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백지영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강의할 제목은 아름다움과 신학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저 사람은 과연 소명을 받았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선배들 중에도 만나겠지만 아마 여러분 동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사역자로 소명을 받는 소명체험의 확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기독교 복음사역자로 부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체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책 2장 정도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집에 가서 읽어보시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주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자가 되어야 되겠다고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이 세상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야지만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소명을 받은 사람들인데 정말 삶이나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
우선 오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들어가는 말, 올바른 신학함, 지식과 사랑의 결합,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 부흥주의의 어두운 유산, 하나님의 아름다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함 이렇게 해서 오늘 강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 보면 소명의 체험이 분명히 있어야 하고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유지가 필요합니다. 소명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소명체험은 순간의 체험이지만 소명을 유지하는 것은 순간의 체험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성화의 과정 속에서 그런 십자가와 부활의 감격이 유지되는 가운데 이 소명에 대한 의식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함이란, 신학을 한다는 것 Doing theology 혹은 Study theology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세상에 있는 학문을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오늘날은 전문직 목회자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이지만 전문직을 위한 교육과정이지만, 이제 초대교회로부터 시작을 해서 최소한 18세기 슐라이어마허 이전까지 가면 여기서는 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에 관한 앎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신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방종교도 또 다른 종류의 신학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신학적인 존재로 태어나고 그래서 17세기 학자들은 "True theology이냐, False theology이냐?", 말하자면 “참된 신학이냐, 잘못된 신학이냐?”라고 하는 것을 갈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신학 속에 철학이라든지 이교의 사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 그리고 자기 자신, 인간, 세계, 심지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신학함을 제가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 왔다'라고 하는 책 제목을 그런 관점에서 이해를 하면서 책을 읽으셔야 될 것입니다. 그 책을 제가 세권 분량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일단 1권이 650페이지가 나왔는데 내년도에 아마 2권이 650페이지 정도 나오고 그 다음 해에 650페이지가, 교정보는 데에 한 7개월이 걸렸습니다. 이제 서론 격에 해당되는 1권이 나왔습니다.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방식으로 신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신학함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내걸었던 그 표어가 pietas et scientia입니다. 그래서 경건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지식이 뒤따라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만들어 낸 전통이 아니라 기독교 속에 심지어는 중세시대까지 있었던 아주 유장한 전통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이런 것들이 많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목적 자체가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17세기의 노트리웨이트의 개혁파 정통주의자에 의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학문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데피니션(definition)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계승을 했는데 저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서 하나를 추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을 안 하면 하나님을 향해 살지 못하는가?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 존재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가치를 설정하면서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게 하는 원동력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히브리어로는 ‘다트 엘로힘’입니다. 특히 호세아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그들을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도대체 그 지식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지식을 버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버림받은 것처럼 분노하시면서 이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 자체를 폐기하시려는 것처럼 말씀하실까? 그래서 우리는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들이 지금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과학지식이나 학문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다트’라는 명사는 ‘야다’에서 옵니다. ‘야다’가 구약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인 게 ‘성교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영어의 노우(know)라는 단어에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는 마리아의 그 이야기는 히브리전통에서 보면 '내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으니'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히브리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감히 나는 저 남자를 잘 안다고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혼사 길 막힙니다. 이런 신중한 단어가 바로 다트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따라서 한 사람 속에 있어서 그 사람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삶의 모든 가치와 질서를 하나님에게 맞게끔 재편시키며 살게 하는 파워고 원동력이고 리얼리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국 무엇이냐?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이냐고 할 때 이렇게 둘로 이해가 됩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입니다. 아뜨리뷰뚬(attributum), 속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꾸비드와 꾸보드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꾸비드는 뀌비따스 "하나님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고, 꾸보드는 "하나님이 누구냐?"하는 질문입니다. 