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1
사실 인제 한국 교회에는 개신교 역사상 유례가 없다그럴 정도로 정말 그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경험했습니다. 1960년이라고 그러면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데, 예수믿는 사람의 인구가 백만이 안됐습니다. 그리고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에 선교사가 파송된 것이 열다섯 명에 불과했습니다. 근데 지금 여기에는 2007년통계가 나왔는데, 2009년 통계에 의하며 는 이만 명이 넘어섰다고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것만 이천 명이 넘었으니깐. 진짜 엄청난 선교사들이 파송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급속한 성장과 함께, 이제 1980년대 이후로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아주 어두운 그림자들이 조국교회에 비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태까지 한번도 안 해본 작업일꺼에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한번 돌아보고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우리의 현재를 관찰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한 이틀 전에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 진리의 전달자 특강한 거 여러분들 기역할겁니다. 그때, 한국교회틀안에서 한번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고 전망해 보는 것은 상당히 유용할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처음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라 하는 선교사가 입국을 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아주 놀랍게 복음을 아주 굉장히 잘 받아들였어요. 선교 학자들은 이때 상황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분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여러분 알다시피 열광의 가축전이 시작되면서, 나라는 이제 빈약해 져가지고 거의 백성을 돌보지 못하고, 그리고 열광의 틈에 끼여서 수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이 마음 둘 곳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전통적인 그 유교사상 이런 것들은 해체되어가고, 새로운 것들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혼란스러운 때였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의 마음들이 되게 가난해지고,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수용하고 그리고 특별히 내세를 가리키는 이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죠. 선교사들이 굉장히 지혜로웠어요. 그래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라는 것들을 선교사들 전체가 채택을 해서 그래서 인제 그 정책에 의해서 한국인들이 스스로 교회를 세우도록 돕고, 그 다음에 인제 산발적으로 선교를 하던 것을 구획을 나누워서 그렇게 해서 강원도 쪽은 감리교가, 그다음에 어디는 성결교가, 어디는 장로교가, 이런 식으로 서로 충돌하지 않겠끔 지혜롭게 나누워서 그래서 선교를 한 것도 복음화에 상당히 이바지 했고, 더 결정적인 것은 평양 대부흥이였어요.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1907년도에 이었던 우리 수련회때 박용규 교수님이 오셔서 특강도 했잖아요. 근데 그러한 평양대부흥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커다란 획을 그었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신앙의 특성들이 마련되게 된 거죠. 어떤 사람들이 비평을 해요. 어떻게 비평을 하냐하면, 그때에 바로 그런 부흥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고 파괴적인 신앙만을 추구하는 현실도피적인 실피복음 적인 신앙을 갔게되었다.그러는데, 사실은 그거는 한쪽의 해석이고,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왜냐하며는 아시아의 선교의 예를 보더라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복음이 들어가서 성공한 나라가 없어요. 예를 들며는 필리핀을 비롯해서, 동남아에 있는 국가들이 스페인이나 열강의 인제, 지배를 받으면서 복음이 같이 들어왔거든요. 부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위로부터 정치적인 압력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오잖아요. 빨리는 전파가 되요. 법으로 믿게 하니깐, 그런데 힘이없어요. 그리고, 토착종교가 훨씬강해서, 그 기독교의 가르침이 들어가도 융합을 일으켜가지고 아주 이상한 종교로 변하는 거에요. 그리서 결국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거에요. 그때 만약에 부흥이 안일어났으면, 똑같은 그런 상황이 됬을거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의 배경을 보며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그래서 아까 말씀대로 굉장히 암담한 현실속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었던 때였어요. 두 번째는 인제 경제 문화적인 변형인데, 이제까지는 사실은 나라가 공업화되지 않았어요. 근대화되지 않았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농어촌을 중심으로 하는 말하자며는 그런 생산 단계에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서구 문명이 들어오게되면서부터 현저하게 격차가 나는 그런 문명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요. 여기에서 인제 사람들이 특히 육이오 사변을 겪으면서 막 엄청나게 많은 미국의 물자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리고 미국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되면서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을 가겨오게 되요. 그래서 인제 선교초기에는 하층민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었는데, 인제 이렇게 되면서는 아주 지식인 층들에게 까지 복음이 들어가게되고 그리고 무얼해서 먹고살아도 미국과 손잡아야 되니깐, 영어의 열기가 영어배우려는 열기가 늘어나면서 문화들도 갔이 들어오게 된거에요. 오늘날에 우리 한류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한류가 난리는 치는게 아니 잖아요. 한류들어가는 나라는 대게 후진국들로 한류가 들어가잖아요. 물론 인제 일본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한류들이 들어가게될 때, 대게 언어가 들어가게되고, 언어가 들어가며는 그 문화도 같이 따라들어가게 되요. 동경하게 되요.
