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김세나
사실 한국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려진 것은 그렇게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려진 것은 신학 분야가 아니라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먼저 알려졌습니다. 예를 들면 철학이나 혹은 다른 교육학이나 혹은 문학이나, 이러한 분야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신학 쪽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돌아서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영향이 큽니다. 그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아주 탁월하게 언급하였습니다. 마치 조나단 에드워즈를 자주 언급하였고, 뭐라고까지 이야기 했는가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칭송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렵고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를 다니엘 로울랜드, 조지 휫필드 보다 더 앞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정말 어리석을지 모르겠지만, 청교도들이 알프스 산맥이고 루터와 칼빈이 히말라야 산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없을 이러한 칭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를 자기의 책속에서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과연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작을 꼼꼼히 읽으셨는지에 대해서 나는 뭐라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부흥과 관련된 이야기, 탁월한 지성, 이러한 것들과 관련지어서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 이러한 것들과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를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제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부족하지만, 저의 저술들이 그러한 생각들을 확장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50여권의 책을 썼고, 200만권 정도가 배포가 되었는데 그 책에 아마 단 한권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도 인용하지 않은 책이 거의 없을 정도로 모든 책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인용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에드워즈를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탐구해야 할 욕심을 갖게 만들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저작들이 체계적으로 번역되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는 Narrative surprising of Conversion, The thought of Rivival, 그리고 『천지창조의 목적』 등등 몇 권이 간헐적으로 소개되다가 최근에 이제 부흥과 개혁사에서 예일 대학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한권씩 차례대로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한 권씩 한 권씩 번역되어 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가 소개되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이 소개되지 않았고, 교수님들과 학자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많이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대부분 신학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많은 책들을 써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활동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활발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매우 사랑하고 매우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제가 그의 신학을 공정하게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해 언제나 스스로 의심하곤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랑은 모든 해석을 결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덧니가 나도 귀엽고, 보조개가 생겨도 예쁘고 머리가 벗겨져도 귀엽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그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편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잘 소개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혹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결점들을 잘 못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그러한 두려운 생각도 함께 가지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공부하려 합니다.
저는 항상 나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학자는 아니다 그렇게 하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나 자신을 자리매김하기를 시골교회 목사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다음부터는 훨씬 부담이 적어졌고 그래서 더군다나 동네 이름도 평촌이기 때문에, 'plain village'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city와 village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나에게는 city가 허락이 안 되고 village가 허락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high village나 beautyful village가 아니라 plain village가 허락이 되었고 그 이름을 우리들은 평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학적인 수준과 전문성에 있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한 모든 학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초라한 시골교회 목사에 불과하지만 사랑과 애착에 있어서든 그들만 못하다는 평가에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처음 만난 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후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났고, 막연히 옛날에 읽은 'History of Preaching' '설교의 역사'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에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설교정도는 읽고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구했고, 그 때는 정말 가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일판을 살 것은 엄두도 못 내었고, 지금 27권쯤 나왔는데 사려면 300만 원정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밴오브트루스에서 나온 아주 깨알 같아서 돋보기를 안 지고는 못 볼 정도의 그 책을 구하였고, 그것으로 그 중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엄두가 안 납니다. 깨알 같은 글씨이니까? 그래서 그 중에서 Revival 부분을 찾아서 몰입되듯이 빠져갔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는 그 후에 존 오웬에 깊이 빠지면서 존 오웬을 깊이 읽고 공부하는데 헌신하였고 그러다가 30대 후반에는 열린교회를 개척하고서 사실은 한동안 조나단 에드워즈를 관심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읽었지만 헌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10년 전쯤 본격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 다시 읽기 시작했고, 지금은 27권 중에서 서너 권 정도 제와하고는 거의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다른 학자들에 비해서 가지고 있는 유리점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18세기 영어는 스위니 교수님 같은 분에게는 별 것 아니겠지만, 우리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장은 매우 길고, 그리고 의미도 모르는 that 은 왜 이리 많이 나오는지, 어디에서 문장을 끊어야 할지, 이어야 할지 보통 힘들게 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유리점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100년전 사람인 존 오웬의 작품을 저작 전집이 16권 정도인데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17세기 영어에 닳고 닳았기 때문에 18세기 에드워즈 영어를 읽었을 때 너무 친절히 느껴지고 존 오웬 보다는 훨씬 더 쉽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영어보다 옛날 영어를 훨씬 더 잘 읽습니다. 