되는 것이 무엇으로 변화됩니까? 썩어질 씨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을 불러놓고 진지하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네가 믿어야할 구세주시라는 것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그런 진실한 말씀이 전파되어도 애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인데 그런데 그것을 처음부터 제시도 하지 않고 만날 문화학교니 무엇이니 하면서 아이들을 불러놓고 놀이나 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흡족해하면 아주 훌륭한 행사였다고, 감동이 있었다고 그러는데 죄인들이 모여서 수없이 감동을 해서 마지막에 그것을 통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애들의 종입니까?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그리고 교회의 막대한 예산을 그 쓸데없는 데가 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상 밖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이 사회의 문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얼마나 엄청나게 변하는데 교회에서 그까짓 거 비슷하게 따라 해가지고 아이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만족을 느꼈다고 아이들이 박수를 치면 애쓰신 선생님이 불쌍해서 격려의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텔레비전에서 15초짜리 상업용 광고를 보지 않습니까? 그것이 잘 만든 것은 15초에 5억이 들어간답니다. 5억 내지 6억이 들어간답니다. 그리고 그냥 보았을 때 ‘그냥 그러네!’ 그런 것은 보통 2억이 들어가는 광고랍니다. 그런 것들로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생각을 사로잡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빔 프로젝트 하나 갖다놓고 그것 비슷하게 만들어서 아이들의 마음을 한번 사로잡아 보려고 합니까? 해보십시오. 그것이 됩니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부끄럽게 하거나 혼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 일어서고 앉는 이 광경을 보면서 많은 시사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의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교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이렇게 갑니다. 그런데 조금 뭐한 이야기지만 수없이 가서 해보지만 강남에 있는 교회들은 조금 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교회가 가르치는 지도자들 자체가 어떻게 하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간의 영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이 진리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하여야한다는 그런 어떤 결단과 자기 확신이 현저히 부족한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였습니다. 처음 그 교회에 청소년부에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갔는데 아이들이 고등부 아이들이 모였는데 한 80명 정도 모였습니다. 갔는데 앞에 있는 선임자 전도사님이 한 20분을 설교하고 찬양도 부르고 해서 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그랬습니다. 그리고 공과공부 시간을 두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성경공부를 굉장히 강조하나보다 생각했는데 열심히 하는 반은 열심히 하는데 그중의 어느 한 반을 보니까 선생님이 예배시간이 거의 끝나서 헉헉거리며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것부터 틀린 것입니다. 그러더니 드디어 공과공부를 시작하니까 쭉 모이는 것입니다. 이제 공과공부를 하려나보다 했더니 선생님이 그러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 아침 먹었니? 아침 못 먹었지? 선생님이 너희 주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샌드위치를 쌌단다.’ 그러면서 가방을 여니까 진짜 쿠킹호일에 싼 샌드위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애들을 다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좀 그렇기는 하지만 밥도 안 먹고 왔으니까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여자아이 둘이서 ‘선생님 우유는 우리가 낼게요.’ 그러더니 우유를 산다고 한 아이가 일어나니까 여자애 둘이서 ‘나도 같이 갈래’ 그러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6명이 모였는데 전 교인의 50%가 우유 사러 갔습니다. 동네 가까운데 슈퍼가 없어서 15분 만에 우유를 사가지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올라와서 우유를 갖다놓더니 ‘어 컵이 없네. 식당에서 컵을 가지고 올게요.’ 그리고 하나가 내려가니까 ‘나도 갈래’ 그러면서 따라 내려갔습니다. 전교인의 33%가 컵을 가지러 갔습니다. 가지고와서 따라서 먹다가 또 흘렸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걸레를 가지러 뛰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샌드위치를 먹고, 우유도 먹고, 흘린 것도 치우고 끝났습니다. 이제 성경공부를 하려나보다 그랬는데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가 ‘얘들아 우리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 어떻게 살았는지 삶을 나누어볼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아이가 ‘저는 일주일동안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다 끝났습니다. 다 끝났나 했더니 내가 이야기 할 것인데 이 선생님은 6명 아이들이 이야기한 것 보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연예인 펜클럽에 간 이야기도 하고 별 이야기를 다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반들은 벌써 다 끝나가는 것입니다. 저쪽 반에서는 공과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가자!’