일본아줌마들이 요세, 할 일 없는 아줌마들이 모여서 한국어 배우는 거 아세요? 왜 배울까요? 드라마 보려고, 그러니깐 참 기가 막히죠. 그죠. 요즘 우리 초등학교 애들도 그래요, 일본어 배운데요. 왜냐하면, 일본만화 원전으로 볼려고, 그러면 우리는 사실은 우리말로 된 성경이라도 열심히 읽어야 되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변화로 한국교가 성장하게되었고, 그다음에 인제 교회적 요인인데, 평양대부흥이 일어나면서, 굉장히 많은 영적 지도자가 세워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놀라운게 뭐냐면요, 신학교 많이 세우면, 영적지도자가 많이 나올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정말 놀라워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신학교에서 섬기신 분들은 섭섭하겠지마는, 신학교에서는 영적인 지도자는 나오지 않아요. 영적인 지도자는 교회에서 나와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거에요. 그 교회는 나무를 기르는 곳이에요. 좋은 나무를 잘라서 신학교 보내면, 다듬어, 오동나무를 보내면, 저쪽에서오동나무가구나 나와, 소나무 보내면 소나무 가구가 나와, 여기서 떡갈나무 보내면, 떡갈나무가 나와, 여기에서 소나무 보냈는데 저쪽에서 오동나무가 되서 나오고 그러는건 없다 이거에요. 이번에 미국엘 가서 마이클 호튼 교수를 만났어요. 그리고지난번에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로 은혜를 끼치고 간 율리스 킴 교수도 같이 만났어요. 한 두시간 동안 얼마나 행복하게 애기 했는지, 저도 사실은 마이클 호튼의 책을 꾀 여러권 읽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당신의 책이 내 서가에 모두 있다는 것 때문에 조금도 놀라지 마라” 근데 진짜 안놀라더라고! 그래서 인제 대화를 한참 나누는데, 애기나오는데 뭐라그러냐면, 아~ 목사님 우리는 부쳐에 불구합니다. 부쳐가 뭐냐면 백정이거든요. 소잡는 사람. 아니며는
고기간에서 고기 짤라 파는 사람. 그래서 뭐라 그러냐며는 “우리는 소를 잡아서 고기를 짤라 놓으면, 진짜 요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나도 고기 자를 수 있는데, 무슨애긴 지 모르죠! 그래서 교회에서 나와요. 교회에서, 그래서 신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나는 적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학교를 위해서 해 줄수 있는 최의 일은 뭐냐면, 정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신학교에 보는 거에요. 그래고 온마음을 다해서 후원하고, 그리고 그 선생님들이 아름다운 신학으로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그 아이들이 그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서 나오도록, 지도자로서 영적인 면들은 교회에서 세워주고, 지적인 면들을 학교에서 보충해서 그래서 아름다운 인격과 경견과 그다음에 학문을 소유한 사람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서로 협력을 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인제 그런굉장히 많은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게 되었구요. 그러면 거기에서 평양대부흥이 모두 그렇게 순수한 지도들만을 그후에 배출했냐 그게아니라 좀 오염된것과 깨끗한 물이 한꺼번에 용출되는 그런 솟아나는 샘처럼, 그렇게 인제 여러 가지 지도자들이 나왔던 거에요. 그래서 평양대부흥 자체는 순수한 부흥이었는데, 이것들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아주 극단적인 신비주의부터 건전한 복음 주의 까지 굉장히 넓은 층차를 가지고 오게되었던 거에요. 그러면서 인제 60년대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엄청난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지게되요. 60년대 이후로 전쟁끝나고 나서 그리고 인제 60년대에 들어와서 특히 60년 후반에 들어와서 기도원 운동이 전개가되요. 그래서 교회마다 기도원 짖는게 아주 유행처럼 됬었어요. 그리고 놀랍게 그 기도원으로 사람들이 기도하러 굉장히 많이 모였어요. 이게무슨 요일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매일 밤 사람들이 모이고, 매일 모였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여러교회는 어떤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냐면, 교회헌금보다 기도원에서 들어오는 헌금이 훨씬 더 많은 거에요. 요즘에 요번에도. 그런 유명한 기도원중 하나에 갔었는데, 요즘 운영이 어떠냐니깐, 아!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요세, 기도원이 애물단지입니다. 한없이 돈이 들어갑니다. 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그런 상황이야. 그러면서 인제 1973년도에 빌리그리암의 대전도대회가 이뤄지면서, 이상하게 한국교회가 대형 집회에 눈을 돌리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빌리그리암 전도집회, 그다음에 액스플로74, 뭐 등등의 커다란 대회가 열리면서 그러면서, 각교회마다 특히 우리교단 같은 경우 일만교회운동 해가지고 교회개척운동들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교회가 굉장히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고, 그러니깐 뭐가 모자라죠? 교역자가 모자라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아는 기독교가 나중에 두고두고 욕을 먹는 구소 신학교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거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학문중에 여왕이었기 때문에 모든 학문을 공부한 사람이 최종적으로 하는 학문이었거든요. 그래서 외국에도 지금도 전통이 남아있어서, 세 개의 전문 학교가 남아 있는거에요. 롤스쿨, 법학전문 대학원, 메디칼 스쿨, 의학전문 대학원, 테올로지칼 스쿨 이렇게 세 개가 사실은 전문적인 지식을 양육하는데에요. 근데 인제 교육자가 모자라니깐, 그렇게 들어가고 너무 제도가 허술한 틈을 타가지고, 여기저기서 안수를 막 주고 하면서, 거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윤리적으로도 검증이 안될뿐만아니나라, 아에 기본적인 학력이 없는 사람들이 은혜만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속에서 들어가게 되는 거에요. 