그래서 작문을 몇 줄 했더니 어느 외국 교수님이 보더니 “김 목사님 문장은 왜 이렇게 장중하십니까?”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그리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러지 말지어다 이러한 식으로 작문을 하였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제 탐독하게 되었고 읽으면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뿐만 아니라 모든 공부를 할 때, 원작을 많이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었다고 하면서 남이 써 놓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책을 읽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2차 자료이고, 2차 자료도 그 사람이 에드워즈를 직접 읽었을 때 2차 자료이지 다른 자료를 읽었을 때는 사실은 3차, 4차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조나단 에드워즈의 원 저작을 읽는 것과 조나단 에드워즈를 해설한 좋은 책들을 읽는 것들을 균형 잡아 읽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으면서 저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또 다른 면, 나의 생각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인상이 마치 리처드 백스터에 대한 인상과 같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회심, 참된 목자상 등등의 책으로 아주 유명하고 열렬하게 목숨 바쳐 설교했던 헌신적인 청교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리처드 백스터는 그렇게 간단한 사람이 아니고 그 뒤에는 엄청난 사상이 자리 잡혀 있고, 심도 깊은 논의들이 이야기되고 있는 사상가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토마스 깜파넬라라고 하는 철학자에게서 받은 이 사람의 영향이 어느 정도냐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이상학자요, 철학자요, 그리고 아주 탁월한 사상가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갖고 있는 사상은 개혁 칼빈주의라기보다는 알미니안 퓨리탄입니다. 그의 많은 저작들 중 일부가 소개 되어서 그를 대할 때 우리는 그를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했듯이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도 작품이 그렇게 부분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여러분 머릿속에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피를 토하면서 설교하는 사람, 부흥을 일으키는 사람, 그 다음에 이단과 싸우는 사람 정도로만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는 훨씬 더 커다란 그림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이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여기에 내려오기 전에도 스위니 교수님과 함께 토론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이 27권인데 한 권당 보통 700페이지 정도 되는데, 18000 페이지 되는 방대한 저작인데, 거기에서 칼빈을 분명하게 인용한 것은 3번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는 오웬의 책을 그렇게 여러 번 읽었지만 존 오웬이 거기에서 칼빈을 인용하는 것을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함에 있어서 칼빈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생각 없이 따라갔던 칼빈의 추종자라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칼빈에 대해서 그것도 칼빈의 작품에 대해서 많이 읽었기 때문에 안다기보다 늘 듣는 이야기가 칼빈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옛날에 신학교 다닐 때 우리 교수님이 그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신학교에서는 'Bible said' 하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해도 문제가 안 되었는데, 'Calvin said' 이론을 달면 그 사람은 찍힌다. 그러니까 이 학교에서는 칼빈이 성경보다 훨씬 더 위에 있다. 그러한 우스갯소리를 하였는데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신학자는 칼빈의 관심사를 능가하는 방대한 학문을 가지고 자기의 신학의 세계를 구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을 1권서부터 차례대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국 거의 모든 작품을 읽으면서 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얼마나 부분적이었는가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는 정말 탁월한 사변의 능력을 가진 철학자였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철학자, 부흥운동가, 또한 교육가, 문학가, 역사가, 역사해석가, 다양한 면모들을 미학이나 특히 그의 작품들 중 하나인 뉴톤주의에 대한 해석이 있었는데, 그는 과학자였습니다. 당시에 새롭게 일어나던 뉴토니즘을 가장 잘 이해하는 뉴잉글랜드에서 몇 사람 되지 않는 지성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정도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에드워즈에 대한 에드워즈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각 분야의 사람들이 각각 주장한 것입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심사는 철학이었다. 어떤 이는 교육이었다. 어떤 이는 역사였다. 다양하게 해석해 왔는데 최근에 와서 ‘New direction movement'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다양한 측면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매일 매일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야 했던 한 지역교회의 목사였다는 사실, 그리고 목사로서 강단에 올라가 그가 한 일은 성경을 충실히 주석하여 자기의 회중들에게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르친 대로 살아가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이 너무 잊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소위 이야기 하는 ’New direction movement'입니다. 지금 그 운동의 기수로 활동하고 있는 학자들이 우리 스위니 교수님, 그리고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의 닥터 민케마 등등의 중견 학자들이 지금 이 모든 것을 리드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위니 교수님의 책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쓴 아티클을 모두 다 읽지는 못하였지만, 다른 공부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싸인 받으러 오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말씀사역』은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달라고 할 때 막 리딩을 끝냈을 때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추천서를 쓰게 되었는데 깊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 사역이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중심이었다는 것이 오랫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사에 의해서 상당히 소외된 면이 있었고 그것이 다시 말하자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점이라 말씀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학문이나 이 세계와는 담장을 쌓고 그저 성경 하나 펴 놓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교리를 설교하던 그러한 막힌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18세기 대륙에서 일어나서 미국, 뉴잉글랜드에 영향을 끼쳤던,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계몽주의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영국에서는 이미 18세기에 유명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인류 사회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주 놀라운 방향으로 인류의 삶을 방향 지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이 정확하게 50년에서 100년에 걸쳐서 미국을 강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계몽주의가 확 일어났습니다. 