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 수련회 2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장 8절)
녹취자 : 조원정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사람의 마음은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지만 그중 하나가 목양이라고 하는 부르심을 감당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들이 많은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죽습니다. 젊었을 때는 옳음과 그름, 용기, 결단, 이런 것들이 주님 앞을 섬기는 주된 가치였다고 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연륜이 깊어지면서 이제 용서 사랑 그런 등등의 과정들을 거치는 거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도 이렇게 보면 맨 처음에는 지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창기 설교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또 철학에 대한 신뢰가 워낙 강해서 심지어 베라리리기오네 같은 책에서는 플라톤의 글들을 보면서 글자 몇 글자만 바꾸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까지 과장을 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교회에 감동이 됩니다. 이제 교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말씀에 세계를 펼치게 되는데 인생의 말년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탐구하는데 자기의 신명을 바치게 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런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하고 봉사할 때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항상 우리의 마음에 들고 우리의 생각에 맞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리의 마음에 들 때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못 맞추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에 맞을 수 있겠으며 아마 우리의 마음에 꼭 맞는다면 그 사람 썩 좋은 사람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에 결점과 결함이 많으니까 언제나 우리와 일치를 이룬다면 혹시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 아첨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우리는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는 목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목회를 하면서 마음을 털어놓을 성도가 없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털어 놓지 마십시요. 우리가 목양을 하면서 그런 기대를 갖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성도들은 우리가 의지하여야 할 대상이거나 우리가 신뢰하고 그래야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그런 심리자체가 자기 안에 하나님 자신으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어떤 고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이 우리 가운데에 가득할 때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거는 기대가 자아중심적인 기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의 희생을 덕 입어서 그래서 주님께 만족을 드리는 사람이 되면 자신은 잊혀져도 상관없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참된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회에서 오는 여러 가지 많은 시련과 상처라 그럴 건 없지만 어쨌든 힘든 시간들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실망하지 않는 것, 이것이 목회자에 아주 중요한 자질, 덕목 가운데 하나다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나는 대체로 목회하면서 성도들에게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목사님 교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들으니깐 그렇죠. 그게 아니라 기대를 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간에 우리들이 목회할 때 당신만을 의지하는 목회가 되길 원하시지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십니다.
어제도 박희찬 목사님의 설교와 강의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될 가장 중요한 자격이 주님의 사랑하는 착한 인격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과 그리고 바람, 그리고 우리의 모든 보상은 우리 주님 자신입니다. 설교자는 누구인가라는 설교 속에서도 그렇게 주인에게 충성했는데 근데 결국은 얻어맞고 구타당하고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보내는 대도 죽여 버립니다. 근데 그거는 결국 뭘 보여주냐 하면 주인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에 비유한 것인데 설교자의 참된 보상이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인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되지 마십시요. 털어 놓지 마십시요. 털어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에 이 길 들어섰을 때, 무슨 성도들이 우리를 불러서 이 길을 들어선 것도 아니고, 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한 확신이 오는 게 목회자와 아주 친근하게 지내는 것은 성도의 영혼에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청교도들이 경고하는 가운데 영적인 변화를 못 받는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목회자와의 친교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인간적으로 너무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니까 이렇게 정식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과 복음에 대해서 말할 수없는 그런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교구에서든지 아니면 부서에서든지 교사들이나 일꾼들하고 친교를 갖고 또 지체들이 그렇게 좋은 친교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항상 지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고 그거자체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변화를 위한 그런 하나의 영혼의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런 하나의 환경으로서의 그것입니다. 중심 그 자체가 영혼의 참된 변화가 없으면 성도의 교제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일체되지 않는 그 속에 무슨 교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이제 사도가 얘기하는 것은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그랬습니다. 어떤 환경이 핍박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큰 고난의 때였잖아요. 그런 큰 먹구름이 밀려오는 고난과 어려움의 때에 그때에 교회에 지체들을 서로 결속시키고 믿음으로 하나 되게 만들고. 만물의 마지막에 가까웠다. 그때에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한편으로는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너희들끼리 뜨겁게 사랑해야한다. 왜냐하면 나가서 마주치는 환경이 큰 핍박과 환란입니다.