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냐?’ 그랬더니 공과 공부하러 간답니다. 어디로 가냐고 그랬더니 웬디스로 공과공부를 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웬디스가 무엇인가 했습니다. 그곳은 롯데리아 같이 닭다리를 파는 곳입니다. 나는 또 순진하게 그곳에서 공부를 하는 줄 알고 나중에 가보았습니다. 공부는 무슨 공부입니까? 음악이 귀가 찢어지도록 나와서 옆에 있는 사람하고 이야기도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결국 그날 거기에서 닭다리 하나씩 뜯고 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그 아이들은 그렇게 하고 같이 이야기를 하고 끝마쳤는데 당연히 공부하려니 했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얘들아 오늘 정말 은혜로운 시간이었지? 우리 손잡고 기도하고 마치자.’ 저쪽에 있는 아이가 ‘선생님 오늘 공과공부는 안 해요?’ 그러니까 옆에 있는 아이가 ‘가만히 있어 이 자식아!’ 그러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런 교육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애들 기분 맞춰주다가 그냥 그 주일을 보낸 것입니다. 그것이 한 주, 두 주, 세 주, 거듭되면서 아이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고 이런 것이구나!’ 그러면서 교회에 기대감 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분명히 회개하여야할 일입니다. 교사는 뭐든 일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진리가 아닌 거짓을 가르쳤을 때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했을 때 이 두 가지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러면 차라리 너도 안 들어가고 남들도 못 들어가게 할 바에야 차라리 비켜라.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실족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어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겠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시간입니다.
우리 딸이 이번에 대학을 들어갔습니다. 애들이 고3이 되면 집안 식구들을 달달 볶습니다. 얘도 힘들게 했는데 나중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엄마, 아빠 나는 내 생애 전체 중에서 고3이 가장 행복했어요.’ ‘왜?’ 은혜 안에서 사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도행전을 보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가 무엇을 달라고 구걸하고 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올라가면서 돈 좀 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요즘은 거꾸로 입니다. ‘은과 금도 내게 있으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이 실화라고 믿지는 않는데 어느 책에 보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그 진실성에 대해서는 확신이 가지 않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사였고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독교의 위대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교황을 만났답니다. 교황이 금고를 열어서 어마어마한 보물을 보여주면서 ‘이보게 수도사! 이제는 우리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네!’ 그러니까 수도사 아퀴나스가 말하기를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교회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그랬답니다.
여러분들이 착각하지 말아야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세상과 똑같아지면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나는 어렸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아부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떠났고 그리고 떠난 후에 지독하게 마음고생을 하고 방황을 하다가 6년 후에 내 발로 교회에 돌아왔습니다. 교회를 떠날 때는 나하고는 사람들이 너무 달라서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는 사람들도 나하고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고, 고생을 하고 다시 돌아올 때는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왠지 나보다는 행복하고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있고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다녔고 중학교 1학년 말에 사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가끔 우리 교사들에게 따끔하게 이야기합니다만 그 긴 세월을 교회를 다니고 수없는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물론 나는 그렇게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선생님들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많은 선생님들이 스쳐갔는데 단 한 명도 내게 와서 ‘남준아!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아니?’ ‘네가 죄인이라는 것이 믿어지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너를 위해 흘린 피라는 것을 믿니?’ ‘너 지금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자신이 있니?’ ‘지금 예수님이 네 마음에 계시니?’ 