계몽주의라는 말이 영어로 무엇입니까? Enlightment입니다. 원래 무슨 뜻이었는가 하면 빛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빛, 지식의 빛이 없어서 무지 목매한 상태로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 빛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우리들이 배우는 진리와 계시, 초월적인 신적인 빛이 아닙니다. 인간 이성의 빛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고, 계몽주의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몽주의의 정신, 모더니즘의 정신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back 한다면 거기에서 그것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 이전에 Reformation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도대체 르네상스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관계, 그리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예술운동이 주는 의미, 메디치가의 역사, 코쉬모 메디치, 로렌조 메디치, 그 다음에 미켈란젤로, 그 다음에 지오토, 바싸리, 그 다음에 도나첼리 등등의 초기 작가들 이 사람들이 피렌체에서 한 일이 어떻게 남이탤리를 넘어서 북이태리에서 지적 운동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 인본주의 운동이 어떻게 세속적 인문주의와 기독교적 인문주의로 나뉘게 되었고, 이것이 각각 어떻게 중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는지. 더 뒤로 back하면 르네상스가 중세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야곱 푸카르트라는 역사가 학계에서 대단히 거목인 인물입니다. 그 사람까지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줄을 그어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곱 푸카르트에 의하면 르네상스는 근대의 봄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중세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르네상스와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한 단절관계에 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해석에 대해서 호이즌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것이 아니라 르네상스는 the harvest of Middle-age, 중세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상들이 아름다운 추수를 거두는 것이 르네상스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수확기, 곧 가을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헤이코 오브만이라든지, 오스카 크리스텔라 등의 선행하던 연구들이 있었고 이러한 식의 거꾸로 백 하면 모든 역사가 단절될 수 없고 새로운 사상들을 만들어 내고 우리 기독교는 항상 새로운 사상에 직면하는 선교적인 사명에 상황을 대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맞이한 선교적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겠는가. 지적으로는 사상가적으로는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유럽을 가득 채우고 이미 미국을 향해 덮쳐오고 있던 때였습니다. 나의 역사 해석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스위니 교수님이 미국 분이시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18세기 미국 사람들은 유럽의 문물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럽에서 책을 출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서 충분히 실험을 해 보자, 그리고 하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도 유럽의 학자로서 자기의 이름을 낸다는 것은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로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장해서 이야기 한다면 우리들이 중국에 대해서 모화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었듯이, 미국 사람들도 당시 유럽에 대해 우월한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이제는 종교적으로 어떠한 상황이었는가 하면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을 건너갈 때 확고한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상당히 쇠퇴하기 시작하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이미 벌써 선조들의 신앙의 생생함을 잃어버리고 사역의 중기쯤 왔을 때에는 교수님의 강의에서처럼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지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제 삶에서 열매가 없는 미지근한 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을 유포시킨 주원인 중 하나가 계몽주의가 갖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계몽주의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지만 계몽주의가 갖고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하는 시스템은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입니다. 이것은 자연과학 속에 있는 수학적 원리들이라는 이름이 붙힌 책입니다. 지금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책은 뭐냐 하면 여태까지는 자연과학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신비하게 보던 사람들이 이제 자연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수학적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고,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뉴턴의 착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미분과 적분 같은 것들을 풀 수 있는 모든 수학이 나오게 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치와 뉴턴이 둘 다 미적분을 발견한 사람인데, 사실은 그렇게 동시에 라기보다는 각자 발견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엄청난 과학의 변혁이 일어나던 때에 서서히 신앙을 파고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비가 내린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게 아니라 수증기가 올라가서 자연법칙에 의해서 쏟아지는 것이다. 열매가 많이 맺혔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다, 그게 아니라 일기가 영향을 주고, 땅의 토양이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모든 설명이 자연법칙으로 되어 가니까 기독교는 상당히 당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지성인들 속에서 이러한 현실적인 시대정신을 어떻게 기독교적인 설명과 융합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데이즘이라고 합니다. 자연 신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고 그것은 모두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인데 원리적으로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있지만, 하나님이 신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건 속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법칙을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뿐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까 원래 가지고 있었던, 제일 데이즘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나 오래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말고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도 퍼질러 자고, 운동 안하고 하면 일찍 죽는 것이고,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적, 기적적인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습니다. 