꾸비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설명은 성경에 많이 안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가까스로 유추해 볼 수 있는 두 구절이 있는데,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것도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많은 여섯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히브리어가. 그리고 요한복음 4장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하는 단 두 구절이 '하나님은 무엇이냐?'라는 것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것을 놓고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은 많은 논변을 펼칩니다. 그때에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쓸데없는 소리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뜨리뷰뚬(attributum) 이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가?"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속성이고, 이 속성은 하나님과 인간, 혹은 사물과 맺는 특히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과 마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이런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속성과 modus operandi, 속성의 시행방식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성품이 다양한 인간사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중세신학자들도 사랑과 지식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항상 일체를 이루는 것이지 이것을 찢어져서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두스 같은 사람은 “지식은 곧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신학을 위한 지성에 자격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삶 전체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들이 이러한 신학의 목적들을 달성해 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탐구해야 합니다. 그 맨 선두에 잇는 것이 지성입니다. 이 지성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심미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에게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서 관측할 수 있는 그런 심미적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종교를 심을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할 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고 거듭나면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을 주시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런 인식 없이 흘려보냈던 우리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발견하게 하는 한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예전에는 돈이 생기면 재수가 좋았다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무 궁핍해서 기도하는데 물질이 생기면 눈물을 흘립니다. 왜냐하면 돈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로 이어져서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실은 신학성경에서는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 다트 엘로힘이라고 하는 것이 크리스톨로지컬 컨벌젼(christological conversion)을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아주 중요한 중보자가 등장하는데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다트 엘로힘 이 개념이 그노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환원이 됩니다.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게 되고 그분이 그들을 섬기셨던 방식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들을 보면서 시행방식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희미했었는데 신약에서는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점에서 계시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주제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은 바로 이러한 경건과 학문의 조화입니다. 그 둘은 결혼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pietas et scientia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칼빈이 문장으로 사용합니다. 스트라스부르로 추방돼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제네바 교회 청빙을 받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이런 표어를 내세우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주여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그래서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지식과 경건이 완전한 일체를 이룬 그 모습이 신학을 하는 동기이고, 신학을 하는 과정이고, 신학을 하는 목표여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작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학은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음에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히스베르투스라고도 라고 하는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도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영국 청교도에게도 영향을 받으면서 당시 쇠퇴하고 있던 말하자면 개혁신학을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적 대안으로서 청교도에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실천적인 엄청난 학자입니다. 아마 17세기에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 가장 풍부하게 알 수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적인 깊이가 굉장히 뛰어난 분입니다. 다행이 이 분이 쓴 책이 제가 검색한 결과로는 두 권이 있는데 최근에 나온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된 '영적침체'라는 책입니다. 조그만 책으로 나왔는데 대학자가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실천적인 책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영국 청교도에 영향을 받아서 네덜란드에 Nadere Reformatie라고 하는 제2 종교개혁의 기치를 듭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주창한 것은 엄정주의입니다. 엄격주의입니다. 그러니까 특히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문자 그대로 따르자 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이 사람이 학생들에게 엄청나게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이 분이 쓴 신학선집에 나오는 내용의 하나입니다.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엄정함 곧 엄격함만을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행동의 정확함 혹은 완전함이다.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교훈에 일치하고 참으로 신실한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전까지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엄격주의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엄정성을 요구하는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엄격주의, 엄정주의를 신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강의의 목표가 아니고, 확실한 것 하나는 이러한 개혁신학의 전통은 결코 지식과 삶을 나누지 않고 이것을 모두 포괄하면서 신학을 가르치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8세기 있었던 영국의 홀리 클럽에 메서디스트 운동이라고 하는데, 메서디스트라고 하는 말 자체가 메서드(method)서 옵니다. 그러니까 방식입니다. 