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목회자세미나 1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요 4:23)
녹취자: 이경순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성례를 중심으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어서 교인들이 예배당에 와서 깨닫는 것들이 별로 없던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예배를 배격하고 그리고 살아있는 생생한 예배를 드리므로서 이 종교개혁을 이루었던것입니다. 칼빈시대에 보면은 매일 예배드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매일 예배를 드렸단 말입니다. 매일 어떻게 일도 안하고 예배를 드리냐하면 아침시간 일찍 예배를 드리고 일터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개신교의 힘은 바로 이 예배의 힘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또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고 하는 것이 개신교의 힘이였단 말이죠. 그래서 이 개신교의 힘은 한편으로는 진리의 힘이고 또 한편으로는 은혜의 힘이예요 그래서 아주 명료하게 무엇인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며 깨닫고 그 깨달은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으로 깨달은 것들은 사상으로 잘 집적해서 그래서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되고 받은바 은혜는 은혜를 못 받았을때에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그런 삶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지의 힘이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윤리와 도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기독교가 특히 개신교가 많은 욕을 먹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없어요 사회적으로 전체적으로 부패하고 악을 향하여 가기 때문에 우리 목회자들이 무슨 별다른 사람들입니까 그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대속에 살면서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남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깨닫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이 세상은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마음속에서 힘찬 의지가 생겨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보면 사실 이 개신교의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개신교의 힘들을 잃어버리고 있는것 같아요 그것이 제일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러한 진리의 힘 이런 은혜의 힘들이 예배 속에서 집적이 되어서 사람들의 생각과 지성에 영향을 주고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그래서 예배 들어오기 전에는 흔들흔들하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갈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한 가지라도 알고 두 번째는 그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 결심이 솟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그렇게 못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것도 없이 예배시간에 모였다가 흩어진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의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다 영화구경을 가도 15분전에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15분전에 오는 사람들은 손꼽을 정도예요 5분전에 밀물처럼 밀려들어와요 그리고 여러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예배가 시작하면 20분될 때까지 양심의 가책도 없이 덜렁덜렁 교회당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예전에 주일학교때는 목사님이 항상 ‘당신들이 일주일에 두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교인인줄 압니까’ 그러셨어요 그땐 예배시간에 두시간이었어요 11시에 시작하면 1시 거의 되어서 마쳤어요 그런데 중학교쯤 들어오니까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1시간 40분 예배드리면 신자인줄 압니까.’ 1시간 40분 예배 드린거예요 제가 한 20년 전에 부교역자 생활을 할때 한 600명정도 모이는 예배당이였는데 비가오나 눈이오나 항상 12시 5분에 예배가 끝나요 11시에 시작해서 그러면 사람이라는게 노래를 부르다가도 흥이나면 길어질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예배시간이 딱 맞느냐 정확하게 마치는 것이 예배의 목표예요 그래서 하다가 앞에서 길어지면 찬송가 578장 1절만 부르겠습니다 라고 해서라도 시간을 맞춥니다 예배시간은 65분인데 순서는 23가지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뭐가 줄어들겠습니까 설교시간이 줄어들죠 그래서 설교시간이 25분정도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그 25분 설교시간도 성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설교를 듣느냐 하면 안들어요 2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면 목사님도 고개를 숙이고 원고를 읽고 성도들도 고개를 숙이고 주보를 읽어요 그것도 가지가지예요 사람들이 설교시간이 되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를 합니다. 