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강의
녹취자: 유 혁
지난 시간에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웠다면 오늘서 부터는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24과에서는 교회의 정치와 권세를 다루고, 25과에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26과에서는 특별히 세례를, 27과에서는 성찬을 이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례와 성찬, 교회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의 정치와 권세를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정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힘이, 권세가 행사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다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권세가 행사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체제, 정확하게 말하면 영어로 polity인데 우리들이 사회시간에 정체라고 배웠습니다. 정체, 정체는 무엇이냐 하면 국가의 권력이 있는데 그것이 군주에 의해서 행사되면 군주제,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의 다수에 의해서 되면 공화제, 이렇게 나눠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의미의 정체를 여기서 정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권위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는 교회를 다스리시되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스리십니다. 교회의 직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옷 입은 자임으로 그의 말씀의 지배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실 때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처럼 교회가 어떤 사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옛날의 교황제처럼 사람을 형벌에 처하고 심지어는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그럴 수 있는 권한이 교회의 고유하게 주신 권한이 아닙니다. 교회에게 주신 권한은 영적 권세로서 이 영적인 권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신앙이 없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아무 것도 겁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이 세상 나라에서 제명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제명되는 것을 더 두려워할 것이고 주님과 무언가 맺히는 것을 이 세상 사람과 맺히는 것보다 더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사람, 진심으로 회심해야 하고 회심한 뒤에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야 말로 교회에서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 그것은 권위의 질서인 동시에 말씀의 질서이고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까짓 것이 무엇인데 하고 발로 차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면서 당신의 권위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법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법하고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그 다음 교회의 직원, 교회의 직원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특수직원과 보통직원 이렇게 나뉩니다. 특수직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특별한 시대에 특별하게 세웠기 때문에 지금은 반복되지 않는 직원, 이것을 가리켜서 특수직원이라 부릅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사도, 두 번째 선지자, 전도자 이렇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원 중 가장 중요한 직원은 사도직입니다. 엄밀한 의미로 특수직원이란 명칭은 예수님에 의해 직접 택함을 받은 그 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되지만 이 칭호는 사도적 인물에게도 적용된다. 사도들은 일정한 특별자격을 가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영감 받음을 의식했고 이적을 행했으며 그들의 사역을 행하는데 충만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또한 성경은 선지자에 대해 말하는데 이들은 교회에 대한 교훈을 말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인물들인데 어떤 때는 미래사를 예고하기도 합니다. 이 선지자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구약의 내려오던 선지자들의 직분이 신약에서도 이어지는데 차이는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신약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 교회 안에 예언의 기능이 잠시 남아있게 됩니다. 이 예언의 기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었고,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언의 기능은 이제 성경이 완성되면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도 그친다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끝나게 됩니다. 그것으로서 다시 선지자 직은 되풀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날 신사도운동에서 자신들이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새로운 사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전도자, 신약은 전도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의 일을 돕는 자들입니다. 사도들을 풀타임으로 따라다니며 복음 전도에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서 그래서 능력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전도자들은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전도하러 다니는 전도자들하고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면 안 되고, 이것은 그 시대의 복음의 문을 열고 교회의 터를 놓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전도자로서 활동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임시직원 혹은 특수직원, 특별히 한정된 시대에만 있었던 하나님의 일꾼들 세 직분이 있는데 사도, 선지자, 전도자 이렇게 세 직분입니다.
보통직원, 보통직원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져오는 직분입니다. 사도행전은 특별히 장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해서 감독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동일한 직원을 어떤 측면에서 봤는가에 의해서 명칭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라고 하면 이렇게 사람들을 돌보고 다스리고 하는 것이고, 감독은 교회의 일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교회를 관할하고 감독하는 그 기능, 감독의 기능과 말하자면 목양하고 다스리는 기능을 어느 관점에서 봤느냐에 의해서 장로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감독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두 칭호는 모두 동일계급의 직원들에게 적용되는데 장로라는 칭호는 그들의 나이를 강조하는 것이며, 감독은 감시자로서의 직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본래 교사가 아니지만 가르치는 기능(?)이 그 직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보면 어떤 장로는 치리만 했으나 어떤 장로는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치리하기만 하는 장로가 오늘날의 장로고, 그때에 치리하면서 가르치기도 한 장로가 오늘의 목사입니다.