이성주의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쓰나미처럼 밀려왔던 이 사상과 맞서서 절대로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은 너희들이 아무리 자연 속에서 많은 법칙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여전히 이 세상의 역사와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모든 계몽주의 사조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계몽주의 사조와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알미니우스 주의, 카톨리시즘, 유니테리안 이러한 것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엄청난 많은 대적들에 둘러싸여 그것을 수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학자는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작년 9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초청되어서 개강예배를 설교했는데,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모든 학생들이 뒤집어졌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주의의 최대의 원수는 복음주의다. 그래서 개혁주의를 잘 가르쳐 주면 큰 칼을 갈아서 그것을 들고 세속주의와 싸우고 이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고 교회로 들어와 복음주의 목에 끼워 넣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하는 것이 있을 테니까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복음주의는 그래도 가깝습니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세속주의, 무신론, 하나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이단들에게 칼을 들고 나가 용맹스럽게 싸워야 하는데 안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만만한 게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는 잘 압니다. 그러니까 칼을 들고 복음주의에 가는 것입니다. 생산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하면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초대교회 때는 기본적으로 모든 신학자의 임무가 이렇게 이 세상에서 밀려오는 엄청난 사상, 언제나 이 시대 속에서 사상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했지, 기독교 앞에서 세속주의가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한수만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교부들의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의 지성을 가지고 이 사명을 감당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사실 종교개혁 이후에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에 들어와 약화되기 시작하다가 1725년경에 와서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이성주의에 흐르게 되면서. 모든 신학의 맥들이 완전히 끊어지게 됩니다. 그 이후에 슐라이어 마허가 나타나면서 신학을 성직자가 되는 사람만 공부해야 할 학문으로 규정하고, 그 신학을 여러 분과로 쪼개어 서로 교통할 수 없는 담을 쌓는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전까지 신학은 신학을 하는 임무가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신학을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때만 하더라도 사실 설교를 듣는 모든 회중들이 그때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신학자였습니다. 조지 마스틴 교수의 책에 의하면 미국에서 목사가 누구인가 라고 할 때, 그는 진리를 전하는 사상가입니다 라는 것이 19세기 중반까지는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으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는 18세기 중반이니까 100년을 뒤로 back 했을 때, 목사에 대한 사상이 훨씬 더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위니 교수님이 어제 강의한 내용 속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당시 교통도 불편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구민들은 목사가 지식의 최정상에 있다고 믿었고, 지식의 안테나를 뻗어서 자기네 나라뿐 아니라 밖에 있는 모든 지식까지도 자신에게 전달해 줄 사람으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목사가 된다는 것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소명을 받았다는 것 만 가지로는 안 되고, 그러한 것을 받은 사람은 그냥 전도자 하면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수능성적이 200점도 안 나오는데 의료선교 소명 받았다고 하면서 의대가면 여러분의 소명을 믿고 받아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그러한 논리가 있었습니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자가 아니면 목회자가 될 엄두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처지 속에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해석을 할 때에는 철저하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의 맥락이 어떠한 맥락인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내용들을 해석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지금은 많이 잊어버려서 어디서부터 읽었는지 차례대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많이 섞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가지 제가 여러분에게 말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 만이 아니라 누구를 공부하든지 무엇을 공부하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이해가 얼마만큼 있고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공부하는 저자와 저작에 대한 풍성함을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었고, 저를 오늘날의 목회자가 되게끔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사실 나는 절대로 교만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누구의 책을 읽더라도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칼빈과 존 오웬을 제가 무한히 존경하지만 탁월하신 분이라 생각하였지만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천재라고 나의 무릎을 꿇게 한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저는 그를 다시 10년 동안 아우스티누스의 첨착 해왔습니다. 