더 웨이 오브 리빙(The way of living), 삶의 방식이 저들은 우리와는 참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메서디스트라는 것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결국 올바른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올바른 삶을 반드시 동반하게 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 이 사람도 역시 메서디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설적인 설교의 영향력을 18세기에 끼쳐서 웨슬리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영국을 위기 속에서 구원해 냈다고 평가합니다. 아마 18세기의 이런 설교자들의 대각성 운동이 없었더라면 영국도 프랑스처럼 유혈혁명을 겪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보는 역사가들도 있습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같은 사람도 역시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대규모의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그러면서 영국을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건져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경건과 신학이 일체된 그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는 그 뜻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목회라고 하는 지식과 사랑이 결합되는 것인데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의 실천, 이것이 후대에 까지 계승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와야 하는데 지금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교회는 어떤 것들이 문제냐? 신학은 신학교에서 신학대로 배우고 설교는 신학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가 분리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침례교 목사가 설교하는 것인지, 순복음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것인지, 장로교목사가 설교하는 것인지, 감리교 목사가 설교하는 것인지, 인물소개 전혀 안하고 내용만 들어보면 아무도 그 칼라를 감지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착하게 살자, 잘 살자," 아침마당 같은 이야기,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 같은 그런 이야기들, 듣고 나면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사실은 진짜 삶 전체를 관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뚜렷한 어떤 사상 이런 것들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능을 망각한 것입니다.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전수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웅장한 사상의 얼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동안 공부를 해야 되고, 공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서 영적인 체험을 하고, 그것을 신학의 골격으로 올바로 세워서 거기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설교되고 알고 있는 지식이 사상화, 체계화 되어서 설교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신학함이란 지식과 경건이 결합되고 그런 지식과 경건이 목회 속에서 구현될 때 이것이 올바른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주의(Evangelism)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인 개혁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가장 최 광의(廣義)로 개혁주의를 이야기할 때는 로마 가톨릭에 반대해서 일어난 모든 운동은 이단까지 다 합해서 개혁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좀 더 좁히면 그런 이단들을 걸러내고 정통개신교를 아울러서 개혁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가장 좁게 들어가면 칼빈주의를 따르는 제네바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사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는 중세 그 다음에 초대교회와 다 연결이 되어 있고 르네상스와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뿌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대부분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러한 부흥주의라고 하는 멀게는 저 위로 올라가서 도나투스트, 몬타누스 운동부터 시작을 해서 수도원주의 그 다음에 경건주의 이런 것들을 추적해 갈 수 있지만 근대로 가면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미국의 일차 대각성 운동,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윗필드를 중심으로 한 대각성 운동, 그 다음에 2차 찰스피니의 대각성 운동 그리고 19세기말 20세기로 넘어와서 D. L.무디의 전도운동 그리고 오순절주의, 은사주의운동 이런 것들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뿌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아주 엄격하게 지식과 고도의 지성과 헌신된 사랑 이런 것들이 결합을 이루는 관점이었다면 여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사 체험 이런 감정 이런 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것을 리바이벌리즘이라고 하는데 사실 리바이벌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썩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찰스피니의 부흥론 같은 것들은 이런 부흥주의의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목회자직에 대한 반지성주의, 목회자직이 꼭 그런 제도를 거쳐서 목회자가 생산되어야 하는 이 시스템에 대해서 회의를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의 지성적인 전통을 무너뜨립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 근대선교운동에 이바지하고 사회개혁에 공헌해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18세기 말에 미국의 켄터키지방에서 일어났던 부흥회입니다. 봐도 그림이 좀 이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탑돌이 하듯이 돌면서 뭔가 불을 붙이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주장하고 이런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원더풀 프리덤, 놀라운 자유가 주어졌고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만났기 때문에 옛날에 생겨난 성직의 질서 같은 것들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런 위험한 사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안 머레이(Iain H. Murray)라는 인물은 '리바이벌 앤 리바이버리즘'(revival and revivalism)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이들은 설교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 두는 일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성령이 지금 내게 말씀하셨다고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면서 모임 전체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이 신약교회적인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 어느 누구도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교사와 복음 전도자로 임명받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 이제 서광이 비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 전통적인 직위와 직무들은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하기를 주장하고 - 그러니까 뭔가 신학을 가지고 성경을 깊이 있게 설교하는 것들이 배척되는 것입니다. - 기독교 목회 사역을 공격하는,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로 대표되었고 그들은 발언할 기회를 훨씬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잘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만 하면 그 내용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냐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하고 싶으면 말재주가 있어야 됩니다. 사람을 아주 현혹시키는 그런 게 있으면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의미에 있어서 성공은 아닙니다.