그때 그렇게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 지금 한 육십정도 넘었을까? 우리때 정도 되어서는 상당히 많이 정화가 됬고, 지금은 뭐 정화가 다됬어. 왜냐하면, 안오거든, 안와요. 안오니깐, 제대로 된 대학교 뭐 문이 활짝 열려가지고,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러니깐, 안와, 이러면서 인제 많은 어두운 면들을 많이 만들어 낸거에요. 이렇게 하면서도 인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유산들이 몇가지가 있는데, 기도중심의 경견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굉장히 많이 약화되었어요. 그런데, 빌리그리엄 목사님이 한국에 처음와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으면서 한국교회의 새벽은 교회마다 울려퍼지는 기도소리로 새벽이 열립니다. 그랬어요. 사실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새벽기도가 살인적으로 4시 반에 새벽기도에요. 왜그랬는지! 모르겠는게 아니죠, 왜냐면 그렇게 해야지만, 새벽기도 드리고 와서 밥해먹고 일터에 나가니깐, 일어서면 4시 반이에요. 그대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뭐냐면, 전기불이 별로 없어서 그래서, 9시면 쓰러져서 자야되요. 그렇게 밤늦게 까지 하는 야근이 별로 없었어요. 방직공장이나 이런데 빼놓고, 왜냐면 어두워지면, 가서 자야되니깐. 툭 쓰러져서 자니깐, 아침에 나오는 거죠. 그래서 그런한 기도 중심의 경견이 오래도록 유지 되었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1980년대에 중반까지는 그래도 이런 열렬한고 간절한 기도가 교회에서 상당히 유지되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거의 사라졌어요. 정말 거의 사라졌어요. 그리고 이제 그때, 기도가 열렬했을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는 뭐냐하며는 그때가 60년대 70년대에 한창 근대화의 그 시기에 살때였거든요. 그대 미친 듯이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때였거든요. 그러니깐, 그런속에서 사람들속에 이 근대화에서 생존경쟁에서 따라가려니깐, 울분같은것들이 싸이는 거에요. 레크리에이션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놀러가는게 있어요! 뭐가 있었어요. 그러니깐, 그런 울분이나 이런것들을 사실은 사회확적으로 사회적심리를 이렇게 교회와서 막 쏟아놓는 거에요. 그래서 금요철야기도회가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였어요. 그러면서 하여튼 간절히 기도하고, 그땐 진짜 철야기도였어요. 이것은 뭐 그게 철야기도야, 밤되기 전에 집에 가는데, 그때는 제가 회심하고 나서 기도 할 때 보며는 대개,밤 11시에 모여서 새벽 한 3시, 3시반, 그정도 끝나요. 30분 쉈다가 그다음에 인제 새벽예배드리고, 집에 가는 거죠. 바로 출근들 다했어요. 참 어떻게 견뎐는지 모르겠어요.
진짜,하나님의 은혜죠! 그러한 기도 운동이 있었어요. 그다음 또하나의 유산이 뭐냐면, 성령중심의 선교에요. 1907년도 평양대부흥이 남긴 유산이 성령중심적 선교에요. 18페이지 2번에 첫째줄 성령중심적 선교이다. 신앙이 아니라 선교이다. 그래서 강력한 성령의 체험은 논리보다 정서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심성과 딱 맞아 떨어졌어요. 그래서 아주 뜨거운 그러한 열렬한 신앙을 물려줬는가 하면, 또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쫌 멀리하는 그리고 그런 개인의 체험을 객관적인 개시의 진리보다 우선시하는 그런 옳지 않은 영향도 끼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면서 인제, 초기에 순수한 사경회운동을 벗어나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깨닫는 것이아니라 이런 영적체험을 그 받아들이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령운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화 되게 되었다는 점을 우리들이 무시할 수 가 없어요. 성령을 강조하고 그렇게 했지마는 이후에 일어나는 옳지 않은 신학들 그담에 면밀하지 않은 신학적인 입장들 때문에 성령은 개인을 복되게 하고 현세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도구로서 성령을 거론하게 되는 그런 불행한 상황도 벋어들고?,
특히 성령을 이야기 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그분앞에서 우리들이 성화되어야한 소명, 이런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현저히 개념이 없는 그러한 불행한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우리들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인제 세 번째는 복음 중심의 신앙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성령운동이 역사성을 무시하고 초월성을 강조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분명하게 복음! 특히 복음중에서도 십자가 고난, 그리고 그담에 내세에 대한 신앙, 그담에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확고한 회심에 대한 신념, 이런것들은 아주 좋은 결과들을 남겨 놓은거에요. 교회론이나 이러점에 있어서는 꼼꼼하지는 못했지만, 구원론, 그담에 종말론, 그담에 기독론 중에서 십자기 고난, 대속의 교리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류에 복음의 요소에 대해서 상당히 체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 놀라워요. 요즘도 보며는 많이 이나라 저나라 다 다녀봐도 그래도 십자가를 설교하면, 아직까지 반응하고 있는 드문 나라중 하나가 우리나라에요. 그러니깐, 얼마나, 그 복음 신앙의 뿌리가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거죠. 이러면서 이제 사실은 진정한 복음에 대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만이 아니라 사실은 복음 교리에 대한 앎을 포함할 때, 그것이 진정한 복음에 대한 앎인데, 이러한 것들이 굉장히 무시되고, 심지어는 복음이 극단적으로 오용이 되어서 예수믿으면, 예수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것을 극단적으로 찢어놓아서, 그래서 심리적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고, 한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당신도 어쩔수 없다. 