교회 왔을 때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그 지체들 속에서 그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 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교제하고 하는 이것이 일주일동안 자신이 살았던 삶과는 다른 질의 사회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때에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라고 하는 거 그 자체는 관계를 계속하고자하는 경향성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나 하면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과는 자꾸 관계를 맺고 싶어 하고 이미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는 그 관계에 만족 하지 아니하고 심화시키고 발전시켜서 더 많은 교통을 누리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경향성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이죠? 우리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랑이라도 세속적인 사랑은 우리와 관계를 맺어서 우리가 만족을 얻기 위한 그러한 관계인데,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서 그 사람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 사람도 릴 수 있게 하고 싶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그리스도 바깥에서의 사랑의 차이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 주위의 있는 사람과 끈임 없이 관계를 모색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속에 그런 주님의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러한 복음의 ?? 그 다음에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참된 뜻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목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이 많게 되면 저 사람이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바라고 신앙이 더 깊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 사랑이 없게 되면 저 사람이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든지 말든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결과중 하나는 사랑의 관계와 목회사역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그런 사랑을 펼쳐가고 관계를 새롭게 맺고 지속하게 되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어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내의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아주 과격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서서히 변화되어가는 그런 성화의 과정 속에서 기독교의 참된 본질들을 하나씩 알아갔고 그것이 오늘 신약성경에 대부분의 서신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목회사역 우리의 신학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깨트리면서 그 속에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 쏟으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목회사역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신학에 있어서 수준의향상과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은 참다운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압니까? 무엇인가 자기를 하나님 말씀 앞에 깨트려서 목회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하질 않고 자신은 이 모습 이대로 충분하고 자기가 목회에 있어서 소위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인 환경 탓이고 혹은 방법의 부족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몇 가지 요소만을 보태거나 고치면 마치 라디오 방송국에 채널을 돌리다 보면 정확하게 뚜렷한 방송이 잡히듯이 그렇게 목회의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분위기입니다. 그것은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런 목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목회는 끊임없이 깨트려지고 변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공부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아마 제가 설교한 많은 시리즈들 중에 가장 사랑하는 열 개의 시리즈 중에 하나일거라고 생각하고 진작에 책을 내고 싶었는데 아직 안내고 있는 이유는 좀 더 완성적인 형태로 그렇게 신학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는 그 책을 참 사랑합니다. 그 교리를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말씀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가만히 보면 아마 내가 목회를 하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교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수없이 찢어지려는 성도들 그리고 그냥 그만 두어버릴까 하는 마음이 솟구치고 그러던 모든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결국은 그 목회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만 고치실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고치시고 목회자를 고치시고 우리 모두 고통스러운 자기 깨트려짐에 과정을 통해서 그런 고통이 없었더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진리의 세계들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구나 그래서 가장 훌륭하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주님이 조금만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말씀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심오한 학문을 펼쳐간 천재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누볐던 사람이 결국은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참된 철학자다 여기서 철학자라는 말은 지혜자라는 뜻입니다. 참된 지혜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새롭고 또 새롭고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나는 어제 밤에도 잠깐 누워서 잠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생애가운데서 정말 쏟아지는 하나님의 성품의 빛 그런 것들을 나는 개인적인 부흥 이라고 하는데 누린 시간은 잠깐이었거든요. 그렇게 잠깐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의 쏟아지는 빛을 받았는데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하는데 하나님께서 많은 빛들을 지속적으로 쏟아부어주신 사람들의 지성과 마음을 어떠하였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도달하는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나가게 만드는 그것은 결국은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거, 이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탁월한 능력이 있는데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항상 자신의 목회 사역을 육체로 끝마치게 됩니다. 육체로 끝마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부르셔서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가실 때 오래도록 참아야 됩니다. 참는 게 어려울적 마다 내 마음을 가슴에 손을 얹고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그래서 자신을 항상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기를 정의하면 성도들이 자기를 싫어할 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존재의 목적에 어긋나는 대접을 받고 있잖아요.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서 나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며칠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가 정말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나머지가 뭐 그렇게 중요한 게 있을까. 왜냐하면 나도 그 속에 한지체로서 풀어져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고 소멸하는 존재일 뿐인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요. 저는 목사가 되기 전까지 내가 전도사로 오래있던 교회를 떠날 때까지 한 팔년 그 교회에 있었는데 참 연단을 많이 받았습니다. 떠나면서 신학교 갈 때에는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자신이 있었는데 가난한 삶을 견딜 수 있겠다. 그다음에 그 교회를 횟수로 팔년 있다가는 떠나면서 이 세상에 어떤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도 나는 목회할 수 있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런 자부심속에서 사실은 살았습니다.