무디도 마찬가지로 2차대각성 운동이라기보다는 그 이후입니다. 이후의 운동을 주장하고 이성보다는 감정,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부흥주의, 은사주의 이런 것들이 복음주의 전통의 한 갈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주의가 어떻게 보면 혼란스러운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문제점은,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에 의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거리설교라고 해서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회심하고 이렇게 하는 설교의 방식들이 파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그래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니까 부흥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했지만 그래서 협력했지만 그러나 윗필드가 주장하는 주관적인 충동 이런 것들은 상상력의 결과라고 비판을 합니다. 이분은 칼빈주의적인 메서디스트로서 아주 견실한 설교를 했던 사람입니다.
조지 마스던(George M. Marsden)같은 사람이 복음주의를 연구한 역사학자이고 신학자인데 에드워즈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휘트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 에드워즈가 정직하게 꾸짖었을 때, 그 순회 설교자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전혀 확신하지 못한 채 오히려 냉정하게 그 주제를 무시했던 것 같다. ···.그 두 복음 전도자는 굳건한 협력자로 남았지만 가까이에서 함께 사역을 하기에는 그 방식이 너무 달랐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제일 많이 묻어나느냐 있느냐 하면 구속사역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이끄시려고 하는 구속사역 속에 잘 드러나 있고 이것이 가장 풍부하게 들어 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온 세계에 퍼져 있지만 그것이 모인 곳이 구속사역이고, 그 구속사역이 성경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성경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이 구속사역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발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니까 구속의 역사가 펼쳐질 것 아닙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유추하면서 아름다움을 인식하면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게 된 그 아름다우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그런 자기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진짜 너무너무 사랑하면 살이라도 깎고 뼈라도 깎아서 그 사람 마음에 들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게 정상적인 사랑입니다. 인간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성품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을 하는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반성 그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목회직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지성으로 설득하고 가슴으로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향한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언어, 인격, 삶으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분은 조지 마스던이라는 학자입니다. 노트르담대학에 계셨고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갔을 때 거기 마침 연구 교수로 오셨기에 제가 한번 뵙기를 청했더니 기꺼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강변에서 식사를 하면서 한 두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때 제가 '목회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다가 목회의 본질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지 않느냐고 여쭈었고, 거기에서 우리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관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은 여러분이 한번 공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통이 사실은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이어져 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하나의 팁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30년 전에 신학대학원을 들어갔습니다. 긴 세월이 흘렀는데,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정말 목회에 도움이 되느냐고 할 때 된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공부대로 다 빠짐없이 하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을 파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학교에 들어갔는데 첫 시간에 교수가 얕은 물에서 참방거리지 말고 깊이가 있는 위대한 인물 한 사람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파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그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선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존 파이퍼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의 책은 아무 책을 열어서 펴보아도 깊이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5권 실제로 27권쯤 되는데 그것 읽기가 미국사람들도 쉬운 책이 아닙니다. 저도 그 책을 읽는데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애독했고, 어떤 책은 네 번, 다섯 번 읽었습니다. 그 전집의 분량이 한 만 8천 페이지 정도 되는데, 아마 서너 권 설교집은 안 읽은 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프리덤 오브 윌(Freedom of Will)부터 시작을 해서 구속사까지 심지어 미셀러니까지 다 읽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파고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어라고 하는 커다란 장벽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도 한 300년 전의 영어니까 그렇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사전도 지금 있는 사전가지고 안 되고 옛날 사전을 보아야 하고 이런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읽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기독교 사상을 볼 수 있는 관점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너무 힘들어서 읽을 수가 없으면 로이드존스든지 찰스 스펄전이든지 존 칼빈이든지 누구든지 한 사람을 깊이 공부하면서 독파를 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후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 이분은 아마 19세기 20세기에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지성적인 설교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무엇이냐고 할 때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 혹은 감동시키는 추론(eloquent reason)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라는 그 자체가 신학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논리가 만약에 로고스라면 불붙었다라고 하는 것은 파도스입니다. 이것을 경건과 열정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신학입니다. 이런 신학의 장작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불 부치면서 타오르는 것이 설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오르려면 장작이 있어야 되니까 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되느냐고 자꾸 묻습니다. 신학대학원 때 여러 번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합니다. 