그래서 무율법 주위 쪽으로 가게되는 그런 결과들를 가져오고, 혼란스러운 신앙들을 만들어내게 된것이에요. 그러면서 또하나는 뭐냐하면, 성장중심의 목회가 이루어져요. 이것은 사회현상과 관련이 있는데,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은 강력한 경제제일 정책을 택해요. 두가지가 중요했는데, 국방과 그담에 경제였어요. 국방과 경제. 그래서 결국은 국방은 인제 무기를 사고 군대를 많이 길러서 이북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였고 그러면서 인제 온힘을 길러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던 거죠. 그러한 경제에 몰입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러니깐, 그러면 경제적으로 그렇게 몰입이 되게 되며는 그럼 어떤식으로 되냐면, 경제제일주의가 되잖아요. 빈부의 차이가 벌어지잖아요. 그래서 도덕적인 가치가 경제발전 과정에서는 항상 무시되는 거에요. 그리고 사회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문가 일어나냐면, 저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아, 근데, 좋은 사회는 저사람이 잘 살게 된 것을 내가 수긍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거든, 왜냐면, 아버지를 훌륭한 분을 만났다던지,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던지, 뭔가 수합이 뛰어나다 던지, 해야되는데 이게 반칙을 해가지고 돈을 버는 거야. 그러면 인제 그때는 불복하게?동의가 않되는 거죠. 그러면인제 급격하게 도덕심이 무너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물질주의가 들어오면, 대게 도덕이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에요.
요즘 중국이 인제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잖아요. 중국뿐만이 아니에요. 신흥국가들 베트남, 캄보디아를 비롯해서 이하에 있는 많은 국가들이 다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그러다가보니깐, 어떻게 되냐하면, 똑깥이 한국교회에도 나라가 하는 그런 발전의 계획들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발전되며는 다 좋은 거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꾸고, 발전하는 그런 쪽으로 교회가 이루어져요. 그래서 선교 맨 처음에는 뭐 큰교회가 훌륭한 교회라든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을 가진 목사가 아주 신령한 목회자라든지 하는 그러한 판단이 없었어요. 근데, 나중에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징들이 물질적이고, 외향적인 것들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그러면서, 이렇게 되면서, 내적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 라고하는 반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1980년대에 광야설교운동이라든지, 그다음에 말씀묵상운동, 제자훈련, 그담에90년대 문화운동등으로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제 교회자체도 큰교회는 막커지고 도퇴되는 교회들은 아주 작아지고, 그러면서, 교인들은 옛날에는 교회를 지어놓으면, 막 몰려왔는데, 지금은 인제, 안그러는 거에요. 인제 이러면서 사실은 인제 과학적인 경향의 기법과 시장의 논리 이런것들을 도입한 교회출현을 가져오게 었던 것이죠. 이제 이러한 현실들 그리고 오늘날 인제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중심적인 목회, 최근에도
어느 교회에 가보니까는 교회로비에다가 쭉 여러 가지 내용들을 현수막으로 붙였는데 보니깐, 가만히 보니깐, 열뎃개이상 쭉 우리교회는 이런교회입니다. 가만히 보니깐, 뭐냐며는 공통점이 있어요, 중심이 인간이에요. 우리교회 나오면, 행복합니다. 우리교회 나오며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우리오며는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오며는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등등 이에요. 이렇게해서 인간들이 교회나오는 동기 자체가 나를 버리고 포기하고 주님을 붙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하자며는 나자신을 오히려 되찾고 경려를 받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 오는 거에요. 이렇게 될 경우에는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든지, 변화되지를 않는다며는 그런 기대를 체워지지 못할 때, 결국은 교회를 가차없이 버리게 되는 거에요. 이런 일들이 인제 교회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에요. 사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은 여전히 혈연 지연, 특별히 공동체적인 의식, 이런것들이 지방을 중심으로 상당히 남아있었어요. 지금도 남아있지만, 근데, 이런것들이 80년대에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속히 와이되기 시작해요. 그리고 인제 생겨나는 어마어마한 아파트 들의 건립을 통해서 인간의 의식과 생활속에 굉장히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거에요. 이웃이라는 개념이 없어져 버리는거에요. 그러면서 인제 굉장히 개인주의적이 되는 거죠. 이러한 변화속에서 이제 결국은 그런 속에서 사람들이 이제 오늘 날은 번영주의를 추구하는 거에요. 그러니깐, 70년대에 있었던 그런 번영주의 기복신앙하고 오늘날의 꺼는 사상적 기반이 틀려요. 옛날에는 먹고살기위한, 인간이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번영주의였는데, 오늘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그런 종류의 번영주의가 되는 거에요. 근데 이런 한국교회성장에대해서 평가를 해보자면, 긍정적인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는데, 어쨌든 긍정적인 면으로 가지고 보며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거죠. 어쨌든, 좀 순수하지 않는 면은 있었지만,