그의 저작을 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에 대한 눈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는 물론 터툴리안, 이레니우스의 글을 통해서도 도움을 얻었지만,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으면서 커다란 감동을 얻었고, 심지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어느 저작은 거의 한 페이지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문장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커다란 감동을 얻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신학의 관심사를 신학과 교회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이것을 확장하여 모든 지식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이 모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식들이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속성을 아름답게 연결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와 성경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땅과 만물 위에 홀로 높고 위대하신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우주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했던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아직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만큼 이렇게 광대한 신학,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의 책을 읽을 때 아주 티끌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한 책을 쉽게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이해는 여러분이 다른 학문과 다른 학자들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갖느냐에 의해서 놀랍게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신학의 역사를 보니까 신학자였던 많은 학자들이 어학자였고, 동시에 천문학,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학은 제가 회심하기 전 매력을 느껴서 한때 공부하던 학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매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문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 나이에 입학을 할 수는 없고 천문학 전공을 한 학생을 불러다가 매월 월사금을 내고 과외 공부를 1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천문학에 대한 기본적 내용을 배웠을 때 저는 신학자체 안에서 해결되지 않던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천문학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습니다. 마치 신학 안에서 내가 알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부분적인 것이었다면, 천문학은 이 부분적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온 우주 속에 투사시켜서 그것들을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일단 조나단 에드워즈를 깊이 파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신학생이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한지 얼마 안 되는 날에 어느 교수님이 첫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천방지축으로 얕은 물에서 첨벙대지 말고, 높고 깊은 신학자 한 사람을 만나서 죽을 때까지 그를 탐구 하거라. 그러면 반드시 훌륭한 목회자와 신학자가 될 것이다.” 그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가슴을 뛰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일평생 읽기로 결심한 착한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존 파이퍼 목사님이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강조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개혁신학과 안 맞는 것도 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철학적이어서 신학적으로 방해가 된다고 하는데, 그가 자연과의 관계에서 판앤데이스트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항상 말합니다. “닥읽.” “조나단 에드워즈 닥치고 읽어라. Shut the mouth. Go to read. 읽지도 않고 염려부터 하는가?”
두 번째, 위대한 신학자는 아무도 홀로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뒤에는 그를 형성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자란 신학자는 어떤 신학자 한 사람을 붙들고 그냥 공부하므로 몽키처럼 흉내 내서 이름을 내지만 위대한 신학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성경을 직접 대면하다가 주님을 깊이 만나면서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여러분도 모두 위대한 신학자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 지성의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때 성경을 펼쳤을 때 그 속에서 들어오는 Super natural light,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빛을 확 받으면서 이 사람의 생각과 사상이 거대한 구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체험이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의 체험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다 외우고 있지 못하지만, 비텐베르크의 탑 속에서 성경을 읽으며 그가 고백합니다. 어느 순간에 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오면서 천국의 낙원의 아름다운 달콤함이 확 들어오면서 이 사람이 복음에 대한 눈이 확 열리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마틴 루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보름스에서 남긴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제 너의 주장을 철회하라. 히어스 테 이히, 이히 캄 니히트 안더스. 주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는 내가 어찌할 수가 없나이다. 왜 입니까? 진리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그의 저작 전집 속에서 기도에 대한 교훈에서 하나 중요한 이야기를 남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도 많은 사상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 존 로크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 되지만 경험주의 등등. 그러나 어느 것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형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Excellency of Christ. 그리고 Divine and the Super-natural light, 그것을 발견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온 땅과 만물 위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티끌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받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닥읽”, 이야기 하지 말고 읽으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글로 된 책이 나오지 않습니까? 읽으십시오. 물론 감동은 원서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간유리를 통해서는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르니까 그것이라도 봐야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항상 한 사람에 대한 해석은 다른 해석에 의하여 좌우된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다른 학문과의 연관관계속에서 지식을 넓혀 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을 때 놀라운 이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자연과학에 대해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Philosophy of Science’, 지금으로 말하자면 과학철학인데, 그냥 과학입니다. 