실제로 저는 서너 번 쓰러졌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충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말도 안 되게 미달되는 양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너무 일찍 사역하지 말고 2학년말까지는 사역을 안 하고 공부만 하면 좋겠습니다. 3학년까지 하면 더 좋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의무가 마음을 하나로 묶고 이것이 소명이 유지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사랑함으로써, 이 둘을 하나로 은혜 안에서 묶게 돼서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설교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지식과 경건이 결합된 가운데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면 정동이 일어납니다. 정동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열정을 가리켜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감정이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잔잔하던 마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면 물결이 치듯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반복될 때 사랑의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지런히 지식을 섭취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늦은 감이 있지만,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가 최소한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토대가. 그래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쯤 문학작품 같은 것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어려서는 신화 같은 것들을 많이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우고, 물론 기본적으로 성경 교육이 기초가 되지만, 문학작품을 만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고민에 공감하고, 그러면서 그 고민이 사상과 철학 쪽으로 옮겨가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인간의 문제에 어떻게 사람들이 답을 주려고 노력을 했고 그리고 실패했는지를 보면서 신학을 공부하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래서 신학 안에서 그런 모든 대답이 되지 못하는 사상들을 비평하면서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쿠데쉬하고 일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미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7세기 말 18세기에 바움가르텐이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미학이 생겨나는데, 사실은 미학이 어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희미한 의식이 미학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학의 출발은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장엄하고 숭고한 체험으로부터 미학적 인식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하심과 완전하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존재론적인 특성이고 도덕적인 특성입니다. 이 위대하심을 보면서 인간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완전하심을 보면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 중 누가, 자신이 선포한 바를 온전히 살아내었고 지금도 충분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설교와 삶의 불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죽이며 그 거룩함을 추구해 가는 과정이 목회자의 삶에 반영이 될 때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 들어갔던 첫 시간을 잊지 못하는데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통적으로 학생들이 아직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전공분야별로 주임교수님이 오셔서 "구약이란 무엇인가?", "신약학이란 무엇인가?",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 해설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해설하시는 것을 보면 구약교수님은 구약을 안 하면 신약이 성립될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신약교수님은 구약은 신약을 공부해야 비로소 구약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조직신학교수님은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교리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숲속을 헤매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교학 교수님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설교로 조직화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은 시중을 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십니다. 선교학 교수님은 또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저걸 어떻게 다 할까? 그분들은 저것을 다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실제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 거기서 삶의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 그런 것들을 목회는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구약학회에서 무슨 무슨 개념에 대해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에 대한 것들을 필요로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절실하게 목회에 필요하지 않은 개념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목회적인 함의가 굉장히 큽니다. 칭의 논쟁이나 이런 것들. 그러나 그러한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 목회를 위한 지식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르쳐야 할 교인들은 선교적인 의미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러 교회에 모인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겸손을 먼저 배워야 하고 어떠한 확실한 지식도 객관적인 성경만큼 권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얻은 바 신학지식은 비판되고 비판되면서 그러면서 성경에 합치하는 여부가 검증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부족을 알기 때문에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천리마가 한 번 크게 뛴다고 하더라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노둔한 말일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역시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아주 기가 막힌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나는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참 비천한 인간이고 노마(駑馬)일 뿐이니 그래서 뛰어난 사람은 놀면서 공부해도 나는 시간이로라도 이것을 보충해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덜 먹고 덜 자고 덜 놀고 덜 쉬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몇 번은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어거스틴, 이 사람이 고백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너무 교만하게 듣지 마십시오. 전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그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제가 칼빈을 읽었지만 칼빈도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굉장하지만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한 번에 "이 사람이 천재구나!"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는 그 위대한 지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중의 한권의 책이 고백록(Confessions)입니다. 