그래서 주보를 갖다 놓고 틀린 글자를 찾아요 틀리글자 찾으면 뭐합니까 벌써 나왔는데 빨간펜으로 틀린글자를 찾고 옆에 사람하고 필담을 나누고 그렇지 않으면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또 하나님보다 어디 더 높은데서 왔는지 전화벨이 울리면 그거를 들고 예배시간에 바깥으로 뛰어나가요 핸드폰을 받으려고 , 여기저기서 삐삐가 울리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끄덕끄덕 졸기시작해요 그런가 하면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요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거기 하나님 안계십니다 지금 모두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말로 주일11시에 나와서 삽질하고 있는거예요 절대 거기 하나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거기오신다면 내가 가서 말립 겁니다 오시지 말라고 거기 왜 오시겠어요 그런 결과 어떻게 됩니까 교회당을 1년 2년 3년 5년 10년을 다녔는데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어요 아는거라고는 교회가서 어떻게 눈치빠르게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목회자를 섬기고 교회봉사하는것 정도밖에는 아는것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배를 인도하고 그리고 목회자인 우리가 밖에 나가서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성도들과 악수를 해요 악수할 때 뭐라고 악수를 합니까 ‘감사합니다.’그런데 뭐가 감사한줄 모르겠어요 뭐가 감사합니까 교회가 무슨 음식점입니까 와준 교인들이 감사하다 아니 그게 왜 감사한 겁니까 오히려 교회가 거기 있고 목회자가 봉사를 해주어서 감사한것이 아닐까요? 난 교회 개척하고 예배 끝나고 교회당 앞에서 한 번도 감사하다고 인사한적 없어요 난 전도사 생활 할때부터 그것이 불만 이었어요 왜 목사님은 마치 음식점 주인처럼 거기 서서 온 교인들의 손을 붙들면서 감사하다고 그러는 걸까 뭐가 감사하다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예배를 그렇게 인도를 해놓고 거기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 성도들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할수 있어요 그렇게 온 교인 인이 하나님을 못만났으면 목회자가 억울해서 강대에서 내려오지 말고 피를 토해야지 그러니까 이게 한 주 한 주 반복되면서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인간의 심령은 종교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때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부딪혀서 그를 깨뜨리면 새사람이 되어가지만 그렇게 마음이 깨뜨려지고 변화를 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면 잃어버릴수록 인간의 심령은 둔탁해지고 무디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처럼 굳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로서 한번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최근에 우리가 인도한 예배에서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된 적있습니까 예배가 끝났는데 모든 교인은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교인들이 차마 예배당을 떠나지 못해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에 큰 해 받으셨나
그렇게 감격에 겨워서 눈물 흘리는 교인들이 예배당에 남아있는 예배를 우리가 인도한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목사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죠 교회가 좀 커지면 이것은 목사가 도대체 기업체의 사장인지 아니면 목회자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저도 주일날 8시에 예배를 시작을 하면 2시간마다 연달아서 예배를 드려서 모두 끝나는 것이 다섯 시 반정도에 끝납니다. 그러면 다섯 시 반부터 결재를 맡겠다는 사람이 복도에 줄을 서요 그러면 그 결재 라는게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돈을 이렇게 많이 쓰냐 절약을 하자 이 행사는 꼭 해야되냐 이 물건은 꼭 구입을 해야 되냐 등등 어떤때는 예배드리면서 받았던 은혜의 마음이 그 사무결재하면서 마음이 상해요. 오늘날 같이 이렇게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서 어떻하던지 살아남기 위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미친듯이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교회도 끊임없이 경영적인 면에 있어서 애를 쓰지 않으면 많은 비효율이 발생을 해요 그런 점에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내가 이렇게 보면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이 사람 도대체 목사인지 사업가인지 마치 자기교회를 자기 개인 기업체처럼 생각을 해요 사람도 있고 돈도 있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꾸 큰 교회를 원하고 그담에 교인 많이 모이는 것이 마치 목회자 자신의 영광 인것처럼 생각하는데 영광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교회를 보는 것이지 교회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저 지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났는데 그곳 목회자들하고 대화를 하는데 그중 한분이 그러는 거예요 목사님 이 시골에는 이 지방에는 비젼이 없습니다. 왜요? 젊은이 들이 없습니다. 젊은이 들이 없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좋으시면 신촌에 와서 교회 개척을 해야지 대학옆에 가서 시골에 젊은 없는것은 너무 당연한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고 비젼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죠. 