과학에 관한 한권을 모두 읽으면서 지금 사실 거기에 나오는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동의하는 이야기도 하지만, 설명이 이상하기도 하고 왜냐하면 그 때에는 뉴터니즘 밖에 몰랐으니까, 이상하기도 하고 과학적으로 명백히 오류라고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이게 바로 신학이구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서 성경을 이렇게 펴고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느껴지지만, 덮고 밖에 나가면 어디에도 안 계신 그러한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시편의 기자가 말한, ‘주의 진리가 궁창에까지 미치나이다’라고 노래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을 모든 학문의 세계 속에서 찾으려 했고 그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유명한 말,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것이 비록 이교에서 발견되었든, 일반학문에서 발견되었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들은 진리를 몇 개만 발견해서 자기 마음대로 엮어서 이상한 결론을 내게 하지만 그 잘못된 해석을 끌러주어서 모든 진리들이 모든 학문 속에서 나타나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어 온 땅과 만물위에 드높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 소재가 되게끔 이 모든 지식들을 잘못된 지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 사명이라면, 그러면 당연히 모든 방면에 대해서 무식할 권리가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식의 추구는 단순한 호기심의 추구가 아니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해석한 것처럼 목적이 없는 세상 사랑에서 출발한 호기심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지식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지식의 추구였고, 그 분께 순종하며 살기 위한 지식의 추구였습니다. 그런데 지적인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말하자면 할아버지가 손연재처럼 리듬체조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분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그대로 활용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보면서 이것이 정말 신학이구나. 그래서 나는 마스틴 교수와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같이 여러 이야기 하면서 “목회가 무엇인가?” 질문이 나왔습니다. 나는 생각하기에 목회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어서 성도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경을 통해 보여주어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궁극적인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과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다음서부터 부지런히 자연과학에 대해 틈나는 대로 공부하게 되었고, 최근 6개월 1년간 양자역학에 깊이 심취했습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는 나에게 놀라운 신학적인 이해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들이 반영된 책이 주기도문인데 6월 중 안에 한 470-80페이지 정도 나오는데 그 속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신학과 연결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놀라운 도전을 주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프리즘입니다. 프리즘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유리가 있는데 햇빛은 아무 색깔이 없지만, 그런데 그것에 비추면 빨주노초파남보 확 퍼지면서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에 충만한 아름다움과 능력을 이 창조의 세계를 통해서 보이시는데, 이 창조세계가 두 개입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고 지상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두 세계를 통해 아주 아름다운 빛을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신학을 통합하는 최고의 관심사는 ‘Knowledge of God’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이었습니다. 모든 거룩한 삶은 앎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유명한 말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표출되게” 이것이 이러한 고민이 아까 이야기 했던 칭의에 대한 발전된 해석을, 정통교회와 다른 해석이라기보다는 진전된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던 동기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진리의 요소들이 모든 자연의 세계,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학문의 세계 안에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것도 성경만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Bible is the essence of God's beuaty”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그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화두인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지식인가 하면 속성과 신학적으로 속성.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 이 두 가지에 대한 앎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속성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수단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way of Salvation입니다. 하나님이 죄로 타락한 인간세계를 구원하시는 과정이 하나님의 ‘Beauty of the all of 에티르뷰트’를 가장 잘 나타낸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구속사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 관심하였던 이유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진수이고, 그 구속사역의 위대함은 하늘의 천문학, 땅의 지질학, 인문이나 예술이 아니라 성경의 구원사 속에 모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중심이 되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여기에 있고, 이것이 퍼지면서 농도가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어두워서 연결 관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죄인들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모든 학문들이 이 초자연적 진리와 어떻게 연관 되는가 개인적인 부흥을 통해 찬란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딤전 1:17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발견하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체험,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것을 한번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유사한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 거룩하심과 달콤함, 탁월함과 초자연적인 것들을 발견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났던 영적인 경험, 탁월한 학문, 치열한 삶, 그리고 이 세상과 분투하여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1번을 아십니까? 나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나의 모든 이웃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한도 안에서는 중세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하나님의 본질,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탐구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최대의 관심은 설명할 수 없는 그 탁월하신 하나님이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으시는가.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어떻게 탁월하게 드러나는가. 그리고 그것이 구원사 속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나타나는가.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어디를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을 펼치고 어느 설교를 읽어도 거의 빠지지 않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Excellency of Christ-그리스도의 탁월성”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혁신학을 하였으니 모두 알 것입니다. 