이뿐 아니라 신약은 집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집사직의 제도는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로고시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답니다. 장로교회의 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랬더니 장로들에게 있다 그랬답니다. 왜 그랬냐고 그랬더니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한예수교는 다 이해하는 것이고, 장로교라고 하는 거기에 나오는 장로와 우리들이 쓰는 장로는 다릅니다. 우리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라고 하면 Korea Presbyterian Church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Presbytery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감독 혹은 노회를 구성하는 회원, 이런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장로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로와 목사들로 구성된 그 모임을 우리들이 Presbytery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두 종료가 있는데 교회를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와 다스릴 뿐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 두 사람이 있는데 이 말씀을 가르치고 다스리기도 하는 장로를 가리켜서 오늘날의 목사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해되십니까? 어떤 사람은 물어봅니다. 부목사님은 어떻게 됩니까? 부목사님은 교단마다 조금 법이 다릅니다. 우리교단에는 부목사님에게는 치리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목사님은 가르치기만 하는 장로, 그렇게 생각하면 되고, 장로는 치리하기만 하는 장로, 담임목사는 치리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장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 교회의 회의, 개혁교회는 많은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서로의 관계는 주의 깊은 순서에 의해 구분됩니다. 이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총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1번 당회, 당회는 지 교회, 지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이름을 가지고 같은 신앙 고백을 가지고 한 건물 안에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한 회중을 가리킵니다. 그 지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이 됩니다. 그럼 얼마나 되어야 하는가? 목사 한 사람, 장로 한 사람 이렇게 모여도 당회가 구성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장로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각 교단마다 다른데 우리교단에는 세례 받은 교인 30명당 한 명의 장로를 뽑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받은 교인 60명이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2명까지 장로를 뽑겠노라고 노회에 신청할 수 있고, 노회에서 허락을 받으면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투표한 사람을 이제 훈련을 시켜서 6개월 동안 그 자격이 통과가 되면 노회에서 이 사람 장로를 시켜도 좋다 그러면 이제 장로 안수를 주고 장로로 취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세운다고 한다면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한 100명쯤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30명의 한 명씩 그렇게 좋은 사람이 모두 나오라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회가 구성이 되면 이 당회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안들을 대의제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교인들이 자기의 대표자를 뽑아서 그래서 교회의 장로로 삼아 목사를 도와 자신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교회 일을 처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교에서의 제도는 명백하게 대의제 정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노회, 노회는 일정지역 내의 각 지역의 목사 1인과 장로 1인으로 구성이 되며, 무슨 뜻이냐면 지교회가 연합해서 노회를 만들게 됩니다. 장로교에서는 사실 노회가 기본 단위입니다. 노회를 만들게 되는데 노회를 만들 때에는 노회가 항상 무슨 회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노회가 구성이 되어 있지만 1년에 두 번씩 회의로 모일 때, 그 때에 이제 각 그 노회 안에 속해있는 모든 지교회의 모든 목사가 회원이 되고 그 다음에 장로들은 모두 한 명씩은 갈 수 있지만 너무 많을 경우에는 숫자를 정해서 대표를 뽑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 장로님이 10명이라면 3명만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3명을 투표로 뽑습니다. 이번에는 당신들이 가서 우리교회의 교인들의 의견을 대신해서 대표단으로 보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모인 목사와 장로들의 모임을 노회라고 합니다. 노회에서는 개 교회에서 일어나는 재판 사건부터 시작을 해서 중요한 노회에 관한 일들을 결정하고 여기서 대표단을 총회로 보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지금 노회가 제가 알기론 80여개 노회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노회는 그 사이즈가 한 30개 되는 곳부터 시작을 해서, 우리는 30개짜리는 없습니다. 보통 적으면 5~60개 교회부터 시작을 해서 많으면 몇 백 개, 800개, 900개 교회까지 모이는 노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쪼개져 있어서 그래서 하나의 노회에서 한 50개에서 한 3~400개 정도의 교회가 모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됩니다. 총회에서는 각 노회에서 파송되는 대표단의 목사 수와 장로 수가 일치해서 그들이 이제 총회를 구성을 해서 교단 전체에 관한 일들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지금 저희들 교단에 소속된 교회는 12000 교회, 한국에서는 제일 커다란 교단입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교회에 관한 일들을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보통 모일 때 한 800명에서 1000명 정도 모인다고 합니다.
다음 지교회의 정치, 지교회의 정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교인들에 의해 피택된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관리를 위한 하나의 당회를 구성합니다. 2. 장로는 교인들에 의해 선택되지만 그들의 권위를 교인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받은 것이라고 봅니다. 3. 모든 지 교회는 교회 사건을 정치하기 위해 충분히 구비된 하나의 완성적인 교회이다. 그러니까 자치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산, 그 다음에 대외적인 의견의 표명, 그 다음에 대내적인 일들의 결정, 재산의 취득과 포기에 관한 사항 이런 것들을 교회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 점에서 완전히 독립된 기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 교회는 공통적 일치점을 근거로 다른 교회와 관련을 맺음으로 완전히 독립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헌장은 지교회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지만 한편으로는 연합된 교회의 공통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해줍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성경적으로 보면 사실은 맨 처음에 교회가 사도행전 때에 생겼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날 핍박하시오 하고 똑같을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잡아가는데 깃발 세우고 열린교회 이름 세우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암암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교회에게 보내는 글 이라면 이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글인데 그것은 이렇게 명확하게 모이는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냐 하면 로마에 있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정들 하나하나가 하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보면 굉장히 눈물이 납니다. 박해 때 사람들이 보면 카타콤에 내려가서 모이지 않습니까? 거기는 지형이 이상해서 수없는 굴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길 잃어버리고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어딘지 아직까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모여서 사람들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역사를 보더라도 이제 이 교회는 기본적으로 지금처럼 이렇게 동아리가 지어져서 지교회로 모이는 그것이 아니라 지역 전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면 갈라디아 교회가 어디 몇 번지 몇 호에 큰 건물 가지고 서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의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연합을 갈라디아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은 노회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노회제도가 사실은 성경적인 기본적인 교회의 제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장로교회에서는 노회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노회는 기본적으로 목사는 노회의 회원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임면, 예를 들면 제가 열린교회를 개척했지만 제가 이 교회의 목사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척한 다음에는 노회에다 신청을 해서 ‘제가 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면 넌 누구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우리 교단에서 어떤 신학을 했고 우리 교단에 소속된 어느 노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 그럼 넌 우리 노회로 와라.’ 그럼 ‘저쪽 노회에서 저 이쪽 노회로 갑니다.’ 하고 오면 그럼 이쪽 노회에서 ‘네가 개척한 교회에 우리가 너를 담임목사로 보내주마.’ 하고 파송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목사에 관한 임면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다가 아무리 백 번 담임목사가 사표를 내도 노회에서 그것을 수리를 안 해주면 자기 직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는 다릅니다. 장로는 그 임면에 대한 모든 것들이 당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당회에서 장로가 ‘여러 가지 잘못된 일로 당신을 면직합니다.’ 