교회 성장도 안되고 그게 뭐 중요합니까 교회를 확확 성장시켜서 한번 몇천명모이는 교회를 하고 싶으면 신도에와서 교회를 개척해야지 시골에 있으면 안되죠. 그게 좋으면 젊은이들이 좋으면 연세대학교 이화여대,서강대 그 앞에다 교회를 세워서 한번 해보는 거예요 교인을 많이 모으고 싶다 그러면 시골에 있으면 안되지요 신도시에 가서 한번 설교해서 교인들을 모아야죠 소원이면 그렇게 하면 되겠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무슨놈의 비젼은 얼어죽을 비젼입니까 하나님이 내가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시골에 보내셨다 그런데 시골에 노인네 밖에 없다 그러면 당신들의 사명은 거기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전하고 노인 하나씩 죽으면 소독약으로 염해서 땅에 묻어주어서 천국보내는 것이 그것이 비젼이예요. 무슨 얼어죽을 비젼이예요 아 그러면 김목사님은 비젼이 없냐고? 무슨 비젼 입니까 비젼이 있으니까 방배동에서 평촌으로 이사를 하고 땅을 사서 교회를 짓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아니거든요 그랬어요 나는 지금도 강남으로 가고 싶어요 아니거든요 그러면 왜 그렇게 하냐고 아니 왜 그렇게 하다니 아니 두 부부 살때는 방한칸이면 되지만 애를 낳았어요 애가 커 그러면
방하나 더 얻어야 되잖아요 또 낳는데 이번에는 딸이야 그런데 애들이 커 사춘기가 되요 그러면 빚을 얻어서라도 방을 하나 더 얻어서 남자에 여자에 다른방을 줘야 하잖아요 아니 도대체 배길수가 없이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강남에서는 비싸서 도저히 못하겠고 할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여기 평촌이라고 하는 시골 촌짜 아니요 난 친구들 만나면 시골목회자라고 해요 그래서 오게 되었는데 9년전에 오니까 여기 전부다 허허벌판이예요 비젼이 있는데 왜 쓰레기더미처럼 생며먹은 공장지대에다 교회를 세웁니까. 비젼은 무슨 비젼이예요 사람이 늘어나니까 할수 없이 한거지 그런데 그이야기에 목사님들은 은혜를 별로 못받았는데 사모님들이 은혜를 받았어요 뭐가 제일 은혜받았냐고 하니까딱 한마디 비젼은 무슨놈의 얼어죽을 비젼이냐고 거기서 코박고 충성하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놈의 비젼이야 큰 교회 목사는 마지막에 죽을 때 금고안에 들어간답니까 금고안에 들어가면 뭐해요 그 금 가져간답니까 아무것도 아니예요 벌거벗은 영혼으로 주님앞에 가는 것인데 그렇게 살다가 죽는거지 무슨놈의 비젼입니까. 크게 많이 휘황찬란하게 높게 이것은 전부다 바벨론의 가치예요.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것이 좋으셨으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택하셨겠어요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나오는 나라를 아니 로마를 택하시면 되잖아 로마 아니면 중국황제가 있는 나라를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이집트를 선택 하시던지 하면 세계역사에 높고 넓고 강하고 휘황찬란한 나라아니예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그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나오는 그 코딱지 만한 나라를 선택하셨겠어요
고등학교 다닐때 제가 섬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섬에서 인천에서 한 두시간 배타고 떨어진 곳인데 풍랑이 꽤 있는데 배가 떠요 항만청에서 주의보만 발령안하면 배는 무조건 뜹니다. 굉장히 파도가 높은데 배가 왔어요 그래서 탓어요 와 어마어마한 파도인 거예요 사람들이 전부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 밑창에 누워 있는데 여기저기서 토하고 난리예요 중간쯤에 왔는데 폭풍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돌아가라는 거예요 좀 일찍 발령하지 내 생각에는 그냥 뚫고 중간까지 왔으니까 어차피 마찬가지니까 인천으로 갔으면 좋겠구만 배를 돌리는 거예요 돌리고 돌아오는길에 결국은 두 시간에 갈수있는 거리인데 갔다 왔다가 다섯시간이 더 걸린거예요 다섯시간 까지는 아니고 네시간 정도 걸렸어요 그랬더니 그 섬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인거예요 그 시간에 전기불도 안들어오는데 캄캄한 어둠이예요 그런데 놀랍게 그 폭풍우치는 험한속에서도 등대하나가 반짝거려요 반작 반짝 그러니까 그 등대불빛 하나를 보고 수많은 배들이 항구로 피하는 거예요 조명탄을 수천개를 쏴올려서 온 항구를 대낮처럼 만들어야만 배가 피난을 하는게 아니더라고요 제자리에서 불빛하나가 비치니까 그것을 보면서 수많은 배들이 난파되지 않고 항구로 안전하게 피 하는 겁니다. 교회의 영향력의 크기는 교회의 물량적 크기가 아닙니다. 교회 같지 않는 교회에 수 만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고는 기독교 욕 먹이고 하나님 영광 가리는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런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오히려 영향을 끼칩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예배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입니다.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중심적인 시간이 예배의 시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목사는 두 시간 예배를 드리려고 일주일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두 시간 예배 드린 그 정신으로 일주일을 살기위해서 예배의 정신에 따라 일주일을 살기위해서 두 시간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적어도 이 예배에 대해서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보십시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요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요 예배를 수없이 드려도 회개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시는 겁니다. 