제가 이 책을 최소한 120번 읽었습니다. 아마 엄격하게 따지면 150번도 넘게 읽었을 것입니다. 한참 읽을 때는 거의 외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서 50이 넘어서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만 해도 어렵다고 사람들이 안 읽습니다. 350페이지정도 되는 책인데, 제가 한 3주 만에 썼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책을 여러분이 꼭 한번 읽어보십시오. 읽어보면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다 읽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면 아직 신학적인 역량이 안 된 것입니다. 좀 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다 이해가 되면 잘못 판단했거나 뛰어난 천재이거나. 정답은 알듯 모를 듯합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제일 어려운 책 중의 하나입니다. 46,7세 신앙과 신학이 한참 성숙할 때 그때에 우주 전체를 아우르면서 단기적인 사색들을 신학의 용변으로 철학의 용변으로 쏟아낸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거의 전율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외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을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누구고 어거스틴은 누구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재능을 주시고 저에게는 몸부림쳐야지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는 정도밖에 능력을 안 주셨습니까? 이 사람은 누구고 저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응답하시기를 “네 은혜가 족하다.” 그래서 이해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어거스틴이 한 250권 정도의 책을 쓰고 죽습니다. 그런데 모두 읽어야 됩니다. 우리말로는 못 읽으니까 라틴어를 하든지 아니면 영어를 하든지, 저는 영어로 읽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인물입니다. 제가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청교도는 사랑하지만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 번에 말이 통합니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을 딱 붙들고 한번 몇 년에 독파할 마음을 먹고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4세기, 5세기 때 아직 기독교가 성숙하지 않았던 시기에 기초를 놓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해석함 없이 무한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또 다른 인물을 공부하면서 개혁주의의 속한 인물들의 조명을 받으면 무한한 원천이 됩니다. 서양사상으로 나아가는 수문입니다. 어거스틴이 없이 신학을 하는 것은 플라톤 없이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비견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고백론은 내가 가늠하는 건데, 신학에 있어서의 그 중요성과 위치가 서양철학에 있어서 플라톤의 국가론(Poliiteiā)만큼이나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읽으십시오. 제가 120번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한번은 여러분이 읽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날 몸이 너무 아파서 네 번 설교를 해야 되는데 한번 설교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링거를 맞고 월요일 날 책가방을 싸서 공부하러 가려고 하는데 우리 집사람이 오늘은 아프니까 좀 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해야 된다고 하고 여태까지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무슨 공부를 더하느냐고 하는데 그때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매일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서 그날 쓸 땔감을 캐다가 그날 하루 가족들을 위해 불을 피워 살게 하는 광부와 같을 뿐이라오.” 사람들은 신학교만 졸업하면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평생 공부할 계획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약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신학이 탐구하고 그 거룩한 진리로서 이것들이 일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우리들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학처럼 아름다운 학문이 없습니다. 제가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보지만 자기 학문에 우리 신학을 하는 사람처럼 감격하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우리 신학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닐 때 여러분 같을 때는 책을 너무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샀습니다. 지금은 책은 있는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책을 사고 싶어서 울었는데 지금은 사놓은 책을 붙들고 눈물이 납니다. 서가에 들어가면 수많은 책들이 나 좀 읽어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제 서재의 책이 5만 5천권입니다. 많은 책들이 나 좀 읽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책 중에는 프레드릭 윌리암 코샤이드(Frederik Willem Grosheide)라고 자유대학의 신학교 교수인데 이 사람이 유명한 주경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름이 한국 주석가들에게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 서가에서 온 책들, 어느 날 서점에서 사왔는데 유니우스(Junius)의 신학전집인데 그런 책들도 들어와서 나에게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체가 휴식의 시간이고 즐거움인데 말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스승님 한 분이 휴식과 공부의 차이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공부는 읽어야 될 책을 일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혼에 대한 감각 그러니까 이런 감각 속에서 육체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이 있고 영원에 대한 감각이 빼어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다른 방식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인간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한 이기심에 빠지게 되고 육욕에 꾸삐띠다스에 의해서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審美者)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고백 속에서 매일 매일 학문이 주는 즐거움이 아니라 그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는 즐거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구도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마다 자신의 추루함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킴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신학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올바르게 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올바른 신학공부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생활 속에서 자신들이 발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는 것, 그래서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목회사역의 목표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란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추루하게 된 것과 창조주가 부여하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별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목회자로 부르실 때 예수님이 세 가지를 똑같은 것을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원어가 좀 다르다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당신 자신을 사랑하느냐 ?" 이것입니다.