그렇게 제명하거나 면직하면 그것은 교회의 결정 자체가 유효해서 그때부터 장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노회의 소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회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 안에서 어떤 분쟁이 일어났는데 교회가 스스로 교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는 노회가 바로 직접 교회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처벌할 사람은 처벌하고 그 다음에 해고할 사람을 해고하는 권한을 노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항상 우리들이 여러분들이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책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이 사랑과 경건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움직일 때 그 때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들을 존중하면서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나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보편 교회의 일부이고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는 같은 교단의 한 소속된 노회의 한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좌우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가는 협력과 이 사랑의 정신들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복음의 정신에 부합한 교회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나라에 침투한 자본주의적인 경향으로 말미암아서 교회 그 자체를 하나의 상점처럼 생각을 하고 상점들은 옆에 상점이 생기면 그 경쟁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한 그리스도 안에 한 지체이고 한 형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함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을 섬겨갈 수 있는 지체의식을 가지고 교회들이 자라가야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교회든지 사랑하고 그리고 그 교회들을 축복하고 비록 이단이 아닌 한 그들이 우리와 신앙고백이 비근본적인 조항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인격과 자세들이 필요하단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비난하고 그러는 것은 너무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는 여태까지 20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며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주위에 있는 교회를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 다음 주요회의 또는 대회의, 지교회가 교회의 연합성을 보다 잘 이룩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 노회나 대회 같은 대회의가 필요합니다. 노회는 당회가 모여서 노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노회가 모이면 총회가 됩니다. 그런데 총회로 하기에는 너무나 작을 경우에 따로 묶어서 대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교회가 있는데 전 세계를 묶고 싶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다 묶으면 모두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교회는 몇 만 교회입니다. 총회가 됩니다. 미주에 있습니다. 그것은 몇 천개 교회 밖에 안 됩니다. 거기도 총회로 만들면 교단이 둘로 나눠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는 대회라고 부르면 중요한 결정들이 총회에 복속되면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가진 회의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보통은 당회, 노회, 총회 이렇게 되는데 경우에 따라서 당회, 노회, 대회, 총회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위의 상위회의의 결정은 아래의 기관들을 귀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때로는 위의 기관에서 하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썩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래도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잘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교단에는 세례교인 분담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무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는데 전에 한창 비쌀 때 한 사람 당 만원이었습니다. 한 교회에 서울은 만원, 지방은 7000원, 소득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겠습니까? 세례교인이 예를 들면 한 2500명쯤 된다고 한다면 매년 2500만원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걷어서 총회에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잘 안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쪽에서 서류를 안 떼어줍니다. 회비를 안냈기 때문에 예를 들면 무슨 증명서를 안 떼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숫자를 조금 줄입니다. 너무 많으니까. 그것 와서 조사하는 것 아니니까 세례교인 몇 명이냐고 하면 2500명인데 1400명쯤 된다고 해서 1400만원만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계산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 해 전에 어느 직원이 목사님 너무 아깝습니다. 좀 줄여서 내시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하자 그래도 너는 목사님 열린교회까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야지 네가 열린교회에서 목양 받은 형제지 그렇게 하면 되겠니? 하나님은 정직하기를 바라시는데 그러면 되겠니? 했습니다. 세금을 이중장부 쓸 수 없어서 36억 달라는 39억을 주고 산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천만 원 깎으려고 하면 되겠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겠니? 그 다음부터는 칼입니다. 정확하게 합니다. 우리교회가 100% 부가세 내는 것 아십니까? 충격 받으실 것입니다. 잘 모르셨나 봅니다. 아십니까? 모릅니다. 저 피아노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하려는 것입니다. 저 피아노 사러갑니다. 그러면 얼마 달라고 하겠습니까? 얼만지 잘 모르겠는데 한 300만원? 저것은 좀 쌉니다. 방송장비를 3000만 원짜리는 샀다고 칩시다. 이거 얼마에요? 해서 3000만원이라고 해서 가져오세요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가져옵니다. 그럼 3000만원 주세요 그럽니다. 3000만원을 주는데 우리 교회에는 세법상의 영수증이 아니면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현금영수증을 가져와야 합니다. 현금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3350만원을 내지 3400만원 아주 맘 좋은 사람은 3300만원 달라고 합니다. 아니 아까 3000만원 달라고 하지 않았냐고 하면 부가세를 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현금영수증 끊으면 그것이 세무서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 회사에서 방송장비 한 대를 팔았다는 것이 통보가 됩니다. 한 대 판 것에 대해 300만원 부가세가 나오고 소득세가 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은 사람들은 3300만원 가지고 안 되고 3350만원이나 3400만원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아까 분명히 3000만원에 준다고 했는데 지금은 3400만원을 달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형제 일어나보세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인은 그런 경우 있습니까? 그런 경우 없습니까? (들리지 않음) 회사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양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 입니까? 그러면 우리끼리 그건 상관없다 어쨌든 3000만원 받았다는 것만 정확하게 적어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탈세를 한 것입니다. 그 마지막 물건을 취득한 다음에 10% 부가세를 낼 의무가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가세 10%를 낼 납부 의무자가 누구입니까? 최종소비자 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쓰는 사람이 내는 것입니다. 제가 방송장비를 사다가 가공을 해서 다른 곳에 팔면 제가 낸 부가세를 돌려받습니다. 그것이 부가세 환급제도 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제도 아니면 안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일 하다가 3만원까지는 아무 영수증 가져와도 교회에서 돈을 주는데 3만원이 넘으면 간이영수증 가져오면 교회에서 돈을 주지 않습니다. 현금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아니면 카드 영수증, 세무서에 신고 되는 영수증 가져와야 됩니다. 그것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어 죽겠는데 방송장비를 가져왔는데 3000만원 짜리 영수증을 달라고 하니 3400만원을 주셔야 됩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은 400만원 주고 영수증을 사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접겠습니까? 그것을 교회는 여태까지 정확하게 400만원을 주고 영수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은 침만 튀면 되는데 실제로 나가서 그렇게 살려면 피가 튀어야 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한 번 언론사에서 와서 깜짝 놀란 것입니다. 다다음주에도 공인회계사들이 들어와서 감사합니다. 1주일 동안 내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예를 들면 A라는 곳에 써야 되는데 왜 B에 썼을까 이런 것은 사람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이 돈을 적법하게 썼다는 점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게끔 그렇게 교회의 장치를 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완벽하게 되어있고 열린공간에서 여러분들이 차 한 잔 마시고 와도 정확하게 세금 계산해서 세금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는 돈이 1년에 몇 억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깝습니다. 그 돈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구제하면 말입니다. 근데 그것은 훔친 돈입니다. 구제를 하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아껴서 해야지 훔친 돈 가지고 구제하면 되겠습니까? 교회가 이 세상의 불의를 꾸짖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빛으로 살아야 할 교회가 그렇게 하면 되겠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 땅 살 때도 36억을 달라고 했습니다. 36억 주고 사자 그랬더니 30억은 현찰로 주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랍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이 땅을 워낙 싸게 사서 그렇게 안하면 자기네가 세금을 너무 많이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금 얼마를 더 내야 되냐고 물으니까 3억을 내야 된답니다. 그래서 '내가 차라리 3억을 더 줄께, 내가 목사가 되서 이중장부를 쓰나' 말이 됩니까? 장부를 두 개를 써야 됩니다. 하나는 세무서 갖다 줄 장부고 우리끼리 볼 장부를 따로 써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에서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 땅이 그런 사연이 달린 땅입니다. 3억 더 주셨구나가 아니라 저 땅 살 때 교회 통장에 1500만원 있었습니다. 그 3억 더 준 것을 대출받아서 준 것입니다. 어쩌면 아직 못 갚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괜히 열 받았네, 본론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 그 다음 페이지 넘어갑니다.