복음이 들어와서 일본처럼 저렇게 씨가 마르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복음이 넓게 전파되어서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된다라고 하는 것 자체를 이제 사회에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고, 그리고 사실은 사회 구석구석 마다 믿는 사람들의 그런 연합들이 일어나게 된거죠. 사실 굉장해요. 이거는 그래서 믿는 사람들끼리 맘만 먹으며는 자기네들 끼리 뭐든지 뭐든지 다 해먹을 있는 정도로 그렇게 엄청나요. 그리고 또, 하였튼 조직을 만드는 데 천재적인 재주를 기독교는 가지고 있어요. 그래기지고 무슨, 한경미화원들 선교회, 이미용사 선교회, 그다음 자동차 운전수 선교회, 장관 차관 운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또, 고위직 운전사 연합회, 어 그런것을 만들었어. 재경부 장관, 지경부장관, 차를 모시는 국무총리를 모시는, 각하를 모시는.. 이렇게해서 사람들이 선교회를 조직하고, 굉장해요! 노래방 업주들이 모여서 선교회를 조직했다는 이야기만, 제가 못들었지, 다른 업종에서는 모두다 존재해. 정말 놀라워요. 이런 것들은 어떤식으로든지 하여튼, 긍정적으로 우리는 보게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리고 어쨌든 많은 학교와 이런것들, 예술 각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국회만 해도 사분의 일정도 국회의원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깐, 무시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면들이 있는 거에요. 그것이 뭐냐면, 제일 먼저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계량화에요. 이게무슨 뜻이냐 하며는 기독교 신앙자체는 정신적이고 영적인것인거든요. 근데 이것을 계량화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교회 몇 명이 모이느냐, 그걸 보고 인제 말하자면 그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냐, 죽은교회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다음에 교회건물이 어떤가, 아니면, 목사님이 학위를 가졌는가!. 너무너무 혼란스러워 졌어요. 이러한 것들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계량화 현상인 것이다. 이런거죠. 둘째로는 목회자에대한 비성경적 절대화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지금은 뭐 별로 그렇지 않죠. 많이 깨어서. 근제 60년대 70년대만 해도, 그렇게 비성경적으로 목회자를 절대화해서, 그때, 제일 웃기는게 종님, 종님, 하나님의 종님께서 올리다 올리다 안되니깐, 별거를 다 올려요. 그러면서 인제 살아가요. 근데 인제 목회자를 대하는 것 이런것들 있잖아요. 제가 제일 기분 좋은 것은 뭐냐하며는 높이고 이러는게 기분이 좋은게 아니라 몇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뭐냐면, 그사람이 나 개인의 인격때문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이 배푸시는 말씀에 대한 존중 때문에 나를 수납하고 받아들여 줄 때, 그렇게하고, 또하나는 뭐냐하며는 이렇게 목회자가 자신의 인생의 행복에 대한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는 두려움과 그다음에 기대감 때문에 목회자를 선대하고 하는 것들은 오래가지 않더라구요. 전체적인 말씀의 질서 속에서 교회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있고 목회자가 누구이고, 그다음에 성도와 목회자의 동일한 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이고 어떤 질서로 목회자를 대해야되는가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한 전체적인 체계적인 앎 속에서 합당한 존중을 목회자가 교인에게 교인이 목회자에게 함께 그렇게 할 때에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봅시다. 목회자가 있는데, 여러분들이 돈이 좀 있다고 목회자가 어느날 와서, 막 예배당에 들어오는데, 너 비켜! 비켜! 여기 앉으세요. 막 이러고, 야고보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게, 실제로 그랬단 말이에요. 그게. 지어낸 애기가 아니라, 아! 여기 앉으세요. 그러고, 목사가 내려와서 의자를 털어 주면서 여기 앉으시라고, 그렇게 하며는 여러분들은 아! 정말 인격적으로 대접 받는다! 그런 생각이 들겠어요? 안들거아니에요. 그죠! 얼마나 돈을 후릴려고 저러나! 그런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러니까는 똑같은거에요. 정상적인 목회자라면, 그것이 금방 느껴지는 거죠. 어느정도가 하는 것이, 그러니깐,
그런 것들이 합당한데, 이런 부흥운동과 이런 여파를 인해서 말하자면는 목사에대한 어떤 절대적인 축복권 뭐 이런 것들이 강조가 되면서 그러면서, 비인격적인 신앙들이 팽배하게 되었던 거죠. 그것들을 또 이용하는 목회자들도 있었고, 교인들에는 뭐가 있냐며는 종교적인 예속 심리가 있어요. 내가 “청중을 하나님앞에 세우는 설교자” 거기서도 썼는데, 막 그냥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막 욕하고 심지어는 막 때리는 목회자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기자가가서 왜 패냐고 교인을, 그랬더니 애비가 자식좀 팼는데, 그게 사랑이지 문제가 되냐고, 그게 말이 되요. 그게! 영적으로 아버지지 그게 개패듯 패라고, 같이 상담하다가 따귀를 막 때리고 그랬다는 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렇게 얻어 맞이면서도 쾌감을 느끼는 거에요. 종교적인 마져히스트들 이거든요. 쌔드히스트들! 복음의 빛이 없으면 그렇게 혼탁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이런면들이 나타나게 되었구요. 그리고 이제 80년대 이후로 들어오면서, 이런 목회자에 대한 비성경 절대화는 살아지는데, 아주 교묘한 새로운 풍조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면, 옛날에 목사님에 대한 존중도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이 였냐며는 이런거에요.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능력있게 전한다. 그리고 그분이 간절히 기도하면 능력이 있다. 그리고 정말 인품이나 이런것들이 주님을 닮았다. 이런것들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이것이 세월이 쭉 흘러가면서 80년대 이후에 와서는 교회를 경영할 능력이 없는 목회자들이 무시를 당하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제가 모시고있던 담임목사님이 예기해 주신게 있었는데, 두교회가 있었데요. 마주보고 있는 교회가 있었데요. 양쪽 교회가 똑같이 이백명씩 모였데요.