저는 신학의 과정을 통해서 두 번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지성적 개안입니다. 30대 중반에는 신학의 모든 분과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통합을 이루어 하나님을 보여주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도대체 구약과 신약이, 그 다음에 조직신학과 성경 신학이 무슨 관계에 있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40대 중반에서 후반사이에는 이 세상의 모든 학문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을 이루며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두 번 다 깊은 영적인 체험 속에서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과 영적 생활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신학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고 삶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할 때마다 항상 역사를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회고하면서 기뻤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애굽의 재앙의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 만나를 먹이신 사건, 그 다음에 광야에서 만나는 수많은 대적들에게 승리하게 하신 사건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 사건들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경험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성숙을 거듭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등의 분야도 공부해야 합니다. 창조세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신적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시 연관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한 번에 내려다보고 그 모든 것들을 통합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건은 성경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로 경건이 이루어지고 이 경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만물 중 하나님 없이 창조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를 통해 세계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창조된 세계의 의미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지식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속(聖俗)의 여부는 지식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별들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별들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이것으로서 강의를 마쳤습니다. 질문 있으시면 두어 분만 받겠습니다.
(질문 1)
(답변 1) 소명은 재능과 기호를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소명이 진실한 것이라면 자기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하면 할수록 마음속에서 자기도 모르는 재능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르만 바빙크가 한 이야기입니다. “재능이 소명을 입증한다.” 감추어져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점점 하기 싫어진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소명없음을 입증하는 과정이니까 빨리 학교를 떠나서 슈퍼를 하든지, 공부를 해서 취업을 하든지, 세상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다는 사인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소명은 진실한데 열심히 기도 생활안하고 은혜생활 안 하니까, 그분은 신학만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성경도 읽기 싫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고 소명의 문제가 아니라 아까 이야기한 끊임없는 경건과 지식의 함양 속에서 소명이 유지되고 있지 못하는 성화생활의 문제점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결단하는 기도를 하고 정리를 해서 새로운 삶을 찾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나 자기를 위해서나 좋고, 두 번째의 경우라면 회개하고 열심히 기도해서 다시 은혜 충만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질문 2)
(답변 2) 저는 여태까지 제가 몇 권의 책을 썼는지를 모릅니다. 세어보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아마 세어볼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70권이라고도 어떤 사람은 백 권이 넘는다고 그러는데 모르겠습니다. 어림짐작으로는 한 70권정도 쓰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대체로 그 이야기가 맨 그 이야기고 우려먹는다는 이야기는 별로 안 들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자신의 공부에 채찍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250권의 책을 썼지만 그렇지만 250권에 대해서 쓴 책은 아마 25만권도 넘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나왔지만 가치의 면에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제 마음 속으로 양보다는 이런 종류의 책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제가 죽기 전에 쓰고 죽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는 책들을 분량을 따져보니까 한 3만 5천 페이지 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에 나오는 이런 경건 서적류의 책들 말고 그 중에 하나가 호세아서 주석 같은 책이 제가 꼭 쓰고 싶은 책입니다. 그 다음에 개혁교의학이라든지 이런 책들 쓸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저는 기본적으로 칼빈을 좋아했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나는 칼빈주의자로 불리어지는 것은 싫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천국 가서도 사실은 칼빈보다 제일 먼저 어거스틴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럴 정도로 사랑하지만 저는 어거스틴주의자로 불리는 것도 싫습니다. 제가 정말 사랑했고 너무너무 좋아했고 심취한 조나단 에드워즈, 저는 그분을 통해서 입은 많은 신학의 감화 이런 것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의미에서 나의 신학을 말하자면 1층에서 한 7,8층으로 올려주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진짜 정성껏 읽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2차 자료들을 거의 대부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정성을 드렸지만 저는 에드워즈주의자로 불리어지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존 오웬을 최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오웬의 전집을 거의 다 독파했지만 저는 존 오웬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냥 나일뿐이다. 그분들을 본받으면서 진정한 기독교신앙을 추구하려고 몸부림쳤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동시에 나는 내가 책을 쓰지만 내 독자들이 나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데 유익을 얻은 다음에 쓰레기통에 던져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 이름을 보존하고 내 저작을 길이 남겨서 사람들이 평생토록 간직하고 그런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저 목사님 팬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제일 싫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습니다.