교회의 회의는 본질상 교회적 사건들, 줄 치세요 중요합니다. 교리와 도덕, 교회의 정치와 권징에 관한 문제들만을 취급합니다. 그러나 대회의는 성질상 소회의에 속하나 어떤 이유에서 거기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성질상 소회의의 영역에 속하나 일반 교회의 관계된 사건들까지도 다루게 됩니다. 그리고 대회의의 결정은 권고적이라고만 솔직히 선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권위적인 것이다. 중요합니다. 3. 권세 교회의 권세는 영적 권세이다. 줄 치세요. 그 이유는 첫째,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둘째, 성령의 권세의 표명인 동시에, 셋째, 신자들에만 관계되며, 넷째, 영적인 방법으로만 집행되기 때문이며, 예를 들면 아니 집사님은 도대체 왜 주일날 교회를 안 나오는 것입니까? 벌써 3주째 빠졌습니다. 지하실에 3일 구류. 구역장인데 구역모임을 몇 주 인도 못하셨다고요? 4주요? 그러면서 무사할 줄 알았습니까? 그 직을 박탈하고 곤장 4대,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이제 목회의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장년이 모이는 3000명 교회를 돌보고 있는데 나는 만약에 회사의 회장들이 하는 방법과 같은 것으로 다스리라고 하면 30000명도 훨씬 쉬울 것 같습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만둬 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더 좋은 사람 불러오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충성하면 승진시켜주고 집도 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안 됩니다. (노래: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일이라고 생각하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의 몸이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나를 여기에 세워서 교회를 돌보게 하신다 이런 마음을 목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며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속에 채운다고 생각할 때에 그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한 교회의 권세는 대리적 권세인데 5. 이 권세는 그리스도에게 나온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3가지로 나눈다. 첫째, 교훈권, 치리권, 봉사권. 첫째, 교리권 이것은 진리와 관계된 것입니다. 교리권은 무엇인가 하면 가르침과 관련된 것입니다. 치리권은 무엇인가 하면 교회의 순결과 관련된 것입니다. 무슨 순결이 있는가 하면 진리에 대한 순결, 삶에 대한 순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와 도덕에 관한 것입니다. 교리에 관한 것은 진리에 대한 순결, 도덕에 관한 것은 삶에 대한 순결 이렇게 됩니다.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치리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올바로 믿지 않을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그래도 고집할 때에는 그를 징벌해서 제제하고 교회에서 아예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덕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 그런데 현저하게 잘못했을 때, 그리고 거기서 돌이키지 않을 때 그를 징계하거나 심하면 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보이는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치리권입니다. 살펴보겠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며 줄 치세요 오고 오는 세대에 진리를 신실하게 전하고 불신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진리를 보수하도록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을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전파해야하고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하며 장래의 사역자들의 훈련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합니다.
첫 번째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다음에 첫째, 말씀을 1. 전파해야하고 2. 신조와 신앙 고백을 작성해야 하고, 3. 사역자들을 훈련해야 한다. 전파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조와 신앙고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장래의 사역자들의 훈련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 믿어도 우리는 이런 것을 믿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남겨 두어도 그대로 살고 가르칠 수 있는 말씀의 지도자들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교회에서 잘 자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결심하게 될 때 가서 목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목자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님을 잘 알고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할 최고의 가장 중요한 투자입니다. 건물이 없으면 훌륭한 목회자가 나와서 열심히 목회를 하면 은혜를 받은 우리가 미리 건물을 만들어놓지 않아도 그 때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 건물을 만듭니다. 그리고 재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든 것이 있어도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잘 훈련된 목회자들이 없으면 미래의 교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 가지 여기 나오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무엇을 믿는지를 확실히 하고 이런 것들은 신조, 신앙고백, 신학 이런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런 일꾼들을 길러내고 하는 이 일에 헌신하는 것이 교회가 너무너무 중요하게 헌신해야할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으로 교회의 모든 것들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의 일의 적절한 규정을 제공하셨고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할 교회의 권세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이 교권은 권징의 권한도 포함합니다.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 있는데 1. 교인들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는 목적이며 입교는 무엇입니까? 교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교인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세례교인이 되는 것, 유아세례 받은 사람이 입교한 사람이 되는 것 등입니다. 출교,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혹은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서 되어야지 어떤 사람이 앉아서 너 가, 왜 그러니까 너 헌금도 안했잖아 가, 그러면 안 되지 않습니까? 넌 왜 만날 말도 안 들어? 무슨 말을 안 들었어? 뭔지는 모르지만 맘에 안 들어, 너는 교회 지을 때 돈도 안냈잖아 가, 그러면 교회가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그럴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분명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이 오고 나가고 하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케 함으로 영적교훈을 촉진시키려는 목적입니다. 병든 교인이 있으면 치료하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실패하면 잘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공적 범죄가 있으면 정신적인이 아니라 정식적인, 정식적인 고소가 없더라도 치리하여야 하며, 개인적인 범죄인 경우에는 언급된 규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 규칙이 무엇인가 하면 맨 처음에 형제가 범죄 하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들으면 다행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 다음에 두 세 명이 증인이 있는 가운데 다시 지적을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제 교회에 회부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하나의 복음의 정신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막 모든 것을 들춰내서 고발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의 정신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는 죄지은 것을 징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을 돌이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 되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 다음 봉사권, 이 봉사권이 사실은 권리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무인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봉사권이라고 넣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전도만 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모든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파송하셨습니다. 