내 목회를 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시해야 됩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목회자인 나를 너무 기뻐 하신다 그리고 나를 이는 내 사랑하는 내 기뻐하는 자라 인정을 해주신다고 칩시다 그래서 목회에 복을 주신다고 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목회의 복이 어디에 나타나겠습니까 교인이 좋은 차를 하나 사주었대드라 양복을 해 주었대드라 여행을 가라고 봉투를 주었대드라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두 가지인데 일반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 이예요. 일반 섭리의 복은 교회땅을 사놨더니 가격이 올랐다더라 교인들이 요새 새로 등록하는데 장차관이 온다더라, 우리애들이 좋은 대학에 갔데더라 시집장가를 좋은 혼처를 만나서 갔데더라 그것보다도 더 뛰어난 복은 영적인 복이예요 어떤 복이냐면 개망나니같이 돌아다니던 집사가 오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더라 아무아무개 인간이 그렇게 못되게 굴고 가정에서 폭력만 행사하더니 회심해서 예수님 앞에 자기가 죄인 인줄을 깨닫고 가정으로 돌아 갔더대라 이런것 들이 영적인 복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의 꽃은 회심이예요. 회심 한사람이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전심으로 믿게 되는 영혼의 변화, 거듭남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 이예요. 우리 옛 말에 코 뚤치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경험한 적이 있거든요 시골에 잠깐 공부하러 내려갔는데 그 집주인이 집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빨리코를 뚫어야 하는데 너무 농사일이 바빠서 코뚫러 못간 거예요 이놈이 굉장히 커진 거예요 코뚤러 가는 날인데 목에다 개줄처럼 매고 가는데 이놈이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집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둘이 매달려서 그놈을 잡아 댕겨가지고 길로 걸어가게 하는데 이놈이 힘이 세니까 산으로 올라가니까 이 두 부자가 딸려서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믿음없는 교인을 목회하는게 이렇게 힘든겁니다. 그러니까 하다가 안되겟으니까 교인이 산으로 가면 목회자가 그 줄잡고 따라 가는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개패듯 한번 패고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데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까 그래 니가 산으로 간다니까 산으로 가자 근대 우리는 그것을 목회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게 목회 목양이라고 하는것은 사람 뜻대로 짐승을 치는 것이지 짐승 뜻대로 사람이 끌려다는 것을 우리는 목회라고 얘기 안 해요. 그러니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교인들은 코뚫은 송아지예요 소가 사람보다야 힘 이세지요 몸무게가 500키로가 넘는데 그런데 안되 그리고 툭툭 한번 흔들면 그 큰 소가 순순히 주인을 따라옵니다. 주인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코가 아파서 따라오는 겁니다. 코가 아파서 말의 경우에는 재갈을 물렸기 때문에 입이 찢어지는것 같아서 브레이크를 잡는 겁니다. 주인을 존경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들이 생겨나면 올바로 살지 않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힘차게 선포해요 그러면 아 하고 회개를 합니다. 내가 정말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살아라 그리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역자들하고 늘 하는 얘기 있습니다. 쓸데없이 교인들하고 밥 먹으로 다니지 마라 교인들은 너무 가까이 하면 안 좋아요 너무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 하면 안 좋아요. 적당한 거리를 두며 언제나 사랑하는데 사랑을 다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 사랑처럼 가슴에 묻어두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처럼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무슨 목회를 하겠어요 지금 은퇴하신 곽선희 목사님 당신은 평생 동안 교인들하고 목욕탕에 간적이 없데요 그래서 왜 그러셨습니까 하니까 볼 거 다보고 무슨 목회를 합니까 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목회자를 만나서 하나님이 그 두사람들을 꼭 붙들고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셔서 한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너무 사랑할 때 그리고 주님이 너무나 좋을 때 그때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데 한시간밖에 시간이 안남았다 우리의 인생에서 뭘 하겠어요
(찬양)