그런데 한쪽교회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해서 한 십오년동안 목회하면서 천이백명교회로 키워논거에요. 그런데 결국은 목회못한다고 쫒겨났어요. 이유가 무었 때문이었냐며는 옆에있는 교회는 똑같은 크기였었는데 계속 성장해서 이천오백명까지 됐데요. 근데 이분은 십칠년동안 이백명 교인을 천칠백명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멈췄는데, 앞에교회는 더 전진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볼 때 열등감을 느끼는 거에요. 그래서 리더십을 교체해야 된다. 그래서 목사님를 짜르는 거에요. 왜! 목사님은 교회 경영 능력이 없다! 리더십이 없다! 짜르는 거에요. 뭐, 교회서 그렇게 하려고 맘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거든요. 물론 그 목사님이 죽어도 벝이겠다 그랬으면 못 쫒아냈을 모르겠지만, 뭐 그렇게 까지 또 거기 남아있고 싶은맘도 없었겠죠. 그래서 인제 짤려서 떠나는 거에요. 그런 이상한 논리가 들어오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는 이제 어떻게 되냐면, 교인들이 그리고 또 어떤게 들어오게 되냐며는,
그러면서 여러분 알다시피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엄청난 물질주의가 밀려오게 되요. 그래서 사람들이, 지금의 이런 삶은 사실은 옛날 같았으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부요한 삶이거든요. 솔직 이야기해서,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뭐냐하며는 이렇게 이세상과 교회는 밀접하게 관계가 있어서 그래서 예를 들자며는 사회의 변천에 따라서 교회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들이 아주 달라지는 거에요. 80년대 경우에는 민주화 운동할 때, 교회가 가장 욕을 먹었던게 뭐냐하며는 민주화투쟁 안한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었잖아요. 그리고 그런 욕을 먹는 거야 사실은 어느정도의 책임도 있어요. 교회에, 그런데 시대마다 교회에 요구하는 것들이 다 각각 달라지게 되는 거에요. 그때 교회는 그렇게 변천하는 사회의 이런 요구들을 보면서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들이 어떤 것들을 간파하고, 그리고 이 불변하는 가치와 변천하는 가치가 무엇이가를 가지고 함께 고민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보세요. 성경에 어디에 목회자가 유능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유능하지 않으며는 세속적인 목회자라는 그런것들이 나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나는 우리교회가 큰교회라고 생각하지 않만, 그렇다고 이애기는 더 큰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마는 나는 여러분들이 작은 교회를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는 마음이 만약에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굉장히 잘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이런 큰 교회를 존중하고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런 태도는 아주 후에 일어난 영향이고 사실 본래에는 그렇지 않고 항상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를 자신의 목회사역 속에서 보이는 것으로 사실은 교회는 그에 합당하게 그를 대해주었던 것이죠. 그런 정신들이 유지되어야 되는 거에요. 핫이라도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 이기 때문에 아주 하급으로 대하고, 그다음에 큰교회 목회자이기 때문에 더 존중하고, 아니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람보다 저사람을 더 높이고 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서는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눈을떠서 이런 개별적인 교회가 아니라 세계전체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이 보편교회에 대해서 눈을 뜨고 거기에는 혹시 우리는 우리와 교파가 달라도 우리가 무슨 애기 했냐면, 나는 지금도 예배시간에 이렇게 예배드리지를 않고 막 뜨겁게 미친 듯이 찬양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그러다가 불쑥 나타나서 설교하고 그리고 다시 찬양으로 끝나는 그런건 난 예배라고 생각해요. 예배의 규모가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교회와 우리교회가 무엇이 다른가? 생각하기 보다는 그 속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오히려 관심이 더 많아요. 우리와 똑같은 예배 형식을 따르고 설교가 세속적인 교회보다는 예배형식이 달라도 말씀이 건전한 개혁주의에 입각한 교회를 나는 훨씬 더 높이사고 싶고 동료애를 느낀다 이거죠. 성가대 하는 거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있는 교회가 그 성가대가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교회보다 열등한 예배를 드린다거나 혹은 그것 때문에 개혁주의가 아니라거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심지어는 우리는 칼빈주의 자들이지만, 알미니우스 주의 자들이 모인 교회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교리의 차이 때문에 그 교회가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교회라고 난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다양성들을 모두 넘어서서, 누가 그러드라고요. 신학교 섬김의 날 을 하는 데, 뭐 신학교가 들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칼빈주의자의 목사님이 알미니우스신학을 주장하는 학교에 가서 섬김의 날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알미니우스를 섬기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지체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랬어요. 괜찮아요. 