초대교인들 중에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은사는 사도시대가 지난 후로부터는 중단되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자선의 봉사는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는 데에 크게 국한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의무를 암시하신 바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실천하므로 아무도 생활에 궁핍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 후 공궤를 일삼도록 일곱 집사를 임명하며 그들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에게 직무를 공평하게 분배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후 집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특히 신약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물품을 모아 분배해주는 일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25과로 넘어가겠습니다. 은혜의 방편, 방편이라는 것은 수단입니다. 수단,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은혜로 다스리는데 그 은혜로 다스릴 때,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를 가리켜서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긴 참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은혜라 그럴 때 크게 3가지 범주의 뜻이 있습니다. 카리스(ca,rij)라고 합니다. 희랍어로 좋다 좋은 것 이런 뜻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구원의 길 자체를 가리켜서 은혜라고 부릅니다. 구원과 관련지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구원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주관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고 그 다음에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럴 때 은혜, grace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를 가리킵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 대하여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 좋은 뜻입니다.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호의, 지난주에도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중간고사에 미끄러진 사람들 다 구제해 주었습니다. 호의 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도 쓰이고 저렇게도 쓰이고 다 쓰이는데 사실 여기에서 은혜의 방편이라고 그럴 때는 여기 성화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씁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 이것이 두 번째 의미 입니다. '너 요새 진짜 은혜를 많이 받았구나, 어쩜 교회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니?' 아니면 '너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구나, 너 너무 좋은 사람이 되었어, 너 정말 요새 은혜가 떨어졌구나, 까칠해'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 사랑의 감화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에게는 이렇게 흔히 인격의 3요소라 그럴 때 무엇이 있다고 그랬습니까? 지, 정, 의가 있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지, 정, 의가 있는데 사실 정은 지성이나 의지처럼 명확하지 않습니다.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지와 의, 이렇게 두 개로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을 보고 '야 저것 좋다'라고 좋은 감정을 느낄 때는 이미 의지가 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맛있는 냄새'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 맛있는 냄새, 아 지겨워' 그렇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지겨우면 맛있는 냄새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이야기가 나오면 굉장히 깁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렇게 알지 않습니까? 아는데 우리들이 항상 아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는 것을 항상 아는 대로 살진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긴 아는데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저도 운동을 참 많이 못합니다. 워킹을 좀 하는데 요새는 그것도 바빠서 정신이 없습니다. 어젯밤에도 수련회 갔다 왔는데, 하여간 굉장히 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핑계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TV나 신문이나 "당신도 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림한 여자들 나오면 '나 이러면 안 될 텐데' 그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든다면 각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건 딱 되는 것입니다. 의지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의지가. 알긴 아는데 의지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엄청나게 열을 받았습니다. 화가 막 납니다. 퍼붓고 싸우는 겁니다. 그러다 마지막 내가 '이 말은 그래도 아무리 화나도 이 말은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격해지면 그 다음에 의지가 이 지성의 통제를 안 받습니다. 그냥 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게 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지성과 의지가 동일하게 힘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에는 밝음이 필요하고 이 의지에는 굳셈이 필요합니다. 이 굳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그것을 굳세게 해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굴삭기차가 20대의 젊은 여성을 덮치지 않았습니까? 너무 불쌍했습니다. 아이를 끌어안았는데 아이는 안 죽었습니다. 자기만 죽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보호해야겠다는 의지의 굳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나긋나긋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강한 힘을 가진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그런 말을 합니다. "헤엄을 못 치는 아버지가 물에 빠진 자식을 보고 뛰어드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이긴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이 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잘 깨닫고 밝음을 유지하고, 그 다음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꺼이 순종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경건의 핵심입니다. 요즘은 이거 이거 없이 그냥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욕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능합니까? 한 쪽 뺨을 때리는 사람을 향해 한 쪽 뺨을 또 내밀고 오 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 리를 가고,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밝은 빛과 성령의 놀라운 은혜,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은혜를 전달해 주는 수단을 가리켜서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방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1. 그 다음이 성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은혜의 수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 카톨릭에서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을 성례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말씀이 토대가 되었을 때에 성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때의 성례가 진정한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 줄 치십시오. 은혜의 방편이란 말은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교회가 사용하기로 한 방편의 표명이라는 뜻으로 사용이 된다. 이렇게 따지면 기도가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하면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할 때, 인격적인 말씀, 다시 말하면 삼위 중 이위나 혹은 창조의 말씀을 말하는 ?? 성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이것을 가리켜서 발화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발화된 말씀 그것을 특별히 공급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여기서 말씀이 무엇이냐고 할 때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라고 하면 안 되고 그것이 아니라 발화된 말씀, 성경에 포함되어 있고 교회에 전해진 하나님의 발화된 말씀 이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므로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입니다. 