구원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 주는 최고의 매개가 되었다면 구원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탁월하게 자리 매김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독특한 사상이라기보다 이미 바울사상의 핵심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세 가지 점에서 바울과 일치하는 것이 었었기 때문에 만나보지도 못한 바울의 신학을 역사적으로 가장 훌륭히 계승하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탁월한 만남,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탁월한 지성, 세 번째는 치열한 삶, 이 세 가지가 사실 바울이 골로새서, 에베소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로마서 못지않게 탁월한 성경이라 봅니다. 골로새서와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기독론 중심의 세계관, 그리고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그리스도 예수,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 하시니라. ‘아나카펠레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통일이라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나-다시’라는 이야기 이고, ‘카펠레오-머리가 되다’입니다. 라틴어로 이야기 하면 ‘렉카피툴라치오’입니다. 결국 무엇인가 하면 세계를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그 머리된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이탈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심으로 이제 하나님이 예수를 재창조의 머리가 되게 하셨는데, 그 첫 열매로 붙은 것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확장되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면서 모든 우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신학의 그리스도 중심의 웅장한 우주관, 웅장한 세계관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약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러한 구속사 중심,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중심을 이탈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철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학을 진술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항상 좋은 날만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놀드 델리모아라고 하는 전기 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조지 휫필드에 대해 전기를 쓴 사람인데 존 오웬에 대해서도 전기를 남긴 작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한 전기 작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존 오웬의 생애를 탐구하다가 어떤 결점을 발견하였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항상 맑고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스위니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한 때는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조금 야속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오해가 될만 한 용어를 사용을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다른 표현을 사용하지. 아까 이야기 했던 ‘최종적 칭의’ 같은 단어.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용하는 신플라톤적인 용어인 ‘발산과 회귀’라는 용어들, 이러한 용어들을 왜 사용해서 왜 꼬투리를 잡힐까? 절대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플라톤 주의적인 유출론주의자가 아니라고 굳게 확신을 하고,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 교수님께서 아까 설명하였던 것처럼 무엇을 결정할 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하나의 텍스트만 보지 말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모든 텍스트, 단지 그의 논문만이 아니라 설교, 성경주석, 여백성경, 미셀러니, 그리고 모든 것들을 다 보고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구절하나만 가지고 탁 하면서, 제가 아는 어느 신학자도 단번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김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 좋아한다면? 그 사람 행위 구원론자야.’ 아닙니다. 제가 확신하건데 그 분은 두 권도 안 읽으셨습니다. 두 권도. 두 권만 읽으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 좋아하신다면서요? 굉장히 위험해요. 그 사람은 판앤이스트입니다. 범신론자에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원작을 이기면서 오해하는 많은 것들이 그의 책에 보면 personal letter, 개인적 편지에 대해서. 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가졌던 의문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갖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드워즈가 이야기 합니다. ‘아니다, 내 뜻은 그런 뜻이 아니다.’ 그 뜻이 아닌데, 왜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지. 그러니까 스위니 교수나 나 같은 사람들이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갈등도 느끼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몇 가지 이론들, 예를 들자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은 매 순간 무한하신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소위 이야기 하는 ‘Every moment creation theory’ 라든지 나는 에드워즈를 범신주의자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유의지에 문제 있어서 결정론이냐 우연론자냐 하는 많은 문제들.. 사실 제 1권은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그게 바로 Freedom of Will 인데, 마크 트웨인이 그 책을 읽으면서 집어 던지면서 미친 사람이 쓴 책이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까, 두 번을 읽었는데도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혁신학 맞습니까? 한 쪽에서는 그렇다고 하고, 한 쪽에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면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혁신학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이냐고 계속 묻는데, 하나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칼빈주의자라고 할 때 그 칼빈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따라서 에드워즈가 그러한 사람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칼빈주의를 칼빈의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라면.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논문과 책도 나왔습니다. 책도 나왔습니다. ‘존 오웬이 칼빈주의자였는가?’ 논문도 나왔는데, 그 논문에서 이야기 합니다. 존 오웬은 칼빈 주의자라고는 보기 어렵다. 칼빈의 가르침을 안 따랐기 때문에가 아니라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존 오웬 같은 위대한 신학자에게는 칼빈이 그렇게 유일하게 따라가야 할 어마어마한 멘토가 아니었다. 그냥 있었던 수많은 탁월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칼빈 신학을 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에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동의가 안 되면 리처드 멀러 교수님한테 가서 물어보고. 칼 트루만이 최근에 내 놓은 책 중에 『존 오웬 리상스맨』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중요한 논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은 카톨릭 유니버셜리티, 보편교회의 신학을 가지고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상이 칼빈과 같았던 것이지 칼빈을 추종했던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칼빈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내려오기 전에 방금 스위니 교수님께 확인을 해 보니까 그의 소장 도서 목록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칼빈의 주석도 없었습니다.