주 앞에 나와 경배 드립니다. 주 계신곳에 기쁨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것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옵니다 그때에 목회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우리들이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떼니까 목양이 가능 한겁니다. 목사라는 곳은 없어요 사자를 친다 그런말은 없어요 맹수기 때문에 그것은 칠 수가 없어요 오늘 밥 주다가도 그놈의 자식한테 물려죽을수도 있는 겁니다. 그럼 내가 묻는것은 우리교인들은 정말 양떼입니까 양이 됬습니까 맹수도 많아요 그런 맹수들을 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주고 목회자가 늘 만나서 동생처럼 타이르고 그런다고 해서 맹수가 양이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깊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전 일인데 저는 그이야기를 듣고 참 부끄러웠습니다. 어느 헌신예배에 가서 설교를 하고 저녁을 먹게 되엇습니다. 그때 앞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던 집사님이 계셨어요. 옆에 있는 사람이 소개 시켜주는데 모 대학교에 사회학과 교수님 이래요 그래서 대화를 하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교회를 개척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처럼 이렇게 개척한다는 개념이 아니었거든요 교회 개척한다고 하면 진짜 아무것도 없이 개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냐면 자 교회를 개척할 소명을 주셨다 그런데 어디 돈이 있어요 그러니까 시유지에다가 군용텐트 하나를 펼칩니다. 그것도 미군부대에다가 잘 이야기 하면 하나 얻을수도 있어요. 그리고 밑에 가마니를 깔아요 그리고 목회자 한사람이 거기서 눈물로 기도를 해요 그리고는 기도하고 나와서 그땐 전도지도 변변한거 없잖아요 돌아다니면서 낡은 성경책을 들고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동네사람 한둘이 예수를 믿을 마음을 가지고 교회당에 모여요 와 보면 군용텐트 하나에 호롱불하나 달리고 그담에 가마니 깔고 설교단은 사과상자 두 개 엎어놓은 거예요 지금도 눈에 선명해요 초등학교때에 그리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나가서 전도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유지에 그걸 해놧는데 가만히 둘리가 있나요 시에서 와서 철거를 하죠 철거 당할것도 없어요 그냥 천막 확 잡아댕겨놓고 가는 거예요 그럼 간 그다음날 다시 세우면 되요 하다 하다가 구청이 집니다. 그래서 그럼 차라리 불하를 받아라 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때부터 교인들이 눈물로 기도를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헐값으로 불하를 받는겁니다. 그리고 개울에서 모래를 퍼다가 밤이면 벽돌을 찍어서 그렇게 교회를 지었어요. 그것이 개척 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에는 텐트만 쳐놓고 호롱불 하 나 걸어놔도 교인들이 모였었는데 요즘은 2층을 얻어서 인테리어까지 해놓고 피아노 까지 들여놓아도 2층이라고 안 오는 시대입니다. 다른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교수님은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목사님 지금도 그때처럼 천막 속에서 뜨겁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 우리는 갑니다. 거기 갑니다. 참 집에 오면서 똑같은 현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시각과 평신도의 시각이 이렇게 다르구나 그리고 쟁쟁하게 ‘목사님 지금도 천막 속에서 그때처럼 뜨겁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거기 갑니다.’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바둑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보에 보면 바둑을 둔 순서대로 번호를 적어 놓은것을 기보라고 하잖아요.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기보에 의하면 토혈국 이라는게 있어요 흑백을 두고 바둑을 두다가 도저히 이길수가 없게 되니까 바둑을 두던 한 사람이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바둑판위에 엎드려져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린 거예요 아니 오락을 하다가도 지면 분해서 피를 토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의 목회가 오락만도 못하겠습니까 우리의 목회에는 하나님 왜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죄인은 왜 없습니까 그리고 피를 토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땀을 흘리는 생애였습니다. 쉴 시간도 없이 온몸에 땀을 흘리며 병든자를 고치고 눈먼자를 뜨게하고 주린자를 먹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 갈릴리로 유다로 사마리아로 다니시며 땀을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웃으셨다는 말은 없지만 우셨다는 말씀이 세 번이 나오고 마지막한번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해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습니다. 저는 17년동안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살아오는 가운데 한 가지 터득한 평범한 사실이 있어요. 교회에서 목회자가 쏟는 이 액체는 하나님이 그 교회에 부어주시는 축복의 구름입니다. 교인중에 진짜 나쁜 인간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주먹지고 싸워서는 안 없어져요 그런데 목회자가 강대에 엎드려서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리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려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서 자신의 마음에 눈물을 쏟아놓습니다. 그럼 그 눈물이 교회바닥에 스며들어 그래서 쓴 뿌리들을 이상하게 죽여요 그리고 주님께 심겨진 그 씨앗들이 싹이 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기죽음 이예요 자신이 죽는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사망은 우리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가운데 역사 하느니라 우리가 날마다 예수 죽인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했던 것입니다.