그래서 그런 모든 지체들 어떻게 말하며는 사실은 이단일지도 모르는 교파에서도 참되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도 우리들의 지체 아니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전체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가꾸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부정적인 면들을 극복해 가야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뭐냐면, 제일 커다란 문제가 뭐냐면, 교회의 세속화에요. 세속화, 그래서 세속화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하나님이 계셔야될 중심에 인간이 온상태가 세속화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오셔야 될 자리에 인간이 중심에 와서 그래서 인간이 중심이되는 그것이 바로 세속화에요. 이런 세속화는 결국은 커다란 도덕적 타락이나 이런것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들이 아니라 중심축이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이 되고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깨뜨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가야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존재 가치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것에 이바지 하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가 성장제일주의로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 들어보세요. 요즘 보며는 주의에서 전도들을 일반적으로는 전도들을 많이 하는 시대입니까? 안하는 시대입니까? 잘 안하는 시대잖아요 그죠! 그런데, 아주 특이하게 열심히 전도 다니는 교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굉장히 이상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제가 최근에 갔다온 어느 교회애긴데, 가서 인제 가족구원에 대해서 설교를 했어요. 가족들이 구원받아야 된다. 그리고 인제 강력하게 설교를 했더니,
사람들이 이사람 저사람이 울기시작했어요. 예배가 끝나고 나니깐, 여기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다 무릎을 꿇었어요. 그래서 인제 기도를 해줬어요. 기도를 하는데, 기도제목들을 인제 예기를 하는데 자기 자녀들 가족들 구원 하지 못한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거에요. 근데 그 교회에 딱 보니깐, 뭐냐며는 굉장히 불신자들을 불러다가 예배를 드리고 그들 교회다니게 하는거, 그런 운동들을 열심히 하는 거야, 무슨예기냐면, 그렇게 열심히 하는 교회들속에는 순수하게 구령의 열정으로 그렇게 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고, 어떤 교회가체가 이런 사람들의 영향들을 이렇게 집중시켜가지고, 그래서 이것들을 상징조작이라고 그러죠. 목표를 부여해가지고, 이것들 속에서 사람들을 확 이렇게 예수 믿게끔 말이죠.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근데 그안에 뭐가 문제냐 하면, 사람들을 모아야한다는 목표는 있는데, 영혼에 대한 사랑이 그거는 사실은 그렇게 경영학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깐, 인제 이런데서 많은 혼란들이 생겨나는 거에요. 그래서 뭐냐며는 마음 자체가 복음으로부터 출발되가지고 이 속에서 구령의 열정이 솓아나고, 그렇게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하고 구원을 받게하고 그런 일들이 교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되는데, 이런것들이 굉장히 어려워 지는 거죠. 이렇게 하면서 결국은 교회가 탈신학화 되가는 거죠. 그래서 무슨 이야기냐며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중심을 하나님에게 둔 생각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인제 어떤 일들이 일어나냐면, 인간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구에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해요.
인간의 요구에 부흥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하겠어요? 규칙이나 법칙, 그리고 진리, 이런것들이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은 자꾸 파괴되는 거에요. 그러니깐, 이런것들을 거둬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탈신학화가 되는 거죠. 요번에 미국에 가서도. 리차드 멀러라고 하는 세계적인 교회학자를 만났는데, 그분하고 같이 인제 점심을 먹으러 차를 타고 가는데, 그분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아! 목사님, 요세는 이 미국도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며는 한편의 쑈라 이게요. 쑈! 그래서 말하자면, 오프라 윈프리 쑈, 비슷해요. 그래서 와서 그냥 틀린이야기는 하나도 없어. 다 좋은이야기야, 그런데 뭐냐면, 복음이 없어. 사상이 없어. 진리가 없어요. 다 듣고 나며는, 마음이 편안 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러면 안되고 설교를 듣고 나며는 마틴루터 표현에 의하면 설교를 듣고 나면, 설교를 들은 다음에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아니면 설교한 사람한테 신경질이 나든지, 둘중에 하나가 되야 되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요! 말씀을 듣고, 아! 나는 틀렸구나,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나는 왜 이렇게 악할까! 이렇게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할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렇지 않으면, 저사람이 우리보고 우리에게 이렇게 나쁜일을 하라그렇까 뭐 이런 분노 같은게 생겨나야 되잖아요. 그게 아니라 너도 좋고 나도좋고 편안한거에요. 진리의 요소를 빼벼려야 지만,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수 있지!