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안 읽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일의 멘토처럼 생각하면서 무릎을 꿇고 칼빈이라면 엎드렸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는 공정하게 칼빈도 읽고 에드워즈도 읽은 사람으로서 나의 깊이에 한정된 한에서 판단하자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칼빈보다도 더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의 질이 칼빈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 신학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러한 자디잔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실제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속에는 오늘 시간이 없어서 다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소스들이 계속 인용이 되는데 이것이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지 칼빈에 제한해 있지 않습니다. 저 바깥으로 터툴리안, 이레네우스부터 시작을 해서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중세 철학자들을 비롯해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특히 튜레틴, 마스트리히트, 히에로니무스 장끼, 이런 사람들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이 됩니다.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들만. 그 당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렇게 방대한 지적인 유산 속에서 자신의 체계를 구축해 갔는데 칼빈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신학을 해 갔는데 그 결론이 칼빈주의가 오늘 생각하는 것과 매우 일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후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칼빈이스트였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 강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신학을 함에 있어서 ‘universality’와 ‘particularity’ 이 두 가지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합니다. ‘particularity’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고백하는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 장로교 칼빈파입니다’ 그러면 이쪽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칼빈부터. 말로만 칼빈 하지 말고 ‘닥읽’ 가서 읽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particularity'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재세례파입니다’ 그러면 재세례파부터 읽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감리교입니다’ 그러면 감리교부터 읽으십시오.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의 신앙고백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갔지만, 내가 고백하는 이 신앙이 가장 하나님을 잘 찾아간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칼빈파가 되었고, 그리고 루터파가 되었고 나는 쯔빙글리파가 되었고, 나는 블링거파가 되었고, 나는 감리교도가 되었고, 나는 재세례파 교인이 된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전부다 잘못되었고 전부다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은 없는 것입니다. 각자 particularity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만 하면 안 됩니다. 하나가 또 무엇인가 하면 universality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책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무한히 존경하니까,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아우구스티누스를 너무 자주 인용하지 마십시오. 오해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그 사람은 마니교의 잔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닥. 읽’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레이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뒤로 넘어가면 속사도 교부들, 이그나티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위대한 중세 신학자들 쭉 나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게 기독교 역사 초기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오류와 진실이 항상 섞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학하면 오류는 절대 없는 순결한 신학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도 그러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분류할 때, 우리의 신학을 데올로기아 비아또름,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복자의 신학, 천국가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마주보고 하는 신학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데올로기아 데이’ 하나님 자신의 신학도 아니고 우리는 모형신학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보편교회가 어떻게 왔는가 보면서 그 속에서 오류와 진실을 가려내고 그 속에서 지적으로 단련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안셀무스나 이러한 사람들을 개혁주의를 가지고 보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꼭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성에 대한 견제 없이 보편성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종교다원주의도 오케이, 그 다음에 이단도 오케이, 이교도 오케이, 세속주의도 오케이, 다 열어놓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universality’를 추구할 때에는 ‘particularity’에 의해서 계속 통제가 되어야 합니다. ‘particularity’를 추구할 때에는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보편교회는 어떻게 생각 했는가 계속 견제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밸런스를 잡으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부들과 중세, 종교개혁과 개혁파 정통주의, 계몽주의, 현대신학, 골고루 읽으면서 신학을 공부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마치겠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혁주의 신학자였는가 집요하게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그 사람은 개혁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개혁신학자가 아니라 18세기의 개혁신학자였고 자기 시대에 충실한 개혁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점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사는 당신도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18세기의 개혁신학자는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의 신학을 이제까지 길게는 20년, 짧게는 10년 넘게 읽어오면서 나는 아직까지도 그의 학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고백은 이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 그 신학이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면 'It's so beautiful.' “정말 예쁘다.” 누구든지 그의 신학을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도 예뻐질 것이다. 물론 외모가 아닙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