강조할 점은 전파되는 말씀인데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해지는 것이니 가정에서와 학교에서 대화나 종교적인 문학의 방편으로 소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만이 아닙니다. 경건서적이나 이런 작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들이 전달이 되면 그것을 읽으면서도 회심할 수 있고 은혜 받을 수 있고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모두를 넓은 의미에서의 말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야만 은혜의 방편의 효과가 됩니다. 그 말씀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키는데 충족하진 않지만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성령은 믿음과 회심을 일으킬 순 있지만 말씀을 떠나서 다시 말해서 말씀을 사용하지 않고 통상적인 역사를 하지 않습니다. 말씀 전파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핵심은 성령과 발화된 말씀 사이에는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말씀은 결국은 성경인데 그 성경은 둘로 나뉘는데 신약과 구약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인데, 그 율법과 복음이 신구약 성경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율법만 신약에는 복음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신약에는 복음, 구약에는 율법이 담겨 있지만,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고 복음 안에도 율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 은혜의 방편으로서 율법은 1. 죄를 자각하게 하며, 2.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를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고, 3.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게 하시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1번 율법은 무엇인가 하면 죄를 자각케 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법이 있어야지만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지 않습니까? 율법의 역할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떻게 보면 고마운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가 명백하게 잘못했는데 그런데 율법이 없으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율법은 그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기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을 우리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 이렇게 이렇게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몽학선생이 되게 하시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몽학선생이 무엇이냐 하면 한 번 설명 했는데, 그 이야기입니다. 옛날 영화에 보면 귀족집안에서 도련님 데리고 종이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이긴 하지만 도련님보다 훨씬 아는 것이 많고 세상 물정을 잘 알아서 도련님한테 가끔 야단도 치지 않습니까? “도련님 오늘도 학교에서 장난치셨어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인어른께 이를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가 다 자라서 성인이 되면 그 몽학선생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4. 율법은 신자의 생활의 규칙이므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줍니다. 복음, 복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바, 구원의 방도의 명백한 표식입니다. 이 복음을 가장 짧게 요약하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술입니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의 방도의 명백한 표식. 1. 복음은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며, 2. 믿는 자에게 구원의 모든 축복을 약속해줍니다. 3.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례의 일반적 고찰,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거기에 이제 성례와 말씀의 관계가 나오는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한 방편으로 완전합니다. 그러나 성례는 말씀을 떠나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카톨릭과 반대인데, 카톨릭은 성례가 구원의 필요한 전부라고 가르칩니다. 말씀과 성례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1.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데에 비해, 성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꼭 사제가 아니더라도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세례가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세례 받았어도 천국에 갈 수 없고, 그가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했으면 세례 받지 않았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죽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세례를 달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도 없는데 그 사람에게 무조건 세례를 준 것이 무슨 효력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들은 애틋한 마음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며 강하게 하나, 성례는 믿음을 강하게만 한다. 성례는 사람들이 와서 신앙고백을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물을 뿌리지 않습니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미신적인 행위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압니다. 한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와 함께 물속에 장례되어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은 거기서 다시 부활하여 일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그런데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 그 세례 받는 과정 자체가 너무 장엄한 한 폭의 그림입니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영혼에 신비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공로가 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C. 말씀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반해,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은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전파하여야 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들어야 할 대상이지만 성례는 신자와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 후손은 여기서 유아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후손들을 위해서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성례의 구분, 성례의 구분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 외적 혹은 가변적 표시, 그 다음에 내적, 영적 은혜의 표징, 세 번째, 표시와 표징의 연합 이렇게 됩니다. 외견적 표시, 성례는 모두 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세례는 무엇을 사용합니까? 물을 사용합니다. 그 물이 무슨 물이어야 되냐고 묻는데 그냥 물이면 됩니다. 요단강에서 떠온 물로 세례 받았다고 하는데, 잘났습니다. 요단강 물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십니까? 성지순례를 갔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갔는데, 가서 가이드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쭉 앉혔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여보, 왜 우리는 요단강에 안 데려다 줘요? 요단강 데려다 줘요 빨리” 그랬더니 “사모님, 그 뒤가 요단강입니다.” 보니까 요만큼입니다. 이쪽에서 건너편으로 마음먹고 뛰면 건널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누루퉁퉁한 물입니다. 상상을 다시 하고 싶지 않는 색깔의 물이 흐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워낙 나라가 작아서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과장합니다. 도랑은 강으로, 그리고 광야는 벌판, 벌판도 너무 커서 광야는 조금 큰 뜰, 그 다음에 산은 언덕, 그 다음에 조그만 호수는 바다, 갈릴리 바다, 갈릴리 호수는 직경이 70km 쯤 되고, 폭이 한 4km 정도 됩니다. 그것을 누가 바다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다면 동해바다는 무엇이겠습니까? 우주입니까? 계곡 그러면 골짜기입니다. 어쨌든 하여튼 과장이 심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거기서 세례 받으라고 하면 고려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도저히 못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물이면 됩니다. 물이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음료수는 안 되냐고 하는데, 성경에 음료수를 쓰지는 안잖습니까? 그러니까 물, 물이면 됩니다. 그 물이 수돗물이냐 생수냐 에비앙이냐 샘물이냐 광천수냐 하는데 아무 물이나 상관없습니다.