진지하게 단 한 번도 물어준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고민을 하고 그렇게 괴로워할 때도 교회를 나갔지만 내 인생에는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나하고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발로 교회를 떠났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출발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큰 고난을 오늘 내가 경험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이제 자기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순종하면서 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면 두 가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전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렇게 변화되고 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아이들도 이렇게 회심을 하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 주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얼마나 탁월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꿀 송이처럼 뭉쳐져 있는 곳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쭉 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 그 아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할 때 보니까 아이들을 설교자의 양심으로 판단하는데 한 100명중 30명 내지 40명 정도가 정말 구원받은 아이들이고 나머지는 구원과 별로 상관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가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잘 보십시오. 와서 행사나 하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전도사가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데 90분씩 설교를 했습니다. 애들이 죽으려고 합니다. 애들이 죽으려고 하기에 그 다음에 설교시간을 늘렸습니다. 그래서 180분씩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9시 20분에 설교를 시작해서 12시 20분에 끝냈습니다. 그때는 한창 때였고 학교의 교수였는데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교강의를 다 끝내고 토요일에 설교준비를 한 다음에 보따리를 싸서 교회로 갔습니다. 이방보다는 조금 컸는데 엎드려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어쨌든 ‘하나님 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가자마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찰 집사님이 계셨는데 교회가 워낙 넓은데 혼자서 일하시니까 깨끗하게 청소할 수가 없습니다. 혼자 가서 양복을 다 벗고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혼자 청소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땀이 뻘뻘 납니다. 맨 마지막에 청소하는 것이 이 강대상입니다. 걸레를 빨아 와서 기도를 하면서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내일 여기서 설교 할 텐데 하나님 역사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저 개념 없는 저 녀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그러면서 청소하면서 마지막에 그 앞에 스치로폼을 한 장 깔고 방석 몇 개를 갖다놓고 앉아서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것이 많을 때는 한 세시까지 하고 그렇지 않으면 두시까지 하고, 잠깐 한숨 자고, 이제 새벽에 아이들이 오면 맞이하고, 설교하고 그랬습니다. 혼자 와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예배시간에 이 녀석들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벌떡 일어나서 걸어 나가면서 교회 문을 발길로 뻥 차면서 ‘에이 씨 제기랄!’ 그러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도토리만한 놈들이 와서 전도사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 교회에 와서 우리 부서를 다 망쳐놓느냐고 그러면서 내가 이제서 이야기하는데 골목길에서 벽돌로 머리를 찍어버리려고 그랬다고 그럽니다. 찍어라 찍으면 내가 순교지!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길을 간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견디고 견디다 떠나간 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되었는데 얼마나 놀랍냐하면 20분 설교를 못 참던 아이들이 180분을 설교하는 동안에 지금 여러분처럼 이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석고를 깎아놓은 것처럼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끝나고 나면 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면 죽어도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아버지의 사랑만이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빈 잔을 가지고 허기지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여러분들이 과자나 사주고 데리고 놀고 박수나 치고 영화나 보여주고 그러면 여러분은 죄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조용히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애들의 출석부를 펼쳐놓고 나의 무관심 속에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양떼들에게 빨간 표를 해보고, 남아있지만 교사의 양심으로 가슴에 손을 얹을 때 이 아이는 절대로 구원받은 아이가 아닐 것 같은 아이들에게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그리고 남은 아이들 중에서 구원받은 아이인데 이중에 얘는 구원은 받았지만 지금 심각하게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거의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안 읽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아이라면 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애들은 예수를 믿고, 확신도 있고, 말씀도 읽고, 경건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은혜 안에 살아가는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만 파란 줄로 쳐봐요. 몇 명 남는가 보십시오.