열린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상당한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은 우리가 오래 참는 거 이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구나. 다른 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거로 대신 사용할 수 있고 그럽니다. 자신이 능력이 없으면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능력이 좀 모자라면 성실함으로 보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지능이 모자라면 체력으로 보강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오래 참는 것은 다른 것으로는 전혀 안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지 않으려고 하는 그거 자체가 결국은 자신 속에 남아있는 자기 아집이고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래 참도록 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으면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자기보고 자꾸 사도가 아니라고 그러는 교인들에게 나 사도 맞다. 증거가 있는데 내가 오래 참잖아.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참을 수가 있겠느냐 고백을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됩니다. 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고백을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그 교회가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그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이 보편 교회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내가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살다가 보면 교회에 이런저런 안 좋은 모습들이 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교회가 많이 타락해서 그래서 이 세상의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나는 이러한 교회론으로 정리하면서 과거에 살아온 나의 태도에 대해서 많이 반성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 얘기하면서 너무 객관적입니다. 너무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부족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역자 한사람이 목사님 저런 교회는 이런 비리가 있고 저런 비리가 있고 막 이야기를 해요. 이게 정말 가슴 아픈 소식들이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소식들을 잘 아는지 몰라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가 다 끝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소식은 잘 들었는데 자네가 난 모르는 소식을 들었으니깐 자네가 그 교회를 위해서 매일 기도 하거라. 사람들은 나쁜 일을 했지만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물론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런 저런 가슴 아픈 얘기를 거론하고 화제를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보편교회에 대한 아픔이 있어야 바로 그 사람들의 허물과 혹은 교회에 이 건전하지 못한 그 부패한 모습까지도 사실은 나의 일부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깊이 가슴아파하면서 기도를 해야 됩니다. 혹은 교단이 다르고 그리고 우리와는 신학 사상이 현저하게 달라도 그게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생각을 하고 오래참고 그리고 그들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됩니다.
요즘도 보면 교회에 이런저런 가슴 아픈 소식들이 많이 들리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이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더라고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천천히 하고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은 급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요번에 미국에 오면서도 어쩌면 도시마다 교회들이 그렇게 찢어지고 죽기위해서 마치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물고 뜯고 싸우는지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이 수치스럽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입니다. 깊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미국의 교회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그들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때 자신의 영혼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렇게 오래 참는 것이 중요한데 결국은 오래참지 못하고 이렇게 많은 교회들이 고통하게 되느냐.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오래 참도록 만들어 줍니다. 마음속으로 오래 참아야 한다고 생각을 해도 은혜가 있으면 참지만 마음속으로 오래 참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당연히 결론을 내도 은혜가 우리 안에 없으면 그 참음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잠깐은 참을 수 있는데 결국은 인간의 혈기와 혈육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참고 오래 참는다는 말을 우유부단해지고 속수무책으로 견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하시는 그런 길들을 우리들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장 가까운데서 부터 성취되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게 그거에요. 