(질문 3)
(답변 3) 찰스 스펄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설교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설교할 수밖에 없다. 그를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쏟아지는 폭포수를 컵으로 받으려는 것과 같이 꼭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투옥되어도 풀려나면 다시 설교할 것이다.” 문제는 사회 법안이 아닙니다. 지금은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지금 구원설교가 전 교회에서 피를 토하듯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못하게 해서 못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번 설교에 자기의 목숨을 바꾼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더 큰 문제는 지금 그런 법안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런 구원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피어린 비명 소리 같은 설교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설교자 자신의 문제입니다. 만약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은혜 없이는 인간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것이 불붙을 때에, 예레미아 같은 심령이 될 때 법안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법이 아무리 설교자들을 보호해 주어도 그것이 외쳐야 할 설교를 솟아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그런 차별 금지 법안들이 생겨가지고 교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그 전에 그런 설교들이 용솟음쳤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그런 것들은 적절하게 기독교 법률가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대언하고 필요하면 시민운동도 하고 해서 프로테스트하고, 문제는 설교자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살피고 교회의 상태를 살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깊이 주님을 만나라.” 이것이 제가 신학생들에게 하는 첫 번째 조언입니다. 두 번째, “죽도록 공부하라.” 세 번째, “치열하게 기도하라.” 네 번째, “삶과 진리를 일치시켜라.” 다섯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라.” 그런 것입니다.
(질문 4)
(답변 4) 최근에 소위 ‘네오퓨리타니즘’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런 것입니다. 청교도도 사실은 아주 칼라풀 합니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카트라이트같이 율법주의적인 청교도부터 시작을 해서 복음적인 청교도, 신비주의적인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그 중에서 역사적인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절대화시키면서 같은 개혁파 혹은 청교도 신앙을 배우는 사람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 정죄하고 이단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아까 질문하신 분이 읽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칼빈을 찾아가서 “당신 누구요?”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나는 가톨릭교도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가톨릭스(Catholics). 가톨릭 교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네바교회 하나가 아니라 당시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편교회가 훨씬 중심적인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난 방식으로 청교도를 접근하는 사람들이 싫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그런 뜻이고, 조언을 하자면 그냥 조언 조언 자꾸 그러지 말고 “닥읽!”, “닥치고 먼저 읽어라!”
(질문 5)
(답변 5) 저는 대답을 거의 매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부실합니다. 그러니까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꼭 해야 될 것 이외 다른 것들은 위임하고 그 다음에 꼭 해야 될 것들은 내가 적극적으로 하고. 그래도 저희 교인이 5천명 가까이 되는데 얼마나 행정적인 일이 많겠습니까?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픕니다. 그렇지만 내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은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합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 한 사람이 교역자 회의시간에 자기가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 갈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 밤에 부부가 심야극장에서 만났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하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애인을 못 만나는 사람 봤습니까? 헤어질 때나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불붙었을 때는 어떻게 하든지 만납니다. 제가 아는 자매는 연애를 하는데 아버지가 하도 꼴 보기 싫게 말도 안 되는 남자를 만나니까 머리를 깎아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수건을 두르고 담장을 넘어가서 만났습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다양한 핑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이번에는 “닥공!”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