선명한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거에요. 이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런 목회의 탈신학화 막 배출이 되는 거에요. 요세 애기들으니깐, 금니빨 사건 알죠. 그거 인제 한물 갔담니다. 미국에서 새로운 운동이 벌어졌는데 발빼기 운동이래요. 그 예기를 상세하게 듣고 너무 황당했어요. 일단 사람이 오면 무조건 불로나가 기도를 한다음에 쓰러트린데요. 그리고 그다음에 백사람이면, 백사람 넌 발이 짝짝이라고 그런데요. 그런데 사실은 발이 어느정도는 짝짝이잖아요. 저도 이센티가 짝짝이거든요. 근데 잡아 당기면 똑같해지고 또 걷다보면, 쑥들어가가지고 짝짝이가 되요. 그래요. 이게 인제 허리가 안좋은 사람들이 그런 현상이 나타나거든요. 근데 앉혀놓고 그런애기를 하는 거야. 너는 발이 짝짝이다. 그러면서 인제 막 찬양을 하고 그래서 이발이 잘못된게 결국은 몸의 위치나 모든 것들을 좌우하고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는데, 너무 심오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자세가 삐툴어지면, 아니 그럼 우리같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해.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진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럼 결론은 어떻게 됐냐, 발빼기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막 찬양을 부르면서, 손을 집어넣고 발을 뺀다는 거에요. 근데 조건이 있는데,
이런 운동화는 안되 센들이나 이런것을 신어야 된다는 거에요. 다 뒷꿈치가 보이는 걸 신어야 되요. 손을 탁 집어 넣고, 주여주여 나온다 나온다 나온다 하면서 발이 뺀다는 거에요. 그러면 진짜 발이 나오는게 보이는데, 그사람이 그것을 비디오를 찍었데요. 멀리서 쫙 보니깐, 손을 이렇게 움직여서 발을 움직여서 발이 빠지는 것처럼 트릭을 쓰드라는 거야. 비디오로 상세히 찍은거에요. 저 위에서 몰래카메라로 확대해가지고, 그래서 발을 빼는 거에요. 그리고 뭐 발을 빼며는 발이 빠지는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탁 똑바로 탁 뼈가 맞혀지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너무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막 오는 거에요. 신학이 사라지고 나니깐, 뭐가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들이 교회가 전체적으로 사라지는 거에요. 지난번에 우리 캐네스 해긴 그 엉터리 여기에서 막 웃음치료 하고 그런거 봤잖아요. 그런 막 깔깔대고 웃으면서, 그러니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 아주 굉장히 심각하게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교파고 뭐고 할 것없이 그렇게 일들이 일어나고,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 수만 있다면, 서슴없이 이런 일들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해가지고 그거를 이주일씩 삼주일씩 목회자들이 가서 상당한 돈을 내가지고 훈련를 받고와서 그래서 빨빼기를 하는 거에요. 미치겠어요. 이 한인교회에서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에요.
그렇게 해놓고 발빼기를 하는 거에요. 이 발빼기가 어디로 갈는지 모르겠어요. 금니빨에서 발빼기로 가는 데, 조만간에 수입이 되리라고 봐. 틀립없어 왜냐며는 하여튼 미재라면 아직도 사죽을 못쓰거든. 그래서 여기로 다들어오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다시또 인제 우리나라에서도 발빼기 교육을 받는다고 또, 가겠지 미국가서 한국지부도 만들어지고 발빼기 할거에요. 내가 미리 애기해주니까. 발뺀다 그런데 가지마. 어떻게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발에 달렸다. 그런황당 근데 그걸 믿는 거에요. 그리고 또 간증이 나오는 거에요. 거기서 발이 빠졌더니 그순간 주님과의 관계가 치료되고 기쁨이 밀려오고 그러더라 그런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에요. 전체가 신학을 떠나고 나며는 세속화가 되는데, 세속화가 되고 나고 탈신학화되면 그다음에 어두움이 교회안에 가득 들어오게 되는 거에요. 그럼 그 어둠속에서는 막 수없이 속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성경에 보며는 마귀도 기적을 행하잖아요. 기적 그 자체가 진리의 증표가 될 수는 없는 거에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중요한것은 신앙에 있어서 참된 중심 자체를 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전체적인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세우는 그것에 기쁨을 느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고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때에 그것이 아름다운 하나의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이고 신앙의 모습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냐하며는 이런문제를 이렇게 심지어 그렇게 발빼기를 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우리들이 머저리 꼴갑하고 있네,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원래의 그 교회의 터는 신앙고백의 터위에 섰고 그리스도의 피위에 서있잖아요. 그런데 진리가 어두움을 감추고 세상의 사상에 판을 치게 되니깐. 그러니깐, 그런 무지와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줘야되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눠줘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 마지막 시대에 아주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