교회마당에 제가 앉았던 자리가 제가 늘 앉아서 성경읽기 좋아하는 자리인데 어느 가을아침에 예고도 없이 어는 후배 목사님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 ~ 왜요? 목회를 잘하는 비결이 뭡니까 그래서 내가 ‘자기죽음’ 네? ‘죽음’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우리 목사님들이 목사님 되게 부러워합니다. 그대는 외국에서 유학까지 하고 왔는데 왜 나를 부러워하니? 아니 부러워할 만한 이유가 많지 않습니까 왜 그 나이에 다른사람들은 남이 세워놓은 교회에 가서 죽도록 장로들에게 고생을 하는데 목사님은 목사님이 교회를 해서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웃으면서 또 뭐가 부럽냐 하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해도 안 되는데 어쨌든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얘기를 해봐라 했더니 남들은 열심히 목회를 하다가 내용이 있느니 없느니 그러는데 목사님은 그래도 계속공부를 해서 내용이 있는 목회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목회만 하는데 목사님은 여기저기 외국에서도 불려 다니니까 해외여행도 하고 좋죠 또 그런데 목사님은 책도 써서 많이 팔리니까 돈도 벌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부럽냐 ’‘네 ’그래서 내가 말하는데 그대가 내 자리에 오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가게 도와달라고 기도할거다 당신도 교회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죽여달라고 기도해본적이 있냐 없데 나는 6개월을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제가 충분히 살았습니다. 오늘 저녁에 눈을 감을테니 내일아침에는 당신의 품에서 눈을 떳으면 좋겠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
제가 맨날 어려운일이 있을때마다 부르는 찬송이 있었어요
(찬양)
잠시 머물 이세상은 헛된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또 오해 하시겠죠 야 교회는 멀끔해 보여도 교인들이 정말 못된교인이 이교회에 다 모였나보다 안그래요 우리 교인들 참 대단합니다. 일체 그렇지 않습니다. 험악하게 교회 대적한 교인 없구요 아직 교회에 악을 행해서 끔찍하게 치리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질서롭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날마다 죽습니다. 예배가 끝나도 아무 감각 없이 자리에 앉아있는 교인들 회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내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에 나왔으나 마음은 세상에 있는 교인들 눈물로 설교를 해도 감동을 받지 않고 웃으며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지않고 준엄하게 책망을 해도 찔리지 않고 타일러도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 교인들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깊이 깨뜨려져야 합니다. 설교는 주석 집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깨뜨려진 바위같은 마음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예요 그래서 설교자 자신이 성경을 읽으며 경건서적을 읽으며 신학서적을 읽으며 자기가 깨뜨려져야 해요 그러면 거기에서 진한 진액이 나오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설교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을 하겠어요 말씀의 쌀가루를 기도의 눈물로 반죽을 해서 성령의 오븐에 구워서 그래서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 떡을 떼어서 성도들의 자식 같은 성도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목회사역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절대로 이 목회사역을 세상 영광중 일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철저히 진리와 함께 싸워서 오직 영혼을 변화시켜 하나님께 인도하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축복을 달라고 교회 건축하게 해달라고 일주일을 금식 기도해 본적은 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왜 설교의 은혜를 안 주십니까 하고 금식기도 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열어주십니다. 저희 은사 가운데 이수만 목사님이라고 계셨는데 이분이 교회를 하면서 신학교를 강의를 하셨는데 너무너무 바쁘신 거예요 설교준비를 하면 톡 써먹고 톡 써먹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열흘동안을 하나님이 설교에 은혜를 달라고 금식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금식기도가 끝났을때 하나님이 성경을 열어주셨답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하나님의 말슴을 증거하는 큰 능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사람들이요 영혼을 올바른길로 인도하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