리처드 백스터라는 17세기 영국의 키더민스터의 목회자는 자기의 ‘회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그를 위해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교역자들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먼저 죽어야합니다.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내놓아야합니다. 선생님들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목숨을 던져야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저 영혼들이 정말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목회자로서 이 교회에서 저 영혼들을 대신해서 죽어도 좋다. 여러분들이 교사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돌보는 영혼을 위해서 금식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릴레이표로 하는 아침금식 말고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18세기의 미국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인디언의 영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던 전도사였습니다. 수백 명 수천 명을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따리를 싸서 밀림을 누비면서 만나는 인디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21살에 회심을 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눈 덮인 언덕에서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각혈이 쏟아져 나오면서 하얀 눈 위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일기 속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에 곡을 붙였습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아마 교회학교 사역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서가 아까 밝힌 중등부서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도 토요일이면 중등부 아이들이 기타를 메고 성경찬송을 가지고 그 바쁜 토요일에 기도하러 모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틀립니다. 다릅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중학교 3학년 밖에 안 되었는데 성도라고 불러주고 싶을 정도로 얼굴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인격이 막 흐릅니다. 그 안정, 평화, 그리고 주님을 향한 의존, 사랑, 이런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루는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 그랬더니 ‘성도여러분! 우리가 참 좋은 성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중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정말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예배를 드릴 때 혹은 여러분들이 몇 명의 아이들을 놓고 가르칠 때 공과공부 시간이 눈물에 젖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아이들이 변화되고 나니까 그렇게 놀기 좋아하고 그러던 아이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예쁜 교재를 갖다 주고 공부를 시켜도 공부를 안 하던 아이들이 모여앉아서 선생님이 성경책 하나만 펴놓고 찬찬히 가르치면 그 말괄량이 같은 놈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공부하는데 고등학교 애들은 그때 이렇게 큽니다. 그런 아이들이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성경을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성경을 듣는 것입니다. 애들이 제일 신나는 때가 언제냐 하면 선생님이 아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때입니다. ‘야, 오늘 우리 공과공부 안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나오면 그렇게 도망가던 놈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서 선생님이 왜 안 나오는지 연락도 없이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놈도 안 움직이고 기도회를 합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보니까 간절히 울면서 기도하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 우리 선생님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실화입니다. 실화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죗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제가 그 교회를 햇수로 7년 만에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한 2년 동안을 설날이면 세배를 왔습니다. 2년 되던 날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오지 마라. 나는 잊어버려라. 지금 너의 지도자에게 충실하여라. 나도 보고 싶지만 이다음에 예루살렘에서 만나자.’ 그 어느 겨울입니다. 잊히지 않습니다. 2년 만에 찾아왔는데 윷놀이를 하고 재미있게 놀았는데 아이들이 ‘전도사님 이제 갈래요.’ 그런데 갑자기 울컥하면서 다시는 이 세상에서 못 만날 아이들인 것처럼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애들아, 지금 시간이 조금 늦었지만 우리 예배드리고 가면 안 되겠니?’ ‘좋아요 전도사님!’ 딱 12명이 마루에 쭉 둘러앉아서 그때 우리 즐겨 부르던 찬송이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마태복음 26장을 펼쳐서 한 40분 설교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정말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찬양)
내 맘을 녹이셨네.
우리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무엇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까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주님의 그 큰 사랑을 힘입어서 여기에 살아있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고 그날 그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면서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친구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흘러가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 아이들이 영원히 우리의 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리고 있을 동안에 온 마음을 다하여 그 영혼이 내 영혼인 것처럼 내 새끼인 것처럼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그 아이를 사랑하고, 그래서 이름 석 자만 불러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그리움이 밀려오도록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물론 우리가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하여도 끝까지 변화되지 않을 영혼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염려할 분량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양떼라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는 어찌하든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십자가 사랑 때문에 그 영혼을 돌보는 목자가 되었다고 하는 움직일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영혼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의 학생들에게 기도하지 않는다고 야단을 안치죠? ‘왜 기도 안했니? 그렇게 기도 안하면 어떻게 하니?’ 야단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하지 않으니까 나부터 야단맞아야하는데 아이들을 야단칠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고 야단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 말씀의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정말 혐오하는 교육의 방식이 애들이 왔을 때 선물을 한보따리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망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는 절대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교회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용서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남자애가 가서 쿡쿡 찌르면서 자기와 연애하자고 편지를 보냅니다. 대꾸도 안하니까 집요하게 편지를 보내고 선물을 보냅니다. 어느 날 여학생한테 답장이 왔는데 이렇게 두툼하게 왔습니다. ‘야, 드디어 넘어갔구나!’ 하면서 펼쳐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무개 보아라.’ 그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구원해주셨고, 은혜를 주셨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미끄러졌고, 쭉 쓰면서 마지막 결론이 ‘정신 차리고 기도 많이 해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사면을 다 돌아보아도 이제 이 어두워져가는 이 시대에 우리의 아이들을 올바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에는 더 극도의 어려움들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남은 희망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서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부신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그 진리의 세계의 유장함을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 고백이 아이들 속에서 흘러나올 때 그 영혼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상관없습니다. 왜? 그럴수록 우리 주님이 더욱 소중하기 때문에 주님을 붙들고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정말 새롭게 핏덩이 같은 영혼들을 끌어안고 주님의 사랑으로 기르기까지 우리가 어떠한 십자가도 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