그 다음 성찬에서는 무엇을 씁니까? 떡과 포도주, 어떤 사람은 떡이기 때문에 떡을 써야 된다고 해서 옛날에 교회 목사님이 시루떡을 만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루떡을 모릅니다. 아르토스(a;rtoj)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그냥 이스트 넣지 않고 구운 빵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카스텔라 사다가 아침에 비닐봉지 뜯어가지고 열심히 또 잘라서 씁니다. 안될 것은 없지만 정성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기리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도주를 가을마다 담근 것입니다. 그리고 떡도 직접 만듭니다. 누룩 넣지 않고 만들어서 삶아서 쓰는 것입니다. 그 정도 정성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fm으로 만들어놓고 믿음으로 안 참여하는 성찬보다야 가게에서 사다놓고 믿음으로 참여하는 성찬에 더 은혜가 많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외적인 요소만을 받은 자가 성례를 받았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성례가 의미한바 모든 것을 받은 것은 아니며 성례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B. 내적 영적 은혜의 표징, 이 표징은 성례가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것으로 내부적 요소입니다. 1. 이 요소는 믿음의 의, 2. 사죄, 3. 믿음과 회개, 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렇습니까? 예를 들자면 원래로 말하자면 나중에 나오지만 물을 뿌리는 것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원래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신앙을 고백하고 물속에 들어갈 때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먹으면서 이 먹는 떡과 포도주가 몸속에 들어간 다음에 몸속에서 분해되어서 우리의 몸에 일부가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우리가 그렇게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을 때에는 떡과 포도주가 별개의 것이었지만, 들어간 후에는 내 몸속에서 떡과 내 몸이, 포도주와 내 피가 나눠지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당시 떡과 포도주는 그 사람들의 주식입니다. 그것을 등가 번역으로 하면, 사실은 그것이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우리로 말하자면 물과 밥이 되는 것입니다. 물 없이 살 수 없고, 밥 없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물과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리스도가 나의 물과 밥이다 혹은 떡과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떡과 포도주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표시와 표징과의 연합, 이것은 실제상 성례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지는 곳에는 은혜가 동반됩니다. 성례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제도로써 이 제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은혜가 감각적 표시에 의해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확정되고, 적용되는 것이며 신자들은 하나님께 그들의 신앙과 순종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적 표시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물, 그 다음에 떡과 포도주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면 사실은 성찬을 하는 그 시간에 설교가 필요 없습니다. 그 자체가 웅장한 설교가 됩니다. 그 자체가 아주 웅장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성례의 수, 구약시대에는 두 가지 성례, 즉 할례와 유월절 예식이 있었습니다. 할례는 남자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팔 일만에 표피를 베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포경수술입니다. 그것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우선 첫째로는 언약 백성의 표를 남자의 생식기에 새김으로써 자신들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생학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부인병을 비롯한 모든 것들에 대한 염려를 퇴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씨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족속이라고 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할례제도였습니다. 이 할례가 있고 그 다음에 유월절 예식이 있습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유월절 예식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구속사적으로 세례와 연결이 되고, 유월절은 어느 정도 성찬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은데, 그런 신학적인 연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시대 때 제정된 것이었으며, 유월절은 모세, 이 두 예식은 구약의 제사제도와 조화되는 유혈성례였습니다. 신약 때도 역시 두 가지 성례, 무혈예식인 세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완전히 희생을 드린 후에는 더 이상 피 흘림이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부당한 방법으로 여기는 칠성사입니다. 그래서 세례, 성찬이 있고, 그 다음에 견진 성사, 이것은 성령 세례는 받는 것입니다. 견진이라는 것은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견고해진다는 말인데, 성령세례가 예식을 베푼다고 해서 성령세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해성사는 신부에게 고해실에 가서 얼굴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신품, 이것은 서품이라고도 하는데 사제가 되는 안수식입니다. 혼배성사는 결혼, 그 다음 종유 혹은 종유예식 혹은 도유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베풀어주는 기름 바르는 예식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성례로 취급을 합니다. 카톨릭에서 보면 결혼식이 개신교보다 훨씬 더 엄중한 것이 느껴집니다. 개신교는 너무 채신머리가 없습니다. 아이들 오락회 하는 것처럼 저는 못하게 합니다. 제가 주례서는 곳에서 가능하면 못하게 하는데 가끔 가보면 명랑오락회도 아니고 저렇게 하나, 주례서는 사람도 농담하고 뽀뽀하라 그러고, 낄낄대며 자기들도 웃고 저는 너무 싫고, 그런 것들이 개신교의 품위를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아십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가 성례라고까지는 생각을 안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이지 않습니까? 경건하고 엄숙하고, 사람들이 와서 보았을 때 뭔가 위엄이 있고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개신교는 그런 점에서 참 가볍습니다. 반성을 많이 해야 됩니다. 결혼식 주례 설 때 신부에게 제가 만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마. 울면 사연이 있는 결혼식 같고, 웃으면 푼수 같아서 부모님 마음에 상처 된다.’고 하지 말라 타이릅니다.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의 비교, 로마교회는 본질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구약 성례는 예표에 불과함으로 받는 자의 법적 지위에만 영향을 주고, 받는 자의 영적 상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받는 자의 신앙에 의해 영향이 좌우된다고 봅니다. 신약 성례는 받는 자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이 없이 성례 행위에 의해 영적 은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그 영적인 은혜를 주고 말고 하는 그 권세를 누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제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받는 사람의 믿음에 의해 신앙의 상태에 의해 그 유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찬을 받으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먹고 나서 계속 조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믿음으로 참여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의점이 있기는 합니다. 구약 성례는 영적 의미 이외에 국가적 국면이 있으며, 2. 구약 성례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하는 데에 비해, 신약 성례는 완성된 희생의 회고입니다. 구약 성례는 성례 받는 자에게 신약 성례가 주는 정도의 영적 은혜의 풍부한 양을 전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네, 그 정도 입니다.
그 다음, 세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례식을 정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세례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세례를 줄 때,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 자, 아무아무 개에게 그 다음 무엇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안에서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성경에 보통 무엇이라고 나옵니까?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번역이 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밥티제테(bapti,zete)라는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뱁티즘(baptism)이라는 영어가 여기서 나옵니다. 너희는 세례를 주거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이스(eivj)는 속으로 입니다. 무엇 무엇 속으로 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어의 in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into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엔(evn)이라는 단어와 에이스(eivj)라는 단어 전치사가 둘이 있는데, 엔(evn)은 정지 상태에 있는 in의 개념이고, 에이스(eivj)는 침투해 들어가는 into의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으로 표현하면, A는 이렇게 있는 것이고, B는 이렇게 되서 침투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는 사실 분사 형으로 나오는데,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그 다음에 제자를 삼고하는 이 모든 것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을 이야기하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알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나 목사가 성부 성자 성령을 대신한 권위를 가지고 그의 대리자로서 너에게 세례를 준다 이런 뜻 아닙니까?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 그런 것 아닙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세례를 줌으로써 내가 이런 성부 성자 성령의 권세를 가지고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세례를 주는데 이 세례가 어느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 이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다 이런 뜻입니다. 이해 되셨습니까? 그래서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는 자 아무개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렇게 굳이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주는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과의 연합 속으로 이 세례 행위를 통해서 이 사람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꼭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례의 형식을 규정하려 하지 않으셨지만, 교회가 그 필요성을 느꼈을 때에 제정의 말씀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현재의 형식은 2세기 초 이전에 사용된 것입니다. 신교에서는 공인된 목사에 의해 삼위일체 하나님 이름으로 시행되는 세례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반하여, 로마 카톨릭은 세례를 구원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아기가 위독할 때에는 다른 사람도 세례를 베풉니다. 이 세례는 교회법상으로 담임목사만 베풀 수 있습니다. 부목사님도 세례를 베풀 수 없습니다. 교회의 법입니다. 이것은 아마 교회의 어떤 입교의 질서를 확연하게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제도라고 여겨집니다.