아내나 남편에 대해서 오래참고 오래 참음에 혜택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가족을 향해 오래참고 여기에 결혼한 자매들 많이 있지만 부모님께 잘 해야 됩니다. 그 부모님께 그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참음으로 승리하는 사랑을 배워야 됩니다. 정말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사랑받는 자식들이 자녀들이 돼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가까운 가족들에게 오래 참음으로 혜택을 누리게 하고 동심원처럼 퍼져나가서 그런 사람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일꾼들을 계속 펼치면서 그러면서 사랑의 품안에서 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상처를 받았다 그러면 우리는 피해를 입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가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회를 하다 상처를 입었다면 일방적인 피해자가아니라 가해할 수 있는 성품에 상처가 아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목회를 하면서 상처를 받았다면 상처를 받은 크기만큼 가해의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순조롭고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을 때에 이게 이상한 환경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언젠가는 부패합니다. 여러분들을 반대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선물입니다. 얼
(예화) 얼마 전에도 하정부목사가 50억이 있어야지 교회를 건축하는데 그래도 한 35억은 나오겠지 하고 건축을 했는데 26억밖에 안 나왔다고 내가 이런 놈들을 위해서 이렇게 마음을 기울여서 목회를 한다고 막 배신감이 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아라. 그리고 많이 나온 거다. 내가 그랬습니다. 20억 좀 더 나올 껄 그랬는데 26억 나왔으니 많이 나온거고 그 26억 가지고 실망하지 말고 그 돈이 절대 다 안 들어와 80퍼센트쯤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되. 경험상, 그리고 아무리 야단을 치고 그래도 더 들어오지 않는다. 나 초창기에 막 야단쳤거든. 건축위원들이 헌금을 한 것을 어느 날 불러서 이것도 헌금이라고 했냐고 휙 집어던지고 다시 써와 이래가지고 그래서 조금 더 나오긴 했더구만. 교회 옮겨야 된다고 막 그러는 집사가 천만원을 헌금을 했길래 그 다음날 부부를 불러가지고 야단을 쳤습니다. 진짜로 혼자 설치면서 천만원이 이게 헌금이 뭐냐고 다시 해와요. 그 다음날 사천만원 헌금을 하더라고, 그때는 그걸 내가 막 자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창피해. 얼마나 못됐으면, 그랬더니. 목사님 우리가 건축 헌금한 걸 확 던지면서 다시해오라고 그러는데 우리도 기도하면서 했는데 그런 소리가 들려요. 그기도 응답 안 된 기도거든. 그러니깐 이게 기도응답이니까 다시 써가지고 와 그렇게 해가지고 팔천만원인가 얼마 더 걷었는데. 근데 그런 게 아닌 거 같아요. 그 후에 깊이 깨달으면서 마지막 할 때는 안 그랬습니다. 나도 똑같이 그런 배신감이 느껴져요. 그렇게 목숨을 걸고 교회 사랑한다 그러고 목사님위해서 평생 기도하다 죽겠다던 사람들이 날 위해서 살아도 좋으니깐 헌금이라도 좀하지.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분명히 있는데 안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막 요동을 치는 거에요.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요. 그리고 눈물을 주셔요. 그래서 얘야 돈 있는데 덜한 성도들 보지 말고 넘치게 했는데 적은 액수밖에 못 드린 성도들 기억 하거라. 그래서 그다 음날 건축위원들속에서도 틈이 갈라지고 이거 20억 가지고 어떻게 60억짜리를 하냐 그러면서 근심이 가득했을 때 10분 연설했잖아요. 10분 연설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녹여주셨어요. 울면서 연설했어요. 이렇게 돈이 있다면 당신들이 얼마나 많이 받쳤겠냐. 정말 하나님 앞에 가장 마음 아픈 것은 교회가 필요할 때 바치지 못한 것 아니냐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셨을 꺼다. 그렇게 해서 막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데 그런다고 해서 헌금이 더 많이 나온 것은 아니에요. 감동은 감동으로 그쳤지. 그 대신 나와 성도들의 영혼에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마음이 되게 했습니다. 그 큰일을 해나가는데 누구하나 마음 찢어지는 사람이 없이 하나님이 일치를 이루게 하셨으니까 그것은 돈 이상입니다. 그래서 깊이 참아야 됩니다. 그랬더니 엊그제 와서 그때 아주 적시에 충고를 해주셔서 마음을 다스리고. 그래야지 마음 다스려야지. 당회원들이 헌금액수를 갖다놓더니 그러더래요. 목사님 우리 감사합시다. 지을 수도 없고 안 지을수도 없는 금액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로 매달리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얘기를 헌금을 많이 한 장로가 얘기해야 되는데 대부분 그런 건 헌금 안 한사람이 그런 얘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래참으면. 그래서 나는 없다. 항상 힘들 때마다 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서 끝까지 사랑해서 여러분들 싫어했던 사람도 떠나고 나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들이 되야 됩니다.
한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담임 목사나 장로님들이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면 목이 메이는 사람들이 되고 한때는 여러분들을 싫어했던 사람들조차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참 그런 목회자가 없었다 생각하고 목이 메이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일겁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래 참으십시오. 목회사역이 여러분들을 속일지라도 참으십시오. 힘들게 할지라도 참으십시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