세례의 양식, 세례의 양식은 두 개입니다. 침례냐 관수냐, 침례는 물에다 풍덩 담그는 것이고, 관수는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물로 뿌린 것은 세례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의 근본적인 관념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고 주장하며, 세례는 침례에 의해서만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러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 성결이 세례의 상징에 있어서 본질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문제가 아니라 성결이다 이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침수와 마찬가지로 물을 뿌리는 형식이나 붓는 형식에 의해서도 상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밥티조(bapti,zw)라고 하는 세례를 주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구약에 가면 70인역에 ‘찍다’로 나옵니다. 떡 같은 것을 꿀에다 찍을 때도 밥티조(bapti,zw)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따라서 세례의 양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례는 침수의 형식에 의해 집례 될 수도 있으며, 붓거나 뿌리는 형식에 의해서도 집례 될 수 있습니다. 침례파는 신약이 침례에 의한 세례만을 정당시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의 어떤 형식을 제정하지 않으셨고, 성경은 양식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baptise 라는 말은 담그다 만이 아니라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침례에 의한 세례라고 확증할만한 예를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갑자기 세례를 받게 된 경우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같은 경우, 그런 경우에 어떻게 세례를 줬겠습니까?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3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는데 요단강에 3000명 못 들어갑니다. 나는 장로교 목사지만 침례를 줄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합니다. 침례를 주는 것을 우리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침례가 아니면 그것은 세례가 아니니 세례를 다시 받으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결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형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에 보면 이것을 어떻게 했냐면 목회자가 세례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얇은 옷을 입히고 들어가는데, 이것이 여자일 경우 일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침례를 받을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선 아예 목욕탕처럼 만들어놓고 거기다 집어넣는데, 글쎄 그렇게 하려면 위에서 물을 많이 부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많이 붓습니다.
세례에 합당한 대상, 세례는 성인과 영아에게 해당됩니다. 세례는 신자와 그의 후손을 위해 시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례 제정의 말씀을 성인 세례를 심중에 두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성인들부터 선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신앙고백이 세례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성인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고백이 이루어지면 그 진실성을 의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한 교회는 그 고백을 표면적 가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 가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하는데, 첫째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인가 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세례주면 안됩니다. 두 번째, 그가 정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는 것이 없으면 세례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학습이라는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히 할 수 있을 때, 그 때의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되는 것이지 지식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 받을 때, 우리 교회에서 세례 받으신 분 까다로웠지 않았습니까? 철저하게 외우지 않으면 안줍니다. 철저하게 의미를 깨닫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자기가 가서 아이를 낳을 때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영아세례 혹은 유아세례라고 합니다. 침례교회는 영아세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데 그 이유는 영아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신약에 영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없고, 그런 세례의 단순한 예를 기록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영아세례가 비성경적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한꺼번에 교리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동네 유치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여섯 살 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이제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신앙이 있으시니까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답니다. 천국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났더니 한 아이가 ‘아 천국 정말 좋겠네, 난 우리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할거야.’ 이 아이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이가 ‘천국이 그렇게 좋은 거야? 나 이제 착한 일 열심히 해서 천당 가야지.’ 이 아이는 알미니우스 주의자였습니다. 신인협력 구원론자 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행위론자 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또 옆에 있던 아이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나는 너무나 어려서 천국에 못 간대.’ 이 아이는 구원파 다니는 집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한 아이가 나왔습니다. ‘너희들 다 틀렸어. 천국은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갈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착한 일 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어리다고 못가는 나라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데?’ ‘회심해야 갈 수 있는 나라야.’ 열린 교회 칼빈주의자 였습니다. 실화입니다. 그래서 딱 전체 교리적 총회가 거기서 끝이 났습니다. 이단은 정죄되고 개혁교리가 섰습니다. 그러니까 구원파에서는 침례교 계통에서 자기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몇 살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지만 영아에게 구원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영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보겠습니다. a. 영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영아 세례는 성경의 단일한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상의 산물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국가적 국면이긴 했지만 영적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유효하며 현 시대의 새 언약과 동일합니다. 영아들은 언약의 혜택에 참여했으며, 할례의 표를 받았고, 이스라엘 회중의 한 부분으로 계산되었습니다. 할례는 신약에 와서 언약에 들어가는 표와 증표로 세례와 대치됩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은혜로운 것으로 나타나므로 새 언약은 영아를 좀처럼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의 견해와도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는데 영아를 제외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b. 영아세례의 근거와 작용, 개혁파 노선의 어떤 학자는 영아가 가정적 중생,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아이가 앞으로 중생할 아이라는 것에 기초를 해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적 중생설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아는 중생의 약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총포괄적인 언약적 약속에 근거해 세례를 받는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후자가 우리의 입장입니다. 영아는 중생의 약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총포괄적 언약적 약속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후자의 견해가 보다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언약적 약속은 영아세례의 확실한 객관적 근거를 제공해줍니다. 영아세례가 어떻게 영적생명을 강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일어나는데, 이 대답은 영아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중생되었다면 세례는 그 시에 중생의 생명을 강하게 할 것이며, 세례의 의미가 보다 명백하게 된 이후에는 믿음이 강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작용이 세례의 시행 순간에만 필연적으로 제한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딱 되었습니다. 한 사람만 질문 받겠습니다. 오늘 15분만 일찍 마쳐드리겠습니다. 다음시간에 우리들이 27과 28과를 공부하게 되고, 다음 주에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종강파티에는 29, 30과 두 과를 하게 될 것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서 마지막까지 완주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